이재만(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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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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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26대 대구광역시 동구청장
이재만
李在晩 | Lee Jae-man


파일:leejaeman.png

출생
1959년 5월 10일 (64세)
경상북도 경산군 와촌면
본관
경주 이씨
별명
재브라도
재임기간
제25-26대 대구광역시 동구청장
2006년 7월 1일 ~ 2014년 6월 30일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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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신암초등학교 (졸업)
경상중학교 (졸업)
달성고등학교 (졸업)
대구대학교 (무역학 / 학사)
영남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 석사[1])
한양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 박사[2])
종교
개신교
소속 정당

약력
대구광역시 동구청장
자유한국당 최고위원
자유한국당 대구 동구 을 당협위원장


1. 개요
2. 특징 및 성향
3. 생애
4. 구청장 재임 시절
4.1. 과학고 유치
4.2. 아양교 보도 철거
5. 구청장 퇴임 이후
6. 논란
7. 어록
8. 선거 이력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사업가 출신 정치인이다.

과거 자유한국당에서 최고위원, 대구 동구 을 당협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소속으로 제25대, 제26대 대구 동구청장을 역임했다.


2. 특징 및 성향[편집]


재브라도, 연금술사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재만의 기본적인 정치성향은 소신파다. 그의 과거 인터뷰만 보아도 알수있듯 정치기조가 신념에 기반하여서인지 소신발언을 주로 하기도 하였는데 그 중 예시를 들자면 같은 지역구의 정치인이라 할지라도 포퓰리즘성 공약을 펼치거나 더 큰 권력에 기생하는 정치인들을 향해 쓴소리를 하는 상남자 기질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정계에 활동하는 인물들이 종종 특정세력을 규합하는 반면에 그는 소신파의 대표격 인물로서 자신의 신념을 기반으로한 정치생활을 하였다. 아무래도 인기에 휘둘리는 정치인들에 대해 반감을 가감없이 표하는 성향으로 인해 언뜻 험악해 보일 순 있으나 그의 인터뷰나 말투를 보면 예상외로 느긋한 말투에 부드러운 말씨라 놀랄 수 있는데 부드러운 말투에 소신발언을 하는 특징도 그의 특색이라고 하면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직장인들의 워너비 스킬)

시의적절 한 소신발언과 타 정치인을 향한 쓴소리로 인해 무뚝뚝한 사람 처럼 보이긴 하여도 대구 동구청장 시절의 투표율, 지지율만 보아도 알수 있듯이 지역사람들 뿐만 아니라 타 지역 사람들에게도 매우 선한 성향이다보니 (귀염상인 얼굴은 덤) 견종 중 하나인 래브라도 리트리버와 이재만의 합성어인 재브라도라고도 불리기도 한다.개처럼 일만 하는 것도 닮았다(?)

여담으로 박근혜 시절 문고리 3인방 중 한명이였던 이재만(1966)과는 동명이인이다. 출신지부터 지역구, 나이등 특정 강아지를 연상케하는 외모까지 아예 다른 인물이지만 흔치 않은 이름으로 인해 종종 그 사람이 그 사람 아닌가하며 오해를 받곤 하는데 아예 다른 인물이다.

3. 생애[편집]


1959년 5월 10일 前경상북도 경산군 와촌면에서 사업가인 아버지와 한학자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3남 4녀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이후 경상북도 대구시로 이주하여 신암초등학교와 경상중학교, 달성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대구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했다.
1996년에는 영남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마케팅 전공으로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2012년에는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의 선친은 뽕나무를 키우는 상묘 사업가였기에 고등학교 2학년까지만 해도 부족함 없이 자랐다고 한다. (언뜻보면 동네 사업가로 보일 수 있지만 중앙상묘회장을 역임하며 한일 정상회담에서 한국대표로 참석 한 것을 보면 규모가 장난없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시절 그의 선친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며 집안 상황은 과거와 달리 생활고를 겪게된다. 요즘에도 종종 사업을 하는 사람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면 그렇듯 없던 빚이 생기고, 없던 채권자가 생겨 유가족들이 고생하는 것 처럼, 그의 유복했던 유년시절은 한 순간에 뒤 바뀌고 말았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고등학교를 졸업 한 후에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는데 그 주체는 바로 대학이였다. (후술할 교육에 대한 철칙과 신념이 확고하게 된 계기가 이때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그의 선친을 따라 사업을 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한순간에 경제적으로 상황이 뒤바뀐 탓에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장고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대학진학이였다. 아무리 자신이 원하는 길이였다지만 경제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폭삭 망해버린 집안에서 대학을 가기 위한 방법은 오로지 스스로 학비를 버는 것 뿐이였다. 잡부와 포장마차 알바부터 해서 낮일 밤일등 온갖 돈이 되는 알바란 알바는 다 해치우며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어냈다. (흔한 성공신화의 신파가 가난 → 유복 인 반면 유복 → 가난 → 유복이라는 독특한 인생사다.)

그 후 어렵사리 대학교를 재학하던 와중 대한민국의 남성이라면 피할 수 없는 국방부의 부름을 받고 군복무를 이행하게 되는데...이 시기에 그의
어머니는 경제적으로 주저앉아버린 집안을 이끌기 위해 비밀리에 텃밭에서 채소를 키우고, 새벽에는 리어카에 채소를 쌓아놓고 칠성시장에 가져다 팔며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후에 이 사실을 알게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었다고 한다)


4. 구청장 재임 시절[편집]


2006년 5월31일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동구청장에 초선으로 당선되었다. 아무래도 지금에서야 정치경력이 20년 가까이 되어가는 노련한 베테랑이지만 당시로서는 정치와는 큰 연이 없는 사업가였을 뿐더러 입당한지 1년도 채되지 않은 정치신인이였기에 주변의 시선은 응원보다 흔들기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당시 대구에서 정치신인이 공천을 받는다? 어림도 없는 일)

하지만 그의 사업가 시절부터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배짱강단만큼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불도저였기에 주변의 시선을 신경쓰기보단 정면돌파였다. 그러한 그가 그저 배짱만 있는 것은 아닌게 구청장후보 시절부터 그의 목표는 명확했다. "대구동구의 가치를 높인다"라는 구체적인 사안은 당시 기준으로 30년전에 비해 타지역의 땅은 25배가량 올랐는데 동구는 10배가량밖에 오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착안한 대구동구의 가치를 높인다는 공약이였다.

과거의 동구에서 착안하여 공약으로 이행하는 면, 이러한 면만 보아도 그저 배짱만 있는 것이 아닌 지능캐의 면모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2023년 현시점에서 보면 지방 청년들이 서울로 계속 이주한다는 점과 지방의 젊은 청년들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회문제가 몇년새에 심화적으로 대두되고 있는데, 17년전에 진작 이에 대한 대응책을 내놓았던 것이다.

지금에서야 동구에는 복지시설이 꽤 있지만, 당시엔 지금과 달리 복지시설 한 곳을 가기위해서 꽤나 걸어야했다. 대구토박이였던 그 조차 이러한 부분에서 '동네에 뭐가 이렇게 없냐'였다. 학부모입장에서는 도서관이 없고, 노인입장에서는 노인복지관이 없고, 학생과 청년들 입장에서는
구민운동장이 멀찍이 있고, 그 외에도 문화적인 메리트가 없으니 동구에 사는 여유있는 사람들도 타도시로 떠나기 일쑤였다.

아무래도 사업에서 성공을 해본 사람이라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를 파악하는 것에 도가 터있는 그였기에 동구의 가치를 올리기 위한 그의 해답은 이러했다. "동구의 교육여건 개선과 사람들이 눌러앉아 살기에 좋은 환경." 그러니까 더 쉽게 얘기하면 주거지역에서 5분 이내에 도달 할 수 있는 문화시설들을 만드는것이 지역의 가치를 올린다는 것이다.

당시 구청장 후보들과 비교해보아도 동구의 가치를 올리겠다는 명확한 플랜이 있는 후보임과 동시에 사업으로 이미 증명을 한 사람이다보니 정치신인이라는 약점 아닌 약점을 뒤덮고도 남았다. (일은 해본놈이 잘한다더니...)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주변의 우려섞인 시선을 무색하게 구청장 후보자리에 공천을 받아냈고, 경선에서는 80.4%의 압도적인 득표를 받으며 당선되었다.

그에 더불어 그는 후술할 구청장 재임시절 과학고 유치등의 교육과 문화에 관련된 사업에 관해 공을 들였는데 그가 명문고, 명문대 출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꽤나 고생을 한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구청장 재임시절 구청장 업무를 다 보고 퇴근을 한 뒤에는 바로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수업을 듣고 마친 뒤 다시 KTX를 타고 내려오며 박사학위까지 취득하는 갓생을 살기도 했다. (?)

4.1. 과학고 유치[편집]


파일:대구일과학고.jpg

이재만이 구청장 재임시절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동구의 과학고 유치다. 앞서 말했 듯 동구의 집값, 땅값등을 올리고 생활수준을 더욱 올리기 위해서는 교육시설등의 활성화가 필요한데 전국에 있는 모든 영재고와 과학고를 합쳐도 30개가 안되는 희소가치가 있는 특목고를 동구에 유치하는 성과를 보였다.(이왜진?)

당시 동구에는 특목고는 커녕 인구대비 인문계 고등학교도 매우 드물었던 터라 위장전입은 물론이고, 자녀의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타거주지로 이사하는 사례가 동구 내부에서는 빈번히 있는 일이였다.

물론 지금에서야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지만 과정에서는 분명 순탄치는 않았다. 당시 대구의 모 국회의원도 자신의 지역구에 과학고를 유치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우고 언론에서도 해당 지역구의 과학고 유치가 당연시 되는 상황이였기에 이재만 구청장에게는 불리한 입지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우려섞인 시선을 보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가는일이긴 하다. 일각에서는 이재만이 모 국회의원 사무실에 칼들고 찾아간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래야 아닐 수 없었다.

또 이 과정에서 이재만 구청장의 미친 사업 수완 능력이 돋보이게 되는데.. 당시 과학고 유치에 필요한 재정은 교과부의 지원은 일체 없이 오로지 교육청과 해당 지자체의 능력으로 설립하는 것으로 되어있었지만, 지역구의 재정력은 지역구민들의 소득수준과 관련이 있다보니, 당시 동구의 재정능력은 실상 과학고를 유치한다고 하여도 하이리스크인것이 정배였다. 근데 이러한 마당에 장학금제도도 지역구에서 지원한다고 해버린 상황이니 골치가 아픈 상황이였다. 그런데 여기서 과학고 부지를 절반이상으로 후려쳐버리는 기염을 토해버린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 10,000평가량의 부지를 확보하는데에는 추정치 200억가량의 예산이 필요한데 이를 60억 가량으로 후려쳐서 확보해버리는 미친 사업수완 능력을 보여준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혁신도시와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기 직전인 상황이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당시 과학고를 유치하겠다는 지자체장들 중에서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재만 구청장은 이를 적극 활용해버린다. 근데 그의 이러한 연금술은 여기서 끝이 아니게 되는데...


4.2. 아양교 보도 철거[편집]



파일:아양교 철거 전.jpg

2003년 8월경 동구청은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맞이해 대구로 들어오는 관문 중 하나인 아양교를 지역의 랜드마크로 만들겠다는 명분으로 총사업비 15억의 투자를 하여 아치형 오르막길을 설치했다.

일명 스카이브리지라고 하여 아양교 아치형 보도교를 만들었는데 이는 3m의 높이에, 폭은 4.5m 그리고 길이는 무려 150m의 대형 프로젝트였으나 이 아치형 보도교가 기괴하게 지어진 탓에 이를 지나가는 이용객들은 미끄럼틀을 타는 것마냥 미끄러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일반 사람들도 상당한 불편감을 느끼는 구조물인데 노인들과 노약자들은 거의 목숨을 담보로하고 지나가야 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다.

급기야는 장애인 단체들은 국가인권위원회진정서를 제출하는 사태에 이르기도 하였는데 결국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2004년 10월 동구청에게 사안에 대해 시정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문제는 이때부터인데 당시 동구청은 해당 공사에 6,500만원, 건설업체와는 3,800만원의 설계 계약을 하였다. 당시 동구청 나름에서 는 아양교를 개선하려하는 시도를 보였으나 말만 개선일뿐 보도를 확장하기 위해 차도를 축소시키는 희대의 병크를 터트릴 찰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공사에는 진전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2006년 이재만 구청장이 취임하고 난뒤 이재만은 대한민국 행정인 사상 역사에 남을 사건을 만들어내는데...

그는 당시 아양교의 보도를 철거 할지 개선 할 지에 대해 지역구민들에게 장애인, 노인단체와 지역구민들에게 일주일간 설문하였는데 이에 철거 82%와 개선 18%의 결과가 나와 담판을 짓기로 결심한다. 상식적으로 보나 법적으로 보나 정상적인 계약에 대해 무를 수 있는 방법은 상호 합의하에 계약을 무르는 방법 뿐이다. 근데 이미 이재만 구청장이 취임하기 전에 맺어진 계약이라 할지라도 동구청은 이를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또한 세상의 어느 기업가가 계약도 끝났겠다 이윤만 추구 할 일이 남았는데 이를 놓치겠는가? 그러한 상황에서 이재만 구청장은 건설업체 사장을 부른 뒤 몇시간의 담화 끝에 2005년에 지급되었던 3,800만원을 되려 받아내고, 아양교를 철거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본래 상식적으로도 보아도 철거조차 돈을 쓰는 마당에 오히려 환불을 해버리고, A/S까지 받아버린 상황이다. 기업을 상대로 돈을 뜯기기는 커녕 되려 돈을 뜯어버리는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였다.


5. 구청장 퇴임 이후[편집]


구청장 시절 평이 매우 좋았던 만큼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동구청장 3선 대신에 새누리당 대구광역시장 후보에 도전하였으나 권영진에 밀려 탈락하였다. 대구광역시장 경선에 탈락하면서 정치적 내상을 입기는 했지만 여전히 동구에서 이재만의 영향력은 엄청났기 때문에 차기 총선에 출마 해달라는 의견이 많았고 차기 총선에 출마 할 것 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였다. 그리고 예측대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승민이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있는 대구 동구 을 선거구에 공천을 신청했고 이후 새누리당은 선거구에 이재만 전 동구청장 단수 공천 할 예정 이었다.

한편 당시, 현역 의원이었던 유승민은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 친박 계열의 미움을 받아서 친박에서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터라 결국 공천을 받기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선거 한 달 전인 2016년 3월 23일에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당시 이재만은 친박,유승민은 비박으로 여겨지면서 친박 vs 비박의 싸움이 대구에서 벌어지나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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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천 취소 사실에 탄식하는 이재만 전 구청장

그러나 김무성의 새누리당 대표 직인 날인 거부 사태로 인해서 해당 선거구가 무공천 지역이 되면서 공천을 받지 못해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23일을 기해 예비후보들의 당적변경시한이 끝나서 무소속 출마도 불가능하다.[1]

결국 유승민의 당선은 무효라는 선거무효소송을 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앞으로 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면 지역구에 가서 무효소송을 내야 하는가 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이전에는 정당 내 공천 문제를 가지고 선거무효소송을 내는 것에 대해 법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고 하였으나, 적어도 대법원의 판례는 선거무효소송은 선거관리위원회의 책임 뿐 아니라 후보자 등 제3자에 의해 선거인들의 자유로운 투표를 저해하는 경우까지도 공직선거법이 규정한 선거무효사유로 보고 있다. 만약 선거무효사유에 해당하지 않았더라면 본안 판단도 받지 못했을 것이나 대법원은 소 제기의 이유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재만 판결 요지는 정당의 자율권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최소한에 그쳐야 하고, 새누리당 당헌 당규상 국회의원 후보자 등의 공천에 있어 최고위원회는 공천위원회의 공천안에 대해 확인, 확정 권한만을 규정하고 있을 뿐, 공천된 자를 공천하지 않을 때 공천위원회에 반송할 의무가 규정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에 미루어 당시 당헌 당규를 새누리당 최고위원회가 위반하였다거나, 재량권을 일탈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일견 정치적 문제를 사법적으로 해소하려하다가 불발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의의를 찾을 수 있는 사안이다.

또한 선거기간 중 유승민 의원의 보좌관을 고발하였다. 대구의 한 장애인단체가 후원요청을 하자 남 모 보좌관은 모 사업가를 통해 기부하면서 본인의 돈 5만원 가량을보태 라면 100상자를 기부하였는데, 이재만 측에서는 이것을 불법후원으로 검찰에 고발하였다.

그러나 기부 하는 쪽이나 기부 받는쪽 모두 누가 누구에게 기부하는지를 명확히 인식한 상태였고, 평소 이 사업가가 수많은 기부를 하였다는 점에서 재판부는 1심부터 3심까지 전부 무죄 판결을 내렸다. 심지어 당시 유승민 의원 측 변호사는 유승민 의원의 친형 유승정 변호사였다.

2017년 3월 새누리당의 후신 자유한국당에서 대구광역시 동구 을 당협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3일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7년 12월 31일에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대구광역시장 도전을 하기 위해 최고위원을 사퇴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경선에서 현직 시장인 권영진에 밀려 탈락하였다.


6. 논란[편집]


2018년 6월 4일, 대구광역시장 자유한국당 후보 경선 과정에서 불법 착신 전환 의혹을 받아 대구선관위가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고, 그의 가족과 측근 등 2명을 검찰에 고발하였으며 결국 2018년 10월 12일, 불법 여론조사에 관여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로 구속 수감됐다.#

2019년 2월 13일, 검찰이 구형했던 징역 4년보다 낮아진 징역 2년 6월이 선고되었다. 2019년 6월 13일, 항소심 재판부는 일부 혐의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면서 유죄 부분의 형량을 1년 3월로 감형했고 이에 대하여 쌍방이 상고하였으나, 2019년 10월 31일 대법원이 피고인의 상고이유는 받아들이지 않고 무죄 부분에 관한 검사의 상고이유만 받아들여 대구고등법원으로 다시 사건을 돌려보냄으로써 형량이 다시 늘어날 위기에 처했다. 2020년 1월 8일,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징역 1년 6월을 선고하였다.# # #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착신전환을 위해 유선전화를 개통하였는데 당시 경선 여론조사는 모바일 100%로 진행되어 범죄행위가 성립되진 못하였다.

2022년 12월 사면복권되었다.

7. 어록[편집]



주변의 평가를 무서워 할게 아니라 역사가 어떻게 평가 할지를 무서워해야하는 거 아닙니까?



공직에 있는 사람은 1년, 2년 뒤만 보고 일 할게 아니라 20년, 30년뒤까지 보아야한다.


8.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6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구 동구청장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102,181 (80.42%)
당선 (1위)
초선
2010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89,009 (74.09%)
재선

9.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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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승민이 탈당한 다음날 오후 2시 10분에 공천을 받았는데 김무성이 2시 30분에 이재만 공천 안한다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하루종일 전화를 못 받을 정신상태가 되어버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