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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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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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체육훈장 수훈자
파일:체육훈장.png
연도
1990년
이름
이종범
분야
스포츠
사유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체육훈장기린장(5등급)

성구회
회원 번호
기록
가입 연도
비고
4
2,083안타[1]
2010년
-

이종범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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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7.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8.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9.svg파일:KIA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10.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3
1996
1997
2009

파일:2023_Champion_LG.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2023


파일: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2002


파일: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코치)

2018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94 KBO 리그 타격왕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94 KBO 리그 최다 안타왕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2004 KBO 리그 득점왕[1]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94, 1996, 1997, 2003 KBO 리그 도루왕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94 KBO 리그 출루율왕

















보유 기록(KBO)
한 시즌 최다 도루
84개[2]
최다 연속 도루
29회[3]
한 경기 최다 도루
6개[4]
한 시즌 최다 고의사구
30개[5]


이종범의 주요 설문조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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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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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7번
김종모
(1982~1992)

이종범
(1993~1997)


장일현
(1999~2001.7.31.)
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8번
히코노 토시카츠
(1992~1997)

이종범
(1998~1999.7.24.)


모리노 마사히코
(1999.7.25.~2001)
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7번
모리노 마사히코
(1997~1999.7.24.)

이종범
(1999.7.25.~2001.5.30.)


다니시게 모토노부
(2002~2003)
KIA 타이거즈 등번호 7번
장일현
(1999~2001.7.31.)

이종범
(2001.8.1.~2012)


KBO 영구결번
한화 이글스 등번호 73번
정영기
(2010~2012)

이종범
(2013~2014)


아베
(2015)
LG 트윈스 등번호 77번
강상수
(2014.5.11.~2018)

이종범
(2019)


윤진호
(2020)
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79번


이종범
(2020)



LG 트윈스 등번호 77번
윤진호
(2020)

이종범
(2021~2023)


결번


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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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No.7
이종범
李鍾範 | Lee Jong-beom

출생
1970년 8월 15일 (53세)
광주광역시 북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광주서림초 - 광주충장중 - 광주제일고 - 건국대 (경영학 / 학사)[1]
신체
신장 178cm[2]체중 73kg|혈액형 O형 | 왼손잡이[3]
포지션
우익수[4](2002~2003[5], 2007~2011)[6]
유격수[7](1993~1997, 1998[8])[9]
중견수[10](2003~2006)[11]
좌익수[12](1999~2000)[13][14]
3루수[15](2001)[16]
-
1루수[17][18]
2루수[19][20]
포수[21][22][23]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3년 1차 지명 (해태)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93~1997)
주니치 드래곤즈 (1998~2001)[24]
KIA 타이거즈 (2001~2012)[25]
지도자
한화 이글스 1군 주루코치 (2013~2014)
LG 트윈스 2군 총괄코치 (2019)
주니치 드래곤즈 2군 연수코치 (2020)
LG 트윈스 1군 작전코치 (2021)[26]
LG 트윈스 2군 타격코치 (2021)[27]
LG 트윈스 2군 감독 (2022)
LG 트윈스 1군 주루코치 (2023)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주루코치 (2017~2018)
해설위원
MBC SPORTS+ 야구 해설위원 (2015~2018)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특별해설위원 (MBC)
경력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회장 (2005~2007)
KBO 상벌위원 (2017)
한국프로야구은퇴선수협회 부회장 (2017~)
상훈
체육훈장 기린장
병역
제31보병사단 방위병 (1995~1996)[28]
소속사
리코스포츠에이전시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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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배우자
정연희(1971년생, 1997년 결혼~현재)[1][2]
자녀
아들 이정후(1998년생)
딸 이가현(1999년 12월 21일생)[3]
사위
고우석[4]
외손자
(2023년 11월 22일생)[5]
사돈
고민규, 송혜원[6]
부모
아버지 이계화[7](1928년생)
어머니 김귀남(1929년생)
형제자매
7남매 중 막내
반려동물
반려견 까오,루아
조카
생질[8] 윤형준(1994년생)[9]
본관
함평 이씨 (咸平 李氏)[10]
종교
가톨릭[11]
등장곡
YG FAMILY - 멋쟁이 신사[12]
응원가
안토닌 드보르자크 - '교향곡 9번 제4악장'#[가사] [13][14]
펩시맨 CM송[15]
응원단 자작곡[16]




1. 개요[편집]


투수선동열이 제일 잘하고 타자이승엽이 제일 잘하고 야구는 이종범이 제일 잘한다.

이종범은 10승 투수 2명과도 바꾸지 않는다.

김응용, 前 해태 타이거즈 감독[29]


대한민국야구인. 현역 시절 포지션은 유틸리티 플레이어.

해태-KIA 타이거즈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성구회의 제4호 회원이다. 해태 왕조 말년인 1993, 1996, 1997년 3차례 우승, KIA의 구단 인수 후 첫 우승인 2009년을 포함해 총 4차례 우승을 이끌었다. 대표적인 수상 기록으로는 통산 정규 시즌 MVP 1회, 한국시리즈 MVP 2회, 골든글러브 6회, 미스터 올스타 1회. 또한 2002 부산 아시안 게임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으로 참가해 각각 금메달과 4강 진출에 기여하기도 했다.


2. 선수 경력[편집]






3. 플레이 스타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종범/플레이 스타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평가[편집]






▲ 야구천재 / 바람의 아들

1990년대에 혜성처럼 등장해 “바람의 아들, 야구 천재”라는 별명까지 얻은 선수로[30] 엄청난 주루 능력과 유격수라는 포지션[31], 최전성기로 평가받는 5년 간은 해당 기간 동안 통산 홈런 2위라는 뛰어난 펀치력과, 통산 타율이 가장 높은 0.332를 기록할 정도로 정교한 컨택 능력, 통산 도루가 무려 310개나 되는 우수한 주루능력을 뽐냈다.

주요 시즌의 기록을 살펴보면 타율 0.393, 196안타, 84도루, 113득점, 출루율 0.452, OPS 1.033 (모두 1위)를 기록한 1994년은 이종범 야구인생의 정점이자, KBO 리그 역사에 남을 시즌이었다.[32] 또한 1997년에는 타율 0.324, 30홈런(2위), 64도루(1위), OPS 1.009(4위)로 30-30 클럽에 가입하고 KBO 역대 최초로 트리플 쓰리[33]를 달성했다. 특히 1994년의 타율은 프로 원년인 1982년 백인천의 0.412 다음으로 최고 타율이며, 안타는 2014년 서건창이 201안타로 경신할 때까지 최고 기록이었다.[34]

비록 일본에서의 부상과 부진, 국내 복귀 이후 급격한 노쇠화에 의해 2004년부터 점점 하락세가 시작되어 말년의 기록은 전성기 때 지표를 상당히 많이 까먹었고 전성기 때 칭송받았던 이름값에 비해 통산기록은 많이 아쉬운 수준에서 그쳤지만[35] 전성기 시절 리그 역사상 손꼽히는 활약과 더불어 타이거즈를 네 차례 정상으로 이끈 핵심 선수라는 점까지 겹쳐 타이거즈 팬들의 지지가 매우 높은 선수이다. 특히 한국시리즈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과 같은 큰 경기[36]에 매우 강한 모습를 드러내며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로의 면모를 보여줬다.


5. 은퇴 이후[편집]



5.1. 해설 위원[편집]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중국과의 야구 준결승전 당시 KBS에서 특별 해설위원으로 초빙되어 처음으로 해설을 맡았다. 대체적으로 야구를 읽는 눈이 아직 녹슬지는 않았고, 의외로 방방 뛰지 않고 차분하게 해설을 했다는 평. 다만 아직 남아있는 사투리와 너무 긴장해서인지 차분하다 못해 가라앉아 있어서 본격적인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려면 좀 더 다듬어져야 한다는 평을 받았다.[37]


파일:20160801115455_mifqprzz_99_20160802085902.jpg

2015년~2018년 MBC SPORTS+ 야구 해설위원

한화 이글스 주루코치 사퇴 이후 KIA 타이거즈 측으로부터 감독직 및 코치직[38]을 제안받았으나 좀 더 야구를 공부하기 위해 야구해설자로 진로를 결정했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MBC SPORTS+와 해설위원 계약을 맺으면서 2015년부터는 MBC 중계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993년 등장했던 양신과 종범신이 이젠 해설위원으로 한솥밥을 먹게 된 것. 그리고 2015년 6월 12일 드디어 양준혁과 같이 해설했다! 시청한 사람들의 소감은 하나같이 ‘하라는 해설은 안하고한명재 캐스터랑 3명 모두 만담만 했지만, 경기 자체가 원사이드하게 흐른 데다가 양 팀팬들 간 서로 추억도 다시 되살려보고 대체적으로 만족했다고 한다.

엠스플 해설자 위촉 기념으로 촬영된 ‘종범神, 엠스플을 만나다’에 따르면 선수 시절 말기 때부터 야구를 보는 눈이 있고 입담이 화려한 이종범의 영입을 위해 엠스플이 굉장히 공을 들였다고 밝혔다. 사석에서 형동생하는 사이인 한명재 캐스터도 끈질기게 붙으면서 엠스플로 오라고 했다는 설. 은퇴 이후에는 가족과의 시간을 가지면서 은퇴 이후의 행보를 설계하느라, 2013~2014년에는 은사 김응용의 러브콜로 성사시키지 못했다가, 2014 시즌이 끝나고 그 때의 정을 생각하여 해설자 직을 수락했다고 한다. 2015 시즌 전 투입된 프로그램에서는 이종범 위원의 예능감이 유난히 드러났다.

그러나 해설자로서의 평은 좋다고 보긴 어렵다. 억지로 표준말을 하려고 하니 발음이 새는 경우가 많고, 발음이 새는데 상황 설명도 자세히 말하려다 말이 꼬이고 자기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거의 매 경기 연출되기 때문. 그리고 유독 눈빛 좋은 선수를 아끼는 모습을 보여서 타이거즈 갤러리에서는 눈빛충이라고 불린다.

2016년 4월 17일에 벌어진 메이저리그에서 '메이저리그 포수보다 한국리그의 포수 리드가 더 좋다'라는 경솔한 말과 김현수와 주전 자리를 두고 경쟁중인 조이 리카드를 무작정 까고 감정적인 해설을 하는 소위 국뽕= 해설을 하여 많은 사람에게 비판을 받았다.

친정사랑이 각별하다. 어느 정도냐면, 중계 도중에 순간적으로 “우리 기아 타이거... 죄송합니다. 기아 타이거즈”라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파일:엠스플_이종범&이정후.jpg

2017년 3월 17일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 파크에서 열린 한화-넥센 경기를 중계를 앞둔 이종범[39]

2017 시즌부터는 이정후가 키움에 입단하게 됨에 따라 이정후의 경기를 중계 할 가능성이 생겼다.

2017년 5월 5일 넥센-SK 경기에서 한명재, 허구연과 해설을 했는데 이정후의 수비에 대해 냉정한 지적을 했다. 또한 이정후가 1타점 3루타를 쳐내자 "흐흐흐"하며 웃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MBC SPORTS+에서 이정후가 팀의 큰 견해를 해주었다는 칭찬을 하자, 때론 아버지로써 선배로써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7년 5월 19일 SK-NC 경기에서는 이정후와 상관 없는 경기의 해설임에도 불구하고 넥센을 거론하며 "저희 넥센같은 경우에는-" 이라는 발언을 하였다.[40]

주로 양신과 많이 엮어주는데 지식을 전달하는 능력이 2% 부족하다는 점 양쪽 지역 사투리를 강하게 구사한다는 점 등 공통점이 많다. 결국 해설실력이 넘사벽급인 같은 방송사 다른 해설진과의 차별화를 위해 두 신의 만담해설이 주 컨텐츠로 자리잡았다.

동료 해설위원이자 1년 선배인 차명석 LG 트윈스 단장의 부름을 받고 LG 트윈스 코치로 가게 됨에 따라 2018년 10월 31일 베이스볼 투나잇 출연을 끝으로 해설위원으로서의 생활은 일단 마치게 되었다.

이후 MBC의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특별 해설위원에 발탁하여 활동하게 됐다.


5.2.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종범/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미디어 활동[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종범/활동 내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사건·사고 및 구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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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종범/여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1. 아들 이정후 관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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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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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후야, 아빠는 지금 인천 원정경기를 끝내고 버스 안에 있단다. 광주에는 새벽에나 도착하겠구나. 아마도 자고 있겠지. 원정 떠나기 전에 “엄마 말 잘 듣고 동생하고 잘 지내” 하고 당부했었는데 잘 했으리라 믿어.

초등학교 3학년 때 네가 처음 야구 선수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빠가 많이 반대했지? 아빠는 네가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하면 할수록 어렵고 힘든 야구를 한다는 게 썩 내키지가 않았단다. 더군다나 야구인 2세로 네가 앞으로 가질 부담감이 걱정도 되었단다. 하지만 네가 좋아하는 거니까, 정말 좋아하는 거니까 막지 않았단다. 지금은 네가 경기에 나가서 상을 타거나 좋은 성적을 내면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곤 한단다. 너는 자랑스러운 내 아들이니까.

지난 3월에 스프링캠프 끝나고 같이 목욕탕에 갔었지? 그때 우리 정후 보고 많이 놀랐단다. 중학교 1학년인데도 키가 165㎝ 가까이 되고 몸도 이제 제법 커졌더구나. 아빠가 일본에서 활약할 때 관중석에 앉아 열심히 응원하던 꼬마 정후는 이제 어디에도 없더라. 체격만 봐서는 아빠보다 더 야구를 잘할 것 같아 흐뭇하기도 해.

한달 전에 네가 운동장에서 야구 하는 모습을 봤어. 제법 하던걸. 앞으로 기본기만 더 잘 익히면 되겠더라. 감독님 말씀 잘 듣기를 바랄게. 아빠가 나서서 아무 얘기도 안해주는 게 섭섭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감독님 말씀이 우선이니까. 기본기가 잘 갖춰지면 실전 기술이나 그런 거는 야구 선배로서 나중에 가르쳐줄게. 고등학교 때 쯤이나 될까. 그래도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라도 물어보렴.

아빠는 배고파서 야구를 했어. 초등학교 6학년 때 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때 화려해 보이는 선수들을 보면서 야구라면, 야구 선수라면 우리 가족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줄 거라는 간절함으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악착같이 야구를 했지. 최고의 선수가 되면 집안도 일으켜 세우고 부와 명예도 쥘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헝그리 정신이라고나 할까. 물론 너는 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래도 정후는 야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아빠 어릴 적보다 나은 것 같아. 지금까지 힘들어도 야구 관두겠다는 말은 한 적이 없으니까. 야구 하면서 재미있어하는 모습을 보니 아빠도 좋다.

야구 하면서 앞으로 시련도 있을 거고, 아빠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스트레스도 많이 받게 될 거야. 그래도 네가 선택한 길이니까 계속 지금같이 즐기면서 야구 하기를 바랄게.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도 잊지 말고. 분명 넌 아빠보다 더 잘 할거야. 승부근성은 타고난 것 같으니까.

내 아들 정후야, 사랑한다.

2011 시즌 가정의 달 中 이종범, 아들에게 띄우는 편지. 한겨레 (인터뷰)[41]



파일:이정후_넥센계약.jpg

KBO 리그 첫 부자 1차 지명

  • 아들 이정후는 2017년 신인드래프트에서 넥센 히어로즈 1차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단했다. 이종범과 함께 역대 최초로 1차 지명으로 프로에 입성한 부자선수가 됐다. 이정후는 데뷔 시즌부터 맹활약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켜 아버지의 유일한 한이었던 KBO 신인상[42]의 꿈을 이뤘고, 프로 데뷔 3년차만에 국가대표 탑타자로 크게 성장했다. ‘바람의 아들’ 이종범의 별명을 물려받아 ‘바람의 손자’로 불리우고 있다.

  • 아들이 야구를 시작한 초등학교 3학년 이후 좀처럼 아들이 야구하는 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스타의 아들이 아니라 야구선수 이정후로 인정 받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마음 같아선 직접 소매를 걷고 지도하고 싶었지만[43] 꾸욱 참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고, 가끔씩 학교로 데리러 가는 것이 전부였다고. 과거 인터뷰에 밝혀진 일화에 따르면 그러던 어느날 멀찍이서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종범은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정후가 형들하고 라면 먹고 있네. 몇 번 먹지도 못하면서 뭐 저리 좋다고 신나하고 있을까. 야구하는게 정말 좋은가봐.”라고 살짝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고. 20여년 전 자신의 옛날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관련 기사


파일:486730_110137_2518.jpg

2017년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 부자 국가대표

파일:야구금메달 부자.jpg

2018년 아시안 게임 야구 첫 부자 금메달

  • 2017년 11월 일본에서 열린 24세 이하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APBC)에서 최종 엔트리에 승선해 맹활약 이정후는 아버지 이종범 대표팀 코치와 함께 ‘한국 최초 부자(父子) 국가대표’가 됐다. 이후 2018년 8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발탁 되며 아버지 이종범과 국가대표에서 다시 호흡을 맞췄다.

  • 절친 양준혁라디오 스타에 출연해 “이종범 씨는 제가 닮고 싶은 부분이 정말 많다. 다른 것보다도 특히 2세에 교육에 대한 노하우를 꼭 전수받고 싶다”며 부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여담으로 서울 예원학교에 진학을 앞둔 딸의 음악공부 뒷바라지를 위해 현역 은퇴와 함께 서울로 이사갔고 이로인해 이정후 역시 광주 무등중학교에서 서울 휘문중학교에 전학을 갔다. 당시 이정후는 한창 예민할 시기인 중2때라 정든 교정과 친구들을 떠나 낯선 곳에서 다시 야구를 시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고 한다. 이를 아내로부터 전해 들은 이종범은 아들 이정후에 너무나도 미안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 이종범은 2017년 9월 2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vs삼성 라이온즈 경기의 해설을 맡았는데, 경기에 앞서 아들을 언급하며, “정후는 잡초처럼 자란 것도 아니고 좋은 환경에서 곱게 자랐다. 힘든 프로 생활을 잘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컸다. 야구를 하는 내내 아빠의 수식어가 따라다닐 텐데, 어린아이가 이를 감내할 수 있을지 몰라서 야구를 반대했다. 야구보다는 축구나 골프를 하면 좋겠다고 했다. 스피드스케이팅, 쇼트트랙에도 자질이 있었는데, 자기가 야구를 제일 좋아하더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프로 지명이 되고, 운 좋게 주전 기회를 잡아 좋은 성적까지 내주니 너무 감사하다.”라고 돌아봤다. 이후 아들 이정후가 KBO 신인상이 가까워지면서 “정후 덕분에 과거의 내 기록이 재조명 되고 신분상승했다며 여기저기서 인사도 많이 받고 괜히 혼자 실실 웃기도 한다”며 기쁜 마음을 한껏 드러내기도 했다. 여담으로 피는 못 속이고 운명은 악착같다고 아들 이정후는 고종사촌형인 윤형준이 야구를 시작하자, 3학년을 앞둔 2007년 2월에 이종범이 스프링캠프를 떠난 사이 어머니 정연희 씨와 몰래 야구부 테스트를 보러 갔다. 이를 알게 된 이종범은 “그럼, 왼손으로 쳐라.”라는 조건을 내밀었고, 오른손잡이 이정후는 우투좌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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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세계 최초 부자 타격왕

  • 아들 이정후가 2021시즌 타율 3할 6푼을 기록, 생애 첫 타격왕을 차지하게 되면서 세계 최초로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타격왕에 오르게 됐다. 아들이 프로 5년차만에 KBO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매김하면서 야구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부러움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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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40주년 기념 레전드 40인

  • 2022년 7월 16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KBO 40주년 기념 레전드 40인 중에서도 높은 투표율로 레전드 4인에 선정되어 이날 KBO 올스타전에 출전한 아들 이정후에게 축하받았다.[44] 재밌는 점은 이종범이 1994년 역대 최초 타격 5관왕을 달성해 낸 24세 나이와 같은 나이인 2022년 아들 이정후 역시 타격 5관왕을 달성해 내며 KBO 리그 사상 최초가 되는 부자 타격 5관왕 외에 정규시즌 MVP를 차지하며 한·미·일 최초 부자 MVP를 이뤄냈다.



사상 첫 부자 MVP


9. 응원가[편집]


KIA 팬들이 종범신을 부릅니다..

2011년 6월 2일 잠실 LG전, 한명재 MBC SPORTS+ 캐스터

드보르자크신세계로부터 4악장을 사용한 응원가로 유명하다.





이종범 응원가

다음은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뛰던 시절의 응원가. KBO 시절보다 흥겨운 느낌이 든다. 가사는 상단 프로필 참조.



NPB 시절 이종범 응원가


10. 관련 문서[편집]



[1] 고등학생 시기에 부친의 요구로 연세대학교고려대학교스카우트를 거부했다고 밝혔다. 연세대와 고려대의 야구부 전용 운동장이 작았고 건국대학교에서 3년간 광주일고 후배들을 입학시켜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2] 실제 신장은 아니다. 스톡킹에서 본인이 실제로는 175~176cm라고 밝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20살 때부터 168cm에 60kg대 초반의 왜소한 몸이었지만 그 작은 몸으로도 고려대와의 경기에서 에이스 박동희에게 연타석 홈런을 치면서 대학 1학년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뽑혔다고 한다. 결국 당년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하면서 일본 대표팀의 다크호스 노모 히데오에게 팀이 졌지만 한국인 중 유일하게 2안타를 친 선수가 되자 프로 야구계에서 주목 받았다.[3] 실제로 야구랑 필기 빼고는 다 왼손을 쓰는데도 우투우타가 된 이유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당시 자신이 존경하던 김재박을 보며 유격수가 되기 위해 오른손으로 야구를 시작했다는 설, 유격수가 되기 위해 좌투에서 우투로 바꿨다는 설, 왼손잡이 글러브가 없어 오른손으로 야구를 했다는 설 등이 있다. 이종범 본인이 이야기쇼 두드림아는형님에서 밝힌 바로는 본인이 야구를 시작했던 1979년 당시에는 왼손 글러브가 없고 오른손 글러브 밖에 없었기 때문에 오른손으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야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우투좌타로 프로에 입단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기록을 써낼 수 있었을 수도 있다라는 추측을 많은 팬들이 했지만 아는형님에서 밝히기로는 좌타로 치는 것보다는 우타가 더 잘맞아서 우타자가 됐다고 한다. 그러나 좌타자가 내야 안타 확률이 더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기에 안타가 더 많이 나올 수 있어서 아들 이정후에게 야구에 대해 크게 조언하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조언한 것이 우투좌타를 하게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아들은 오른손잡이.)[4] 커리어 통산 가장 많은 경기를 우익수로서 출전했다. (KBO 610경기)[5] 2003 시즌 주로 중견수로 나왔지만 우익수로도 못지 않게 출전했다.[6] 1998, 1999, 2000, 2004[7] 이종범이 야구 천재라는 별명을 얻었던 기간의 포지션. 리그 최상위권의 타격 생산력과 독보적인 주루, 가장 넓은 수비 범위와 강한 어깨, 뛰어난 야구 센스를 가지고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였고 4년 반 동안의 주 포지션이었지만 이 기간 동안 쌓은 WAR이 40이 넘으며 현재까지도 유격수 역대 1위를 지키고 있다. 또한 이 기간 중 94시즌은 126경기 체제였음에도 역대 모든 야수를 통틀어 WAR이 가장 높은데, 이는 역대 모든 경기 체제로 환산을 하더라도 마찬가지. 우익수 다음으로 가장 많이 출전한 포지션이다. (KBO 549경기)[8] 일본 진출 첫 해인 1998년에는 부상 당하기 전까지 56게임을 유격수로 출전했다.[9] 2004, 2005 (관련)[10] (KBO 441경기)[11] 1998, 1999, 2000, 2001, 2002, 2007, 2008, 2009, 2010[12] (KBO 14경기)[13] 주니치 시절 부상 이후 주로 좌익수로 출전하며 중견수, 우익수를 간간히 번갈아 가면서 출전했다.[14] 1998, 2001, 2002, 2007[15] (KBO 77경기)[16] 2000, 2004, 2005, 2007, 2009[17] (KBO 32경기)[18] 2008, 2009, 2011[19] (KBO 3경기)[20] 2007, 2010[21] (KBO 2경기)[22] 1996[23] 링크. 1996년 8월 23일 대전 한화전. 당시 임창용의 공을 받았다. 그해 5월 22일 삼성전에서는 이대진의 공을 받았고 김재걸의 도루를 저지하기도 했다. 링크. 단 두 경기 였지만 당시 모습은 이종범의 야구센스를 말할 때 꼭 나오는 장면이며 임팩트 있던 장면으로 아직까지 회자된다. 아마시절을 통틀어 이전까지 포수로 출전했던 적이 전무했기에 더 큰 임팩트를 줬었다.[24] 2001년 6월 1일 상호 합의 하에 퇴단했다.[25] 2012 시즌 계약 후 시범 경기까지 마치고 은퇴했다.[26] ~4월 20일[27] 4월 21일~[28] 당시 규정에 따라 방위병으로 복무할 경우, 홈경기엔 경기 출전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방위병 복무기간 중이었던 1995 시즌의 절반인 63경기에 출전하였다. 그 절반의 출전만으로도 당해 야수 중 손꼽히는 활약을 했다는 점이 당시의 천재성을 보여준다. 정확히는 1996년 초까지 방위병으로 복무했다. 이 때문에 하와이 전지 훈련에 불참했으며 시즌 초 원정 경기에 미출장했다.[29] 이종범의 대단함과 동시에 김응용 감독의 정확한 눈을 볼 수 있는 발언. 실제로 이종범의 일본 진출 전 5년간의 WAR은 연 평균 8.4 정도이며 방위병 복무로 1995년은 절반(정확히는 홈 경기 한정)만 뛸 수 있었음을 감안하면 연 평균 9.4에 이르는데, 평범하게 승수를 쌓을 경우 10승 전후를 기록할 수준의 2~3선발급 투수는 일반적으로 3~4대의 WAR을 기록한다. 진짜로 10승 투수 2명보다 가치가 뛰어났던 것. 세이버매트릭스가 도입되지 않아 WAR라는 스탯이 있는지도 몰랐던 90년대에서, 김응용은 이종범의 실제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정확히 읽어낸 것이다.[30] 지금으로 치면 이정후의 타격과 박해민의 주루/수비를 모두 갖춘 유격수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시즌 성적 자체도 괴랄한데, 1993~1997 시즌 중 방위복무로 홈경기만 뛰었던 1995 시즌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시즌에서 홈런, 안타, 득점, 도루 모두 5위 이내에 들었다는 점만으로 이종범의 대단함이 설명된다.[31] 이후 여러 포지션에 출전하게 되는데 외야수를 제외한 다른 포지션은 훈련을 제대로 받은 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평균 이상의 소화 능력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투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에서 뛴 적이 있으며, 96년에는 그야말로 경기 중에 갑자기 포수 마스크를 쓰고 당대 최고의 강속구 투수인 이대진임창용의 공을 받았으며 당해 40도루를 기록한 김재걸을 도루사 시키기도 했다.[32] KBO 리그 역대 단일시즌 야수 sWAR 1위(11.77)다.[33] 한 시즌 동안 3할 타율, 30홈런, 30도루를 기록하는 것. 정확성(타율)과 파워(홈런), 스피드(도루)를 모두 갖춰야 하기 때문에 KBO 역사상 30년 역사에 6명밖에 배출하지 못할 만큼 어렵다. 다만 30홈런, 30도루를 달성한 선수도 6명 뿐이기 때문에 일단 모두 성공하기는 했다.[34] 경기수는 14년 서건창이 128경기 체제, 94년 이종범이 126경기 체제로 별 차이 없지만 타석수는 14년 서건창이 616타석으로 561타석의 94년 이종범보다 더 많은 타격 기회를 가져갔다. 따라서 타율은 94년 이종범의 우위.[35] 데뷔 이후 5년 동안 쌓은 sWAR이 42.16인데 일본에서 돌아온 이후 11년 동안 쌓은 sWAR은 26.58에 불과한 것을 보면 전성기가 제법 일찍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전성기가 비슷한 급의 선수들에 비해 약간 일찍 끝난 것도 있으나, 전성기에 해당하는 20대 후반~30대 초반 시기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보낸 부분이 KBO 통산 기록이 생각보다 빈약한 결정적 이유일 것이다. 실제로 이종범은 만 33세 시즌인 2003년에 3할-20홈런-50도루를 기록하며 2022년에 이정후가 경신하기 전까지 21세기 중견수 단일시즌 sWAR 1위(7.11)였던 기록을 남겼고 만 35세 시즌이자 꽤나 심각한 투고타저 시즌이었던 2005년까지도 규정 타석 3할 타율을 기록했다.[36] 특히 1993년1997년 한국시리즈는 전체 시리즈를 이종범이 거의 지배하며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고 백전노장으로 출전한 09년 1차전에서의 2타점 역전 적시타와 1타점 결승타의 활약으로 1차전 MVP, 국제대회에선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8강 한일전 2타점 결승타 등[37] 그렇지만 지방 출신 해설위원 중에 사투리를 안 쓰는 해설을 찾기가 더 힘들다. 평생을 써온 말인데 고작 몇 년 사이에 고치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은 이해해야 할 부분이다.[38] 김기태 신임 감독이 직접 이종범에게 코치로 올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39] 이종범이 해설위원으로 이정후의 경기를 해설하는 것은 처음이었다.[40] 자세한 건 MBC SPORTS+의 야구 비판 참고.[41] 관련 기사[42] 데뷔 시즌에도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복무로 데뷔가 늦어진 1년 선배 양준혁의 엄청난 활약에 의해 신인왕을 빼앗겼다. 반대로 이종범은 다음해 양준혁의 한이 된 MVP를 수상하며 복수(?)했다.[43] 사실 딱 하나 지도한 것은 우투좌타 하라고 한 것이 전부라고[44] 이종범은 전문가 투표에서 149표(76.41점), 팬 투표에서 59만5140표(10.90점)를 얻어 총점 87.31로 3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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