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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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Egyptian civilization
나일강 중류, 하류에서 번성한 세계 4대 문명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더불어 서양 문명과 중동 문명의 근본이 되는 지역이다. 석기시대 무렵부터 정기적으로 범람해 풍부한 식량을 확보하게 해준 나일강으로 인해 성립되었다.
2. 역사[편집]
페르시아 왕조에 정복당하면서 순수 이집트계 왕조와 문명이 억압되고 사라졌다가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하면서 다시 부활시키고 알렉산더 대왕 사후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어서 파라오라 칭하면서 로마 시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이 정복한 시점부터 순수 이집트인에선 멀어지고 있었다.
분량과 연대기가 너무 장대해 한절기를 정리하는 데에만 셀 수 없이 많은 파라오들을 거친다. 때문에 이 문서는 나일강 위주로 발달한 고대 이집트 문명의 세계사적 의의와 대표적 문화 특성에 대해서 주로 설명하고 세부적인 내용은 고대 이집트 문서로 분리하므로 자세한 내용은 각 문서 참조.
3. 역대 왕조[편집]
3.1. 이집트 통일 이전[편집]
자세한 내용은 이집트 선왕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초기 왕조 시대[편집]
자세한 내용은 이집트 초기 왕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3. 이집트 고왕국[편집]
자세한 내용은 이집트 고왕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4. 제1중간기[편집]
자세한 내용은 이집트 제1중간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5. 이집트 중왕국[편집]
자세한 내용은 이집트 중왕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6. 제2중간기[편집]
자세한 내용은 이집트 제2중간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7. 이집트 신왕국[편집]
자세한 내용은 이집트 신왕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8. 이집트 말기 왕조[편집]
자세한 내용은 이집트 말기 왕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8.1. 프톨레마이오스 왕조[편집]
페르시아를 털어내는 김에 이집트를 장악하게 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집트의 문화를 존중했고, 역으로 자신이 받은 신탁[3] 을 이용해 "아몬의 아들의 명령을 따를 사람은 따르라"라고 하며 이집트를 상대로 배려를 해주었고 이에 이집트인들도 알렉산드로스를 파라오로 인정하고 따랐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입장에선 이집트는 어디까지나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위해 그냥 지나가는 거점이라 오래 있지 못했고, 아몬의 아들이라는 신탁은 알렉산드로스의 주요 측근들이 내세운 대의명분인 필리포스의 아들과 충돌하여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인들이 불만을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사후, 이집트의 총독으로 임명된 프톨레마이오스가 기원전 305년, 이집트인들이 말을 너무나도 듣지 않자 스스로를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로 칭하며 파라오에 즉위, "내가 파라오니까 내 말을 좀 들어라"라고 공표하자 이집트인들이 이를 수용해, 그리스계 이집트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성립된다.[4]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경우 파라오가 된 남자들의 이름을 모두 프톨레마이오스라고 칭했으며 X세 대신 칭호를 붙였다. 이것은 그리스 문화 계열 왕조들의 특징이기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그리스 계통의 이집트 왕조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이 시대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세계의 학문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히파티아도 여기서 살았으며 여기에 있던 무제이온[5] 은 당시 최고의 연구, 교육기관이었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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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이집트어 표기. 'km t'인데 이집트 상형문자는 모음 표기를 하지 않아 정확한 발음을 알 수 없고 이집트학에서는 후대 언어인 모음을 표기하는 콥트어의 모음과 대조하여 모음 e와 ə를 넣어 '케머트'라고 읽지만, 편의상 케메트(Kemet)라 표기한다. 굳이 해석하자면 '나일 강의 검은 땅' 정도의 뜻이 된다.[2] 고대 이집트 문명이 기원전 3150년에 시작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100만 년 전부터 이미 구석기가 시작되었고, 이집트 선왕조라고 제1왕조가 들어서기 전에도 왕과 도시들은 엄연히 존재했다.[3] 자신이 태양신인 아몬의 아들이라는 신탁.[4] 알렉산드로스의 말을 안 들은 것은, 그가 파라오를 칭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설이 있다.[5] 당시 최대의 도서관이 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이곳의 부속 건물이었다. 참고로 그 도서관은 나중에 파괴되었는데, 범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많다.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설도 있고, 무슬림들이라는 설도 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략 때문이라는 설, 아우렐리아누스의 침략 때문이라는 설 등등 온갖 떡밥이 난무한다. 특히 부분적 파괴가 아니라 완전한 파괴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