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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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33대 국무총리.
2. 생애[편집]
1934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군(현 포천시) 군내면 명산리에서 아버지 이정호(李貞鎬)[4] 와 어머니 평강 채씨 채병숙(蔡秉淑)[5] 사이의 4남 4녀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복고등학교(29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958년 제10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판사로 일하다가 검사로 전직하였다.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사직하고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정계에 입문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연천군-포천군-가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한국당 홍성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이후 총재비서실장,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한국국민당 김용채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6년 민정당 원내총무에 임명되었고, 1987년 대한민국 국회 운영위원장이 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경기도 연천군-포천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정책위 의장이 되었다. 또한 같은 해 12월부터 1989년 7월까지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된 이후 민정계로 분류되기는 했으나 민주계 인사들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등 계파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정치 행보를 보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4년에는 민주자유당 원내총무에 임명되었고, 이춘구의 국회부의장 사임으로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제14대 국회 후반기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7년 대선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 출마하여 제법 세몰이를 했으나, 1차 투표에서 8표차이로 이인제에 밀려 3위에 그치면서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6][7]
1999년 12월 29일 한나라당을 탈당[8] 하고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했다. 자민련 총재 직을 맡았고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0년 5월 국무총리에 지명되어 헌정사상 첫 인사청문회를 거쳐 정식 취임했다.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 통과로 DJP연합이 붕괴되자, 내각에 잔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자민련은 당 총재인 이한동을 제명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9] 2002년 7월까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2002년 9월 하나로국민연합을 창당하고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0.3%의 지지율을 기록하면서 낙선하였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2004년 2월 다시 자민련에 복당했으나,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에 복당하여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였다. 이후 2021년 별세하기 전까지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 국민의힘 상임고문이었다.
2.1. 사망[편집]
2021년 5월 8일 낮 12시 30분 쯤,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 향년 86세이며 빈소는 건국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사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안장 전에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되었다.
3. 소속 정당[편집]
4. 선거 이력[편집]
5. 둘러보기[편집]
[1] #인근의 좌의리와 함께 고성 이씨 집성촌으로 이진호 전 포천군수도 이 마을 출신이다.[2] 도촌공파 32세 한(漢) 항렬.[3] 정식 취임 전까지 국무총리 서리 수행. (2000년 5월 23일 ~ 2000년 6월 28일)[4] 이명 이정호(李禎鎬).[5] 채수면(蔡洙冕)의 딸이다.[6] 득표 수는 이인제 1,774표, 이한동 1,766표. 득표율은 이인제 14.7%, 이한동 14.6%.[7] 당시 이회창 대세론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1차투표 이회창 1등은 기정사실이었고, 과연 2등후보가 결선투표에서 역전할 수 있을지가 관심이었다. 그래서 이한동, 이인제, 이수성, 김덕룡은 누가 2등을 하던 결선투표에선 표를 몰아주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따라서 고작 8표차이 3등은 정말 아쉬운 결과였다. 만일 이한동이 2등으로 결선투표에 진출했다면 그 뒤 이인제의 진로와 대선 판도가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다.[8] 199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던 소위 9룡중에서 순차적으로 박찬종, 이홍구, 이인제, 이수성, 김윤환, 이한동 총 6명이 탈당하였다. [9] 이한동은 바지사장이고 실제 최고존엄은 김종필이었기에 가능한 일.[10]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11]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12] 이명박 대통령 후보 지지 선언[13]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14] 포천군, 연천군, 가평군[15] 1999년 탈당 2000년 자유민주연합 입당[16] 2001.09.07 탈당, 2002.11.11 하나로국민연합 창당, 2004.02.19 자유민주연합 복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