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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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군 >
70 이호준 · 71 김경태 · 72 김민호 · 73 김일경
· 74 경헌호 · 77 이종범 · 80 박경완 · 81 김정준
· 85 염경엽 [[감독#s-1.1|

]] · 97 모창민'''
< 퓨처스/재활군 >
75 조인성 · 76 윤진호 · 78 양영동 · 79 황병일
· 82 윤요섭 · 83 임훈 · 84 박용근 · 86 신재웅
· 89 양원혁 · 93 장진용 · 99 김광삼

< 트레이닝 파트 >
87 안영태 · 88 김용일 · 91 이권엽 · 95 고정환
· 92 스티브 홍 · 96 배요한 · 98 박종곤 · 유현원
· 최재훈 · 김종욱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군입대선수등록선수
다른 KBO 리그 팀 명단 보기



이호준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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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펼치기 · 접기 ]

파일:XmLbTVV.png파일:SK 와이번스 우승 엠블럼 V1.svg파일:SK 와이번스 우승 엠블럼 V3.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7
2007
2010

파일:NC_Dios_2020_KoreanSeries_Champions.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2020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4 KBO 리그 타점왕

보유 기록
1경기 최다 볼넷 및 최다 연타석 볼넷[1][2]
6회(2012년 5월 20일)
최고령 KBO 포스트시즌 출전
41세 8개월 13일[3]
연속타석 출루기록
13타석(2003년 8월 17일~19일 DH2)[4]


이호준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 펼치기 · 접기 ]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9번
김태동
(1992~1993)

이호준
(1994~1995)


이원식
(1996)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8번
이상윤

이호준
(1996~2000)


오우진
(2001)
SK 와이번스 등번호 17번
성영재
(2000~2000.5.31.)

이호준
(2000.6.1.~2001)


안재만
(2002)
SK 와이번스 등번호 27번
오승준
(2001)

이호준
(2002~2012)


백인식
(2013~2013.5.5)
NC 다이노스 등번호 27번
김태우
(2012)

이호준
(2013~2017)


장현식
(2018)
장현식
(2018)

이호준
(2019~2021)


윤형준
(2022)
LG 트윈스 등번호 70번
임훈
(2019~2020)

이호준
(2022~)


현역




파일:22이호준LG.png

LG 트윈스 No.70
이호준
李昊俊 / Lee Ho-Joon

출생
1976년 2월 8일 (48세)
광주광역시 동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광주중앙초 - 충장중 - 광주제일고 - (호남대)
신체
187cm, 95kg, O형[1]
포지션
투수[2]1루수, 지명타자[3]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4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해태)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94~2000)
SK 와이번스 (2000~2012)
NC 다이노스 (2013~2017)
지도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18)
NC 다이노스 1군 타격코치 (2019~2021)
LG 트윈스 1군 타격코치 (2022~)
응원가
SK 와이번스 시절
Speedy Gonzales[4][5][6]
NC 다이노스 시절
오기택 - 아빠의 청춘[7]
모차르트 세레나데 13번 제1악장[8][9]
가족
배우자 홍연실(1978년생)
장남 이동훈(2002년생)
딸 이동영(2005년생)
차남 이동욱(2008년생)
종교
불교천주교 (세례명: 프란치스코)

1. 개요
4. 연도별 성적
4.1. 투수 기록
4.2. 타자 기록
5. 별명
6. 말말말
7. 기타
7.1. 야구 관련
7.2. 야구 외
7.2.1. 인생은 이호준처럼
8. 사건 사고
8.1. 병역비리
9. 관련 문서
10. 둘러보기



1. 개요[편집]


LG 트윈스의 1군 타격 코치이자 前 해태 타이거즈, SK 와이번스, NC 다이노스 소속의 야구선수.

해태 타이거즈 시절 유망주 투수로 주목 받기도 했으나 부진하여 타자로 전향하였고, 타격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던 중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이적 직후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팀의 중심타자이자 간판스타로 거듭나며 팀의 왕조 구축에도 기여했다. 이후 신생팀 NC 다이노스로 이적하여 베태랑이자 간판스타로 팀의 구심점이 되어 빠르게 강팀이 되는데 큰 역할을 하며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다.

로또준, 인생은 이호준처럼, 호부지 등의 별명으로 유명하다.

2. 선수 경력[편집]



보통의 인간 이호준, 인생은 아름다워!


3.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호준/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연도별 성적[편집]



4.1. 투수 기록[편집]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1994
해태
8
12⅓
0
0
0
0
-
10.22
16
7
9
4
14
14
KBO 통산
(1시즌)
8
12⅓
0
0
0
0
-
10.22
16
7
9
4
14
14


4.2. 타자 기록[편집]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6
해태
17
18
.167
3
1
0
1
3
6
0
6
.389
.375
1997
54
126
.278
35
9
1
8
20
26
0
8
.556
.321
1998
121
422
.303
128
27
1
19
77
64
5
33
.507
.354
1999
107
312
.276
86
16
1
16
55
48
5
27
.487
.333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0
SK
61
190
.232
44
9
0
10
25
23
1
16
.437
.291
2001
80
286
.234
67
17
5
(3위)
8
30
44
4
21
.413
.287
2002
129
444
.288
128
24
2
23
64
76
5
49
.507
.358
2003
133
473
.290
137
20
1
36
(4위)
102
(5위)
86
9
78
.564
.389
2004
133
497
.280
139
22
2
30
(3위)
112
(1위)
87
7
73
.513
.368
2005
105
354
.271
96
16
1
21
65
59
5
55
.500
.367
2006
공익근무요원 복무[10]
2007
101
351
.313
110
22
1
14
71
56
3
34
.501
.368
2008
8
25
.200
5
2
0
0
2
1
0
1
.280
.231
2009
103
299
.298
89
14
1
16
55
40
0
36
.512
.369
2010
85
194
.278
54
9
0
8
46
19
1
21
.448
.342
2011
114
368
.253
93
12
0
14
62
41
2
45
.399
.333
2012
127
426
.300
128
26
0
18
78
55
3
77
.488
.407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13
NC
126
442
.278
123
25
1
20
87
46
2
61
.475
.362
2014
122
424
.271
115
20
0
23
78
59
3
70
.481
.371
2015
131
449
.294
132
25
0
24
110
48
0
68
.510
.381
2016
119
399
.298
119
20
0
21
87
46
3
67
.506
.396
2017
77
164
.299
49
10
0
7
36
13
1
21
.488
.366
KBO 통산
(22시즌)

2053
6663
.282
1880
346
17
337
1265
943
59
894
.491
.362


5. 별명[편집]


  • 가장 널리 알려진 별명은 '로또준'. 원래는 전성기 시절 '타점을 로또맞듯이 쓸어담는다' 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로또준이라는 별명이 생겼고, FA 계약 이후에는 부상과 하락세로 인해 한창 부진한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잊을만하면 가끔 터지는 뜬금포로 인해 나온 별명. SK 와이번스 시절에는 '34억짜리 경비원'[11]으로 불렸다. 또한 FA 계약 이후 팀에게 너무 피해를 줬기에 또르노빌, 또쿠시마라고도 불렸으며, 워낙 SK 팬들의 애증의 대상으로 유명해서 야갤에서는 반어적 의미로 '씹솩의 소울'로 불렸다. 하지만 2012년 이후에는 팀에서 최정과 함께 거의 유일하게 쓸 만한 타자가 되어버려서, 진심으로 'SK의 쏘울'이 되었다.

  • NC 다이노스 이적 후에는 디시 NC 다이노스 갤러리에서 유래한 별명으로 '호부지'가 있다.# 이는 호준+아부지의 합성어로, 젊은 타자들의 아버지 역할이자 선수단의 가장으로서 꾸역꾸역 타점을 벌어다가 팀을 먹여살리는 선수라는 좋은 의미이다.[12]


6. 말말말[편집]


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 인생은 이호준.[13]


이승엽은 화려했고, 이호준은 묵묵했다. 이승엽은 임팩트있게 꾸준했고, 이호준은 소리 없이 꾸준했다. 결국 강한 자도 살아남았고, 살아남은 자도 강했다.

이승엽, 이호준이 2015년 올스타 득표 1, 2위 발표가 난 기사의 베스트 댓글.(하지만 지금은 네이버 스포츠 뉴스 댓글이 폐지됨에 따라 볼 수 없다.)


프로는 인내의 삶이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꺼진 뒤의 쓸쓸함을 곱씹을 줄 알아야 한다.

2013년 인터뷰 중, 후배들에게는 본인이 겪은 자기관리에 대한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이런저런 잔소리를 할 예정이라 말하며.

부상 전, 나성범 & 이호준의 유쾌한 캠프 수다


(잠시 고민하더니) 진짜 어려운 질문이다.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선 진실된 땀이 필요하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땀이 아니라. 진실되게 해라. 그리고 '앞으로 크게 내다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2013년 NC 스프링캠프,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서 절대 하지 말고 피해야 할 것이 있냐는 박민우의 질문에.

[10대1 인터뷰] NC 이호준"계속 언더로 던졌으면 MLB 갔을 것"


내가 NC 입단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선수들을 한 데 모으는 일이었다. (중략) 유니폼 입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 선수단 관련해서 안 좋은 얘기를 하지 말자고 부탁했다. 불만이 쌓인 사람이 있다면 남자답게 감독, 코치 찾아가서 직접 얘기하자는 말도 덧붙였다. 선수들끼리 편이 갈리면 팀이 무너진다. (중략) 지고 있으면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분해서 눈물 흘리는 리더가 필요하다. 내가 말하는 리더는 ‘고참=리더’가 아니다. 게임의 리더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2018년 10월 인터뷰, NC에는 선수들의 리더가 필요하고 그래야 또 다른 도약을 할 수 있다고 말하며

일본에서 돌아온 이호준, NC 코치로 출발선에 서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지막에 귀국 결정을 내린 건 NC에서의 요청도 있었지만 후배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올시즌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며 상처받고 자신감이 상실됐을 그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걸 떠올리니까 더 이상 다른 생각이 들지 않더라.

2018년 10월 인터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정식 코치진 제안을 거절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에 대해 묻자

일본에서 돌아온 이호준, NC 코치로 출발선에 서다


직구 변화구 두 개 다 잘 치는 거보다는 직구 하나라도 잘 치자. 변화구에 삼진 먹더라도 뭐라 할 사람 한 명도 없으니까 그 부분에 있어서는 타석에서 스트레스 받지 말자.

2020년 4월 SBS sports 전화인터뷰, 팀 타율 2위 및 팀 홈런 1위를 달성한 2019 시즌 타자들에게 계속해서 강조했다는 말.영상

이호준 코치에게 물었다…"NC 어떻게 홈런군단 됐나요"



7. 기타[편집]



7.1. 야구 관련[편집]


  • 24년간 선수 생활을 해서 인지 누적 스탯이 꽤 좋다. 2007년 우승과 2008년 야구붐 이후 SK 팬이 된 사람들은 그 이전에 보여준 이호준의 전성기 활약[14]을 보지 못했고 FA 계약 후 부상과 부진이 이어지며 먹튀 이미지가 컸기 때문에 엄청나게 까이곤 했다. 사실 2007년 우승 후 FA 자격을 얻었을 때만 해도 전성기의 기량을 보였던 데다가 창단 초창기부터 SK의 간판타자 역할을 했기 때문에 팬들이 "우리의 프랜차이즈 스타인데, 꼭 FA로 잡아야한다."라고 팬 게시판에서 서명운동까지 할 정도로 사랑받았다.[15][16] 그 때 팬들의 반응 덕분에 이호준은 예상보다 훨씬 높은 금액의 FA 로또를 터트릴 수 있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 ||
이호준의 타격 폼

  • SK 시절 마지막에 보여준 로또와 FA 먹튀 이미지 때문에 꽤나 저평가를 받았던 타자지만, 역대 홈런 순위 5위[17], 역대 타점 순위 4위[18]에 랭크되어 있을 만큼 꾸준한 활약을 했던 타자이다. 특히 NC에 이적해와서는 거의 회춘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타격 성적이 반등했는데, 나이가 있긴 하지만 2014년까지 통산 285홈런을 때렸고 2015년 6월 18일에는 프로야구 사상 8번째로 300홈런 달성에 성공했다. 최고령 300홈런 기록은 덤.[19][20]

  • 프로 데뷔 후 골든 글러브 수상이 단 한번도 없다. 프로 선수 생활 동안 300개가 넘는 홈런을 쳤지만 프로 통산 300홈런 이상 친 타자 중 유일하게 골든글러브를 받지 못했다. 이유는 골글을 받을만한 시즌에 항상 더 괴물 같은 성적을 기록한 사람들이 있어서[21] 그래서 NC 다이노스 갤러리에서는 은퇴 선물로 골든글러브를 만들어서 전달했다. 개인 타이틀도 2004년 타점왕 하나밖에 없다. 살짝 아쉬운 부분. 어쩌면 개인 타이틀에서 밀렸기 때문에 골든글러브 경쟁에서 뒤쳐진 원인일지도 모른다.

  • 2013년 신생팀 NC 다이노스로 FA를 통해 이적한 이후에는 창단 초창기 팀의 주장을 맡으며 팀의 전통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인터뷰에 따르면 전력질주, 격려, 불만제로를 팀 컬러로 정착시켰다고 하며,[22] 또 다른 인터뷰에 따르면 이호준이 NC 입단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선수들에게 유니폼을 입고 있는 한 감독, 코치 흉을 보거나 전날 작전에 대해 잡음이 들리면 벌금 300만 원을 부여하겠다고 강하게 말한 것이라고 한다. 사복 입고 밖에 나가서 삼삼오오 모여 얘기하는 건 자유지만, 유니폼 입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 선수단 관련해서 안 좋은 얘기를 하지 말자고 부탁했다고.

  • 이렇듯 이호준은 2014년 NC에 합류한 이종욱손시헌과 함께 후배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며 팀 창단 초기 선수단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기한 사실들이 팬들에게 알려지고 이호준 본인도 나테이박으로 대표되는 클린업 콰르텟의 일원으로도 맹활약 했으니, NC 팬덤에서는 그의 은퇴 후에도 대부분 이호준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으며 그러한 팬들의 신뢰와 지지는 타격코치로 팀에 복귀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 선수 시절 가지고 있던 징크스를 다 합치면 100개가 넘을 만큼 많았다. 예를 들면 본인이 손톱을 깎거나 남이 손톱을 깎는 걸 보면 그 날 경기가 잘 안 풀려서 그러한 행동들은 전부 경기가 없는 월요일에 했다. 또 경기가 있는 날은 이발하는 것도 피하고, 비누 없이 물로만 세수와 샤워를 하며, 계란같이 잘 깨지는 것도 피했다고 한다. 또한 성적이 안 좋으면 쓰던 야구 용품을 모두 버리고 모조리 교체했다고 한다. 반대로 좋은 징크스로는 본인이나 와이프가 똥차를 보면 그날 꼭 홈런을 쳤다고.

  • 고향 팀인 KIA 타이거즈에 지금도 애착이 있다. KIA가 연패에 빠질 때 인터뷰에서 KIA가 연패를 끊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인데, 2009 시즌과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KIA와 벤치 클리어링이 여러 번 터질 때도 절대 나오지 않았다.[23] 성적 역시 SK 시절에는 유난히 기아전 성적이 처참했던 적이 있었다. 박재홍이 KIA 타이거즈 시절 빵 사건이나 지명 거부 등으로 별로 사이가 안 좋은 것과는 대비된 부분.

  • 퇴물, 먹튀로 취급받던 시절에도 롯데만 만나면 전성기로 돌아와 불방망이를 휘두르던 로나쌩 클럽 회원이기도 하다. 그런데 김성근 감독 이후의 SK는 롯데한데 뭘 해도 이기는 팀이라서, 팬들에겐 호구 상대로 스탯쌓기만 한다고 오히려 까였다. 이 때문에 2007년 FA 당시 롯데에서 영입하려 했지만, 영입 실패로 돌아가면서 꼴런트 어디 안 간다고 욕을 먹은 적도 있다.

  • 2012 시즌이 끝나고 FA 자격을 얻은 뒤 SK와 협상이 결렬되며 NC로 갔을 때 SK 와이번스 갤러리에서는 아름다운 이별행이라면서 섭섭함보다 기쁨이 크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호준이 NC로 이적한 후 먹튀짓을 하지 않고, 중요한 순간마다 SK에게 비수를 꽂자 이호준을 까는 데 앞장섰던 SK 와이번스 갤러리에서는 엔전드라고 부르곤 했다.[24] 그리고 2013년 겨울 정근우가 팬들의 뒤통수를 거하게 치고 떠나면서 좋게 떠난 이호준은 그래도 착한 사람이라는 재평가가 SK 팬들 사이에서 잠깐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후 2015년 겨울 정우람이 정근우보다 더한 뒤통수를 거하게 치면서 또다시 재평가를 받았다.



7.2. 야구 외[편집]


  • 이진주(속칭 펄녀)를 앞장서서 내쫓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SK 팬들은 그를 34억짜리 구단경비원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이게 별 거 아닌 것 같아 보여도 팀 케미스트리에는 큰 도움이 되는 일이다. 각광받는 유망주의 타락으로 통하는 길 하나를 막아버렸다는 얘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같은 팀 고참이었던 김재현과 함께 둘이서 쌍욕까지 하면서 쫓아냈다고 한다. 아는 형님에서 김광현이 한 이야기로 데뷔 후 20대 초반부터 팀 에이스로 활약했을 때 선배들의 조언으로 야구에만 전념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야구장 이외에 연예인과의 만남이 30대에 출연한 아는 형님 방송이 최초라고 밝힐 정도로 젊은 선수들의 일탈을 막고 과도환 외부활동에 휩쓸리지 않게 하는데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훗날 NC로 이적 후에도 베테랑이자 덕아웃리더로서 신생팀의 선수단 기강과 규합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그래서 찰리 쉬렉이 심판 판정에 불복해 한국어로 욕설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한국 욕을 이호준에게 배운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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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내 홍연실 씨가 아주 미인인 것으로도 유명하다.[25] 야구 팬들은 그녀가 하지원 + 성유리 + 김유미를 닮은 듯한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KBO 리그의 WAG 중 최고의 미모라고 해도 반론이 없다며 찬양했다. 인천대학교 출신 전직 대한항공 스튜어디스로, 구애를 할 당시에 자신의 연봉으로 외제차를 뽑았다고 과장을 하면서 들이댔다고 한다.[26] 처음엔 거짓말이었겠지만 이후 현실이 되었으니 부인에겐 진실된 남자. 게다가 이호준이 외출할 때는 신발을 직접 신겨주는 현모양처 스타일이라고 한다. 이호준 부부 인터뷰 딸도 무척 귀엽다.

  • 최동수와 닮은 꼴로 유명한데, 위의 사진에 나온 딸조차 SK로 이적 온 최동수에게 달려가 아빠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 횡령 등으로 무너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차기 회장으로 박재홍을 떠밀면서 존재감을 다시금 입증했다. 처음에는 자존심 강하고 개인주의적이란 비난을 듣던 박재홍이 선수협 회장을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론이 많았으나, 예상외로 박재홍이 선수협을 잘 이끌어 나가자 덩달아 이호준의 평가도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사람 보는 눈이 선구안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 큰아들인 2002년생 이동훈이 프로에 입단할 때까지 뛰는 게 목표라고 한 적이 있다.[27] 인천동막초등학교와 수원북중학교, 휘문중학교를 졸업하고 2018년 휘문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2019년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강릉고로 전학했다. 포지션은 투타 겸업으로 3루수와 투수이다. 공교롭게도 아버지인 이호준 역시 프로 초창기 투수로 입단했고, 타자 전향 후 3루수로 뛴 적이 있다.[28] 사이드암 투수로 130km/h 대의 공을 던지고 있다.# 이동훈은 2021년도 신인 지명에서 지명을 받지 못했고 강릉영동대학교 야구부로 진학했다.

  • 입담이 상당히 좋기로 유명하다.2017년 KBS N SPORTS 합의판정에서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많이 풀어내어 MC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다.[29]

  • 이호준 본인도 해설을 하고 싶다고 여러 차례 말한 적이 있고, 방송국에서도 몇번 섭외 시도가 있었던 듯하다. 봉중근도 이호준은 해설가로 어울린다고 말했다. 2020년 4월 SBS sports 야담법석 전화인터뷰에서도 화려한 언변을 선보여 진행자들과 NC 팬들 모두의 호평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엔씨' 2행시는 백미.#

  • 차덕후다. 이 인터뷰에서는 지금까지 자동차를 24대나 탔다고 하며, 좋은 자동차를 소유하고 싶었던 욕구가 야구선수로서의 동기부여가 됐다고 한다. 멋 모를 때는 할부리스 없이 현금으로만 차를 샀다가 취등록세가 어마어마하게 나왔다고 한다.

  • 해산물을 좋아하는 것으로 보인다. SK 시절에는 연안부두 어시장에서 종종 볼 수 있었다.

  • NC에서 방출당했다가 재입단한 투수 이효준이 이호준과 비슷한 이름으로 NC 팬들 사이에서 로뚀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 본의 아니게 임창용을 각성시켜 야구 역사를 뒤바꾸는데 일조한 바 있다. 광주진흥고 시절 1 년 후배인 임창용과 노가리를 까면서 짓궂은 농담으로 "네 공은 도시락 하나 까먹으면서도 칠 수 있으니깐 마음대로 던져봐라" 하며 약올렸는데 그 이후로 임창용이 팔 각도를 사이드 스로로 올리며 죽어라 노력하자 최고구속이 120km중반대에서 145km로 급상승하자 이호준이 공을 건드리지도 못했다고. 결과적으로 한국 야구 역사를 새로 쓰는데 간접적인 공헌을 한 셈. 공교롭게도 이 둘은 LG와 막판까지 치열한 선두다툼을 하던 1997년 9월 10일 잠실 LG전에서 소속팀 해태를 패배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었다. 해태가 1점 앞선 9회말 2사 후 임창용이 허문회에게 1루수 앞 강습 안타를 내준 후 1루로 견제구를 던진 것을 1루수 이호준이 포구하지 못하면서 2루를 허용했고, 후속타자 이병규의 적시타로 동점을 내준 후 연장 14회말 2사 만루에서 송구홍에게 역전 끝내기를 맞은 것이다. 이 해 해태가 LG를 1.5게임 차로 밀어내고 정규시즌 1위를 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 박명환야구TV에서 오상민이 술회하기를 이호준은 조그만 것 가지고도 크게 부풀려서 이야기를 하는 통에 선배들한테 많이 혼났다고 한다. SK 와이번스 초창기에 후배인 이진영과 말다툼이 있었다가 군기반장이었던 오상민이 선배들한테 얻어터진 뒤 이진영을 뚜드려 팼다고... 박명환은 NC 입단 당시 본인이 주로 달던 배번 27번을 이호준이 이미 달고 있어서 22번을 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 빠른 1976년생인 데다가 고졸 신인으로 프로 무대에 데뷔하였기 때문에 프로 경력이 굉장히 길다. 만 18세였던 1994년에 데뷔해서 2017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 24시즌[30]을 선수로 뛰었고, 은퇴 당시 KBO 최고령이자 가장 연차가 오래 된[31] 선수였다. 동시대에 뛰었고 40대까지 현역 생활을 한 이승엽, 박진만, 임창용, 박정진 등 1976년생들과 동갑내기 취급을 받을 때도 있지만 이호준은 빠른 1976년생이기 때문에 이들보다 1년 선배다. 오히려 김재현, 조인성 등 1975년생들과 친구[32]로 지낸다.

  • 가수 김종서와 상당히 친분이 있다고 하며, 축구선수 곽태휘와도 친분이 깊다. 2008년 무릎 연골 수술을 받으러 독일을 방문했을 때, 곽태휘도 마침 무릎 십자인대 수술을 받으러 왔고 이후 재활센터에서 같이 재활하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이호준이 아이스 버킷 챌린지에 참가했을 때 박찬호 배우 정경호 그리고 곽태휘를 지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7.2.1. 인생은 이호준처럼[편집]


야구 팬들 사이에 "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 인생은 이호준처럼" 이라는 얘기가 있다. SK 와이번스 시절에 쓰일 때는 대박을 터뜨릴 정도는 아닌 성적을 거두다가 FA 자격 획득 마지막 시즌에 성적이 뛰어서 거액 FA 계약 후 먹튀가 되었다는 조롱의 의미[33]였지만, NC 다이노스행 이후 준수한 활약으로 인해 거진 야구계의 명언이 되어버렸다.

원래는 "야구선수로서의 기록은 더 뛰어나지만 결혼을 하지 못한 양준혁[34]보다, 기록은 좀 뒤져도 미인과 결혼한 이호준이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라는 좀 장난스런 의미였다. 그러나 이후 FA 계약으로 인한 연봉 대박, NC 다이노스로 팀을 옮긴 이후 고령의 나이에도 더 좋은 성적을 내면서 신생팀을 이끌어가는 모범적 고참 선수로 인정받는 등,[35] 화려하지는 않아도 꾸준한,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가치가 높아지는 선수라는 경의를 담은 별명이 되었다. 비공식이기는 하나 선수협 차원에서 은퇴투어를 하였다. 이후 그의 계보는 kt wiz에서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 꾸준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어린 후배 선수들을 이끄는 리더십으로 팬들의 지지도 함께 받고 있는 유한준이 잇고 있다.

이 말은 워낙에 유명해서 네이버 자동완성에도 저장되어 있고, 아내가 말해줘서 본인도 알고 있다고 한다. '야구는 양준혁처럼, 인생은 이호준처럼'이라는 바리에이션도 있는데, 이 말이 왜 생겼는지 고려한다면 이쪽이 더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카스포인트에서 이걸 놓치지 않고 이 문구가 들어간 광고를 만들기도 했으며, NC 다이노스는 이 구절을 인쇄한 티셔츠를 2014 시즌부터 판매하기도 했다. 자신도 이 별명에 자부심이 있는지 '인생은 조인성처럼'이 나오자 발끈하기도 했다.기사


8. 사건 사고[편집]



8.1. 병역비리[편집]


이호준 최대의 흑역사. 두 가지 범죄를 저질렀고 전과자 빨간 줄도 그어졌으나, 실질적으로 둘 다 처벌받지 않았다.

본인의 병역비리에 대해서는 공소시효 만료로 공소권 없음 처분되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후 재검 뒤 공익 복무로 군 복무를 마쳤다. 공소시효가 만료되었고, 이호준을 포함한 당사자들이 함구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로 큰 죄를 저질렀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상태다.[36]

본인의 병역비리가 운좋게도 공소시효 만료로 넘어간 것과 별도로, 다른 선수들에게 전문 브로커를 소개해 준 행위가 발각되어 병역법위반방조죄로 처벌을 받았다. 허나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감방살이는 면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은 공소사실이 모두 인정되나 아무 전과가 없는 초범이고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는 점을 참작해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고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호준이 전과가 없는 초범임을 고려하여 집행유예를 선고했다고 밝혔으나, 사실은 초범 여부와 상관없이 브로커를 소개한 방조죄만으로 실형을 선고하기가 어려웠기 때문.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도 병역을 기피하고 다른 선수에게 브로커를 소개시켜준 경우 본인의 병역기피로 징역 8월 + 브로커 소개로 2월로 징역 10월을 살게 되었는데, 이호준처럼 본인 병역기피로 실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방조죄만으로 실형이 불가능했다. 왜냐면 실형은 징역 6월 이상부터 가능하기 때문, 그렇다고 방조죄만으로 징역 6월을 내리는 것도 불가능한데,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은 선수들은 방조죄로 징역 2월 분량이 추가되었으므로 사법 형평성에 어긋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적으로 집행유예만 가능한 상황이었던 것. 물론 사법적인 문제와 관계없이 사회 일반 도덕규범상 이호준이 병역비리를 저지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9. 관련 문서[편집]



10. 둘러보기[편집]


파일:KBO 리그 로고(1982~2012).svg 2012년 8월 KBO 리그 월간 MVP
최형우
(삼성 라이온즈)

이호준
(SK 와이번스)


서재응
(KIA 타이거즈)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15년 5월 KBO 리그 월간 MVP
안영명
(한화 이글스)

이호준
(NC 다이노스)


김태균
(한화 이글스)
[1] 기사[2] 해태 타이거즈 입단 시즌에는 투수였으나 바로 다음 해 타자로 전향했다. 여담으로 LG 트윈스의 김재현의 20-20 클럽 가입 허용투수가 바로 이호준.[3] SK 시절 첫 FA 계약을 맺은 2008년 전까지는 주전 1루수였으나 이후 무릎 부상으로 박정권에게 서서히 1루를 내주고 지명타자가 되었다. NC에서는 풀타임 지명타자로 뛰었는데, 1루수 수비가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부상 전력과 나이 문제 등으로 사실상 수비 측면에서는 거의 활약을 기대하기 힘들었다.[4] 야야야야~ 이호준 날려버려라(홈런!) 이호준 날려버려라~ (홈런!) 이호준 날려버려라~ (홈런!) X2[5] SK-SSG의 거포 타자를 대표하는 응원가이며 상당히 인기있는 응원가 중 하나이다. 2008년에는 이재원도 잠시 사용했었고 현재는 한유섬이 사용중이다.[6] 가끔 배영섭 응원가와 햇갈리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 노래는 장윤정의 올레다. 본의아니게 응원가가 비슷하여 삼성팬들은 SK 늙은비룡 이호준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응원가를 물려받은 한유섬(당시는 한동민)은 SK 젊은비룡 한동민이라고 하였다.[7] 다이노스 이호준 NC 이호준~ 이호준! 이호준! NC 이호준~ 이호준!(홈런!) 이호준!(홈런!) NC 이호준~[8] 다! 이노스! 홈런 이호준! 다! 이노스! 홈런 이호준 오~ 이호준 홈런 오오오 홈런 이호준 홈런~ X2[9] 일명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Eine Kleine Nachtmusik)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그 곡이다.[10] 병역비리 연루로 입대 후, 1년 만에 의병 전역했다.[11] 왜 이런 별명이 생겼는지는 기타 항목 참조. 여기에 엮여서 생긴 김성근 감독의 별명으로 나니욘쥬라는것도 있었다. 대충 3억짜리 경비원의 역할에 만족하고 있던 김성근에게 이호준이 40억이라고 알려주자 놀라며 나니?! 욘쥬?!라고 말했다는 드립이 흥하면서 생겼다. 물론 드립이다. 김성근은 당시에도 한국에 산지 30년이 훨씬 넘었었다. 그리고 김성근 본인은 10여년 후 "나니?! 햐쿠욘쥬?!"란 소리가 나올 돈벼락을 맞게되는데...[12] 마침 응원가도 "아빠의 청춘"이다.[13] "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까지는 김응용 감독이 실제로 했던 말인데 다재다능했던 이종범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선동열과 이승엽을 언급한 것이다.[14] SK 최초의 준우승인 2003년 근처 시기에 상당한 활약을 보였다. 베테랑이라기에는 젊은 20대였지만 준우승 주역 중 한명으로 꼽힌다.[15] 이호준이 지금은 사라진 용틀임마당에 술을 먹고 쓴 글이 계기가 됐다.[16] 여담으로 이 당시 롯데 자이언츠도 타선 보강을 위해 이호준 영입을 추진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호준이 SK와 우선협상이 결렬되자마자 곧바로 롯데 프런트가 이호준과 접촉해 몇 차례 협상을 벌였으나, 금액 차이가 나서 최종적으로 계약이 이뤄지지 않았다.[17] 2020 시즌 기준. 이승엽-최정-양준혁-장종훈에 이은 5위이다.[18] 2019 시즌 종료 기준. 이승엽-양준혁-김태균에 이은 4위이다. 우타자로만 한정하면 통산 타점 2위. 1위는 김태균, 3위는 장종훈이다.[19] KIA의 이범호가 329홈런을 기록하며 이호준의 통산 337홈런 기록을 넘지 못하고 은퇴했다. 이호준의 홈런 기록을 넘어선 타자는 최정, 박병호, 그리고 이대호 정도.[20] 종전 최고령 300홈런 달성자는 박재홍.[21] 대표적으로 36홈런을 쳤지만 이승엽에게 밀린 2003년.[22] 전력질주는 수비 나갈 때, 방망이 치고 나갈 때, 공수교대 때에 전력질주 하고, 상황이 되었을 때 몸을 사리지 않고 다이빙 캐치하는 것, 격려는 플레이 중 누군가가 잘못 했어도 항상 ‘괜찮다’고 서로 말해주는 것, 불만제로는 선수-코칭스태프-프런트 간 하나로 꽉 뭉쳐서 뒷말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23] 벤치 클리어링은 투수 몇몇을 제외하곤 무조건 나가야 하며, 안 나가면 벌금을 물기도 한다.[24] 실제로 게임인 마구마구에서 NC 레전드 카드로 출시가 되었다. 물론 SK 소속으로도 출시되었다.[25] 훈련소에 있을 당시 퇴소 전날에 행사를 진행하였는데 깜짝 영상편지를 띄웠다. 그리고 모든 훈련병들이 우와~를 외쳤다는 썰이 있었다.[26] 물론 그 당시엔 연봉이 적었겠지만 FA로 대박을 친 이후의 연봉은 5억으로, SK에서 박경완, 박재홍과 함께 최고 연봉 수령자였고 KBO 전체에서도 양준혁 - 김동주 - 손민한 - 박진만 - 장성호 다음가는 고액연봉자였다.[27] 물론 농담이고, 2017 시즌 이후 은퇴했다.[28] 2대째 야구를 하는 선수의 경우 아버지의 포지션을 닮아가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내야수 출신인 김한수 감독이 있다.[29] 청소년 대회를 앞두고 서울에서 훈련을 하다가 KFC에 갔는데 양념도 안 뿌려진 치킨이 매운걸 알고 전라도 사투리로 '아따~ 아야~ 닭이 매워야~' 말 한마디로 웃겼고 부대찌개를 먹으면서 '김치찌개라면을 넣어 먹다니 세상에 이런 김치찌개도 있구나'하면서 감탄했다고 한다. 훈련 도중 광주에 다녀와야 할 일이 있어서 버스 타기 전 고속터미널에서 부대찌개를 시켰는데 라면이 안 들어가 있자 '아줌마! 나 시골서 왔다고 지금 라면사리 안 넣어주요!'하고 따지자 아줌마 성대모사를 하면서 '1인분은 라면사리가 안들어가요오~호호'라고 상황설명을 하자 MC들이 터졌다.[30] 그러나 1995년, 2006년 시즌 1군 출전 기록은 없다. 23년 연속(1991~2013) 1군 경기에 출전한 선수는 박경완.[31] 이호준보다 먼저 은퇴한 이병규최영필은 대학(93학번)을 졸업하고 1997년에 데뷔했고, 이호준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1994년에 데뷔했다.[32] 2012년에 이적한 조인성과 같은 팀이었는데 서로 반말하는 장면이 경기전 방송에 나온 적이 있었다.[33] SK에서 FA 이후 2008~2011년까지 4년간 연봉 34억을 받으며 스탯티즈 기준 WAR 합계 2.72를 기록했던 이 기간만을 한정한다면 먹튀라 불릴만 했는데, 2012년에 2억 5천만원이라는 저렴한 연봉으로 SK와 재계약한 후 선수 시절 두번째로 높은 WAR 4.45라는 대단히 좋은 성적으로 한방에 만회했다. 때문에 SK에서도 다소 많이 받긴 했어도 먹튀까지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SK에서 연봉대비 잘했다는건 절대 아니고, 그저 애매했지만 받은 돈에 비해서는 평범한 성적을 냈다는 것이다. 단지 먹튀라는게 다소 심하다는 것 뿐. 먹튀/야구 문서에 나와있듯 진정한 먹튀들은 WAR이 0점대, 마이너스도 수두룩하다.[34] 현재는 결혼을 했다.[35] 이는 성적에서 역대 정상급의 타자이면서도 팀워크, 인성 등에서 평판이 나빠 환영받지 못하며 은퇴했던 두산 베어스 김동주사례와 대조를 보였다. 성적으로만 따지면 영구결번이 아깝지 않은 선수이나, 은퇴식조차 못하고 초라하게 야구계를 떠났다.[36] 이 후 추정상으로 SK 소속 선수들 다수에게 병역 브로커를 소개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건 발생 후 이진영을 비롯한 몇몇 SK 선수들과 약간 사이가 좋지는 않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는 일부 팬들의 주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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