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록

덤프버전 :

1. 개요
2. 특징
3. 역사
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일본에서 제작된 록 음악이다. 통칭은 J-ROCK.(제이락은 일반적으로 1980년대 이후의 일본 록을 가리킨다. 이 문서에서는 일본의 전반적인 메인스트림 록 음악을 설명하였다.)


2. 특징[편집]


주로 영미록의 조류를 따르면서도 다소간 일본식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4도/7도음을 빼는 일본식 '요나누키 음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데, 이게 영미록에서 쓰는 펜타토닉 스케일과 일치해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일본 록이 이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며, 21세기 들어서는 와록 같은 데서 강조되고 일반적인 록 장르에서는 이나 본 조비 등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서도 익숙한 그 방식으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영미록에 비해 키보드가 많다. 영미권(특히 미국)에서 키보드는 따로 포지션을 배당하지 않고, 전문적으로 필요시에는 키보드 세션을 고용하거나, 간주 등에 양념으로 사용 되는 경우에는 다른 포지션(주로 보컬)이 겸임하는 경우가 많은데 반해 일본 록은 따로 키보디스트가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 또한 일본에서 인기가 많았던 록밴드 딥 퍼플존 로드, 프레디 머큐리 등의 영향이 있지 않았나 짐작된다.

베이스의 경우 썸스트로크 속주가 타국에 비해 자주 활용된다. J락 특유의 속도감 있고 리드미컬한 아니메틱 하이틴 느낌을 만드는데에 크게 일조하는 요소 중 하나.


3. 역사[편집]



3.1. 배경[편집]


일본은 동아시아의 국가 중 외국의 문물을 가장 빨리 받아들인 국가다. 제1 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연합군의 편에 서서 싸웠을 정도였고, 세계 각국의 나라와 수많은 교류가 있던 나라다. 그로 인해 일본은 1920년대부터 재즈 풍의 음악이 수입되었고,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자유분방한 풍조에 따라 일본 대도시의 곳곳에는 댄스홀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댄스홀을 중심으로 서구식 대중음악이 퍼지기 시작한다.[1]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 태평양 전쟁 발발을 거치면서 이러한 "귀축영미"의 음악은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적대국이 아니었던 아르헨티나, 브라질[2], 멕시코, 쿠바 등의 중남미 음악이나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 스페인의 음악은 계속 유입되었다. 이는 훗날 일본의 라틴 음악 붐에 큰 자양분으로 작용한다.[3] 한국에서는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록 음악이 쉽게 발달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대조적이다.[4]

여하튼 이렇게 외부의 문화를 무리없이 받아들이는 풍조는 이후 일본음악의 유연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3.2. 태동기[편집]


패전 후 일본은 미군정의 지배를 받으며 급격히 "미국화"가 되어간다. 사실상 전쟁 전의 문화와 전쟁 후의 문화는 완전히 단절된다. 이제 일본은 개인이 멸사봉공하여 국가의 부속품으로, 국가가 움직이는 대로의 국가가 아닌 개개인이 향락을 추구하는데 있어 거리낌이 없는 국가로 변한다.[5]



히라오 마사아키, 다이아나(1958)
야마시타 케이지로, 그저 발코니에 앉아(1958)

1950년대부터 일본은 로큰롤 음악이 빠르게 유입된다. 엘비스 프레슬리, 진 빈센트, 척 베리등의 뮤지션들의 음악이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퍼지게 된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그렇게 큰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미소라 히바리나 후랑크 나가이같은 엔카 가수들이 엄연히 메인스트림을 장악하고 있었다.[6] 그렇기에 서양음악은 일종의 소스로 쓰였을 뿐, 그 자체로 새로운 음악이 되지는 못했다. 재미있는 부분은, 이 시기에 로큰롤이 유행했고,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태양족이라는 일본식 테디보이 서브컬쳐가 생겨났지만, 사실상 외양만 비슷할 뿐 로큰롤 자체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이 당시 로큰롤을 잘 발음을 못해서(로-꾸운-로루 라고 발음해야 했다.) 로큰롤이든 리듬 앤 블루스건 죄다 "로카비리"(로커빌리)라는 이름으로 통칭해서 부르곤 했다고 한다.이 시기를 대표하는 가수로는 밋키 카치스, 야마시타 케이지로, 코사카 카즈야,



더 스파이더즈, 흔들흔들(フリフリ)(1966)
더 다이너마이트, 터널 천국(トンネル天国)(1968)


더 골든 컵스, 긴 머리 소녀(長い髪の少女)(1968)
더 타이거즈, 파랑새(青い鳥)(1968)

일본의 록 음악은 1960년대부터 여명기를 맞이하게 된다.[7] 1950년대 후반부터 로커빌리 밴드들이 외국식 음악을 재즈클럽이나 댄스홀에서 연주하고는 있었지만, 비틀즈 붐이 불면서 비로소 일본식 록이 생겨난다. 이 시기에는 일본식 록 밴드를 GS(그룹 사운드의 약칭)라고 불렀다. 이러한 흐름은 196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사이키델릭 록이나 하드 록의 시대가 불기 전까지 일본식 비트 뮤직을 형성했다. 이 시기에 유명했던 밴드는 일본 GS의 패왕이라 불린 더 스파이더스, 더 타이거즈, 더 카나비츠, 재키 요시카와와 블루 코메츠 등이 있다.[8]

당시는 음악 장르의 세분화가 진행되지 않았던 시대이기도 해서 록 밴드면 전부 단순하게 "그룹 사운드"라고 불렸지만 밴드마다 음악적인 특징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흐름은 사이키델릭 록을 거쳐 하드 록,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이어진다. 더 몹스(The Mops), 플라워 트래블링 밴드, 외도(外道), 잭스, 더 포크 크루세이더스 등의 밴드들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밴드들이다. GS 붐의 소용돌이에 있던 일부 뮤지션들은 자기 길을 찾아가 포크를 비롯한 다양한 음악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 때문에 당시에 GS 밴드를 했던 사람들 중에서는 "레코드 회사에서 시켜서 한거지 내가 원하는 음악은 따로 있었다"라고 과거부정을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일본의 포크 록은 60년대 후반 사회적인 저항의 분위기를 타고 크게 성장한다. 특히 URC 레코드를 위시로 한 여러 인디 가수들이 메이저 시장에 올라왔다. 대표적으로 엔도 켄지, 타카다 와타루, 미카미 칸이나 이노우에 요스이같은 뮤지션들이 이 시기에 음악적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간사이 지방을 중심으로 니시오카 쿄조, 오카야바시 노부야스 등이 활동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은 한국에는 별로 없던 글램 록 성향의 밴드들도 꽤 있었다는 것이다. 튤립은 아예 록시 뮤직 같이 독특한 코스튬을 입고 무대에 등장했고, 다운타운 부기우기 밴드는 글램록에 영향을 받아 소울풀한 음악을 들려주었다.

한편 1960년대부터 오키나와에는 주일미군 병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록 음악이 발달해왔는데, 특히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 몰라 괴로워하는(당시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다) 미군 병사들이 근심을 잊도록 하드록 계열을 많이 공연하며 본토와 다른 록 문화를 발전시켰다. 무라사키, 컨디션 그린, 마리 위드 메두사 등이 당시의 대표적인 밴드들이다. 1970년대 중반, 베트남에서의 전쟁이 끝나면서 오키나와 밴드들은 일본 본토로 진출하며 일본의 록 씬에 여러모로 영향을 끼쳤다.


3.3. 1970년대[편집]


1970년에 등장한 핫피 엔도를 분수령으로 일본 록은 그 틀을 갖추게 된다. 핫피 엔도는 1960년대 말부터 불어닥치던 일본어 락 논쟁에 대해 불후의 명반 風街ろまん으로 응수하면서 일본어 락의 진정한 시작을 알렸다. 핫피 엔도의 뒤를 이어 1972년 야자와 에이키치의 밴드 캐롤은 일본어 락의 완전한 정착을 알렸고, 이마와노 키요시로가 이끄는 전설적인 밴드 RC 석세션 역시 이 시대에 등장하여 현재의 일본 록 콘서트, 라이브하우스 문화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60년대부터 쌓아올린 일본 밴드의 연주력 내공 또한 점차 무르익어가며 사디스틱 미카 밴드라는 프로그레시브 락 성향의 밴드도 탄생하기도 했다. 이들의 절륜한 연주력은 외국에서도 인정받으며 黒船라는 앨범은 영미권에서 발매되는 등 외국 진출의 발판이 마련되기도 했다. 카르멘 마키, 요닌바야시 등의 프로그레시브의 대성기 또한 이맘때. 이후 The Alfee(해산 및 활동중지 없이 지금도 멤버들의 솔로활동과 병행해 활동 중이다.), LAZY와 같은 기라성과 같은 밴드들이 등장하면서 일본 락은 점차 주류 음악으로 자리잡게 된다.

1978년에는 쿠와타 케이스케가 이끄는 일본 국민 밴드 사잔 올 스타즈[9] 가 勝手にシンドバッド를 발표하면서 충격적인 데뷔를 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오다 카즈마사가 이끄는 Off Course가 2인조 포크 그룹에서 5인조 록밴드로 변신을 가하여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들의 등장을 기점으로 일본 락은 완연한 일본 음악의 메이저로 진입하게 된다. 대략적으로 이 1970년대 중반의 시기를 제1차 밴드붐이라고 부른다.

1970년대 일본 음악을 상징하는 시티 팝 또한 록의 흐름의 일종으로 생겨난 장르다. 상기한 핫피엔도의 멤버였던 오타키 에이치A LONG VACATION이라는 역작을 통해 시티팝의 개막을 알리고 야마시타 타츠로라는 뮤지션으로 하여금 꽃을 피웠다고 평가받는다.

비단 록뿐만이 아니어도 이들이 남긴 유산들은 다양한 장르르로 영향력을 뻗어나갔는데, 핫피엔도의 호소노 하루오미와 사디스틱 미카 밴드의 타카하시 유키히로 둘은 떠오르는 키보디스트 사카모토 류이치를 발굴하며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로 하여금 일렉트로닉 뮤직의 발전을 꾀한 바 있었고, 플라스틱스, P-MODEL, 젤다[10] 등의 뉴웨이브, 테크노 밴드들 또한 록의 자양분을 받으며 일본 록은 일본 가요계 전체를 통틀어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3.4. 1980년대[편집]


1980년대 일본 록 전성시대의 출발은 메탈 음악이었다.[11] LAZY 출신의 일본 최고의 기타 히어로인 타카사키 아키라와, 일본 메탈(보통 재패니즈메탈을 조금 줄인 쟈파메탈로 불렸다)계를 대표하는 보컬리스트 니이하라 미노루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LOUDNESS[12], 일본을 넘어선 세계적인 보컬리스트 겐키 히토미와 거물 기타리스트 야마모토 쿄지가 이끌던 VOW WOW[13], 건즈 앤 로지스와 함께 투어를 돌기까지 한 E.Z.O, 사카모토 에이조라는 거물급 보컬리스트를 주축으로 한 ANTHEM 등의 전설급 밴드가 속출하였고, 이들은 해외 진출까지 하며 쟈파메탈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한편 일본 국내에서는 거물 보컬리스트 히무로 쿄스케와 초일본급 기타리스트 호테이 토모야스가 이끌던 슈퍼밴드 BOØWY[14]가 등장하였다. 보위는 1985년에 인기 밴드로 올라선 후 불과 3년만에 해산을 선언하며 일본 전역에 큰 충격을 안기기도 하였다. 보위는 일본 락의 판도를 완전히 뒤엎어 버렸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으며, 90년대 J-ROCK을 대표하는 LUNA SEA, L'Arc~en~Ciel, GLAY 세 밴드 모두 보위의 후계 밴드라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보위와 함께 또 다른 중요한 밴드로 일본 펑크 락의 레전드 블루 하츠가 1987년 일본 음악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평가받는 The Blue Hearts를 발매하면서 데뷔하였다. 블루하츠는 이후 JUN SKY WALKER(S), UNICORN, THE BOOM[15]과 함께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의 제2차 밴드붐을 이끌었으며 상기 밴드들은 밴드붐 4천왕이라 불리면서 90년대 초반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일본 사회의 버블과 맞물린 이 시기의 2차 밴드붐은 블루하츠를 중심으로 한 펑크 락이 중심이었으며, 이러한 펑크 붐은 90년대의 Hi-STANDARD를 중심으로 한 멜로코어 열풍, 00년대 MONGOL800을 중심으로 한 청춘 펑크 열풍으로 이어진다.

이 외에도 코무로 테츠야의 그룹으로 유명한 TM NETWORK, 여성 보컬 놋코를 전면에 내세운 레베카, 포크 락의 레전드 안전지대, 빙계의 대선배인 TUBE 등의 밴드들 역시 히트곡을 연발하면서 80년대 일본 락씬의 인기를 견인하였다. 사잔 올 스타즈 역시 1985년 활동 정지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일본 국민 밴드라는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또한 DEAD END[16], 세이키마츠, 닌겐이스 등 독특한 스타일을 추구한 밴드들도 나타나서 일본 음악계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44MAGNUM, ZIGGY 등의 밴드들 역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또한 XBUCK-TICK을 중심으로 하여 소위 '비주얼계'라고 하는 화려하게 분장한 밴드들이 등장한 것 역시 이때부터였다.[17] 비주얼계의 전성시대는 1990년대였으나, 이미 1989년 X의 BLUE BLOOD 앨범의 히트를 기점으로 메이저에 상당히 지분을 늘려나가고 있었다. 기행으로 알려진 근육소녀대도 활동 개시 시기상으로는 이들과 비슷하며, 이들과는 사이가 나쁜것으로 알려져있다.

여성 멤버들로만 결성된 걸즈 록이라는 또다른 조류 또한 80년대를 기점으로 대성하기 시작했다. 특히 PRINCESS PRINCESS는 걸즈 록을 설명하는데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당시 독보적인 밴드였으며 이후로 SCANDAL 등 부도칸 공연을 성사시키는 걸즈 록 밴드들 또한 다수 등장함에 따라 하나의 명실상부 조류로서 안착하게 된다.

1989년 헤이세이 시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하드 록을 대표하는 최고의 인기 밴드인 B'z[18], 그리고 일본 혼성 밴드의 시초격으로 여겨지는 LINDBERG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1990년대 이후 나올 밴드들에게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끼친 싱어송라이터가 있는데, 바로 오자키 유타카. 그는 밴드로 활동한 경력은 없으나 적극적인 당대 영국, 미국 록 풍토를 적극적으로 적용한 음악 색깔, 10대의 감성이 가득찬 자아성찰적 가사로 당대의 청소년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그의 음악을 듣고 자란 청소년들이 성장하여 밴드를 결성하게 되고, 오자키가 추구하였던 모던 록과 자아성찰적이고 진실된 사랑을 추구하는 가사를 그들의 음악에 담게 된다. 즉 90년대의 밴드 붐이 일어나는데에 오자키의 음악이 무시하지 못할 기반을 세워놓았다고 볼 수 있다.


3.5. 1990년대[편집]


일본 음악의 최고 황금기이자 밀리언셀러의 시대였던 1990년대는 동시에 일본 록의 최전성기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밴드 붐의 시작은 B'z, WANDS, ZARD, T-BOLAN 등을 중심으로 하는 BEING이 선도하였다. 앞서 말한 B'z, WANDS, ZARD, T-BOLAN을 비롯하여 이미 자리 잡은 TUBE, 솔로 가수인 오구로 마키, 후배격인 DEENFIELD OF VIEW 등등 어마어마한 라인업을 앞세워 1991년에서 1994년까지 최전성기를 누렸으며, 빙 음악의 열풍은 사회현상으로까지 번져나갔다. 빙 붐이 최절정이었던 1993년 오리콘 싱글 주간 차트는 단 4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빙 아티스트가 1위를 차지하였고, 연간 매상 TOP 10의 절반을 빙 아티스트가 차지하였다. WANDS와 ZARD로 대표되는 소프트 록을 중심으로 한 빙 음악은 90년대 초반 일본을 상징하는 하나의 현상으로 남았다.

90년대 중반에는 미스터 칠드런스핏츠를 중심으로 한 모던 락 계열의 컬리지 락 밴드들이 강세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JUDY AND MARY, My Little Lover, 샤란Q[19], 우루후루즈, the brilliant green, MOON CHILD 등의 밴드들이 활약하면서 인기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밴드 열풍의 중심에 서있던 미스터 칠드런은 이른바 '미스치루 현상'이라고 까지 불리는 사회 현상으로까지 번져나갔으며, innocent world, Tomorrow Never Knows와 같은 국민 가요들을 배출해내면서 이 시대의 상징으로 남았고, B'z, 사잔 올 스타즈와 더불어 일본 3대 국민 밴드로 불리게 되는 영예를 안게 된다. 미스터 칠드런과 더불어 이 계열의 양대산맥이라 할만한 스핏츠는 90년대 중반 이후 ロビンソン, チェリー, 空も飛べるはず를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정상급의 밴드로 떠올랐다.

X와 X의 기타리스트면서도 솔로로도 성과를 거둔 hide를 중심으로 한 비주얼계의 열풍 역시 90년대 일본 락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X의 후계 밴드 중 LUNA SEA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LUNA SEA 이외에 Malice Mizer, SHAZNA, La'cryma Christi, FANATIC◇CRISIS의 네 그룹은 비주얼계 4천왕으로 불리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외에도 쿠로유메는 비주얼계 아티스트들 가운데 총 음반 판매량 5위(531만장 판매)를 기록하면서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큰 성공을 했으며, 페니실린과 같은 밴드들도 인기를 끌었다.

1997년부터는 GLAY[20]L'Arc~en~Ciel을 중심으로 보위의 후계 그룹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글레이와 라르크 앙 시엘은 90년대 초반에는 비주얼계의 영향력 하에 있었으나 곧 탈피하였고, 1980년대 보위가 들려주던 하드 록 사운드와 유사한 음악을 들려주면서 90년대 후반 락씬을 견인하였다. 90년대 후반 비주얼계적인 요소가 약해진 LUNA SEA 역시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여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1/3의 순수한 감정으로 유명한 SIAM SHADE 역시 이러한 흐름에 몸담은 밴드 중 하나였다.

한편 1990년대에는 이른바 '록킹온계'라고 불리는, ROCKIN'ON JAPAN 잡지를 중심으로 한 인디밴드들의 활동 역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the pillows, BLANKEY JET CITY, 엘리펀트 카시마시, THEE MICHELLE GUN ELEPHANT, 서니 데이 서비스 등의 전설적인 밴드들이 이러한 흐름을 선도하였고, 후배격인 쿠루리, 넘버 걸, 슈퍼카의 세 밴드는 이른바 97세대로 불리면서 일본 인디씬을 견인하였다.

이중에서도 글램 락적인 요소를 선보였던 THE YELLOW MONKEY[21]는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하여 밀리언 셀러를 배출해내기도 하였다. 멜로펑크 열풍을 불러온 Hi-STANDARD 역시 90년대를 대표하는 밴드였으며 99년 앨범 Making the road는 인디즈 앨범으로 65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당시 인디즈 최고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 쿠로유메키요하루도 펑크락 밴드 SADS를 결성해, 싱글 TOKYO로 99년 오리콘 싱글차트 78위를 기록했다.

이러한 1990년대 초반 빙붐 - 중반 모던 록/비주얼 록 - 후반 라르크/글레이까지를 통틀어 제3차 밴드붐이라고 분류한다.

반면 당시 일본 메탈씬은 그야말로 암흑기나 다름없었다.[22] 라우드니스는 계속되는 멤버교체를 겪다가 결국 리더 히구치 무네타카가 탈퇴를 하였고, ANTHEM과 VOW WOW는 해체했으며, 세이키마츠는 뜬금없이 받았다. 메탈이 아닌 다른 장르를 시도하는 앨범을 내어 팬들의 외면을 받았다. X 출신의 멤버 TAIJI의 밴드 D.T.R 도 1집은 나름 성과를 얻었으나[23] 2집은 그야말로 처참하게 실패했다. 굳이 이런 레전드급 밴드들 말고도 수많은 헤비메탈 밴드들이 활동중지 및 해체를 발표하였고, 이렇게 일본 메탈의 시대는 저무는 듯 했다.

하지만 일본의 메탈 뮤지션들은 어떻게든 메탈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고 그렇게 탄생된 팀들이 ANIMETAL, 섹스 머신건즈이다. 이들은 각각 메탈을 일반 대중들에게도 알리기 위해 인기많은 애니송들을 메탈로 편곡하는 방법(애니메탈)을 사용하기도 하고, 재미있는 가사와 코믹한 컨셉으로 메탈에 대한 대중들의 진입장벽을 낮춰주기도(섹스 머신건즈) 하였다. 특히 만화 시티헌터의 TV 스페셜 오프닝을 맡았던 섹스 머신건즈는 전위적인 퍼포먼스로도 유명한데, 일례로 POP HILL 98' 콘서트에서 미발표곡 'Fire'[24]를 연주하는 도중 입에 머금은 알콜을 횃불에 뿜어 불쇼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들 끝에 현재 일본에서는 메탈 장르가 다른 국가에 비해서 상당히 잘 나가는 편이다. 다만 hyde의 인터뷰에 의하면 J-Rock 정도는 괜찮지만 메탈 밴드가 유명한 장소에서 공연하여 매스컴을 타는 것을 높으신 분들이 상당히 껄끄러워한다고 한다.[25]


3.6. 2000년대[편집]


화려한 1990년대를 장식한 일본 록은 2000년대 중반까지도 일본 음악의 최고 인기 장르로 위치하였다. 그 선두주자는 MONGOL800을 필두로 하는 청춘 펑크붐이었다. 2001년 발매한 MONGOL800의 MESSAGE 앨범의 小さな恋のうた, あなたに와 같은 수록곡들이 알음알음 방송에 노출되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하더니 2002년에 들어와 폭발적인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무려 27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이는 일본 인디즈 최고 판매량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26] 블루 하츠의 감성을 하이스탠다드 스타일의 멜로코어로 해석했다는 평을 듣는 MONGOL800는 이른바 10대의 공감을 사는 가사를 핵심으로 하는 청춘 펑크 열풍의 선봉장 역할을 하였고, ROAD OF MAJOR[27], 175R, FLOW, 가가가SP, 긴난보이즈와 같은 청춘 펑크 밴드들이 연속으로 흥행하면서 2000년대 초반을 뒤흔들어 놓게 된다.

이러한 청춘 펑크 열풍과 더불어 BUMP OF CHICKEN을 중심으로 한 시모키타자와계의 기타 록 밴드들 역시 큰 인기를 차지했다. 범프 오브 치킨의 天体観測을 시작으로 ASIAN KUNG-FU GENERATION, 레미오로멘, ACIDMAN 등의 밴드들이 큰 인기를 누렸으며, 이들 시모키타계 밴드들은 모두 록킹온계와 그 궤를 같이 한다. 하이스탠다드계의 멜로코어계 역시 엘르가든, 10-FEET 등의 밴드들이 큰 인기를 누렸다. 이외에 메이저 록씬에서는 포르노 그라피티와 LOVE PSYCHEDELICO가 큰 인기를 누렸다.

한편 1990년대부터 활동해오던 비주얼계 밴드들과 모던 락 밴드들도 2000년대 초반 까지는 상당히 선전하였다. JUDY AND MARY는 2000년 해체를 앞두고 발매한 베스트앨범 'FRASH'가 오리콘 연말 앨범차트 6위를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고, 라르크 앙 시엘도 Real 앨범이 밀리언셀러를 달성하며 식지않는 인기를 보여주었고, GLAY의 경우는 베스트 앨범 <DRIVE-GLAY complete BEST>이 무려 더블 밀리언을 달성하였으며, 그밖에도 전위적인 코스프레를 선보였던 Psycho le cemu가 싱글 '愛の唄'로 매우 주목받았고, FANATIC◇CRISIS 또한 이른바 '비주얼계 4대천왕'으로 엮였던 경쟁 밴드들 가운데에서 그나마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추풍의 광시곡으로 큰 인기를 얻었던 비주얼계 밴드 라파엘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카즈키가 각성제 과다복용으로 인해 쇼크사한 소식이 알려지면서 큰 충격을 불러왔고, 비주얼계 밴드들은 잠시동안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나마 동원 면에서도 인기가 굳건했던 비주얼계 밴드는 도쿄 돔 공연까지 성사시킨 the GazettESID 정도.

200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는 90년대 후반 드래곤 애쉬RIZE를 중심으로 소개되었던 뉴메탈 음악들이 일본에서도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고 뉴메탈의 일본식 변주라 할 수 있는 믹스처 록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믹스처 록 장르는 ORANGE RANGE를 대표로 크게 히트하였고 특히나 오렌지 렌지는 SEKAI NO OWARI 등장 이전 최후의 일본 스타밴드라 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오렌지 렌지 이외에도 HY와 Aqua Timez, UVERworld, SID와 같은 밴드들이 큰 인기를 얻었으며, 맥시멈 더 호르몬과 같은 밴드는 영미권 스타일의 하드코어한 사운드로 크게 히트쳤다.

대략적으로 청춘펑크 붐과 믹스처록 붐를 중심으로 한 2000년대 초중반을 제4차 밴드붐이라고 일컫는다.

이후 200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음반 시장의 축소와 맞물려 일본 락 시장은 최대 침체기에 접어든다. 이시기에는 RADWIMPS, flumpool 정도를 제외하면 눈에 띄는 신인들도 등장하지 않았고, 3대 국민밴드인 B'z, 미스터칠드런, 사잔 올스타즈와 라르크, 글레이, 스핏츠 등의 중견밴드, 그리고 범프 오브 치킨과 시이나 링고도쿄지헨 정도를 제외하면 많은 밴드들이 앨범 판매량에서 쓴 맛을 맛보아야 했고, 일본 음악의 주도권은 완전히 아키모토 야스시 사단과 쟈니스 사무소를 중심으로 한 아이돌 음악과 EXILE 등의 R&B 음악으로 넘어가게 된다.


3.7. 2010년대[편집]


2010년대에 이르러 쟈니스, AKB 등 아이돌계의 이미지가 악화되고 방송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기존 J-POP 가수들의 입지가 좁아지자 오히려 일본 록에 유리한 상황이 형성되었다. 한편 록킹온계들은 전체적으로 지상파 노출을 극도로 꺼리고 해외 아티스트들과 교류하며 J-POP으로부터 멀어지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기성밴드들이 수입을 늘리기 위해 연달아 지상파에 진출하자 이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오히려 꾸준히 정체성을 유지한 밴드들이 큰 지지를 얻게 되었다.

먼저 비주얼계 아티스트들의 재결성, 프로젝트 붐이 일었다. 특히 쿠로유메는 1999년 해체 이후 11년만인 2010년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복귀 후 발매한 싱글 ミザリー와 アロン은 각각 오리콘 주간차트 6/8위를 차지해 비주얼계 씬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뒤이어 발매한 정규앨범 Headache and Dub Reel Inch도 도모토 츠요시, 고토 마키 등의 쟁쟁한 아티스트들을 제치고 오리콘 주간 2위를 차지해 상업적으로 식지 않은 인기를 재확인하였다. 할리우드에 진출했던 각트도 2010년부터 솔로 활동의 비중을 줄이고, 유럽 지역을 겨냥한 프로젝트 밴드 Yellow Fried ChickenZ를 결성해 활발한 공연활동을 펼쳤다.

2000년대 초 밴드붐 속에서 화려하게 데뷔했으나, 후반에 침체기를 겪으며 앨범판매량 급감을 체감한 중견 밴드들은 각자 다른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범프 오브 치킨은 음악에 팝적인 요소를 더하고 적극적으로 방송에 출연하면서 새로운 팬층을 끌어모았다. <RAY>는 큰 히트를 쳤으나 <Butterflies> 이후 음악성의 큰 변화로 오히려 적잖은 올드팬들이 떠나가기도 했다. 언더그라운드에서 크게 지지를 받아온 syrup 16g은 재결합 후 다시 음악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ONE OK ROCK은 앨범 <人生×僕=> 이후 크게 인기를 끌었고 뒤이어 미국 진출을 시도해 8집 Ambitions의 인터네셔널 버전이 초동 23만을 기록하는 등 순항중이다.

초기 서정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점점 어둡고 신랄한 행보를 보여왔던 RADWIMPS는 OST 전곡을 맡은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다시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28] 신카이 마코토와 작업 이후로 RADWIMPS는 다시 초기의 서정성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2010년대 중반은 일본 락의 재부흥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신인들이 정상권에 진입한 해였다. SEKAI NO OWARI가 발매한 Tree 앨범은 대히트한 싱글들에 힘입어 50만장에 육박하는 판매고를 올렸고 이는 일본 최대 규모 공연장인 닛산 스타디움 입성으로 이어졌다. 게스노키와미오토메 역시 유튜브를 중심으로 화제를 모으면서 인기를 끌었다.[29]back number는 서정적인 락을 선보이며 큰 인기를 얻었고 MAN WITH A MISSION는 독특한 컨셉을 바탕으로 인기 밴드로 거듭났다.

해외 진출 쪽으로 보면 BABYMETAL의 선전이 두드러졌다. 데뷔 초기부터 태생적으로 아이돌 그룹으로 보냐 록/메탈이냐 의견이 분분했지만, 2013년부터 라이브 백밴드인 카미밴드가 정식으로 참여, 부도칸 공연 이후 2014년부터는 썸머 소닉이나 LOUD PARK 등의 일본 국내 락 페스티벌, 2016년에 도쿄돔 공연을 성사하는 한편, 영국의 Sonisphere Festival, Download Festival 등 해외의 여러 유수 락 페스티벌에 출연, 레드 핫 칠리 페퍼스건즈 앤 로지스 등과도 협연을 하는 등 해외에서의 입지가 탄탄해졌다. 2019년 발매된 3집은 빌보드 차트 200 13위에 랭크되면서 현재 일본 아티스트들 중에서는 가장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외에 키노코 테이코쿠, SHISHAMO, UNISON SQUARE GARDEN, \[Alexandros\], KANA-BOON, amazarashi, WANIMA, Suchmos, MY FIRST STORY, the peggies 같은 밴드들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러한 신진 밴드들의 약진은 제5차 밴드붐이라 불리고 있다. 일본 내 국제 락 페스티벌로는 후지 록 페스티벌과 함께 양대산맥으로 꼽혀왔던 섬머 소닉 페스티벌이 자국 밴드만 공연하는 Rock In Japan과 일정이 겹치게 되자 관객감소를 우려하여 일정을 미뤄 피해간 일은 일본 락씬의 번창을 상징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하지만 불경기가 악화되면서 일본 메탈씬은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중이다. 그나마 하드코어/메탈코어밴드들이 헤비니스씬의 명맥을 잇고 있는 중. 애니메이션 씬으로 비교하면 2000년대 까진 그럭저럭 명맥을 이어오며 수작도 간간히 내던 거대로봇물들이 2010년대 들어서서 건담 시리즈트랜스포머 시리즈 같은 시리즈물들을 제외하면 신작들의 평가는 물론 매출까지 시원찮아진 것과 같은 현상이다.

또 악재가 여럿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2014년 일본 모던 록의 대부 사쿠마 마사히데가 타계한 일이 대표적이었다. 사쿠마는 Alexandros 등의 신진 밴드를 발굴하면서 자체적인 음악활동을 활발히 추진하던 상황이었기에 많은 애도를 받았다. 그밖에도 인기 밴드 샤란Q가 활동을 재개했으나, 보컬 층쿠의 후두암으로 성대적출이 이뤄져 안타깝게 활동을 중단했다.

이러한 악재들 속에서도 2010년대 후반은 드라마와 영화 주제가 타이업에 힘입어 Official髭男dism, King Gnu 두 밴드가 스타덤에 올랐다. 2019년 일본 음악계 최고 히트곡은 의심할 여지없이 Official髭男dismPretenderKing Gnu白日이라고 할 정도로 갑작스레 큰 인기를 얻었다. 그 외에도 여성 솔로가수인 아이묭은 락 음악을 기반으로 현 일본에서 가장 대중들에게 주목받는 아티스트 중 한명으로 올라섰다.

고참 뮤지션들 중에서는 L'Arc~en~Cielhyde가 12년만에 솔로로 컴백한 것이 단연 돋보였다. Hyde는 정규앨범 'Anti'가 오리콘 앨범차트 3위를 기록하면서 건재함을 보였고, 활동곡들 대다수를 영어 곡으로 포진해 해외공연을 적극적으로 타진했다. LUNA SEA도 U2, 롤링 스톤즈 등등의 프로듀서였던 스티브 릴리화이트와 협업한 앨범 'CROSS'가 오리콘 차트 3위를 차지하며 뜨거운 반응을 모았다. GLAY의 경우는 2019년 한일 무역 분쟁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방한공연을 실시해 한국 팬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


3.8. 2020년대[편집]


2020년 초부터는 빙 계열의 WANDS가 주목할만한 행보를 보였다. 해산 20년만인 2019년 재결성된 WANDS는 새 보컬 우에하라 타이시를 영입해 真っ赤なLip를 발매하고, 연달아 발매한 싱글 '抱き寄せ 高まる 君の体温と共に'가 타이업 등의 지원을 받아 각각 오리콘 차트 14위/3위의 기록을 차지했다. WANDS는 과거 팬들을 겨냥한 예전 히트곡을 리메이크하여 재기에 성공했다. 새 보컬 우에하라는 기존 보컬의 음색과 비슷하여 기존 팬들이 우에하라의 옛 노래를 들어도 거부감이 없다.

한편 LUNA SEA도 2019년에 이어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건담 시리즈의 40주년을 기념해 협업한 음악 앨범들 중 "THE BEYOND GUNPLA 40th EDITION THE BEYOND X MS-06 ZAKU II Ver.LUNA SEA" 싱글은 밴드 역사상 20년만에 오리콘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또 디지털 싱글 'Make a Vow'를 공개해 코로나 19 시대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컨셉으로 제작한 뮤직비디오가 호평을 얻었다.

하지만 전세계적인 코로나 19 사태로 일본 록 씬 역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4대 돔 투어가 예정되어 있던 SEKAI NO OWARI는 결국 투어를 2022년으로 연기하였고 월드투어를 진행하며 활동을 재개한 DIR EN GREY는 해외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투어가 중도에 중단되었으며, SCANDAL은 첫번째 한국 단독 콘서틀 계획했으나, 코로나19 사태로 무기한 연기되었다. ONE OK ROCK 또한 두번째 방한공연을 준비중이었으나 한국의 코로나 확산 문제로 취소되었다. 각각 데뷔 20주년/30주년을 맞은 각트L'Arc~en~Ciel도 연초부터 대규모 콘서트 투어로 활동재개를 꾀했으나, 이들 역시 일본 내 코로나 문제로 인해 중도에 투어를 중단해야만 했다. 이러한 라이브 시장의 부진으로 인해 코로나 기간 동안 온라인 콘서트가 많이 열렸고 이 틈을 타서 음원 서비스를 시작하는 아티스트도 많아졌다. 그리고 코로나 사태가 어느 정도 잠잠해진 후에도 현장과 온라인 콘서트를 병행하는 케이스가 늘어났다.

코로나 이후 시티팝의 재발굴[30]을 시작으로 전세계적으로 J-POP의 인지도와 평가가 과거에 비해 올라가면서 일본 록 또한 주목을 받게 됐는데 특히 2022년 일본 인디밴드씬을 잘 고증한 봇치 더 록!이 대흥행을 일으키면서 일본 밴드씬에 대한 주목도 이루어졌다. 또한 한국 한정으론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즈메의 문단속 등의 일본 극장판 애니가 흥행하면서 해당 영화의 주제가를 부른 밴드의 인지도가 올라갔고 이 중 슬램덩크의 음악을 맡았던 10-FEET의 경우 무대인사 차 내한을 했고 이때의 호평을 기반으로 다시 단독 내한공연이 잡히는 등 큰 수혜를 받았다.


4. 기타[편집]


  • 일본 음악계는 록밴드에 의해 이끌어져 왔다는 점에서 일본 대중음악계는 감성 발라드와 아이돌 댄스곡이 중심이 되는 한국 음악계와는 상당히 다른 경향을 보이는 것도 특징이다.[31] 심지어 힙합이나 댄스 등 다른 음악을 하는 팀들도 록 밴드 경험이 있는 경우가 많으며 아이돌 프로듀서로서 한때 이름을 날렸던 층쿠도 샤란Q라는 록 밴드 출신이다. 90년대에 '코무로 붐'을 일으켜 사회 현상을 만들어낸 프로듀서 코무로 테츠야 역시 록 밴드인 TM NETWORK의 멤버였다. 일본 일렉트로닉계에 엄청난 파급력을 미친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역시 록 밴드 출신들과 사카모토 류이치가 합심해 만들어진 밴드. 내가 주목받는게 좋아서 밴드 한다고 하면 보컬과 기타만 몰리고 주목받는 한국의 음악 문화와는 달리, 일본 특유의 조직 문화, 개인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하는 것을 중시하는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에도 밴드 음악이 어느정도 맞기때문에 스쿨밴드나 사회인 밴드를 즐기는 저변도 상대적으로 넓고 대중매체에도 밴드물이 가끔씩 나와준다.

  • 일본 록 씬이 이처럼 흥하게 된 원인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면 다른 국가들과 다른 점이 크게 2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록과 대척점에 있는 제도권 팝씬이 매우 폐쇄적이고 특정 집단이 이권을 독점하고 있다는 점과, 둘째는 록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탄압이 없었다는 점이다. 일본 대중문화, 그중에서도 J-POP씬은 쟈니스 사무소 , 바닝프로덕션으로 대표되는 소수의 기획사 집단이 독점하고 있고 방송국과의 유착관계도 단단해 외부의 진입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이 역설적으로 자유로운 영혼들이 J-POP에서 기획사 시키는 대로 하기보단 자기 마음대로 음악을 할 수 있는 록 밴드로 꾸준히 진입할 수 있는 동인이 된다. 둘째로, 일본은 기독교가 극소수 마이너 집단이기 때문에 이들이 주도한 음악과 악마주의같은 극단적 문화탄압이 없었고, 70년대 박정희 정권때처럼 기타들고 노래만 부르면 일단 잡아가두고 대마초 피웠다고 자백을 강요한 정치적 문화탄압의 역사도 없다. 이렇다보니 일본의 기성세대들은 자녀가 록 음악을 한다고 해서 막거나, 나쁜 길로 빠졌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적다. 이런 행운덕에 록 음악이 굳건하게 자기 위치를 유지하고 지금도 신인들이 공급되고 있는 것이다.

  • 악기 브랜드로 봐도 차이를 알 수 있는데 한국의 기타 브랜드들이 범용기타를 제작한다고 하면 거의 펜더 빈티지쪽에 기울어져 있는게 특징인데 일본의 브랜드들은 록, 메탈에 기울어져 있다. 발라드에 많이 쓰는 음색을 가진 소위 말하는 세션톤 악기를 한국에서는 선호하지만[32] 일본에서는 소위 말하는 씹덕톤, 혹은 텔레톤 기타로 불리우는 고음이 강조된 악기를 선호한다. 그래서 까랑까랑한 깨방정톤의 대명사 Telecaster가 유독 일본에서 인기가 많고, 일본의 메이저 악기사 ESP,아이바네즈등을 주로 메탈기타 취급하지만, 써나 탐 앤더슨 같은 악기는 일본인들이 잘 쓰지 않는다. 현재는 미국쪽도 씬의 추세가 범용기타화 되고 힘도 빠지는 추세라 스트랫타입 기타를 많이 내놓는데, 여기서도 일본 악기사의 기타들은 기본 톤에 펜더 빈티지물이 거의 빠져있다.

  • 애니메이션 음악에 비주얼계 출신 밴드를 쓰는 경우도 많다. 기동전사 건담 더블오의 주제가를 부른 라르크 앙 시엘이나, 흑집사의 주제곡을 부른 SID 등등. 반면 데스노트처럼 맥시멈 더 호르몬 같은 코어락 계열 밴드가 주제가를 맡는 경우도 간혹 있다.[33]

  • 유독 일본 록음악에서는 베이스가 돋보인다는 사람들도 있다.[34][35]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일본에서는 밴드의 멤버를 구할 때 베이스가 잘 구해지는 편이라고 한다.

  • 하드코어 펑크/메탈코어 씬의 경우 일본과 가장 밀접해있는 한국과의 교류도 상당히 깊은 편이다. 씬 특성상 원래 국적이나 인종을 가리지 않고 후드/크루로 엮이긴 하는데, 굳이 교류가 가장 많은 나라를 꼽자면 한국이다. 심심하면 한국 밴드와 콜라보 공연을 하거나 앨범을 내거나 한다.[36] 한국 내의 진정한 J-ROCK의 골수 팬들은 여기에 포진해 있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37] 그나마 대중적인 포스트 하드코어나 이모코어와 같은 밴드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활동 수가 적은 익스트림 메탈보다도 팬층이 더 두꺼울 정도이다. 실제 하드코어 밴드들은 계속해서 신인밴드가 늘고 신보도 많이 나오지만, 전술했듯 메탈 밴드들은 다시 하향세를 겪고 있다.

  • 한국인이 일반적인 록 음악을 듣는다치면 서양 쪽은 들어도 일본 쪽은 관심없거나 하는 경우가 많은데[38], 하드코어 팬층은 일본 하드코어도 같이 듣는 경우가 꽤 많다. 당연한 얘기지만 일본의 하드코어 팬들도 한국의 하드코어 밴드들을 상당히 많이 듣는다. 특히 2000년대의 Vassline과 MY PROOF의 스플릿 앨범은 한일 양국에서 레전드 스플릿 앨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2010년대에 들어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한국밴드 End These Days의 곡 Solace엔 Cristal Lake의 보컬인 Ryo(키노시타 료)가 피쳐링을 해줬고[39], End These Days의 보컬 송상율[40] 역시 일본밴드 WINDRUNNER의 곡 Sakura와 EARTHISTS의 곡 Leaves에 피쳐링을 해주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혐일/혐한분위기는 이 씬에서는 그냥 딴나라 얘기.[41][42]

  • 미국 다음으로 록 씬이 제일 큰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심지어 영국보다도 크다. 핀란드는 메탈이 대중적이라곤 하지만 경제 규모 때문에 약하다. 현재 일본의 록 씬은 굉장히 규모가 거대하여, 수천개의 록 밴드들이 활동하며 공연하고 있고 전국의 공연 클럽 숫자, 그리고 그 록 음악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어마어마하다. 또한 인디씬의 경우도 음악성만 있다면 명성과 팬, 그리고 상당 규모의 음반 판매량을 기대할 수도 있다. 일본에선 아예 인디즈라는 나름 독자적인 인디씬도 형성되어 메이저 못지 않은 활동을 할 수도 있을 정도이다. 이 때문에 앨범 판매량이 시원찮아도 공연기회를 많이 잡으면 충분히 널리 이름을 알릴수 있을 정도가 되며, 대형 록 페스티벌에 헤드라이너로 공연할수도 있다.[43] 이는 한국 인디밴드에게도 마찬가지인지라, 장기하와 얼굴들같이 일본에서 어느 정도 알려진 인디 밴드의 경우 일본 공연을 성황리에 마친 바 있다.


5.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5 01:59:20에 나무위키 일본 록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이 시기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에서도 재즈풍의 음악이 대 유행했다. 당시 슈퍼스타였던 무용가 최승희가 재즈 음반을 취입할 정도였다.링크[2] 일본에서 이민 온 사람들의 후손이 많은 편이다.[3] 1950년대 한국에 맘보차차차 붐이 불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4] 한국도 1960년대에는 신중현을 위시한 록음악과 밴드사운드가 활발했었다. 그러나 유신개헌 이후 본격적으로 퇴폐문화를 추방하려는 움직임 가운데 대마초 파동 때 록음악 뮤지션들을 거의 말살 수준으로 퇴출시키면서 록음악은 1980년대 중반까지 암흑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암흑기 동안 가요제 출신의 대학 그룹사운드는 차라리 아마추어가 프로로 가는 수준이었고, 산울림이나 송골매같은 인기밴드 몇몇만 있었을 뿐이었다.[5] 일본의 군국주의파시즘과 다르다는 평가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파시즘은 대중적 지지가 분명히 있었지만 일본의 군국주의는 사실상 권력자들 사이에서 치고박고 쿵짝이 맞아서 결정된 것이고, 개인들은 그저 대세에 따라 휩쓸려 다녔다.[6] 사실 엔카라고는 하지만, 이미 엔카가 등장한지 수십년이 되었고, 재즈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엔카는 거의 반쯤 재즈같은 음악이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문서 참조.[7] 이 점은 한국에서 부러운 점이라 할 수 있었는데, 한국이 낮은 경제력과 검열로 인해 외부의 문화가 잘 유입되기 힘들었던데 반해 이들은 당시 경제력도 있고 검열도 약했기 때문에 외국의 문화가 실시간으로 유입된다. 심지어 1966년에는 비틀즈도 일본으로 투어를 온 적이 있다.[8] 당시 일본 GS 밴드들의 이름은 일본식 가타카나 발음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한국어로 옮길때 엄청나게 발음이 괴상해지는 경우가 많다.[9] 활동 중지 선언만 했을 뿐인데 일본 주가가 오르내렸을 정도의 인기를 가지고 있으며, 일본 유명인 중 다수가 이들의 팬임을 밝히고 있다.[10] 여성 멤버들로만 결성되어 최초의 일본 걸즈 록으로도 꼽히기도 한다.[11] 일본에서는 하드록과 메탈을 싸잡아 HR/HM이라고 통칭했다.[12] Crazy Night라는 싱글이 빌보드차트 74위까지 오르며 동양권에서 최초로 빌보드 차트에 진입한 록 밴드가 되었다.[13] 영국에 음반이 발매되었을 때, 음악만 듣고 영어권 밴드인줄 알았다가 일본 밴드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14] 비주얼적 컨셉이나 창법 등에서 이후 등장한 비주얼계 장르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래 DEAD END와는 달리 메탈 계통의 음악을 하는 비주얼 록 밴드보다는 모던록 성향의 밴드들이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LUNA SEA 역시도 히무로 쿄스케의 뽕삘나는 창법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5] 보컬로이드 KAITO의 커버로도 유명한 시마우타(島唄)가 대표곡이다.[16] 쿠로유메의 키요하루, BUCK-TICK의 사쿠라이 아츠시 등이 영향받았음을 공언하고 있으며, LUNA SEA 등도 언급만 안 할 뿐 다대한 영향을 받음.[17] 이러한 스타일은 이들 전에도 세이키마츠와 D'ERLANGER 등의 밴드들이 존재하였다. 그걸 대중화시킨 사람이 바로 이들이라는 것.[18] 일본 최고의 인기 록밴드로서, 통산 8000만장에 이르는 판매량을 기록하여 일본에서 가장 많은 음반 판매량을 가진 밴드다.[19] 모닝구무스메의 프로듀서 층쿠가 보컬이자 리더로 활동한 밴드[20] 사실 글레이도 X-JAPAN히데요시키가 눈여겨보아서 메이저 데뷔를 요시키의 음반사에서 했다. 때문에 이들이 자신들의 성향을 밝힌 적이 없어도 비주얼계로 분류하는 의견이 어느정도 있다.[21] 결성은 80년대 중반에 이뤄졌을 정도로 매우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밴드이다. 보컬 요시이 카즈야의 카리스마적인 캐릭터 또한 밴드의 인기를 좌지하는 요소 중 하나.[22] 사실 일본 메탈씬 뿐만 아니라 서구권에서도 너바나의 등장으로 시작된 얼터너티브 록 붐으로 인해 메탈이 주류에서 밀려난 시기였다.[23] 사실 메탈의 암흑기 시절에 낸 것 치고는 매우 좋은 성적을 거둔 앨범이다.[24] 2년 뒤 2000년에 뱔매된 정규3집 BBQ-Michel에 수록된다.[25] 덤으로 보수적이라고 깠다.[26] 음반 시장이 축소된 현 시점에선 불멸의 기록이 되었다.[27] 데뷔싱글 大切なもの는 9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인디즈 싱글 최고 판매량 기록을 세웠다.[28] 너의 이름은. 이후에 같은 감독이 연출한 애니메이션 날씨의 아이의 OST도 담당했는데 이 역시 호평일색.[29] 다만 게스오토의 경우 보컬 카와타니 에논의 추잡한 추문이 잇따르며 완전히 몰락했다.[30] 베이퍼웨이브의 방법론에서 파생된 퓨처 펑크는 대체로 시티 팝을 샘플링하고 있다.[31] (쉽게 설명해서) 한국 아이돌 그룹에 속해있던 가수들이 솔로 앨범을 내거나 드라마 OST로 참여할 경우 전부 다 발라드 곡을 부르는데, 일본은 록을 부른다고 생각하면 된다. 때문에 일본 드라마 OST는 록 장르가 굉장히 많다.[32] 특히 고급 악기 수요층인 음악인들의 대부분 수익이 대중음악 세션수당이라, 수입하는것도 써, 타일러, 탐 앤더슨 같은 세션톤 악기를 선호한다 국내에서 카피하는것도 대부분 중음현쪽의 폴피스가 높게 세팅된 전형적인 세션톤 악기.[33] 간혹 하드록 밴드가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맡는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SIN의 오프닝인 Pray를 맡은 LAZY. 그런데 이 경우는 약간 괴랄한데 당시 작품의 음악 담당인 이노우에 슌지가 밴드 키보디스트였던지라...게다가 의외로 이노우에 슌지는 해체 후에 음악 프로듀서로 뛴 경험이 많아서 이후 자기가 회사를 차리고 나서는 여러가지 활동을 한다.[34] 실제로도 상당히 테크니컬한 베이시스트들이 많기도 하고, 주로 저음쪽에서 연주하는 록음악임에도 애니메이션 록 음악들은 베이스가 고음쪽에서 연주하는 곡들도 많다.[35] 카시오페아와 같은 베이스라인이 돋보이는 퓨전 재즈가 인기를 얻은 부가효과로 보인다.[36] 가장 대표적인 작업물이 일본 밴드인 "SETE STAR SEPT"와 한국밴드 "Nahu"의 스플릿 앨범이다. 두 밴드 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장사 안되는 그라인드코어밴드다.[37] 역으로 일본 하드코어 팬들도 한국 하드코어 밴드들을 자주 듣는 경우도 많다. 원체 서로 많이 공연에 앨범에 엮이다보니 한일 하드코어씬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38] 일본도 마찬가지다. 한국 록을 싫어한다기보다는 다른 나라의 록 음악에 밀려서 한국 록의 관심 순위가 떨어지는 것 뿐이다.[39] 현 신세대 양덕들의 한국 하드코어 입문곡이기도 하다. 일본음악 덕후가 Ryo의 이름만 보고 들었다가 한국의 밴드들에게도 매력을 느끼는 신세대 팬들도 생겼다.[40] 해외활동에선 Yul이라고 표기한다.[41] 이는 마이너한 장르 특성도 한 몫 한다. 굳이 음악 뿐만 아니라 이런 좋아할 사람들만 좋아하는 서브컬쳐의 특성상 취향이 다른 같은 나라의 사람보다도 취향이 같은 다른 나라의 사람을 만나는 게 더 삶의 질이 올라가기 때문. 다른 장르에서 비슷한 예를 찾는다면 힙합이 있다. ZEEBRA타이거 JK의 친분은 말할 것도 없고, 잊지마 같은 결과물도 있다.[42] 한국의 멜로코어밴드인 Counter Reset의 뮤직비디오의 댓글에 보컬 최지훈의 사망에 정중히 명복을 비는 일본인 팬들이 보인다. #[43] 이는 전 세계적으로 미디어 문화가 발전하면서 앨범 판매량이 낮아지면서 일본 록 문화의 메리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