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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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대통령실 흰색 심볼.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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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 비서실장 (1948~1960)

이승만 정부


허정 내각

초대
이기붕
제2대
김양천
제3대
고재봉
제4대
유창준
제5대
장일강
청와대 비서실장 (1960)

장면 내각

제6대
김준하
대통령비서실장 (1960~2008)

장면 내각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정부

초대
이재항
제2대
이동원
제3대
이후락
제4대
김정렴
제5대
김계원

최규하 정부


전두환 정부

제6대
최광수
제7대
김경원
제8대
이범석
제9대
함병춘
제10대
강경식

전두환 정부


노태우 정부

제11대
이규호
제12대
박영수
제13대
김윤환
제14대
홍성철
제15대
노재봉

노태우 정부


문민정부

제16대
정해창
제17대
박관용
제18대
한승수
제19대
김광일
제20대
김용태

국민의 정부

제21대
김중권
제22대
한광옥
제23대
이상주
제24대
전윤철
제25대
박지원

참여정부


제26대
문희상
제27대
김우식
제28대
이병완
제29대
문재인
대통령실장 (2008~2013)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초대
류우익
제2대
정정길
제3대
임태희
제4대
하금열
제5대
허태열
대통령비서실장 (2013~현재)

박근혜 정부

제30대
허태열
제31대
김기춘
제32대
이병기
제33대
이원종
제34대
한광옥


제35대
임종석
제36대
노영민
제37대
유영민
제38대
김대기
제39대
이관섭



임종석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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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성동구)
선거구 통합
이세기[1]
김학원[2]

제16대
임종석


선거구 분리
최재천[3]
임종석[4]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성동구 을)
선거구 분리
임종석[5]

제17대
임종석


제18대
김동성




대한민국 제35대 대통령비서실장
임종석
任鍾晳 | Im Jong-seok
[1]
파일:p179568529194392_449.jpg
출생
1966년 4월 24일 (57세)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금산리 신기마을[2]
거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본관
장흥 임씨(長興 任氏)[3]
현직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이사장
재임기간
제16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박원순 시정)
2014년 4월 14일 ~ 2015년 12월 22일
제35대 대통령비서실장
2017년 5월 10일 ~ 2019년 1월 8일
서명
파일:임종석 서명.svg
SNS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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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김소희
자녀
딸 임동아(1997년)[1]
학력
안양서국민학교[2] (전학)
서울묵동국민학교[3] (졸업)
태릉중학교 (졸업)
용문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무기재료공학[4] / 학사)
병역
병역면제 (수형#受刑)
종교
가톨릭 (세례명: 프란치스코)
신체
176cm, A형
소속 정당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6, 17
약력
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3기 의장
청년정보문화센터 소장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원
제16대 국회의원 (초선 / 서울 성동구 /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원내대변인
제17대 국회의원 (재선 / 서울 성동구 을 / 열린우리당)
민주통합당 사무총장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이사장
제16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박원순 시정)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위원장
제35대 대통령비서실장 (문재인 정부)
대통령비서실 외교특별보좌관 (UAE 특임)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특별보좌관
별명
림종석[5], 함박웃음[6], 플이중[7]

1. 개요
2. 생애
2.1. 정치 입문
2.2.1.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위원장
2.3. 2019년 이후
3. 약력
5. 소속 정당
6. 선거 이력
7. 여담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정치인.

전대협 출신으로, 제16·17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줄곧 민주당계 정당에서 활동해오다 박근혜 정부박원순 서울특별시장 밑에서 정무부시장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19대 대선 당내 경선 당시 문재인 캠프에 후보 비서실장으로 합류했고, 뒤이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문재인 대통령의 첫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대통령비서실장에서 퇴임한뒤 바로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 남요원 전 문화비서관, 권혁기 전 춘추관장 등 문재인 정부 1기 참모진들과 함께 2019년 2월 18일,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했다.

2. 생애[편집]


1966년 4월 24일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금산리 신기마을에서 아버지 임세기(任世基, 1936. 7. 5 ~ )와 어머니 경주 김씨(1939. 7. 2 ~ ) 사이의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경기도 안양시로 이주해 안양서초등학교에 재학하다가 5학년 때 서울로 올라와 서울묵동초등학교, 태릉중학교, 서울 용문고등학교(33회),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무기재료공학과(86학번)를 졸업하였다.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무기재료공학과 1학년 때, 노래패에 가담하면서부터 운동권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고, 1988년 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이 되어 1989년 한총련의 전신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일명 전대협 3기 의장을 맡으면서 학생 운동권의 중심으로 활동했다. 전대협 의장이 되면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따른 경찰의 지명 수배를 받게 됐는데 10개월간 갖은 방법으로 도망다니다 결국 1989년 12월 경희대학교에서 체포, 5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문민정부 때인 1993년 특별사면되어 3년 6개월만에 석방되었다.

당시 경찰은 임종석을 검거하기 위해 2계급 특진과 1,000 만원의 현상금을 걸었으며 전국에 10만 장의 수배 전단을 붙였고 연인원 12만명의 경찰을 동원했다. 그런데도 임종석은 신출귀몰, 경찰의 수배망을 따돌리면서 10여 차례의 기자회견과 대학 집회 등에 20여 차례 모습을 드러냈고 임수경의 평양 축전 참가 등을 주도하기도 해서 '임길동'이라 불리기도 했다. 워낙 잘 도망다녀 여장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안경을 쓰고 다닌 정도였지 따로 변장을 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1990년 12월 26일 대법원에서 임수경의 밀입북을 몰래 도와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 판결을 받게되는데,# 유죄판결에 따른 실형으로 인해 공식적 병역사항은 미필이 되었다. 1993년 5월 원주교도소에서 출소한 이후 8월에 한양대학교 4학년에 복학하게 되고, 1995년 8월 대입 10년 만에 졸업을 하였는데 졸업식에서 총동문회장상과 공로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당시 정치사회상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국가보안법 전과자에게 큰 상을 줬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임종석은 전대협 의장 가운데 가장 인지도와 영향력이 높은 인물로, 당시에 이미 2000년대 이후의 정치인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한국 특유의 학벌주의, 서열 문화의 영향도 있었는데, 서연고 위주로 돌아가던 학생운동판에서 한양대생 임종석이 전대협 의장이 되자 학교 명성이 높아졌다며 한양대 측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학총장협의회에서 한양대 총장의 발언권이 세졌고, 대학입시의 합격선이 올라갔다는 얘기마저 돌아다녔다(…). # 어찌 보면 정말 "한국적"인 상황.


2.1. 정치 입문[편집]


1994년 말부터 비정부기구 쪽에서 활동하였다. 가까운 동료들과 만든 청년활동단체인 청년정보문화센터 부소장직을 맡았다.

1995년 모래시계 세대 정계진출 관련 기사들이 많이 나오던 때부터 정계진출 유력 후보로 자주 거론되었다. 그러나 1996년 총선에는 당시 자격이 되지 않아 출마하지 못했고, 이후 1999년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대규모 사면복권 당시 복권이 돼서야 출마 자격을 얻게 되었다.

1999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한창 386세대 운동권 출신 영입이 활발할 때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 서울 성동구 지역구에 출마하여[4] 당시 상대후보였던 4선의 이세기 한나라당 의원을 누르고 당선되면서 정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다만, 임종석 자신은 의외로 전대협 의장 출신이라는 화려한 경력 비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의원은 되지는 못하였는데, 이후 2004년 17대 총선에서도 당선되고, 열린우리당 대변인도 했다지만, 당내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거나 거물급 의원으로는 성장하지 못했다.

정계 입문 후 임종석의 의정활동은 국가보안법 폐지, 북한인권법 제정 반대, 대북 교류사업 등에 주로 초점이 맞춰진다. 초선 의원 시절인 2000년 7월 임종석은 국보법 관련 국회 토론회에 참석해 이 같은 발언을 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보완책으로 간첩죄에 대해 형법상 처벌을 강화하면서 대북 접촉, 통신교류에 대해선 남북교류협력법을 통해 규제하면 된다." 또 2004년 7월에는 의원실 주최로 '국보법 폐지를 위한 간담회'를 열었고, 같은 해 8월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국보법 폐지 입법추진위원모임에서는 "국가보안법은 위헌적이며 반(反)민주악법의 상징이기에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2004년 12월에는 국보법 연내 폐지를 촉구하는 의원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참여정부 당시 대북송금 특검수사에도 적극 반대했는데, 대북송금 사건김대중 정권 때인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에 5억 달러를 불법송금한 사건을 말한다. 2003년 3월, 임종석 등 당시 민주당 소장파 의원이 주축이 된 모임인 '정치를 바꾸는 젊은 희망'은 대북송금 특검 수사 반대성명을 냈다. 같은 해 6월에는 민주당·개혁당(대표 유시민) 소속 의원 61명과 함께 대북송금 특검 수사 마무리를 촉구하는 성명서에도 이름을 올렸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뉴타운 열풍으로 한나라당 김동성 후보에 밀려 낙선하게 되고, 이후 당내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재기를 노렸다. 그리고 민주통합당 출범 당시 당 사무총장에 임명되면서[5] 처음으로 비중있는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문제는 이 당시 임종석이 정치자금법 문제로 재판에 걸려 있었다는 점. 결국 19대 총선 직전 나온 1심 판결에서 유죄가 선고되면서 총선 출마가 좌절되었다. 사실 출마 자체는 할 수도 있었지만, 재판 문제로 인해 당 내에서도 공격이 상당히 많이 나오면서 결국 공천을 반납한 것은 물론 사무총장직까지 사퇴했다. 한명숙 당시 대표가 끝까지 만류했다고 하는데 결국 그는 사퇴를 선택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사무총장으로서 공천권과 관련하여 소위 노이사 공천(친노-이화여대-486 위주 공천)을 주도했다는 공세도 한 몫 했고 실제로도 그런 측면이 강하다. 그가 떠나면서 공석이 된 성동구 을 지역구는 임수경 공천설이 돌았으나, 임수경은 비례대표로 공천을 받았고, 그의 친구인 홍익표 한양대 겸임교수가 지역구를 물려받았다. 그의 사퇴 원인이 된 정치자금법 문제는 2심에서 무죄로 뒤집히면서 최종적으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

2014년 '(사)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해당 재단은 남측 방송을 대리하여 대한민국 내 북한 저작물 이용의 저작권료를 북한에 지불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국가간 저작권을 존중하는 베른 협약에 가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타 국가의 저작권물 이용에 관해서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고 있고,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형평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2014년 지방선거에서 박원순 시장 캠프에서 활약하면서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에 임명되어 2015년까지 재직하였고, 때문에 박원순계의 대표주자 정치인으로 분류되었다.

2014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중도를 지향해야 한다는 뜻이냐"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임종석은 당시 야당이던 새정치민주연합이 "노선이나 정책이 상당히 치우쳐있다"며 "과도하게 사회, 정치적 문제에 집착하고, 국가 운영과 관련된 의지에는 소홀하다"고 지적했다.*

이윽고 2016년 20대 총선 출마를 위해 정무부시장 직을 내려놓은 후 은평구 을 지역출마를 선언하고, 정계의 거물이었던 이재오와 겨뤄서 정치적인 재기를 모색하였는데, 그만 당내 경선에서 무명의 신인이었지만 이미 은평구 내에서 기반을 착실하게 만들고 있었던 강병원 후보에게 패하면서 아예 출마 자체를 하지 못했다. 전대협 의장 출신으로 많은 기대를 받으며 정치에 입문했지만, 18대 총선부터 20대 총선까지 세 번의 선거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면서 10년 넘게 원외에 남게 되었다. 임종석과 함께 국회의원 자리에 도전한 다른 박원순계 정치인들도 기동민을 제외하면 경선과 본선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다.

2.2. 문재인 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장[편집]


그러다가 2017년 문재인 캠프의 비서실장으로 영입되었다. 임 실장은 19대 대선 국면 동안 안정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재인 당시 민주당 전 대표가 삼고초려 끝에 영입을 했다고 알려졌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대선 후보 경선 때 문재인 당시 후보를 상대로 극단적인 네거티브 공세를 퍼부었던 이유를 여기서 찾기도 한다. 다만 유시민 작가는 썰전에서 임종석을 박원순계로 분류하는 이 같은 시선에 대해서는 꼭 그런 식으로 분류할 수 있는 건 아니라면서 '편견이다'라고 비판했다.[6]

이윽고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문재인 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2017년 11월, 국회 국감장에서 당시 자유한국당전희경 의원과 충돌하게 되었는데, 전희경 의원은 "주사파 · 전대협이 청와대를 장악했다"면서 "전대협의 강령과 회칙을 보면 미국을 반대하고 모든 외세에 부당하다고 본다. 회칙을 보면 민족과 민중의 근거한 진보적 민주주의 구현을 밝히고 있다. 지금 청와대에 있는 전대협 인사들이 이런 사고에서 벗어났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고 임종석 실장을 비판하였는다. 이에 임종석은 실장 이에 대해 "전희경 의원님 말씀에 매우 모욕감을 느끼고, 아주 강력한 유감의 뜻을 표합니다. 5공, 6공정치군인들광주를 짓밟고 민주주의를 유린할 때 전 의원님이 어떻게 살았는지 제가 살펴보진 않았습니다.[7] 그러나 지금 의원님께서 거론하신 대부분의 그 사람들이 인생을 걸고 삶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의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로 부끄럽게 살지 않았습니다."며 발끈했다.#

'비서실장 자리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고, 박근혜 정부 시절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왕실장'으로 군림하며 대통령 참모 그 이상의 과도한 권력을 행사한다는 이유로 '기춘대원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는데 임종석 또한 이를 반복하고 있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다. 이는 논란 문서의 대통령비서실 권한 관련 문단 참조. 반면 장하성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함께 인수위 기간 없이 시작된 문재인 정부의 초기를 안정적으로 이끌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의 내각 구성을 끝나고 청와대가 본격적으로 활약하면서, 자연스럽게 청와대 비서실의 리더인 임 실장이 보폭이 커졌다. 그 덕에 청와대에 머물지 않고 대외적으로 다방면으로 활약하는 해결사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문재인 대통령의 오른팔로서, 추미애 여당 대표를 예방한 자리에서 장미꽃을 선물하며 당청 불화설을 일축하였고, 추경 통과를 위해 추미애 대표의 '머리 자르기 발언'에 대한 사과를 요구한 국민의당 박주선 비대위원장에게 대통령 대리인으로서 사과하면서 막힌 정국을 해결해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또한, UAE에 특사로 파견되어 양국의 외교적 갈등 봉합에 핵심 역할을 했다. UAE는 UAE 논란으로 야당과 언론에 뭇매를 맞고 있는데도 침묵을 지킨 임 실장을 보고 신뢰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비서실장 취임 후 1년차가 되면서 제왕적 비서실 및 자기 정치로 비판을 받았으며, 음주운전, 음주폭행 등의 공직기강 해이가 청와대에서 일어나는데 비서들은 SNS에 집중하고 있다, 겉멋만 들었다는 지적이 여당에서도 나온다. 또한 통신사고가 일어났는데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자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경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이번 정권의 실질적 2인자으로 활약하면서 민주당의 차기 대권 주자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차기 대권 주자로 부상하면서 야권에서 행적 하나하나를 비판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한편 임 실장에 대한 여론은 긍정평가 48.9% VS 부정평가 38.7%로 드러났다. 긍정평가가 부정평가보다 높긴 하지만, 자기 정치 논란이 일면서 과거에 비해 지지율이 약 10%p 하락했다. 또한 매우 잘 한다, 매우 못한다 등으로 여론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기사

2019년 1월 청와대 인사 개편안을 발표하고 퇴임했다. 후임 비서실장은 노영민 주중대사.


2.2.1.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위원장[편집]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확정된 뒤인 2018년 3월 9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4월 27일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할 준비위원회를 꾸리라는 지시를 내렸고 임종석 비서실장이 위원장직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북정상회담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게끔 준비위원회가 구성된다고 발표되었고, 3월 16일 첫 전체회의를 개최했다.

남북정상회담 준비위는 중요 사항을 결정할 전체회의를 매주 또는 격주에 한 차례 열기로 했다. 준비위 전체회의와 별개로, 실무 논의는 위원장과 총괄간사, 3명의 분과장이 참석하는 분과장 회의에서 논의하며, 이 회의는 주 3~4회 열기로 했다.

2018년 4월 27일, 서훈 국정원장과 함께 오전 남북정상회담장에 자리했다. 서 원장이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의 카운터 파트였다면, 임 실장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가장 곁에서 보좌한 김여정 제1부부장의 카운터 파트로 나선 것으로 보인다.

임 실장은 1달 동안 준비위원장을 맡으면서 회담의 밑그림을 그렸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동안 북측과 꾸준히 사전 의제 조율 작업을 벌여 한반도 비핵화를 뺀 나머지 의제들에 대해선 회담 전에 상당부분을 남북이 합의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이러한 임 실장의 역할에 주목해 1989년 전대협 3기 의장을 맡아 임수경 전 의원의 방북을 주도하는 등 학생운동 시절부터 그가 거쳐온 인생역정을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최룡해와 함께 북한의 사실상 2인자로 평가 받고 있는 김여정 제1부부장과 호흡을 맞춘 것이 임 실장이 현재 문재인 정부에서 가지고 있는 위치를 보여준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2018년 9월, 임종석은 국회의장단과 외통위원장, 여야 5당 대표 등 총 9명을 제3차 정상회담에 초청했다. 그러나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은 "애초 불참의사를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회담 며칠 전 언론을 통해 일방적 재초청을 공표한건 정략적 행위"라고 주장하며 불참 의사를 밝혔다. 문희상 국회의장과 이주영, 주승용 국회부의장은 정기국회와 국제회의 등의 일정으로 불참한다고 했다.#


2.3. 2019년 이후[편집]


21대 총선에서 종로 출마설이 1월 비서실장 퇴임 이후 수면 위로 계속 대두되면서, 점점 기정사실화가 되기도 했는데,# 6월에는 종로구 평창동에 전세를 얻었다. 다만 현역 지역구 의원인 정세균 전 의장과의 교통정리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2019년 11월 17일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총선 불출마 및 정계 은퇴를 암시하며, 민간 부문에서 통일 운동을 해나갈 것이라고 발표하였다.[8]# 게다가 정세균 전 국회의장도 지역구를 떠나게 되었는데, 개각을 하면서 국무총리로 입각하고 동시에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해당 지역구를 이어받게 되었다.

21대 총선 기간에는 고민정, 이수진 등 각 지역구 민주당 후보 지원 유세에 참여했다.

2020년 6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으로 김연철 통일부장관이 사의를 표한 이후, 차기 통일부장관으로 유력하다는 보도가 있었다. 우상호 의원과 이인영 전 원내대표도 차기 통일부장관으로 유력하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우 의원은 임종석이 적임자라고 평가했다.## #

2020년 7월 1일 기준, 서훈을 뒤이은 차기 국정원장으로 거론되었지만, 이틀 뒤 박지원 전 의원이 내정자로 밝혀지고 본인은 외교안보특보로 임명되었다. 북한은 7월 14일 대남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이번 외교안보라인 교체와 관련, "이인영, 임종석 두 사람에게 거는 기대도 많다"고 반응했다. #

2022년 2월에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의 의원직 사퇴로 공석이 된 종로구 보궐선거에 출마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었으나, 민주당이 종로에 공천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없던 일로 되었다. 이에 내리 3선을 한 김영종 전 종로구청장은 이에 반발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결국 본인도 낙선하고 국민의힘 후보로 나온 최재형감사원장만 더 돋보이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2022년 3월에는 서울특별시장 출마설이 잠시 있었으나 본인이 후보등록을 하지 않으면서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4월에 문재인 정부 전반에 대한 회고 인터뷰를 SBS와 가졌다. 부동산 정책, 외교안보, 조국 사태청와대에 있으면서 겪었던 일의 뒷이야기를 술회하였다. #

2022년 7월 5일, 민주당 전당대회 출마를 준비 중인 이재명을 향해 "대선지방선거에서 패배해 당을 위태롭게 만들고 반성은 커녕 되레 당을 장악하려는 부끄러운 짓을 한다", "염치 없고 기본과 상식을 벗어난 행동에 창피하고 화가 난다"면서 강력한 태클을 걸었다. #
  • 황교익은 이를 두고 임종석의 민주주의 의식이 매우 낮은 수준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전근대적 정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 손혜원은 자신의 유튜브 영상을 통해 앞선 4월 임종석의 SBS 인터뷰를 반박하며 비판했다. # 영상

2022년 말부터는 SNS에서 윤석열 정부의 정치보복을 규탄하는 메시지를 내고 있다.

22대 총선에서는 전 지역구인 성동구 출마설이 돌고있다. 아무래도 19대 총선까지 임종석의 지역구이기도 했고 당시에도 출마직전 재판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출마를 포기하고 친구였던 홍익표가 대신 지역구를 이어받았었는데 홍익표가 서초 을로 지역구를 옮기면서 공석이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종로구 선거구에도 전략공천 가능성이 점쳐진다. 임종석의 국회시절을 기억하는 다선의원들에게는 좋은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으나 지난 총선때까지만해도 원내에 친이재명 세력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다선의원들의 바램과는 다르게 공천이 힘들 가능성도 있다.


3. 약력[편집]




4. 논란 및 사건사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임종석/논란 및 사건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새정치국민회의|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

1999 - 2000
정계 입문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0 - 2003
합당[9]

[[무소속|
무소속
]]

2003
탈당[10]

[[열린우리당|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

2003 - 2007
창당

[[무소속|
무소속
]]

2007
탈당[11]

[[대통합민주신당|
파일:대통합민주신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7 - 2008
창당

[[통합민주당(2008년)|
파일:통합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8
합당[12]

[[민주당(2008년)|
파일: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8 - 2011
당명 변경

[[민주통합당|
파일:민주통합당 연두 로고타입.svg
]]

2011 - 2013
합당[13]

[[민주당(2013년)|
파일:민주당(2013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13 - 2014
당명 변경

[[새정치민주연합|
파일:새정치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2014
합당[14]

[[무소속|
무소속
]]

2014 - 2015
탈당[15]

[[새정치민주연합|
파일:새정치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2015
복당

파일:더불어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2015 - 2017
당명 변경

[[무소속|
무소속
]]

2017 - 2019
탈당[16]

파일:더불어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2019 - 현재
복당


6.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68,481 (48.39%)
당선 (1위)
초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 을

[[열린우리당|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

36,467 (49.61%)
재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26,718 (46.67%)
낙선 (2위)




7. 여담[편집]


  • 전국에 지명수배된 상황에서도 여장을 하는 등 신군부 정권의 추적을 교묘하게 따돌리면서, 당시 임길동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파일:임종석 현상지명수배.png
추적을 피하기 위해 쓰인 수법 중에는 그와 비슷한 체구의 학생들이 클론처럼 돌아다니는 수법이 있었다고. 호감형 외모투사 이미지 그리고 신출귀몰한 행적, 전대협 의장이라는 신분 등으로 인해 당시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키며 여고생들이 주로 보는 하이틴 잡지에서 인기순위 1위를 차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 임종석이 엄연한 공인인 정치인의 신분임에도 엄청난 미남이다.

  • 1996년에 결혼할 때, 결혼식 기사가 경향신문에 나오기도 했다. 부인은 그가 교도소에 있을 때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알게 된 사이라 하며 슬하에 1녀를 두고 있다.

  • 한총련이 2003년 미군 훈련장 난입 사건 때 과격했다고 한총련을 비판했다. 임종석은 위에서 봤듯이 임수경 방북 사건과 각종 사회 운동을 주도한 전대협 제3기 의장이었다. 한총련의 문제를 최소한 인식은 하고 있을 뿐 아니라, 80년대 전대협의 행보와 90년대 이후 한총련의 행보는 성향에 다소 차이가 있다 여겨진다.

  • 2005년에 디시인사이드에서 정사갤러들과 간담회를 가진 이후 '본인의 요청'으로 정치인으로는 최초로 임종석 갤러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2010년대의 디시 갤러리들은 우후죽순 마구 만들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만두 조공을 바치고 리플로 찬성 여론을 만들어도 겨우 될까 말까 한 갤러리 개설이 김유식과 임종석의 이해관계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 없이 손쉽게 그것도 정치인의 갤러리가 개설된 것에 대한 반발이 매우 심했다.[17] 예를 들면 당시에 매우 인기있던 문근영, 이나영 등의 여배우들은 관련 팬덤들이 만두 조공도 바치고 각종 팬카페 및 디시 갤러리에서 이용자들의 동의 리플을 부탁하는 이른바 '화력 지원'을 거쳐 갤러리가 생기는 게 관례였는데 임종석은 이러한 과정도 없었고 정치적으로 딱히 거물급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갤러리 관리 또한 이외수 갤러리와 더불어 다른 곳과는 달리 본인이 직접 했었는데 과도한 글 삭제와 필터링 때문에 말이 많았으며 나중엔 본인의 이름까지 금지어로 설정해 '금지어 갤러리'라고 조롱당하기도 했다. 관련이미지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성덕선이 동생 성노을을 보호하려고 성노을의 여자친구와 여친의 친구들과 싸우다 파출소에 잡혀갔을 때 동생을 구하러 가는 장면에서 벽에 붙은 수배전단에 등장했다. 단순 소품이 아니라 작가가 일부러 옛날 자료를 구해서 재현하여 붙혔다고 한다. 지인의 제보로 임종석 본인도 찾아보고 크게 웃었는데 키를 170cm로 표기해서 섭섭하다고 트위터에 올렸고 이에 작가진은 옛날 자료라 인쇄상태가 나빠 176을 170으로 잘못 보고 적었다고 답글을 보냈다. #


  • 문 대통령이 초청하는 만찬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가 오면 국무총리가 가서 인사를 나누고 임 실장이 곁에서 지킨다고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천명한 문재인 정부이지만 대통령이 귀빈 여러 사람들을 영접해야 하다보니 위안부 할머니를 세심히 챙길 수 없어서 대통령비서실장이 곁에 가서 무슨 말을 하는지 다 듣고 알려달라고 해서 이루어지게 됐다.

  • 정준호와 친하다. 임종석이 2016년 2월 은평구 을에 예비 후보로 출마했을 때 정준호가 선거 사무소로 찾아와서 응원해 주는 장면이 찍혔다. 홍익표 의원 블로그에 의하면, 정준호와 임종석은 서로 형동생 하는 관계라고 하며 정준호가 사무소에서 "임종석 후보가 꼭 국회에 들어가셔서 대한민국을 위해 더 큰일을 해 주셔야 한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 정준호가 보수적인 성향이라 평가받는 점을 생각하면 의외인 부분이다.


8. 둘러보기[편집]









[1] 수풀 '림(林)' 등은 본음이 '림'인데 두음 법칙으로 인해 '임'이 되는 반면, 임종석의 성씨인 맡길 '임(任)'은 본음이 이미 '임'이므로 두음 법칙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 북한에서도 '임종석'으로 부르는데(기사) 두음 법칙을 적용해서가 아니라(주지하다시피 북한은 두음 법칙을 적용하지 않는다.) 본음이 '임'이기 때문. 따라서 로마자 성씨 역시 'Lim'이 되기 어렵다. 여권에 '임(任)'을 LIM으로 표기한 일부 사례들(#1, #2, #3)이 발견되긴 하나, 정정을 희망한다는 내용이거나, 엄밀히 따지자면 적절하지 않은 표기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냥 살고 있다는 내용이다. 당사자가 의도한 표기는 아니라는 얘기다. 연합뉴스 영문 기사에도 임종석의 성씨 표기가 'Im'으로 되어 있는데, 해당 기사에서 문재인임(林)수경의 성씨는 표기법대로인 'Mun', 'Im'이 아니라 당사자의 표기인 'Moon', 'Lim'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종석의 'Im' 역시 표기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한 결과가 아니라 당사자의 표기를 따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2] #[3] 문충공파-참판공파 31세 종(鍾) 항렬. 참고로 그 무인시대에 나오는 고려 의종, 명종, 신종의 모후이자 인종의 왕후인 공예태후 임씨의 집안이다.[4] 그의 모교인 한양대학교가 있는 지역이다. 임종석 외에도 지역구 출신이 아니지만 자신이 나온 대학교나 일했던 공장 소재지 지역구에서 당선된 의원이 있는데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 출신인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노동자 출신인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우 의원의 지역구인 서대문구 갑 지역에 연세대학교가, 홍 의원의 지역구인 부평구 을 지역에 GM 한국사업장 부평공장이 있다.[5] 당 대표였던 한명숙은 친노 직계인사였고 임종석은 민평련계 인사였다.[6] 박원순은 한나라당-새누리당이 국가 3부의 실질적 인사권을 모두 장악한 다수파 여당이던 시절, 서울시장으로서 범야권 인사들을 두루 등용했다. 변호사 등 전문직이 아닌 재야 정치인들은 어찌 됐든 계속 정치-행정 경험을 쌓으면서 먹고 살아야 하므로, 서울시장이 임명할 수 있는 정무직을 임종석과 같은 인사들에게 맡긴 것이다. 계파를 형성할 수 있는 계기인 것도 사실이지만, 반드시 박원순의 사람이라기보다는 민주당계 주요 인물이므로 기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7] 굳이 설명하자면, 전희경은 1975년생으로 당시 6월 민주항쟁 때 불과 12살이었던 반면 임종석은 6월 항쟁에서 운동권으로서 시위에 앞장선 대학생이었다.[8] 여담으로 같은 날 자유한국당의 3선 의원이었던 부산 금정김세연 또한 불출마를 선언하게 된다.[9]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10] 열린우리당 창당을 위한 탈당[11]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12] 민주당과 신설 합당[13]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14]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15] 공직 취임으로 인한 탈당[16] 공직 취임으로 인한 탈당[17] 정작 김유식은 2년 후 대선에서 손학규 지지를 했다. 물론 손학규가 경선에서 떨어진 이후 누구를 지지했는지는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