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공업 통합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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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2.1. 자동차 업계의 상황
3. 내용
3.1. 최초 시행안 (백지화)
3.2. 반발
3.3.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
3.4. 기아의 반발과 철회
3.5. 조치 발표 결과
4. 결론
5. 여담
5.1. 이 조치로 인해 단종된 차량


1. 개요[편집]


1979년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해 세계 자동차업계가 휘청이던 상황에서 그동안 경제규모에 비해 과잉투자를 해온 국내 자동차업계도 직격탄을 맞자 전두환 정부가 국내 자동차 기업의 도산을 막는다는 이유로 실시한 정책이다.


2. 배경[편집]


1960년대 공업화가 본격화되면서 국내 자동차 산업도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러 자동차 기업들이 생기며 경제 규모에 비해 과잉투자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가용 승용차가 잘사는 사람들이나 타던 사치품 취급을 받던 시기였지만 미래의 가능성에 배팅을 걸었던것이었다.

그러나 1979년 제2차 오일 쇼크가 터지며 유류비가 치솟자 전세계적으로 자동차 수요가 급감했다. 세계 각국의 자동차 회사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미국의 메이저 자동차 회사인 GM, 포드, 크라이슬러는 이때 맞은 타격을 이후로 영원히 회복하지 못했고, 그나마 독일, 일본,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버텼을 뿐, 영국 등 여러나라에서는 아예 자동차 산업이 거의 붕괴되기도 했고, 한때 자동차 산업이 융성했던 이탈리아도 춘추전국 시대를 방불케 할 만큼 많은 자동차 기업이 있었지만 피아트 정도만 살아남고 나머지 자동차 기업들은 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을 정도로 자동차 산업이 위축되었다.

석유가 생산되지 않던 우리나라는 오일 쇼크의 타격을 크게 입은 나라 중 하나였고, 치솟는 유가를 통제하기 위해 정부는 장관급 관료의 차량 실린더 수를 4기통으로 제한하는 등의 자동차의 수요 억제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1] 그러다가 1979년 10.26 사건과 그해 12월에 일어난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하여 전두환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오일 쇼크 당시 국내 자동차 업계의 충격은 어마어마했는데, 1979년 사상 최초로 20만대를 돌파했던 자동차 생산량이 1980년에는 전년보다 무려 40%나 줄어든 12만대로 떨어졌을 정도였다. 국내 자동차 회사들은 줄도산 위기에 처했다. 전두환의 경제 브레인인 김재익 등은 이러다가 다른나라처럼 한국 자동차 산업 자체가 무너질 것을 우려했고, 과잉투자 상태에 있던 국내 자동차기업들의 합병을 시도하는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후 정책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자동차 회사들간의 합병은 백지화되었고, 생산 차종에 대한 규제가 이루어지는 선에서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2.1. 자동차 업계의 상황[편집]


오일쇼크 이전인 1970년대 초에도 자동차 업계는 이미 과잉 투자로 인한 가동률 저하가 시작되었다. # 아시아자동차가 원래 기아와는 별개 기업이었으나 자회사가 된 것도 이 시점이었다. 이 와중에도 각 자동차 회사들은 모델 생산 범위를 전 범위의 차종으로 넓히기 시작했는데, 이러면서 발생한 각 차종별 문제점은 아래와 같다. 뒤에 나오지만 퇴출된 모델들은 이러한 약점들을 안고 있었다.
  • 승용차 : 당시 우리나라의 승용차 시장을 보면, 당시의 국민소득 상황으로 소형 승용차들은 수요가 많지 않았고, 중대형급 차가 당시 승용차 시장의 주류였다. 승용차 시장에선 기아자동차가 꽤 불리했다. 문제는 기아자동차의 중대형 승용차들은 라이센스 비용같은 이유로 인해 유독 비싸서 가성비에 문제가 있었던 상황.
  • 지프 : 당시 지프는 신진자동차(현 쌍용자동차)가 M38A1 기반인 CJ-5를 라이센스 받아서 단독으로 생산하던 상황이었다. 문제는 이 모델을 기반으로 최초로 국산화를 시도했던 ¼톤 트럭 K-100에서 문제점이 너무 많이 발견되어 M151 기반으로 K-111을 다시 개발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K-311, K-511이 개발되면서 군용차량을 아시아자동차(현 기아) 공장에서 생산하는걸로 몰아버렸다.
  • 1~5톤 트럭 및 버스 : 트럭쪽은 기아가 삼륜차를 생산하던 시절부터 국내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기아 타이탄기아 복서 이후로 시장을 더더욱 굳혔다. 새한 엘프가 1.4톤, 2.5톤, 3톤 급으로 그럭저럭 판매되고 있었으나 후발주자의 불리함으로 기아 타이탄을 완전히 압도하지 못하였고(그래도 한때나마 타이탄 판매량을 뛰어넘은 적은 있다.), 현대 바이슨은 고유모델이어서 당시의 낮은 기술력으로 인한 조잡함으로 경쟁에서 불리했다.[2] 버스의 경우 2000년대와는 다르게 마을버스와 소형 통학버스의 수요가 거의 없었고, 자가용, 전세버스 시장은 대형버스들이 장악했다. 심지어 기아 코스모스 급의 중형버스들은 대중교통용의 계보가 한번 끊어진 적이 있던 상황.[3]

3. 내용[편집]



3.1. 최초 시행안 (백지화)[편집]


1980년 8월 20일에 중화학 분야 투자조정 조치 밑으로 자동차 부분 투자조정 조치라는 명칭으로 처음 시행되었으며, 1981년 2월 28일에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를 발표하면서 실물화되었다.

우선 이 자동차 부분 투자조정 조치의 내용을 살펴보면 현대자동차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의 전신)을 통합하여 승용차만 전문생산을 하되 경영은 현대그룹이 맡고, 기아(당시 기아산업)는 5톤 미만의 소형 상용차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되, 5톤 이상의 버스와 트럭은 당시 제조사들에게 자유 경쟁에 맡긴다는 것이 기본적인 골자였다.

또한 기아자동차의 2륜자동차 사업부이자 계열사격 회사인 기아기연[4]을 대림산업에게 넘기고 철수를 함과 동시에 자동차 산업에서 손을 뗀 대우는 한라그룹의 모기업이었던 현대양행(지금의 두산중공업)을 인수하는 것으로 하려고 했다. 이는 자동차부분 투자조정 발표 전에 국보위에서 정주영 회장과 김우중 전 회장으로 하여금 선택하게 했던 것의 일환이었다.


3.2. 반발[편집]


하지만 최초의 안은 여러 반발로 시행되지 못했고 이후 수정을 거쳐 생산 차종을 조정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특히 새한과 현대가 합병안에는 골치 아픈 사정이 있는데, 일단 당시 새한의 지분 50%를 미국 제너럴 모터스가 가지고 있었다. 원래 전두환 정권의 구상은 현대가 자동차를 포기하면 자동차를 새한과 합쳐서 GM의 합작 기업으로 돌리고 대신에 중공업을 현대 쪽에 몰아준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뜬금없게도 정주영 회장이 중공업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일이 꼬인 것이었다. 정주영은 당시 중공업 분야는 포기해도 조선소를 바탕으로 나중에 다시 진입할 수 있지만, 자동차는 한 번 포기하면 진입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당시 미국 GM에서는 새한의 지분은 한국 내 자동차 사업권에 대한 지분이라는 것과 동시에 이 통합이 사실상 현대와 GM의 1:1 통합이기에 통합한 후에도 50%의 지분과 경영권을 요구하면서 꼬인 것이다. 이는 당시 새한자동차의 지분 상황이 복잡했기 때문인데, 새한자동차는 신진자동차와 미국 GM이 1972년에 50:50으로 출자한 GMK가 그 시작이다. 그러나 신진자동차가 1973년 오일쇼크로 인하여 산업은행이 관여함에 따라 신진이 빠지게 되었고 당시 신진의 사장이던 김창원은 그룹이 분리되는 것을 보면서 말년에 신진공고(현 신진과학기술고등학교)의 이사장직을 지내다가 1996년에 사망한다. 현 이사장인 김용식은 김창원의 아들이다.

지분 문제와 경영 전략간의 이결로 인하여 현대와 새한의 통합은 무효로 돌아갔고 현대와 새한 대신 기아와 GM의 통합을 생각 했지만 이 역시 불가능해졌다. 차라리 지금처럼 현대와 기아를 통합할 생각은 못 했던 걸까?


3.3.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편집]


투자조정 조치가 사실상 무위로 돌아감에 따라 국보위에서는 이것의 대안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바로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였다. 1981년 2월 28일에 발표했기에 흔히 2.28 조치라 불린다.

  1. 승용차는 현대와 새한으로 이원화하여 경쟁체제를 유지시키고 수출시장 개척[5]에 주력, 1~5톤 트럭 및 버스 생산 금지
  2. 차종별 전문생산 체제의 강화를 위해 기아는 승용차 및 픽업을 제외한 1~5톤 트럭 및 중소형 버스, 동아(현 쌍용자동차)[6]는 소방차, 믹서트럭, BCC(비포장 시멘트 운반차), 탱크로리 등 특수특장차의 생산을 각각 전문화
  3. 기아와 동아의 전문생산체제에 대비한 양사의 경영합리화 방안으로 양사의 통합을 추진, 기아는 2륜차 부분을 대림산업에 인계
  4. 기타 계열기업 정리과정에 대한 조치 기준

이 조치의 핵심은 통합이 불가능해진 승용차부분 대신 상용차 부분에서 기아와 동아의 통합을 통해 통폐합 조치의 명분을 살려보자는 말도 안 되는 정책이었다.


3.4. 기아의 반발과 철회[편집]


이 조치가 발표된 후 기아산업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힌 수준이었다. 아무리 국보위의 명령이라 해도 현대와 기아와의 통합이면 어떻게든 가능하겠지만 규모에서 엄청난 차이가 났던 기아와 동아와의 통합은 회사 차원에서도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볼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제 막 종합자동차회사로 성장하려던 상황에서 싹을 자르는 조치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한 1976년부터 기아의 누적된 부채 문제로 인해 결국 김상문 회장이 1981년 10월 5일 자본과 경영의 분리를 선언함과 동시에 퇴진하면서 김선홍 당시 기아기공 사장이 기아를 이끌게 되었다. 상공부에서는 합병을 계속 주도했지만 당시 동아 하동환 회장의 기아 및 동아 주식 대량 매집을 했으나 기아의 부채를 견디지 못해 다시 주식을 대량 매각한 사건으로 인해 더이상의 협상은 불가능해진 것이다.

결국 이 조치는 사실상 무효화되고 1982년 7월 26일 최종적 조치가 내려졌다.

  1. 2.28 조치 중 기아와 동아의 통합은 백지화
  2. 승용차생산을 중단한 기아에 대하여는 중소형 트럭 및 중소형 버스의 전문생산 체제 지속
  3. 양사의 합병을 전제로 동아에 전문화시켰던 소방차, 믹서트럭, BCC, 탱크로리 등의 특장차 생산 자유화
  4. 양사의 경영상태가 악화되어 정상 경영이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자연 통합 방향으로 유도


3.5. 조치 발표 결과[편집]


  • 승용차 : 현대, 새한
  • 지프: 신진(민수용)[7], 아시아(군사용)
  • 1~5톤 트럭 및 버스: 기아 단독 생산
  • 8톤 이상 트럭 및 버스[8]: 현대, 기아, 새한
  • 특장차: 전 회사
  • 이륜차: 대림

4. 결론[편집]


이 조치 발표로 인하여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기아자동차였다. 기아는 7년간 승용차 생산이 중단되면서 기술력이 뒤쳐지는 바람에 기아와 현대에게는 간극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될 정도로 커졌고, 이 조치가 해제되는 1987년부터 현대와 합병되는 1998년까지 항상 2인자 신세를 면치 못했다. 기아는 적자투성이인 2륜차 사업 관련을 대림산업에 헐값에 넘기게 된다. 이 일로 인해 김선홍 기아기공 사장, 김명기 고문, 김성웅 아시아자동차 전무[9]가 반발했지만 결국 기아의 2륜차 생산은 1982년 3월을 기점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현대는 당시에 생산하던 중소형 상용차 뿐만 아니라 디젤 엔진도 생산할 수 없게 되어 현대의 중소형 상용차 기술[10], 디젤엔진 기술[11][12][13] 및 국산화율은 1990년대 후반까지 한동안 크게 후퇴하고 말았으며 1997년 현대 슈퍼트럭, 1998년 마이티 2, 카운티 출시 및 2000년에 현대 파워텍 엔진이 개발되면서 그제서야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었다.

그나마 이 조치로 인해 국내에서 가장 혜택을 입었다고 할 수 있는 업체는 새한/대우자동차. 계열사 대우중공업이 독일 MAN사와 기술제휴로 국산화한 대형 디젤엔진(D0846HM, D2156HM 등)을 이 조치로 자동차 4사가 공유하였고,[14][15] 비록 상용차 시장을 포기하기는 했지만 1980년대 초만 해도 새한의 상용차 시장점유율은 극히 미미했던데다 전통적으로 새한은 트럭이나 특장차 등의 상용차보다는 중형 승용차와 대형 트럭버스에 특화된 회사였기에 이 조치로 인해 받은 타격도 현대나 기아에 비해 매우 적었을 뿐 아니라[16], 현대자동차와의 합병이 무산된 이후 승용차 이원화 업체 중 하나로서 특히 중대형 승용차 시장에서 1980년대 강자로서의 위치를 꾸준히 지켜갈 수 있었다.[17]

전두환 정권에서 실시된 자동차공업 통합조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많다. 군사정권이 일방적으로 강행한 전근대적 조치이며, 권위주의 정부의 강압적인 규제로 인해 경쟁이 없어져 한국 자동차 업계가 퇴보를 거듭했다는 혹평이 많다. 하지만 학계 및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오일쇼크 당시 위기에 처했던 경제상황에서 이 조치는 결과적으로 국내 자동차 산업에 부정적인 영향보다 긍정적인 효과가 더 컸다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당시 전세계 자동차 산업이 큰 위기를 겪고 있었고 특히 이제 막 성장하고 있던 한국의 자동차 기업들의 타격은 어마어마했다. 때문에 자동차공업 통합조치가 없었다면뭐 지금 끝났으니 다행인데 몇 개 기업이 도산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자동차 산업이 붕괴하거나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훗날 IMF 외환위기 때를 봐도 기아자동차의 도산 위기가 외환위기 본격적인 도화선이 되었으며, 이후 기아 뿐만아니라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대우자동차 등이 줄 도산위기에 처했고이때 대우는 쌍용을 인수해서 도산을 모면하고 쌍용은 역사가 길어서 역경을 이겨냈다고 한다 결국 현대나 다른 외국계 자본에게 팔려나가며[18][19] 국내 자동차산업이 완전히 구조조정, 재편되었다.안돼 IMF 당시는 자동차 대중화가 진행되어 매년 수십만대 이상의 차량이 판매되고 있었고, 미국, 동유럽, 중앙아시아 등으로 수출도 많아졌던 시절인데도 이랬는데, 1980년 당시 주로 미국, 일본, 독일차들을 라이센스 생산하고, 아직 자동차는 부유층이나 타던 사치품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신생 자동차 후발 주자국이 과연 구조조정 없이 자동차 공업을 제대로 이끌 수 있었을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있다. 이미 70년대 후반 한국은 자동차회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며 경제규모에 비해 자동차산업이 과잉 투자 상태에 이르렀다는 지적을 받고 있었다. 사실 자동차공업 통합조치 이전을 살펴보면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자동차회사들이 생겼다가 도산해 왔다. 소규모 회사들이 난립하다 사라진 50년대를 제외하더라도 60 ~ 70년대 한때 한국 자동차 업계 1위를 차지했던 하동환자동차, 새나라자동차, 신진자동차 등이 모두 순식간에 도산해서 사라졌었다. 자동차공업 통합조치 시점으로 돌아가보면 1979년 하반기 발생한 오일쇼크가 전세계를 강타하여 미국조차도 기업이 줄도산하며 신음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정부의 개입이 있든 없든 간에 구조조정은 필연적인 상황이었다. 80년 당시 정부의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로 비록 각 회사들은 나름 피해를 봤다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 도산하거나 토태되는 기업없이 어느정도 연착륙에 성공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오일쇼크와 외환위기로 이어지는 세계의 자동차 도산 위기화

사실 오일쇼크로 인해 자동차 수요가 급감하여 이로 인해 전세계 모든 자동차 회사들이 엄청난 손실을 입었고, 미국과 독일, 일본의 메이저 자동차 회사를 제외한 많은 자동차 회사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많은 나라의 자동차 산업이 무너졌고, 영국, 호주 자동차 산업이 호흡기를 떼게 된 시발점으로 볼 수 있었다.

이 조치는 1987년부터 해제되기 시작하여 1989년 완전히 해제되었다.

5. 여담[편집]


  • 비슷한 시기 영국의 통합 자동차 회사였던 브리티시 레일랜드가 막장경영 끝에 공중분해 되었던 것, 호주버튼 플랜 사례를 보면 결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물론 한국 자동차 산업이 아예 망하지 않은 이유를 들자면 영국식인 승용차 업체 통합이 무산된 부분 및 호주의 무리한 배지 엔지니어링 남발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조치도 위에서 서술된 것처럼 초안에서 2번이나 수정된 조치다.
  • 1982년 제미니의 페이스리프트 모델로 출시된 새한의 맵시는 첫 출시 당시 1.5리터 엔진이 나온 후 마쓰다제 1.3리터 엔진을 쓰고 있었는데, 이 엔진은 사실 브리사 2의 엔진을 얹은 것이었다. 기아(당시에는 기아산업)가 이 조치로 승용차 생산을 못 하게 되자, 그렇지 않아도 1.5리터 엔진의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던 새한이 얻어 온 것.[20]
  • 기아는 승용차를 생산하지 못하더라도 브리사의 계열모델이었던 브리사 픽업(기아마스터 B-1000)이라도 살려 보려고 했었으나 회사 입장에서 말도 안 되는 답변을 받고 브리사 픽업을 단종시켜야 했다. 당시 기아차는 브리사 디젤 모델도 연구하던 상황[21]이었으니 더더욱 속이 탔을 정도. 이 사건으로 승용차를 생산할 수 없게 되자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그 결과 나온 모델이 바로 원박스카인 기아 봉고. 불가능하리라 예상되었던 이 모델은 빅 히트를 치면서 기아를 기사회생시키는 역할을 했다.[22]
  • 1983년 기아의 계열이던 아시아자동차는 당시 랜드마스터라는 컨셉트카를 공개했다. 하지만 실제로 출시하는데에는 몇 년이 더 걸렸는데, 결국 그 과정에서 이름을 바꿔야 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록스타. 그리고 원래 이 차를 이용해 미국에 진출하려던 기아차의 계획도 완전히 틀어져 기아는 포드를 통해 우회적으로 미국에 진출했다.
  • 이 조치로 인해 1980년대 초부터 KR-600 프로젝트로 신형 SUV를 개발하고 1984년 컨셉트카를 공개했던 동아자동차는 개발을 마무리해 놓고도 해당 차종이 자사의 전담 차종인 민수용 지프가 아닌 승용차로 간주되어 허가가 나지 않아 출시하지 못하다가 이 조치가 해제되고 회사가 쌍용그룹에 넘어가 쌍용자동차로 사명을 변경한 이후인 1988년 하반기에서야 코란도 훼미리라는 이름으로 출시를 할 수 있었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저서 '신화는 없다'에서도 이를 맹렬하게 비판한다. 그는 당시 현대그룹의 임원이었기 때문에 당연하긴 하지만.
  • 당시 이 조치로 인해 현대, 대우, 아시아, 동아 4사의 시내버스, 시외고속버스 차종은 모두 같은 전조등과 후미등을 사용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심지어 시내버스 차종은 모두 같은 MAN엔진[23]을 사용했었다.
  • 이 조치에서 생산 차종 발표 결과만 놓고보면 일부 예외적인 종류만 빼면 결국 회사별 최초 생산 순서대로 재편되었다. 차종별로 후발주자들이 날아간 상황.
    • 자동차산업 합리화조치라는 통칭도 있는 것처럼 비효율적인 모델이 제일 먼저 날아가야 하는데 당시 상황은 상단부 자동차 업계의 상황 문단 참조.

5.1. 이 조치로 인해 단종된 차량[편집]


  • 기아: 브리사, 피아트 132[24], 푸조 604[25]
  • 새한: 엘프[26], BL064[27]
  • 현대: HD1000(포터), 바이슨[28], D0710, 디젤 엔진[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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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실질적인 효과보다는 오일쇼크 시대를 맞아 정부 고위 각료도 이렇게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2] 하필 자동차용으로는 (고속도로가 늘어나던 1980년대 기준에서)다소 부적합한 퍼킨스 엔진을 도입한것도 한몫.[3] 당연할 수 밖에 없는게, 60~80년대 시점의 버스 수요를 오늘날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대도시들은 전철망이 미비해서 버스들이 가축수송을 하던 시절이고, 농어촌버스는 저 시점이나 지금이나 배차간격이 길고, 농민들이 5일장을 가러 버스에 대형 짐을 싣던 시절이다. 울릉도 같이 길 자체가 좁아서 답이 없는 곳이 아니면 중형버스가 잘 팔릴리가 없었다. 당장에 아시아자동차AM808부산 금정산성이나 청주 상당산성 같은 특수한 지형을 운행하는 곳을 제외하면 노선버스로는 거의 팔리지 않았다.[4] 1975년 기아산업 2륜차 사업부를 물적분할하고 일본 혼다와 합작하여 설립한 자회사. 당시 기아혼다란 브랜드는 이 회사 소유였다.[5] 이 문구가 굳이 왜 들어갔냐면 당시까지만 해도 국산 자동차 수요는 거의 내수수요였다. 수출시장이 없으면 결국 내수에서 치킨게임하다가 망했을 구조. 물론 이 때와서야 수출을 생각한 건 아니고 이미 현대차 같으면 70년대부터 제3세계 지역에 꾸준히 수출을 해왔다.[6] 1977년 하동환자동차에서 상호 변경[7] 신진자동차와 미국의 AMC가 합작해서 설립한 신진지프자동차를 가리킨다. 신진 지프차량의 판매부진을 계기로 AMC가 자본을 철수하면서 합작이 깨지기 시작했고, AMC 자본철수를 계기로 지프를 리비아에 수출한 사건으로 인하여 지프 브랜드 사용 연장도 불허되는 바람에 1979년에 사명을 신진자동차로 변경하고 1981년에 거화로 변경하게 된다. 1984년에 동아에 인수되었고 현재 쌍용자동차의 한 축이 된다.[8] 단, 대형버스는 동아자동차를 포함한 전 회사가 계속 생산하고, 조치 해제전에 쌍용자동차로 재편되었다.[9] 당시 지위 기준. 세 사람 모두 당시 기아의 원로 인사들이었다. 당장 김선홍만 해도 소하리 공장 건설을 지휘한 인물이고 공채 1기였으며 김명기 역시 회사 초창기부터 함께 해온 인물. 김선홍은 기아그룹을 책임졌으며, 김성웅도 뒤에 기산그룹을 책임졌다. 김명기는 1981년 10월에 이미 퇴사했고, 김성웅은 1993년 기아그룹의 자회사인 기산의 회장이 되었지만 1997년 IMF 사태 및 기아그룹의 부도로 물러났고, 김선홍은 1990년에 기아그룹의 회장이 되었지만 마찬가지로 1997년 IMF 사태 및 기아의 부도로 물러났다.[10] 현대는 당시에 고유모델을 승용차에 국한하지 않고 1톤 트럭, 미니버스, 3톤 트럭 등에도 적용하기 시작하였고 자체 기술을 발전시키려고 힘쓰고 있었으나 이 조치로 인해 그동안 쌓았던 기술이 사장되어 버렸다. 1987년부터 다시 경상용차를 생산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자체 기술 대신 미쓰비시의 기술과 모델을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 즉, 포터, 2.5~3톤 트럭 등의 초대 모델(3톤 트럭은 마이티가 아니라 바이슨이라는 이름이었다.)은 현대 고유 기술로 만들어진 순수한 고유모델이었으나 1987년에 등장한 2세대 모델은 미쓰비시에서 들여온 모델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11] 현대는 포니와 경상용차에 디젤엔진을 적용하기 위해 영국의 퍼킨스라는 외국의 전문 설계 회사의 힘을 빌어 1977년부터 디젤엔진을 자체 생산하고 있었으며 국산화율을 꽤나 높였으나, 이 조치로 인해 투자 대비 생산규모가 줄어들어 경제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87년에 승용 및 경상용 디젤엔진을 만들기 시작할 때는 미쓰비시 기술을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2000년 파워텍 엔진과 2007년 F엔진, G엔진, H엔진을 독자 개발하면서 비로소 자체 개발한 디젤 엔진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1992년에 나온 K-1 엔진은 독자개발이라기 보다는 미쓰비시 후소의 4D32 엔진을 자체적으로 개량했다.[12] 하지만 만약 퍼킨스 엔진을 계속 도입했다면 디젤엔진 시장에서는 오히려 현대자동차가 도태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퍼킨스 엔진은 산업용이나 중장비엔진에 최적화 되었기 때문. 도로의 고속화로 인하여 자동차 엔진시장에서는 고회전에서의 내구성 문제로 80년대 말 ~ 90년대 초에 거의 도태되고 아예 산업용 엔진으로 확실하게 전환해버렸다. 하지만 현대 바이슨에 들어가던 퍼킨스 4.236 디젤엔진은 1960~70년대에 볼보트럭이 만들던 준중형트럭인 F82/83에도 들어갔으며(이 엔진의 rpm 레드존은 2,000rpm이라 고속도로가 발달하면서 점점 경쟁에서 뒤쳐졌다.), 당시 기아산업에서 라이센스 생산하던 마쯔다 디젤 엔진도 실은 마쯔다가 퍼킨스에 엔진 설계를 의뢰해서 만든것을 기아산업에 라이센스를 내준 것이었다. 물론 소형 디젤에서 J엔진이 도태되고 A엔진R엔진으로 통합된 현대자동차의 디젤 엔진 개발사를 봤을 땐 결과는 좋았다.[13] 게다가 당시 퍼킨스 최대의 고객은 하필 닷지(자동차)1973년도에 결별했던 포드였기 때문에 기술 습득이 과연 제대로 이루어졌을지는 의문이다. 바로 앞 주석에서 언급된 기아자동차 디젤 엔진 원판인 마쓰다 엔진이 퍼킨스 의뢰품인 것도 실은 마쯔다가 당시 포드와 협력관계였기 때문.[14] 1977년 HD170RB585부터 대우 디젤엔진을 공유하였지만 독자 기술 개발의 의지가 강했던 현대자동차는 1986년 이후 대우 디젤엔진 공유를 중단하고 미쓰비시 후소와 기술이전을 조건으로 D6B 엔진으로 갈아탔다.[15] 이 외에도 기아자동차가 라이센스 생산한 마쓰다 레나 1.3 엔진을 대우 맵시에 장착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16] 아시아, 신진, 동아의 경우 이 조치로 인해 개발 중이던 신형 차종의 출시가 한참 미뤄지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시장점유율이 높지 않은 틈새시장 업체였기에 현대, 기아, 새한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한다.[17] 이 말이 타당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동차공업 통합조치가 해제된 직후인 1987~1989년 사이 기아산업이 신차를 내놓고 승용차 시장에 성공적으로 복귀하며 그때까지 승용차 시장 2위였던 대우자동차는 3위로 밀려났고, 이후에도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 3총사를 내놓을 때까지 2위로 복귀하지 못했다. 그만큼 기아의 공격적 마케팅과 승용차 국산화 노력에 대우차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증거.[18] 외환위기 당시 대우자동차는 GM에, 삼성자동차는 르노에, 쌍용자동차는 상하이자동차에 팔려나갔고 이후 마힌드라한테 인수되었으며 현재 KG그룹 산하로 들어가게 되었다.[19] 현대차도 기아를 인수하기 위해 새로운 자동차 그룹으로 현대그룹과 완전히 별개의 기업이 되었다.[20] 이미 GM대우/한국GM의 우려먹기는 옛날부터 전해져 왔었다. 이 1.5리터 엔진은 계보가 좀 복잡한 게, GM코리아에서 실패한 시보레 1700의 1.7리터 엔진의 사이즈(배기량)를 줄여 1.5리터로 다시 만들어서 카미나에 장착한 게 시초다. 하지만 카미나는 불과 1년도 안 되어 1,000대도 판매하지 못한 채 망했고 이 엔진이 1977년에 출시한 제미니에 달리는데, 당연히 제미니는 연료효율이 나빠서 인기를 못 얻었다. 그럼에도 제미니의 F/L인 맵시에 달렸다는 것... 맵시는 브리사의 1.3리터 엔진을 얻어 오고도 인기를 못 끌어 맵시-나(2번째로 만들었다는 뜻에서 가나다 순서의 "나"를 붙였다.)를 내놓으면서 결국 이 1.5리터 엔진을 완전히 버리고 XQ 엔진으로 교체했다. XQ 엔진이 중형차에도 확대적용돼서 비판받은 면이 있지만, 소형차 부문에서는 남부러울 것 없는 출력(81마력)으로 큰 호평을 받은 엔진이다. 중형차였던 로얄에만 적용되었던 비판을 엔진 전체까지 싸잡아 비판하는 건 내로남불이나 다름없는 것.[21] 이후 1988년에 콩코드의 디젤 모델이 나오긴 했다.[22] 그런데 사실 현대에서 한국 최초의 1톤 트럭이자 고유모델인 HD1000이 생산, 판매되고 있었으며, 1980년 8월에는 누적 판매량이 3만 대를 넘었다. 안타깝게도 1981년에 이 조치로 강제 단종되었다. 다만 이쪽은 레저도 고려한 기아와 달리 영업용만 고려하고 만든 듯하다. 이후 5년이 지난 1986년에 현대에서 포터를 내놓으며 현대의 1톤 트럭 계보가 이어졌고, 포터와 봉고는 지금까지도 경쟁중이다. 승합차 모델은 그레이스로 재출시. 이후 스타렉스-스타리아로 계보가 이어진다.[23] 정확히는 대우자동차의 계열사였던 대우중공업에서 라이센스 생산한 엔진.[24]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생산된 DOHC 엔진 승용차였다. 다만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4밸브가 아닌 2밸브 DOHC 엔진이었으며, 비싼 값에 애매한 사이즈로 많은 인기를 얻지 못했다. 132의 라이선스 생산 종료 후 기아자동차에서 내놓은 후륜구동 중형급 모델은 36년 후에 출시한 스팅어다. 참고로 같은 시기에 이탈리아 현지에서도 단종되었다.[25] 출시 당시 가격이 2,300만 원대였다.[26] 일본 이스즈에서 생산한 동명의 트럭을 들여와 팔았다. 그 뒤 대우자동차로 바뀐 이후 3세대 모델을 수입하여 생산했으나 마이티트레이드에 밀려 판매 부진으로 단종되었으나 일본 현지에서는 여전히 생산중이며 2017년이 되어서야 재출시하게 된다.[27] 엘프와 마찬가지로 이스즈에서 생산한 저니를 들여와 팔았다. 단종 이후 대우자동차로 사명이 변경되고 대우버스가 설립된 이후에도 마이크로버스는 생산하지 않다가 2012년이 되어서야 자일대우버스 레스타를 출시하게 된다. 참고로 원 모델이었던 저니는 2021년에 단종되었다.[28] 유럽 포드의 D시리즈 트럭의 차대를 기반으로 자체개발한 캡과 현대자동차에서 면허 생산된 퍼킨스 디젤엔진을 올려서 만든 트럭, 이후 91A 중형 트럭을 거쳐 슈퍼 중형트럭, 메가트럭, 파비스로 이어지는 현대차 중형 트럭 라인업의 제1호였다.[29] 영국 퍼킨스와의 기술제휴로 1977년부터 4종의 디젤엔진을 생산했으나 불과 5년도 채우지 못하고 강제로 공장이 문을 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