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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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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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정의
2.1. 논쟁
2.2. 시장경제와의 관계
3. 용어
4. 역사
4.1. 기원
4.2. 상업 자본주의
4.3. 자본주의 1.0 시대 (1776 ~ 1932)
4.3.1. 산업 자본주의
4.3.2. 독점 자본주의
4.4. 자본주의 2.0 시대 (1932~1980)
4.5. 자본주의 3.0 시대 (1980~2010)
4.6. 자본주의 4.0을 향하다 (2010~ )
5. 자본주의는 왜 사라지지 않았는가?
5.1. 자본주의의 위기 극복
5.2.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과 맞지 않다?
6.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론
6.1. 자본주의는 서열을 나누는가
6.2. 자본주의는 종교인가
7. 참고 자료
7.1. 도서
7.2. 영상
8. 관련 문서
8.1. 인물
8.2. 이념
8.3. 밈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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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미국 달러[1]
자본주의( / Capitalism)는 재화의 사적 소유권을, 개인이 가지는 자유의지에 반하거나 법률에 의하지 않는 방법으로는 양도 불가능한 사회 구성원의 기본권으로 인정하는 사회 구성체 또는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다. 즉, 자본을 굴려서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체제라는 뜻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을 단순한 '부'와 구별한다. 자본이란 생산에 투입되는 돈과 재화와 자원을 말한다. 반면에 부는 금고에 갇혀있거나, 땅 속에 묻혀 있거나 비생산적 활동에 소모된다. 비생산적인 피라미드에 자원을 쏟아붓고 연회를 여는 파라오는 자본주의자가 아니다. 스페인의 보물선단에서 약탈한 금화를 상자에 담아 카리브 해의 어느 섬에 묻어둔 해적은 자본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연봉의 일부를 갖고 주식에 투자한 도시 근로자는 자본주의자이다.

2. 정의[편집]


다음은 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자본주의의 핵심 요건이다.

  • 사회 공동체 내에서 재화의 사적 소유권을 개인의 천부의 권리로 인정한다.
    • 다른 모든 요소의 전제조건이 된다.
  • 혈통적 조건이 아닌 생산수단의 소유로 결정되는 뚜렷한 계층의 존재.[2]
    • 프롤레타리아와 자본가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의 정의. 명백하게 혈통적 조건인 노예제는 포함되지 않는다. 산업혁명 이전에도 등장하나,(브뤼헤면직물 산업이나 송대비단 산업 등.) 부분적이고 산발적으로 역사에 등장하고 사라져감을 반복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론적으로 정교해 보이지만, 이 도식을 역사에 적용할 경우 마르크스 자신이 자본주의 사회라 명명한 유럽 사회18세기까지 경제의 상당 부분을 노예제에 의존하고 있었다.
  • 자본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기재의 존재.
    • 자본주의의 정의로는 사용되지 않지만 각 사회의 '자본주의화 정도'를 계산할 때 역사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기준이다. 실질적인 재보의 이동 없이도 원거리에서 자금의 이동이 가능하게 함으로써 경제의 회전속도를 크게 늘려주는 신용수단, 즉, 어음(나아가 지폐), 환전, 은행, 투자, 이를 보완할 사회적 요인 등을 모두 포함한다.


2.1. 논쟁[편집]


자본주의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발달한 것인지를 명확히 규정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정치/사회/경제적 시스템으로서의 '자본주의'를 규정하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관찰을 수행한 최초의 인물이 다름 아닌 칼 마르크스인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시장경제'란 추상적 개념을 철학적 개념으로 재정의해야만 자신이 밀고 있는 공산주의 철학의 안티테제로서의 시장경제체제를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란 용어 자체가 인류사 보편에 적용되는 거대한 사회과학적 개념이 아닌, 자연인 마르크스가 창조한 사회철학적 개념일 뿐이라고 선을 긋는 학자들 또한 많다.

사적 소유를 자본주의의 표지로 삼기도 한다. 여기서 뜻하는 바가 소유권 자체는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마르크스 역시 '개인적 소유'[3]는 인정했다. 그러나 자본에 대한 사적 소유국가권력이 물권으로 인정하는지, 아니면 그것이 경제의 중추를 이루는지는 자본주의의 표지가 될 수 있다. 사적 소유의 승인을 기준으로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사회주의, 봉건제, 부족사회 등)를 가를 경우, 토지의 사적 소유가 법으로 인정되는가를 확인하면 된다.[4][5]

'금융자본주의'를 '현대' 자본주의로 파악하는 논자들도 있다. 이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소수의 기업가와 다수의 노동자 간의 관계성을 강조하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는 생산수단 소유자가 아닌 금융인들이 대출받은 자본가들을 쥐어흔드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봤다. 불특정 대중의 자산, 은퇴노인의 연금지급용 목돈, 국가의 유휴자산 등의 금융자본이 생산자본을 압도하고 있으며, 생산자본가들은 관리인으로 전락하고 금융자본의 지배가 전면화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식의 사고는 로자 룩셈부르크로 대표되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서 강하게 비판 받았다.

생산의 차원에서 바라보기도 한다. 자신이 쓰기 위하는 생산 또는 착취는 자본주의의 특징이 아니며, 팔기 위하는 생산 또는 착취야말로 자본주의의 특징이라는 주장이다.

맨큐의 경제학에서는 수많은 기업과 가계가 시장에서 상호 작용하면서 분산된 의사결정에 의해 자원 배분이 이루어지는 경제체제로 정의되었다.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하나, 자유주의(특히 경제적 자유주의) 관점에 기초한 규정이 가장 일반적이라 볼 수 있다.

2.2. 시장경제와의 관계[편집]


위와 같은 논쟁으로 인하여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쓰는 것을 쓰지 않고, '시장경제(Market economy)'라는 용어를 대신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의 전경련, 자유기업원 등의 단체나 보수 정치인 및 경제학자들은 현대 경제체제를 '자본주의'로 설명하지 않고 '시장경제'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그러나 일단 자본주의시장경제는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을지언정 동의어는 될 수 없다. 자본주의 경제는 단순히 공산주의 경제나 사회주의 경제의 반의어가 아니라, 농노제 경제나 노예제 경제와 단계론적으로 구분되면서 성립된 용어이기 때문이다.[6]

경제사학적으로 자본주의란 노동력을 통제하는 방식이 노예제나 농노제에서처럼 무력과 신분적 예속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닌 자본이라는 매개를 통해 작동하는 경제체제를 의미한다. 일례로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는 주인의 명령과 강제에 의해 자신의 노동력을 주인에게 제공하게 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여 고용주에게 제공하고 이를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

이렇듯 이전 시대와 같이 노동력을 제공하는 측이 누군가의 소유물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또는 폭력에 의해 노동력을 갈취당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평등한 관계에서 노동력을 거래하게 되는 관계를 자본제라고 하며, 이러한 노동력 이용 방식이 보편적인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라고 정의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본주의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 점차 다양해졌으나,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의미의 변형 또는 확장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시장경제는 자유시장을 통한 재화의 거래가 주류가 되는 경제체제로서, 자본주의가 일반화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어디서든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시장경제의 도입이 필수적이다. 고로, 동의어는 아니지만 두 개념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둘을 동의어로 취급하면 상당히 복잡한 문제에 처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자본을 통한 노동 상품의 구매 대신 강제적인 노예제가 보편적인 옛 미국 남부나, 섬노예 문제가 심각한 한국의 일부 지역은 시장경제가 아닌가? 옛 미국 남부의 여러 면화농장은 명백하게 자본주의적 방식이 아닌 노예제적 방식으로 운영되었지만 노예의 강제 노동으로 생산된 면화는 곧 미국 국내외의 자유시장에 유통되어 판매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동의어로 볼 경우, 분명 노예들의 노동으로 굴러가는 면화농장을 '자본주의적 농장'으로 보거나, 멀쩡히 시장에 면화를 내다파는 농장을 '비(非)시장경제적 농장'으로 보는 모순이 발생한다.

요약하자면, 자본주의는 노동력을 이용하고 거래하는 한 방식이고 시장경제는 노동력을 포함한 여러 상품들을 자유시장이라는 매개를 중심으로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는 경제체제를 의미한다. 분명 두 개념은 서로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또 서로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서 반드시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그것이 곧 두 용어가 동의어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3. 용어[편집]


아래의 역사 문단에서 보듯이 자본주의의 기원은 16세기 경으로 보지만, 'capitalism'(자본주의)라는 말은 그것에 비하면 더 늦은 시기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자본을 뜻하는 capital은 12, 13세기부터 사용되어왔고, '자본의 소유자'라는 뜻의 capitalist는 1600년대 초반 등장하였다. 어원적으로 Capitalism의 모체가 되는 두 단어 모두 어떤 비하적인 의미도 담지 않았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캐피탈리즘(capitalism)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이는 루이 장 조셉 샤를 블랑(Louis Jean Joseph Blanc, 1811 ~ 1882)[7]라는 역사가 겸 프랑스 정치가이다. capitalism이라는 단어는 1854년에는 "자본을 가지고 있는 상태"[8]라는 뜻으로 처음 등장했고, 오늘날의 의미대로 "자본가가 되기를 부추기는 경제/사회 체계"라는 의미로서의 '자본주의'라는 단어는 1872년에서야 비로소 처음 쓰이기 시작했다. #

'자본주의'라는 단어부터가 마르크스가 경멸적으로 붙인 단어라는 주장도 있다. 이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관계부터 틀렸다. 위에서 보듯 '자본주의'라는 말은 마르크스가 개발한 말은 아니고 본격적으로 널리 알린 시초이다. 자본주의라는 표현은 막스 베버의 기념비적인 저작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9]》에도 포함되어있다.

capital이라는 단어와 달리 자본이라는 한자어는 문서에서도 보듯이 한자어 ''은 의외로 근대 번역어는 아니고 조선 시대부터 쓰이던 말이다. 정조실록을 보면 資本이라는 한자어가 '밑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오늘날의 의미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물론 '자본', '자본주의' 등의 단어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영어 'capital'의 번역어로 채택되면서이다.[10] 한편 중국의 엄복(嚴復 1853-1921)은 capital을 모재(母財)라고 번역하기도 하였다.[11]


4. 역사[편집]


러시아계 영국인 경제학자 아나톨 칼레츠키(1942~)는 1776년 이후 자본주의를 버전별로 나눴는데, 여기서는 칼레츠키의 기준도 바탕으로 한다.


4.1. 기원[편집]


자본주의는 흔히 16세기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것으로 본다. 이는 페르낭 브로델의 설명이며, 지난 세기 세계사의 거장인 이매뉴얼 월러스틴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이 여전히 지지한다.

한편 아부재닛 루고드는 이를 13세기까지(나아가 그 이전 이슬람 세계에서 시작되었다고) 올려 잡았으며, 캘리포니아 학파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는 편.

반대로 브로델을 비롯한 아날 학파가 근대 이전 자본주의의 기원을 찾는 것에 너무나 많은 분량과 심혈을 기울인 나머지 여기에 반발한 현 세대의 역사학자들은 마사 호웰처럼 "단순히 현대 자본주의의 정신적 근간을 이루는 '상업 정신'과 하나의 근대적 정치, 경제적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후자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근대적 의미의 공업 생산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오히려 산업혁명이 태동한 18세기 후반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기원을 더 늦게 잡는 경우도 있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경우엔 자본주의의 시작을 규정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라고까지 말했다.


4.2. 상업 자본주의[편집]


자본주의의 초기 형태로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 신대륙의 발견과 신항로가 개척되고 중상주의 정책과 적극적인 해외 식민지 개척을 통해 발달하게 된다. 당시 유럽은 산업 혁명 이후 상공업의 발달과 공장제 수공업이 확대되며 자본이 축적되었으며 적극적으로 산업적인 재화 생산보다는 재화의 교환과 판매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 체제이다. 동양과의 무역이 확대되며 향신료비단 등 큰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재화가 유럽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반대로 유럽은 새로운 원료 산지와 판매 시장을 얻게 되었다.


4.3. 자본주의 1.0 시대 (1776 ~ 1932)[편집]



4.3.1. 산업 자본주의[편집]


1776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출간된 후 정부가 경제활동에 간섭하지 말라는 자유방임주의가 점차 뿌리내리기 시작했고, 같은 시기 산업혁명이 도래하면서 이 사상을 바탕으로 산업 자본주의가 성장했다. 산업혁명 후 기계를 이용해서 질 좋은 상품들이 나오자 수공업자들이 몰락하여 도시 노동자로 전락했고, 이에 따라 사람들은 도시로 몰렸으나 일자리 수는 따라주질 않았다. 기업가들은 정부의 비호를 받은 채 고용여탈권을 가지며 싼 값으로 고용한 후는 부려먹으면서 이윤 창출에 주력했으며, 노동자들은 일요일도 없이 하루 16시간이나 일하는가 하면 여자와 어린이들까지 공장에 내몰렸다. 작업 중 병이 들거나 사고로 다쳐도 보상 없이 쫓겨났다. 이에 따라 노동운동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으며 카를 마르크스 같은 공산주의 시조들도 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주축 세력인 자본가들의 신분은 오늘날과는 차이를 보였다. 프랑스, 영국이나 독일 등 자본주의가 발달한 강국들에서조차 19세기까지는 여전히 귀족들이 형식상, 심지어 실질적으로도 자본가들보다 위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만 해도 귀족들이 우세에 있는 영국이나 독일 같은 나라들이 미국에 비해서 밀린다고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혈통에 의해 결정권을 부여받는 체제, 더이상 무력으로 영민들을 윽박지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각국의 상업자본은 꾸준히 축적되기 시작했고, 이들이 경제적 실권을 장악했음에도 정치적인 권한을 얻지 못하는 상황은 유럽 여러국가에 변화의 흐름을 촉구했고, 그것은 프랑스나 소련에서의 혁명이나 영국에서의 빈민들의 정치 참여 확장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반면 전통적인 귀족층이 얇은 미국은 국제적인 저인식 속에서도 차츰 국력을 쌓아나가 이미 1.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유럽대륙 어느 국가도 미국의 산업생산력을 넘보지 못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들은 이런 미국의 힘을 모르고 있었지만 양차대전에서 이들은 대륙을 넘어 투사해오는 미국의 힘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4.3.2. 독점 자본주의[편집]


소수의 자본이 국가 전체의 산업을 넘어 문화까지 독점하는 독점 자본주의는 흔히 제국주의와도 호응한다.

특히 미국에선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듀퐁, 맥코믹, 벨 컴퍼니, US 스틸 등 제조업 재벌(트러스트)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산업화에 따른 경제성장으로 금융업도 같이 발달해 JP 모건, 씨티뱅크 같은 독과점 업체들이 나왔다. 연방정부의 자유방임 속에서 일부 주를 제외하고 대다수 주들은 세금을 많이 걷기 위해 독점자본을 허용했다. 그러나 독과점의 피해가 점차 커지자 1890년에 벤자민 해리슨 행정부가 '셔먼 독점금지법'을 제정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행정부 때 적극 활용하기도 했으나 오히려 대기업들은 법망을 피해서 시장독점을 지속했다.

독점자본주의 시기 자본주의는 유래 없을 정도로 그 실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독과점, 부정적 외부효과, 공공재 부족 등 시장실패트러스트 기업들로 인해 극대화되었으며 식민지에서는 비인간적인 착취가 이어졌다. 어쨌든 식민지에서 팔아온 것을 잘 분배했으면 적어도 자기나라 국민은 먹여살릴 수 있었겠지만 그마저도 잘 분배되지 않아 가계는 점점 수요를 상실했다.[12] 그 모순이 쌓여 일어난 폭풍이 바로 대공황이다. 사실 이론이 망하지는 않았다. 이론대로 경제적으로 보든 승자들은 여전히 승자였으며 패자들만 사라진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승자들에게 경제력만큼의 군사력이 없어서 패배자들이 대량으로 발생하자 결국 계속 유지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대공황 이후 존 메이너드 케인즈를 필두로 데뷔한 케인스 학파뉴딜 정책 등으로 자신들의 이론이 맞음을 어느 정도로 입증해냈고, 사회민주주의가 발흥하게 됐다.[13]


4.4. 자본주의 2.0 시대 (1932~1980)[편집]


이 시대에는 FDR 행정부의 '뉴딜 정책' 같이 정부가 경제활동에 개입하여 시장을 간섭하고 질서를 바로잡았지만, 기업들은 온갖 규제 때문에 경제활동을 제대로 하기 어려워 실제 경제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이는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사태'로 이어졌다.


4.5. 자본주의 3.0 시대 (1980~2010)[편집]


1981년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 규제와 세금을 줄여 경제활동을 자유화하는 '레이거노믹스'를 창안하면서 신자유주의의 뿌리가 마련됐고, 1990년대 들어 소련 등 공산권의 붕괴로 자본주의의 승리가 기정사실화되면서 인류의 역사는 자본주의에서 끝날 거라는 전망도 있었다. 이를 설파한 학자는 <역사의 종말>의 저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등이다. 그러나 기업활동이 또 자유화되면서 기업가들은 끝없는 욕망으로 독점을 더더욱 강화하는가 하면, 글로벌화된 세계 시장에서 거침없이 부를 빨아들인 탓에 빈부격차가 더해져 2000년대의 20:80에서 2010년대에는 1:99로 벌어졌다.

무한한 탐욕 때문에서 서민 경제가 파탄나자 2008년 대침체 당시 월스트리트 금융업체들은 파산 신청을 했고, 정부도 국민의 세금으로 제너럴 모터스, AIG, 씨티그룹 등지에 구제금융을 해줬지만, 정작 금융기관들은 반성 없이 보너스 파티를 벌였다. 이와 같은 모습은 2010년 월가 점령 시위로 번졌다.

이 상황 속에서도 대다수 유럽의 국가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자본주의적 색깔이 옅어진 면도 있다. 사회민주주의로 불리는 체제, 즉 고율의 조세제도로 뒷받침되는 고복지 국가가 실현된 상태라 할 수 있다.

한편 구 공산권 해체와 2000년대 이후 세계 정세의 불안정, 2010년대 이후 세계 경제의 위기를 통하며 시장자유주의와 자본의 사유화(민영화) 등을 주장하는 우파적 담론이 거세고, 또 그에 반대하는 좌파적 담론들, 또는 제3의 길의 후신들, 대안 우파들까지 각종 사상이 학계에서, 그리고 정치계에서 각축장을 벌이는 상황이다. 재미있게도 신자유주의는 경제적인 차원에서 논의되는 자본주의보다도 더 모호하다.


4.6. 자본주의 4.0을 향하다 (2010~ )[편집]


제4차 산업 혁명, 특히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전은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가치를 거의 0으로 만들고 있다. 노동뿐만 아니라 한계생산성이 0으로 수렴하면서 기업들이 이익을 창출하는 일마저도 점점 더 어려워진다.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플랫폼 회사들은 막대한 수입을 거두는 반면, 많은 기업들은 수익모델이 점점 악화된다. 일자리를 빼앗긴 노동자들은 소수의 고급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시장 법칙에 따라 인공지능에 투자할 만큼의 가치도 없을 정도로 부가가치가 낮은 업종에서만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저임금 노동자로 전락할 수 있다. 이런 양극화는 소비 계층이 있어야 지속 성장할 수 있는 자본주의를 위기로 몰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는 자칫 거대한 플랫폼을 가진 기업들만 남는 봉건주의와 비슷한 사회가 될 수도 있다.[14] '능력주의' 문서도 참고. 공동체, 생활 환경 관련 글

2008년 대침체를 계기로 아나톨 칼레츠키 같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인도적 성격을 지닌 '자본주의 4.0' 시대가 오리라고 얘기했고, 자본주의 국가들은 정글 자본주의 대신 인도적 자본주의로 이행해야 한다는 과제를 떠안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같이 친기업적에 능력중시적인 국가들은 이러한 딜레마를 안고 있다. 인류가 기술적 특이점에 도달해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되면 자본주의가 무너질 것이란 이 기사 역시 그러한 맥락이다. 하지만 기사는 현 체제에 불만이 많다 하는 것을 방증했을 뿐, 어떠한 시대가 열릴 것인가에 진지하게 대해서 고찰한 것은 아니다.

한편은 자본주의를 긍정적 혹은 필연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초역사적 체제로 여긴다. 그러나 미래는 알 수 없는 일이기에 단언할 수는 없는 문제이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체제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쉬운 시대에 살고 있다."

프레더릭 제임슨

위와 같은 말도 있다. 차라리 세계의 종말을 상상할지언정, 자본주의의 종말은 상상하지도 못하는 세태를 일컫는 말이다. 미디어에서도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재는 차고 넘치지만 문명이 붕괴되고 나서도 대체화폐 등을 사용해서 사회를 구축하는 등 자본주의가 멸망하는 내용의 작품은 거의 없다.[15]


5. 자본주의는 왜 사라지지 않았는가?[편집]


Money doesn't change men, it merely unmasks them.

(돈은 사람을 바꾸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진정으로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헨리 포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책들의 홍수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2015년에 출판되어 화제를 일으킨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에서도 자본주의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대충 요약해보면, 자본주의 체제의 전제는 끝없는 성장이고 영원히 계속되는 경제 성장에 대한 자본주의자의 믿음일 뿐인데, 운좋게 과학자들이 계속 새로운 기술과 산업을 개발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전해왔고 이젠 경제의 거품이 터지기 직전인지라 과학자, 기술자 등의 개발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고 자본주의는 곧 끝난다는 식의 논리다. 수요를 부추겨서 먹고사는 자본주의 특성상 언론이든 책이든 건강식품이든 팔아먹으려고 '공포 마케팅'을 과하게 하는 것은 자본주의 특유의 문제점이고, 자본주의 자체도 공포 마케팅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공포 마케팅의 홍수다보니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떨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자본주의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며 곧 망한다는 책을 읽은 대중들의 행복지수가 높아지겠는가.

당장 자본주의를 버려야 할 것 같지만, 문제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정작 사피엔스의 결론이 뭔가 하면 농업혁명은 최대의 사기고 사기가 좀 더 세련화된 것이 국가, 사회, 종교, 자본, 제국이라며, 풍요와 안전을 가져다 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폭압적 장치들이니 농경사회 이전에 그 자유로운 삶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박민영 문화평론가는 사피엔스 저자를 제국주의자라고 깠는데, 저자가 '지구제국'의 필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또 지구제국이 ‘옛 로마 제국과 비슷하게’라고만 할 뿐 “구체적으로 어떤 주체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지구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우주와 문명에 대한 여러 얘기들을 물 흐르듯 다 잘 섞어서 말하는 데는 능숙한데, 정작 구체적 내용이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진보언론에서는 자본주의가 곧 사라질 것처럼 묘사한 사피엔스에 열광했지만, 정작 저자는 진보언론에서 찬양해 마지않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평가절하했다. '민주주의는 상대적으로 최근에 발명된 것이고 세상에 가져온 임팩트도 적으며 점차 힘을 잃고 있기에 민주주의가 계속 지배적인 시스템으로 남을지는 의심스럽다'고 평했다.# '프랑스 혁명'도 평가절하했다. 그래서 사피엔스에 비판적인 의견으로는 저자가 '불안한 미래'를 만들어 부와 명성을 얻었다며 수많은 공포 마케팅의 하나로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원래 '대안없는 비판'은 무책임하고 남을 지적질하고 까는건 쉽다.

사피엔스의 저자는 마치 자본주의자들이 과학자들 바짓가랑이 붙들고 영원한 경제성장에 대한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간주하나, 그게 꼭 그렇진 않다. 일례로 유명한 경제이론 중에 '깨진 유리창의 역설'이란 것이 있다. 유리를 교체하기 위해 돈을 쓰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거래를 창출하고 경제를 활발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론이다. 실제의 예로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일부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으나, 역설적으로 복구 경기로 인해 경제성장률이 올라갈 것이라고 해외 전문가들이 예측하기도 했다. 파괴된 인프라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일부 경제가 활성화되고, 중국은 아예 꼼수로서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해 멀쩡한 도시를 그냥 뒤엎고 다시 도시를 만들기도 했다. 여하튼 수요가 있으면 경제가 활성화되므로 신제품이 개발되면 수요의 급증으로 활발해지지만, 신기술과 경제가 둔화된다고 해서 북한 수준으로 폭망하지는 않는다.

한국에서 경제가 망했다고 평가받는 90년대 IMF 시절도 북한 '고난의 행군' 시절처럼 굶주리거나 아사자가 속출할 정도는 아니었다. IMF 시절에도 '이밥에 고깃국'은 흔했다. 일본도 '잃어버린 30년' 어쩌고 하지만, 중국의 떡상으로 경제 3위로 밀려난 정도이고 '고난의 행군' 수준과는 전혀 비교불가다. 단지 미국을 다 살 수 있다느니, 엄청난 호황으로 돈자랑하던 당시에 비해 못산다는 의미다. 하지만 일부에선 자본주의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며, 마치 북한과 도찐개찐이 될 것처럼 선동하며 역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답이라는 등 이상한 식으로 물타기를 하기도 한다. 북한 간첩단의 선동일 수도 있다. 한국의 역사교과서에서 김정은이 집권 후 북한의 경제를 발전시켰다며 긍정적으로 묘사한 대목이 논란이 되었는데, 망한 자본주의가 발전한 북한보다는 훨씬 더 잘살 수도 있다. '썩어도 준치'인 셈. 북한이나 중국에서 사회주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 없는 건 단지 죽기 때문이다.

수요가 증대하면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것이 자본주의이므로, 과학기술이 정체되면 자본주의가 정체될지언정 망하는 것은 아니다. 삼성처럼 꾸준한 신기술로 성장하는 기업도 있지만, 음식처럼 꾸준한 수요가 보장되는 분야엔 스테디셀러 상품 하나로 꾸준히 버텨오는 기업들도 있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마르크스인데, 실제 자본주의가 극한으로 발달하고 난 후에 공산주의가 도래한다고 했다. 모든 이들이 다 펑펑 잘 살 정도로 자본주의가 극한까지 발달할 것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자들도 회의적이며, 또한 그렇게 생산력이 극한까지 발전하여 다들 부자로 잘 살고 있는데 왜 굳이 공산주의로 전환한다는 것인지도 모순이다. 원래 인간은 경로의존성으로 인해 가급적이면 원래 살던 방향에(체제든 종교든 문화든 언어든) 의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 경제가 계속 꾸준히 상향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되기도 했다가 불황과 호황을 반복하는 패턴을 보이므로 마르크스가 말한 '극한으로의 발전'이 대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르크스도 모를 것이다. 애시당초 경제의 통계 자체가 역성장을 하기도 했다가 발전하는 등 패턴을 보이며 단지 무한정 후퇴하지도 않고 바닥을 찍으면 반등하기도 한다는 것이므로 경제가 무한정 성장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자본주의가 완벽하지 않지만 사회주의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즉,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체제가 아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당장 체제로 전쟁까지 벌인 한국만 봐도 만약 북한에서 모두가 다 잘사는 지상락원을 보여주고 무상주택, 무상의료, 무상급식 등 다 공짜로 주는 유토피아를 이룩했다면 생활난에 허덕이는 한국의 청년들은 공산주의자가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의 현실은 시궁창이니 북한을 답으로 여기는 청년들은 많지 않다. 아무리 헬조선이라고 비난해도 막상 "북한 갈래?"라고 하면 여기가 비교도 안 되게 낫다는 반응이 절대다수이다. 반자본주의 끝판왕 북한이 자본주의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북한이 꿈꾸던 이밥에 고깃국 먹는 지상락원은 자본주의 한국에서 이뤄졌다. 니키 헤일리 미국대사는 전 세계 극빈 인구가 94%였다가 10%로 줄었는데, 이런 일은 많은 국가들이 시장경제를 받아들여 가능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번지르르한 이론이나 말 따위가 아니라 '결과로 입증'해보였다. 한국에선 노숙자들이 '일 안할 자유'도 있으면서 무료급식소에서 쌀밥에 고깃국 먹으며 잔반도 많이 남긴다. 거지도 배부른 나라가 된 것이다. 하지만 세계 최악의 노예국가로 선정된 북한에서는 일 안하면 중범죄이므로 강제노동 명령을 거부할 권리 따위도 없고, 그렇게 착취당하며 노예처럼 일해도 굶주리거나 아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북한에 비하면 지상락원인 한국이지만 헬조선이라며 분노하고 행복지수가 낮은 이유는 '아는 게 병'이기 때문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법인데, 모든 정보가 오픈되다보니 유명인들의 호화로운 생활상이나 부정부패 기사를 접하다 보면 박탈감을 받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북한처럼 모든 정보를 차단당한 채 '모르는 게 약'이라며 눈과 귀를 막고 '우물 안 개구리'로 사는 것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갑질을 통제하고 '을'을 보호하는 장치가 많이 발전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불공정 계약으로 노예가 됐다며 욱해서 '공산당 선언'을 외치는 사람들이 일부 있을 정도니, 하물며 자본주의 초기에 통제가 안되던 갑질에 분노한 을들의 반란은 나름의 명분이 있기도 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했는데, 문제는 국가가 갑질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2019 세계 최악 현대판 노예국가로 선정됐다(워크프리재단). 그나마도 개인간의 갑질은 대항이라도 할 수 있지, 국가가 갑질하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강제노동 명령을 거부하면 중범죄다. 개인도 조그마한 감투나 권력이 있어도 갑질을 하고 완장질하려는 본성이 있는 판국에, 국가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결국 체제가 아닌 사람 문제였다.

차라리 모두 다 망해서 거지가 되면 거지들끼리는 평등할까 싶지만, 그 유명한 '거지왕' 김춘삼은 염천교 거지 소굴의 '최고존엄'이었다. 다 가난해보이는 탈북자들도 서로 어디 출신이네 하면서 우월의식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래서 '찬물(거지)도 위아래가 있다'는 속담이 있으며 수평 폭력이 발생한다. '무정부주의' 서울역 노숙자들도 먼저 왔다고 텃세 부리기에 '오뉴월 볕 하루만 더 쬐도 낫다'는 속담이 있다. 법적 최저임금도 못받는 '평등한' 사병들 간에도 하루라도 먼저 온 순으로 권력을 쥐니 계급사회가 형성되어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 가해자인 이 병장은 내무반의 최고존엄이었다.

인간도 무리동물인지라 서열을 나누려는 본능이 있기에 갑이 되면 갑질을 하려는 본능이 있어 갑에게 너무 많은 힘을 쥐어주는 것은 위험하다. 권력이 재력을 흡수하면 절대반지처럼 무서워지는데, 사우디의 왕세자 빈 살만은 천조원대 재산에 절대권력까지 독점한 '최고존엄'으로서 아무도 덤빌 수가 없다. '공산혁명'에 성공하여 자본주의를 없앤 북한이 '김씨왕조' 소리를 들으며 용비어천가 마냥 '김일성 대원수는 인류의 태양'이라는 둥 낯뜨거운 찬양이 난무하는 이유 역시 절대권력과 재력을 다 손에 쥐었기 때문이다. 애초 '신'이란 존재 역시 절대적인 힘을 지닌 존재이니 찬양하는 것과 같다. 조선중앙통신은 장성택 처형 후, 이 하늘 아래서 감히 원수의 '절대적 권위'에 도전하면 혁명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징벌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따라서 국가의 갑질을 통제하려면 권력과 재력을 분리하는 것이 더 나은데, 이게 바로 자본주의다. 괜히 중국공산당알리바바 그룹 창업주인 마윈을 견제하며 찍어낸 것이 아니다. 실제 문재인 전 대통령은 북한 인권을 개선하려면 북한에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퍼뜨리는 길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대략 정리하자면, 자본주의에서 자본가들의 갑질과 착취가 심해 을의 분노가 커졌고 결국 "자본주의는 해로운 새다!"라며 제사해 운동 마냥 뒤집어 엎은 후 국가에게 공정하게 관리해달라고 거대권력을 몰아줬다. 하지만 이젠 그 국가가 절대권력으로 스스로를 '최고존엄'으로 신격화한 후 국민들에게 절대복종을 강요하고 자본가들보다 훨씬 더 심한 갑질과 착취를 하니 김씨왕조 북한에서는 '자본혁명'이 벌어져야 그나마도 인권상황이 개선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실제 장마당 경제를 통해 북한의 계급제인 성분제가 흔들려서 장마당을 탄압한다는 기사도 보도되었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하므로 국가에게 통제하기 힘든 거대권력을 몰아주는 것은 위험하니, 권력과 재력을 분리시켜놓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자본가들의 갑질을 통제할 제도적 장치를 발전시켜나가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인정받고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도입됐던 '주52시간 근무제' 같은 것도 그러한 예이다. 자전거 피하려다 똥차에 들이받힐 것 같으니 자전거를 안전하게 방어하려는 것과 같다.

'무식한 자가 신념을 가지면 무서워진다'는 말처럼 무조건 과격하게 뒤엎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실제 남베트남은 1960년대에 반전시위, 징병제 반대 시위가 열릴 정도로 나름 진보적인 민주국가였으니 문제점을 하나둘씩 보완해나갔다면 대만이나 한국처럼 발전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정부가 부패하다며 뒤엎어버리고 베트남 공산당이 들어서긴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아 오히려 외국인들에게 자본주의에 눌러앉아야될 명분을 주었다. 특히 베트남을 적화통일한 호치민에 대해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세상사람들이 호치민 주석의 정신을 본받는다면 이 세상에 부패라는 것이 없어질 것'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김일성과는 달리 호치민의 베트남에 대해서는 외국에서도 환상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비록 못살아도 부패나 인권, 자유 등 다른 방면의 가치라도 개선됐다면 나름 의미가 있었겠지만, 경제를 포함하여 전부 흑화돼버리는 참사가 벌어졌다.

비자본주의권 국가들중에서 낫다는 소리듣는 베트남 또한 안타깝게도 2018년 베트남의 부패지수는 117위로서 처참한 상황이며, 한국(45위)과 일본(18위)과는 비할 바가 못된다. 또 국경없는기자회(RSF)가 발표한 ‘2019 세계 언론자유지수’에서 조사 대상 180개국 중 176위, 2022년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에서 발표한 자유지수에서 19점을 맞고 '부자유 국가'로 선정되었다. 상태가 별로 안좋은 방글라데시도 39점으로 '부분자유 국가'는 됐는데 말이다(한국은 83점으로 '자유국가'). 김일성보다 훨씬 낫다는 호치민의 베트남조차 이러면 자본주의는 사라질 수 없다.

니키 헤일리 미국대사는 사회주의는 정부가 경제 뿐 아니라 개인의 생각과 자산, 그리고 생명까지 통제하는 체제라고 지적하며, 이같은 사회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자본주의는 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의미할 뿐 아니라 다른 기본적인 권리를 말한다고 강조했다. 원래 사람에게는 한번 히잡을 쓴 여성이 계속 쓰려하는 것과 같은 경로의존성이 있어 한번 '자유'의 맛을 보고 길들여진 시민들이라면 정부의 통제에 거부감을 느낄 가능성이 크다.

중국인들은 탄압을 피해 해외로 탈출해도 자유롭지 못하고 중국 비밀 경찰서에 감시당하고 있다.# 니키 헤일리는 사회주의 중국의 14억 인구가 항상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그렇기에 자본주의가 인류가 선택해야 할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자본주의에도 빈부격차 등의 문제는 있다고 지적했는데, 탈북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 역시 한국 자본주의 시스템에 '빈부 격차'가 존재하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다만 북한의 빈부격차가 남한보다 더 심하다며, 말단(최하위층)에 있는 사람은 하루에 한 끼도 먹기 힘든 경우가 있다고 부연했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권리가 체제보다도 우위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체제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비판했다고 죽을 걱정을 하는 사람은 없으며, 오히려 자본주의 까는 걸로 자본을 축적하여 먹고사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종교나 미신이 지배하는 체제에서 개인의 목숨은 허망하기 그지 없는데, 고작 히잡을 안 썼다고 여성을 무참히 살해하거나 공양미 삼백석에 팔린 효녀 심청이처럼 인신공양 제물로 전락하기도 한다. 중국과 북한에서는 반사회주의적 행위들을 제압하고 엄격히 통제하는 것을 중대한 과업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회주의 자체가 종교처럼 신격화되어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은 신성모독으로서 이슬람 국가에서 코란을 까는 것처럼 끔살당할 수 있다. 이슬람 국가도 아닌 프랑스에서조차 이슬람 풍자만평 올린 언론사가 테러를 당해 살해당했으며, 중국 비밀 경찰서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는 중국인들이 해외라고 함부로 '사회주의'에 대해 입을 놀렸다간 실종될 수도 있다.

유독 자본주의 체제만 문제가 있어보이는 것은, 자본주의 외의 국가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시궁창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베트남 시절엔 훗날 간첩으로 밝혀진 기자들과 야당 정치인들, 시민단체, 종교인들이 국민들의 분노를 선동하며 허구헌날 반정부 시위 천지였고 정부와 체제를 비판하는 기사와 벽보 홍수였으니 그걸 접한 국민들이 정부에 불만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무서운' 베트남 공산당이 들어선 후 언론자유지수는 180개국 중 176위로 추락하며 비판 자체가 거세되었기에 부패지수가 시궁창이어도 조용해졌다. 원래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는 항상 해맑게 웃고, 너무 많은 것을 아는 철학자는 심각하게 고뇌하며 근심이 가득한 법이다. 너무 많이 알면 다친다는 말도 있다. 물론 '모르는 게 약'이므로 정부의 부패를 모른 채 '우물 안 개구리'로 사는 것이 행복지수는 더 높을 순 있고, 매일 부정부패 기사가 쏟아지며 그것을 접하는 한국인들은 실망을 하게 되니 행복지수는 낮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언론의 감시' 기능이 작동하여 그나마도 통제가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베트남에 비해선 '반부패국가'로 분류된다.

한국에서 2008년 ‘뇌송송 구멍탁’으로 요약되는 '광우병 괴담' 당시 공포에 질린 촛불소녀는 이명박을 비판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그래서 글자를 아는게 우환이라는 '식자우환'이란 사자성어도 있으며 '가짜뉴스'가 문제가 되는 이유이다. '뇌송송 구멍탁' 기사를 읽은 여고생이 행복하다고 느끼겠는가. '촛불집회 전단지에 유서 남기고 여고생 자살' 이후 촛불소녀를 열사처럼 미화하여 반정부 투쟁의 수단으로 이용하며 더 혼란해졌듯이 베트남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당시 남베트남에서 '필요악'적으로 반정부 시위를 찍어누르는 강력한 독재로 북베트남이 자멸할 때까지 눌러놔 시간을 벌었다면 살았을 수 있는데,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는 들불처럼 번져가는 시위에 속수무책으로 자멸했다. 북한은 망한 2020년대에도 계속 한국에 가짜뉴스 유포 지령을 내리고 있음이 밝혀졌다. 문재인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문제 없다'란 결론[16][17]을 내렸음에도, 북한 지령문에는 '방사능 괴담' 유포로 사회적 반감과 불안감을 증폭시키라고 지시했다. 자신들은 빗장을 걸어잠근 채 오픈된 한국에 저런 식의 가짜뉴스 유포는 국력차이가 벌어진 지금도 꽤 위협적인데, 하물며 북한의 국력이 한국과 대등하거나 더 잘사는 상황에서 저런 가짜뉴스를 유포한다면 한국도 자멸할 수 있다.

대만은 원래 중국정부였으나, 당시 '반란세력'이던 중국 인민해방군이 승리하여 섬으로 쫓아낸 후 대륙을 점령했는데, 이름도 거창한 '인민해방'과는 달리, 현실은 중국의 국외 불법 경찰조직 운영으로 인민들은 해외로 탈출해서도 해방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언론의 자유가 없는 중국에서 미화된 기사만 보도하니, 심지어 한국의 정치인들까지 중국의 정치체제에 환상을 품기도 했다. 특히 시진핑이 집권 후 정적제거 목적으로 '부정부패 청산'을 내걸고 정적들을 한창 숙청하던 시기에 한국의 일부 정치인들은 부패를 척결하는 시진핑을 배우자는 발언까지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현실은 '시진핑 반부패 운동으로 적폐는 더 쌓이고 일인지배 기반 강화' 기사에 나온 것처럼, 반부패 운동이 끝나자 '시황제'로 등극해 있었고 부패지수는 80위에서 87위로 더 떨어졌다. 오히려 한국의 부패지수가 중국보단 훨씬 좋으며, 인민해방군이 '부패정권'이라며 추방했던 대만은 부패지수 25위로서 중국에 비하면 훨씬 '반부패국가'가 되었다. 2020년 미국 상원을 통과한 TAIPEI 법안에는 '대만은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번영하는 국가'란 대목이 있다. 이런 일련의 역사들을 살펴보면, 자본주의를 없애기보다는, 자본주의를 다듬어 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최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5.1. 자본주의의 위기 극복[편집]


제국주의 시대의 독점자본주의는 큰 폐해를 보이고 있었다. 일종의 자본주의의 위기라고도 볼 수 있을 듯하다. 이에 따라 마르크스와 같은 학자는 자본주의가 곧 막을 내릴 것이며 공산주의 사회가 등장할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고도 자본주의 사회는 여전히 이어진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생산계급이 자본을 투자할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의 비율인 이윤율이 줄어든다고 했는데, 이는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경제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인 측면의 기술혁신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계급은 줄어드는 이윤율을 만회하기 위해 인간의 생활세계를 자본으로 치환하는데, 교통, 교육, 의료 등 국가공공부분의 민영화가 일례이다. 생산계급의 이윤율이 자본계급에 비해 계속 저하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계급의 이윤추구가 극단적으로 흐르면 노동계급이 반기를 들어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할 것이란 게 마르크스의 이론이다.

결정적인 변수가 생긴 것이 바로 노조의 설립과 확장이다. 즉, 자본주의 내에서도 충분히 노동계급의 이권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으니 굳이 피를 흘려야 하는 사회주의 혁명까지 갈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양대노총이 점점 거대해지며 정재계와 사회에 입김이 강해지고 노동친화적인 문재인 정권 시절에는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한다며 주52시간 근무제가 전면 시행되기도 했다. 오히려 반대로 노동계급의 이윤추구가 강해지며 양대노총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크게 늘어 2022년 화물연대 파업은 실패했다. 아예 민주노총을 '민폐노총'이라 부르며 강경대응을 하던 윤석열 정권의 지지율이 오를 정도였다. 이젠 자본계급이든 노동계급이든 상관없이 국민들의 지지만 얻는다면 자신들의 이권을 관철시킬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한계이윤율저하 경향의 법칙은 어디까지나 경향에 그치고, 정말로 그런지는 마르크스 본인도 회의적인 입장을 지녔다. 또한, 수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이 나중에 연구하길 한계이윤율저하 경향의 법칙과 노동가치설은 상호 간에 논리적 모순이 있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고,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폐기처분을 받았다. 주류 경제학의 실증분석에 따르면 이른바 이윤율(이자율)은 자본이 축적될수록 일정 수준에서 수렴한다.

또,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가 생긴 1920년대의 대공황은 국가의 재정지출 확대와 수정 자본주의 이론으로 극복했으며, 전후 인플레이션은 브레튼우즈 체제를 통해서 억제했다. 이러한 처방 밖에도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체제와 자유주의로 공산진영보다 놀라운 기술혁신이 이루어진 점도 자본주의 진영이 체제경쟁에서 이긴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 체제가 망하지 않는 게 자본주의 자체에 결점이 없다는 말은 아예 아니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라고 보는 사상들 역시 아직은 유의미하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사유재산의 인정과 개개인의 자유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유재산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는 쉽게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즉, 혈통으로 지위가 결정되던 전근대 신분제 사회 속에서, 재산은 개개인이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의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으로 기능해왔기 때문에 이를 전폭적으로 인정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쉽사리 사라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이다. 또한 자본주의 이전에도 시장경제의 틀은 존재해왔기 때문에[18] 미래에도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는 사라질지언정 시장경제 자체가 사라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점도 있다.

마르크스는 공산사회가 도래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극한으로 발달하고 난 이후에 도래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아직은 그 시기가 오지 않은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문제는 마르크스의 시대였던 19세기가 지나고 20세기 중반쯤 지나자 드디어 공산주의를 할 시기가 도래했다며 전세계적으로 '공산혁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달에 착륙한 소련의 과학기술과 경제력은 21세기인 지금 봐도 경이로울 정도니 "드디어 때가 왔어!" 들고 일어났던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그 당시 소련의 경제력을 훨씬 뛰어 넘어야 가능하다면 딜레마가 생겨난다. '부자 몸조심'이란 관용어구처럼 사람이 가진게 많아지면 모험을 피하게 되는 성향이 있다. 이미 현대 한국의 경제력으로도 '부자 몸조심'하는 경향이 생겨 급진적인 '혁명'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잦아든 판국에, 그야말로 '극한'까지 발전했다면 경로의존성도 있으므로 굳이 검증도 안된 다른 체제로 급진적인 도박을 시도하기보다는 그냥 '극한의 자본주의' 그 상태로 눌러앉은 채 '문재인 케어'[19] 같은 복지를 강화하는 방향을 택할 수도 있다. 사실 "자본주의가 극한으로의 발달"이란 전제 자체가 "현대과학(의학)이 극한으로의 발달"처럼 뜬구름 잡는듯 막연하고 기약이 없기에 어쩌면 그런 때가 도래하기도 전에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다.[20]


5.2.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과 맞지 않다?[편집]


'사피엔스'에서는 수렵 채집인 시절에는 먹을 것이 떨어지거나 주변이 오염되면 훌훌 털고 떠나면 되었던데 비해서 농업을 시작한 이후로는 그런 자유가 줄어들었다며, 그로 인해 전염병이 널리 퍼지고 사람들 사이의 분쟁도 증가했다고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바로 사피엔스가 극찬하는 떠돌이 생활은 수많은 아포칼립스 작품의 클리셰다. '북두의 권'이나 '더 라스트 오브 어스'가 유토피아처럼 여겨지는가. 법과 질서가 있는 현대사회에서도 조폭들이 설치고 다니는데(한국은 순한 편이다), 무법지대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 다른 지역으로 떠나다가 조폭무리 만나면 매우 험한 꼴 당할 수 있다. 조폭이 그냥 인사하고 순순히 떠날 것 같은가? 약탈만 하면 다행이고, 죽거나 여성은 납치당할 수도 있다.

또 한국이 야생동물로부터 안전한 것은 일제때 해수구제사업으로 곰과 호랑이 등 인간에게 위협이 되는 해수들을 처리했기 때문인데, 90년대 비디오테이프 경고문에는 "과거 어린이들에게는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어쩌고로 시작하는 대목이 있다. 정착생활을 하여 무리지어 살던 조선 때도 '호환(호랑이에게 당하는 화)'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잡몹들이 널려있는 RPG 게임에서 필드를 떠돌아다니는데 무슨 자유와 낭만을 느끼겠는가. 물론 본인이 레벨이 높아서 마치 홍길동처럼 산적들을 웃으면서 다 소탕할 수 있다면 재밌을 수는 있다. 하지만 무력에 자신이 없다면 정반대일 것이다. 한적한 길을 소수의 일행과 걷는다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매우 공포로서 극단적인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

현대사회에서도 밤길이나 인적이 드문 한산한 거리에는 치안이 안좋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좀 주변에 사람들이 있어야 안심을 하는데, 인간은 혼자서는 너무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실제 어린아이가 차에 깔리자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어 차를 들어 아이를 구출해내는 미담이 보도되기도 하고, 납치당할 뻔한 아이를 눈썰미있는 서민이 구해내거나, 심정지가 갑자기 온 사람을 지나가던 행인이 발견하고 바로 119에 신고하고 응급조치로 살려내는 등 미담도 많다. 괜히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하는 것이 아닌데, 고작 도심에 멧돼지 한마리 출몰해도 일대가 마비되기도 한다. 서로 어울려 사는게 분쟁도 생기고 서열이 나뉘고 갑질하는 등의 단점도 있지만, 도움을 받는 장점이 더 크기에 사회에 속해서 사는 것인데, 일부 단점만 부각시키면서 소수가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미화한다면 이는 '좋았던 옛날 편향'에 해당한다.

그저 한곳에서 생활하는게 지겨워서 자유를 느끼고 싶어 떠돌아다니는게 아니라, 먹을게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이주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미국 바이든 대통령의 고조부도 아일랜드에 대기근이 닥친 1850년에 아일랜드를 떠나 '신대륙'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식량이 없어서 떠나는 것은 결코 낭만적이거나 즐거운 일은 아니다. 식량 못구하면 굶어죽는건데 무슨 자유인가. 또 길목에서 터를 잡고 나그네를 노리는 산적같은 악당이나 호랑이, 곰 등 야생동물이 득실댈텐데, 이들에게 변을 당했다고 해서 도와줄 사람도 없고 다쳐도 병원도 없는데,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을 수 있다.

아포칼립스 작품에서는, 그래서 주인공이 '파티'를 구성한다. 혼자서는 나약한 인간들은 무리생활을 하게될 수밖에 없다. 먹을 것이 떨어져 먹을 것을 찾아 떠난다면 생존이 달린 문제라는 것인데, '무서운 이야기 2'에서는 절친인 두 친구가 절벽에서 조난당한 후 초코바 하나 때문에 다투다 살인난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식량이 떨어져 눈이 벌개진 채 떠돌아다니는 조폭무리를 맞닥뜨린다면 먹히거나 아니면 '전쟁'이 벌어질 수 있으며 그게 바로 북두의 권이다. 결국 생존을 위해 세력을 불릴 수밖에 없는데, 사피엔스에서는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으로 분화됐다며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물론 기술과 문화의 발달에 이바지한 점도 언급하긴 했으나 간략하게 넘어가며, 편향적으로 단점만 부각했다.

농부들이 관절염과 척추질환에 시달린다고 사피엔스와 맞지 않다고 하는 것도, 모든 육체노동은 부상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속담도 있는데, 나무에서 과일 따다 떨어져 다치면 병원도 없다. 평원에서 달리기를 하고 사냥감에 투창을 하는 것도 젊을 때나 괜찮지, 노인들은 관절 나갈 수 있다. 사실 농부들도 최근엔 노인들이 많으니 더 관절염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지, 그냥 사무직 노인들도 관절염이 있는 사람들도 많고, 원래 나이들면 자잘한 병들이 생긴다. 젊을 땐 농부들도 팔팔했을 수 있다. 물론, 생존을 걸고 이주하고 사냥해야 하는 떠돌이 생활은 노인이 감당하기 힘들어 아예 도태되어 없을테니 다들 건강해보이는 착각은 있을 수 있다. 노인들이 야생에서 능숙하게 투창 던지고 달리고 수영하고 이런 실전 '철인3종 경기'를 감당하기는 힘들다. 장거리 이주할때 자동차도 없는데 뛰기는커녕 잘 못걷는 노인은 손절당할 수 있다.

결국 떠돌이 생활이든 정착 생활이든 식량을 구하려는 수단이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북두의 권'처럼 기약없이 목숨 걸고 식량을 찾아 이주하는 것보다는 정착 생활을 하는 것이 안정적인 식량을 구하는데 훨씬 효율적이고 치안면에서도 안전하니 농업혁명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그로 인해 폭발적으로 인구가 늘어나 다른 동식물들과 지구가 피해를 보고 어쩌고는 너무 부정적인 관점으로만 본 것이다. 오히려 인구가 늘어났다는 것은 먹고살만해졌다는 것인데, 노동으로 인한 삶의 질 저하를 부각한다. 왜 떠돌아 다니던 시절에는 인류가 안늘어났는지 생각해보자. 동물들도 최소한 안전이 보장되는 환경에서 출산을 한다. 물론 사피엔스의 저자도 스스로 '농업을 통한 식량생산을 통해 큰 인구 부양력을 얻어 호모 사피엔스의 개체 수가 폭증하게 된 것'은 인정하면서도, 농업혁명을 '거대한 사기'라고 폄하하니 앞뒤가 맞지 않다. 바로 그 인구의 급증으로 인해 현대문명과 사회의 기반이 되었으니 '혁명'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파트/대한민국/선호 이유'를 보면, 왜 인구가 자본주의와 현대문명에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해조류와 수산물이 풍부한 완도지만 영화를 보려면 큰마음을 먹어야 했다고 하는데, 인구가 적어 영화관조차 없어 현대문명에서 소외되었다. 그나마도 2017년에 영화관이 생겨 감격하여 '우리 동네에도 영화관이 생겼어요! / YTN'란 제목으로 보도되었으나, 그조차도 정부의 지원으로 만들어졌고 민간 영화관에 비해서는 많이 부족하다.

자본주의는 수요를 통해 돌아간다. 그래서 맥도날드CGV 등 자본주의 기업들은 지역의 수요를 꼼꼼히 따져보고 들어가기에 인구수가 중요한 것이다. 문화뿐만 아니라, '대학병원'급의 대형 병원들도 한적한 시골엔 없다. 수지타산이 안맞기에 조그만 개인의원조차 잘 안들어설 정도다. 심지어 기본 편의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대중교통조차 적자를 이유로 버스노선이 폐지되어 시골주민들이 항의하는 기사가 보도되기도 한다. 시골이 아니라, 지방도시에서 응급환자가 인근 종합병원에서 의사가 없어 몇시간 구급차를 타고 떠돌다 골든타임을 지나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종종 보도되기도 한다. 인구가 집중된 수도권에 대학병원은 물론, 온갖 편의시설과 문화시설이 다 갖춰있기에 수도권을 선호하는 것이다.

이렇듯 인구가 시장경제에 중요한 요소인 것은 맞지만, 현대과학과 현대의학이 발전을 멈추면 다 망한다는 것은 과장된 괴담일 뿐이다. 게다가 과학자와 의학자들이 언제쯤 발전이 완전 멈춘다고 전망하지도 않고, 오히려 과학과 의학이 발전된 먼 미래사회에 대한 전망이 많다. 물론 발전이 멈추면 타격이야 있겠지만, 네이처 등 과학저널이 발표되는 논문이 없어 망하는 날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세계 모든 과학자들이 더이상 연구할게 없다며 손가락만 빨고 머리를 쥐어뜯는 세상보다, 인류 멸망이 더 빠를 수도 있다. 버스노선이나 먹거리 산업처럼 필수재 같은 분야는 별로 발전 안해도 수요로 인해 잘만 돌아가고 있다. 게다가 한 산업이 사양산업이 되면 다른 산업이 갑툭튀해 떡상하기도 한다. 과거 조립완구 산업이 수요의 저하로 망하는 한편 전자오락 등 다른 산업이 뜨기도 했으며, 자녀들이 적은 현대사회에서 고독사하는 노인들이 늘어나자 유품정리업체가 뜨기도 하고 상조회사들이 많이 탄생했다. '인류가 희망'이라고, 하여간 인구가 있으면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수요로 인해 시장경제는 어떻게든 돌아가게 된다.

일부에서는 자본주의 사회가 답답하다면서, 소수가 떠돌아다니던 농경사회 이전을 자유와 낭만처럼 묘사하기도 하나, 사냥하다가 넘어져 발목을 다치거나 나무에서 과일을 따다 떨어져 팔이나 다리가 골절됐을 때도 행복하기는 힘들 것이다. 당장 고통부터 너무 심하고, 불구가 되어 도태되는데 무슨 행복인가. 자동차도 없이 맨발로 이주해야 하는데 불구가 되면 다들 손절하고 자연도태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항상 극심한 스트레스에서 살아야 하는데, 차라리 119 부르면 구급차 오고, 대형병원에서 양질의 치료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현대사회가 여러 단점들을 씹어먹는 장점이 있기에 선호하는 것이다. 뭐든지 '일장일단'이기에 '단점은 하나도 없고 장점만 가득한 완벽한 체제'는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런 마법같은 쉬운 '정답'이 있다면 인류가 바보 천치도 아니고 인류역사가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완전무결한 체제가 존재하리란 믿음은 종교와 다를바가 없다.

박민영 문화평론가는 사피엔스 저자에게 이미 널리 알려진 단점들을 잘 융합해서 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며, ‘그래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원한다고 촉구했다.# 맨날 부정적인 말만 하여 부와 명성을 쌓는 학자들보다는, 단점 많은 사회에서 어떻게 단점을 억제하고 장점을 발전시킬 것인가 고민하는 학자들이 사회에 더 생산적일 수 있다. 이때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마냥 비현실적인 허황된 말만 하는 사람보다는, 보다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이 사회에 도움이 된다. 지적질 잘 해서 인기 끌었다가 막상 감투 줘보면 본인도 똑같은 사람들이 많아 '흉보면서 닮는다'는 속담도 있다. 초창기 문제가 많던 한국사회를 발전시켰던 사람들은 구체적인 대안을 연구하고 모색했던 학자와 정치인들이었지, 맨날 앵무새 마냥 인류가 멸망할 거라며 종말론(휴거)을 퍼트리는 종교인들과 자본주의 종말론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수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도 인구는 중요하다. 물론 중국처럼 인구만 많다고 무조건 내수경제가 활성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이 G2까지 성장한 것도 결국 인구빨이기도 했고, 어느정도는 국력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기에 인구는 중요하다. 그래서 한국의 출산율 저하 문제를 지적하며 한국이 곧 국가 소멸될 것이라고 공포를 과장하는 공포 마케팅도 있는 것인데, 다른 쪽에서는 자본주의로 인구가 급증하여 환경을 파괴하고 동식물을 괴롭히고 지구에 민폐를 끼쳐 재앙이 됐다는 식의 공포 마케팅을 펼치니 적당히 걸러들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붕괴론이 많으니 위태로워 보이지만, 중국붕괴론, 북한붕괴론도 수십년전부터 있었다. 90년대에는 일본이 곧 망한다는 반일서적 천지였고, 2011년 동일본 대지진때는 어느 정체불명 하버드 교수가 일본이 곧 망할거라고 했다는 둥 드디어 이젠 진짜 일본 망한다는 부정적인 전망 천지였으나, 2023년에도 여전히 경제3위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그런 책들과 기사에서 망한다는 근거로 든 것들이 아주 근거가 없진 않았으나 다소 과장됐고, 또 일본에도 똑똑한 엘리트들 많은데 그냥 손가락만 빨고 있지 않고 대책 마련을 한다는 것을 간과했다. 이런 붕괴론들도 일종의 '공포 마케팅'이듯이, 자본주의에 대한 공포 마케팅도 잘 걸러들어야 할 것이다.


6.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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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자본주의는 서열을 나누는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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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자본주의는 종교인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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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참고 자료[편집]



7.1. 도서[편집]


  • 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 11권: 미국 2-역사 편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04. p145~150.
  • 업그레이드 먼나라 이웃나라 11권: 미국 2-역사 편 - 저자/출판사 동일. 2018. p262~265.

7.2. 영상[편집]



8. 관련 문서[편집]



8.1. 인물[편집]



8.2. 이념[편집]



8.3. 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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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달러 지폐 앞면 인물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다.[2] 와 함께 그로 인해 점증하는 노사 간의 대립도 포함되는 경우가 있다.[3] '사적 소유'와는 다르다.[4] 민법주해(곽윤직 편집대표) 물권법 1편 서설 참조.[5] 대표적으로 중국이나 베트남 등 국가에서 개인의 토지소유가 금지되어 있어 기한이 한정된 사용권이란 걸 사고판다.[6] 즉, 흔히 말하는 '원시 공산제-고대 노예제-중세 농노제-근대 자본제-공산제'의 역사발전론에서 나온 용어라는 뜻이다. 현대 경제사학계에서는 이 중 마지막 단계인 공산제 단계를 제외하고서 해당 이론적 틀을 개조, 확장하면서 사용하고 있다.[7] https://en.wikipedia.org/wiki/Louis_Blanc[8] 영어의 '-ism'은 한자어 '-주의'와는 달리 늘상 사상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tourism', 'terrorism' 등과 같이 '~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때도 있다.[9] Kapitalismus가 바로 Capitalism, 자본주의라는 말이다. [10] 이와 유사하게 어형 자체는 고래로부터 존재했으나 근대 번역어로 자주 쓰여 근대어처럼 여겨지는 단어로는 '경제'(經濟), '공화'(共和) 등이 있다.[11] 양세욱(2012), 동아시아의 번역된 근대: ‘개인’과 ‘사회’의 번역과 수용, 인간・환경・미래, (9), 63-91.[12] 정확히 얘기하자면, 수중에 돈이 없어 수요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13] 이를 일본에서는 수정자본주의, 아나톨 칼레츠키는 '자본주의 2.0'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4] 그리고 이는 디지털 소외, 좋았던 옛날 편향 등을 강화할 수도 있다.[15] 스타트렉에서는 물질재조합장치가 등장하여 사람들이 물질적 가치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작중에서도 페렝기라는 종족은 물질 재조합이 불가능한 라티넘이라는 금속을 대체화폐로 삼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굴리지만 주인공 세력인 행성연방은 공산주의에 가까운 경제 체제를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16] 원전 오염수는 동해가 아닌 태평양에 방류하기 때문에 해류에 의해 미국을 먼저 돌아서 한국에 도착하므로 미국이 직격탄을 맞는다. 허나 미국은 관심도 없는데, 한국에선 이상하리만치 과장된 공포와 혼란이 도는 것은 북한의 입김도 작용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한국에선 다 죽을 것처럼 선동하는 후쿠시마산 수산물조차 미국은 수입한다. 중국과 한국 정도만 후쿠시마산 수입을 금지하는데, 미국FDA와 대만, 서구는 친일파들이 점령했고 중국은 인민들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서 그런다는 반론도 있다. 알고보니 북한 지령문에는 문재인 정부가 절대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하지 못하게 각종 시민단체를 부추겨 정부를 압박하여 문재인 대통령과 스가 총리가 절대 결합하지 못하고 한일갈등을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악화시키라고 지령을 내린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 한국이 무서운 것은 태평양쪽으로 방류하는 원전 오염수보다는, 서해에 방류하는 중국의 원전 폐수이다. 자국의 귀족도시 베이징에도 너무 뿌옇게 안보일 정도로 '발암물질 덩어리' 미세먼지 폭탄을 퍼붓는 중국은 독재국가 특성상 원전 폐수도 투명하게 관리하거나 정화하여 내보낸다는 보장이 없고 무단 방류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한국의 앞마당인 동해에는 북한이 고농도의 핵폐기물이나 미사일 등 마구 퍼부어 쓰레기장으로 만드는데 이런 것에는 관심도 없다. 중국의 미세먼지는 정말 위험이 검증되어 정부에서도 미세먼지 주의보를 내릴 정도임에도 '미세먼지 괴담'은 없는 반면, 반미와 연관된 '광우병 괴담'이나 반일과 연관된 '방사능 괴담'은 과도하리만치 퍼져나간다. 반미, 반일을 앞세운 전략이 북한의 '갓끈전술'이다.[17] 정치인들은 '국민 건강'을 명분으로 내세우는데,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국민 건강은 안중에도 없어질 수 있다. 새우깡 '먹어서 응원하자' 사건을 보자. 국산 새우 포기한 새우깡… 농심 “서해 오염 탓” 2019년, 농심은 서해 오염이 심각해진 탓에 폐플라스틱 등 각종 폐기물이 섞인 새우가 납품되는 사례가 늘어 식품 제조에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며 국산 새우를 포기하겠다고 발표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소비자 안전'이라고 강조했다. 과연 정치권과 언론에선 소비자 안전을 생각하는 모범기업이라며 추켜세웠을까? ‘국민 과자’ 새우깡 배신에… 군산 정치권도 ‘발끈’ 언론은 새우깡이 '배신'때렸다며 감성을 앞세워 언플했고, 군산 정치권에선 서해 환경오염을 지적하는 것은 서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 전북 어민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행위라며 전 국민적 불매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놀란 농심은 황급히 사과하고 철회했으며, 언론도 일제히 기사들이 사라지며 다들 쉬쉬하며 없던 일로 무마됐다. 역시 '모르는 게 약'인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코로나를 '우한폐렴'이라 하자 중국 혐오했다고 난리치며 우한 이미지 나빠진다고 우한이란 말도 못꺼내게 하던 정치인들이 '후쿠시마'를 혐오하지 않으면 친일파라는 식으로 매일 같이 후쿠시마에 대한 공포와 혐오 여론을 조장하고 다니는 것은 정치적 유불리가 개입됐을 수도 있다.[18] 가령 시장고대에부터 존재했다.[19] 윤석열 정부 들어 폐지하는 이유를 재정 고갈로 꼽았으니, 그말인 즉슨 재정이 넘쳐나면 문재인 케어 이상으로 보장을 강화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만약 한국이 어디 석유 나는 나라처럼 갑자기 잭팟이 터져 재정이 넘쳐나게 된다면 국민들은 '무상복지' 시리즈 강화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한국의 시스템에서도 '재정만 뒷받침된다면야' 사회주의 수준으로 각종 보장을 강화할 수 있으므로 굳이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까지 체제를 뿌리째로 갈아엎을 이유도 없다.[20] 미루기 극복 전문 강사인 리타 엠멋이 말하길, 미루기 선수들은 항상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미루다가 아무것도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낸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런 완벽한 조건을 갖춘 때는 어쩌면 영원히 안올 수도 있으니, 어느 정도 선에서 조건이 갖춰지면 일단 과감히 시작하고 하나둘씩 해결해나가라고 강조했다. 현대과학이든 의학이든 자본주의든 아주 완벽한 조건이 갖춰져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당장 기사만 검색해봐도 지구온난화니 한국인 자연소멸 심각이니 하는 기사 보면 100년 뒤도 장담할 수 없을 것처럼 묘사해놓기도 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3차 핵전쟁 운운하며 10년 뒤도 장담을 못할 것 같은 기사도 있다. 그런데 마르크스 사후 100년이 훌쩍 지난 21세기에도 써먹을 수 없는 체제라면 문제가 있다. 100년이고 200년이고 무한정 기약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체제라면 과연 현실성이 있는 체제인가? 체제는 종교가 아니기에 당면한 현실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체제가 좋은 체제인데, 한국을 포함하여 많은 빈곤국들의 극빈인구를 줄인 것은 자본주의 체제였다. 아무리 이론으로 멋져보여도 정작 현실에서 써먹을 수가 없다면 그것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