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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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9월 14일 ~ 2009년 5월 9일 (향년 56세)

1. 소개
2. 초기 생애
3. 대중적 문필가로의 길
4. 교수로서의 삶
5. 암 투병
6. 사망 및 사후
7. 일화
8. 평가



1. 소개[편집]


대한민국의 영문학자, 교육자, 작가

일반 대중, 독자들에게는 다수의 문학 및 일상 관련 수필, 칼럼을 기고한 명수필가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신체장애와 암투병을 이겨낸 '인간승리', '희망'의 대명사로도 자주 인용되는 인물. 종교가톨릭이며 세례명은 마리아이다.


2. 초기 생애[편집]


1952년 9월 1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훗날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1960~19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이 읽은 다수의 영어 소설을 번역하고, 중/고등학교 영어 교과서를 썼던 장왕록 씨다. 장왕록 씨는 평안남도 출신으로 8.15 광복 직후 서울로 월남했으며, 장영희의 출생 당시 주한 미 공군부대의 번역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어머니 이길자[1] 여사도 남편 장왕록 씨와 같은 고향 출신의 실향민. 장영희는 총 6남매 중 셋째였는데, 1946년 11월생인 둘째 장병우 씨[2]를 제외한 5명이 모두 여자다. 즉, 딸부잣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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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소아마비에 걸려 두 다리와 오른손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장영희는 평생 목발에 의존하여 거동해야 했으며, 왼손잡이로 생활했다.

학창 시절 성적이 우수한 편이었지만 1960~70년대 한국 사회의 학교들은 시험 기회 자체를 허락해 주지 않으려 했다. 이 때문에 상급학교로 진학할 때마다 아버지 장왕록 씨가 직접 나서서 "제발 시험이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학교에 간청해야 했다.

결국 중, 고등학교는 아버지가 교수로 근무했던 서울대 사범대 부속인 서울사대부중[3]/서울사대부고를 다녔다. 당시에는 중학교도 입학 시험을 쳐서 들어갔는데, 장영희는 무즙 파동이 있었던 1964년 12월에 입학 시험을 치렀으며 당시 장영희도 '무즙'으로 답을 써서 손해를 본 이들 중 하나였다. 신체장애 때문에 체력장 점수를 포기한 상태였고, 당시 서울사대부중의 커트라인을 고려할 때 모두 정답을 써야 했던 장영희에게는 더욱 큰 일이었지만 다행히도 그해 서울사대부중의 커트라인은 이전보다 1점이 더 낮아서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다.

1971년, 당시 개교한 지 11년밖에 안 되었던 서강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이것마저도 당시 서강대학교가 예외적으로 장애인 학생의 입학시험 기회를 허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4] 장왕록 씨가 당시 서강대학교 영문과 학과장이었던 제롬 브루닉[5] 신부를 찾아가 사정했더니, 브루닉 신부는 너무나 의아하다는 듯이 “무슨 그런 질문이 있는가.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보는가? 장애인이라고 해서 시험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고 반문하였다고 한다. 장영희 교수에 의하면 아버지가 두고두고 그때 일에 대해 “마치 내가 말도 안 되는 것을 물어본 바보처럼 말이야. 그렇지만 그렇게 행복한 바보가 어디 있겠냐”고 했다고... 그렇게 장영희는 서강대 영문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77년까지 서강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당시 서강대에 영문학 박사 과정이 없어서 연세대학교 박사 과정에 응시했다. 하지만 면접장에서 "우린 학부생도 장애인은 안 받는다"는 냉담한 반응을 받고, 곧장 그 자리를 떠나야 했다. 결국 1년 동안의 TOEFL 준비를 거쳐 1978년 뉴욕 주립대학교 올버니(SUNY)에 유학했으며, 1985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3. 대중적 문필가로의 길[편집]


1985년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 귀국해 모교인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전임강사로 강의하기 시작했다. 1987년부터는 한국일보 계열의 영자 신문 코리아 타임즈에서 격주로 Crazy Quilt(조각이불)이란 이름의 영어 칼럼을 기고했다. 이 칼럼은 2000년까지 13년 동안 장기 연재되었다.

1994년 7월 17일 아버지이자 영문학계의 대선배이기도 한 장왕록 씨가 향년 70세로 타계[6]하는 슬픔을 겪었으며, 1995년부터는 선친의 뒤를 이어 중고교 영어 교과서 집필에 본격 참여했다.[7] 이때까지만 해도 장영희는 영어, 영문학에 관심있는 사람들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1999년 월간 <샘터>의 고정 필진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샘터>는 시인 피천득, 법정스님,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 등 당대 네임드급 작가들의 글을 오랫동안 게재해 왔는데, 미국으로 치자면 대한민국에서 두산동아가 라이선스 발간하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와 같은 성격의 잡지였다. 이를 계기로 장영희의 대중적 인지도는 크게 높아졌다. 당시 연재했던 글들을 중심으로 1년 후인 2000년 하순에 첫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을 출간했는데 이 책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001년에는 안식년을 맞아 하버드 대학교에서 1년간 초빙교수로 근무했고 그 해 9월부터 조선일보에서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라는 문학칼럼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본래 이 칼럼은 다른 작가, 교수들과 교대로 기고하는 형식이었는데, 장영희의 글이 워낙 인기가 많아서 이후 장영희의 단독 칼럼으로 바뀌었다. 2004년부터는 아예 칼럼 이름도 '장영희의 문학의 숲'으로 바뀔 정도였다.


4. 교수로서의 삶[편집]


각종 매체의 지면에 게재되는 글을 통해 접한 이들에게는 수필가, 칼럼니스트 등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 장영희의 본업은 영문학 교수였다. 장영희 본인도 '문필가'보다 '교수'로서의 삶을 더 중요시 했으며, 그가 발표한 수필과 칼럼의 상당수도 자신의 교수 생활이나 강단에서 학생들과 겪었던 일들을 소재로 한 것이다.

장영희가 주로 강의했던 과목은 '19세기 미국문학', '번역연습' 등이었는데, 그의 수업은 서강대학교 영문학부 내에서도 '최악의 난코스'라고 불릴만큼 흠좀무하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예습을 전제로 수업을 진행하다 보니 수업 내내 쉬지 않고 질문을 퍼부었고, 2~3주 간격으로 퀴즈 시험이 있었다.. 특히 자신의 전공인 '19세기 미국문학'의 경우는 가히 비명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 학기 동안에 300~500페이지 내외의 두꺼운 영어소설을 원서(原書)로 여러 권을 독파하고, 1권씩을 마칠 때면 어김없이 퀴즈를 봤다. 학기 말에는 기말고사 말고도 10장이 넘는 과제물을, 그것도 영어로 제출했다고.

이렇다 보니 서강대학교 학생들에게 장영희의 수업은 '빡세다'는 한마디로 요약되는 경우가 많았다. 안그래도 공부 빡세게 시키기로 유명한 서강대인데 학기 초 서강대의 교내 게시판에서 "장영희 교수님 수업 어떤가요?"란 질문이 올라올 때마다, 공통적으로 "엄청 빡세다던데요..."란 말이 십중팔구 들어 있었을 정도.

그러나 장영희가 학생들에게 엄한 교수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매 학기마다 많을 경우 거의 100명에 육박하는 학생들의 이름을 1개월 만에 모두 외우고, 종강 시간에는 자필 싸인과 손수 만든 책갈피를 함께 넣은 자신의 책, 번역 작품을 학생들에게 선물로 주면서 빠짐없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말하자면 강단에서 학생들 이상으로 열정을 쏟는 데 노력한 교수였던 것이다.

1993년부터는 서강대학교가 운영하는 야학 '성 이냐시오 학교'에서 10여년 동안, 매주 영어 수업을 진행했다.


5. 암 투병[편집]


"뒤돌아보면 내 인생에 이렇게 넘어지기를 수십 번, 남보다 조금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에 좀 더 자주 넘어졌고, 그래서 어쩌면 넘어지기 전에 이미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넘어질 때마다 나는 번번이 죽을 힘을 다해서 다시 일어났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넘어져 봤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난 확신한다."

- 조선일보 고별칼럼 "문학의 힘" (2004년 9월 25일자) 중에서


장영희가 처음 암에 걸린 것은 안식년으로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2001년 말이다. 당시 가벼운 마음으로 하버드 대학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그만 유방암 진단을 받았던 것. 장영희는 자신의 증상을 가족들에게만 알리고 조용히 치료를 받았으며, 귀국 직후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암과의 지긋지긋한 사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2번째 암 진단은 2004년 9월의 일이었다. 장영희는 그해 여름부터 신체에 불편함을 느껴왔지만, 칼럼 기고를 비롯한 대외활동의 증가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결국 가을학기 개강 직후, 온몸을 움직이기 힘든 지경에 이르러서야 진단을 받은 결과 척추암 판정을 받게 되었다. 3년 전 완치되었다고 생각했던 유방암이 척추로 전이된 것이 원인이었다(유방암이 척추로 전이되는 사례는 10% 이하로 낮은 편이다.).

결국 장영희는 학교 강의, 칼럼 기고를 비롯한 일체의 대외 활동을 중단하고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본격적인 암 투병을 시작했다. 입원은 2개월만에 끝났지만, 이후 2주 간격으로 병원을 찾아 항암치료를 받는 생활을 계속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음해 1학기에 다시 수업에 복귀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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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장영희의 강단 복귀는 주요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도 소개될 정도로 대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말하자면 '희망의 아이콘'같은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장영희와 인터뷰를 하려는 각 언론사의 기자들이 워낙 많이 몰려들다 보니, 조교가 은행에서처럼 번호표를 나눠주는 진풍경이 생겼을 정도. 같은 해 3월 조선일보 문학칼럼을 엮은 수필집 <문학의 숲을 거닐다>도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6. 사망 및 사후[편집]


장영희의 척추암 항암 치료는 2007년에 끝났다. 완치는 아니지만, 강의와 연구, 대외활동을 비롯한 일상 생활을 안정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해 여름에 간암 진단을 받게 되었고, 2008년 1학기를 끝으로 강단을 떠났다. 공식적인 이유는 안식년이었지만, 이때부터 병세가 점차 악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해 9월 서강대 동문 행사에 참석한 것이 장영희가 마지막으로 참석한 대외 공식행사였다.

이듬해인 2009년 4월 말, 병원에서 입원 중이던 장영희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 이길자 여사에게 작별 편지를 남겼다. 사실상의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글은 장영희의 사망 직후, 언론을 통해 소개되어 독자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4월 28일 퇴원한 장영희는 자택에서 가족들과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5월 7일 병세가 급격히 나빠진 채 병원으로 후송되어 이틀만인 5월 9일, 향년 57세에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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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의 장례식은 5월 13일, 서강대 성 이냐시오 학교 성당에서 재단이사장인 유시찬 보나벤투라 신부를 포함한 예수회 사제단의 집전으로 엄수되었다. "내가 죽어 내 관을 나를 사람도 제자들이 될 것"이라는 생전 고인의 뜻에 따라, 장영희의 관은 서강대 영문학부 학생들이 운구했다. 유해는 충남 천안공원묘원에 위치한, 15년 앞서 세상을 떠난 선친 장왕록 씨의 곁에 안장되었다.

장영희의 마지막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사후 1주일 후 발표되었고, 출간 직후 주요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장영희의 유족들은 그해 9월,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의 인세 수입 등을 포함한 5억원을 모교 서강대에 장학금으로 기부했고, 이듬해(2010년) 2학기부터 매 학기마다 '장영희 장학금'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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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5일에는 서강대 정하상관(J관. 신인문관)의 315호실이 '장영희 강의실'로 지정되었다. 전직 교수의 명칭이 붙은 강의실 지정은 서강대 역사상 최초의 일이다.


7. 일화[편집]


1984년에 박사과정 졸업을 앞두고, 3년 동안 작성해온 졸업논문이 담긴 가방을 도둑맞는 불상사를 겪었다.[8] 당시 지도교수가 엄격하기로 유명한 교수라서 학생의 사정을 절대 봐주지 않았다. 선배들이 무참히 탈락하는 것을 봐온 장영희는 깐깐한 지도교수가 자기라고 봐줄 것 같지 않았다고. 일주일동안 방에서 식음을 전폐했고 혼절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 이야기는 2009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된 미래엔 출판사의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린 바 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아버지 장왕록 교수로부터 "사람도 죽고 사는데, 그만한 일로 낙심하지 말라"는 엽서를 받고서 겨우 마음을 다잡고 일어설 수 있었다. 지도교수도 장영희의 사정을 듣고는 여러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에 힘입어 1년만에 겨우 박사 논문을 다시 썼고,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중학교부터 대학원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정말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 평가[편집]


평생 목발에 의지해서 걸어야 한 신체장애인, 3차례의 암투병 끝에 57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애를 살고 갔다는 점만 본다면 '죽도록 고생만 했던 불쌍한 사람'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장영희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지인, 제자들에게 매우 큰 결례다. 장영희는 자신의 일상과 강단에서 일관되게 긍정, 희망, 밝음을 전하고자 한 인물이었다. 장영희가 발표한 다수의 수필, 칼럼들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배경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장영희의 글을 읽고 팬레터를 가장 많이 보냈던 이들은 교도소의 재소자, 군인, 병원 환자들이었을 정도.

90년대 말 서강대 인문대(X관)[9]을 다녔던 학생들이라면 항상 양 겨드랑이에 목발을 짚고 당시 신설된 철제 슬로프를 힘들게 다니고도 늘 미소를 띄며 학생들의 인사를 모두 받아준 그녀를 기억할 것이다. 교양수업 중에 자신이 결혼식에 참석한 일화를 이야기하시며, 모두들 자신을 알아보며 아는 체를 해주었지만 정작 그녀가 원했던 것은 뷔페식이었던 식사시간에 두 손이 부자연스러웠던 그녀를 대신해서 누군가 음식을 담은 접시를 건네주는 것이었는데 결국 아무도 그렇게 해주지 않아서 굶고 왔다는 일화를 말씀하시면서 보인 정말 소녀같은 눈망울과 웃음을 담은 얼굴이 계속 그리울 뿐이다.

그리고 영어와 친숙하지 않았던 학생들의 콩글리쉬도 재치 있다고 다독여 주시고, 단지 교양 수업으로 3학점을 들었던 학생들까지 몇년 후까지도 기억해주시던 그 분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과 기억 그리고 추억속에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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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7년생으로 남편과 딸과 아들이 먼저 가는 걸 봐야했다. 2022년 1월 10일, 향년 95세로 타계했다.[2]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LG그룹에 입사, LG오티스 엘리베이터 대표이사를 지냈으며 2005년 은탑산업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국내 최대의 엘리베이터 제조업체인 현대엘리베이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동생의 추모 및 기념 행사에도 유가족을 대표해 열성적으로 참여해 왔다. 안타깝게도 장 교수의 10주기 추모 행사를 거행한 다음날인 2019년 5월 10일 뇌출혈로 쓰러졌고, 5월 28일에 향년 72세로 별세했다.[3] 오늘날 서울사대부중남중이지만, 장영희가 다닐 당시에는 남녀공학이었다. 1969년부터 서울사대부중(男)과 서울사대부여중(女)으로 분리되었다.[4] 지금은 장애인전형등으로 대학입학이 수월한 편이나 당시엔 아무리 학업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장애인 학생들은 본고사에 응시를 거부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자녀의 본고사 응시가 가능한 대학을 찾거나 응시자격을 달라고 사정하는일이 많았다.[5] 1980년 7월에 향년 62세로 타계했으며, 용인 천주교 묘지의 예수회 사제 묘역에 안장되었다.[6] 해수욕장에서 수영하던 중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익사하였다. 나이에 비해 상당히 건강한 편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사고로 타계하여 장영희 교수를 비롯한 가족들의 슬픔은 더욱 컸다고 한다.[7] 두산동아 교과서에 장영희 교수 성함이 집필진에 나왔다. 그리고 아버지의 성함도 언급된다. 이후 2007 개정 교육과정까지 교과서를 집필한다. 마지막으로 집필한 교과서는 NE능률에서 출판되었다.[8] 장영희가 유학중인 당시에는 USB는 물론이며, 현재 흔하다싶은 컴퓨터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졸업논문을 오로지 타자기로 작성했고, 설상가상으로 논문 복사본도 없었다.[9] 2010년대에 인문학 관련 학과들이 신축된 정하상관(J관)으로 옮기면서, 지금은 법학대학원 건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