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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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시대에 쓰이던 닭장[편집]
2. 동학농민군이 쓰던 방어구[편집]
장흥 접주(長興 接主) 이방언(李邦彦)이 고안 제작한 것으로, 문단 1번을 거대하게 만든 다음 안에다가 솜, 짚단 등을 채워넣고 낫과 칼을 꽂아 겉으로 날붙이가 튀어나와 부딪힌 적이 상처를 입게 만든 것이다.
사진 출처 한겨레 신문
그리고 이런 식으로 굴리면서 적을 향해서 전진한다. 실제 사용된 것은 더 컸을 것이다. 정확한 실험 결과가 나오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당시 사용하던 탄환을 막아내는 데는 충분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1]
중세시대에 일본이 쓰던 이동식 대나무 방패와 비슷하다.
동학농민군이 사용했던 화승총의 사거리가 관군의 스나이더 소총같은 신식총보다 짧았기 때문에 장태로 탄환을 방어하며 전진했다. 황토현 전투에서 처음 등장해 회선포로 무장한 관군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고, 이후에도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도 쓰이는 등, 동학군이 전주를 함락할 때까지 계속 이용되었다.
2차 봉기 때에도 우금치 전투에서 사용되었다. 하지만, 동학군이 장태를 굴리면서 우금치 언덕을 오르기를 시도했으나 관군이 능선에서 신식 소총과 회선포를 쏴대자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2]
저렴하고 신속하게 화력의 열세를 타파해보자는 생각에서 나온 참신한 무기였지만, 이런 걸 제대로 써먹고 발전시키기에는 동학군에게는 군사적인 지식도, 연구할 시간도 없었다.
사실 이동식 장애물을 쓰는 건 흔한 전술이다. 고대 중국부터 쓰였던 차진(수레)도 그렇고, 혁명 프랑스에서도 술통을 굴려 바리케이드로 썼다. 나폴레옹은 이를 대포로 파괴해버렸다.
드라마 녹두꽃에서도 등장한다. 다만 여기선 황룡촌 전투가 상당한 고증 오류를 보여준지라 이쪽도 영 잘못된 방법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준 게 흠.[3]
3. 출산 후 태(胎:태반과 탯줄)를 땅에 묻는 일[편집]
삼국시대부터 전해내려오는 우리나라 고유의 풍습으로 주로 왕실과 양반계층에서 행해졌다. 조선시대에는 태를 불에 태우거나, 물에 흘려보내거나, 땅에 묻었는데, 땅에 묻는 방식을 가장 선호했다 한다. 특히 장차 왕위에 오를 원자와 원손의 태(胎)는 왕실 차원에서 묻는 장소와 방법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태를 보관하는 장소를 태실(胎室)이라 한다. 원자가 왕위에 오르면 태봉(胎封)으로 격상시키고 주위의 석물을 추가로 설치했다.
태를 묻는 의례를 주관하는 관청에서는 매번 그 과정과 절차, 필요한 인력과 물품 등의 내역을 빠짐없이 의궤(儀軌)나 등록(謄錄)으로 기록해두었다. 대표적으로 조선왕실의궤 장태의궤(藏胎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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