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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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개요
2. 상세
3. 보급



1. 개요[편집]


전투경찰이란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대한민국 국군과 함께 일선 전투에 참전했거나 후방교란을 목적으로 하는 적 유격대를 포착, 섬멸하기 위해 작전했던 경찰관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표현이다.


2. 상세[편집]


전쟁 초기 빈약한 무장과 보급, 북한군의 파죽지세와도 같은 남하와 같은 악조건 하에 주로 지연전을 펼쳤다.

당시에는 전차와 중화기로 무장한 북한군에게 국군도 속수무책이었으니 볼트액션식 99식 소총이 주무장이었던 당시 경찰은 말 할 것도 없었던 상황. 그런 상황에 이들은 자의나 타의로 적이 점령한 지역에 남아 함께남은 국군과 함께 조선인민군을 상대로 처절하게 유격전을 펼쳤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대한민국 국군과 함께 후퇴한 경찰들은 전쟁 초기 최후의 보루를 지키던 전투인 다부동 전투에도 약 15000명이 참전하여 작전 성공에 뒷받침했다.

그 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고립된 적들이 아측 후방지역에서 유격전을 펼치자 이들을 포착하고 섬멸할 목적으로 정식으로 창설되어 빨치산 토벌 작전을 펼쳤다. 토벌작전에 동원된 이들은 전술한 인원과는 다른 전투경찰대로 정식 창설된 인원이었다.

이들의 특징은 오로지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한 조직이므로 대민 업무가 목적인 일반 경찰과는 다른 조직내의 조직이었고 자체적인 민간인의 지원, 선발 과정이 있었다는 점이다. 일단 전투경찰대에 배속이 되면 대한민국 국군으로 입대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 1967년 창설한 전투경찰순경도 초기에는 매우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후에 지원제 전경이라고 불리게 되는 전투경찰순경의 초기형태가 그렇다. 전투경찰순경에 지원해 배속되면 일반 군복무를 이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시행 몇년 뒤 차출제로 바뀌었다.

3. 보급[편집]


일본군99식 소총이 주력이었으며 전쟁 후기에는 M1 카빈도 사용했다. 전쟁 초기에도 그랬지만 후기 빨치산 토벌때도 보급은 형편 없어서 조선인민군 출신 빨치산에게 중화기를 노획하여 썼다. 식사도 보급이 없다시피 하여 작전 인접 지역 주민들에게 조달 받았으니 사실상 모든 것이 자체 조달이었다. 얼마나 사정이 심했는지 지나가던 국군이 거지부대라고 놀렸다는 참전 전투경찰의 증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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