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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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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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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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

: K리그1 우승 / : K리그2 우승 / : FA컵 우승 / :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




파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서윤찬
(1969)

정병탁
(1969~1970)


김정남
(1970~1971)


대한민국의 축구인

이름
정병탁
金鏞世 | Kim Yong-Se
출생
1942년 3월 14일
전라남도 여수읍
사망
2016년 2월 10일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신체
192cm
학력
여수서초 - 여수중 - 배재고 - 연세대
포지션
공격수, 윙어
소속팀
해병대 축구단 (1967)
양지 축구단 (1967~1969)
서울신탁은행 축구단 (1970~1972)
국가대표
파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39경기 11골 (대한민국 / 1964~1970)

1. 개요
2. 선수 시절
3. 감독 시절
4.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축구인

2. 선수 시절[편집]


여수서초에서 축구를 시작한 정병탁은 여수중 재학부터 그리 큰 키는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빠른 발을 앞세워 축구선수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축구 명문인 배재고를 거쳐 연세대학교 1학년인 1964년부터는 성인 대표팀에 발탁되는 영광까지 누렸다.

군팀이 상한가를 쳤던 1960년대 해병대에 입대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간 정병탁은 대표팀에서도 주축 레프트윙으로 활약했다. 그런데 이때 정병탁을 비롯한 한국 축구 역사에 큰 획을 그을 만한 일이 벌어졌다.

북한이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에 오르며 세계의 주목을 받자 체제의 우월성을 자랑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축구팀을 결성했기 때문이다. 바로 '축구판 실미도 부대'였다. 정권 실세인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나선 창단한 이 팀은 강제로 각 팀에서 가장 축구를 잘하는 이들을 뽑아 들였다. 국가대표팀도 아닌 곳에서 강제로 선수를 빼가는 일이 벌어졌지만 그 누구도 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린다던 중앙정보부의 지시였기 때문이다. 팀 이름도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앙정보부 슬로건에서 '양지'를 따 왔다. 물론 당대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정병탁도 해병대에서 양지로 옮겨야 했다.

정병탁은 소속팀 양지의 주축으로 활약하면서 1970년에 출범한 국가대표 1진 청룡의 초대 주장에 선임됐다.

당시 아시아 최고의 대회였던 1970년 제 13회 메르데카컵 조별리그 3차전 인도와의 경기에서 2도움을 기록하며 팀을 결승에 올렸고, 버마와의 결승전 박이천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대한민국의 첫 대회 단독 우승에 앞장섰다. 역시 주장으로서 가장 먼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대회 종료 후 만 28세의 젊은 나이에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 정병탁은 이후 신탁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1971년 한국신탁은행 축구단의 창단 첫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우승과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에 일조했다.

3. 감독 시절[편집]


1980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으로 선임된 뒤 부위원장에 올랐으나 1년 만에 개인사정으로 사퇴했다.

1984년 모교인 연세대학교 감독에 선임돼 10년 간 팀을 이끌었다. 부임 첫 해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고려대 진학이 유력하던 김봉길을 연대로 입학시킨 일이나 강철을 수비수로 전향시켜 대표팀 선수로 만드는 등 지도력을 입증했다.

연세대 감독 재직 중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해 1986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를 이끌기도 했다.

1989년 한국대학축구연맹의 기술이사가 되었으나, 본인의 업무 소관을 침해당했다는 사유로 3개월만에 사임하였다. 같은 해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팀의 우승을 견인해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고, 1990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사임한 이회택의 후임 중 한 명으로 검토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이차만이 낙점되었다.

하지만 1992년 아주대와의 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춘계 대회 경기에서 잔디상태가 좋았던 효창운동장에서의 경기를 택하기 위해 서로 져주기 의혹을 받아 한국대학축구연맹으로부터 1년 감독 정지의 중징계를 선고받았으며, 이후 1993년을 끝으로 김호곤 감독에게 지휘봉을 넘기며 연세대 감독직에서 내려온다.

연세대 감독에서 내려온 후 고향 팀이자 신생팀인 전남 드래곤즈 초대 감독에 선임되며 프로 지도자로 데뷔한다. 노상래, 김인완, 김태영, 김도근, 김봉래 등을 앞세워 기술 축구를 시도하였으나 1996년 5월 성적 부진을 이유로 물러났다.

이후로는 순천ㆍ여수 등지에서 정병탁 축구교실 등을 운영하였다.


4. 여담[편집]


그의 아들인 정상남도 축구선수로,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활약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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