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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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현대 심리학과의 관계
2. 현황
2.1. 의학계
2.1.1. 관련 문서
2.2. 비평 이론
3. 프로이트의 이론
3.1. 에로스와 타나토스
3.2. 마음의 지형학적 모형
3.3. 성격 발달 이론
3.4. 정신역동
3.5. 방어기제
4. 융의 이론
5. 후학



1. 개요[편집]


精神分析學
Psychoanalysis

정신의학, 심리학의 한 갈래.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제시한 학문이다.

인간행동을 개인 내적인, 사회적인 욕구의 표출 및 조화/부조화로 인한 갈등에 의한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프로이트는 이런 욕구들을 성적 욕구로 이해했지만 이후의 정신분석학자들은 다양한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정신분석학이 주류 심리학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의식의 연구 여부와 과학적 방법론이다. 심리학은 일반적으로 인간 의식의 영역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정신분석학에서는 감정과 욕망 생각 등이 의식에 의해 억압된 부분이 있다고 보며, 그 부분을 무의식이라고 설정하여 이 부분을 굉장히 중요시하며 연구한다(의식은 단순히 빙산의 일각이라고까지 표현한다). 물론 주류 심리학의 여러 갈래들이 모두 무의식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무의식 개념을 사용하더라도 정신분석학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개념인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혼동을 피하기 위해 무의식(unconscious)이 아닌 비의식(nonconscious)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서 사용한다.[1]

처음 발표 당시에는 기존의 전통적인 인간관을 뒤엎으며 종종 지동설이나 진화론에 맞먹기도 한다고 평가될 만큼 사회에 미친 충격이 크기 때문에 여러 매체에서 자주 다루어지면서 심리학의 대표주자처럼 인식되었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렇게 오랫동안 다른 학문과의 교류가 없이 뒤쳐지는 듯 했으나, 90년대 이후로는 위와 같은 비판을 정신분석학에서 상당히 수용하며 다른 학문과의 통섭적인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정신분석적 치료가 실제적으로 임상적 효과가 있음이 임상 연구에서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으며, 적절한 대상에만 적용된다면 약물 치료 혹은 인지행동치료와 복합적으로 사용했을 때 시너지 효과를 보인다. 2011년 이후에는 신경정신분석학이라고 해서 fMRI를 비롯한 뇌인지과학의 여러 방법론과 이론들을 통합시키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기존의 인간관을 뒤엎는 정신분석학은 정신의학 분야 이외에 철학, 문화인류학, 종교학 등의 광범위한 분야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애초에 임상적 상황에서 환자에게 적용하는 치료이론을 지나치게 다른 영역에 퍼지면서 각 연구자들이 자의적인 해석을 하다보니 정신분석학에 대해 점차 오해가 쌓이게 된 경우가 많다. 대중적으로 프로이트를 추종하는 사람과 프로이트를 욕하는 사람 모두 프로이트의 사상에 대해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국내에서는 라캉철학포스트모더니즘이 크게 유행했기 때문에 그들이 저서에서 이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많이 인용하여 썰을 풀어나간 것만 가지고 현대 유럽 철학에서 정신분석학이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주류 유럽 철학이 아니라는 점에서 틀린 생각이다. 실제 유럽 철학의 양대 조류인 현상학과학철학에서는 이러한 작용조차도 의식의 작용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 항목 참조. 그러나 정신분석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철학과는 엄밀히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철학 내에서 주류나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어불성설. 하지만 이후의 인간관이나 철학의 흐름에 영향을 많이 준 것은 사실이다.

1.1. 현대 심리학과의 관계[편집]


이는 매우 논쟁적인 사안이며 단정적으로 설명하기 곤란하나, 가능한 한 포괄적으로 설명하자면 임상 및 상담 심리학계를 비롯하여 특정 개인의 생애사를 추적하여 통합적인 조망을 구성해야 하는 치료적 맥락에서 정신 분석학은 현대에까지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며 계승되고 있다. 물론 프로이트의 이론이 날것 그대로 숭배되면서 전수된 것은 아니며, 현대에는 非임상 분야들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다른 심리학 분야들의 관점에서 보면 프로이트의 이론은 냉정히 말하면 하나의 폐기 처분된 갈래, 혹은 역사적 의의만을 갖고 있는 한때의 인간관에 불과하다는 정도의 평가를 받는데, 이 마저도 호의적인 평가에 가깝다.

임상 분야에서 정신 분석학의 가치는 고객의 상태에 대해서 그 출생력, 가족력, 발달력, 사회력, 성격 등과 같은 다양한 데이터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수집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데 있다. 특히 이들 데이터들을 하나의 통합된 형태로 묶어내는 방법으로서 정신 분석학은 대단히 유용하게 간주되고 있다. 과학적 엄밀성이 중요하기는 하더라도 사람을 치료하는 '임상적 기술'의 관점에서는 그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행동주의 치료를 급진적으로 적용하려는 치료사가 아닌 한, 대개의 치료사들은 정신 역동적 접근을 하나의 의미 있는 방법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 적용할 수 있다.[2] 게다가 스테판 미첼 코슬린에 의하면 "프로이트의 시대에 정신 분석학이란 프로이트 개인의 발명품"이었다. 하지만 프로이트 생전에도 빌헬름 라이히 같은 몇몇 인물들이 프로이트와 때때로 공개적인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었고, 프로이트 사후 20세기 중반부터는 수많은 이론가들이 경험 과학적인 방법으로 이 이론을 수정하고 다른 심리학, 뇌과학 분야의 성과와 맞물려 발전해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때문에 현대의 정신 분석학은 전통적인 프로이트 이론과는 많이 다르다.[3] 그렇기 때문에 21세기 현대 정신 분석학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학문적 여명기에 나왔던 논리만을 가지고 공격당하는 것에 상당히 억울해하고 있는 중. 이들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계보 속에서 계속해서 발달되고 수정된 큰 틀의 정신 분석을 이용하는 것이다.[4]

현대적인 임상 연구 방법론이 정립됨에 따라 프로이트의 전통적인 생각들은 (과학적 맥락이 아닌) 임상적, 치료적 맥락에서 보완되고 수정되어 왔다. 물론 새로운 과학적 방법 역시 정신 분석학계에 영향을 끼쳐 왔고, 이에 전통 프로이트 이론의 많은 부분들이 부정되거나 이를 현대 정신 분석학 이론가들이 수정해 왔다.

한편 비판적인 심리학자들은 프로이트가 지나치게 과학적 방법의 요건을 도외시한 채로 지나치게 포괄적인 이론 체계를 세웠다고 비판한다. 프로이트는 심리적 문제를 경험하는 빅토리아 시대 비엔나 지역의 소수 여성 내담자들만을 대상으로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관점을 형성했고, 이를 미국의 임상가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과잉 해석 및 확대 적용을 시도한 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본다.[5] 인지 과학자 키스 스타노비치는 《심리학의 오해》 에서 '인간 그 자체를 설명할 수 있는 포괄적인 설명이 심리학이라는 학문에는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크나큰 착각에 빠져 있는 데에는 정신 분석학의 영향이 크다'고 비판했으며, 상담과 심리 치료를 통해 사람들을 돕는 일은 심리학이라는 학문 그 자체의 존재 이유가 되지도 않는다고 웅변했다. 또한 그 치료의 과정 자체가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에 기초하지 않으면 심리학을 다른 학문들과 구분할 수 있게 하는 정체성 자체를 상실하게 된다고도 하였다. 한편 신경 과학자 크리스 프리스는 정신 분석학에 기초한 논문은 아직 실증되지 않은 아이디어에 그치는 논의들을 참고 문헌으로 다수 인용하고 있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하였다. 이런 비판론자들은 치료적 맥락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도리어 더더욱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학성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의 일부는 정신 분석 이론가들의 잘못된 학문적 태도와도 연관이 깊다. 정신 분석학이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이론가의 주류가 정신과 의사들이 되었고, 이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정신 분석학을 지나치게 의료화(medicalization)하였다는 것이다. 난해한 언어, 이해하기 어려운 임상적 용어들로 다른 학문이 이에 침투하기 어려운 배타적인 이론으로 만들었으며, 이러한 성역화는 정신 분석학이 다른 과학적 발전과는 동떨어진 갈라파고스와도 같은 상황을 만들었다는 비판이 있다. 실제로 1960-70년대 정신 분석학의 저작들을 읽어보면 일반 정신과 의사들이 보기에도 너무 난해하게 쓰여져 있다.

이와 같은 상이한 관점에서 언급할 만한 것은, 결국 심리학이라고 대중적으로 묶일 만한 학문 분야에서조차 심리학은 결국 그 학문함의 목적성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연구 대상의 보편적 특성이나 패턴을 발견해내는 (즉 nomothetic한) 것과 특정 개인의 심리적 상태를 평가 및 진단하고 개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즉 idiographic한) 것이 모두 심리학이라는 이름하에 교과목이 편성되어 훈련을 받지만, 결국에는 그 목적성의 차이로 인해 학술 공동체로서의 괴리감을 촉발하게 만든다는 문제가 있다. 한쪽에서는 전공 강의의 첫 수업 시간부터 정신 분석학을 최우선적으로 배우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프로이트에 대한 학문적 부관참시를 하는 것으로부터 그들의 전공 강의를 개관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심리학의 역사에서 대단히 보편적인 수준에서 제기되어 왔던 것으로, 일례로 APA의 회장을 역임했던 윌리엄 베반은 심지어 "심리학과 회원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심리학과' 라고 적힌 동일한 우편함에서 우편을 받는다는 것뿐"이라고까지 하였다. 이런 발언에 입각한다면, 비록 누군가가 기분 나빠한다고 하더라도, 정신 분석학을 수용하거나 말거나 모두가 현대 심리학의 우산 아래에 설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학문적 정체성이나 유의미성, 차별성은 역사가 아주 깊은 몇몇 학계를 제외한 어느 근대적 학문 체계에서든 보이지 않는 물밑싸움을 벌이고 있으니 일상적인 일이라고 하겠지만, 이것이 학부생들이나 대중들에게 왜곡된 형태로 (내지는 한쪽의 의견만이 반영된 상태로) 전달되는 것은 잠재적인 위험의 소지가 있다.

극단적으로 비관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정신분석학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정신분석학에 이해가 부족한 강경한 행동 과학자들이 정신분석학을 공격한다' 고 주장하지만, 한편으로 정신분석학을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과학적 연구에 이해가 부족한 임상가들이 심리학의 근간을 위협하고 있다'[6]고 주장하고 있다"는 식의 설명도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구도에서 보듯이 상대방을 향한 칼끝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되돌아올 수 있는 적대적 관계에서는 양측에 건설적인 협업이 형성되기 어렵다.

마침 심리학의 오해 문서에서도 지적하고 있지만, 정신분석학에 대한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의 이미지를 정립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인정 투쟁의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심리학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는 연구자들에게 뭔가를 과학적 방법을 통해 실증해 보인다는 것이 심리학을 위해 얼마나 중추적이고 근본적인 논리인지는 뼛속 깊이 체감할 수 있다. 고양이의 머리를 붙잡아두고 시각 체계를 연구하거나 쥐의 신경 발화율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에게 정신분석학은 그야말로 천체 물리학자가 바라보는 별자리 운명론 같을 수 있다. 이들의 활동을 고려하면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이라는 슬로건을 인정하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한편 필드에서 직접 뛰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그들의 생애사와 발달에 대해 수많은 데이터를 수집하는 임상가들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과학이라는 영역에서는 뭐라고 설명할 수조차 없는 이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소중한 접근 방법 중 하나가 바로 현대적으로 개선되어 온 정신분석학이라는 접근인 것이다. 이들의 활동을 고려하면 심리학의 정체성은 과학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 그 이상의 무언가이다.

잠시 생각해 볼 만한 점은 정신분석학이 향후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심리학이 본질적으로 과학성과 기술성 모두를 포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과학과 기술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는 것이 쉽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임상적 장면은 과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치료적 독특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fMRI를 비롯한 첨단 신경 영상 장비들의 과학적 발견들에 대해서는 두 손 들어 환영한다면, 눈돌아가는 뇌 사진들에 정신이 팔려서 치료 현장에만 존재하는 계량화할 수 없는 "어떤 것" 을 놓치게 될 위험이 있다. 이는 비단 환원주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특히나 신경 과학자들 본인들부터 뉴로이미징이라는 방법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을 느끼고 있는 2010년대 중반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더욱 중요한 사안이다. 이는 비단 정신분석학뿐만 아니라 심리학의 숱한 분과들에서 피해갈 수 없는 화두이기도 하다.[7] 이런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미 머리를 쥐어뜯고 있기에, 신경과학과 같은 소위 '경성 과학적 접근'에 대한 전반적인 심리학계의 분위기는 2000년대 초엽에 비교하면 상당히 침착해진 상태이다.

2. 현황[편집]



2.1. 의학계[편집]


현대의학이 모든 병을 고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임상정신병리학 역시 모든 정신질환에 확고한 대응책을 주는 것은 아니다. 현대 정신의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정신분석적 치료 외에는 뚜렷한 방법론이 없었으므로 1970년대까지 정신분석학적 치료는 이를 대체할 수단이 없는 치료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1970년대 정신약물학의 발전, 인지행동치료의 발전에 근거한 여러 치료법이 개발되었고 따라서 정신분석 치료는 그 무엇도 대체할 수 없는 1위의 자리는 더 이상 아니라고 하겠다.

현재의 정신분석 이론은 무수한 수정을 거쳐 프로이트 시대와는 사뭇 달라졌으므로, 이를 감안할 필요는 있다.

정신분석 치료는 그 치료의 특성상 환자가 일정 수준 이상의 인지기능과 좌절을 견디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스스로의 감정을 직시하고, 내면에 단속적으로 끊어져 있는 심리적 요소들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능력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분석 치료를 모든 환자에게서 적용하는 것은 어렵다. 오히려 현재 호소하는 우울, 불안, 환청 같은 뚜렷하고 심각한 정신병리적 증상이 있을 때에는 정신분석 치료는 답이 아니겠다.

하지만 정신의 문제를 호소하는 환자들을 파악하는 데에는 그 환자의 능력이 어디까지냐에 관계 없이 정신분석학 이론을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 환자가 왜 이러한 문제를 호소하고, 왜 이렇게 행동하는가에 대해서 설명을 정신분석학은 나름의 설명을 제시하고, 실제로 이에 근거한 임상적 접근은 많은 도움이 된다.

뿐만 아니라 심리검사에서도 정신분석학적 이론이 많이 사용되는데 현재 한국에서 표준적으로 쓰이는 풀 배터리 심리검사에는 직간접적으로 정신분석에 근거를 둔 검사들이 여럿 들어가 있다.

미국에서는 임상/상담심리사들도 정신분석학을 많이 공부하지만 한국은 특유의 심리학계에서 정신분석학에 대한 배타적 분위기 때문에 정신과 의사들이 더 정신분석을 공부하는 편이다. 여기에는 임상심리사들이 환자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는 의료제도적인 상황도 연관이 되어있다. 정신과 레지던트 때는 병원에 따라서 무료 혹은 저가에 정신분석을 직접 받을 기회도 제공한다.

2.1.1. 관련 문서[편집]



2.2. 비평 이론[편집]


비평에 정신분석을 활용하는 것은 거의 클리셰와 같은 것이 되어서 비평가라면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을 까기 위해서 정신분석 비평 이론을 가져올 정도다. 즉,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 체계가 지향하는 기본적인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 이건 프로이트의 이론을 대체로 헤겔이나 칸트의 비평 이론을 거쳐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인데[8], 개인의 심리에 대입하기에는 상당히 거칠게 보일 수 있는 정신분석학을 집단이나 사회에 적용시키면 나름대로 괜찮은 설명을 뽑아낼 수 있었던 것이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정신분석학에서 아버지라고 하는 것을 권력의 작동으로, 어머니라고 하는 것을 개별적 삶을 향유하는 것이라고 환원시키는 것 등이 이들 비평의 특징이다. 즉 개별적인 모티프를 총체적인 모티프로 추상화하는 것. 계속해서 이야기하면 개인의 무의식을 오이디푸스 삼각관계의 아버지-아이-어머니에서 권력-개체-자유라는 공식으로 치환을 했을 때의 효과는 이전까지의 비평의 고리타분함이나 전문성, 난잡함에서 벗어난 명료함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 전환은 그전까지 전문성에 치우쳐져 있었던 비평을 대중문화에 대한 비평으로 이끌어올 수 있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독일 관념론은 일반적으로 총체적인 것을 먼저 파악하고 그로부터 자신을 주체화하는 구조를 가지는데, 이렇게 현실을 총체성으로 인식하면서 그에 맞춰 스스로의 주체성을 만들어내는 논리를 낭만주의라고 한다. 이 낭만주의적 사고는 개별적인 주체성을 결정짓는 논리들을 판단하는 것을 우선시하는데, 카를 마르크스 이전에는 이런 논리들을 명료한 단어로 이끌어오기가 어려웠다. 마르크스를 거치면서 그것이 가능해졌지만, 문제는 마르크스의 이론들은 지나치게 정치적이었다는 것. 즉 섬세한 판단을 요구하는 문제나 사안에 대해서 정치적 주체화를 강조했던 마르크스주의는 해석을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확장하고 그로부터 강박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정치화라는 뚜렷한 목표점을 만들 것을 요구했다.

그런 와중에 나타난 정신분석 이론은 그전까지 사회에 대한 비평이라면 빠질 수가 없었던 마르크스의 과도한 주체화 논리에 제동을 걸게 되었던 것. 마르크스의 이론을 빌려 비유를 하자면 하부구조의 상부구조에 대한 지배력만을 놓고 이를 변형시키는 것을 과제라고 보았기 때문에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상호작용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이런 이유로 지나치게 교조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즉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에 대해 새로운 논리를 제시한 마르크스 자신이 내세운 이론이 변증법이 중지되어 교착상태에 있었던 것인데, 정신분석학을 이 사이에 도입함으로써 다시금 인간의 삶을 이루고 있는 현실의 제반 조건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논리적인 매개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물론적 관점에서 보는 '물질성'이 되었고, 이것은 인간의 의식을 결정하지만 인간은 의식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은 이를 분석할 수 있는 혁신적인 관점의 전환점을 보여주었던 것. 사실 정신분석학이 나오기 이전에도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서 현실의 유물론적 구조를 파악하고자 했던 비평가들이나 철학자들은 존재했다. 발터 베냐민이 대표적인데, 정신분석 용어만 사용하지 않았다 뿐이지 그 접근법은 고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시대 상황을 물질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분석했다. 다만 그런 용어를 가지지 못해 개념에 단락이 많고, 상당 부분을 직감에 의존하려고 했다. 프로이트가 원장면이라고 불렀던 것을 베냐민은 변증법적 이미지라고 부른다거나 하는 식으로 유사한 부분들은 많았지만 이를 일반화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정신분석 비평 이론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분석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형태를 취한다. 이를테면 개인이 꿈을 꾸듯 집단은 꿈을 꾸고, 집단이 꾸는 꿈은 그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감각에 기인한다. 이 감각을 재현하는 것을 예술이라고 보았던 헤겔의 관점에 맞추어, 집단이라는 대중의 꿈은 곧 대중 문화인 것이다.

대중문화를 그 집단이 꾸고 있는 꿈이라고 해석함으로써 그 집단의 총체적인 방향성과 상태를 진단한다는 이야기다. 사실 이는 프로이트의 문명에 대한 비평[9]에서 이미 예견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즉 정신분석학은 원래부터 개체의 정신보다 총체적인 정신의 흐름을 설명하기에 적합하다는 것. 이렇게 정신분석을 통해 개인이 권력 앞에서 반응하는 모습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면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총체적인 환원은 독일 관념론의 전통에서 기인하고 있고, 이를 가장 잘 활용했던 철학자로 헤겔과 칸트가 있기 때문에 헤겔과 칸트를 거쳐서 활용하게 된다. 보통 이런 비평들은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활용해 국가와 사회 전반에 걸쳐서 프로이트의 이론들을 가져와 썰을 풀어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에 마르크스의 정치적인 부분을 뺀 변증법적 유물론까지 끌어온다면 굉장히 복잡해지지만 보통은 거기까지 가지는 않는다. 일단 추산과 해석이 어렵기 때문이고, 글로 써놔도 글이 난해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비평을 하고 있는 비평가가 바로 프레드릭 제임슨.

이러한 이유로 인해 독일 관념론에 대한 이해가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정신분석학의 기본 용어와 개념들을 가져오게 되는데, 이러다 보니 정작 정신분석학에서 개별적으로 보는 사안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견이 없거나 있더라도 사안의 핵심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심리학계에서 정신분석학을 근거가 없고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를 할 때 이들 비평가들은 이에 대해 "그건 당신이 권력의 작동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전혀 딴소리를 하게 되는 것.

최근에는 비평 이론만이 아니라 문화의 형태와 발전양상을 파악하는 문화 이론에서도 광범위하게 정신분석학의 방법론을 차용해서 쓰고 있는데, 사실 협의로보면 정신이란 개체의 정신이지만 광의로 보면 정신이 군체의 정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0] 다만 그런 이유로 군체의 정신으로부터 개체의 정신의 상황을 파악하는 구조를 가진 분석심리학은 그다지 환영받고 있지 못하는 추세.

3. 프로이트의 이론[편집]


심리학자 드루 웨스턴(D. Westen)은 1998년에 프로이트가 "록 음악에서의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위상을 차지했다" 고 평가한 바 있다. 이것이 다른 심리학 분야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한 비판이 거셈에도 여전히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사실 그의 이론이 현대의 과학적 회의주의의 관점에 입각했을 때 검증되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듯해 보이고 매혹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2011년대 이후 상술했던 신경심리학의 이론과 정신분석학 이론을 통합하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초자아와 원초아 간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역동은 배외측 전전두피질(DLPFC; dorsolateral prefrontal cortex)과 중변연계(mesolimbic system) 사이에서 나타나는 자기조절(self-regulation) 과정으로도 설명될 수 있으며, 무의식(unconscious) 역시 현대 인지과학에서 말하는 암묵적 정보처리(implicit information processing), 비의식적 지각(nonconscious perception) 같은 개념들을 연상케 한다. 이는 마치 프로이트의 이론이 신경과학적인 근거로 뒷받침되는 것처럼 보이는 사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결국 개념의 환원으로 인한 학문적 잠식의 가능성이다. 달리 말해서, "만일 무의식이 단순히 암묵적 정보처리와 동일시될 뿐이라면 우리가 어째서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와 같은 질문에 정신분석학계가 제대로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어느 정도 건설적인 경계심을 유지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3.1. 에로스와 타나토스[편집]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능(또는 충동)이 항상 신체에 존재하고 있다고 보았다. 마치 인간의 혈액순환과 내분비 작용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는 것처럼,[11] 인간의 정신적 측면에서도 항시 존재하면서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 존재할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프로이트가 "충동" 이라고 부른 이 본능은 두 가지의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존재하는데, 하나는 생(生)의 본능인 에로스(eros), 다른 하나는 사(死)의 본능인 타나토스(thanatos)이다.

에로스는 심리성적 에너지인 리비도(libido)가 관여하는 것으로, 충동 중에서도 성적인 충동을 담당한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이 부분을 그의 모든 이론에서 매우 힘주어 강조하면서 다른 이론들의 기초로 삼았다. 현대인들에게 프로이트가 마치 변태 노인네처럼 여겨지는 것은 바로 이 리비도 때문. 반면 타나토스는 프로이트 본인조차도 그다지 많이 논의하지 않았으며, 충동 중에서도 공격적 충동을 담당한다. 이 부분은 현대의 정신분석학자들이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가장 먼저 내버린 개념이기도 하다.

여기서 인간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다. 리비도는 저절로 줄어들지 않는데 이 리비도를 해소할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 성적인 충동을 사회에서 함부로 드러내 보였다가는 금세 철컹철컹 크리를 맞기 십상이니, 어지간해서 리비도는 충족되기가 힘들다. 결과적으로 그 잉여분은 인간의 무의식(unconscious) 속에 남겨져 있다가 언뜻언뜻 그 존재감을 내비치게 된다. 이를 탐지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최면, , 자유연상, 유머, 상징, 말실수 등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해되는 것처럼, 프로이트는 꿈이야말로 무의식을 가늠할 수 있는 왕도라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꿈은 개인의 무의식 속 긴장을 통제해서 적절히 방출하는 것을 허용하는 안전지대였다.[12] 꿈 속의 음침한 소망과 충동은 상징(symbol)이라는 안전장치에 묶인 채로 나타나며, 기상 후 의식수준에서 묘사 가능한 기억나는 부분과, 자유연상을 통해 추가적으로 얻어지는 단서들을 조합하면 무의식에 대한 분석이 가능하다는 것.

그 외에도 프로이트는 몇몇 특이한 탐지방법을 제안했다. 대표적인 사례를 두 가지만 들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말실수로, 이는 따로 "Freudian slip" 이라는 용어까지 붙었다. 프로이트의 예를 빌리면, 당시 오스트리아 하원 의장은 개회를 선언할 때 "이제 정족수가 충족되었으므로 폐회를 선언합니다" 라고 잘못 말했는데, 이를 통해 회의가 어서 빨리 끝났으면 하는 그의 무의식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사퇴합니다 라고 말했던 것이 비슷한 예. 그 외에도 프로이트는 인간의 유머에도 무의식이 엿보인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이 흔히 음담패설을 즐기는 것 역시 리비도를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한 방출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3.2. 마음의 지형학적 모형[편집]


무엇이 마음을 이루는가? 이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노력한 프로이트의 모형이 바로 지형학적 모형(topographic model)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의식(conscious), 전의식(preconscious), 무의식(unconscious)으로 구분될 수 있다. 개인은 의식 속에서 하나의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옮겨갈 수 있고, 또한 전의식을 관찰해서 그것을 끌어올리거나 반대로 밀어내릴 수 있지만, 무의식의 경우에는 의식세계로 꺼내올 수 없다는 게 그의 이론이다.

물론 프로이트가 가장 강조했던 부분은 무의식으로, 이는 매일의 리비도의 긴장 상태가 끊임없이 축적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상술되었듯이 꿈은 무의식의 핵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이를 해석하려면 먼저 그 명시적인 가면 이면에 숨겨진 실제 욕망의 핵심인 상징적 의미를 풀어 이해해야 한다는 것. 쉽게 예를 들자면, 꿈 속에서 이것은 남근을 의미하고 저것은 아버지를 의미한다는 식의 설명이 바로 이에 기초하고 있다.

프로이트가 제대로 짚은 점이 있다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연속적인 관계가 있다고 추론한 것이다. 또한 무의식이 때때로 개인의 사고와 행위, 의식적 경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 역시 정확히 판단했지만, 아쉽게도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상호작용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낸 바 있다.

3.3. 성격 발달 이론[편집]


프로이트의 성격이론을 이해하려면 먼저 심리성적 발달단계(psychosexual developmental stage)를 이해하는 편이 훨씬 쉽다. 그의 발달단계는 언뜻 당혹스러운 내용으로 가득하지만, 어째서 프로이트가 성격의 구조 모형(structural model)을 그렇게 설정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심리학과 학부생들이 교재에서 심리성적 발달단계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그 이론이 갖는 역사적 의의와 인간관의 변화, 후대에 끼친 영향, 한계점과 주요 비판점들을 공부하는 실익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특히나 20세기 중엽 이후로 에릭슨의 발달단계론이나 애착 이론 등 많은 임상가들과 학자들이 이 이론을 수정하면서 심리학 이론들을 발전시켜 왔으므로 그들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정신분석학에 대해 먼저 숙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발달단계 이론보면 대부분 프로이트의 무슨 단계에 해당하며라고 나와있는게 이 이유다[13].

언제나 그렇듯 프로이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리비도이므로, 발달단계는 전적으로 성적 충동에 기초하여 구분되고 설명된다. 만일 어린이에게서 리비도가 충분히 충족된다면 긴장이 가라앉고 정상적으로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만일 이 만족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다면, 채워지지 않은 리비도의 일부가 그 신체부위에 그대로 남겨지게 되고, 결국 다음 단계의 도전을 다루기 위해 준비되어야 할 리비도가 더욱 적어지게 된다. 이러한 문제가 바로 고착(fixation)이다. 남겨진 리비도는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그 초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체적 및 심리적으로 골몰하게 한다.

한 개인의 첫 발달단계는 바로 구강기이다. 한 개인에게 오직 원초아(id)만이 존재하며 그것의 충동과 소망에 온전히 이끌려서 그 어떤 제재도 받지 않고 움직이는 시기다. 쉽게 말해 "지 꼴리는 대로 마음대로 해버리는 시기". 이때 관여하는 신체부위는 으로, 초기에는 당연히 치아가 없으므로 주로 수유 중의 빨기, 삼키기에 몰두하며, 후기에는 치아가 생겨나므로 이제 깨물기와 먹기로 넘어가게 된다.

초기에 리비도의 결핍이 발생하면 구강 협응적 성격(oral incorporative personality)이 된다. 이들은 음주, 흡연, 키스 등을 통해 결핍된 리비도를 채우는 데 천착하고[14], 마치 아기처럼 다른 이들을 쉽게 믿고 받아들이며 의지하려 한다. 반면 후기에 리비도의 결핍이 발생하면 구강 가학적 성격(oral sadistic personality)이 된다. "깨무는" 활동에서 리비도가 결핍되었으므로, 개인은 성인이 되어서도 입으로 타인을 괴롭히고 가학성을 보이며 공격적인 언행을 보이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들의 문제는 불안에 처한 상황에서 손톱이나 빨대 등등을 마구 깨물도록 만든다.

1~3세가 되면 이제 두 번째 발달단계인 항문기가 나타난다. 한 개인에게 원초아를 통제할 자아(ego)가 비로소 나타나는 시기이며, 충동을 따라 자유롭던 개인이 비로소 사회적 기대와 타인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게 되는 시기. 이때 관여하는 신체부위는 항문으로, 초기에는 아직 적절한 통제를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주로 배변하려는 경향을 보이며, 후기에는 이미 배변훈련이 상당히 진행되어 배변을 참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초기에 리비도의 결핍이 발생하면 항문 배출 성격(anal expulsive personality)이 된다. 마치 어린이가 아무 때에나 함부로 배변하듯이, 이런 성인들은 무절제하고 통제력이 없으며 저항적이고 자뻑이 심하다. 반면 후기에 리비도의 결핍이 발생하면 항문 보유 성격(anal retentive personality)이 된다. 마치 어린이가 양육자의 배변훈련에 과도하게 부응하려 노력하듯이, 융통성이 없고 인색하며 지나치게 조직화되어 있고 고집스러우며, 깔끔한 것과 정리정돈을 좋아하고 완벽주의적인 사람이 된다.[15]

이 항문기 성격에 관해서는 과학적으로 연구된 적이 있다. 어떤 심리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위의 항문 보유 성격은 일부 맞는 것으로 보이는데, 실험 결과 인색한 사람은 대체로 고집이 세고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16] 그러나 정작 항문기의 존재는 과학적 의심의 대상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위와 같은 항문기 성격은 배변 훈련과 관련되어야 하는데, 과학 연구들은 오히려 부정했기 때문이다.[17]

5세 이전까지 세 번째 발달단계인 남근기가 완료된다. 한 개인에게 부모의 가치가 동일시됨으로써 초자아(superego)가 이식되는 시기이며, 부모의 꾸중과 같은 처벌을 겪으며 그들의 가치체계에 부응하고자 노력하는 시기. 이때 관여하는 신체부위는 남근으로,[18] 남성에게는 거세 불안(castration anxiety)이, 여성에게는 남근 선망(penis envy)이 나타난다. 즉 이는 최초로 성차가 나타나는 단계이며, 남성과 달리 여성이 그들의 리비도를 제대로 충족하지 못한 채 남겨지는 비극적인 시기이기도 하다.

남성의 경우, 이때 어머니를 향한 갈망과 아버지에 대한 견제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해결해야 한다. 즉 아버지의 가치 체계의 내면화, 즉 아버지의 초자아의 이식이 그것이다. 여기에 실패하여 결과적으로 리비도의 결핍이 발생하면, 성인이 되어 남근기 특성(phallic character)이 나타난다. 이들은 남근 상징적 취미에 몰두하고, 남성성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남자다움을 과시하고 힘을 얻는 데 관심을 보이며, 간지나는 자동차크고 아름다운 트럭 등에 광적으로 흥미를 보인다. 쉽게 말해 남자의 로망에 목숨을 걸게 된다!!

문제는 여성의 경우인데, 아버지에 대한 갈망과 어머니에 대한 견제 외에 남근 선망이 뜻밖의 변수로 작용한다. 즉 아버지에게 내면화를 하려고 해도 자신에게는 없는 남근을 가진 아버지는 결국 남근 선망을 일으켜서 다시 거리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만성적인 리비도의 결핍은 히스테리 특성(hysterical character)을 초래하여 경박함과 난잡함, 남성성에 대한 비난 등을 보이면서 그들의 남근 선망을 애써 해소하려 노력하게 한다. 그러나 그들의 결핍은 그들이 결혼하여 아들을 낳을 때까지 지속되며, 아들을 통해 상징적 남근을 얻음으로써 그때 비로소 히스테리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이제 개인은 원초아 - 자아 - 초자아라는, 성격의 세 가지 구조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성격은 5살이 되면 완성된다. 아기일 적에 먹고싶을 때 먹고 싸고 싶을 때 싸는 생활을 통해 원초아가 형성되고, 이후 부모에게 배변훈련을 받으면서 상황적 필요에 따라 스스로를 통제하는 경험을 하며 자아가 형성되며, 부모에 대한 갈망을 생산적 방향으로 해결하기 위해 내면화를 채택, 부모의 가치체계를 따라 부모에게 조금이라도 더 근접하고자 노력하면서 초자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후 프로이트는 잠복기를 가정했는데, 5세에서 사춘기 시절까지의 이 기간에는 끓어오르는 리비도가 학업이나 또래 집단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활동들 속에서 승화되며 해결된다고 보았다. 사실상 프로이트가 크게 역점을 두지 않은 부분. 그리고 사춘기에 도달했을 때, 프로이트는 생식기 내지는 성인기를 가정하면서, 비로소 "사랑하기와 하기"(Lieben und Arbeiten)로 묘사되는 생산적인 사회 구성원이 되었다고 보았다. 사춘기 청소년들 역시 성인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대접받을 수 있다는 것.

현대 정신의학과 임상심리학, 유아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오이디푸스 시기의 발달에 대한 프로이트의 세부적인 설명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19]. 하지만 큰 틀에서 프로이트의 관점과 현대 정신분석학의 관점은 비슷하다. 즉, 3세에서 6세까지의 발달 시기에서 인간은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20], 부모로부터 일방적으로 사랑받으려 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모와 경쟁하고 반항한다. 이 노력하는 과정에서 도덕성, 수치심, 자존감, 스트레스에 대한 인내 등 많은 인간 심리의 구성 요소가 개별화 되어 형성되어 추후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3.4. 정신역동[편집]


인간의 내면에 위치한 세 가지 정신적 요소, 이드와 자아, 초자아는 서로가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는 관계가 아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이드의 의지와 초자아의 의지, 그리고 자아의 중재가 갈등, 투쟁, 타협을 오가면서 복잡한 전쟁과 휴전이 반복된다. 즉 인간의 마음은 정적이라기보다는 동적이다.

이드와 초자아는 그 성질상 적대 관계라고 보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 원초아는 마구 끓어오르는 성적 충동과 공격적 충동을 현실 세계에서 표출하려고 하며, 부모의 도덕규범과 양심으로부터 이식된 초자아는 그럴 때마다 사사건건 태클을 걸면서 원초아가 제 성질을 부리지 못하게 막는다. 물론 그런다고 순순히 물러날 원초아가 아니고, 이렇게 양자간의 싸움이 격화되기 전에 자아가 적절하게 나서서 중재를 시도한다. 현실원리에 비추어서, 자아는 일정 부분은 원초아가 충동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나타내 보이도록 허용하고 일정 부분은 현실적인 한계를 인식하게 하여 원초아를 진정시키려 한다. 즉 "본능" 에 입각하여 심리적 에너지를 마구 뿜어내려는 원초아와, "도덕규범 및 양심" 에 입각하여 그것을 억누르려는 초자아 사이에서, "현실" 에 입각한 자아가 내면의 전쟁을 막아내는 역할.

3.5. 방어기제[편집]


프로이트가 제안한 정신역동 모형에서 자아(Ego)가 짊어져야 하는 책무는 막중하다. 초자아의 비판을 견뎌내면서, 이드로부터 올라오는 본능적인 욕구를 적절히 융합해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이 적절하지 못 하면 지나치게 이드가 억압되거나, 초자아에 굴복해서 자책감에 휩싸일 수 있었다.

프로이트 역시 이를 알고 있었고, 자아의 과업이 지나치게 버거워지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 첫째 부작용이 바로 불안(anxiety)이라고 생각했다. 그 구체적인 증상은 신체적일 수도 있고, 심리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아는 불안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단을 지니고 있는데, 프로이트는 이것이 바로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라고 제안했다. 방어기제들은 자아를 손상시키기 쉬운 불안과 그것이 가져올 우울증의 위협으로부터 자아를 지켜내기 위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프로이트의 생애에 방어기제는 자아의 중재 방식을 의미했지만, 프로이트의 사후 안나 프로이트에 의해서 방어기제는 정신역동의 큰 요소로 자리잡았다. 현대 정신분석적 치료에서 방어기제에 대한 해석과 교정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4. 융의 이론[편집]


분석심리학 문서 참고.

5. 후학[편집]


오늘날 거론되는 정신분석은 더 이상 프로이트가 말하는 그 의미만을 독점적으로 담아내고 있지 않다. 이하의 학자들이 생각했던 내용들은 많은 정신분석 치료 장면들에서 다양하게 응용되고 있다.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자기만의 영역을 개척한 사람들을 가리켜 "신프로이트 학파" 라고도 부른다. 이에 대응되는 개념이 바로 고전프로이트 학파.
  • 안나 프로이트
프로이트의 친딸이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프로이트 사후 그의 업적과 이론들을 정리했으며 방어기제의 종류를 체계화하는 작업을 하였다. 아래의 멜라니 클라인과는 대립 관계이며 하인츠 하트먼과는 협력 관계이다.
  • 데이비드 래퍼포트
  • 도널드 위니캇
위니캇과 페어베언은 대상(object)과의 관계를 중시했는데, 특히 유년기의 중요한 몇몇 사람들과의 관계를 강조하여, 일반적 대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설리번 등과 대립하였다. 인간은 대상으로 지목한 사람에게 유년기에 승인받고 인정받는 경험을 함으로써 정상적으로 성격을 발달시키게 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 단적으로 말해 "부모 노릇 똑바로 하라" 가 이들의 메시지다. 국내의 정신분석가들의 학풍이 대개 이 대상관계 쪽이라고 카더라.
  • 로널드 페어베언
  • 헨리 건트립
  • 멜라니 클라인
위와 마찬가지로 대상관계학파의 얼굴마담이며 안나 프로이트와는 대립 관계. 두 사람은 프로이트 사후 아동의 정신분석 문제를 두고 크게 대립했다. 이 입장의 대치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정신분석학계는 크게 자아심리학파와 대상관계학파로 나뉘어져 있다.
프로이트에게 최초로 반기를 든 후학으로 유명하다. 정신분석에 사회적 요인 및 전체론적 조망을 가져올 것을 역설함으로써 개인 내부의 경험과 환원가능한 측면을 강조하던 프로이트와 대립하였다. 아들러는 "개인심리학" 이라 불리는 분야를 창시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우월함에 대한 추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출생순위(birth order)와 아동발달의 관계에 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아들러와 입장을 같이하는 흐름을 "아들리안 학파" 라고도 한다.
프로이트의 성격발달 단계를 포함하는 전생애적 발달단계를 고안했다. 특히 발달이 평생에 걸쳐 서로 다른 발달과제에 직면하며 진행된다는 그의 아이디어는 오늘날까지도 엄연히 유효하며, 수많은 최신 발달이론들이 에릭슨의 모형과 비교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아들러처럼, 그 역시 개인의 성격에 있어 사회적 요인이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고 생각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정신분석을 도입한 유명한 심리학자. 사회심리학 분야를 개척한 것으로도 유명하다.[21] 그는 인간의 성격형성이 사회적 요인의 힘과 상호작용하며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고.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을 활용하여 라캉철학이라는 독자적 철학 체계를 정립했다. 극도로 난해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다만 그 난해함은 의도된 것으로 그의 철학에 대한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아이콘으로 통하기도 한다.
  • 조지 에만 베일런트
방어기제를 주로 연구했으며, 더 바람직하고 더 성숙한 방어기제가 있는 반면 더 원시적이고 미성숙한 방어기제가 있음을 제안하였다.
  • 카렌 호르나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프로이트의 성차별적 요소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사회적 돌봄과 따뜻한 유대가 개인의 성격발달에 필수적이고 이것이 없는 고립된 사람들에게서 신경증이 나타난다고 제안하였다. 에리히 프롬과는 문화적 요인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의기투합했고, 해리 설리번과는 대인관계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는 점에서 종종 묶어서 언급되곤 한다.
한때 프로이트의 수제자였으나 학문적 결별을 계기로 프로이트에게 엄청난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집단적 무의식" 의 존재를 제안했으며, 개인은 자신의 경험 외에도 조상들의 공유된 기억과 민족의 얼에도 영향받는다고 보았다. 주로 관심을 기울였던 대상은 신화, 민담, 전설 등이며, 성적 상징에 거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의 이론은 "분석심리학" 이라 불리며 훗날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MBTI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 하인츠 하트먼
안나 프로이트와 함께 자아(ego)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였다. 대상관계학파에 대항하여 자아심리학을 창시하여 "자아심리학의 아버지" 로 불리는데, 이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평가 절하했다. 이 분야에서는 자아의 발달과 기능상의 효율이 연구되었다.
  • 해리 스택 설리번
호르나이와 유사하게, 타인과의 관계를 통한 정서적 경험이 자기(self)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설리번에 따르면, 불안은 내면 정신역동의 불균형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 대인관계에서 받은 좌절과 상처의 결과이다.
로르샤흐 검사를 개발한 분석가로 유명하다. 치료 장면에서 자주 쓰이는 투사형 검사의 개발에 큰 공을 세웠으며, 그의 검사는 오늘날에도 엄청난 인지도를 갖고 활용되고 있다.[22] 무의식의 의식화를 돕기 위해서 자유연상의 보완 혹은 대체물로 애용되는 중.
[1] 뇌신경과학같은 비정신분석학적 학문들에서는 무의식적 활동이란 의식적 자각에 전적으로 따르지 않는 정신적 활동을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하며 이경우 이를 '비의식'(nonconscious proces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베르그송과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 비교 연구> 주성호[2] 대신, 일반적인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들이 기본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수준은 정신 역동이론 및 대상관계 이론까지다. 융학파나 라캉학파를 추구하는 것은 개인 선호에 따른 것으로 봐야 한다.[3] 도서 《Freud and Beyond》(1995)를 참고.[4] 이러한 '큰 틀'을 싸잡아 정신 역동적(psychodynamic) 이해라고 한다. 모든 임상가들은 정신 분석학자가 아니어도, 대상관계 이론처럼 현재까지 발달된 정신 분석적 맥락 안에서 기본적인 틀을 이용하여 환자를 이해하고 치료할 수 있다.[5] 이 점에 대해서는 프로이트를 비판하는 인접 학문 분야들의 (ex. 페미니즘 이론 등) 저작물들에서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부분이다.[6] 예컨대 정신분석학 옹호자들은 그들이 적대하는 그룹이 행동주의 심리학자들"뿐"이라고 믿을 수도 있지만, 그 행동주의자들의 잔칫상을 엎어버린 인지 과학자들과 후대의 신경 과학자들 역시 정신분석학을 의미 있는 과학 연구의 토픽으로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까지는 반영하지 않고 있는 듯 보인다. 정신분석학의 논리 체계에 대한 인식이 프로이트에서 멈춰 버리면 곤란하듯이, 여타 심리학 분과들의 논리 체계에 대한 인식이 스키너에 멈춰서도 곤란하다.[7] 예컨대 정신분석학 긍정론자들에게 이유모를 공격을 받는 사회심리학계를 예로 들면, 한때는 이들도 부두교 과학(voodoo science)이라는 욕까지 먹어가며 사회 신경 과학 등의 통섭론에 열을 올렸었지만, 십수 년이 지난 뒤에는 오히려 뇌 기반 연구에 좀 시니컬해진 연구자들도 많다.[8] 헤겔이나 칸트에서 곧바로 이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독일 관념론의 철학적 체계를 문화현상에 대입해 비평했던 체계에 20세기에 등장했던 거의 모든 발상의 전환을 일으킨 발견이나 이론들이 인용되어왔는데, 정신분석학은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활용되어 왔던 것[9]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되자 자기의 이론을 활용해 문명이나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10] 여기에 어떤 사안에 대한 실효성을 가지는 비평이 곧 그것 전체에 대한 이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말이기도 하다.[11] 이 부분은 프로이트의 생리학자로서의 배경과도 연결되어 있다.[12] 물론 그가 생각한 꿈의 역할이 옳다고는 할 수 없다. 재미있게도 현대 심리학에서조차 꿈의 진화적, 적응적 역할은 아직도 가설들만이 난무할 뿐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13] 예외는 피아제인지 발달 이론과 파울러의 영적 발달 이론이다.[14] 이 부분에서, 프로이트 자신은 구강기에 고착되어 흡연을 못끊는다고 했다. 즉, 흡연=펠라하고 싶다는게 아니라 빠는 행위에서 못벗어난다는 뜻[15]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763481 p117-118[16] Rosenwald, G. C. (1972). Effectiveness of defenses against anal impulse arousal. Journal of Consulting and Clinical Psychology, 39(2), 292.[17] Fisher, S., & Greenberg, R. P. (1985). The scientific credibility of Freud's theories and therapy. Columbia University Press.[18] "생식기" 나 "성기" 같은 표현 대신 구태여 남근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19]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의학, 심리학보다 페미니즘 이론에서 자주 거론되고 비판된다[20] 오늘날의 발달심리학과 비교해 봐도 합치함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항문기에 해당하는 시기 되어서야 배설의 수의적인 조절이 가능해진다.[21] 물론 현대의 사회심리학은 더 이상 그에게 큰 의존을 하고 있지는 않다.[22] 단, 심리검사가 인지도가 높다는 건 약이 아니고 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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