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대(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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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정용대(鄭用大)
자/호중범(重凡)/의암(毅庵)
본관광주 정씨
생몰1882년 2월 28일 ~ 1910년 1월 26일
출생지경기도 적성현 남면 경신리
(현재 경기도 양주시 남면 경신리)
사망지경성형무소
추서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정용대는 1882년 2월 28일 경기도 적성현 남면(현 양주시 남면) 경신리에서 아버지는 정두환(鄭斗煥)과 어머니 풍천 임씨(豊川任氏)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광주 정씨 양촌공파 21세손으로, 일찍이 군문에 들어가서 정교(正校)로 근무하다가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귀향하여 동장으로 근무하며 아동들에게 한자를 가르쳤다. 그러던 1907년 말 동향 사람인 윤인순(尹仁淳)이 의병을 일으키자 가담하여 서기로서 활동했고, 1908년 2월 이은찬 의병장을 중심으로 창의원수부가 구성될 때 좌군장에 선임되었다.

창의원수부 의진은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씩이었는데, 일본군경과 작은 전투를 벌일 때는 독자적으로 싸웠으나, 큰 전투를 벌일 때는 연합했다. 일제가 기록한 <폭도에 관한 편책>에 따르면, 정용대는 1908년 3월 2일 이은찬과 함께 8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양주경찰서와 연주언병분견소 연합대를 상대로 양주군 회암면 귀율리에서 교전했다가 사망자 1명, 부상자 10명을 내고 포천군 송우 방면으로 후퇴했다고 한다.

<통감부문서> 10권, '폭도수령 정용대 경기 교하 지방 무장 출몰 건'에 따르면, 정용대는 약 80명의 부하를 이끌고 목하 경기도 교하군 북면 지방을 횡행하며 금곡(金穀)을 약탈하고 있으며, 총기는 서양식 총 50정, 화승총 20정, 권총 4정, 군도 7자루를 휴대하고 복장은 상하 모두 다갈색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1908년 겨울로 접어들자, 창의원수부 의진은 포천지역의 일본군 수비대·헌병대·경찰대를 섬멸하기 위해 유인책을 쓸 정도로 능동적인 활약을 벌였다. 이에 일본군은 용산수비대와 경성헌병대의 병력을 급파하고, 포천지역에 경비전화를 가설하는 등 창의원수부 의진의 습격에 신속히 대처하도록 하였다.

창의원수부 의진은 분산하여 소부대 단위의 유격전을 펼치는 가운데 포천, 영평 일대에서 의복, 식량, 무기 등과 군자금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때에도 이은찬 의병장과 정용대는 반드시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후일 갚도록 함으로써 지방민들도 그들을 '대장(大將)' 또는 '각하(閣下)'라고 일컬었다.

이듬해인 1909년 1월4일 창의원수부 의진 200여 명은 포천지역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포천헌병분견소와 수비대를 기습하고 양주로 이동하였다. 1월7일에도 양주헌병분견소를 기습하면서 의진을 나눠 동두천헌병분견소를 공격하는 양동작전을 구사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1월15일 밤 300여명 의진으로 포천군 내촌면과 가산면을 기습하고 양주로 나아갔고, 1월25일에는 170여명의 의진으로 양주군 광적면에서 일본군 정찰대 및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그리고 1월26일, 28일에도 의진을 두 부대로 나누어 일본 헌병대와 경찰대를 공격한 후 소를 8마리를 잡아 설을 쇠었다.

이처럼 창의원수부 의진은 1908년 12월부터 약 3개월간 포천, 가평, 양주 등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줄기찬 의병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연일 계속된 전투로 탄약이 결핍되고, 사상자가 속출하여 1909년 2월에 이르러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군경 합동부대와 변장대를 편성하여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펴기 시작하였다.

창의원수부 의진은 포천과 양주 등지로 옮겨 다니면서 총탄을 아끼는 이른바 '전투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힘썼으나 3월6일 양주군 현암리에서 이들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했고, 이어 3월16일 양주 북방에서 우군장 윤인순 의병장이 일본군 삭령수비대와 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했다. 이은찬 의병장은 의진을 해산하고 후일을 기약하려 했지만 3월 31일 일제에게 가담한 밀정에 의해 용산 정차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동안 함께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이은찬 마저 체포되었지만, 정용대는 포기하지 않고 의병 활동을 지속했다. 일제가 기록한 <폭도에 관한 편책>에는 다음 기록이 기재되어 있다.

“(1909) 3월27일 오후 1시경, 경기도 통진군 주재 일한 순사 5명은 그곳 헌병과 같이 동군 양릉면 삭제리에서 폭도수괴 정용대 및 그 부하 27명과 충돌하여 약 2시간여 교전 후 폭도들을 흩어지게 하고, 이튿날 오전 3시까지 추적하였던바, 폭도들은 모두 정예한 총기를 휴대하고 김포 쪽으로 퇴각하여 동군 운양리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교하군을 향하여 도주하였다. 이 교전에서 피아(彼我) 사상자가 없다.”


정용대는 인근 의진과 연합해서 의병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창의군사부를 이끌고 있던 권중설 의병장과 함께 각국 영사에게 통고문을 보낸 것이 <통감부문서> 10권 '헌기 제1088호'(1909. 05. 25.)에 기록돼 있는데, 이 문서에는 그가 창의군사부 돌격장으로 나타나 있다. 그 후 정 의병장은 임진강 유역 각지에서 일본군경과 전투를 벌여 큰 전과를 올린 후 창의원수부 의진을 수습하여 대장에 오르고, 국권회복의 의지를 다졌다.

“폭도수괴 정용대는 최근 풍덕군 방면으로부터 돌아와서 양언(揚言)하기를, “이은찬·윤인순 두 의병장을 잃었으나, 우리 의병은 좌절한 것은 아니다. 방가(邦家:국가)를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여 왜놈의 압박을 제거하고 국권회복(國權恢復)을 도모하여 그 뜻을 관철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폭도에 관한 편책


그러나 1909년 여름이 되자 일본군경의 의병 토벌은 극심해져 의병투쟁은 더욱 어려워져 갔다. 특히 이은찬 의병장의 피체 이후 의병들의 사기가 떨어져서 의진을 구성하는 의병수도 점차 줄어들게 되고, 소지했던 탄환도 바닥이 난 상태가 되자 정용대 의병장은 의진을 해산하고 고향 인근으로 은신했다가 1909년 9월 9일 끝내 체포되었다. 일본군이 기록한 <폭도 토벌지>는 정용대를 체포한 전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폭도수괴 정용대는 본월 9일 오전 10시, 적성군 남면 덕도리에서 적성헌병대의 손에 체포되었다.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1. 정용대는 부하 2명을 인솔하고 이달 9일 오전 10시, 향리 적성군 남면 덕도리 한 주막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는 중임을 적성헌병분견소 밀정이 탐지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 누구냐고 물으니, 그는 이름을 허위로 말하고 달아나므로 그 밀정은 '정용대'라고 가리키는 자를 밭 가운데서 체포하였던 바, 과연 동인이었다.

2. 정용대는 상투를 하고 갓을 썼는데, 엷은 차 색깔의 비단으로 된 한복을 입고, 몸에는 아무 것도 지니지 않았다. 체포 후 그는 자못 결심한 듯,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10월2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이 선고되자 공소, 12월1일 경성공소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고, 이듬해인 1910년 1월10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교수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1월 26일, 정용대는 경성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용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