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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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동래 정씨[1]
출생
1893년 3월 13일
경상도 언양현 중북면 다개동 원평마을
(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평리)
사망
1925년 10월 22일
경상남도 기장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정지모는 1893년 3월 13일 경상도 언양현 중북면 다개동 원평마을(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평리)에서 부친 정인길과 모친 이출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기장군 정관읍 매학리로 이주한 그는 김재교의 장녀인 김매월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1919년경 3.1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김윤희(金允熙)·오해환·오진환·김종복·박일봉(朴一鳳) 등과 함께 김종복의 사랑방에 모여 비밀리에 시위를 계획하고 거사일을 좌천 장날인 4월 9일로 정하였다.

4월 9일 정지모 등 시위 주동자들은 장시 중앙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불렀다. 이에 호응한 500~600명의 장꾼들도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경찰의 제지를 물리치고 장시를 누비며 울산으로 통하는 거리까지 만세 시위를 하였다. 시위가 고조되고 시위 군중이 늘어나자 일본 군경은 야만적인 무력 탄압과 발포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때 정지모는 오진환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시위 군중들은 붙잡힌 주동자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좌천주재소로 가서 일본 군경과 투석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체포된 주동자들이 석방되었으며, 시위 군중들은 좌천에서 정관으로 돌아오는 내내 만세를 불렀다.

그 후 정지모는 결국 일본 경찰에게 주동자로 체포되어 1919년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1925년 10월 22일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정지모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30세 모(謨) 운(雲) 항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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