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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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7년 4월 24일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
사망
1980년 5월 22일
경상남도 의령군
이명
정혜원(鄭惠元)

집중(執中)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정호권은 1897년 4월 24일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4일 구여순 등이 주도한 의령읍에서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고, 오후 3시경 읍내외시장에서 다수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후 3월 16일 오후 1시경 지정면 봉곡리 시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모인 약 150명의 군중에게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였으니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는 취지의 연설을 하고 함께 만세를 불렀다.

당시 의령경찰서 중교경찰관주재소에 근무하던 권종수(權宗洙) 순사보는 봉곡리 시장을 단속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시장에 모인 군중들의 만세시위가 점차 과격해지자 이들을 진압하려 하였다. 그런데 시위군중 중에서 누군가가 순사보를 살해하자고 큰소리로 떠들자, 많은 사람들이 발로 차고 위해를 가할 기세를 보이기에 순사보는 그 부근 주막으로 피신하였다. 이에 군중은 순사보를 추적하여 주막에 이르렀고 정호권은 시위군중을 지휘하였다.

정호권은 3월 18일 오전 11시경 남곡면 남지리 장날 시장에 가서 다수의 군중에게 조선독립에 대한 연설을 하고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 1919년 5월 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의 징역 2년 판결에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했다. 1919년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소요·보안법(保安法) 위반·공무집행방해’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상고하였다. 1919년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월 17일 출옥했으며, 이후엔 의령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0년 5월 2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정호권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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