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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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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군인, 관료, 정치인.
2. 생애[편집]
2.1. 군인 시절[편집]
1932년 9월 10일 경상북도 대구부 신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서 태어나[4] 대구남산초등학교, 경북중학교[5] ,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후일 육군사관학교의 동기가 되는 노태우는 경북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이자 동창이었는데 경북고등학교-육군사관학교 동기로 김복동도 있다.[6]
1951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25 전쟁 중 육군에 병사로 입대하여 참전하였다. 그 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7] 1964년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김복동 등과 사적 모임인 하나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1977년 특전사 참모장을 거쳐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1978년 제50보병사단 사단장이 되었으며 1979년 12.12 군사반란 이후 정병주의 뒤를 이어 육군특수전사령관[8] 에 취임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광주와 서울을 세 차례 오가면서 공수부대에게서 보고를 받거나 현장 상황을 확인했다. 1980년 5월 27일 '상무충정 작전' 직전 육군본부로부터 가발과 수류탄 등 군수품을 지원받아 현지의 공수부대에 제공했는데 이때 폭동 진압 명령자라는 논란이 있었다. 특전사령관 보직 수행 중 중장으로 진급했고, 다시 1981년 12월 대장진급과 함께 제3야전군사령관이 되었으며 1983년 12월 황영시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9]
2.2. 예편 이후[편집]
1985년 12월 2년의 참모총장 임기를 끝으로 예편한 다음 일해재단 연구위원에 임명되었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초기 수습책으로 김종호의 뒤를 이어 내무부장관에 임명되었다가[10] 4개월 만인 1987년 5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축소 의혹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 등에 의해 폭로되면서 민심 수습 차원에서 개각이 일어나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 등과 함께 경질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11]
한편 1999년 10월 10일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6.29의 진실 편의 본인의 인터뷰에 의하면 6월 항쟁 당시 현직에 있는 후배들이 찾아와서 부대가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 준비를 하고 있다며 자신에게 군 투입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개진해왔고, 자신 역시 이에 동의하여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에게 그 의견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6월 항쟁과 6.29 선언 후에 전두환이 쫓겨나고 제5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난 후에 1987년 7월 국방부장관으로 내각에 복귀하여 노태우 취임 전까지 재임하였다. 짧은 재임 기간 때문에 국방부 장관으로서 눈에 띄는 치적은 없었지만 해병대사령부의 재창설이 실현된 것과 2군 지역에 군단 2개를 만든 것 정도가 그나마 기억될 만한 성과.[12]
2.3. 정치 활동[편집]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구직할시 서구 갑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여소야대 국회에서 5공 비리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청문회로 사회 여론이 공직 사퇴 요구를 제기하자 결국 3당 합당을 앞둔 1990년 1월 8일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13] 이후 명예 회복을 위해 1990년 4·3 보궐선거에 다시 출마했지만 정치적 부담을 느낀 노태우 정부의 압력에 의해 후보직에서 다시 사퇴했고 서구 갑 보궐선거에선 문희갑이 민주당 백승홍 후보와 비교적 적은 표차로 당선되었다.[14] 당시 재보궐 선거는 3당 합당 이후 처음으로 치뤄진 선거라 매우 치열했고 전국적으로 이목을 끌었던 선거였다. 정호용 본인에 의하면 노태우가 의원직 사퇴 후 열리는 재보궐선거에 공천을 주겠다고 해서 사퇴했으나 공천을 받은 사람은 문희갑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이었으며# 안기부에서 자신을 밀착 감시하고 주변 사람들을 샅샅이 뒤지며 못살게 굴었으며#, 국회의원들까지 동원하자 결국 견디다 못한 부인이 자살 기도까지 하게 되자 후보직을 사퇴했다고 한다. 정호용의 사퇴로 남은 선거 자금이 후일 문희갑의 대구광역시장 임기 말 발생한 비자금 파동의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15]
1992년 다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민주자유당 문희갑 후보를 꺾고 당선되자 후에 민주정의당의 후신 민주자유당에 복당하고 지구당위원장 자리도 되찾았다.[16] 이후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의 제14대 대통령 선거 운동을 도왔으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대구광역시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본인이 완고하게 불출마 의사를 표했고[17] , 김영삼 정부의 과거사 청산 작업에 따라 1996년에 다시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혐의로 구속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옥 중에서 대구광역시 서구 갑에 출마하였으나 2위로 백승홍에게 밀려 낙선했다.
정호용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과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수 차례나 광주광역시와 서울특별시를 오갔으며 정호용은 특전사령관이었기 때문에 특전사 소속 부대의 잔혹 행위를 둘러싸고 훗날 책임론이 제기됐다. 1989년에 열린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정호용은 당시 특전사 소속의 진압 부대들은 당시 광주 상무대에 있던 전투교육사령부에 배속됐기 때문에 자신의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신군부는 공식적인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사조직 하나회의 인맥에 의한 명령을 내리는 일이 빈발했고 실제 재판에서 이것이 밝혀진다. 1996년 1월 5.18 광주민주화운동 검찰 수사 결과 정호용이 5.17 내란에서의 내란 모의 참여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과정에 관여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에 따라 1997년 4월 대법원은 정호용에게 내란 모의 참여죄와 내란 목적 살인죄 등으로 징역 7년을 선고했다.
2.4. 정계 은퇴 이후[편집]
1997년 김영삼 정부가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를 사면하면서 석방된 정호용은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가 2002년 정씨연합회 회장지격으로 정몽준의 대통령 선거 출마를 돕기도 했다. 2015년 경북고등학교 시절 절친이었던 이맹희의 빈소에 방문해서 너무 일찍 갔다고 통곡하기도 했다. 2019년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 40주년이었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 최세창 전 장관 등과 같이 호화만찬을 즐기면서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2021년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자진해 개인 자격으로 조사를 신청한 것이 밝혀졌다. 본인은 광주 진압 작전에서 배제됐고 총 4차례 광주를 방문한 것은 통신 보안, 인사, 군수 지원 업무를 위해서였지 작전을 지휘하러 간 것이 아니었으며 노태우가 3당 합당을 성사시키기 위해 자신을 5.18 관련 책임자로 몰아 정계에서 제거[19] 했다고 주장했다. 5공 집권 시나리오도 몰랐고 5공 초창기의 실세 3허(허화평, 허삼수, 허문도)와 특전사령관 재임 당시 행보, 민주정의당 창당 자금 모금과 언론통폐합 반대로 불화가 심했다 주장했다. 그간 5.18에 관련해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5공 세력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6공 세력 간의 입장 차이와 갈등은 꾸준히 존재했지만 5공 세력 내에서 입장차이가 발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호용의 이러한 행보가 5.18의 구체적인 진상을 밝히는 데에 어떤 영향을 줄지 주목된다.[20]
그러나 5.18 당시 회의에 참석한 사진, 영상이 드러났으며, 미국으로 출국한 것으로 밝혀졌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윤승원이 연기했다. '특전사령관', '경상도 출신'이라는 이미지를 반영해서 경상도 사투리를 즐겨 쓰는 호탕한 사나이 타입의 캐릭터로 나왔다.[21] 드라마 후반부로 갈수록 장세동과 대립각을 세우고, 박철언과 함께 노태우의 조력자 역할이 부각되었다. 또한 대통령이 된 전두환에게도 둘이서만 있는 자리에서 유일하게 반말을 사용하는 등, 극 중에서 전두환과 노태우 둘을 모두 친구로 대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인물로 나온다. 드라마 방영 후 당사자인 정호용은 "자신이 전두환, 이학봉, 황영시, 최세창보다도 내성적인데도 실제로 매우 다른 인물로 묘사되었다"며 유감섞인 평을 했는데 정호용 고유의 목소리도 실제로 크지 않고 카랑카랑한 비음이 섞인 얇은 중저음 목소리 톤이라 배우 윤승원의 목소리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정호용이 인터뷰에서 보여준 상대를 내려다보는 듯한 거만한 성격을 잘 재현해냈다.
-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배우 박용수가 맡아서 연기했다. 작중에서 이름이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으나[22] 계급이 소장인데 당시 특전사령관은 중장이 아니라 소장이었으므로 정호용이 확실하며 배역 역시 '정 소장'이라고 되어있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육사 11기 동기이자 하나회 핵심 멤버 중 한 사람이었고[23] 당시 특전사령관으로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의 주요 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음에도 여단장으로 보이는 준장보다 훨씬 더 진압에 소극적이며 유연해보이기까지 하는 캐릭터로 나와 고증 오류나 마찬가지의 캐릭터로 표현되었다.
4. 여담[편집]
- 전두환, 노태우와 동기생이라는 특성상 그들에게 사석에서 말을 놓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였다고 한다. 2019년 12월 12일에 전두환과 호화만찬을 즐겼을 당시에도 전두환에게 "두환이"라고 호칭할 정도. 다만 전두환의 동기라는 포지션으로 인해 5공화국 당시에도 전두환과 노태우는 물론 장세동, 허화평 등에게 견제를 당했으며 예편 이후 정계에 진출해서도 노태우의 심복 격인 박철언, 최병렬 등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 경북고 동기였던 이맹희 전 삼성그룹 부사장에 따르면, "학자같은 면모가 있는 수재"였다고 한다. 이맹희는 정호용이 당연 학자의 길을 걸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24] 그에 대해 공부를 잘 하고 머리가 뛰어났다는 주변 인물들의 회고가 늘 따라다녔지만 그게 독으로 작용해 많은 견제를 받기도 했다.
- 전두환 전 대통령 재임 시기, 당시 서울 내 대학가에서는 독재 타도 및 민주화 시위, 반미 시위가 한창이었다. 당시 시위대에서는 전경들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도록 여학생들을 맨 앞줄에 내세웠는데,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정호용은 이것을 보고 과감하게 옷을 벗겨라고 경찰한테 지시했다고 한다. 옷을 막 벗길려고 덤벼드니 여학생들은 도망가버리고 당연히 시위대는 쉽게 진압되었다. 이를 보고받은 전두환은 정호용을 크게 신뢰하게 되었다고 한다.
-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호탕한 인물로 그려진 것과는 다르게 실제 성격은 엄청나게 꼬장꼬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늘그막에 가졌던 인터뷰 자료에서도 조곤조곤하고 비음섞인 말투를 가졌으며 뉴스타파에서 인터뷰를 시도할 당시에도 택도없는 소리하지 말라며 신경질적으로 쫓아내는 모습을 보였다.
5. 선거 이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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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표기는 鄭鎬鎔이었다.[2] 대구 서구 갑 국회의원 시절엔 서구 내당동 황제맨션에 거주했다.[3] #[4] 경상북도 청도군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있다.[5] 중학교 평준화 조치로 폐교 후 경운중학교로 재개교.[6] 경북고등학교 32회로 노태우, 정호용, 김복동 외에도 김윤환 전 의원,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이상경 전 대구은행장이 있으며 동기생은 약 130명이다.[7] 전두환과 노태우가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생이다.[8] 이 시절만해도 특전사령관과 수방사령관, 보안사령관은 소장보직이었다. 그러다가 전두환 정부를 거치며 중장 보직으로 격상된 것.[9] 전두환과 노태우는 육군참모총장이 목표였으나 최종적으로는 정호용이 참모총장이 된다.[10] 당시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라는 망언을 남기기도 했다.[11]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거짓 해명을 하며 한 말. 5.18 당시 발포 명령자로 의심되며 적어도 5.18에 깊이 연관된 그가 한 말이라는 것이 유머 포인트.[12] 2군 지역은 후방이라는 특성상 동원사단 위주로 구성되어있어서 중요도가 낮다보니 군단이 없고 군단보다 급이 낮은 관구사령부가 군단의 역할을 대신했었는데 2군 지역에 있던 관구사령부를 통폐합하여 9군단, 11군단으로 격상시켰다. 다만 군단으로 격상되긴 했지만 워낙 규모가 작았던데다 예산 낭비라는 지적이 끊이질 않았었고 결국 9군단과 11군단은 참여정부 시절에 국방개혁의 일환으로 해체되어 2군 지역에는 현재 군단 편제 자체가 없고 사령부 - 사단이라는 해괴한 편제를 가지게 되었다.[13] 말이 자진 사퇴이지 박철언 당시 정무제1장관이나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문제로 경북고 후배인 서동권 당시 안기부장에게 멱살을 잡히기까지 했다.[14] 당시 백승홍 후보가 선전한 요인은 정호용의 후보직 사퇴에 서구 갑 선거구 주민들이 지역구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데 이어 후보직도 마음대로 사퇴했다는 데에 불만을 느낀 것과 백승홍 후보가 이를 잘 캐치해 낸 것이 주 원인이다.[15] 이 같은 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기에 서구 갑은 1990년대 당시 지금의 수성구 갑 못지 않은 정치적 위상을 자랑했다. 지금은 선거구 자체가 단일 선거구로 통폐합되었지만 말이다.[16] 이를 계기로 문희갑은 민주자유당을 탈당 후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대구광역시장에 출마해 당선된다.[17] 1990년 서 갑 재보궐선거 당시 맞붙었던 문희갑과 다시 경쟁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18] 대구광역시에서 김영삼의 제14대 대통령 선거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한 말이다. 하지만 김영삼 집권 후 토사구팽되었다.[19] 노태우 정부 말인 1992년 14대 총선에서 국회 복귀에는 성공했지만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과거사 청산에 따라 구속되며 정계를 완전 떠나게 된다.[20]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한 6공 인사들은 이전부터 꾸준히 광주 문제에 대해 사죄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지만 5공 측 인사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북한 개입설을 주장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고수해왔는데 5공 측 인사라고 할 수 있는 정호용이 처음으로 5.18 진상규명에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5공 정권 내에서 핵심 실세였던 장세동, 박희도, 허화평과 상대적으로 겉돌았다고 볼 수 있는 정호용 간에도 상당한 갈등이 존재하고 있음이 표면으로 드러날 가능성도 높다.[21] 노태우가 "쓰리 허 수석들 일명 허 가 허 가들이 우릴 물로 본다"고 말하자 "뭐 물? 크하하하하하하핳 야! 물은 너 아니가? 크하하하하하하핳..."하는게 웃음 포인트다.[22] 이름이 언급되지도 않고 이름표도 점퍼를 입고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23] 그 덕분에 12.12 군사 쿠데타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 했음에도 신군부의 집권 후 군과 정부에서 주요 고위직들을 많이 역임했다.[24] 훗날 정호용이 정치를 하게 되면서, '실탄'이 필요할 때마다 찾아왔다는 내용도 나온다.[25] 1990.1.8. 의원직 사퇴.[26] 전임자 정호용(본인 맞다) 의원직 사퇴로 발생한 선거. 이 당시는 소위 맹형규법이라 불리는 법이 제정되기 전이어서 본인의 사퇴로 벌어진 재보선에 본인이 재출마할 수 있었다.[27] 1992.11.21. 민주자유당 입당.
1995.12.22. 신한국당 탈당.[28] 옥중출마.
1995.12.22. 신한국당 탈당.[28] 옥중출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