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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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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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葛瞻
227~263
파일:attachment/314e251f95cad1c875152e5c7f3e6709c93d511b.jpg
1. 개요
2.1. 초기 생애
2.2. 놀라운 출세가도
2.3. 강유 탄핵에 대한 해석
2.4. 면죽에서의 최후
2.5. 사후
4. 평가
5.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이자 무장으로 는 사원(思遠).[1] 제갈량의 외동아들. 『정사 삼국지』에서는 단순히 제갈량의 아들이라고만 나오는데 원나라 시대 학자 학경이 지은 촉한의 역사서 『 속후한서』「제갈첨전」에 황부인이 낳은 자식이란 기록이 있다.

조위사마소사마사, 제갈각와 마찬가지로 출세가도를 달렸다는 점은 당시 각국의 유명한 대신들이 남긴 2세들과 비슷한 점이지만 사마염서진을 건국할 정도의 기반을 쌓아둔 사마씨 형제나 잠시나마 대권을 주도한 제갈각과 달리 기록이 적어 행적이 많이 남지 않은 편이다. 이는 제갈첨의 능력이 다른 2세들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시사하지만 동시에 묘하게도 공신의 후손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사례가 없는 촉한의 정치구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2. 정사[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제갈량의 늦둥이 아들로 제갈량이 무려 47세였을 무렵에 태어났다.[2] 나이에서 볼 수 있듯이 제갈량에게 오랫동안 친자식이 없어 형인 제갈근의 차남인 제갈교양자로 들였지만 제갈교는 아들로 제갈반 하나만 남긴 채 요절했다. 훗날 제갈각의 일족이 멸문되고 제갈씨가 복권되면서 제갈반은 동오로 가서 제갈근의 가문을 이었다. 이런 불운에도 불구하고 친자가 태어나 대를 이을 수 있었으니 제갈첨에 대한 제갈량의 기분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듯.

제갈량이 제갈근에게 보낸 서신에 제갈첨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제갈)첨도 이제 여덟 살인데 총명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저는 이 애가 너무 일찍 숙성하여 큰 인물이 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3]

[4]


제갈량집」에 남은 제갈근과의 서신 중 대부분이 사무적인 내용인데, 유독 이 서신에서는 어린 아들이 총명하고 사랑스럽다며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늦둥이 아들이 매우 귀여웠던 모양.

다만 안타까운 부분이라면 제갈량이 이 편지를 보낸 게 다름아닌 234년 2월, 즉 제갈량이 사망하기 반 년 전이다. 제갈량이 대군을 이끌며 마지막 북벌을 위해 야곡을 지나면서 형 제갈근에게 보낸 서신이다. 234년 8월, 제갈첨이 겨우 8살 때 아버지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사망했다. 나이도 나이지만 제갈첨이 태어난 227년에 제갈량의 북벌이 개시된 걸 생각하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제갈량은 이런 아들에게 살면서 도움이 될 만한 마음가짐을 가르치는 계자서(誡子書)를 지어서 남겼는데 여기서 그는 담박(淡泊)과 영정(寧靜)을 강조했다. 제갈량은 그 글에서 "무릇 군자(君子)는 고요함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검소함으로 덕을 키운다. 담박하지 않으면 뜻을 밝힐 수 없고(非淡泊無以明志), 고요하지 않으면 먼 곳에 이르지 못한다(非寧靜無以致遠)"고 말했다.

이는 소학에도 나올 정도로 잘 알려진 말이 되었는데 '담박'이란 깨끗하고 고요함을 유지해 스스로 담담함을 이루는 경지다. '영정' 또한 마음에 선입견을 두지 않아 평온함을 유지하는 상태다. 모두 흔들림 없는 물에 비유한 마음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마음 상태가 담담하지 않으면 뜻을 제대로 세울 수 없고 외부의 선입견에 휘둘려 마음을 잡지 못하면 원대한 목표 또한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뜻을 집약해 표현한 위의 명구는 '담박명지(淡泊明志)', '영정치원(寧靜致遠)'이라는 네 글자 형태의 성어로 정착했다.


2.2. 놀라운 출세가도[편집]


제갈량이 죽은 뒤 제갈첨은 아버지의 작위인 무향후를 이어받아 장차 촉을 이끌 인재로 기대를 모았다. 『촉서』 「제갈량전」에 부록된 「제갈첨전」에 의하면 제갈첨은 글과 그림에 능하고 기억력이 좋았다고 한다. 제갈량을 좋아하는 촉인들에게 특히 기대받아 제갈첨의 재주와 총명함을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243년, 17살의 제갈첨은 공주에게 장가 들어 유선의 부마가 되고 기도위(황제호위직)에 임명되었다. 244년에 우림중장랑으로 임명되고 다시 여러번 승진해서 사성교위, 시중, 상서복야에 군사장군으로 봉해졌다. 기도위, 우림중랑장, 사성교위 모두 황제의 호위직으로 전통적으로 황제의 인척들이 맡았다. 당시 제갈첨은 황제의 사위였으므로 이런 관직을 맡는게 이상하지는 않다. '여러 번 승진하여' 같은 구절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순식간에 거쳐간 관직이 너무 많아서 생략된 것도 좀 있는 듯하다.

261년, 제갈첨은 행도호 위장군으로 봉해져 같이 평상서사를 맡은 동궐과 함께 상서의 일을 관장했다고 한다.

제갈첨의 출세가도는 실로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불과 35세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군부 내에서 대장군 강유 다음가는 자리인 위장군을 꿰찼다. 물론 한왕조 장군 서열을 그대로 적용하여 군부만을 따지고 본다면 제갈첨이 위장군으로 임명된 262년엔 우대장군 염우, 좌거기장군 장익, 우거기장군 요화가 제갈첨보다 군부 서열이 위로 볼 수 있지만 유비 생전부터 이미 촉 장군들의 서열은 꼬일 대로 꼬여있기 때문에 함부로 끼워맞추는 것은 위험하다. 오히려 대장군 비의 밑에서 위장군을 지내고 있던 당시의 강유가 실전지휘관 중 최고 서열 대우를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촉한의 장군 서열은 위장군이 대장군 바로 다음가는 서열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기록이 명확하게 남아있지는 않으나 고작 30대였던 그가 이런 중임을 맡았다는 데서 그 역량을 가늠해볼 수도 있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된다.

다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갈량의 아들이라는 출신 때문에 (실제 역량과는 관계없이) 꽤나 기대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진수는 삼국지에 아버지 덕에 사람들이 제갈첨이 하지 않은 일들도 그의 업적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매번 조정에 선정(善政)이나 좋은 일이 있으면 비록 제갈첨이 제안한 일이 아니더라도 백성들은 모두 서로 전하며 말하길, ‘갈후(葛侯)가 한 일이다’고 했다. 이로써 아름다운 명성과 과분한 칭찬이 그 실제를 넘어섰다." -『촉서』 「제갈첨전」


물론 『진서』 「진수열전」에 의하면 촉한 시절에 진수가 제갈량 부자에게 모욕을 당한 일이 있어 『정사 삼국지』에서 그 둘을 의도적으로 폄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보니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다. 진수는 제갈량에 대해서는 제갈량집을 쓰는 등 호의적인 편이었고 제갈량의 글을 모아서 문집을 남겼다는 사실에 대해 사마염에게 사죄하는 글을 「제갈량전」에 첨부한 것을 보면 제갈량을 의도적으로 폄하했다는 비판은 옳지 않지만 제갈첨에 대해서는 상당히 뒤끝있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하여튼 간에 승진 속도만 보면 촉한 인물들 중 최고속으로, 제갈첨을 제외하고 최고속 승진 속도를 자랑하는 강유조차 위장군을 40대 중후반에나 달았다. 강유는 일찍이 제갈량의 추천으로 여러 군직에서 경험을 쌓았고 제갈량의 북벌과 낙곡대전에 참전하는등 여러차례의 군사적 경력이 있는데 제갈첨은 이전까지 군사 경험이 전혀 없었다.

제갈량의 아들이라는 타이틀 덕에 정권 내에서도 기본적으로 영향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시사하는 기록 또한 남아있다. 「종예전」에 의하면 258년에 제갈첨이 처음으로 조정의 일에 관여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일흔이 넘은 요화가 32살의 제갈첨을 찾아가자고 종예에게 말했다고 한다. 겨우 30대 초중반인데 조정의 모든 고위직을 꿰차고 있고 훨씬 더 나이 많은 노신들한테 인사를 받는 입장이었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이다. 근데 이 위치로 제갈첨이 뭘했는지 기록이 많이 안 남은게 문제, 아마 제갈첨 밑에 있던 진수가 이걸 몰랐을리는 전혀 없고 민감한 기록은 삭제한것으로 봐야 할 듯 하다.[5]

「장익전」에 의하면 259년에 장익이 좌거기장군에 봉해졌다고 하는데 요화가 우거기장군을 맡은 것을 고려하면 259년에 요화 또한 우거기장군에 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제갈첨을 방문한 효과인지는 사서에서 자세히 기록하지 않기에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제갈첨을 방문한 바로 다음 해에 승진한 것을 보면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다만 제갈첨은 강유를 잦은 외정에서 내정을 관할하는 쪽으로 돌리려고 했다는 의혹이 있고, 적어도 강유를 제어하려 했다는 의도는 있었던게 확실하다. 요화 역시 262년 적도로 출병하는 강유더러 좀 적당히 하란 식으로 비꼰 발언이 남아 있다, 이걸 고려하면 서로 이해관계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장억전」에 의하면 장억은 제갈각의 무모한 북벌을 막아야 한다는 장문의 서신을 제갈각의 사촌 동생인 제갈첨에게 보냈다고 한다. 장억이 할 일이 없어서 제갈첨에게 제갈각의 실패를 예견한 것도 아닐테고 서신을 읽어봐도 왜 제갈첨이 제갈각의 출전을 말려야하는지 역설하는 내용임이 확연하다. 그러나 제갈첨이 제갈각에게 보낸 서신의 전문은커녕 서신을 보낸 여부조차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장억이 제갈첨에게 제갈각에 대해 독촉한 것을 봐서는 제갈첨은 이전부터 나이로 따지면 아버지뻘인 사촌형 제갈각과 서신을 교환했을 가능성이 있다. 계속 제갈각이 대권을 잡았다면 제갈량과 제갈근 형제가 그랬듯이 두 사촌끼리 소통하며 촉오관계를 증진하고 중앙정권 내에서 제갈첨의 입지도 더욱 상승했을지도 모르지만 제갈각이 253년에 암살당한 탓에 무산되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촉오의 제갈씨는 양국의 외교라인의 주축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제갈각이 주살당하고 대가 끊겨서 제갈첨에게 힘을 실어줄 방식이 하나 줄은 것은 두고 두고 아쉬운 점이다.


2.3. 강유 탄핵에 대한 해석[편집]


(경요) 5년(=262년), (강)유가 군대를 이끌고 한(漢), 후화(侯和)로 출병하였다가(※) 등애(鄧艾)에게 격파되니 답중(沓中)으로 돌아가 주둔하였다.

(강)유는 본래 기려(羈旅,객지생활하는 나그네) 신세로 나라에 의탁하였는데 여러 해 동안 공전(攻戰,공격하여 싸움)하였으나 공적(功績)을 세우지 못하였다. 그런데 환관(宦官) 황호(黃皓) 등이 내부에서 권력을 농단하고 우대장군(右大將軍) 염우(閻宇)가 (황)호와 더불어 협비(協比,결탁)하니 (황)호는 은밀히 (강)유를 폐하고 (염)우를 심고자 하였다. (강)유 또한 이를 의심하니 이 때문에 스스로 위구(危懼,두려워함)하여 다시 성도(成都)로 돌아가지 않았다. -『촉서』 「강유전」


등애(鄧艾)가 촉을 평정한후 세운 경관(京觀)이 덕양현(德陽縣) 북쪽 33리 되는 곳에 있다. 등애는 경원 4년 촉을 정벌하여 제갈첨을 면죽에서 크게 깨트리고 대를 쌓아 경관(京觀)을 만들었다. 당초 제갈첨은 부현(涪縣)에 있었는데 등애는 이미 강유로 들어왔다. 제갈첨이 말하기를 “나는 안으로는 황호를 제거하지 못하였고, 밖으로는 강유를 제어하지 못하였으며(外不制姜維), 나아가서는 강유를 지키지 못하였다(进不守江油). 내게는 (이) 세 가지 죄가 있으니 무슨 면목으로 되돌아가겠느냐?" 마침내 면죽에서 사람의 다리를 (땅에) 파묻고서 싸우다가 (제갈첨) 부자는 죽었다. - 『삼국지집해 촉서』 「제갈첨전」 조일청 주[6]

「원화군현지(元和郡县志)」[7]


경요(景耀) 4년(262년), 행 도호(行 都護), 위장군(衛將軍)이 되고, 더불어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에 동궐(董厥)과 함께 평상서사(平尙書事)가 되었다. 이 때 환관(宦官) 황호(黄皓)가 안에서 정사를 어지럽히고[亂政] 강유(姜維)는 밖에서 무력을 남용하였다[黷武]. 제갈첨은 이를 깊이 근심하여 동궐(董厥), 번건(樊建)과 더불어 염우(閻宇)로써 강유를 대체할 것을 모의하고 제(帝=유선)에게 아뢰었으나[啓] (유선은) 따르지 않았다. -『학경 속후한서』 「제갈첨전」


처음에 강유는 떠돌다가 한나라에 의탁하였는데, 몸소 중한 임무를 맡아서 몇 년 동안 군사를 일으켰으나 아무런 공적을 세우지 못하였다. 황호가 궁중에서 권력을 잡고 우대장군 염우와 친하게 잘 지내면서 속으로 강유를 폐하고 염우를 세우고자 하였다. -『자치통감』 78권


제갈첨, 동궐 등은 강유가 전쟁을 좋아하나 공이 없고 국내가 피폐해졌다 하여 후주에게 표를 올려 그를 소환해 익주자사로 삼고 그 병권을 빼앗으려 했다. 촉 장로(蜀長老)는 제갈첨이 표를 올려 염우(閻宇)로 하여금 강유를 대신하도록 했다는 고사가 있다 한다.

진 영화(永和) 3년(347년), 촉의 사관인[8]

상거(常璩)[9]는 촉 장로가 말한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진수가 일찍이 제갈첨의 관원이 되었다가 제갈첨에게 모욕당했는데, 이 일 때문에 죄악의 원인을 황호에게 돌리며 ‘제갈첨이 능히 바로잡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 『촉서』 「제갈량전」 주석 손성의 『이동기』


오직 『촉서』만의 기록을 참고한다면 유선에게 총애받는 환관 황호가 강유를 염우로 대체하려던 촉한 말기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단순한 기록일지도 모르지만, 『학경 속후한서』와 『촉서』 「제갈량전」 주석 손성의 『이동기』[10]의 기록 덕분에 상당히 다채로운 해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학경 속후한서』와 『이동기』는 모두 공통적으로 동궐과 제갈첨이 강유의 북벌을 반대하여 강유의 병권을 염우에게 맡기려 했다고 한다. 『촉서』에 의하면 황호 또한 유선에게 동일한 제안을 했다고 한다. 두 시도 모두 좌초되었는데 덕분에 제갈첨과 동궐이 황호와 결탁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동기』를 참고하면 제갈첨은 강유의 병권을 빼앗는 대신에 강유를 익주자사로 삼으려고 했다는 점이다.

강유는 그간 대장군+녹상서사+양주자사였는데 강유 이전 양주자사는 위연임을 고려하면 양주자사는 북벌의 실무책임자를 의미한다. 그에 비해 이전의 촉한의 최고 실권자들의 관직은 각각 대장군/대사마+상서령+익주자사(장완), 대장군+녹상서사+익주자사(비의)로 대장군+녹상서사+양주자사였던 강유가 익주자사로 봉해진다는 것은 결코 의미 없다고 볼 수 없다. 예외적으로 제갈량은 승상+녹상서사+익주인데, 이는 제갈량이 개국공신이자 유비의 탁고대신이었기 때문이다.[11] 촉한은 황제국으로 스스로를 칭하였으나 전토가 익주에 불과한 만큼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운 다른 자사직과 달리 익주자사는 권위를 높여주는 실권직이라 해도 무방하다.

왜 하필이면 황호와 결탁한 것이 확실한 염우에게 병권을 맡기려고 했는가가 문제다. 아직 명망이 적은 우대장군[12] 염우가 경력이 다른 원로급인 진남대장군 종예, 좌우거기장군 장익과 요화, 우표기장군 호제보다 다루기 쉬우리라 여겼기에 그러했다는 해석도 있다.[13]

다만 황호 또한 강유를 염우로 교체하려고 했다는 『촉서』의 기록을 고려하면 강유-염우 교체책은 외정의 강유와 내정의 황호 둘 다 동시에 제어하기 위해 내세운 제갈첨과 동궐의 묘책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익주자사로 봉해진 강유가 내정 권한이 강해지면 262년에 황호를 죽일 것을 건의할 만큼 황호를 경계했던 강유가 내정을 어지럽히는 황호를 두고 볼 리가 없다. 최소한 익주자사 책봉을 통한 권위 강화는 성도에서 위협을 느껴 답중으로 피신가야 했던 262년의 답 없는 상황만큼은 막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유를 단독으로 익주자사로 봉하려고 했다면 유선의 총애를 독차지한 황호의 위기감 서린 반대를 맞설 수밖에 없는데, 제갈첨과 동궐은 황호와 친한 염우에게 강유의 병권을 내어준다는 제안으로 설득하려 한 것 같다. 제갈첨과 동궐의 의도가 어찌되었건 간에 『촉서』에서만큼은 황호가 단독으로 강유를 염우로 교체하려 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황호는 강유-염우 교체를 좋게 받아들인 것 같다. 더불어 제갈첨과 동궐은 강유의 북벌 또한 문제로 봤는데, 강유의 병권을 염우에게 양도함으로 북벌을 쉴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려던 것이라 볼 여지가 있다.

해석을 요약하자면 제갈첨과 동궐은

1. 강유를 익주자사로 봉해서 내정권한을 강화하고,
2. 강유의 군권을 박탈해서 북벌을 중단할 수 밖에 없게 만들고,
3. 대신 염우에게 군권을 양도해서 근시안적인 황호의 지지를 얻는다.

라는 계책을 내놓았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제갈첨은 희대의 정치적 묘수를 획책한 것이지만 유선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갔으며[14] 앞서 언급한 모든 의도와 가능성은 증명하지 못한 채로 좌초되었다.

『이동기』에서는 일부분 촉의 장로의 증언을 자료로 쓴다는 점에서 신뢰성을 의심할 수도 있지만 다행히 『이동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익주자사 부임책은 장로의 구술과 상거의 보충설명을 바탕으로 한 기록으로, 제갈첨과 동궐이 병권을 염우에게 주려고 했던 부분이 『학경 속후한서』와 교차검증이 가능하다. 특히 신뢰도를 높이는 부분은 바로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익주 출신 사관이자 화양국지의 저자 상거가 촉 장로의 설명을 보충한 부분으로, 상당히 아슬아슬한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배송지의 비판이 없다는 점과 함께 기록의 신빙성을 높이고 있다.

진수는 촉한에서 기록이 없는 인물은 양희의 계한보신찬에 넣었다고 썼지만 정작 자기를 추천해준 동문 나헌이나 사이가 틀어진 이밀, 이양 등의 기록을 정사 삼국지 본전에 적지 않을만큼 자신에 관한 일에서만큼은 뒤끝이 매우 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이가 안 좋았다고 유명한 제갈첨에 대해서는 가려들을 여지가 있다.[15] 더군다나 진수는 갈후(제갈첨)가 하지 않은 일도 그가 했다고 하여 그 명성이 실제를 넘어섰다고 기폄했지만 그가 재주가 있고 총명하여 주위의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까지는 부정하지 못했다. 그러니 명성이 부친덕에 과장이 있었더라도 기본적인 바탕은 분명 있었다는 것이다.[16] 하여튼 간에 제갈첨이 중앙정권에서 그가 원하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분명하나 재주와 총명함으로 인해 명성을 얻었고, 그냥 놀고 먹던 것만은 아니라는 점 하나는 확실하다.


2.4. 면죽에서의 최후[편집]


263년, 위의 종회, 등애, 제갈서는 총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촉한을 침공했다. 여러 악재 끝에 한중의 양안관구를 상실했으나 강유는 공함곡 30리 북진으로 제갈서를 낚은후 바로 남진하여 하루 차이로 무사히 제갈서의 포위망을 회피하는 현란한 기동전을 보이며 검각에 무사히 도착해서 결사적인 항전을 펼쳤다. 종회의 주력군은 검각에서 막혀서 발이 묶였지만 병사와 치중까지 합쳐도 2만명이 채 되지 않는 등애의 별동대는 음평으로부터 작은 길을 돌파해 한의 덕양정을 지나 부현을 공략한 이후 성도를 향해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등애는 결국 음평(陰平)에서부터 경곡도(景谷道)를 거쳐 우회해 들어왔고 제갈첨은 제군을 지휘해 부(涪)현에 이르러 머물렀다.

대장군 강유, 좌우거기장군 장익, 요화가 검각에서 필사적으로 종회군을 막아내고, 우대장군 염우와 우표기장군 호제가 이 당시 뭘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무해 의미가 없으니 본토 촉군 중 가장 직위가 높은 위장군 제갈첨은 제갈상(제갈첨의 장남), 상서랑 황숭(황권의 차남), 상서 장준(장포의 아들), 우림우부독 이구(이회의 조카)등을 이끌고 등애를 막으러 나섰다. 이들 지휘관 중 군사경험이 기록된 인물이 하나도 없다는 점은 등애의 음평침공이 얼마나 시급한 비상사태였는지를 시사한다.

제갈첨은 강유관이 그렇게 쉽게 점령당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이후 부현에서의 말로도 '나아가선 강유관을 지키지 못했다'며 한탄하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그러하다. 아쉽게도 강유관은 이미 공대 내부의 적(...)인 마막이 그냥 항복한 상태였고 원화군현지(元和郡县志)에 따르면 제갈첨이 부에 있을때 이미 등애는 강유에 들어간 상태였고 자치통감에서도 강유관이 넘어가고 제갈첨이 부에 도착했다고 나온다. 위서 등애전과 자치통감을 보면, 말 그대로 사지(死地)를 지나와 제대로 된 보급도 없이 지치고 다친 등애군의 선두 진영이 도착하고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 성을 넘겨버린 것이다. 진서 단작전의 단작의 말에 따르면 양흔이 거느린 병사들 만이 강유관의 형세를 핍박하였음을 이유로 30명이 봉해질 수 있었다. 이렇게 소수의 병사들만이 공이 인정되어 봉해진 것을 보면 이들을 중심으로 한 뭔가의 군사적 압박이 있었을테지만 자세한 사항은 알 수가 없다. 마막 문서에서도 확인이 가능하지만 강유관은 혹시나 올지 모르는 적을 막는 제대로 된 관문이라서 양흔이 강유관을 핍박하던 말건 대비가 잘 되어 있었다면 공성전으로 가도 보급이 부족한 등애군이 역으로 자멸할 수도 있었고 적어도 큰 피해를 입고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 했을수도 있다. 결국 그런 중요 직책에 이런 소규모 군사 압박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마막 같은 인물을 배치한 촉한의 실책이 컸다.

어쨌거나 원준의 원자와 진서 문제기에 따르면 이 당시 1만명 정도 남은 등애의 병력은 강유관을 거저먹고 재정비 후 다시 한덕양을 거쳐 부현으로 침공한다. 결국 제갈첨은 성도의 병력을 인솔하여 부현으로 진격했다. 황숭은 제갈첨에게 곧바로 신속하게 요충지(덕양으로 추정)를 점거해서 등애군의 평지 진입을 저지해야한다고 건의했으나 제갈첨은 주저할 뿐 전진하지 않았다. 황숭은 이후에도 제갈첨에게 요충지를 점거해야한다고 여러 차례 권유했지만 제갈첨은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않으니 황숭은 급기야 눈물까지 흘렸다. 왜 황숭의 눈물겨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는지에 대한 여러 설들이 분분하다.

1. 황권이 위에 투항한 사실을 상기하고 황숭의 건의를 믿지 않았다. 청나라의 학자 주수창이 세운 이론이지만 황권의 투항은 이미 40년 전의 일인데다가 유비가 황권의 항복은 본심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직접 보증했다. 이런식이라면 애초에 제갈량이 직접 보증한, 검각에서 종회를 막고 있는 항장 출신 강유부터 의심하고 그를 검각에서 소환했을것이다. 그리고 등애를 방어하러 나간 촉한군의 중진들은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 장비의 손자 장준, 이회의 조카 이구 등 대대로 촉한 황실에 은혜를 입은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촉한 입장에서도 나름대로 '배신하지 않을자들'을 선발해서 보낸 것이라는 것인데 싸우기 전부터 황숭을 의심했다면 애초에 싸우다가 배신당하면 치명적이니 부성으로 출전시키지 않으면 그만이고, 명색이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은 군부내에서 끗발이 강한 총사령관 위장군으로서 처음부터 믿지 않았으면 출전시키지 않을 권력 정도는 있었다. 그런고로 가능성이 많이 낮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이 가설을 채용했다.
2. 녹록치 않은 후방 사정. 이미 종회의 대군이 익주의 눈앞인 검각에 진입한 상황에 등애의 별동대가 익주 내부로 밀고 들어오는 덕에 성도의 예비군마저 동원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물론 험지에서 대치상황만 지속한다면 음평에서 보급로 걱정을 해야하는 등애군을 언젠가는 격파 할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제갈첨이 신속히 등애를 격파하지 않으면 민심이 동요하는 것을 후방에서 우려할 수도 있다. 특히 적을 지연시키며 결판을 내지 못하는 장수가 간신의 모함에 몰락한 일화는 여러번 되풀이 된 사례고 유선 옆에는 이를 이행하고도 남는 황호가 있었다. 특히 초주같은 항복론자에 의한 선동을 고려하면 확실한 불안요소라 해도 무방하다.[17] 제갈첨 스스로도 싸우러 나가면서 안으로는 황호를 견제하지 못하고, 밖으로는 강유를 제어하지 못했으며 나아가서는 강유관을 지키지 못한 당시 자신의 상황을 한탄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이쪽이 다른 가설보다 확실히 가능성에서 훨씬 높다.[18]
3. 수뇌부의 동요와 민심의 동요, 양쪽 모두일 가능성이다. 1번과 2번은 같은 것을 수뇌부의 동요와 민심의 동요로 나누어본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적군이 촉한 중심부로 진입한 상황에서 등애를 몰아내지 못해 민심이 동요했고 여기에 수뇌부조차 민심과 같이 동요해 황숭의 계책을 신뢰하지 못하였으며 전시상황에서 그의 계책을 따라 등애와 무작정 대치국면에 서는건 믿음직 하지 못하고, 동요를 바로잡는데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가설은 근거가 좀 부족하다.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정사 삼국지 초주전에서 등애가 음평(陰平)에 들어올 때부터 백성들이 동요한것은 잘못 쓰여진 것으로 음평에서 '음(陰)'자를 빼서 등애군이 '평지(平)'에 들어오자 백성들이 동요한것이라 적어야 한다고 썼고[19] 자치통감도 제갈첨이 격파되고 난 뒤, 촉한인들이 뜻하지 않게 위나라 군대가 도달하니(漢人不意魏兵卒至) 성을 지키는데 조절과 통제를 못하였고(不爲城守調度) 등애가 이미 평지로 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聞艾己入平土) (그 때부터) 민심이 동요(百姓擾擾)했다고 기록했으며 화양국지도 제갈첨군이 격파된 후 등애군이 평지에 들어오자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산과 들로 흩어졌다고 나온다. 즉 제갈첨군 격파 이전에 촉한의 민심은 아직 동요되지 않았다는 얘기고, 등애군을 평지에 들이지 않고 막고만 있었거나 제갈첨군이 격파되지 않았으면 애초에 민심의 동요는 없었거나 제갈첨군이 격파될 때보다 적었을거라는 뜻이다.

어쨌든 제갈첨이 주저하는 사이 등애군은 마침내 먼거리를 달려 전진해 제갈첨의 선봉을 격파했다. 제갈첨은 후퇴해 면죽으로 물러났다. 어떤 이유던간에 전쟁터에 나가보지도 않은 제갈첨이 강유를 격파한 적도 있고 후일 무성왕묘에도 등재되는 명장 등애를 상대로 황숭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애초에 황숭의 말을 들을것이 아니었다면 면죽에 있으면서 선봉이 격파되는 일 없이 손실이 없는 상태에서 맞았으면 더 유리하지 않았는가라는 부분에선 제갈첨의 군사적 실적 부족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최소한 손실을 덜 입었다면 인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등충과 사찬을 맞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등애는 제갈첨에게 서신을 보내 회유하려 했다.

"만약 투항하면 반드시 표를 올려 낭야왕(琅邪王)으로 삼겠소."[20]


사실 사마소조차도 겨우(?) 촉한 정벌 중에 진공에 올랐고, 촉한을 정복한 공로로 진왕에 올랐음을 고려하면 제아무리 낭야왕이 이자왕으로 진왕보다 두 단계 낮다지만 일개 정서장군이 마음대로 임명할 권한이 있을 리가 없다. 후일 황제였던 유선도 왕이 아닌 안락공에 봉해진 데다가, 낭야왕에 책봉된 인물이 사마주에 서진통일 이후 대부분 사마씨 종친들이 이자왕이었음을 고려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게 도발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 대목에서 엄연히 제갈첨전과 자치통감은 등애가 제갈첨을 편지로 유혹(誘)했다고 썼다.[21] 또 제갈첨이 이 편지로 화를 내긴 했어도 도발당했다고 생각해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 무모한 결전에 나서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면죽에 열진(列陣, 포진)하면서 등애군을 기다렸다. 어차피 후일을 생각하면 도발이든 유혹이든 사마소 귀에 들어갔으면 좋은 반응이 나오지 못했을 얘기다. 그만큼 등애 역시 되도록이면 싸우지 않고 성도로 진격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해서 뒷일 생각하지 않고 이런 편지를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제갈첨은 해당 서신에 분노해서 사신의 목을 베는 것으로 응답하고 면죽에 포진하여 주둔했다. 의외로 한 성깔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나라가 망할까말까 하는 상황에서 되도 않는 헛소리를 하고 있으니 열받지 않겠냐마는...

등애는 아들 등충에게 우익을 맡기고, 사찬에게 좌익을 맡겨서 제갈첨을 공격했다. 등애는 군을 삼등분해서 포위섬멸을 노린 것으로 보이지만 놀랍게도 군사적 경험이 없는 장수들로만 구성된 제갈첨의 군대는 등충과 사찬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촉한 진영은 전투 경험이 아예 없던 것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분전했다 볼 수 있다. 다만 이는 그만큼 등애군 역시 지쳐있었기 때문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어쨌거나 정사 삼국지 등애전에 따르면 제갈첨과 싸운 등충과 사찬은 전세가 불리했으므로 나란히 퇴각하여 돌아와서 적을 공격할 수 없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등애군은 자포자기에 빠질 뻔했다. 그러나 등애는 화를 내며 지금 존망의 위기가 이 싸움에 있는데 어떻게 불가능하다고 하느나며 사찬과 등충을 나무랐고 아예 이들의 목을 베어버리려 했다. 등충과 사찬은 급히 돌아가 다시 출진해 제갈첨군과 교전했는데 이때는 촉군이 대패했다. 제갈첨과 같이 싸웠던 황숭, 장준, 이구는 모두 전사하고 제갈첨은 진중으로 끌려나가 참수되었다.

위에서도 몇번 나왔지만 삼국지집해 『촉서』 「제갈첨전」에 주석으로 기재된 원화군현지(元和郡县志)의 글귀에 의하면 제갈첨은 부현에 있을때 등애가 강유관에 이미 들어가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안으로는 황호를 제거하지 못하였고, 밖으로는 강유를 제압하지 못하였으며, 나아가서는 강유를 지키지 못하였다. 내게는 세 가지 죄가 있으니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겠느냐?"

그리고 면죽으로 가서 죽었다.

동일한 열전에서 주석으로 기재된 『화양국지』에 의하면 제갈첨의 장남 제갈상은 촉군의 괴멸을 바라보며 한탄하며 말했다.

부자가 나라의 무거운 은혜를 받고서 일찍 황호의 목을 베지 못하고 나라를 무너지게 하고 백성들을 죽게 하였으니 살아본들 무엇에 쓰겠는가?"


그리고 말을 때리며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돌격하다 사망했다.

제갈첨의 패배로 성도의 방어선이 한 번에 무너졌다. 이에 혼란에 빠진 촉한 조정은 남중으로 피하자, 오나라에 의탁하자 의견이 분분했는데 이때 혼자 항복을 주장한 초주의 설득에 남쪽으로 피난가려던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하면서 촉한은 멸망한다. 당시 제갈첨의 나이는 향년 37세로, 아버지인 제갈량은 그 나이대에 유비의 한중왕 즉위로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할 무렵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나이에 아들인 제갈첨은 조국을 지키려다 전사한 것이다.


2.5. 사후[편집]


장남 제갈상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면죽에서 전사했으며 이 때 나이는 19세,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차남 제갈경은 촉이 멸망한 뒤 하동으로 이주했다가 서진이 세워진 뒤 강주자사가 되었다. 오늘날 제갈량의 직계 후손들은 바로 제갈경의 핏줄을 이었다고 하며 저장성 란시시에 집성촌인 제갈팔봉촌이 있다. 사마염나헌한테 촉의 인재들에 대해서 물어볼 때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 등 다른 인물들과 함께 추천되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그와 그의 아버지인 제갈량의 명망을 이용해 제갈첨이 죽은지 4년후에 촉군에서 반진복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왕부 문서 참고.

사천성 몐주시에 제갈첨 부자와 장준, 황숭, 이구를 모신 제갈쌍충묘사가 있어 면죽 전투 당시 전사한 이들의 넋을 기린다고 한다.


3. 연의[편집]


역사에서는 할거 다 하고 출세가도를 달렸으나, 여기선 황호의 난정을 근심해 출사하지 않다는 설정으로 매우 후반부에 등장한다. 등애가 음평을 돌파하자 극정의 추천으로 면죽을 방어하며 아버지의 목상을 앞세우고 싸워 위군은 제갈량이 되살아난 줄 알고 혼란에 빠져 물러났다. 이후 몇 차례 위군을 몰아붙였지만 결국 등애의 유인책에 빠져 전사한다.

오에 원군을 요청하는 것도 제갈첨이 한 걸로 바뀌었고 강유 탄핵과 황숭의 간언도 생략되었다. 나관중본에선 등애에게 항복할까 고민하는 장면이 추가되었으나 모종강본에서 사실대로 삭제되어서 혜택만 남겨졌다.


4. 평가[편집]


제갈첨은 글과 그림에 능하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촉인들이 제갈량을 그리워하니 모두 그의 재주와 총명함을 사랑했다. 매번 조정에 선정(善政)이나 좋은 일이 있으면 비록 제갈첨이 제안한 일이 아니더라도 백성들은 모두 서로 전하며 말하길, ‘갈후(葛侯)가 한 일이다’고 했다. 이로써 아름다운 명성과 과분한 칭찬이 그 실제를 넘어섰다. -『촉서』 「제갈첨전」


“비록 제갈첨의 지혜가 위급함을 구원하기에는 부족했고 그 용맹이 적과 맞서기엔 부족했으나, 밖으론 나라를 저버리지 않고 안으론 부친의 뜻을 바꾸지 않았으니 충효가 여기에 있었다.” -『촉서』 「제갈첨전」에 기재된 간보[22]

의 제갈첨에 대한 평.


제갈량의 아들 첨은 자가 사원인데, 면죽의 싸움에서 등애의 심부름꾼을 베어 죽이고 순절하였는데, 이때 나이 37세였다. 또 아들 상은 "부자가 나라의 후중한 은혜를 받고서 능히 황호를 베지 못하고 패배하였으니, 살아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탄식하고, 이에 위나라 군사에게 달려가서 죽었다. 첨과 상은 자질이 비록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으나 역시 공명의 충효가법에서부터 온 것이 있었던 것이다.-안정복의 『상헌수필』


"제갈첨(諸葛瞻)은 음평(陰平)을 지키지 못하고 후퇴하여 면죽(綿竹)에서 죽었다. 그가 아비의 충성은 있었지만 그 아비의 재주가 없었으므로 결국 자신이 죽고 집안이 망했을 뿐더러 나라에도 이익이 없었던 것이니, 애석하도다. 그러나 군사를 해산시키고 적에게 항복한 강유의 무리에 비교하면 또한 사람의 마음을 약간 격동시켰다. 그가 황호(黃皓)를 죽이지 않았던 일에 대해서는 그의 아들도 죽음에 임해서 격분하고 한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일을 가지고 죄목을 삼는다면 그에게 너무 까다롭게 책비(責備 완비하기를 바라는 것)하는 것이니, 이것은 ‘군자(君子)는 사람과 더불어 착함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홍대용의 『담헌서』


(제갈)근의 아들 (제갈)각(恪)은 비록 일이 잘못되어 적신(賊臣)에게 살해를 당했으나, 그 역시 나라를 위한 마음은 제갈첨(諸葛瞻 제갈량(諸葛亮)의 아들)의 부자와 더불어 거센 물결 속에 꿋꿋이 서 있는 지주(砥柱) 같았다. 어찌 집안에서 이런 충성과 절개가 이처럼 한꺼번에 났을까? 추측컨대, 그 부조(父祖)들의 교양에 따라 그렇게 되었던 것인 듯하다. 탄복할 만하고 공경할 만하다. -이익의 『경사문』


소열제는 어려서 진원방(陳元方 진기(陳紀))과 정강성(鄭康成 정현(鄭玄))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예절을 익힌 터라 충분히 자신을 굽힐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삼고초려(三顧草廬)하여 마침내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에 뒤지지 않는 천하제일의 보좌 제갈 무후(諸葛武侯)를 얻었고, 자신은 탕왕(湯王)ㆍ문왕(文王)과 나란히 칭해지게 된 것이다. 한나라를 중흥시킨 것은 주(周)나라 선왕(宣王)과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에 비견되며, 나라가 망할 때에도 영예로움이 있었다. 북지왕(北地王) 유심(劉諶)은 종묘에서 곡하다 죽었고 제갈첨(諸葛瞻), 제갈상(諸葛尙) 부자는 면죽(綿竹)에서 전사하였으니, 이들의 순국(殉國)은 모두 그의 유업(遺業)인 것이다. 각정(卻正)은 후주(後主)를 따라 낙양(洛陽)으로 들어가면서 죽어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으니, 유선(劉禪)이 어찌하여 이런 충신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선제(先帝)가 특별하게 대우해 준 것을 추념하여 그에게 보답한 것이다. -성대중의 『청성잡기』


고금을 막론하고 제갈첨에 대한 평가는 지혜와 재주는 아버지에 미치지 못하지만 충성심은 아비 못지않다는 것이다.

면죽 전투에서 등애는 이행 권한도 없고 의지 여부도 불명이지만 투항하면 제갈첨에게 낭야왕으로 삼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제갈첨이 기회주의자인 장서, 마막같은 부류였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받아들였겠지만 제갈첨은 사신의 목을 베는 것으로 응답하고 등애군을 한 차례 박살내면서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이를 보아 충성심 하나는 확실했던 것 같다. 당시 등충은 이미 후작위를 달고 있는데다가 나이와 경력은 등애를 따라서 만만찮았지 않았고 사마 사찬 또한 최소한의 전투 경험을 겸비했을텐데 한 번도 전투를 지휘해보지 못한 제갈첨에게 불리함을 겪다못해 퇴각해 적을 공격할 수 없다고 등애에게 자포자기로 하소연한 것을 보면 제갈첨은 군사적으로 경험이 한번도 없었음에도 선전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등애군이 험준한 음평 산길을 넘어와서 많이 상했지만 제갈첨 역시 급조한 전력으로 이들을 상대해야 했다.

진수는 밖에서는 강유, 안에서는 황호를 제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동궐과 더불어 비판적인 평가를 남겼지만 강유 탄핵건에서 볼 수 있듯이 놀고먹으며 산 건 아니었고 병권 교체라는 초강수를 통해 최소한 강유만큼은 제어하려 했다는 점은 『촉서』 「제갈량전」 주석 『이동기』, 『학경 속후한서』에서 검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제갈첨은 다른 공신 2세인 제갈각이나 사마소, 사마사 형제와 달리 불과 8살에 제갈량이 별세함으로 별다른 가르침이나 경험을 전수하지 못했다. 제갈량도 이를 염려해 계자서를 남기긴 했지만 제갈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제갈첨이 조금이라도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제갈량을 수행하며 경험을 쌓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후 제갈첨의 행보도 분명 많이 달라졌을 공산이 크다. 또 겨우 34살에 위장군에 임명되었으며 258년부터 조정에 관여하기 시작해 불과 5년후에 나라가 망했다. 뭘 하고 자시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거기에 강유-염우 교체책에 대한 해석이 맞다는 가정하에 제갈첨의 정치적 능력은 나이에 비해 상당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죽었을 무렵의 나이는 37세. 중앙 조정에서 일한지 불과 5년이었다는 점에서 너무 늦게 태어났고 나라가 너무 일찍 망해서 자질을 보이지도 키우지도 못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아버지의 이름을 먹칠할 정도로 못난 사람은 아니었다. 인물평에 상당히 깐깐한 편인 홍대용조차도 제갈첨 부자가 황호를 죽이지 못한 것을 두고 죄를 물으려고 하는 것은 "너무 까다롭게 책비(責備 완비하기를 바라는 것)하는 것"이라는 평을 남겼다.

결론적으로, 제갈첨은 황숭의 간언을 듣지 않고 등애의 평지 진입을 허용하는 실책을 범했고 이 때문에 자신과 부하들 모두 전사했다. 그러나 충성심만큼은 제갈량과 함께 묶여 칭송받을 정도로 흠 잡을 구석이 없었으며 허무하게 배신한 장서와 마막과 달리 등애의 공격을 한 번 격퇴시켜 촉한의 마지막 관문을 허무하게 넘겨주진 않았다.

검각에 들어가기 직전 종회는 제갈량의 후임이었던 장완의 아들 장빈에게 편지를 보낸 바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파와 촉에는 재능과 지혜가 있는 문인과 무인이 많은데, 그대와 제갈사원(諸葛思遠:제갈첨)에 이르러서는 초목에 비유되며, 나와 똑같은 천지의 기(氣)를 받았습니다. 옛 선인에 대한 존경은 지금이나 과거나 중시했던 일입니다. 서쪽에 도착하면 , 그대 부친의 산소를 차아가 받들어 인사하고, 묘지를 깨끗이 청소하여 경의를 표하려고 합니다. 선친의 산소 위치를 알려주기 원합니다!


종회가 조조 시대부터 조정의 최고 원로급이었던 종요의 아들로서 당시 이미 일류 명사였음을 감안하면 제갈첨에 대한 평가가 그리 박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종회는 제갈첨뿐만 아니라 강유를 비롯한 촉 인물들을 우대했으며, 혜강을 모함할 때 와룡드립을 치는 등 과장된 평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음은 고려해야 한다.

다만 종회의 와룡드립은 진심으로 혜강이 제갈량같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사마씨의 숙적인 제갈량과 비유함으로 사마소에게 혜강을 죽이도록 종용한 것이다. 장완과 제갈첨에 대한 평가와는 의도에서부터 매우 다르다. 또 종회 본인도 제갈량의 사당에 굳이 제사를 지낸다던지 본인을 스스로 유비에 비한다던지 하는식으로 촉한 인물들을 다분히 의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또한 이 당시 종회는 사마소에게 역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촉한을 멸망시킨다면 촉한의 장수들을 자기편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고 이 때문에 본심과는 관계없이 촉한의 명사들을 비롯한 촉한 사람들 모두에게 존중받고 아낌을 받았던 장완과 제갈첨을 높게 평가하는 식으로 편승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5. 미디어 믹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갈첨/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첨(瞻)이라는 글자에는 바라보다/우러러보다/멀리 보다 등의 의미가 있다. 자인 사원(思遠)은 역시 멀리까지 생각하고 내다본다는 뜻이 된다.[2] 어머니 황부인 또한 당시 적은 나이는 아니었을 확률이 높다. 황부인의 생년이 불명이기는 한데, 제갈량이 형주에 살던 시절 결혼했었으므로 227년 시점에선 나이가 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여성의 가임 연령을 고려하면 제갈량보다는 확실히 연하였을 확률이 크다.[3] 이 번역은 신원문화사에서「제갈량집」을 번역한 <와룡의 눈으로 세상을 읽다>에서 발췌했다.[4] 원문: 瞻今已八歲而聦慧可愛,嫌其早成,恐不為重器耳。[5] 정사 삼국지 본전만 보면 제갈첨의 정치적인 견해를 잘 알 수가 없다. 알 수 있는건 북벌에 회의적이었던거랑 충성심이 강했다는거 정도다. 성격도 의외로 엄격했을 거란것만 알 수 있다.[6] 삼국지집해에 기재된 조일청 주석과 중국어 위키백과 기준으로 작성한다.[7] 당헌종의 연호 원화(元和, 806~820)에 작성된 당시 기준 당나라의 군현지리지이다. 원래는 40권, 목록 2권으로 총 42권이었으며 그림이 있어 「원화군현도지(元和郡縣圖志))」라 불렸고, 이길보(李吉甫)가 원화 8년(813년)에 완성했다. 중국 전역을 다루는 현존하는 가장 빠르고 비교적 완전한 지리총지이다. 남송 이후 그림은 이미 산실되어, 「원화군현지元和郡县志」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현재는 제19, 20, 23, 24, 26, 36권이 산실되었고, 제18권과 제25권은 일부분이 부족하다.[8] 촉한에 사관이 없었다는 진수의 기록과 대치되는 부분이기에 간혹 논쟁의 대상이 되는데 애시당초 후주전을 보면 알겠지만 정작 진수의 저 기록 몇 줄 위에 있는 경요 원년에는 사관이 기록한 내용이 있으며, 유지기는 이런 내용을 사실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배송지도 이건 진수의 사사로운 감정이 들어간 평이라고 평가를 내렸다. 물론 여기서 언급하는 "촉"은 성한이다. 촉한이 멸망한지 80년이 넘게 지났는데 촉한의 사관이 살아남았을 리가 없다.[9] 화양국지의 저자 상거 맞다.[10] 제갈량전에 붙은 번건동궐의 기록에 붙은 주석이다.[11] 자사보다 목이 가지는 권한이 더 크다.[12] 흥미롭게도 『화양국지』 「유후주지」에서는 염우를 우대위장군(右大衛將軍)으로 기록한다. 단순히 오기로 생각되나 『화양국지』가 서술될 무렵에 사방장군이 사방위장군이었기에 우대위장군이라 표기했다는 설도 존재한다.[13] 반대로 제갈첨이 도호직을 행(行-직책앞의 '행'은 정확히 그 직책을 처음 맡은 자로서 해당 직책의 역할을 할 경우에 붙인다)했다는 시점에서 제갈첨의 지위를 다른 장수들의 앞에 놓는 의견도 있는데, 이것 또한 애매하다. 행도호가 아니라 도호는 이엄이나 장완 등이 군권을 잡을 때 맡던 직책으로, 후한 시대에는 이민족 정벌을 맡던 직책이다. 이엄의 경우 제갈량이 있던 상황에서 전적으로 군권을 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불어 장완이 군권(군령권 - 군사 작전 및 훈련을 명할 수 있는 권한- 과 군정권 -군 인사권 및 행정권 - 모두였을 것이다)을 가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도호이기도 했지만 더불어 군부 최고 직책인 대사마 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후한 기준으로 대사마는 대장군에게 따르는 직책인 동시에 삼공보다 위에 위치한다.[14] 유선의 반대도 다각도로 비춰볼 여지있다. 당시 국정을 농단하던 황호의 권세는 모두 유선의 지원 하에 가능한 것이어서 강유가 녹상서사+익주자사의 권한으로 황호를 제어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면 유선의 권위 또한 위협할 수 있는 셈이다. 유선의 황호에 대한 신뢰도는 전쟁준비마저 좌지우할 수준이었는데 황호마저 지지한 방안을 유선이 반대했다는 것은 유선은 장기적으로 강유-염우 교체책의 위험성을 꿰뚫어봤다고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유선은 정치적 권위를 세우는 능력 하나만은 상당히 뛰어나다는 평이 있는데 이 가설마저 맞다면 유선의 통찰력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라고 볼 수도 있다. 통찰력은 누구를 닮아서 뛰어난데 어째 이상한 쪽으로 뛰어나다.[15] 나헌은 제갈첨의 아들인 제갈경을 진수 본인과 함께 사마염에게 추천한 전적이 있다. 그가 제갈첨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일을 마음에 담아두었을 법 하다. 실제로 그는 제갈경과 같이 나헌의 천거를 받았음에도 본전에 제갈경이 하동으로 옮겨갔다는 기록만 적고 그가 서용되어 이름을 떨쳤다는 얘기는 넣지도 않았다.[16] 이에 대해서 '촉의 사람들이 제갈량을 사모 한 나머지, 제갈첨이 건의하여 창도한 것이 아니더라도 백성들은 모두 갈후가 만든것이다.'라고 하는 문맥으로 나오는 것이니, 이것은 제갈첨이 무조건 기폄해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제갈량이 얼마나 촉의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었는지를 나타내는 일화라고 봐야 하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17] 실제로 초주는 조정에서 유일하게 항복을 유선에게 권해 유선이 항복을 선택함으로서 각지의 군대가 구원하기 오는 와중인데도 촉한을 망하게 했다.[18] 사실 제갈첨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부친의 계자서를 주의깊게 읽었다면 1의 가설은 처음부터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19] (초주전 삼국지집해) 하작이 말하길, 황숭이 말했다. "신속하게 가서 험지를 점거하여, 평지 진입을 저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작이 말하길 ) 후인들이 음(陰)자를 잘못 더한 것이다. (즉 초주전의 음평(陰平)은 그냥 평(平)이라는 말.)[20] 제갈량을 비롯한 냥야 제갈씨의 본관이 서주 낭야군이다. 아마 이를 꼬집어서 낭야왕으로 봉한다고 회유한 듯. 호삼성 역시 '제갈씨의 본관은 낭야인이니 연고로서 이를 유혹하는 것이다'라고 했다.[21] 백화문 번역인 자치통감전역에서는 좀 더 정확하게 편지로 권유(劝诱)한다고 나온다.[22] 동진시대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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