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대체역사/동부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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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았더라면?
2.2. 바르바로사 작전의 중지 혹은 축소
2.3. 레닌그라드의 완전 점령
2.4. 중부집단군이 바로 모스크바로 쳐들어 갔다면?
2.5.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군이 승리했다면?
2.6.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이 승전했다면?
2.7.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6군이 성공적으로 철수했다면?
2.9. 영국을 완전히 항복, 종속시킨 후 소련을 침공했다면?
2.10. 일본 제국이 미국 대신 소련을 공격했다면?
2.11. 소련이 먼저 독일을 공격했다면?
2.12. 소련이 독일의 공격을 조기에 막아냈더라면?
2.13. 스탈린이 독일과 강화했다면?
2.14. 독일이 소련에 좀 더 일찍 쳐들어갔다면?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2.1.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았더라면?[편집]


독소전쟁으로 나치가 폭망한 현실을 고려하면 나치 독일의 입장에서는 제일 희망적인 IF다. 직전까지만 해도 소련측은 독일과 손잡고 타국가를 노렸을 정도였기 때문에 독일이 난데없이 뒤통수를 후려치지만 않았어도 그대로 날아온 반격에 나치의 모가지가 순식간에 날아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당시 대략적인 전황으로 보면 영국은 처칠의 주도 하에 바쿠 유전 지대 폭격 작전을 검토하고 있었으며 소련은 독일과 손잡고 회담에서 말한대로 인도 제국을 침공하고 있었을 것이다. 독일-일본만 해도 막는데 벅찼던 연합군이었던 만큼 소련이 독일과 적대하지 않고 추축국에 가담했다면 현실에서보다 더 순조롭게 상황을 끌고갔을 가능성이 높다. 소련이 추축국 가입까진 가지 않는다해도 불가침조약만 계속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동부전선으로 갈 물자와 병력을 아프리카영국으로 돌릴 수 있게 되므로 훨씬 여유가 있는 상황이다.

그 외에 존 키건 교수는 소련 침공에 동원한 병사들을 소련이 아닌 중동 전선으로 투입했을 경우의 수도 이야기했는데 이 당시 미국, 독일과 같이 국력 정상을 달리던 소련과 치열하게 싸웠던 수준의 독일 병사들을 북아프리카나 서아시아로 보내기만 했어도 간단하게 밀어버릴수 있었을 것이다.[1] 아프리카까지 먹힌다면 유럽은 동쪽 해로를 통해 아시아로 가는게 몹시 힘들어지므로 아시아에서도 유럽의 영향력을 상관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심지어 중동, 아프리카를 독일이 먹는다면 이후 만에 하나 침공할 가능성이 있는 소련의 측면을 노릴 수단이 생기므로 억지력 역할을 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2.2. 바르바로사 작전의 중지 혹은 축소[편집]


독소전쟁을 피할수없었다고 가정하면 나치 독일입장에선 둘째로 희망적인 IF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입안 중 보급을 총괄하던 병참장군 에두아르드 바그너는 지속적으로 작전을 미루든가 아니면 작전의 목표를 좀 더 작게 수정해달라고 건의하였다. 바그너 장군의 계산상으론 나치 독일의 물자로는 AA선은 택도 없고 스몰렌스크 까지가 한계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국방군최고사령부는 귀담아 듣지 않았고 모스크바까지 무리하게 진격하다가 크게 한방먹고 스몰렌스크 인근까지 집단군을 물려야 했다. 후퇴 중 수많은 물자와 인력이 손실된건 덤.

만약 최고사령부가 바그너 장군의 건의를 받아들여 스몰렌스크 까지로 작전을 수정하거나 혹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키예프 전투 이후 중지했다면 큰 이점을 가지고 독소전쟁을 끌어 갈수 있었다. 르제프 전투, 하리코프 공방전에서 보았듯이 독일 국방군은 방어전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특히 소련군이 준비가 덜 된상태에서 낸 공세를 번번히 격퇴하였다. 어차피 키예프 전투가 끝날 즈음 라스푸티차가 시작되기 직전이었고 독일군이나 소련군이나 유의미한 진격이 불가능했다. 그 말인 즉슨 다음 해 봄까지 전력을 추스르고 다음 작전을 구상할수 있었을 것이다. 지친 군대를 쉬게 하고 보급또한 정비할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레닌그라드를 완전히 점령하고 은색 여우 작전을 성공시켜 렌드리스를 막을수도 있었고 혹은 좀 더 준비 된 상태에서 청색 작전을 진행 해 캅카스 지역을 완전히 점거 할수도 있었다. 물론 소련군도 전세를 재정비 할수 있었겠지만 독일군이 스몰렌스크에서 전선을 안정화 시키기 시작하면 조급해지는건 소련군이고 스탈린의 무리한 탈환 명령은 소련군의 출혈을 강요 했을 것이다. 독일이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를 장악하고 더 나아가 캅카스 유전지대마저 먹었다면 전쟁이 길어질수록 불리해지는건 소련일 가능성이 크다. 점령지의 시민들을 온정적으로 대했다면 금상첨화 이겠지만 그건 나치더러 나치짓을 하지 말란 소리이므로 논외.

만약 시나리오가 이렇게 흘러갔다면 소련을 멸망시키는건 힘들 더라도 아주 유리한 조건에서 강화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2.3. 레닌그라드의 완전 점령[편집]


리처드 오버리의 명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에서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주제. 약 100만의 북부집단군이 900일간의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치르는 대신 레닌그라드를 완전 점령한 이후 모스크바 전투 시 북부에서 양익 작전을 실시했거나 무르만스크, 아르항겔스크 등의 무기대여법 북극해 항로를 마비시켰다면 41년의 소련은 도미노처럼 무너졌을 것이다. 상기 서적에서는 "러시아의 옛 수도의 결사 항전이 새로운 수도의 목숨을 살렸다."라는 평을 하고 있을 정도. 그래서인지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차역에는 영웅도시(ГОРОД ГЕРОИ)라는 칭호가 붙어있다.


2.4. 중부집단군이 바로 모스크바로 쳐들어 갔다면?[편집]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중부집단군이 키예프로 가지않고 바로 모스크바로 쳐들어갔다면?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치 독일은 멸망했을 것이며, 공산주의의 세력은 최소한 벨기에까지 미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당시 독일 중부집단군은 사실 애초부터 모스크바까지 진격할 수 있는 전력과 물자가 없었다. 따라서 이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남부, 북부집단군에서 전력과 물자를 빼어 중부집단군에 배치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중부집단군에게 양쪽 측방을 비우고 최전선에만 집중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당시 키예프와 레닌그라드 일대에 있던 소련군의 규모와 전력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격이며, 정말 이렇게 된다면 소련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이 끝나기도 전에 물자가 다 빠져나가 약체화된 남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의 공격을 받아 싸워서 몰살시키고 중부집단군에 대한 포위섬멸을 기도할 수 있었다. 발트삼국과 우크라이나를 다 통과하지도 못한 채로 중간부만 모스크바 코앞까지 닿는다면 그야말로 동유럽 전체보다 넓은(...) 돌출부를 형성하는 것이며, 소련군은 글자 그대로 동유럽 전체를 통째로 포위섬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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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전선을 이와 같이 기형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독일의 전략적 기반은 송두리째 붕괴하며 유효한 전력은 물리적으로 섬멸된다. 그리고 소련군의 진격을 막아낼 수 있는 전력이 없는 만큼 소련군은 적어도 동유럽 전 지역, 만약 재수가 없다면 단숨에 나치 독일 본토까지 진격했을 것이다. 이것은 영국이나 미국의 개입이 제대로 있기도 전에 소련군이 유럽 동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상술한 대로 서유럽 지역, 적어도 저지대 국가들에는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미쳤을 것이다.

이것이 긍정적인 대체역사로 많은 호사가들에게 이야기되었던 이유는 전략적 관점을 보지 못하고 전술적 관점으로만 판단한 구데리안의 짧은 식견에 기반한 회고록 때문으로, 전략적 관점에서만큼은 키예프를 정리하지 않고는 모스크바로 진격할 수 없다는 히틀러의 판단이 명백하게 옳았다. 독일과 소련은 근본적인 경제 규모와 동원 인력의 격차가 있고, 전쟁경영론적 관점에서 그것은 전술적으로 어떤 짓을 하더라도 극복할 수 없다.

2.5.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군이 승리했다면?[편집]


독소전쟁의 결정적 전환점 중의 하나이다. 모스크바 전투를 가장 상세하게 다룬 서적인 '세계사 최대의 전투'에 따르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스크바 점령에 대비하여 시가전을 준비하는 등 독일군이 모스크바 점령 이후에도 계속해서 피를 보았을 것이 확실하나, 전쟁은 짧아도 몇 년은 더 끌었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모스크바의 상실로 유럽 러시아의 모든 교통로가 마비되어 보급이 절단나는 상황이 왔을 것이다. 물론 독일군도 보급선 등 여러 문제가 있지만 이를 극복하고 모스크바 점령 후 보급이 절단된 소련 주요 도시들로 진격을 계속했더라면 말 그대로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래도 소련이 바로 항복했을 가능성은 없으나, 스탈린에겐 아돌프 히틀러와의 강화를 생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2] 또 무엇보다도 일본이 모스크바가 넘어가는 것을 보고 소련 침공을 감행했을 것이고 진주만 공습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미국의 참전도 뒤로 늦추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모스크바 함락 이후 소련 서부 지역 대부분이 독일에게 점령되고 일본이 몽골연해주를 기습했다면 전세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른다. 추축국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미국이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문제는 그게 언제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참전하기로 마음을 굳혔을 즈음엔 이미 독일과 소련 사이엔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고 영국이 포위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미국은 진주만 공습 이전에도 참전하기로 약속을 했기에 시기가 늦춰지기는 했어도 참전했을 것이다.


2.6.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이 승전했다면?[편집]


독소전쟁의 결정적 전환점 중의 하나이며, 의외로 가능성이 있었던 시나리오다. 청색 작전 시기 전력을 반으로 나누는 뻘짓만 안했어도 스탈린그라드 장악이 상당히 가능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청색 작전 때 캅카스 지역으로 반을 보내고 스탈린그라드 지역으로 반을 보냈는데, 그 정도의 병력으로도 스탈린그라드의 무려 90% 가까이를 장악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모스크바 전투 다음으로 중요한 전투인 만큼 그에 대한 파급력도 상당했을 것이 확실하다. 당시 일본은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할 경우 소련을 공격하겠다고 독일과 밀약을 체결한 터라 일본이 독소전에 참전하여 연해주와 북사할린, 캄차카 반도 등이 공격받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미국과 이미 한창 전쟁 중인 터라 소련과의 전면전은 무리고 극동지역의 소련군에 도발하여 묶어두는 수준에서 그쳤을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독일에게는 굉장한 이득이다. 게다가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함락을 발판 삼아 그 기세로 소련 남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면, 독일이 간절히 원했던 유전이자[3] 반대로 소련에게 매우 중요한 바쿠 유전의 상실로 소련군은 전쟁 말기의 독일군이 겪었던 연료부족으로 인해 각개격파당하는 것을 피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4] 또한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의 존재도 지속적으로 위협받았을 것이며 동부전선은 최소한 교착상태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2.7.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6군이 성공적으로 철수했다면?[편집]


앞의 가정과 함께 많이 의논되는 이야기이다. 6군이 독일 정예군의 결정체로서 이들의 전멸이 독소전쟁이 분기가 되었을 정도로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코카서스에는 이들보다 규모가 훨씬 큰 A집단군 역시 소련군에게 포위될 위기를 겪었다. 6군의 저항 덕분에 코카서스의 A집단군이 철수 할 수 있어서 남부전선 전체가 붕괴되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가장 희망적인 가설은 A집단군 철수 이후 다시 구조작전이 시작되어 남은 6군이 성공적으로 철수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시기에 소련의 포위망이 엄청나서 병력은 몰라도 장비회수에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됭케르크 철수작전과 비슷하기 때문에, 살아남아 전선에 다시 투입될 병력자체만으로도 독일군 역량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만약 장비들 역시 운좋게 회수하였다면 독일군 역량 회복에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2.8. 쿠르스크 전투의 경우[편집]


앞의 2개의 가정에 비해선 파급력이 낮은 편이지만 이 또한 매우 중요한 편이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이 승리함으로써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후퇴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전선에 상륙한 병력들도 북진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노르망디 상륙작전바그라티온 작전이 이루어짐으로 독일이 패망했다. 그런데 여기서 독일군이 승리했다면 이후 독일은 방어전으로 전환하여 동쪽에선 소련군을 막아내면서 남부에선 이탈리아 방어에 더 치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노르망디 상륙과 바그라티온 작전도 없었던 일이 되었을 것이고 당시 독일군의 후방을 교란했던 게릴라들도 싸그리 청소함으로써 독일의 목숨이 몇년 연장되었을 것이다.[5]


2.9. 영국을 완전히 항복, 종속시킨 후 소련을 침공했다면?[편집]


이건 앞의 것들보다는 좀 가능성이 적은 게, 애초에 독일이 영국을 항복시킬 힘이 없었기 때문.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IF 시나리오이고 역사라는 특성상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현상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최소한 영국이 독일의 패권을 인정, 협조하게 되었다고 가정하고 영국의 막대한 해군력과 식민지 상당부분이 독일의 영향권에 간접적이나마 들어갔다고 치자. 예를 들어 만약에(대체역사)라는 책에서 가정한 것처럼 처칠 대신 대독 온건파인 핼리팩스 경이 영국 총리가 된 상황이거나, 더 나아가서 나치를 지지했던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하지 않고 국왕으로 재임한 상황 등등. 독일이 항복한 영국의 도움을 받고 공군력과 해상 보급도 동원했다면 부실한 보급이 상당부분 나아졌을 것이고 속전속결로 모스크바나 스탈린그라드 정도는 점령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 점령한 후에 영국도 없이 유럽에 홀로 남겨진 소련이 강화를 결정했을 가능성도 있다.

독소전쟁에서 독일이 입은 피해가 인명손실적으로 너무나 막대하기 때문에 영국과의 전선에서 입은 피해를 과소평가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영국 본토 항공전 문서에 매우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독일은 이미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부터 그 총력전 역량이 이미 바닥을 쳤다. 독소전쟁의 전장이 워낙 거대하고 또 기갑전력과 육군이 전쟁의 핵심이었기에 많이 무시되지만, 독소전쟁에서 모스크바 전투 이래 루프트바페는 단 한 번도 소련군을 상대로 정상적인 제공권을 확보하지 못했다.[6] 소련군의 저열한 전투기 기술과 낮은 파일럿 수준을 감안한다면, 이는 정상적인 군사대국의 공군에게 있을 수 없는 문제였다. 또한 독일이 영국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위해 개발한 V1, V2 로켓의 제작에 들어간 비용은 다 합쳐 30억 마르크를 초과하는데, 이것은 4호 전차를 3만 대나 만들 수 있는 군비였으며, 동시에 독일군 보병사단 250개를 1년간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이었다. 독일이 대서양 전쟁 과정에서 건조한 유보트가 280척에 육박하는데, 이것은 4호 전차 1만 대를 만들 수 있는 비용과 4호 전차를 5,600대나 만들 수 있는 철강 및 원자재가 투입된 것이었다. 따라서 독일이 영국을 상대로 총부리를 거둔다면 독일이 얻게 되는 어드밴티지는 단순히 영국과의 교전에서 얻은 피해가 없어진다는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총력전의 근본적인 역량을 소련에게 퍼부을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애초에 소련이 초반에 패배한 결정적 이유가 '히틀러 그놈이 설마 영국이 아직 건재한데 전쟁을 또 벌일까?'였던 걸 보면 영국이 항복한 시점에서 소련은 최고 경계 상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영국을 항복시키느라 바르바로사 작전이 연기될 수도 있고 그렇다면 초반부터 그렇게 밀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전 유럽 점령은 아니더라도 모스크바아르항겔스크, 스탈린그라드를 잇는 광활한 지역과 중앙아시아 일부도 독일군의 공격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영국이 이미 독일의 아래로 들어간 마당에 미국이 유럽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을지도 의문이다. 이런 상황까지 왔다면 미국은 독일 중심의 유럽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인정하고 독일과 공존하기를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7] 그렇게 영국을 굴복시킨 후 소련 침공도 순조롭게 이루어짐으로써 유럽 일대를 제패했더라면 당신들의 조국이 현실화됐을지도.


2.10. 일본 제국이 미국 대신 소련을 공격했다면?[편집]


일본이 독일의 요구를 받아들여 소련을 공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심리적 영향과 소련에 타격은 주었겠지만 일본군의 역량을 생각해본다면 궁극적으로는 시베리아 출병 때처럼 북 사할린연해주, 더 나아가 봐야 바이칼 호 이동 지역만 분쟁지역화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한 독소전이 시작된 이후에도 극동에는 최소 30개 이상의 사단이라는 대규모 병력[8]이 배치되어 있었고 일본 육군은 소련까지 상대할 여력 자체가 없었다. 따라서 일본이 독일처럼 불가침조약을 무시하고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극동에 배치된 병력을 잡아두는게 최선이고 그 이상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패전국이란 이미지만 보고 나온 이론적인 면으로, 일본군이 여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의외로 군사적 역량이 상당했기에 아무리 주공이 아니어도 이를 막으려면 소련군은 추가로 병력을 차출하고 그 보급을 북아프리카 전역를 뛰어넘는 수준의 난이도로 수행해야 한다. 당연히 이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고, 양측의 전략 목표는 결국 시베리아 철도 시설들에 집중 될게 뻔하다. 다만 일본판 KV쇼크가 일어나도 무방할 정도로 일본군의 대전차 능력이 형편 없었다는 점이 중요 요소가 될수 있지만, 이를 항공전력을 투입해 근접항공지원으로 극복하고 현상유지라도 성공하면 극동 소련군은 발이 묶여버린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여기도 대숙청의 영향을 받았고, 이미 이 시점에서 주코프가 독일을 대비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그럼 이 부패가 만연한 극동에 남은 병력들이 일본군을 제대로 상대 할수 있다고 믿는건 좀 무리가 많다(...). 아무튼 동부전선에서 시베리아 너머에서 온 정예 부대들[9]이 엄청난 전공을 세운 것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독일군에게 많은 큰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 독일군의 목적인 소련군을 잡아두는걸로도 모스크바 방위가 강화되지 못하여 모스크바가 심대한 타격을 받든가 심지어는 함락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2.11. 소련이 먼저 독일을 공격했다면?[편집]


만약 소련이 T-34를 좀 더 일찍 배치하고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선제공격을 하였다면 소련군의 공격은 아무리 잘해 보아야 단치히바르샤바, 동프로이센쯤에서 중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소련은 스탈린대숙청으로 군이 반병신이 된 상태였고 독일도 소련을 침공하기 전에 소련의 공격에 대비한 어느 정도의 준비를 해 둔 상태였다. 다만 소련의 선공이 있었더라면 모스크바까지 뚫리는 일과 더불어 소련의 침공으로 여력이 없게 된 독일은 홀로코스트를 실행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홀로코스트 계획이 이루어진 것은 1942년 1월의 일로 독일이 소련을 쳐바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런데 당장 전황이 심각해진 상황에서 소련군 막을 생각을 먼저 하지 유대인을 죽일 생각을 할까? 하긴 했다하더라도 실행은 나중의 일로 미루었을 것이다. 일단 당장은 눈앞의 불을 꺼야 할 상황이니까. 그런데 소련의 선공으로 독일이 그걸 막는데 여념이 없는 동안 북아프리카에선 롬멜의 진군과 후퇴도 없이 전황이 방어전의 상황으로 지속되었을 것이고 오히려 북아프리카 군단이 좀 더 오래 견디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었을지도. 한편 이런 경우 소련이 명백히 침략자인 상황이므로 미국이 렌드리스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어쩌면 독일이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비시 프랑스에게 점령지를 뱉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서구 여론은 독일을 제1의 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양면전선이 된 독일을 노려 일찍 독일을 패망시켜 끌어내리고 소련과의 비밀 협약을 통해 얄타회담 후와 같이 유럽을 양분하게될 가능성이 높다. 즉 어딜 가나 실제 역사와 비슷하게 흘러갈 수 밖에 없다는 것.


2.12. 소련이 독일의 공격을 조기에 막아냈더라면?[편집]


대표적으로 스탈린라인의 완공 문제와 키예프 방어전 그리고 그리고리 쿨리크의 숙청에 달려있다. 폴란드 국경에 건설 중이던 스탈린라인을 괜히 옮기는 일 없이 그대로 계속했더라면 1941년이 오기 전에 완공할 수 있었을 테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독일은 소련 침공을 재고해 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키예프의 경우도 마찬가지. 게다가 대숙청 기간에 그리고리 쿨리크가 숙청되었다면 일찍이 T-34 전차와 데그탸료프 기관단총, 53-K 대전차포와 ZiS-3 대전차포가 소련군에 배치되어 화력이 개선되었을 것이고 유연한 전략적 후퇴까지 허용되었다면 소련군이 조기에 포위섬멸당하지 않고 우크라이나소련 남부에 독일군이 오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다. 더 나아가서 독일의 공격을 조기에 막고 전쟁의 종결을 앞당기는 동시에 수천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멍청한 독재자무능한 장성의 결정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대숙청으로 맛이 갔던 당시의 소련군이었지만 이러한 변수가 해결되었다면 모스크바 근방까지 속절없이 밀려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전력을 재편한 소련군이 조기에 독일군에 반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국력을 상당수 보존한 소련이 장차 도래할 냉전에 있어서도 현실의 소련보다 더욱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을 것이다.


2.13. 스탈린이 독일과 강화했다면?[편집]


모스크바 전투 이전에는 스탈린은 불가리아[10]의 중재로 일단 나치 독일과 폴란드 서부, 발트 3국, 몰다비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부를 내주는 선에서 강화를 맺으려고 했다. 이는 선례도 있어서 더 유리하다. 블라디미르 레닌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거대한 영토를 떼어 주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빠진 후 한숨 돌렸다가 나중에 독일이 패한 다음에 많은 영토를 수복했다. 스탈린은 이를 따라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조기강화의 경우에 독소전쟁은 사실상 독일의 승리로써 소련은 1차 대전 전후의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처럼 오늘날 러시아 부분만 간신히 유지했을 것이고, 더불어 스탈린의 권력 또한 엄청나게 위험해지게 되어 조기 실각의 가능성이 훨씬 커졌을 것이다. 심지어 소련 자체가 해체될 수도 있다. 동쪽의 위협이 사라지고 자원 수급도 원활해진 독일은 혼자 버티는 영국과의 전쟁에 집중했을 것이며 일본이 이 와중에 혼자 진주만 공습을 벌이더라도 일본의 도움이 불필요해진 독일이 일본 편을 들어서 미국에 선전포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도 영국 빼고 전 유럽을 장악한 독일을 공격하지는 않았을테니 일본과만 전쟁을 했을 것이고 전후 질서는 유럽의 독일 세력 vs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미국 세력의 냉전 체제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일부에서는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한 시점에서 소련 공략을 포기하고 강화 조약을 맺었다면 좀 더 생명이 연장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데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독소전쟁 중 독일과 소련의 강화 가능성은 모스크바 전투가 끝날 때 완전히 소멸했기 때문이다.

1944년에는 오히려 위기에 몰린 독일은 공산주의를 혐오하던 히틀러를 배제한채 스탈린과 협상하여 단독 강화를 맺으려고 하였으며, 괴벨스는 서방 측보다 이쪽이 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나치에게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소련이 다 잡은 맹수를 살려 줄 리가 없다.[11]


2.14. 독일이 소련에 좀 더 일찍 쳐들어갔다면?[편집]


의외로 가능성이 높았을 사례. 원래 바르바로사 작전의 작전 개시일은 1941년 5월 15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둠의.연합군 이탈리아가 유고슬라비아그리스를 침공하면서, 독일도 여기에 합류를 하게 되고 점령하는데에 군사력이 소비됨으로써 바르바로사 작전이 1941년 6월 22일로 미뤄졌다.[12]
이로 인한 나비효과는 엄청 났는데, 추축국의 점령 직전의 레닌그라드 공격이 포위전으로 바뀌고 모스크바 공방전이 겨울까지 끄는 바람에 월동 준비가 부족한 추축국이 공세를 중단했던 이유이다. 작계대로 혹은 4월쯤 일찍 바르바로사 작전이 발동되었다면 겨울이 오기 전에 주요 도시인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등이 함락, 소련은 그야말로 멸망 직전까지 몰렸을 것이다. 최소한 모스크바 시내가 독일군의 전면적인 공세로 전장터로 초토화되었을 것이다.[13]

다만 다른 의견도 있는데, 오히려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함으로써 소련이 방심했기에 오히려 진격이 더 이른 시기에 끝났을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이다. 게오르기 주코프가 바로 이런 주장을 했는데, 의외로 이것도 신빙성이 있는 의견이다. 실제로 추축국의 공세가 늦춰진 가장 큰 이유는 지나치게 빠른 진격으로 독일군의 보급선에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지 기상은 부수적인 원인이다. 물론 5월에 진격을 했다면,여유 시간이 있었긴 하나, 독소전쟁 문서에서 보듯이 소련의 방심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침공한 것도 있음을 감안하면 독일에게 1달 정도 더 여유가 생겼을 뿐, 소련이 오히려 준비를 더욱 더 해서 독일이 현실보다도 꽤 어렵게 진격했을 가능성도 높았을 것이다.


2.15. 독일이 바그라티온 작전비스와-오데르 대공세를 막아냈다면?[편집]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바에서는 히틀러가 고지사수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장군들이 유동적으로 싸우지 못해 발렸다고 하지만, 실제로 당시의 전황을 본다면 극소수의 사례를 제외하면 장군들은 그 명령을 씹고 유동적으로 방어했다.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완전히 밀려난 것은 독일군이 어리석게 싸웠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독일군의 전쟁 역량이 한계에 다다른 동시에 소련군의 기동이 결코 1940년대 초의 독일에 못하지 않을 정도로 교묘하고 전격적이었기 때문이며, 바그라티온과 비스툴라 공세의 승리는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독일군을 소련군 자신들의 노력과 근본적인 체급 차이로 찍어 누른 것이었다.

무엇보다, 만약 독일군이 이 공세를 막아낸다 해도, 소련군 입장에서는 여전히 독일군보다 더 많은 병력이 있었고, 공세를 얼마든지 더 감행할 수 있었다. 바그라티온 작전이 막히면 2차, 3차, 4차 바그라티온을 감행하여 뚫어버리면 그만이다. 어쨌거나 독일은 소련보다 오래 버틸 수 없으니까. 전술적인 측면이 아니라 전략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근본적으로 독일은 적들의 최종 종심인 모스크바를 함락시키기 전에 공세종말점에 다다른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소련을 절대로 이길 수 없었다. 따라서 독일군이 이를 막아낸다면 종전이 조금 늦추어지거나 소련군이 베를린까지 입성할 가능성은 미미하게 줄어들 수는 있으나 독일의 패망 사실 자체는 결코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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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실에선 롬멜이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멋대로 공세에 나서긴 했는데 롬멜이 지휘하던 군대는 3개 군단이 전부였다. 그러고도 물량 차이가 압도적으로 나는 영국군을 상대로도 전선을 이집트 국경까지 밀었던걸 고려할 때 보급과 군대 증원까지 겹쳐지면 아예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럽 열강의 영향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2] 실제로 모스크바 전투 전에 스탈린은 히틀러와의 강화를 매우 진지하게 검토했다.[3] 히틀러는 원자재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으로부터 수입으로 충족, 식량자원은 우크라이나로 충족되었다고 생각했으며 독일군의 각지 전선의 기계화전력을 기동시킬 연료에 간절하였기에 청색작전을 집행한 것이기도 하다.[4] 다만 무기대여법으로 연료를 더 뜯어내는걸로 때웠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나 스탈린그라드가 점령당하면 보급선이 꼬인다는 것을 감안하면 타격이 클 것이다.[5] 그린힐의 대체역사 전집에서 참고. 해당 서적은 국내 미출간.[6] 소련군이 충분한 대공력을 가지고도 순전히 교전을 유기해서 유지된 경우는 있다.[7] 일각에서는 영국과 노르웨이가 모조리 독일의 손에 넘어갔다면 제해권이 완전히 장악되어 미국이 렌드리스를 하려고 하더라도 제대로 소련에 도착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건 틀린 의견인데, 그 이유는 렌드리스 수송선의 북극 항로의 비중이 역사적으로 상당히 적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소련에 건네준 렌드리스 물품의 대부분은 북극 항로의 계절적인 위험과 영국을 포위한 유보트 때문에 북극 항로가 아닌 인도양태평양을 통해 옮겨졌다. 북극 항로를 통한 렌드리스는 초기에 시도해 보다가 손실률이 너무 커서 유보트를 거의 다 잡아낸 대전 후기까지는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의 배만 운영되던 비주류 항로이며 렌드리스 물품의 과반수 이상은 일본과 중립 관계였던 소련이 직접 태평양을 통해 옮겼고 나머지도 대부분은 인도양으로 옮겨졌다. 이 북극 항로의 위험성 문제는 렌드리스가 42년 중반이 넘어야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치가 영국을 점령하고 그로 인해 일본이 독소전에 참전하여 태평양 항로가 막힌다고 가정하면 렌드리스 자체에 큰 위험이 되겠지만 단순히 미소 간 렌드리스로 한정한다면 북극 항로는 역사적으로 차지하면 엄청 좋은 항로지만 없다고 렌드리스 운송을 못할 항로는 아니었다. 북극 항로가 그나마 대전 총합 20% 수준의 렌드리스 물품이라도 옮긴 건 대전 후기에 유보트를 다 잡아내고 제해권을 장악한 이후에 이 항로를 애용했기 때문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전 초기에 북극 항로를 통한 운송 실패가 워낙 빈번하여 대전 총합 이 항로의 손실률은 7%에 달했다.[8] 독소전의 정신나간 스케일에 비하면 30개 사단이 별거 없어 보이지만 상식적인 구성에서 30개 사단이라는 숫자는 엄청난 대군이다. 그 유명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은 고작 4개 사단이었고 아프리카 전역의 대전투들이라는건 고작 몇개 사단들끼리 서로 치고박는 정도였다. 30개 사단은 북아프리카에 가져다두면 그 즉시 전역 자체가 종결되는 수준의 대군이다.[9] 극동의 부대들은 정예였고 그 수도 상당했으나, 앞서 적혀있듯 심지어 소련의 운명이 풍전등화였던 모스크바 전투에서도 소련은 극동에 대규모 군대를 유지했다.[10] 당장 불가리아는 추축국이었지만, 같은 슬라브족-정교회를 매개로 러시아와 매우 가까웠으며, 특히 러시아 제국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고 불가리아를 독립시켜줬기 때문에 소련을 상대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추축국인데도 독소전쟁에서는 병력을 보내지 않고 사실상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11] 애당초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비참하게 털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원래 양면전쟁은 어떤 국가나 피하려고 하는 데다가 독일은 제국시절에 일어난 1차대전때 프랑스를 얕보고 양면전선을 했다가 단단히 준비한 프랑스가 잘 대응하며 버텨내자 구상도가 완전히 어그러졌고 말기에 러시아와 타협해 서쪽전선에 투입했을 당시에는 이미 독일 전선이 무너지던 도중이었다. 이후 독일은 이 전투를 교훈삼아 "전선을 2개로 만들지 말라"는 격언까지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전쟁을 확대한 점은을 일으킨 점은 두고두고 까일 일이다. 독일 스스로도 이 전쟁에서 패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단지 초기 전선잘 돌아가면서 비관적으로 보던 프로이센 출신 장교들의 발언권이 약해지고 히틀러의 발언권이 강해졌었다. 결국 프로이센 출신 장교들의 예상대로 되었다고 볼 수 있을 듯. 전투는 이기지만 전쟁을 이기지 못하는 독일의 종특 뭐...전체적으로 본다면 동맹간에 손발이 영 안맞았던게 문제기는 하다. 일본 제국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상태였기에 소련을 협공하자는 독일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 왕국은 전쟁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그리스 침공, 이집트 침공을 하다가 되려 역관광 당해 제 앞가림도 못하는 바람에 독일이 상당한 도움을 줘야했으니(...).[12] 청색 작전과 성채 작전도 원래 5월로 예정되었다가 연기되었다.[13] 전황이 급격히 악화된 후 어느날, 히틀러가 프리드리히 대왕 초상화 앞에서 "그 1달을 돌려달라"고 절규했다는 풍문이 전해질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