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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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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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5.17 내란 · 배경 및 전개 · 계엄군의 학살
관련 인물
및 단체

진압 및
왜곡 관련

전두환 · 노태우 · 정호용 · 황영시 · 이희성 · 최세창 · 박준병 · 하나회 · 주영복 · 신군부 · 지만원 · 김대령 · 이주천 · 서석구 · 김진태 · 이종명 · 김순례
저항 관련
윤상원 · 박남선 · 정상용 · 조비오 · 박관현 · 윤한봉 · 김완섭 · 광주시민 · 투사회보 · 시민군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 · 헤닝 루모어 · 인요한 · 김영택 · 김사복 · 조갑제 · 정동영 · 서청원 · 서정갑 · 심재철
피해자
사상당한 경찰과 시민 · 김경철
사건 사고
5.18
관련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 광주교도소 습격 조작 사건 ·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일반
임을 위한 행진곡/논란 · 광주 폭격 시도 논란 · 전두환 손자 폭로 사건 (전우원)
왜곡 관련
5.18 민주화운동/왜곡 (북한개입설 · 무장폭동설) · 광주민주화운동 진보편향 명칭설 · '5.18 광수' 날조 논란
5.18 연고대생 북한간첩설 · 5.18 북한개입설 보도사건 (채널A · TV조선) · 자유한국당 공청회 5.18 망언 논란 · 전두환 회고록
기타
창작물에서의 묘사 · 5.18 사적지 ·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 5.18 특별법 · 5.18 관련 의문점 · 임을 위한 행진곡 · 화려한 휴가 · 택시운전사 · 오월의 노래 · 오월의 청춘 · 검정 고무신과 함께 하는 기영이의 5.18 여행 · 관련 자료김남주




조갑제
趙甲濟 | Cho Gab-je


파일:external/ph.mediatoday.co.kr/92236_102809_4848.jpg

출생
1945년 10월 24일 (78세)
연합군 점령하 일본 사이타마현 사이타마시[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직업
언론인, 출판인, 편집인, 작가
본관
함안 조씨 (咸安 趙氏)
병역
대한민국 공군 병장 만기전역 (병 161기[2])
학력
부산고등학교 (졸업)
부산수산대학교 (중퇴)[3]
경력
국제신문 기자
월간 마당 편집장
조선일보 월간조선부(部) 기자
월간조선 편집장 1기(1991 ~ 1996)
편집장 2기(1998 ~ 2004)
월간조선 초대 대표이사(2001년 ~ 2005년)
조갑제닷컴 대표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종교
개신교(예장고신)

1. 개요
2. 생애
3. 언론인으로서의 조갑제
4. 조갑제닷컴
5. 새누리당 공천 내홍에 대한 평가
6.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논조
6.1. 문제점
7. 조갑제의 시각
7.1. 진영 논리 거부
7.2. 반북
7.3. 자위적 핵무장론
7.4. 미국 의존적 한미동맹의 지양
7.5. 6.25 전쟁에 대한 시각
7.6. 박근혜 탄핵 관련
7.7. 3김에 대한 평가
7.8. 일본에 대한 관점
7.9. 부림사건, 영화 변호인에 대한 비판
7.10. 매카시즘에 대한 시각
7.11. 박원순의 자녀 병역비리 의혹
7.12. 군사문화 찬양
7.13. 한글 전용 혐오와 한자 찬양
7.14. 신라에 대한 찬양
7.16. 예술관
8. 여담
9. 기자로서의 조언
10. 저서




1. 개요[편집]


자기 나라를 지킬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을 써보지 못하고 남한테 구하려고 손을 내미는 것은 노예근성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자들은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다.

시국강연회 강연 中


대한민국언론인.

극우 논객이라는 인식이 넓게 퍼져 있긴 하지만, 사실 지극히 고전적인 형태의 완고한 반공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4] 좌우 대립보다는 남북 대립에 더 신경이 예민한 경향을 보인다. 과거 2005년 월간조선 대표에서 경질된 계기가 된, 그의 "친일보다 더 나쁜 것은 친북" 발언에서 그의 사상적 기반이 잘 드러난다.#[5]

청년 때부터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저지른 비리와 조작을 파헤쳤고, 다른 민주화 투사처럼 안기부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한 뒤에도, 취재를 포기하지 않을 만큼 집념이 강했다. 나중에는 안기부에서 고문을 받은 사람들 및 당시의 고문 기술자를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전두환 정부를 비난하는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이라는 책까지 작성했다. 또 전두환 정부 시절에 두 번이나 기자 해직을 당하였다. 그가 극단적인 말을 할 때마다, 언론인 후배들이 반박은 하더라도 조갑제가 기자로서 남긴 업적이 대단하기에 아주 심하게 공격을 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를 보고 장래희망을 기자로 정한 사람도 많다. 지금도 비록 조갑제와는 정치적 입장과 노선을 달리 하지만, 과거 70년대 일선 기자로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언론인으로서 보여준 조갑제의 업적과 취재력, 글쓰기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6]

다만 2000년대 이후로는 강경한 반공주의 성향을 드러내며 '김대중과 노무현이 김정일과 내통했다'라는 음모론을 설파하는 책을 발간하거나, 서정갑 등의 극우 인사들과 함께 손을 잡고 활동하는 등, 극단성이 더욱 강화되는 행보를 보였다.

다만 현재는 의외로 5.18 북한개입설, 4.15 부정선거설, 박근혜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친박의 공천학살 등 주로 극우 논객들이 옹호하는 것들에 대해 모두 부정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미국 대선 부정선거 음모론도 좌파 프락치랑 다를 바 없다며 굉장히 싫어한다.


2. 생애[편집]


2006년 8월 1일 신동아 기사 '救國(구국)의 논객' vs '안보상업주의자' 조갑제의 비밀 - 전직 월간조선 기자의 大(대)해부
2022년 10월 24일 연합뉴스 기사 [삶] 50년 기자 조갑제 "이스라엘에는 미군 주둔 않는다"

1945년 10월 24일,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7] 1946년 부모들이 나고 자란 경상북도 청송군으로 귀국하여 성장하게 된다. 이런 연유로 자신의 고향을 경북 청송 출신으로 소개한다. 출생신고가 1년 늦어 호적상으로는 1946년생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가난을 이유로 부산으로 이주하였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수산대학교(현 부경대학교)를 중퇴하였다.[8] 고교 시절, 단파라디오를 통해 미국과 일본의 야구 중계방송을 들으며 영어 및 일어를 공부했고, 군대에서 미 공군과 합동근무를 하고 비행기 식별 업무 때문에 일본 자위대와 연락관계를 유지하면서 영어, 일어 회화를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1967년 3월 1일 공군에 입대하여 요격관제[9] 특기병으로 3년 4개월을 복무하였다. 원래는 3년 만기 전역이었는데 훈련병 때 결핵성 늑막염에 걸려 40일간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서 자대배치가 늦어졌고, 1.21사태 등으로 군 복무를 몇개월 더 했다고 한다. 전역이 늦어져 제때 복학을 못했고 빨리 사회에 나가야 했기 때문에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부산·경남지역의 신문인 국제신문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1971년부터 부산·경남지역의 신문인 국제신문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으며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 아프지 않았는데도 회사에 병가원을 제출하고 광주광역시로 내려가 그 곳을 현장취재하였던 경험이 있으며 그로 인해 신군부의 압력으로 신문사에서 해고당하고 신군부 해직기자 명단에도 등재당하는 확인사살을 당했으며 이후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와 다시 언론기자로 활약 개시해[10] 월간 마당의 편집장을 지내다가 1983년 조선일보 월간조선부(部)에 입사하여 기자[11]로 활동하게 되었고 1991년 편집장 1기를 지냈고 1996년 ~ 1998년까지 해외연수를 갔던 경험이 있다. 이후 연수를 마친 1998년에 월간조선으로 복귀하여 편집장 2기를 맡았고 조선일보에 박정희에 관한 일생을 담은 저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연재하였다. 2001년 1월 2일자로 월간조선이 조선일보사에서 분리독립하여 독립법인 회사로 출범하면서 그 해부터 독립법인 월간조선사 초대 대표이사를 맡았으며 편집장도 겸직하였다. 이후로는 20년 동안 몸 담았던 월간조선을 떠나게 되었으며 독자적으로 세운 독립법인 회사 조갑제닷컴의 대표가 되었다.


3. 언론인으로서의 조갑제[편집]


1970~80년대 기자로서 조갑제는 가히 전설적인 족적들을 많이 남겼다. 환경문제와 관련한 심층취재(이를테면 중금속 오염에 관한 실태), 포항 유전설이 나돌 때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다'고 폭로한 특종 보도[12]를 비롯해 권력층들의 권력형 비리에 아주 날카롭게 다뤘으며, 1979년 부마민주항쟁(이때 남긴 책이 '유고' 2권 세트-1987년-이다.) 때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시기 각각 잠입 취재했었다. 군사정권 시절에 빈번히 행해진 수사기관의 고문에 대해서도 여러차례의 심층 탐사 보도를 써낸바 있다.[13] 1980년대까지 국제 기자 및 작가들의 단체인 국제 펜클럽에서 상도 여러 번 탔고 일본에도 정론과 민주주의를 지키는 언론인으로 알려졌다.

80년대 중후반까지 분명히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의 인기를 만들어준 실력파 기자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진우, 손석희 등 2010년대에 이름을 얻은 기자나 논객들이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군사정권 시기 박정희를 직접 저격하려고 부단히 애썼던 사람이다. 기자정신 하나는 정말 대쪽같은 양반이었고 요즘 문제가 되는 기레기들이 보고 배워야 할 진짜 참기자의 모습을 갖춘 기자였다. 지금이야 조갑제 기자에 대해 흑화된 이미지가 많지만, 현장은 가지도 않고 사실 확인도 없이 최신 유머글 퍼나르는 기자들보다 훨씬 정상적인 기자임을 넘어, 진보언론에서조차 조갑제 기자는 대선배로서 존경해 마지않는 대한민국 대표 기자로서의 자격이 충분했던 사람이다.

이 밖에도 4공, 5공의 각종 비화에 관해서도 취재해 족적들 남기기도 했다. 1983년에는 월간조선 편집기자로 이직했다. 이 시기 조갑제는 탐사, 심층 취재 도중에 안기부에 붙들려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당시 월간조선에 한국에서 활동하는 CIA에 관한 기사를 실었는데, 과감하게도 국내에 존재하는 CIA 사무실 전화번호를 공개하는 용자짓을 해버려 이때문에 조갑제는 고문 후유증 영향으로 지인이 부축하지 않으면 혼자 걷는 것이 힘들어졌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조갑제는 어떠한 외압,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진실만을 추구하는 기자로서 모범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조갑제의 전문 영역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는 항공 전문 기자이기도 했다. 군 복무를 공군 관제병으로 마쳤기에 비행기와 항공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등 대형 항공 사고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 기사를 싣기도 했다. 앞의 대한항공 사고 나무위키 문서에 기재된 내용의 상당수는 사실 조갑제 기사의 월간조선 기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대한항공 보잉 747 조종석에 동승해 지구를 한바퀴 일주하고 난뒤 월간조선에 게재한 "점보 조종실 기행 2,000개의 계기 속에 갇힌 고독"이라는 르포 기사도 항덕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명문이다.

이후에 논조에 변화가 생겨서 스탠스가 보수, 반공주의 노선으로 전향된다. 이에 대해서 1987년 6월 민주항쟁,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지난 시점으로 우익 반공주의 성향으로 확 변했다는 설도 있으며, 1987년 양김 분열과 김영삼 정부를 거치면서 기대를 가졌던 민주화 세력의 엇나간 행보에 실망해서 생각이 바뀌었다는 추정도 있다. 여기에 관해 성공회대 역사학자 한홍구는 '조갑제가 안기부로부터 각종 많은 정보를 주고 받으면서 정보의 유혹에 넘어갔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람 속 마음을 들어가보지 않는 한 이 역시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스탠스의 변화는 홍준표와 비슷하다는 지적이 있다. 활동기 때 권력에 맞서고, 업계에서 전설로 불리었으나 전향했다는 점에서 그런듯하다.

조갑제에게 과거에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는데 왜 생각이 바뀌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자료들을 샅샅이 뒤지다가 보니까, 어느 순간 박정희라고 하는 인물에 대해서 매료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조갑제는 1991년부터 계속 월간조선의 편집장 자리에 있었고, 월간조선이 독립법인화 된 2001년부터는 편집장 겸 대표이사를 맡는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조갑제의 주장과 행동이 강경화, 극단화 됨에 따라, 조선일보는 부담을 느끼고, 송희영 논설위원을 필두로 조갑제를 비판하는 칼럼을 지면에 게재하는 등 그와 점점 거리를 두게 된다. 실제로 2004년 12월말에 실시된 인사이동에서 조갑제는 편집장 업무에서 물러나 사장직만 수행하게 되었고, 2005년 3월에 일어날 후술할 사건으로 사장자리도 불명예 퇴임했다.

결정적으로 2005년 조갑제의 친일보다 나쁜 건 친북 주장 이후 사회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아 논란이 커지자 조선일보는 그를 월간조선 대표에서 경질했고, 월간조선의 대표이사 자리에 조갑제의 극단성을 비판하던 이상철 기자를 앉혔다. 최소한 대중을 상대하는 언론으로 수익을 내야하는 하는 기업의 입장에서 대통령을 인격적으로 모독하거나 원색적인 비난을 하는 초극단주의적 성향의 관계자를 책임자로서 마냥 품고 갈 수는 없었던 셈.

또한 몽골징기스칸에 대한 관심이 높으며, 몽골 현지 취재도 여러 번 다녀온 경력이 있다. 월간조선 시절에 몽골 취재 기사를 올린 사례가 많으며, 이후 조갑제닷컴 등에도 징기스칸을 소재로 한 글을 자주 쓰고 있다.[14]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기 집권에 성공한 이후, 처음으로 인터뷰한 한국언론은 메이저 언론매체도 아니고 정식 언론매체도 아닌 조갑제 개인이었다.# 일본의 총리가 언론사 재직중인 기자도 아닌[15] 일개 민간인과 관저 집무실에서 공식적으로 시간을 내어 인터뷰를 갖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 당시 조갑제와 아베 신조 사이의 통역을 맡은 것은 극우인사 니시오카 츠토무(西岡力) 국제기독교대학 교수였다.[16]

최근에는 유튜브에 '조갑제 TV'라는 채널을 만들어 활동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Vlog 영상들을 올리는 중이다. 주로 예전부터 조선일보/월간조선을 구독해온 노인층 내지 이른바 '콘크리트 보수'들이 많이 본다.


4. 조갑제닷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조갑제닷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새누리당 공천 내홍에 대한 평가[편집]


2016년 20대 총선 과정에서 친박계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존영'이란 표현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조갑제는 친박계가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을 떨어트렸고 친박계가 개인 박근혜에 대한 충성이 아부로 비춰진다고 지적하면서, 진정으로 대통령을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은 없다고 비판했다.[17]

대통령직이라는 것은 프레지던트(president)가 아니고 프레지던시(presidency)이며,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대통령 사진을 거는 일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통령 개인을 중심에 두고 친박(親朴), 비박(非朴), 진박(眞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스스로 보수의 윤리가 없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특히 한국인들은 특유의 '저항적 정의감'을 갖고 있다면서 권력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갖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또한 당 정체성 위반을 이유로 유승민, 이재오 등 컷오프시킨 논란에 대해서도 공천관리위원회가 찍어내리기하는 것보다는 공천을 탈락시키고자 한다면 국민들을 설득하는 방법을 택해야 하며, 경선을 붙이든지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다 보니까 국민들한테는 정치 보복처럼 비춰진 것이라고 비판했다.

유승민 의원에 대해서는 새누리당의 정체성과 부합하지 않고 좌파영합주의라고 비판하면서도, 안보관과 국방문제, 중부담 - 중복지로의 복지강화, 단기적인 경기부양 정책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동조하였다. 조갑제는 유승민의 공천문제에 대해서 공관위가 당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유권자들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이 옳다고 밝혔다.


6.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논조[편집]


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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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 노태우 · 정호용 · 황영시 · 이희성 · 최세창 · 박준병 · 하나회 · 주영복 · 신군부 · 지만원 · 김대령 · 이주천 · 서석구 · 김진태 · 이종명 · 김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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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임을 위한 행진곡/논란 · 광주 폭격 시도 논란 · 전두환 손자 폭로 사건 (전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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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개입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광주사태 당시 시위대는 반정부적이었지만 친북적이진 않았다. 시위대가 간첩 같은 사람이 끼어 있다고 군 당국에 신고하기도 했었다.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가 늘 나왔다. 대한민국 세력은 진실 위에 정의를 세워야지 정의 위에 진실을 세우려 해선 안 된다. 신념보다 사실이 더 중요하다.

조갑제 《조갑제의 광주사태》, 조갑제닷컴 2013., 45쪽


"전두환 타도!"란 구호 뒤에는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가 따랐다. 시민들이 간첩으로 의심 가는 시위자를 붙들어 계엄당국에 넘겨주기도 했다. 광주사태의 기본이념은 반공·민주화였다."

조갑제 《조갑제의 광주사태》, 조갑제닷컴 2013., 195쪽

“대대규모 북한군의 광주개입” 주장은 믿을 수 없다! (조갑제닷컴)

의외일지 모르겠지만 지만원을 비롯한 극우 반공주의 진영이 어떻게든지 폄하하려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하면서 반공적 민주화 운동으로 높이 평가한다. 무엇보다 조갑제 본인이 당시 기자 신분으로 광주, 즉 생생한 현장에 있었고, 당시의 상황을 두 눈으로 생생하게 봤기 때문이다.[18]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를 경험했기에 부실공사를 철저하게 취재하여 당산철교의 조기 재시공을 이끌어낸 최일구와 더불어 현장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 사람이 확실히 알려준다.

이미 조갑제는 80년대부터 5.18 연고대생 북한간첩설을 강하게 부정했으며 월간조선에서도 이것만은 아니라고 계엄군의 무차별한 시민 학살이라며 계엄군의 총에 피투성이가 된 시신 사진들을 실으면서 강력하게 비판했다.[19]

파일:북괴는오판말라.jpg

조갑제가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잠입해 본인이 직접 찍은 사진으로 광주 시민들이 플래카드로 북괴는 오판말라![20]라고 외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조갑제가 5.18은 반공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21]

다만 그렇다고 조갑제가 5.18을 무작정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5.18 당시 계엄군이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일에 대해서 조갑제는 자기가 보지 못했다며, 좌파 성향의 영화나 드라마들이 지나치게 과장했다며 부정적으로 보는데 계엄군의 광주 시민 학살은 분명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판명이 난 일이다.


6.1. 문제점[편집]


조갑제는 5월 23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 머물렀는데, 그 때는 공수부대가 광주 외곽으로 철수한 상황이었다. 즉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벌어졌던 공수부대의 만행을 잘 모른채 당시 시민들과 계엄군들의 이야기만 주로 듣고 '시위대가 괜히 과격'한 것처럼 보이거나 양비론이 나올 수 있다.

김문수, 조갑제 할 말은 한다-나는 일류국가에 목마르다 에선 화려한 휴가에 화를 내면서 (시민들 무장 후에) "학살이라 할 수 없다"고 하며 "서로 살기 위해 싸웠다"고 한다. 또 그는 "광주사태는 발포명령자가 누구인지 여지껏 밝혀지지 않았다. 차량을 탈취한 시위대가 전남도청 앞을 지키고 있던 군인 두 명을 깔아뭉갰고 한 명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장교가 한 클립 정도의 M-16 실탄을 가지고있었는데, 격분한 나머지 차량을 향해서 사격한 것이 최초의 발포. 이후 경찰서 무기고를 털어서 무장한 시위대가 반격에 나서면서 상호 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다만 훈련된 군인이 유리하기에 시위대가 더 많이 희생된 것이다." 라고 말했다. 화려한 휴가에서처럼 전남도청 앞에서 시민을 향해 일제사격하는 장면은 거짓이라고 했다. 또한 영화 시작 부분에 '이 영화는 사실을 기반으로 만들어 졌습니다.'는 문구가 있는 만큼 관람자들이 전남도청 앞 일제사격이 실제 있었던 일로 생각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시민들에 대한 일제사격, 조준사격이 실제로 있었더라면 당연히 발포를 명령한 지휘관이 있어야 되는데 지금까지 아무리 조사를 해도 발포 명령자가 없다고 이야기하며 발포 명령자가 있었으면 진작에 사형에 처해졌을 거라고 말했다. 구술은 실증이 될 수 없고 오히려 과장되거나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거.[22]

또한 조갑제는 화려한 휴가가 과장됐다고 말한다. 그런데 조갑제는 5월 23일부터 현장에 있던 사람이라 5월 18일~19일에 있었던 공수부대의 잔인한 만행과 21일 도청 앞 집단발포 양상을 직접 보지는 못한 사람이다. 이건 조갑제 본인이 본 게 아닌, 시민 측과 계엄군 측의 증언들을 토대로 파악한 광경을 전체로 잘못된 일반화한 것. 무엇보대도 광주는 상술한 것과 같이 조갑제만 간 게 아니다. 중앙일보 장재열 기자, 한국일보 조성호 기자, 동아일보 김충근 기자,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 독일인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 등 조갑제보다 먼저 광주상황을 목격했던 기자들은 은근히 많으며, 특히 5월 18일부터 광주 상황을 예의주시한 김영택 기자는 오히려 화려한 휴가가 실제보다 못하다고 말하며 광주 학살의 참혹함을 전했다.


7. 조갑제의 시각[편집]


오늘날 조갑제는 대체적인 논조로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이승만박정희에 대해서는 강하게 옹호하는 논조를 가졌고, 김대중노무현, 문재인은 극렬히 비판한다. 놀라운 것은 그가 언론인으로써 초창기 활동했을 당시 썼던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이랑 <박정희> 전기 시리즈(1992년 까치 출판사에서 발간한 책)는 같은 사람이 썼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다른 내용이라는 것이다.[23] 김지하와 마찬가지로 6월 항쟁 이후 논조가 바뀐 케이스 중 한 명이다. 그의 확 틀어져버린 논조에 대해 '진짜 조갑제는 남산에 끌려가서 죽고, 페이스오프된 대역이 조갑제라는 이름을 쓴다' '고문 후유증으로 스톡홀름 신드롬에 걸린 게 아니냐'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사실 이래저래 엇나가거나 극단적인 발언을 하여 욕을 먹기도 하는 등 여러 면에서 문제가 있긴 하지만, 2010년 이후부터 규모가 확 커져버린 넷우익에 비하면 확실한 논조가 있으며, 자료수집이나 역사, 정치, 경제, 사회, 항공 분야 등 여러 방면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승만이나 박정희를 강하게 옹호하는 점이 그와 정치성향에서 반대에 있는 사람들을 거북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비판하는데 있어 조금 신중해야 하는 것이, 위에도 언급했듯 박정희 정권 시절에 누구보다도 날선 비판을 했던 인물이 조갑제다. 유신정권에 아부하며 이권을 챙기던 지식인이나 언론도 많았던 점을 고려하면 분명 큰 점수를 줄 수 있는 부분이고 또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오히려 스탠스를 옹호 쪽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적어도 그것이 시류 편승적이거나 기회주의적 발로에서 기인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이다. [24]

그런 이유로, 다른 강성 보수 지식인들과 달리 조갑제에 대한 반대 진영의 평가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강성보수 인사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여타 극우인사들과는 달리 반대 진영에서도 인정하고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다.[25] 그도 그럴 것이, 반대 진영에서 군사정권시절을 비판하는 근거로 드는 역사적 비화들도 알고 보면 조갑제가 치밀한 취재로 발굴해낸 것이 많다.[26]

또 진보측의 의견을 옹호하거나 사실관계를 인정해주는 경우,[27] 다른 극우 인사들이 제기한 음모론들[28]이 사실이 아니라며 부정하는 경우가 많기에 진보 측에서는 보수논객 조갑제조차 ~는 인정했다, 라는 식으로 자주 인용되고 일베 등 극우 사이트에서는 '결정적일 때 좌파 편 들려고 보수 코스프레하는 프락치' 아니면 빨갱이, 종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기도 한다.[29]

이 사람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도 잘한 것은 칭찬하고,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잘못한 것은 비판하자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젊은 시절 박정희를 강경하게 비판하다가 90년대 이후 찬양으로 돌아선 것도 그냥 자기 소신에 충실한 것 뿐이다.[30]

우파 언론인의 표상이긴 하지만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글만큼은 자기가 직접 목숨 걸고 취재를 다녀와서 쓴 글이기에 이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인정받는 수준이다. 또한 5.18과 관련된 많은 역사자료를 내놓기도 하였다. 이 때문인지 진보측에서도 비슷한 논조[31]지만원에 비해 조갑제는 크게 까이지 않는 편이다.[32]

다만 과거와는 달리 2020년대 들어서는 노무현에 대한 평가가 입체적으로 변하는 모습이 보인다.

2022년 2월 5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 조갑제 TV에서 공개한 윤석열, 제주 강정마을에서 노무현 언급하며 ‘울컥’ 이란 영상을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당시 지지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주해군기지를 건설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노무현이 김대중의 친북 노선을 이어받은 것은 실책이었으나, 제주해군기지 건설은 중국의 위협에 대비한 현명한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노무현이 한미 FTA를 추진한 것도 국익을 위해 옳은 결정이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이러한 정책에 반발하여 돌아선 지지자들이 노무현을 욕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참고로 이 영상은 윤석열의 안보 전략을 높이 평가하는 내용으로,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결정한 노무현의 고뇌를 언급한 것은 과거 반공 일변도에서 벗어난 아주 스마트한 전략이라고 극찬했다.

그 외에도, 노무현을 긍정적인 맥락에서 언급한 적이 또 있는데,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이 정몽준을 설득하기 위해 정몽준 자택 앞에서 기다린 일화를 언급하면서, 윤석열은 노무현의 이런 자세를 본받아 안철수를 설득하여 단일화를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는 윤석열이 노무현을 존경한다는 사실을 알고 윤석열을 설득하기 위해 내놓은 메시지이긴 하지만, 여기서 노무현의 우직한 면을 긍정적으로 봄을 알 수 있다.

사실, 조갑제는 북한과 관련하여 논조가 강경할 뿐이지,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전직 대통령들도 예의를 갖춰 언급한다.[33] 그러한 점에서 흑백논리로 일관하거나 자극적인 언어를 쓰는 다른 정치 유튜버들과는 다른 노선을 걷는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조갑제의 기준이 어디까지나 국익이라는 점이다. 후술하겠지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 당시 북한에서 좋아한 기자가 조갑제였는데, 이는 조갑제가 목숨 걸고 취재하여 밝혀낸 사실들을 북한에서 정치적으로 악용하여 공산독재를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권 당시 북한에서 살포한 삐라에 집값, 취업난 등으로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젊은이들이 많다는 내용이 있는 걸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즉 남한도 어차피 지상낙원이 아니니, 탈북을 하거나 체제를 바꿀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조갑제의 기사를 악용한 것이다.

애초에 조갑제는 친북도 아니고 군사정권 시절부터 정일관되게 반공적 입장을 지켜 왔으니, 북한 좋으라고 쓴 기사가 아니라는 점을 강변하고 싶었을 것이고,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로서, 적어도 박정희전두환김일성, 김정일보다 훨씬 나은 지도자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조갑제가 기자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심지어 김일성보다 극악무도한 독재자인 폴 포트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34]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집권하던 때였으며, 민주화가 이루어진것은 6월 항쟁 이후인 80년대 후반이고 선진국에 진입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인 만큼 그 이후의 현대 한국인의 관점과 조갑제가 젊은 시절이었을 당시의 관점은 잣대가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주사파가 독재 정권의 실정을 강조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조갑제의 박정희 쉴드는 갑자기 사상이 바뀌었다기보다는 자신이 쓴 기사가 악용되어 사회가 혼란해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35]

더군다나, 냉전 시대에는 미국이 공산주의 억제 전략을 위해 자유 진영의 독재를 어느 정도는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조갑제의 시각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조갑제닷컴을 보면 냉전시대 외교 비사를 담은 기밀 해제 문서를 번역한 글이 꾸준히 올라오는데, 미국이 박정희전두환의 독재를 묵인한 이유가 나와 있다.

이러한 문서의 내용을 소개하는 의도는 주사파들이 주장하듯이, 미국의 패권주의가 절대 아니며, 독재를 비판하는 미국의 엘리트층마저도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해야 했음을 알리기 위함이다.

한 마디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즉 국익을 위해서는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주의적인 시각이 조갑제의 지론인데, 이것이 OECD 국가 대열에 올라선 지금의 눈높이로 보면, 시대에 안 맞는 부분도 있고, 개인의 행복 존중을 우선시하는 젊은 세대의 관점과 맞지 않기 때문에, 이래저래 엇나가는 부분이 생긴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조갑제가 걸어온 길을 보면 그는 국민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임은 분명하다. 앞서 서술된 바처럼, 그는 소신 보도를 하다 고문을 당했던 사람임에도, 정권이 북한 정권을 잘 방어했다는 이유로 군사독재가 민주주의를 지킨 필요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결과가 좋았기에 가능한 평가이다.


7.1. 진영 논리 거부[편집]


2022년 8월,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자신이 왜 진영 논리를 거부했는지를 강변했다. 링크

앞서 이미 설명된 내용이지만, 반대 진영의 의견에 동의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은 이유가 이 영상으로 설명된다.

독재 정권을 강경하게 비판했다가 박정희 찬양으로 돌아선 것도, 그래도 잘한 건 인정해야 한다는 그의 기본 신조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보통 박정희에 비판적인 진영에서는 박정희의 업적도 부정하려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박근혜 탄핵 이후에는 보수 유튜버들이 줄기 차게 밀고 있는 부정선거 음모론도 강력 비판한다. 그런 맥락에서 그가 강하게 비판하는 인물이 황교안이다. 조갑제는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수를 궤멸시키려는 반대 세력의 프락치라 보고 있으며, 미국 대선 부정선거 음모론도 매우 비판적이다.[36] 링크


7.2. 반북[편집]


친일보다 더 나쁜 건 친북


그가 저술한 <종북백과사전>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북한 주민들을 해방시키는 건 우리의 임무다. 그게 싫으면 이민가라' Ergo Decedo 참고


7.3. 자위적 핵무장론[편집]


적이 핵무장 했다면 살기 위해서라도 핵 필요해 핵무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핵무기는 비대칭전력이기에 이를 해결하려면 북한이 핵무장을 포기하거나 한국이 핵무장을 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북한의 행보를 생각해 보면 북한이 핵무장을 포기할 가능성은 낮다. 다만 북한이 핵무장해서 제제를 받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한국이 핵무장을 선언할 경우 국제사회의 제제를 받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


7.4. 미국 의존적 한미동맹의 지양[편집]


이스라엘과의 비교를 들면서 북한과의 비교를 들면서 남북이 일대일로 싸워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급진적인 반미주의적 시각은 당연히 절대 아니고[* 조갑제가 말하는 한미동맹 해체는 한국의 미국 의존적인 동맹을 지양하고 서로 협력하되 자주국방을 이룩하자는 의미이지, 기존의 우호적 우방관계까지 청산하자는 뜻이 아니다!], 점진적으로 우리 국방을 키워서 장기적으로는 한미 동맹이 해체되더라도 독자적으로 북한군를 비롯한 공산진영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에 가깝다.


7.5. 6.25 전쟁에 대한 시각[편집]


* 정규재: (중략) 6.25 전쟁은 어떻게 보십니까? 6.25 전쟁 자체는 고통의 과정이었지만, 그 이후 근대화로 새 출발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최근 들었습니다.

* 조갑제: 6.25는 재앙으로 위장한 축복이었어요. 6.25 없었으면 1960년대 초에 한국은 월남 식으로 공산화됐을 겁니다. 6.25가 났을 때 한국은 출구가 없었어요. 한미 동맹도 없었고, 주한 미군도 나갔고, 국회에는 좌익들이 들어와서 여러가지 분탕질을 하고 있었고, 이미 산악 지역에는 북한 게릴라들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중략) 저는 6.25 없었으면 한국은 망했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37]

역사학계에선 16세기 조선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선조 시기 사림파가 기존 인식과 달리 전혀 개혁적이지 않었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다. 기묘사림 이후 제대로 개혁을 부르짖은 건 이이 정도밖에 없던 상황에서 임진왜란이란 초유의 전란 덕분에 대동법 등 기존에 받아들여지지 않던 개혁과 재분배 정책들이 시행되었다는 시각이 있는데 이것과 비슷한 시각이다. 국토가 폐허가 되고 수많은 사람이 죽은 비극이지만 가만 있었으면 내부 혼란과 체제 모순이 걷잡을 수 없어졌을 대한민국이 전쟁으로 기사회생에 성공했다는 것. 조갑제는 다른 글에서 6.25로 인해서 남한이 사라질 뻔했다고 하는 주장한 바도 있으며, 6.25 전쟁을 한국과 자유진영의 승리로 공산군의 남침을 저지시킨 것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이 발언이 김일성의 남침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7.6. 박근혜 탄핵 관련[편집]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반대 집회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비록 최순실 게이트 사태가 국민들의 분노를 유발하는 사건이기는 하나 국가의 기본과 정체성을 뒤흔들 정도까진 아니니 임기 5년까지는 보장하는 게 맞고, 부친인 박정희의 딸이니 봐 주는 게 낫지 않냐는 입장이며 탄핵 반대 집회에도 연설을 위해 참여했다. 그러면서도 박근혜 현직 대통령을 보좌하던 보수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논조도 공존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박근혜 대통령의 파면과 관련하여 12가지의 이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주간조선에 기고한 글에서 조갑제는 박정희 탄신 100주년에 일어난 박근혜의 추락 앞에서 그리스 비극을 떠올렸다며 "그리스 비극은 못 되더라도 국민적 연민의 부족, 이 점이 한국식 비극의 핵심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버지-어머니-딸이 대를 이어서 동족의 손으로 요절이 나는데 외국 언론이 동정론을 펴는 게 그래서 더 인상적이다. 한국인은 원래 이토록 잔인한 민족인가? 과연 영웅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가?"[38][39]라고 했는데,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문학동네》 2017년 여름호에서 이런 조갑제의 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받아쳤다.

저 질문에 답을 해 주기로 하자. 한국인은 헌법을 유린한 범죄자에게 이 정도로 '잔인'할 만큼의 정치적 이성은 가지고 있다고. 또 현대사를 수십 년 퇴행시키려는 것이 아니라면 오늘날의 민주공화정에 파시스트 '영웅' 따위는 필요없다고. 그리고 '국민적 연민'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국가가 방치해서 바닷속에 가라앉은 304명을 위한 것이지, 그들이 죽어가는 동안 행방불명 상태였고 이후에도 유가족을 철저하게 외면한 냉혈한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40]

신형철 「굿바이 -2017년 여름호를 펴내며-」, 《문학동네》제24권 제2호(2017년 여름호), 문학동네, 2017, 3~4쪽


그뿐만 아니라 조갑제는 월간조선 2017년 4월호에서도 탄핵을 두고 내전이나 다를 것 없다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41]

눈 감고 귀 막고 탄핵을 반대하기만 하는 다른 보수 성향 인물들과는 다르게, 이번 사건이 국민들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한다는 점과 비판 없는 보수들이 박 대통령을 파멸로 몰고 갔다고 비판하는 점이 눈여겨볼 만하다. (기타: #, #)

그리고 탄핵 이후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과정에서 탄핵 찬반을 떠나서 북한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은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안철수를 지지했고, 탄핵 사태로 보수가 형해화된 상태에서 '중도' 성향의 안철수가 대통령에 당선하게 된다면 절반의 성공 내지는 선방을 한 셈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2017년 대선 뒤에도 보수통합, 우파통합을 주창했는데 결국에는 박근혜 탄핵 사태가 이를 꼬이게 만들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리고 "보수가 살아나려면 음모론 퍼트리지 말자."라고 했는데#, 정작 아이러니하게도 조갑제 본인은 김대중과 노무현이 김정일과 결탁했다는 식의 음모론을 진지하게 주장한 책들을 썼다.(...)#, #


7.7. 3김에 대한 평가[편집]


유튜브 조갑제 TV - 내가 겪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 김대중과는 10회 이상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짧게하면 2시간, 길게 하면 8시간 이상 했다고 한다. 1993년 경에 김대중과 7시간 이상 인터뷰 할 당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을 김대중 측에게 검토 요청하여 김대중이 직접 글을 고쳐서 보내왔는데, 그의 문장력이 정확하고 달필이었다고 회고했다. # 이념적으로 자신과는 다르지만, 가장 부지런하고 가장 성실하고 가장 전략적인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했다. 그의 흠으로는 독선과 사물을 바라볼 때, 단편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점을 비판했다.[42]

  • 김영삼에 대해서는 타이밍을 잘 잡는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강단과 기개가 있었고, 기자들의 질문을 잘 받아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 속에 한 번 각인이 된 것은 쉽게 바꾸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대통령 집권 후에 원초적 민족주의에 빠진 것은 그의 큰 불행이었다고 했다.[43] 가장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정치인이며, 약속을 잡아 시간에 맞춰가면 먼저 기다리고 있더라고 언급했다.

  • 김종필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와 만나게 되면 정치뿐만 아니라, 예술, 영화, 문화, 자신이 만난 인물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는데, 박학다식하고 만남이 기다려지는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종합적인 능력과 소양이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했다.


7.8. 일본에 대한 관점[편집]


2005년 '친일보다 나쁜 것은 친북', 2009년 '친일은 기본적으로 생존의 수단'[44]이란 발언을 남긴 것이 친일 논란을 낳은 바가 있지만, 이를 감안하지 않아도 구로다 가쓰히로를 위시한 일본 극우 인사들과 친하게 지내며 이들과 일본의 극우 신문의 자료들을 자신의 사이트에 올려놓칠 않나, 구로다 가쓰히로와 친하게 지내면서 이 인간의 망언에 대해선 별로 터치를 안하거나 오히려 두둔하는 등으로 빈축을 산다던가,[45] 사이트에 친일성 글들이 올라와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한일 무역 분쟁에서 일본편을 드는 주장을 펼치는 등 빼도박도 못하는 친일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에 대해서도 '마지막 사무라이'라며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

다만 적어도 지만원처럼 일제강점기를 미화하거나 독립운동가를 폄하하는 일은 없다. 2010년 출판한 '조선총독부 최후의 인터뷰'에서 일제강점기에 대해 '근대화를 강요당한 치욕의 시대'라고 언급하며 식민지 근대화론과는 완전히 선을 긋고 있으며,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 때에도 홍범도를 제외한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흉상은 왜 철거하냐고 비판하며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칭송하기도 했다.# 덤으로 친일 경찰들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것도 "반공반일을 국시로 삼다시피한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한 사람을 장관으로 기용할 리가 없었다. 다만, 친일 경찰 출신들을 중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수사하도록 했는데, 이들이 정치사찰까지 하는 바람에 독립운동가 출신들을 조사하는 사태가 일어나곤 했다."라며 친일 경찰 출신 인사들의 독립운동가 탄압을 불상사처럼 묘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사실 '친일보다 나쁜 것은 친북 발언'도 친일 이라기보다는 골수 반북에 더 가까운 뉘앙스이다.

그러나 조갑제는 1987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런주장과는 전혀 배치되는 주장을 했던 사람으로,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이라는 책에서 그는 친일파들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부정적 영향들을 끼친 주범들로 반드시 단죄해야 한다'는 논조를 보이고 이승만이 일본경찰에서 복무하던 친일 경찰을 가지고 한국경찰을 만들며 일본경찰의 고문과 조작 기술을 전수시켰기에 군사정권 시절에 고문과 조작이 횡행했다고 본 게 조갑제였다.

그러나 이런 논조의 변화도 이해하지 못할 것만은 아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소수의 주사파 등 일부 운동권을 제외하고는 사회 전반적으로 반공 분위기가 강했으나 2000 남북정상회담 이후 2005년에 이르면 사회 전반적으로 공공연하게 친북 성향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물론 친일도 옹호되어선 안되지만, 어쨌든 일제강점기 시대는 끝났고, 일본에서도 극우정당, 극우 세력들 이외에는 일제를 옹호하고 한국을 위협하려는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다만은 사실 극우들이 정권잡고 극우 유권자들이 넘쳐나는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아베노믹스한일 무역 분쟁으로 피해를 입은 바도 있고해서 결코 우호적이라고만은 볼수 없다, 그냥 조갑제가 친일 성향을 보여서 저러는 것. 어쨋든 친일세력이 망신을 주고 만행을 저질르긴 했어도 당장은 국가안보에 해가 되는 존재는 아니지만, 북한정권이 여전히 대남적화전략을 가동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친북세력은 '현존하는 안보 위협'이라는 위기의식은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현재는 북한에 대한 인식이 조금 바뀌었을 수는 있어도, 위협이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아직 경계단계인건 사실이다. 더불어 일부 극우세력들은 주사파들에 의해 종북주의자들이 늘어난다고 하지만, 사실 북한과는 동북아 평화를 위해 협력하는 상황이지, 아직 북한을 동맹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증하지 않고, 현재도 주의~경계단계인 적국인 상태. 더불어 친일이나 친북이나 이를 넘어선 종북, 종일의 경우 타국(특히 적국)에 충성을 하는 건 좋다고 절대 할 수 없다.


7.9. 부림사건, 영화 변호인에 대한 비판[편집]


2022년 6월 14일에 올라온 이 영상에서 조갑제는 권양숙 여사를 방문한 김건희 여사의 발언을 비판하면서 부림사건은 공산주의 운동이며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변호인은 선동 영화라고 비판한다. 또한 그 근거로 보수 단체 국민행동본부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부림사건은 대법원에서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확정 판결을 내린 사건이라고 단언했다.링크

하지만 부림사건은 해당 문서에도 언급되듯이, 결국 2014년에 사건 관련자 5인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한 무죄 판결이 확정되었다.링크 조갑제는 김건희가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았다고 비판하였지만, 어쨌든 대법원에서 무죄로 최종 결론을 낸 사건이므로, 조갑제의 발언은 결국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부정한 것이다.

그가 인용한 국민행동본부의 발언은 2014년 이전에 나온 것으로, 결국은 사법부에 의해 뒤집혔다. 따라서, 김건희가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권양숙을 방문한 것이라면, 조갑제의 비판은 설득력을 잃는다.

물론, 대법원의 최종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자유이나, 사건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공산주의 운동이란 결론이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7.10. 매카시즘에 대한 시각[편집]


강력한 반공 논조로 인해 의외라 생각될지 모르지만, 매카시즘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반대한다. 이는 최장집 교수 사상 검증 사건 때 보인 태도에서 드러난다. 당시 월간조선에 몸담고 있던 조갑제는 섣부르게 남을 공격해선 안 된다며, 최장집 교수를 김일성 옹호자로 규정하는 기사를 막으려 했었다. 하지만 결국 문제의 기사가 나가 버렸고,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기성 언론의 신뢰성이 급하락하여 강준만의 안티조선 운동의 서문을 여는 등 조중동이 싸잡혀 찌라시로 몰리게 되었다.


7.11. 박원순의 자녀 병역비리 의혹[편집]


의외라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박원순의 자녀 박주신의 병역비리 의혹에 대해서 명백히 허위사실이라고 반박했다. #1 #2

2015년 10월 9일 조갑제는 박주신 병역비리 의혹에 대해 '마녀사냥'이라고 평가하며 "개인에 대한 다중의 증거 없는, 광기 어린 공격은 문명국가, 법치국가,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행태이다. (중략) 이는 형사피고인이라도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하고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정신에도 위배된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박주신씨는 별개의 인격체인데도 그 어떤 범죄사실도 드러난 것이 없는 박주신씨를 공격하면서 아버지를 끌어들이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인 '개인의 책임과 의무'를 무너뜨리는 비겁한 행위"라며 "박원순 시장을 미워하는 마음이 아들에게까지 전이(轉移)되고 있는 현상은 반(反)문명적이고 반민주적이며 건강한 정신상태가 아니다"라고 언급하며 이 의혹을 반박했다. #


7.12. 군사문화 찬양[편집]


조갑제닷컴에서 "군사문화의 전통이 강한 곳에서만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고 있다."는 글을 올릴만큼, 군사 문화를 열렬히 찬양한다.# 심지어 조갑제가 박정희를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찬양하는 이유도 그가 문약에 빠진 한국 사회에 군사 문화를 심어주었다는 것 때문일 정도다. 다만, 그런 식의 논리라면 "북한은 남한보다 군사문화의 전통이 강한데 왜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에 답을 할 수가 없다.

또한 2003년 개봉한 영화 황산벌을 두고 "한국사의 가장 감동적 장면을 파괴한 非국민적, 反역사적 행태", "자기 역사의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부분을 짓밟고 이로써 돈을 벌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견제하지 못하고 나무라지 못하는 나라는 자멸하기 쉽다"라며 맹렬히 비난했다.#[46] 월간 조선에서도 이런 논조로 긴 글로 영화를 비난했지만 되려 이걸 보고 황산벌에 흥미가 생겨 극장에서 보았다고 조갑제 닷컴에서 황산벌 홍보 잘해줬다고 비아냥거리는 글도 올라오곤 했다.[47]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자 조갑제 닷컴에서 영상을 올려 이재명이 대통령되면 우크라이나처럼 된다느니 윤석열을 뽑아 군사적인 강국으로 될수 있다느니 찬양하고 있지만 군대도 면제이고[48] 사드 추가 배치 공약만 내세운 윤석열이 군사적 강국을 만들기 위해 뭐라도 할게 있냐는 일부 보수 지지자들의 반론도 있다. 무엇보다 윤석열을 군사적 강국으로 이끌 인재라고 너무 억지로 연결하고 주장하고 옹호하는 느낌이 강하다.


7.13. 한글 전용 혐오와 한자 찬양[편집]


2020년 총선 패배의 원인을 두고 "한자 포기가 근본 원인"이라는 유튜브 방송을 올렸으며#, "한글 전용을 저지하여야 선진화가 이뤄진다. 좌파득세와 한글전용은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두 가지 장애물이다. 좌파가 한글 전용을 확산시키고, 한글 전용이 좌파가 득세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었다."고 말할 만큼 한글 전용을 혐오하고 한자를 찬양한다.#

그런데 저런 조갑제의 주장대로라면, 한글 전용 정책을 추진한 박정희야말로 좌파이거나 좌파가 득세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든 원흉이 되어 버린다(...) 실제로 박정희는 "1970년 1월 1일부터 행정·입법·사법3부의 모든 문서뿐 아니라 민원서류도 한글을 전용케 하고 국내에서 한자가 든 민원 및 모든 공용서류는 접수치 않을 것이며 이날부터 각급학교 교과서에서 한자를 없애도록 하라."고 내각에 지시했다. 덧붙여 박정희는 "한글이 제정반포된 지 5백20년이 넘는데도 아직 무어라고 핑계를 붙여 한글 전용을 반대하고 이의 실천을 주저하는 것은 한글을 언문이라 하고 한자를 진서라 하는 비주체적 전근대적 사고방식이며 한문을 모르는 대다수 국민을 문화로부터 멀리 하려는 행위."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고 조갑제가 한자어만을 선호하는 성향이라고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게도 두 딸의 이름을 모두 순우리말로 지었다. 링크

여기에는 복잡한 시대적 배경과 맥락이 있다. 박정희는 철저히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한글 전용 정책을 추진한 것이므로, 박정희의 실용주의적 측면을 높이 평가하는 조갑제로서는 굳이 박정희의 한글 전용 정책을 깔 이유가 없다.[49]

반면 조갑제가 비판한 좌파 세력은 조갑제의 시각으로는 실용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북한의 어문정책과 발을 맞추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50]

실제로 순우리말을 권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근거도 없이 일본어 잔재설을 퍼트리는 사람들도 섞여 있고 그중 일부가 반미 운동권인 것도 사실이다.[51] 어찌되었든 간에, 현재 언중의 관점으로 보면, 극단적으로 한자를 배척하는 순우리말 운동가들의 관점은 실용주의적 관점과는 한참 거리가 있으므로, 현실 속에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52] 게다가 그들이 배척해 버린 한자어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결국 순우리말이 아니라 영어였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가 추구한 공문서 한글화 정책과는 아예 결이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박정희의 공문서 한글화 정책은 현재는 누구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순우리말 운동가들이 제안한 단어는 그들만의 언어로 머물러 버렸기 때문이다.[53]

즉 조갑제에게는 이런 정책을 추진하는 주체가 누구냐가 중요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고서는 자녀들의 이름을 모두 순우리말로 지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54]

다만, 국수주의적인 좌파 진영이 억지로 제기하는 순우리말 정책의 문제점과는 별개로, 한글 전용이 좌파를 득세하게 하였다는 것은 논리 비약이다

물론, 한자 교육을 강화하면 어휘력이 풍부해질 수는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표의문자한자를 쓰는 국가는 얼마 되지 않는다. 더구나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은 한자를 아예 쓰지 않는다. 물론 서구권 지식인 중에 라틴어 계열 단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있으나, 문자 체계는 자국어와 크게 다르지 않은 표음문자이다. 따라서 조갑제의 주장처럼 한글로 적은 한자어가 발음 기호일 뿐이라면, 서구권이 사용하는 알파벳도 어차피 발음기호일 뿐이다.

물론, 일본의 경우처럼 동음이의어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자를 같이 쓰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문제는 한자도 모양이 비슷한 글자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일례로 배우 이보희 씨가 1986년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서 김재박(金在) 선수를 김재전(金在)으로 잘못 읽었던 사례도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차라리 한글로만 적었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한자는 획수가 많기 때문에 모양이 비슷한 글자를 가려내기가 더욱 어렵다. 괜히 중국이 간체자를 쓰는 게 아니다. 즉, 한자의 발상지에서도 한자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는 얘기다.

다만, 무운을 빈다는 말을 두고 논란이 벌어진 것처럼, 최근에는 한자어 지식이 너무 부족하여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있지만, 한글 전용을 하면서도 한자 교육을 병행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국민들의 한자어 지식이 떨어지는 것은 한글 전용만이 원인이 아니라, 떨어지는 독서율, 잘못된 교육 방식 등 다양한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55]

조갑제의 주장의 또 다른 문제점은 2020년 무렵부터 인터넷에서 불거지는 만물중국기원설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동북공정처럼 고대사 문제로만 국한되었으나, 지금은 김치도 자기네 전통에서 기원했으며, 한국이 이를 훔쳐가 한국 전통 문화로 날조했다고 우기는 상황이다.

중국의 만물중국기원설은 인류 공통의 요소마저도 중국의 고유 문화로 침소봉대하는 것인데, 만약 조갑제의 주장처럼 국한문 혼용을 했었다면, 중국이 이를 악용할 것이 뻔한 상황이다.

물론, 운동권 세력의 국수주의적 언어관은 경계해야 마땅하지만, 이에 대한 과한 비판이 오히려 그가 혐오하는 중국의 국수주의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는 것도 간과해선 안 될 문제다.


7.14. 신라에 대한 찬양[편집]


대한민국신라에 비유하면서 신라를 본받아서 통일해야 한다는 주장을 자주 한다. 삼국 중에 신라를 정통으로 놓고 대한민국이 신라로부터 정통성이 내려왔다고 주장한다. #1, #2 비슷한 맥락에서 김춘추도 매우 좋아한다. # 이승만, 박정희, 김춘추, 문무왕을 민족사의 4대 위인으로 꼽는다.


7.15. 국정교과서 찬성[편집]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한 것을 박근혜 정권의 잘한 정책으로 꼽는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국정교과서를 쓰는 곳은 희귀하며 그중에는 조갑제가 비판하는 북한도 있다.링크 애초에 국정교과서가 비판받은 가장 큰 이유가 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는 대한민국을 제외하면 국정교과서를 쓰는 곳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북한을 제외하면 국정 교과서를 쓰는 곳은 방글라데시를 비롯한 일부 이슬람권 국가, 아이슬란드[56] 뿐이다.

또한 일종의 독점이란 점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시장 경제를 부정한다는 점도 문제다. 물론 검인정 교과서도 엔하위키를 출처로 표기하는 등링크, 부실 검정 문제가 심각했지만, 이 경우는 그래도 일부 출판사의 문제라서 다른 교과서로 대체라도 할 수 있지만, 국정교과서는 만에 하나 실수라도 있으면 대안이 없다는 게 문제다.

따라서, 처음부터 교과서 검정을 철저히 해서 부실 교과서를 막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나라에서 한 종류만 지정해야만 이러한 문제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굳이 공권력을 동원할 필요 없이, 문제가 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자연히 도태시키는 방법으로 대처할 수도 있다. 이는 일본의 사례가 좋은 예가 될 수 있는데, 과거 문제가 되었던 새역모의 극우 역사교과서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채택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극우나 친북 역사 교과서도 문제를 공론화하고 채택하지 않는 방법으로 대처할 수 있다.

게다가 어차피 수능에서는 공통적인 내용을 출제해야 하므로, 문제를 출제할 때 팩트 위주로만 출제한다면, 학교 수업도 자연히 그러한 방향을 따르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정권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것인데, 반대로 좌파 정권이 들어선다면, 오히려 좌파 정권에서 국정교과서를 악용할 가능성이 높다.[57]


7.16. 예술관[편집]


예술에는 국경이 없지만 예술인에게는 국경이 있다라고 말하며, 의외로 작품 자체를 비판하는 경우는 많지 않으나, 예술가 본인의 행적이 석연치 않은 경우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비한다. 대표적인 경우로 윤이상, 이응노의 부인 박인경, 피카소에 대한 비판이 있다.

윤이상의 경우, 아무래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음악가라는 위상 때문인지 음악 세계 자체를 비판하는 발언은 하지 않으나, 동백림 사건 이후 친북 행적에 대해서는 비판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김일성 찬양 발언은 문서로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58]

이응노 화백의 부인 박인경의 경우는 윤정희 백건우 부부의 납치에 가담한 인물로 본인도 화가이다. 문제는 이런 사건에 연루된 인물임에도 전혀 처벌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작 남편인 이응노는 비록 누명이긴 하지만 간첩 혐의로 처벌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미스테리한 부분이다. 이러한 이유로 조갑제박인경을 비판한다. 박인경은 남편 이응노 화백의 작품 세계를 기린다는 이유로 자유롭게 한국을 왕래하는데, 왜 범죄 혐의자가 자유롭게 대한민국을 드나들게 방치하느냐는 것이다.

또한 윤정희가 별세하자, 왜 언론에서는 박인경이 가담한 윤정희 백건우 부부 납치 사건을 전혀 언급하지 않느냐며 언론계의 집단 건망증을 비판했다.[59]

피카소에 대해서는 한국에서의 학살 국내 전시를 비판했다. 다만, 해당 문서에도 나오듯이, 이것이 북한에서 미군에 의한 학살이라 주장하는 신천·재령군 봉기를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물론, 조갑제가 지적했듯이, 이 작품이 좌익 세력의 미국 악마화에 악용된 것은 사실이나, 애초 작품 자체에 학살의 주체가 누구인지가 불분명하다. 그런 이유로 정작 공산주의 진영에서도 혹평받기도 했다.

여담으로, 예술가의 작품이 재테크 활동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예술가의 친북 의혹은 북한 정권이 멸망하지 않는 한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조갑제는 이 기사에서 미국이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를 뉴욕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돌려준 일을 언급한다. 기사를 보면 '공산주의자'로서 미국에 입국하려는 피카소를 미국은 막았으나, 작품 자체는 뉴욕의 일류 미술관에서 전시하다가 본인에게 돌려주었다는 내용이다. 게르니카 문서에도 나오듯, 애초 이 작품은 나치를 비판하는 것이므로 미국이 이 작품 자체를 금지할 명분은 없다. 즉, 작품에 대해서는 정당하게 평가하되, 예술가가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행동을 한 경우에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취지로 볼 수 있겠다.

조갑제는 기사 말미에, 한국에서의 학살을 전시하는 것 자체는 좋으나, 적어도 작품의 배경으로 알려진 신천·재령군 봉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실 관계를 명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만, 국가 안보와 관련된 부분이 아니면, 문화예술인의 도덕성을 문제 삼지는 않는 편이다. 심지어 황영웅의 경우는 공산당식 마녀사냥을 하고 있다고 열변을 토했다.[60][61]
전과가 있다고 해서 모든 루머를 사실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조갑제가 황영웅에게 팬심이 있다는 점은 감안해서 보아야겠지만, 조갑제가 본래 발로 뛰어 취재하던 사회부 기자 출신이란 점을 고려하면, 연예 매체를 불신하는 태도를 보일 만도 하다.[62]


8. 여담[편집]


  • 자신에 대한 비판적인 글에 대해서 자신이 판단하기에 사실에 부합하지 않은 것들은 대개 무시한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해서 비판문을 쓴 사람들 중에서 고마웠던 사람이 있느냐 질문에 강준만 교수를 꼽았다.[63]

  • 영국의 작가인 조지 오웰을 매우 존경하며, 오웰의 저서를 자신의 글에 인용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조지 오웰이 골수 사회주의자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의외라면 의외. 하지만 오웰이 반 스탈린주의자에 발로 뛰는 르포 작가였고, 현직 기자 시절 조갑제가 이를 충실히 계승했던 점을 생각하면 나름대로 납득이 가는 부분,

  • 포항 석유 사건 폭로 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는데, 당시 조사를 담당한 사람은 훗날 김재규와 함께 한 박선호였다. 조갑제는 당시 상황에 대해 조사 때의 대우는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고 회고했고, 박선호도 신사적인 인사였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 인권변호사 조영래와 절친한 관계였다고 한다. 실제로 조영래는 조갑제의 저서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추천사를 쓰고 조갑제도 조영래의 요절을 안타까워하며 조영래에 대한 추모사를 쓰고 장례식에 참석한 바가 있다. #

  • 김정일 사망 3개월 시리아 내전에 대한 칼럼을 쓰며 김정은은 주민봉기가 발생하였을 때 김일성, 김정일마냥 대량학살을 저지를 수 없다고 봤는데, 그 이유로 시리아 내전의 참상이 전세계에 언론, SNS로 알려지는 등 하마 학살 같은 대규모 학살을 은폐할 수 있던 과거에 비해 세상이 너무 변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들었다. # [64]

  • 《조선일보》 사회부장 출신으로 판문점에서 북한 기자들과의 접촉이 잦았던 함영준 기자의 회고에 의하면, 1990년 무렵까지만 해도 조갑제는 북한에서 가장 좋아했던 대한민국 기자였다고 한다.[65] 그도 그럴 것이 위에서 나온대로 정권의 치부를 드러내는 수많은 탐사보도 특종을 냈으며, 5·18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용기 있게 폭로하며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을 여러 차례 난처하게 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북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반정부 기사를 써대는 용감함에 북한 언론인들도 감탄해마지 않았다고 한다.[66][67] 다만 조갑제가 반북 성향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후에는 북한 기자들도 조갑제를 비난했다.

  • 영화 황산벌이나 변호인에 대해서는 정치적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연기자로서 거둔 성과는 인정한다. 일례로 송강호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을 때는 영화 같은 나라에서 상복이 터졌다며 축하 영상을 올렸다. 링크 다르게 생각하면 입장 바꾸기 내지는 묻어가기일 수도 있지만.


9. 기자로서의 조언[편집]


기자 출신으로 신동아 2006년 8월호 기사에서 특종사냥에 대한 조언을 했다. 한때 탐사취재와 보도로 명성을 날렸던 대기자의 연륜이 엿보인다. 기자로서의 투철한 직업정신 면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가릴 것 없이 그를 존중[68]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신문기자 조갑제의 특종 사냥법

"정기적으로 논문 색인집과 관보 읽어라"

*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춰라. 가급적 대중성이 강한 분야가 좋다. 야구가 인기면 야구, 권투에 대한 관심이 높을 때면 권투, 석유면 석유, 고분 발굴이면 고분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춰라.

* 논문 색인집을 정기적으로 살펴보라. 국회도서관과 주요 대학, 연구기관에서는 다양한 논문 색인집을 내고 있다. 여기에 실린 논문 제목을 정기적으로 살펴보면 생각하지도 못했던 아이디어를 찾아낼 수 있다.

* 관보를 비롯한 정부 간행물을 정기적으로 읽어라. 관보를 비롯한 정부 간행물에 실린 사안은 정부의 공식 정책이거나 정책으로 확정될 것이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보도해도 오보가 될 가능성이 작다. 각 부처에서 나오는 보도자료에만 의존하면 특종을 쓸 수 없다.

* 루틴(routine)한 취재를 반복하라. 출입처 이외의 기관도 정기적으로 챙겨라. 경찰서를 출입할 때는 구청도 드나들어라. 그러면 2중으로 취재지역을 훑을 수 있다.

* 취재 현장에는 반드시 가라. 현장에 가면 사무실이나 기자실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 같이 술을 마심으로써 취재원에게 접근하는 방법은 지양하라. 맑은 정신으로 취재해야 취재원이 안심한다. 취재한 것은 반드시 기사화하고 취재원에 대해서는 끝까지 함구해 확실한 신뢰관계를 구축한다. 그가 새로운 제보자를 소개해 준다.

* 다작(多作) 속에 특종이 있다. 기사 욕심을 내서 기사를 많이 쓰는 기자가 특종에 접근한다. ‘기사는 힘으로 쓰는 것’이고 ‘발로 만드는 것’이다.

* 문제의식을 갖고 한 주제를 물고 늘어져라. 한번 잡은 주제를 여러 번 반복해서 취재하다 보면 시작할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큼직한 특종이 걸려든다. 잡지기자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 ‘사실은 이념에 우선한다’는 소신이 필요하다. 이념과 신념에 빠져버리면 왜곡된 기사를 내놓게 된다. 기자는 사명감 때문에 취재하는 게 아니라 사실을 추적하는데 재미를 느끼며 취재해야 한다.

* 명문(名文)과 미문(美文)을 쓰려고 하지 말고 정확한 문장을 쓰려고 노력하라. 형용사 부사 접속사는 되도록 쓰지 말고 건조한 문장을 만들어라.

* 특종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취재를 피하는 취재원은 몇 번이고 찾아가는 성의를 보여라. 알아도 취재원에게 자꾸 물어봄으로써 상대방이 편하게 말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취재원을 감동시키거나 신뢰를 주지 못하면 제대로 된 취재를 하지 못한다.

*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고 해서 데스크와 충돌하지 말라. 그들도 이유가 있어 기사를 내보내지 못하는 것이다. 취재원뿐 아니라 데스크에게도 신뢰를 주어야 한다. 데스크가 의심하지 않도록 정밀한 취재를 할 수 있는 능력부터 갖춰라.



10. 저서[편집]


  •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 1986년, 기자 조갑제가 인천 일가족 살인사건의 사형수 오휘웅의 억울함과 무고함을 입증한 전설적인 책. 사법부의 문제점과 사형제에 관련해서 조목조목 파헤친 책이다. 법대 전공수업이나 대학원 수업에서도 읽혔던 책이다.

  • 『대폭발』 - 1985년 2.12 총선에 대한 분석 및 1980년대 중반 민주화운동 관련 다룬 르포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 박정희의 일생을 다룬 전기로,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내용을 엮어서 펴낸 책이다. 박정희에 대한 조갑제의 평가가 잘 드러난 책이다. 취재를 바탕으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많아서 좌우파 연구자를 막론하고 박정희 시대사 연구자들의 저술 등에서 종종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한다. 나무위키의 수많은 관련 문서들도 이 저서의 내용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 『국가안전기획부』


  • 『조갑제의 광주사태』 : 왜 총을 들고, 왜 총을 쐈나? 광주 사태 루머와 싸운 30년 이야기 - 5.18을 왜곡하는 지만원의 주장을 반박하는 책.

  • 『군부』 - 안기부의 행태들을 날카롭게 본격 해부한 책.

  • 『한강의 새벽』 - 박정희의 5.16 군사혁명을 평가하며 선진화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 『종북 백과사전』 - 일종의 종북인명사전이다. 한때 조갑제닷컴에 신청하면 무료로 배송해 주기도 했다.

  • 『송의 눈물』 - 군대에서 정신 교육 시간에 읽어보라고 권유한다. 2014년 기준. 평화 조약과 강화 협상의 부질없음을 강조한다.

  • 『트루먼과 스탈린의 한반도 게임 비사』 - 소련이 왜 유엔 안보리에 불참했는지 편지를 갖고 와서 설명한다.


  • 『우리 생애의 가장 길었던 날』

  • 『조선총독부, 최후의 인터뷰』: 해방 39년이었던 월간조선 1984년 8월호에 실린 기사를 중심으로 당시 인터뷰를 2010년 단행복으로 엮어 출간한 책으로, 당시 70~90대로 살아있었던[69] 조선총독부와 일제강점기 조선의 재계/관계 주요 인사들을 인터뷰한 내용이다. 45년생으로 역시 39세였던 진보 시절(?)의 조갑제 기자가 남긴 기록이라 오히려 일본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잃지 않고 있다. # 세지마 류조에 대한 인터뷰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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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6년에 경북 청송으로 귀국하게 된다.[2] #[3] 현재의 부경대학교[4] 당연히 이북의 '공산주의'와 일반적인 좌파는 다르다.[5] 실제로 그는 북한 3대 세습 정권에 반대하는 좌파라면 환영한다고 한 적이 있다. 물론 이는 좌파를 별개로 3대 세습 정권이라는 독재주체사상에 대한 반대를 의미한다. 애초에 북한은 공산권 국가 중에서도 민주 캄푸치아를 제외하면 제일 기형적인 체제의 국가이다.[6] 물론 90년대 이후에는 조갑제 자신이 한때 자신이 그토록 날카롭게 비판하던 박정희와 전두환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론자로 변신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7] 조갑제의 부모는 1939년경 일본으로 건너가 장사를 하며 살았다고 한다.[8] 처음에는 해양 쪽 일을 하고싶어 해군사관학교나 한국해양대학교에 지원했으나 시력 문제로 지원 자격이 되지 않았고, 육군사관학교 역시 지원 자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부산수산대학교에 진학했으나 수산물 가공 쪽 학과라서 영 재미가 없었다고 한다.[9] 요격관제병은 관제사가 전투기를 관제할 때 그 옆에서 수동식 컴퓨터로 비행기의 속도, 고도, 방향 등을 계산하여 보좌해주는 조수(助手) 역할을 수행한다.[10] "조갑제의 현대사추적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책 머릿말에 나온다.[11] 이때 주로 많이 쓴 기사가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였다.[12] 이때 거의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국가적으로 이제 한국도 산유국이 되어서 기름 한 방울 안나는 나라의 설움을 벗어나겠다고 신나했는데 조갑제 기자는 당시 국회 도서관을 드나들면서 논문들을 열람하고 지질학자 및 화학자 등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아예 논문을 한 편 만들었다. 자비로 논문을 출간해서 관계 당국과 언론사, 석유시추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한 학자들에게 보냈고 결국 조갑제는 한국의 산유국화' 주장을 개박살냈다.[13] 후술하듯 조갑제보다 먼저 광주에서 잠입 취재하며 광주의 진실을 밝혀낸 기자들은 은근히 많았지만, 이들은 모두 집단발포 직후에 일어난 광주 봉쇄 이전에 광주에 들어갔다. 물론 이들의 취재도 매우 가치 높은 사료들일 수밖에 없긴 하지만. 더구나 조갑제가 광주에 잠입한 5월 23일은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이 발생했던 터라 운이 나빴으면 조갑제가 광주 잠입 중 계엄군에게 살해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조갑제의 용감함이 더욱 돋보인다.[14] 2004년 9월 징기스칸이라는 월간지를 만들었는데, 창간사가 "1등과 천재 덕분에 먹고 사는 범인이 그 고마음을 모르고 질투심과 열등감을 천재들에게 쏟아붓는 판국. 우리는 1등과 천재들이 존경받고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건전한 사회를 향하여 나아갈 것. 저희 잡지는 바보처럼 우직하게 일하면서 천재를 알아보는 순수함을 견지하겠다. 징기스칸을 읽으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힘이 불끈 솟아나며 세상이 밝게 보이도록 해 드리겠다"이다. #[15] 월간조선에서 은퇴한지 한참 지났고, 조갑제닷컴은 조갑제 개인의 홈페이지로 본다면 풍부한 정보량을 자랑하지만, 정식 언론매체로 보기는 힘들 정도로 영세한 수준이다.[16] 그런데 이 니시오카 츠토무는 정작 일본군 위안부 문제 왜곡으로 크게 비판을 받은 인물이다.[17] 조갑제는 예전부터 박근혜를 향해 야당으로 가라고 비판하였을 정도였다.[18] 이 밖에도 조갑제는 1979년 부마민주항쟁에서도 잠입취재했던 경력이 있던 기자다.[19] 지만원과 완전히 갈라선 것도 이문제 때문이라는 추측이 많다. 참고로 지만원은 인터넷에서 5.18 북한군 개입설을 체계적으로 유포한 최초의 인물이다.[20] "현재 휴전선 이남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민중 항쟁은 너희와 신군부가 선동하는 사회주의 인민해방이 아닌,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항쟁이니, 북한은 혼란을 틈타 남침할 생각 말라"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실제로, 1980년 서울의 봄 당시에도 대학생 시위대는 훌라송에 맞추어 김일성은 오판말라를 외친 바 있다. 1960년 4.19혁명 당시 내무부차관 이성우의 "시위의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는 발언이 화젯거리가 된 뒤로, 1970년대까지 "김일성은 오판말라, 반공전선 이상없다"는 용공 혐의를 의식한 시위대가 자주 외치는 구호였다.[21] 엄밀하게는 1956년 8월 종파사건이 벌어진 이후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김일성을 추종하는 무리로 전락해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22] 조갑제는 5.18 검찰 보고서와 계엄군 지휘관들의 증언들을 토대로 '화려한 휴가'의 도청 앞 집단발포 장면이 과장됐다고 한다. 그러나 '애국가가 흘러나오면서 기립자세를 취하던 시민들'을 향해 '군인들이 앞줄은 무릎쏴 자세로, 뒷줄은 서서쏴 자세로 일제히 사격'하는 장면은 동아일보 김충근 기자와 김영택 기자가 현장에서 직접 확인한 사실들이다.[23] 심지어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에는 "오늘의 민주화운동은 정상적인 민주화운동이며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민주화 역사를 위해서는 박대통령은 잘 제거됐다" 같은 오늘날의 조갑제라면 상상할 수 없는 수위의 발언까지 나왔다! 심지어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은 1987년 2월, 다시 말해 6월 항쟁 4개월 전에 출판된 책인 만큼 군사정권 시절을 감안하면 정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위의 발언이었던 셈이다. 덤으로 김대중이 사망했을 때 쓴 칼럼들에도 김대중에 대한 비방적 발언들로 '조갑제, 이제 그만 '저주의 굿판'을 거두어라' '생전에 무슨 악연이 있었기에 그토록 소름끼치는 독설을 퍼붓는가'라는 등의 비난을 받앗는데도 대놓고 김대중이 '잘 죽었다'는 식의 반응은 보이지도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충격적이라고 할 만하다. #[24] 앞에도 기술되어 있듯이 조갑제는 당시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해서 혼자서 제대로 걷기도 힘들 정도이다.[25] 한겨레21에서도 '기자 조갑제'만큼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26] 일례로 박정희의 혈서와 내연녀 이현란의 존재가 있다. 조갑제와 성향이 상극임과 동시에 박정희 혈서 기사를 찾아낸 민족문제연구소조차 박정희 혈서 발굴의 '일등 공로자'가 조갑제였다고 인정할 정도다. #[27] 일레로 한겨레에서 이명박BBK 스캔들을 폭로했을 때 한겨레를 옹호했던 보수 진영 인사로는 조갑제가 유일했다.[28] 5.18 북한군 개입설, 박주신 병역비리 의혹, 4.15 총선 & 2020 미국 대선 부정선거 음모론 등[29] 정작 극우는 뉴라이트, 몇몇 보수 논객, QAnon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를 부추기는 병크를 저지른 대안 우파, 사이버 렉카화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평가 받는 우파 유튜버로 화려하게 삽질해서 조갑제를 비판할 처지가 못 된다. 보수우파에서 노인공경을 중시하는 분위기라고 자타공인 여겨진다는 걸 감안하면, 극우들은 위의 각주에서 고문으로 혼자서 제대로 걷기도 힘들다고 알려진 나이로 노쇠한 노인에게 쇼크를 줄 수 있는 폭언이나 하니 보수우파 자격이 없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30] 실제로 1987년 쓴 책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에서도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반공차원에서 이루어진 진정한 민주화운동"이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이 역시 조갑제가 기자 시절에도 기본적으로는 강경 반공 성향이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사실 사회적 문제에서는 진보 성향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보수인 사례는 과거의 이원복프리덤 하우스 등 그렇게까지 드물지는 않다.[31] 사실 판박이라고 보기에도 무리이다. 적어도 조갑제는 친일 성향이 있기는 해도 식근론을 부정하는 등 일제강점기와 독립운동가 문제에서는 선을 넘지 않는 것과 정반대로 지만원은 오늘날 같은 한글을 만든 것도 일본이라니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는 한국이 정상적 국가가 아니라니 같은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였다.[32] 다만 5.18 음모론이 지금만큼 기승을 부리지는 않았고 조갑제도 지금보다 기조가 더 강경했던 시절인 2010년대 초반까지는 가히 오늘날의 지만원 이상으로 욕을 먹었다. 사실 당시 조갑제의 논란이 된 칼럼들을 보면 지금 기준으로도 읽기 거북할 수준으로 강경한 논조이긴 했다.[33] 일례로 한미 FTA 체결 과정에 있어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저항과 도전정신'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칼럼을 올렸고, # 2010년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 의혹에 대해 제대로 된 근거도 없이 언급하자 조갑제는 칼럼에서 "증거가 있으면 내놓고, 증거 못 내놓을 소리라면 그냥 사퇴하라"라고 비난했다. #[34] 다만 응게마는 악행에 비해 대외적 인지도가 매우 낮다.[35] 주사파한국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가 아니라서, 향후 젊은 세대들이 박정희의 독재를 김일성의 독재와 동급으로 잘못 인식할 것을 우려했을 수도 있다.[36] 일각에서는 그가 영웅을 숭배하는 엘리트 주의자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선거 결과까지 부정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37] 출처 책 정규재TV 닥치고 진실 321쪽[38] 2017년 1월 2일자 《주간조선》2439호.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탄핵이 인용되기 전에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을 두고 쓴 것이다.[39] 그런데 정작 조갑제가 그토록 찬양하는 칭기즈 칸은 역사상 가장 잔인한 정복자였다.[40] 조갑제는 기본적으로 초인-엘리트 사관 숭배자이며, 그런 의미에서 조갑제 같은 강성 보수 인사에게 세월호 침몰 사고로 죽은 300명의 아이들은 국가적 위신 같은 대의보다 덜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시각이 있다. 혹자는 최근 방송에서 드러난 바로 짐작해 보면 조갑제는 세월호 음모론을 정권 교체에 이용하는 것을 경계했다고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실제로 문재인 정권 이후에도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고링크, 이러한 이유로 세월호 유족들의 정치적 입장도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입장과 지지하는 입장으로 갈리고 말았지 않느냐는 것. 하지만 세월호 유족들의 정치적 입장이 어떻건 박근혜가 세월호 참사에서 보여준 모습은 결코 옹호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41] 조갑제는 2020년 4월 20일에도 여전히 박근혜를 찬양하는 글을 홈피에 올릴만큼, 강성 친박이니 당연히 박근혜 탄핵을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42] 다만 조갑제는 김대중이 북한과 내통한 좌익 첩자라는 식으로 극렬히 비난한 책을 써냈을 만큼, 엄연히 반 김대중 성향을 띈 인물이니 결코 김대중에 우호적인 인물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43] 그런데 정작 조갑제 본인이나 월간조선에는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王家의 후손이다", "1300년 동안 숨겨진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칭기즈칸 선조(先祖) '황금항아리'는 발해(渤海) 대야발의 후손" "대한제국의 한은 칭기스칸의 칸"이라는 식으로 작성된 '원초적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내용의 기사들이 넘쳐났다. 애초에 조갑제 본인부터가 "한국인은 몽골족 등 북방 유목민족의 후손이다."라는 식의 원초적 민족주의가 담긴 주장을 가장 적극적으로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설파한 사람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그런 조갑제 본인이 민족주의를 부정적으로 보는 일 자체가 일종의 셀프 디스인 셈이다. 사실 한국인이 몽골 계통의 민족이라는 설부터가 오늘날에 와서는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는 쪽으로 학계에서 결론이 나오고 있다. 만약 조갑제 본인이 정말로 원초적 민족주의를 부정적으로 본다면, 본인이 옛날부터 열심히 주장했던 "한국인은 몽골족 등 북방 유목민족의 후손이다."라는 설 자체를 스스로 비판해야 옳다.[44] 다만 여기서 조갑제가 두둔하려고 했던 친일파들은 노덕술처럼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사람이 아니라 신현확처럼 실무 부역을 한 사람들이다. 자신도 악질 친일파들이 "적극적으로 일제의 앞잡이가 된 한국인들이 있었지만 극소수였다"고 말하며 자신이 두둔하는 친일파가 악질 친일파가 아닌 실무 부역자란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 하지만 박정희의 친일도 '일제에 순응하는 척하면서 실력을 길러 대한민국의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라며 두둔한 것과 다른 일본-만주군 출신 장교들의 친일도 실력 양성의 영역으로 축소한 것은 확실히 빈축을 살 만했다. #1 #2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의 혈서의 존재를 알린 인물도 조갑제이다.(...)[45] 일례로 2009년 구로다가 비빔밥에 대해 양두구육이라며 비하하는 남기자 조갑제는 민족주의 운운하고 손에 손잡고까지 끌어오며 "한국음식에 정통한 한 일본기자가 '비빔밥'을 비판하였다고 지도층의 한국인들이 신경질적 반응을 보인다면 외국인이 과연 한국 음식을 먹어주겠는가?"라며 감싸고돌았다. #[46] 그런데 정작 조갑제 본인은 "우파의 美學을 재건하자. 우파는 멋진, 자유의 삶을 긍정하고 즐기는 이들이다."라는 글을 올렸는데#, 고작 코미디 사극 영화 한 편에 저렇게 신경질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일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고 삭막한 정신 상태를 가진 사람이 "멋진, 자유의 삶을 긍정하고 즐기는" 생활 자세를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47] 조갑제는 현재 대한민국의 근간이 신라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따라서 신라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영화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단순히 군사 문화 찬양의 맥락에서 나온 반응이 아니라, 신라가 곧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반응일 것이다. 조갑제는 신라를 부정하는 것이 친북의 사고방식이라고 의심하는 인물이다.[48] 다만 이건 두 후보 모두 해당되는 사항이긴 하다.[49] 다만 박정희가 한글 전용 정책을 추진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한겨레, 이오덕으로 대표되는 진보 진영에서 앞장서서 순우리말을 권장해 왔기 때문에, 순우리말을 자주 쓴다고 하면 진보라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50] 실제로 북한에서는 순우리말을 많이 쓴다. 물론 반공적인 기성세대 중에도 그 점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긴 하지만,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반지성주의의 일환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51] 생활한복 입고 다니는 선생님은 전교조라는 고정관념 같은 걸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52] 극단적으로 한자를 배척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우리말의 80%가 한자어라는 것이다. 즉 중국의 문화 침략으로 우리말이 많이 사라졌으니 지금이라도 열심히 순우리말을 만들어서 한자어를 몰아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전통을 몰라서 생긴 오해일 뿐이다. 한마디로 보면 역사적 맥락을 모르는 상태에서 글자 자체에만 집착하는 것인데, 근거 없는 일본어 잔재설도 이런 식으로 퍼졌다.[53] 흔히 이런 케이스의 끝판왕으로 국립국어원을 생각하지만, 국립국어원은 운동권 집단이 아니다. 오히려 극단적인 순우리말 운동가들은 국립국어원이 우리말을 망친다고 배척한다.[54] 오히려 한자어 지식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순우리말을 적극 살려 쓰는 경우도 있으므로, 한자 교육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모두 순우리말을 천시한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천자문에 쓰여진 한글 뜻풀이는 순우리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천자문을 배운 어르신들이 한자어와 순우리말 양쪽에 해박하시기도 하다. 게다가 한글이 없던 시절엔 순우리말을 한자를 빌려 표기하던 전통이 있기 때문에, 한자 지식이 잊혔던 순우리말을 발굴하는 열쇠가 되는 경우도 있다. 즉 순우리말을 널리 보급하려면 아이러니하게도 기본적으로 한자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이다.[55] 원래는 마법천자문처럼 글자 형성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재미있게 가르쳐야 하는 것인데, 과거 주입식 교육 시절에는 무조건 달달 외우라 하고, 틀리면 손바닥을 때렸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한포자가 되었으며, 한문 선생님 하면 개량 한복 입고, 단소로 애들을 때리기나 한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깊숙이 박혀 버렸다(...)[56] 다만 아이슬란드는 정치진영간 역사관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단 것은 감안해야 한다.[57] 실제로 야당이 비판한 정책을 정권 교체 후 여당이 된 야당이 유용하게 써먹는 경우는 많다.[58] 나무위키의 윤이상 문서에도 나오지만 사실, 대한민국 정부는 윤이상의 입국 자체를 막지 않았다. 이미 1972년에 박정희가 화해의 제스쳐를 보낸 적이 있었다. 다만 동백림 사건으로 데인 윤이상이 박정희에 혐오감을 느껴 거절한 것이다. 이러한 점이 참작되어 김영삼 정부 때는 김일성 찬양 발언에 대해 사과하기만 하면 입국을 허용하겠다고 했는데 윤이상이 거부했다. 이러한 점이 아직까지도 윤이상에 대한 논란을 부르는 부분.[59] 참고로 백건우이응로 화백이 자기네를 납치하려 한 것은 아니라고 믿지만, 박인경에 대한 의심은 풀지 못했다.[60] 하지만 그렇다고 조갑제가 황영웅의 잘못을 옹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조갑제 유튜브 채널에 올라오는 영상들을 보면, 조갑제도 황영웅이 폭력 전과가 있다는 점은 인정하며, 이에 대해서는 두둔하지 않는다. 다만 조갑제가 분노한 부분은 인터넷상에 나도는 루머를 언론에서 제대로 검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61] 황영웅을 옹호하는 인물은 아니지만, 일요신문 신민섭 기자는 벌금 50만 원의 폭력 전과 이외에는 확실한 결론을 낼 수 없다며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링크[62] 조갑제는 젊은 시절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등 누명으로 의심되는 사건을 다룬 저서를 남겼다. 그가 걸어온 길을 고려한다면 전과자라는 이유로 모든 루머를 사실로 결론 내는 태도를 지극히 위험하다고 보았을 것이다.[63] 강준만은 조갑제에 대해 "후일 한국언론사를 쓰는 학자는 그에 대해 적잖은 지면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왜? 그는 발로 뛰는 기자 정신에 관한 한 독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라고 극찬하면서도# "사실(fact)을 자신만의 환경 속에서 해석하는 사실 물신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다."#라고 혹평한 바 있다. 한 마디로, 사실은 정말 잘 캐는 반면 그 사실에 대한 가치판단이 엉터리라는 것.[64] 이와 비슷하게 리콴유 싱가포르 전 수상도 "김정일의 후계자가 김정일처럼 인민의 목숨을 파리처럼 죽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예상하였다. 절대로 김정은이 선대 지도자들보다 착해서 학살을 저지를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조갑제와 리콴유의 예상처럼 김정은은 김정일처럼 심화조 사건마냥 수천 명 이상을 학살하는 초거대 유혈 숙청은 벌이지 않았으며, 김정은 시기 초기에는 장성택 처형, 김정남 암살 등 유혈 숙청을 벌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나 이 사건들이 국제적으로 거센 비판을 받자 김덕훈에 대해서는 본인이 직접 공개적으로 비판하긴 해도 자리를 보전해주는 등 선대에 비해서는 어느 정도 대외 여론을 의식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65] 덤으로 그 무렵에는 북한에서 《조선일보》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이름부터 '조선'이 들어가고 논조도 당시에는 결코 親정부적이지만은 않았으며,(물론 이는 3선 개헌 이전까지에 한정된 것이다) 방응모가 북한 출신(평안북도 정주군)이라는 점도 작용했다고 한다. 반대로 동아일보는 전라도 지주가 세운 부르주아 신문이라고 경멸을 드러냈다고 한다. 정작 그러면서도 김일성의 경력을 뻥튀기한 보천보 전투 호외를 만든 것만큼은 매우 좋아했지만.[66] 북한은 자신들의 치부를 되도록 숨기려 하기에 박명식 장기적출 연쇄 살인사건 같은 흉악한 살인 사건과 대규모 교통사고같은, 다른 나라라면 나라가 뒤집힐 사건조차 일체 보도하지 않을 정도이며, 룡천역 열차 폭발사고평양 아파트 붕괴사고처럼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사고여야만 보도하고 있다. 살인 사건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언론통제에 시달리는 북한 기자들이 정부가 숨기고 싶어하는 비밀들을 연이어 폭로하는 조갑제에게 감탄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 셈.[67] 사실 로동신문 항목만 봐도 알 수 있듯 로동신문 자체가 군사정권 시절 남한 언론도 뺨치는 수준의 편향적인 논조는 둘째치더라도 신문 기사 자체의 질도 매우 떨어진다. 특히 논설위원 동태관 등이 쓰는 정론들을 보면 남한 사람 입장에서는 실소만 나오는 수준.[68] 진보 성향의 경향신문조차 장문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시각을 경청했다.[69] 해방 당시로 역산하면 30~50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