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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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찬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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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MAlogoblack1.jpg
올해의 음악인
남자: 이승철
여자: 이소라
그룹: 클래지콰이 프로젝트
(2005년)

남자: 조규찬
여자: 이상은
그룹: W
(2006년)

남자: 이지형
여자: 박선주
그룹: 노브레인
(2007년)



조규찬
曺圭贊


출생
1971년 1월 13일 (53세)
서울특별시 성동구 천호동
(現 서울특별시 강동구 천호동)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본관
창녕 조씨 (昌寧 曺氏)
신체
175cm, 64kg, A형
가족
아버지 나화랑, 어머니 유성희, 형 조규천, 조규만
배우자
해이
자녀
아들 조은우
학력
서울강동초등학교 (졸업)
신암중학교 (졸업)
선화예술고등학교 (미술 전공 / 졸업)
동국대학교 (서양화 전공 / 학사)
일리노이 대학교 (어배너-섐페인 재즈학 / 석사)
종교
개신교(예장통합)[1]
소속
우송정보대학 교수
소속 그룹
조트리오
데뷔
1990년 새 바람이 오는 그늘 1집
<새 바람이 오는 그늘>
취미
낚시, 영화보기, 당구
특기
그림그리기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
3. 가족관계
4. 바이오그래피
5. 평가
6. 수상
7. 기타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30년차 싱어송라이터. 2012년 3월부터 대전 우송정보대학 실용음악과 전임교수직을 겸하고 있다.


2. 디스코그래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조규찬/디스코그래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가족관계[편집]


일가친척 모두 음악가 집안으로 유명하다. 그의 형제인 조규천, 조규만과는 조트리오라는 이름으로 앨범을 발매했다.

  • 아버지 :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 나화랑(본명: 조광환, 1921~1983년 사망).
    • 600여 곡의 작품 가운데 인기곡으로 꼽을 수 있는 곡만 해도 40여곡은 된다. 나화랑의 생가는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 대표곡으로는 '늴리리 맘보', '청포도 사랑', '열아홉 순정', '무너진 사랑탑' 등이 있으며 유명한 군가 '멸공의 횃불'도 그의 작품이다. 몇 년간 김천여고 음악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 큰아버지 : 극작가 고려성(본명: 조경환, 1977년 사망)
  • 어머니 : 가수 유성희(2013년 사망)
  • 맏형 : 가수 겸 작곡가 조규천
  • 둘째형 : 가수 겸 작곡가 조규만
  • 부인 : 가수 겸 뮤지컬 배우 해이(본명: 김혜원)[2]
  • 처제 : 가수 겸 뮤지컬 배우 소이(본명: 김소연), 前 티티마 멤버
  • 처남(아내의 사촌) : 가수 폴킴


4. 바이오그래피[편집]


  • 1971년 1월 13일 서울 출생.
  • 서울 강동초등학교
  • 서울 신암중학교
  • 서울 선화예술고등학교 미술학과 [3]
  • 동국대학교 서양화과


1989년 제1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무지개'라는 곡으로 대상격인 금상을 수상했다.

1990년에 이준, 김정렬과 함께 "새 바람이 오는 그늘"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어서 첫 앨범 "1집 새바람이 오는 그늘" 을 냈다.[4]

같은 해 박선주의 앨범에 실린 박선주와의 듀엣곡인 '소중한 너'가 소소한 히트를 기록했는데(가요톱10에 두 사람이 같이 출연하여, 라이브로 부르기도 했다.), 가요 듀엣곡 중엔 명곡으로 꼽히는 곡으로, 허나 부르기는 상당히 어렵다. 특히 곡의 마무리 '나나나'에선 좀처럼 음을 잡기 힘들게 각기 다르게 낮은 음을 향해 간다.

1992년에 김현철 2집의 마지막 트랙 '나나나'에 작사로 참여했고, 해당 곡을 김현철과의 듀엣으로 불렀다.

1993년 대망의 첫 솔로 앨범인 "추억"을 발매했다.

1994년에 토이의 첫 앨범인 "내 마음속에"에 동명의 타이틀곡인 "내 마음속에"에 객원 보컬로 참여했다.[5]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4차원적인 캐릭터를 보여주면서 패널 등으로 인기를 구가한 적도 있다. (유재석이 진행한 "진실게임"이 대표적)

2010년 9월에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 어바나 샴페인 캠퍼스로 장학생으로 재즈 보컬 석사 과정을 밟는다. 그리하여 가족 모두 미국으로 떠났는데... 그로부터 1년 후인 2011년 9월 26일, 나는 가수다에 합류 예정이란 기사가 떴다. 참고 기사. 나가수 합류를 위해 한 학기 휴학했다고 한다. 실제 10월 9일 본방송에서도 가수들이 가수들이 좋아하는 가수라는 말로 조규찬을 평했다. 그리고 10월 9일 방송에 출연, 박기영과 듀엣으로 임재범의 '이 밤이 지나면'을 완벽한 편곡과 조화로 깔끔하게 불렀지만 7위를 기록, 자문위원단도 인정한 고음과 폭발만이 살아남는 나가수라는 걸 여실히 느낄 수 있다.[6]

이후 펼쳐진 호주 경연에서 1% 차이로 탈락이 확정되었다.[7]

해당 내용이 방송된 다음날 언론이 '새 가수에게 너무 가혹했다'[8], '천재 가수가 자극적인 노래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탈락했다'[9], '현장에선 빠르고 터지는 노래가 1위일지 몰라도 음원은 다르다'[10] 등 디스하기 시작했다. 또 호감형이라 그런지 네티즌들도 동감하는 분위기. 여기에 '영사방문사건', '한국 관광객만의 공연' 등으로 병크를 뻥뻥 터트리는 중. 게다가 새 가수는 박완규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데[11] 들어오는 순간 나가수는 '누가 고래고래 소리 잘 지르나'가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불후의 명곡 2 깔 자격이 있나 싶다[12] 이런 나가수에 모다시경 성시경이 나갈 수 있을까?[13] 다만 조규찬의 노래가 긴장 때문인지 많이 불안정했다는 의견도 많이 나오고 있다.

김연우와 평행이론으로 화제가 됐는데, 사실 훨씬 불쌍하다.[14] 김연우는 마지막 경연곡으로 압도적인 음원 순위를 보여줬지만 현재 조규찬의 곡은 선전하고 있지만 역시 고음이 부족한 장르 특성상 대중적 인기가 지속될지는 불투명한 부분. 특유의 독특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으니 예능 활동으로 만회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니나다를까 방송 활동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는데, 위대한 탄생 2에 나와서 윤일상 멘토스쿨의 심사위원을 잠깐 봐 주기도 하였다. 이 때 말했던 심사평들이 하나 같이 깔끔하고 좋다. 이런 쪽에 잘 맞을 지도. 위탄3 멘토 확정?

대전의 우송정보대학 실용음악과 전임교수로 임용되어서 2012년 한 학기 강의를 마친 뒤 다시 학업에 복귀할 예정이다. 학업을 마친 뒤에는 본격적으로 대학에서 후진양성을 하게 된다.

2015년 미스틱엔터테인먼트에 합류했다. 관련기사

2018년 5월경에는 같은 미스틱엔터테인먼트 소속인 윤종신, 정석원을 비롯 작사가 겸 가수인 박주연 등과 함께 TEAM 89라는 프로듀싱 팀을 결성하기도 하였으며, 이어 7월 6일에는 2010년에 9집을 발표한 이후 근 8년만에 디지털 싱글 <비 온 날>을 발표하였고,8월 3일에는 디지털 싱글 <Deja vu>를 발표하였으며, 9월 5일에는 <자전거 산책>을 발표하였다. 아울러 10월 1일부터 2020년 8월 30일까지는 KBS 제2라디오의 <<매일 그대와 조규찬입니다>>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꾸준히 디지털 싱글을 발표하며 생존신고 중.


5. 평가[편집]


보컬, 연주, 작사, 작곡, 프로듀싱을 비롯한 모든 음악 전반에 관해서 능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코러스에 관해서는 국내 최고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고, 코러스의 황제라고 불린다. 조규찬이 코러스로 참여한 노래

2010년 7월 16일 방송된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코러스 시범. 더불어 유희열의 조규찬 모창도 들어보자.

싱어송라이터 중에서 작곡과 보컬에서 모두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싱어송라이터는 보컬리스트가 작곡에 참여하는 경우와 작곡가가 보컬을 담당하는 두 경우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신승훈, 이승환 등이 있는데 보컬 능력은 뛰어나지만, 작곡이나 음악작업 전반에 관해서는 전문적인 작곡가나 프로듀서에게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고 후자의 대표적인 인물은 윤상, 유영석, 유희열, 정재형 등이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작곡이나 작사 등의 음악을 만드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보컬리스트로서의 실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조규찬>의 경우는 보컬리스트로서도 초일류의 실력을 가진 동시에 작곡가와 프로듀서로서도 국내 최고의 경지에 올라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고음을 가창력의 척도로 재는 경향이 강한 한국에서 <조규찬>의 몇 곡만 들어보고 가창력으로써 부족하다 하는 사람이 있는데 얼척도 없는 이야기. R&B를 처음 도입한 게 <조규찬>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교에도 능한 보컬이다. 유희열은 <FM 음악도시>에서 <조규찬>이 R&B쪽으로 음악적 흐름을 바꾼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했을 정도이다. 방송에서 한국 최고의 보컬리스트로 임재범, 조규찬이라고 여러번 얘기 했을 정도로 높히 평가한다.

녹음을 할 때, 보통 보컬의 녹음을 한 트랙만 사용하는 것과 달리, 조규찬은 한 번 보컬을 녹음한 뒤에 그것과 똑같이(정말 오차 없이 똑같이) 한 번 더 불러서 보컬에 두 트랙을 사용한다고 한다. 워낙 똑같이 불러서 두 번 불렀다는 걸 확인하기는 힘들지만, 확실히 음반(음원)을 통해 듣는 조규찬 노래의 보컬은 좀 더 두텁고 소리가 좋다.

재즈, R&B, 팝, 어쿠스틱, 락까지 많은 장르를 섭렵했다.

휘성이 가수 데뷔하기 전에 제일 많이 연습한 곡이 조규찬 4집의<믿어지지 않는 얘기>라고 한다.

이소라가 앨범 낼 때 Thanks to에 항상 있는 이름이 조규찬, 김현철, 고찬용인데 이소라는 조규찬에게 항상 보컬 디렉팅을 맡긴다. 조규찬은 이에 대해 "이소라 같이 노래 잘 부르는 가수에게 디렉팅을 누가 하냐라는 게 무슨 차이가 있겠냐. 단지 이소라의 입장에서 나에게 맡겨야 안심이 된다라고 생각하는 심리적인 요인 때문에 이소라 앨범의 보컬 디렉팅을 맡는 것 뿐이다"라고 밝혔다.또, 이소라가 <FM 음악도시>에서 조규찬의 <서울 하늘>을 듣고, 이런 감성은 대체 어디서 오는거냐고, 부럽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프리스트형민우 작가는 프리스트를 그릴 때 조규찬의 음악을 듣는다고, 2011년 6월호 무비위크 인터뷰에서 밝혔다.

배우 이제훈은 2011년 8월 28일 상명대 아트센터에서 열린 첫 팬미팅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베스트 앨범으로 조규찬 6집을 꼽았다.


6. 수상[편집]


  • 2006년 3회 한국대중음악상 남자 가수상 - 8집 "Guitology"[15]
  • 2011년 8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팝 앨범상 - 9집 "9"[16]


7. 기타[편집]


고집이 세고, 자신의 음악에 대해 지나친 자신감이 있다는 루머에 시달렸다. 평소에도 영어를 섞어 쓰는 말투[17]도 있고 항상 진지한 표정으로 던지는 농담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90년대 초반 TV 프로에 출연했을 때 이 진지한 표정 탓에 왕자병 이미지가 생겼다. 본인은 농담으로 던진 얘기였는데, 예능감이 떨어지다 보니 의도와는 달리 좋은 반응을 못 얻은 듯.

하지만 TV에 자주 출연하고 대중에게 노출되면서 그런 소문은 사라졌다. 실제로는 겸손[18]하고 재치 있는 성격이라고 한다. TV에 출연하기 전에 이미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재미있는 패널로 소문이 자자했었다.

표정이 진지한 건 학창시절 안면마비의 영향이 있다.(공감토크쇼 놀러와 참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고, 그 때문에 힘들게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단지 못사는 집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도둑 누명을 썼다. 그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아 소주를 마신 후 안면마비 증세가 왔다고 한다. 안면마비 이야기는 2011년에 공감토크쇼 놀러와에 출연했을 때 처음 한 이야기지만, 도둑 누명 이야기는 2002년에 가이드포스트라는 기독교 잡지에서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관련 기사그 영향으로 휘파람을 못 분다고 하는 걸 보면 표정 관리가 힘들다는 것의 한 예다.
조규찬의 6집 '해빙'[19] 등 일부 음원이 멜론, 벅스 등의 음악 사이트에서 서비스가 되고 있지 않았으나, 2011년 11월 현재는 정상적으로 서비스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아마 저작권 협상 문제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CBS 음악FM에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조규찬의 꿈과 음악 사이에>[20][21]의 DJ를 맡았다. 이 프로그램 중 한 코너인 <달에서 온 편지>[22]는 2009년 그의 에세이집으로 출간되어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되었다. 책을 읽어보면 그가 직접 그린 그림이 나온다. 앨범과 책의 리뷰. 2018년 현재는 KBS 제2라디오에서 매일 그대와를 진행 중. 그 전에도 간간이 DJ 대타를 몇 차례 맡은 적이 있다.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후배인 유희열은 <대실망쇼>에서 그의 노래인 '서울하늘'을 능욕하였다[23]

한양여자대학교 실용음악과 겸임교수로 있었으나, 2010년 가을부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2011년 나가수를 계기로 일시 귀국하였다. 나가수는 본인의 예상대로 탈락하였으나 방송 출연, 공연 등의 일정으로 귀국이 늦춰졌다. 갔기 때문에 2013년에 귀국할 예정이다[24]

가수로서는 드물게 트위터, 페이스북, 싸이월드 등의 SNS를 이용하지 않는다. "바이러스에 걸리면 컴퓨터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아내 해이의 증언이 있다. 대신 2001년부터 이어져온 공식 홈페이지(이곳)가 있는데 업데이트와 방명록이 뜸하다가 나는 가수다 출연 이후로 새로운 팬이 늘고 수면 아래에 있던 오랜 팬이 결집하면서 가입자가 급증하여 현재 2만명 가까이 된다.

조규찬의 졸업 사진은 유명인으로서는 드물게 신암중학교 재학 시절 생활지도부장 선생님에 의해서 풀리고 말았다. 잘 생겼다[25]

나는 가수다에서는 8라운드 중간 점검에서 모범생 같은 면모와 수려하고도 잔잔한 말솜씨로 조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11월 12일 케이블 낚시채널 FTV에 출연했다. 낚시in피플 조규찬편 보기.

호주는 어족자원이 충분하죠

낚시채널 HD특집 2부작 긍정적 중독의 나레이션을 맡았다(1부. 인간은 왜 낚시를 하는가 2부. 긍정적 중독, 치유의 낚시). 메이크업을 지우면 낚시인의 피부임을 주장하며, 낚시인임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바다로 데려갈 요트에 관한 노래까지 만들었다.[26] 낚시에 관한 방송 나레이션을 맡은 것을 굉장히 기뻐해서 방송분을 CD로 만들어달라고 제작진에게 요청했다.

강산에, 조덕배와 함께 싱어송라이터 특집에 출연, 작가분이 조규찬의 토크가 좋다고 해서 공감토크쇼 놀러와 11월 21일 방송분부터 하차한 이하늘을 대신해, 고정패널로 출연한다 12월 26일 방송분까지 출연하였다. 11월 당시 1월 초 출국 예정이어서 12월 말까지 하기로 되어있었다. 허나... 사실, 조규찬이 수려한 말솜씨를 가진 것은 사실이나, 워낙 예의가 바른 탓에 포인트를 확확 찌르고 나가야 되는 자리가 전혀 맞지 않는다. 실제로 출연한 몇 번의 방송분에서 애초에 말을 하지를 못한다.

JTBC의 프로그램 칸타빌레 1회부터 출연했다.

나는 가수다로 광탈(光脫), 칠규찬[27], 조박사라는 별명을 칸타빌레에서는 조규山, 조마에라는 별명을, 노래싸움 승부에서는 조지티브(조규찬+'긍정적인'이라는 뜻의 positive)라는 별명을 얻었다.

1집 활동을 할 때만 하여도 머리를 매우 길게 길러 묶은 뒤, 파마까지 하고 활동하였지만, 계속되는 작곡 활동과 음반 작업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해 탈모증이 걸려 결국은 장발을 포기하였으며 이후에는 다시 장발 헤어스타일을 고수하지 않는다. 1993년 발매된 1집 음반에서 조규찬의 장발 사진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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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명성교회에 출석 중이다.[2] 해이는 통역사(외교관인 아버지 덕분에 영어와 프랑스어에 중국어까지 구사가 가능하다고 한다) 출신인데, 미성을 알아본 이문세의 눈에 들어 2001년 1집 'je t'aime', 2집 'Piece of my wish'를 발표했다. 그 덕분에 이문세를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존경한다고. 조규찬은 '조조할인'에서 도입부 코러스를 맡을 정도로 이문세와 각별한 사이. 그 덕분에 두 부부의 해외 유학 생활을 이문세가 SNS에 간혹 언급한다. 2004년 2월 조규찬과 결혼했다. 해이의 동생이자 조규찬의 처제인 소이는 예전에 티티마에서 활약했었고 지금은 라즈베리 필드라는 인디 밴드의 보컬을 맡고 있다. 특히 소이는 여성 아이돌 출신이 음악적으로 성공한 얼마 안 되는 예 중 하나. 자매가 각각 연세대학교(불문과), 고려대학교(중문과) 출신 둘 다 엄친딸(연고전이라도 하면 태극기 휘날리며...)로 유명하다... 참고로 소이는, 본인의 아버지가 외교관이었기 때문에 외교관 특별 전형을 통해 입학했다고 밝힌 바 있다.[3] 미술전공으로 그가 학생 시절 직접 그린 자화상이 훗날 중학교 미술책에 학생작품으로 수록되기도 하였다. [4] 절판되었으나 재발매되었다. 다만 현재 엠넷닷컴 등의 음원사이트에서는 서비스가 되고 있지 않다.[5] 원래 코러스로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유희열이 자고 있는 사이에 보컬 녹음을 해버렸다고 한다. 유희열의 얘기에 의하면 조규찬이 부른 곡을 자기가 다시 도저히 부를 수가 없어서 앨범에 넣었다고 한다. 오, 그럼 설마 김연우도?[6] 편곡도 아주 깔끔했고, 보컬 리드도 아주 뛰어났다. 사실 폭발적인 고음만을 봐도 박기영이 절대 뒤지지 않는다. 허나 그녀는 조규찬의 스타일대로 맞췄고, 그것이 자문위원단의 우려대로 결과로 나타난 것.[7] 나가수 제작진 입장에서도 조규찬이 칼퇴근 탈락할 경우 "고음이 전부냐?" 는 둥의 비판이 더 거세질 것이고 몇몇 시청자 입장에서도 정엽 이후로 나가수에서 듣기 힘들었던 톤과 완성도 높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될 것으로 보인다. 배철수도 이런 현상에 대해 밥 딜런본 조비가 붙으면 본 조비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니. 다만 본 조비에 대한 평가절하라는 의견도 있다. 본 조비 역시 손에 꼽는 락 그룹이다. 사실 본 조비와 비교하는 게 밥 딜런에 대한 모욕일 수도 있다[8] 조규찬이 들어온 시점에 원래 포맷을 전부 버리고 새로운 시도만 했다는 점이다. 1차 경연 때는 듀엣곡 경연을 벌였는데, 결국 본인의 매력 부각보다는 듀엣 파트너와의 호흡과 조화에 더 치중해야 한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첫 출연 가수로서는 불리한 부분이었고, 2차 경연은 호주에서 실내 공연이 아닌 야외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바람에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템포가 느리고 감성 위주의 노래를 하는 조규찬으로서는 관객의 집중도를 끌어내기가 불리했다.[9] 조규찬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호주 공연에선 조금 더 높은 음과 기교를 선보였으나 그는 이마저도 참 깔끔하게 잘 짜여져있다. 이쯤되면 무서울 정도로 정교하다.[10] 실제 10월 24일 기준으로 바비킴, 인순이보다 조규찬의 음원 순위가 평균적으로 높게 나오고 있다.[11] 여담으로 박완규는 조규찬 9집에 피처링으로 참여한 바 있다.[12] 이쪽은 애초에 고음 새내기들의 집합 장소.[13] 실제로 성시경은 나가수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14] 대표적으로 공부하던 걸 휴학하고 왔다는 점. 슈퍼스타K2에서도 카이스트 다니던 학생이 휴학하자마자 광탈한 적이 있었다.[15] 시상식에서 '원숭이 사냥'을 불렀다. 이 영상에서 15분부터 나온다.[16] 2012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도 공연한다고 한다.[17] 언어에 대해서는 그네들의 단어를 쓴다고 해서 그들을 우러러보는 것은 아니라고 해명한 적이 있다. 꼭 영어를 그렇게 하셔야 되나요라는 유희열의 질문에 대한 답변.[18] 2012년 1월 19일 생방송 YTN 이슈앤피플에 출연하여 김연우가 자신보다 잘 생겼다고 말하여 앵커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19] 이후에 트랙을 추가하여 6집을 한 번 더 냈는데, 추가된 수록곡 중 하나가 무려 브라이언 맥나잇과 듀엣으로 부른 'Thank you (for saving my life)'이다.[20] 이 프로그램은 다른 방송사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잘 틀어 주지 않는 음악을 소개해 주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음악 리스너들 사이에서 정말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전영혁의 음악세계급으로 레어한 음악을 소개한 모양.[21] 여담으로 당시 이 프로그램의 PD가 '뉴스쇼'로 유명한 김현정 PD였는데, 조규찬이 생방송에 지각하던 날에 잠시 임시진행을 맡았다가 반응이 좋아 방송진행자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현재는 CBS라디오의 간판 프로그램인 CBS 김현정의 뉴스쇼를 진행하고 있다.[22] 그가 2009년 낸 어쿠스틱 앨범 제목이기도 한데, 대중음악웹진 보다에서 활동 중인 음악평론가 김윤하는 이 앨범을 물 흐르듯 흘러가는 한 장이라고 평하였다.[23] 사실 김동률은 유희열이 의외로 잘 불러서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조규찬과 유희열은 동갑내기 20년지기 친구이기에 이런 능욕(?)이 가능했다. 조규찬과 해이 부부가 출국 전 마지막 방송이었던 2010년 7월 16일 스케치북에 같이 나왔을 때 유희열이 자기 직전에 생각해보면 웃기는 전설에 남을 섹드립을 쳤다. 여기서 보자. 조규찬-해이 부부 파트는 38분부터 나온다. 조규찬의 공처가적인 면도 드러난다. 아내를 따르는 게 세상을 사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허나 틀리면 내가 당신을 연주할 거야[24] 석사 과정은 2년이지만, 그 후 1년 간은 아이와 함께 지낼 예정이기 때문에 3년 후에 돌아온다고 본인이 레이디경향과의 인터뷰에서 언급하였다. 그리고 나는 가수다는 그의 귀국을 늦춰 버리는데...[25] 이 사진을 올리신 분은 '아솜'이란 네이버 블로거로서, 현재 서울 인헌고등학교 미술교사로 근무 중이다.[26] 9집 'Jessie' 라는 곡이다. 꿈 속의 Jessie. 여성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제목이지만 여성도 남성도 아닌 Fishing Boat이다. 가사를 살펴보면 My dreamy boat Jessie, 언젠간 열린 바다로 우릴 데려가 줄 Jessie라는 부분이 나온다.[27] 비슷하게 휘성에게는 6657이라는 별명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