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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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대 제호
4.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5. 관련 문헌
5.1. 사측
5.2. 안티조선측
6. 역대 임원
6.1. 상임고문
6.2. 명예회장
6.3. 명예사장
6.4. 회장
6.5. 대표이사 사장
6.6. 대표이사[1]
6.7. 대표이사 부사장
6.8. 대표이사 전무
6.9. 부사장
6.10. 부사장대우
7. 역대 법정등록인
7.1. 발행인
7.2. 편집인
7.3. 인쇄인
8. 역대 주요 간부
8.1. 주필
8.2. 논설고문
8.3. 논설주간
8.4. 논설위원실장
8.5. 수석논설위원
8.6. 편집고문
8.7. 편집국장
8.8. 편집국장 대리


1. 역대 제호[편집]




2. 일제강점기[편집]







기존에는 창간호를 보유하지 못해 1920년 3월 9일자 제3호가 가장 오래된 지면으로 전해졌다가, 2010년에 1920년 3월 5일자 창간호가 일부 발견되었다.# 다만 이때 발견된 창간호는 신문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제1면이 빠진 채 제3, 5, 13, 14면만 남아 있다. 그나마도 제5면과 제13면에는 먹으로 붓글씨 연습을 한 상태. 1920년 3월 7일자 제2호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비단 이 뿐만이 아니라 남아있지 않은 날이 많으며, 남아있는 지면도 훼손이 심한 경우가 많다. 이는 조선일보의 경영권이 불안정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과거 신문(아카이브)의 보존 상태가 불량하다는 얘기다.

창간호의 제5·14면은 창간 축하 광고와 기고가 있고, 일반기사는 제3·13면에 '조선 현하의 공업 상태'라는 기획기사와 '산림사업과 수전' '1919년의 조선무역 개황'이라는 경제 기사가 실려 있다.

제3호의 머리기사 사설 제목은 '실업(實業)의 실지 (實地)'인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조선 5백년 실업이 미발달하였다. 위(謂)하여도 현상(現狀)의 실업보다는 십분 우승(優勝)한 바이요 현상 수십년래 실업이 극발달하였다 위하여도 5백년 유래의 실업보다는 십분 쇠퇴한 바이라 하노니 하이연야(何而然也, 무슨까닭인가)오. 5백년 유래의 실업은 실지가 유(有)하다 함이요. 현상 수십년래의 실업은 실지가 무(無)하다 위함이라.


1920년 3월 5일조진태, 예종석 등 친일인사들이 주축이 된 친일경제단체였던 대정실업친목회(大正實業親睦會)[2]에 의해 창간되었다. 사장으로 조진태, 발행인 겸 부사장으로 예종석, 편집국장에 조강 그 외에 최남, 최원식, 최국현, 서만순, 방한민 등이 참여하였다.

대정실업친목회가 친일단체였기에 아마 일제는 이들을 통한 선전을 목적으로 창간을 허가해준 것으로 보이나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조선일보의 일선 기자들은 거기에 따르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창간 이후 6개월도 안되는 기간 동안 30여 차례의 기사 압수처분을 받았다. 특히 1920년 6월에 최국현과 방한민이 연재한 '조선민중의 민족적 불평'이라는 연재물 때문에 당시 발행인이자 부사장이었던 예종석은 총독부에 의해 쫓겨난다. 그리고 8월에 방한민이 쓴 '자연의 화'라는 논설로 인해 조선일보는 민간지 최초로 1주일 정간을 당한다. 정간이 풀리자마자 9월 5일에 '우열(愚劣)한 총독당국은 하고(何故)로 우리 일보(日報)에 정간을 명하였나뇨'라는 내용의 논설을 실어 다시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2달 뒤 정간이 풀리긴 했으나 1921년에는 '골수에 맺힌 조선인의 한'이라는 연재기사 등으로 계속해서 여러번의 정간 처분을 받았다.

1921년 4월에는 친일파 송병준이 대정실업친목회로부터 회사를 인수했다. 앞에서도 일부 언급했지만 재밌는 점은 1920년~1924년 기간동안 조선일보 사장, 운영진들이 조진태, 송병준을 비롯한 친일파 거두였음에도 그 밑에 기자들은 조선총독부에 반대하는 항일 민족지 성향이 아주 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성향도 꽤 보였다.[3] 특히 친일 거두 송병준이 사주로 있던 1921년~1924년 초 사이가 사주(경영진) vs 기자 간의 대립이 아주 격렬했는데 친일파 경영진으로 구성된 사주와 대척점에 선 젊은 기자들의 적극적 문필 활동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조선총독 사이토씨에게 사직을 권고한다 코렁탕 논설을 쓰는가하면, 독립군 의용대원들이 일본군을 상대로 교전한 사실을 크게 보도#하면서 총독부로부터 압수를 여러차례 겪었다. 압수수색→정간조치 여러 차례 + 경영진(친일파)로부터 압박을 당해도 조선일보 내 기자들은 계속해서 이런식의 항일 논조로 일관해왔다. [4]

결국 송병준은 1924년 9월에 경영을 포기하면서 독립운동가 신석우가 8만 5000원에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이 무렵 조선일보는 민족 신문이자 공산주의자[5]도 논설기자로 받아들이는 등 이념에 구애받지 않는 신문사였다.[6] 창간 초기부터도 그랬지만 특히 이 시기에는 총독부의 눈에 가장 거슬렸던 신문으로 사사건건 검열과 탄압을 받았다.[7]

이 시기에는 독립운동가로 명망 높았던 이상재안재홍도 조선일보 사장을 지냈다.

파일:신간회_창립대회.jpg
1927년 2월, 신간회 출범식을 다룬 조선일보 기사. 신간회는 일제강점기때 '합법적'공간에서 활동했던 좌-우 연합 성격의 독립운동 단체였다.[8] 여기 신간회 핵심 멤버들 가운데 조선일보 출신들이 많았다.(ex:안재홍, 이상재, 이승복, 홍명희, 한용운 등)
1927년에 조선일보는 사회주의자와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이 결성한 좌-우 연합 성격의 신간회활동을 적극 주도하고 지원, 다양한 강연 주최 활동하는 등 합법적인 공간에서 독립운동과 사회활동, 계몽운동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1931년 이후 자금난을 겪고 '재만동포 자금 횡령사건'[9]에 연루되어 사장 안재홍이 구속당했다.

이후 사장의 공백과 총독부의 잦은 탄압과 검열로 심각한 경영난에 시달리다 1933년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거두이자 광산왕인 방응모에게 소유권이 넘어가며[10] 이때부터 조선일보는 친일적인 논조로 변절해버렸다.[11] 친일적인 논조를 본격적으로 보인 시기는 1936년 새해 첫 날 신문에 당시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의 '연두교사'를 실은 내용 전후로부터였다. 그 내용은 마치 '임금이 신민(臣民)에게 내리는 교지' 정도급이었다. 물론 총독부당국의 압력이 있었다.[12] 같은 해 8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동아일보가 총독부의 압력으로 강제휴간을 당하자, 경쟁관계였던 조선일보는 전국적으로 발전자축회를 개최하는 등 이를 사세 확장의 기회로 이용했다.[13]

1937년 7월 7일, 일제가 '루거우차오 사건'을 조작해서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중일전쟁)하자, 이무렵 조선일보는 일본군의 '연전연승' 소식을 실시간 중계를 했다.[14] 일본제국의 '애국일'인 9월 12일자 신문은 '황군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전 조선적인 애국'을 부르짖었다.[15] 이무렵 상하이 전투를 비롯해 난징 전투 등 일본군의 전투 소식에 중계방송하듯이 다룬 정도(...). 여기에 1937년 12월에 일본제국이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 시를 점령했을 때는 마치 '축제 분위기'인거 마냥 신나게 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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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2월 11일, 난징성 전투. 난징 성 함락 당시 보도한 조선일보

지나의 수도 남경은 이에 함락되었다. 진강, 구용, 심수의 소위 '제1 크트' 국방선에 의하여 난공불락을 자랑하고 수도 사수를 맹서한 국민정부도 황군 정예 앞에는 함락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면적 총공격을 개시한 이래 4개월 만에 수도 남경을 함락하였다는 것은 세계 역사상 희유(稀有)한 일이다. 남경성 방공 기타의 방위에 있어서 세계 제일이라는 칭(稱)이 있다. 지나 군대의 전투력은 근대국가의 육군으로서 손색이 없다. 함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신속적 스피드로 성과를 수하였다는 것은 지나군의 열세에 의한 것보다 충용한 황군 장병의 우월한 데 기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군사상 여러가지 '핸디캡'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단시일에 적국 수도를 함락하였다는 것은 일본군의 실력이 여하히 정예한 지를 좌증하는 것으로 다 같이 축하할 바이다.


드넓은 중국 침략 자체 병력만으로 감행할 수 없던 일제는 1938년 1월 중순 '조선이 지원병제도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는데, 여기서 조선일보는 1938년 1월 18일자 사설에 '이제 조선에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한다는 것은 획기적인 중대 사실'로서 내선일체를 표방한 것이라고 보도했다.[16]#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 발발했을때 조선일보는 사설 '독파 전단 개시/구주대전[17]은 불가피'에서 나치독일을 지지하였고, 이어 "세계대전은 제국(일제)의 일대 비약의 호기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18]

이후 조선일보는 연달아 거의 매일 차마 보기 민망하다 싶은 수준급의 기사 글들 연달아 기고하는 등, 총독부로부터 국민적 입장을 가진 신문으로 극찬받을 정도였다.

그와 더불어 구 일본군의 무운을 기원하는 광고, 일장기, 일본도를 든 어린이들을 이용해 침략 전쟁을 미화한 광고 등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광고를 자주 게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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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를 제호 위에 올리고[19] 천황 부부 사진을 1면에 실은 <조선일보> 쇼와15년(1940년) 1월 1일자 신년호

건곤일전(乾坤一轉) 욱광(旭光)은 동천(東天)에 빛나고 서기(瑞氣)는 사해(四海)에 미만(彌滿)한 기원 2600년이요 쇼와 15년(1940년)의 원단(元旦)을 맞이하였다. 이날을 당하여 천황폐하께옵서는 만수무강하옵심을 봉하(奉賀)하오며 황실의 유익강영(愈益强榮)하심을 봉축하는 것은 대일본제국 신민의 무상(無上)한 경행이요 지고한 영광이다.

생각건대 신무(神武) 천황께옵서 일지환서수(日之丸瑞穗)의 국(國)을 조개(肇開)하옵신 이래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통(皇統)이 금점무결(金點無缺)로 2600년 동안 계계승승(繼繼承承)하여 보조유영(寶祚愈榮)하고 국초익견(國礎益堅)한 것은 실로 만방무비(萬邦無比)의 경행이다. 더욱이 황위(皇威)는 세계 만국에 현양(顯揚)되고 황화(皇化)는 동아 대지에 희합(熙合)하여 가는 이때에 기원 2600년의 이날을 맞이하는 것은 대일본제국 신민의 독특한 광영이요 지대한 경행이다.

금상(今上) 폐하께옵서는 제124대의 천황이시옵고 이날로써 어천조(御踐祖) 제15의 원단을 맞이하옵시는 바 윤문윤무(允文允武) 만기(萬機)를 어총람하시옵고 옥체유건하옵시와 성덕(盛德)의 우로(雨露)가 사해에 호택(浩澤)하옵는 것은 일상 배승하옵는 바이다.

황후 폐하께옵서는 곤덕(坤德)이 숭고하옵시며 황태자 전하께서도 6회의 탄일을 지나신 지 몇 달이 아니 되어서 새해를 맞이하시었는데 어건장하신 생활은 일상 승문(承聞)되는 바이다. 황족 각궁 전하께서도 어건강하시와 원단을 맞이하심은 국민 일반의 봉축 불기(不己)하는 바이다.

회고컨대 2600년 배양하여온 팔굉일우(八紘一宇)의 황도정신은 동아 신질서 건설의 성업을 통하여 그 실현의 단계에 도달하였다. 이날은 황국의 총력을 거(擧)하여 이 성업 완수에 매진하는 제4년의 원단이다.

일선의 황군 장병이 황위를 장(杖)하고 숭고한 사명을 달성하려고 천신만고를 감당하고 있다. 호국의 영령에 경조(敬弔)하고 존귀한 희생을 위문하는 것은 총후의 감사와 감격을 표현하는 상도(常道)다.

대일본제국 신민은 누구나 이날이 황기 2600년이요 성전 제4년의 원단임을 깊이 기억하여서 억조일심으로 시간(時艱) 극복, 성업 달성에로 매진할 결심과 각오를 모고(牟固)하게 하여야 한다. 내외 다난한 이 기원 2600년에 만사가 형통하여 소기한 목적을 달성하여야만 상으로 황은에 보답하고 하로 황국의 사명에 충실하는 소이가 될 것이다.


왜 1940년 신년축사가 요란하게 되었는지에 대한것은 황기 기년법으로 2600년이 되기에 일본제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덴노 중심의 국민총화를 부추기던 것과 관련이 있다. 황기2600주년 기념 봉축곡의 역사적 배경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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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8월 11일자 조선일보. 폐간사

조선일보는 신문 통제의 국책과 총독부 당국의 통제 방침에 순응하여 금일로써 폐간한다. 우(吁)라 물건은 본(本)과 말(末)이 있고 일은 시(始)와 종(終)이 있다. (중략) 금일로써 본보는 무(無)와 사(死)의 막이 내리었다.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체의 감회는 주관과 객관의 가치 판단에 있거니와 뚜렷한 사실은 이 조선일보가 영영 조선사회에서 없어진 것이다.(중략) 작년 9월에 발발한 구주대전과 독이의 대승을 계기로 하여서 세계 정세는 큰 전환을 보게 되고 국내 정세가 또한 이에 대응하여서 신체제가 건설되려고 하는 이때에 신문 통제가 국책으로 수행되는 이상 우리는 이에 순응하는 이외에 다른 사정을 운위할 바가 아니다. 본보의 폐간도 이 점에 근거가 있다. 끝으로 본보를 애독지지하여 준 사회 대중에게 감사와 미안의 말씀 이외에 다른 말이 없는 것을 심량하여 주기 바란다. -폐간사-


그러다가 1940년에 일제 조선총독부에서 '같은 논조의 신문들이 중복해서 여러개가 있을 필요 없다'면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시킨다.[출처][20] 조선일보는 '폐간사'와 '사고'(社告)에서 '신문 통제'라는 '국책에 순응'해서 조선일보를 폐간했다고 밝혔다. 다만, '감사와 미안의 말씀 이외에 다른 말이 없는 것'을 깊이 양해해 달라는 말로 여운을 풍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조선일보는 총독부에 저항도 못하고 동아일보와 같이 폐간하게 된다.[21] 신문사가 폐간된 이후에도 사주 방응모는 월간 <조광>을 계속 발간하여 전시체제기 동안 내선일체를 적극 홍보하고 침략전쟁을 미화, 찬양하는 논조를 노골적으로 보였다.


3. 8.15 광복 이후 미군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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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23일자 복간호

만천하의 환호와 기대 속에 조선일보가 오늘 속간된다. 삼천만 동포가 못내 사랑하고 열렬히 지지하던 조선일보가 조선의 자주독립의 큰 물결에 따라 오늘부터 역사적 재출발을 하게 되었다.

(중략) 철쇄로 얽매이고 날카로운 총검 밑에 떨어 오직 노예적인 굴종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중략) 그러나 이것은 모두 과거의 일이다.

(중략) 비노니 삼천만 동포는 배전의[22]

애호와 편달을 아끼지 말지어다. -속간사-[23]


1945년, 일제 패망 후 8.15 광복을 맞으면서 1945년 11월, 조선일보가 복간되었다. 복간과 동시에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의 노선을 적극 지지하면서 '민족의 대변자'인거마냥 나섰다. 이후 조선일보는 초창기 반탁운동, 미소공위 반대, 반공주의적 성향, 한국독립당 지지 논조를 보여왔다. 하지만, 반공주의적 논조를 보였다해도 최소한 기사,사설 기고할때는 중도적인 입장의 사설글들 기고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1945년 12월 5일. '임시정부에 제언함'이라는 사설에 조선일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력과 조선인민공화국 세력이 합작하여 민족 통일 전선을 완성할 것을 바란다. 민중의 총의에 의한 민주 정부여야 할 것. 현재 민족 통일 전선의 암이 되어 있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 문제이다. 이런 도배를 신성한 우리의 건국에서 배제함으로써 후환을 단절하는 데 어느 누가 찬동치 않을 것인가?'라고 강조를 하였다.#

조선일보는 해방정국 시기 김구를 지지하면서 한독당의 노선을 지지하면서도 초창기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사설을 기고하는 등 좌우합작 7원칙에 지지하는 사설을 기고하기도 했었다.[24][25] 1947년 국제적으로 냉전이 불어닥치기 시작한 '트루먼 독트린' 시기 전후로 냉전이 심화될 무렵. 1948년 1월, 단정 수립 지지하는 사설을 기고하면서 단정 지지로 선회했다.[26] 사장 방응모는 1948년 6월 김구가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반대하며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서 '남북협상'에 참여하자 그와 결별한 뒤 조선일보를 '반공주의적 신문'으로 변모시켰다.


4.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편집]



4.1. 제1공화국 시기[편집]



4.1.1. 1948년 ~ 1950년[편집]


정부 수립 이후 초창기 1공화국 시기에는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이었다.[27] 어느 정도로 비판이 강했냐면, 반민특위 활동 당시에 조선일보는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친일, 반민족행위자 처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사설을 연달아 기고하는가 하면[28][29], 1948년 11월, 정부에서 국가보안법을 제정했을 무렵에 조선일보는 "이 법이 악용될 소지가 매우 크다!"라고 사설에가다 강력하게 규탄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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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1월 14일자 조선일보 사설 '국가보안법을 배격함'(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전략) 오늘의 정치적 혼란, 난마적인 사상의 불통일의 이 현상에서 더구나 정부는 국회의 내각개조론에 까지 불순을 꾸짖는 이러한 이 현상에서 이러한 법의 제정은 대한민국의 전도를 위하여서나 우리 국민의 정치적 사상적 교양과 그 자주적 훈련을 위하야 크게 우려할 악법이 될 것을 국회 제공(諸公)에게 경고코저 한다. 원래 법치국됨은 법망의 정비 교묘(巧妙)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법치국의 근대적 발달은 법이 민주적 성격을 가지고 국민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발달을 도모하여 그 자주와 권리를 존중하는데서 국가의 통치권력으로써도 이를 보장하고 침해치 않음으로써 정치의 인류사적 공헌을 목표하는데 본의가 있는 것이고 국민을 착취나 지배의 대상으로 포로시하는 그러나 법망의 주밀, 세공화는 법치의 역사성에 반역하는 것이다. 그러한 예가 군왕 전제의 일본이나 독(獨), 이(伊)의 파씨즘국가가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그러타고 이러한 원리원칙이 오늘 대한민국을 이 상태에서 그대로 적용될 것이냐고도 말할 것이나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원리원칙은 언제나 부인될 수 없는 것이고 또한 대한민국과 그 국민의 전도양양할 것을 축복코저 할 때 다시금 이러한 원리를 토대로 입법과 정치가 표(表)와 리(裏)의 물샐틈없는 실천력을 발휘하여야 한 것을 주장한다.(후략)


한편, 이 시기에도 극우 반공주의적인 논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대표적으로 여수,순천 일대에서 일어난 국군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의 배경에 대해서는 14연대 반란군의 학살에 초점을 맞췄다. 조선일보는 "지난 20일 여수에서 국군 반란이 일어났단 보도를 듣고 우리가 제일 염려한 것은 인명의 실상과 시설의 파괴에 대한 것"이라고 전했다.[30][31]


4.1.2. 1950년 ~ 1960년[편집]


6.25 전쟁 개전 초기 전세는 대한민국쪽에 불리했다.

이런 전세는 조선일보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32] 국방부의 '허위 보도자료'를 그대로 베껴써 인용하여 27일자 신문엔 '전과 혁혁·요격 태세 완비/국군 일부 해주 돌입/적 사살 180명/전차 등 격파 58대'## 이란 거짓 기사를 1면에 대서특필했을 뿐 자신들이 알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일절 보도하지 않았다.

이는 조선일보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자유신문 등 국내 언론매체들이 다 저지른 오보이기도 하다. 비록 정부의 요구에 따라 한 일이라고는 하나, 이는 한국 언론사에 있어 매우 커다란 오점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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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호외를 통해 북한을 찬양하였다.[33]

“입성한 부대들은 서대문 마포 양 형무소에 구금된 애국자들을 석방하고 괴뢰집단의 소위 대한민국 중앙청 서울시청 검찰청 미국대사관 은행 소위 유엔 위원단 및 중요한 도로 교량 체신 철도 및 각 신문사를 완전히 해방시켰다”

“오래 갈망하여 맞이하던 조선인민군대를 서울시민들은 열열한 환호로서 환영하였다”

“서울에 있던 만고역적 리승만 도당들과 미국대사관 및 유·엔위원단들은 이미 27일 오전 중에 서울에서 도망하였다”

"서울은 완전히 우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수도로 되었으며 서울 전체 시민들의 거리로 되었다. 이제 시민들은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치안당국의 지시를 절대 신임하고 반동들의 온갖 모략에 귀를 기우리지 말라"

"반동분자들의 데마(유언비어)와 테로(테러) 방화 파괴 등에 최대의 경각성을 돌리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우리민족의 경애하는 수령인 김일성장군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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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6월 28일부터 신문제작을 중단했다고 주장한다. 이 시기의 내용은 조선일보의 공식기록에 없다.# 다만 당시 상황에 대한 관계자들의 회고를 종합하면 조선일보를 비롯한 대부분의 신문사에는 인쇄공에서 기자, 간부에 이르기까지 공산당과 연계가 있는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호외는 이들이 찍은 것으로 보는 게 맞다. 이후 인민군 점령기간 동안 서울에서 조선일보는 발행되지 않았다.

1950년 9월 28일 인천상륙작전의 후속 작전의 결과로 서울이 수복되자 10월 23일 정식으로 속간하였는데, 사장 방응모 및 주요 간부들이 죄다 납북당하는 바람에 1면에 주주총회 공고를 내 대책을 논의한다는 내용이 실렸다. 이후 꾸준히 발간하다가 1.4 후퇴로 서울이 다시 공산군에게 넘어가 1월 2일부로 다시 중단되었으며, 부산으로 피난하여 허름한 공장에 터를 잡고 2월 1일부로 복간했다. 2월 말경 공장의 사정으로 잠시 휴간했다가 22일부터는 정상적으로 배포되기 시작했으며, 3월에 들어서는 다시 휴간하였다가 5월 3일 서울로 돌아와서 이후 끊김 없이 이어진다. 5월 속간 이후부터는 전쟁통에 흩어진 가족과 친지들을 찾기 위한 광고도 많이 실렸다.

한국전쟁 기간 논란있는 굵직한 사건들을 밋밋하게 다뤘다. 이를테면 고급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얼어 죽고 굶어죽는 군인들이 속출한 국민방위군 사건을 일체 다루지도 않았다. 이어 국군이 북한 인민군과 빨치산과 내통한다는 혐의를 씌워 무고한 민간인 719명을 학살한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에 반발해 이시영 부통령이 사표를 제출한 사건을 전하면서도 그 이유는 전하지 않았다.#

한편, 이승만 전 대통령의 반민주적 행위도 또한 보도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국회에 제출한 직선제 개헌안이 압도적 반대로 부결되자, 정치깡패들(땃벌떼) 동원에 헌병대 동원시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구속시켰던 무렵(부산정치파동) 조선일보는 이승만 정권의 정치 공작에 대해 일절 지적하지 않았다.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도 마찬가지로 어떠한 논평도 내지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한동안 한국전쟁 전후로 '대통령의 의중'을 떠받들고 매카시즘 논리에 휩쓸려 독재정권의 '어용지'로 전락.# 자유당 정권의 막나가는 막장짓들에 대해서는 일절 다루지도 않았다. 6.25 당시의 타격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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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3월 26일자. 이승만의 80살 생일맞아 특집 지면으로 다뤘다.[34]

오늘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을 맞이하여 노(老) 대통령에게 경하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환희와 감격을 느끼게 된다… 80이면 고희에 10년이 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이 대통령에게 적용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가능하다면 백천(百千)세가 거듭 되었으면 한다. 왜그러냐 하면 우리의 전도(前途)에는 해결해야 할 중대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에게 더욱 신의 가호가 있어서 통일대업을 완수하고 국가 기초를 더욱 확고히 하는 데 더 한층 노력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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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시기의 조선일보[35]
그러다 1960년 4.19 혁명 시기에 또다시 시류에 따라 변신. 기존 노선에서 틀어 동아일보와 함께 독재정권을 맹공격하는 신문사로 활약한다. 3.15 부정선거 무렵부터 조선일보는 마산에서 일어난 부정선거 규탄 투쟁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는가 하면 4월 13일~17일자까지 이승만 정권을 강하게 비판하는 사설을 잇달아 내보냈다.


4.2. 제2공화국 시기[편집]


4월 혁명 직후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교원노조 운동을 극히 소홀하게 다루다가 6월 23일자 석간 1면에 '교원노조에 대한 문교부의 부당한 해산명령'이라는 사설을 올려 노동운동을 지지하는듯한 사설을 기고했으나[36] 1960년 7.29 총선 뒤 구성된 장면 정권이 교원노조를 탄압하는 데도 조선일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후 장면 정권의 노동운동 탄압이 계속되는데도 조선일보는 여기에 외면했다.

또한 조선일보는 이 시기 반통일적인 입장을 나타내기도 했는데, 7.29 총선을 계기로 혁신세력이 '중립화 통일론','남북협상론'등을 제기하자 조선일보는 7월 10일자 석간 1면 사설을 통해 '반공 지상주의적 통일론' 또는 '타율적 정세에 의한 통일론'이라고 볼 수 있는 주장을 펼쳤다.[37] 1961년 5월, 서울대 민통련이 남북학생회담을 공식 제의하기로 결정하자 조선일보는 6일자 석간 1면에 '시도의 가치 없는 남북 학생회담 제의'라는 사설을 내보냈다.[38]


4.3. 제3·4공화국 시기[편집]



4.3.1. 초창기부터 3선 개헌까지[편집]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조선일보는 5월 19일자부터 30일자까지 '군사혁명'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고 미화하는 사설을 무려 12편이나 내보냈다. '제2단계로 진입한 혁명의 완수를 위하여', '혁명의 완수와 국내외의 기대', '제2공화국의 붕괴와 최고회의의 사명', '국제적으로 공고해진 혁명정부의 위치'등 사설 등이었다.#

이어 1963년 민정이양을 앞두고 박정희가 이른바 '혁명공약'을 저버리면서 군복을 벗고 대통령에 출마하기 위해 '번의'를 거듭하던 무렵, 조선일보는 이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논조를 펼쳤다.# 그러나 이무렵 강하게 의혹이 일던 김종필이 주도한 '공화당 사전 조직'에 대해서는 진상을 보도하지 않았다. 1963년 쿠테타세력이 저지른 '4대 의혹 사건'(증권 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빠징코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1964년 '언론윤리위법 파동'을 이용해 언론사주들을 어르고 달래자 조선일보는 한동안 그 '악법'에 저항하는 논조를 보였다. 특히 최석채 주필[39]이 재직했을 당시 1964년~1969년까지의 조선일보는 사회적 약자, 노동운동에 많은 관심과 옹호하는가하면 박정희 정권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적인 논조들을 상당히 많이 기고하는 등 민주주의적인 입장을 지지하여 당시로서 매우 용기있는 주장들을 과감하게 다뤘다.[40][41][42]


4.3.2. 3선 개헌 전후 입장 변화와 유신체제 시기[편집]


1969년 3선 개헌을 전후로 조선일보는 '친박정희' 노선으로 변해버렸다.[43][44]

이후 조선일보는 연일 내내 '친 박정희' 논조를 보이면서 1972년 유신 정권 시기로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싶을 정도로 '유신'을 적극 지지[45]한 뒤 '유신 찬양 시리즈'를 잇달아 내보내면서 반민주주의적인 입장을 확실하게 보였다.[46]

그러나 동아일보 기자들을 시작으로 일어난 '언론자유수호운동' 당시 1975년 3월 6일 조선일보 기자들은 "진실에 투철해야 하는 기자로서의 열과 성을 다해 언론자유에 도전하는 외부권력과의 투쟁은 물론 언론 내부의 안이한 패배주의와도 감연히 싸우려 한다"는 요지의 선언문을 채택하고 정론지 제작을 요구하며,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신문제작 거부를 단행하기로 결의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조선일보 경영진은 몇 명의 간부들을 동원하여 통신기사 위주의 파행적 신문제작을 감행하면서 3차에 걸쳐 주도적인 기자 33명을 파면 또는 해임(1명은 재입사)시키는 등의 조치를 통해 신문제작 거부 농성을 6일만에 강제 해산시켰다. 강제 축출된 조선일보 기자들도 '조선언론자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를 결성하여 지속적인 언론자유수호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계속되는 강력한 통제로 인해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고 언론은 유신정권이 끝날 때까지 장악되었다.#


4.4. 제5공화국 시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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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당시 조선일보의 보도[47]
1979년 느닷없이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들이 주도한 12.12 군사반란 시기 조선일보는 전두환 세력의 군사반란을 긍정적인 면으로 보도하고##하고 지지[48], '혁명'으로 미화[49][50]하였다. 이듬해 1980년 5월 17일 '서울의 봄'을 유린하는 군사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과 노태우의 '신군부'는 바로 이튿날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시위가 대대적인 민중항쟁으로 발전하자 무참한 '학살'로 그 사태를 '진압'했다. 조선일보는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 또는 '난동'이라고 허위 보도해버렸다.[51]

"광주시를 서쪽에서 들어가는 폭 40m의 도로화정동이라는 이름의 고개가 있다. 그 고개의 내리막길에 바리케이드가 쳐져있고 그 동쪽 너머에 '무정부상태의 光州'가 있다. 쓰러진 전주.각목.벽돌 등으로 쳐진 바리케이드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광주로 통하는 모든 통로가 막힌 상태에서 광주에는 식품과 의약품 등 생필품의 품귀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타지에서 반입되던 생필품이 끊긴데서 비롯된 것이지만 대부분의 상점과 시장들이 가게를 열었을 때의 안정이 보장받지 않은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고 바리케이드 저편에서 온 몇 사람들은 얘기했다...."


이어 5월 27일자, 조선일보는 <혼미-광주사태 10일째>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상가·은행 등 문 못열어" "외부와 두절, 생필품난 극심"하다며, 임시취재반을 통해 항쟁 10일째로 접어든 광주시내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광주시내의 쌀과 보리는 거의 동이 났고, 일부 문을 연 변두리지역 정육점과 어물전의 재고도 고갈 직전에 있으며, 도시가스도 공급이 제한되고 있다....강경파들은 '계엄군이 진주하면 도청에 있는 1천여발의 수류탄과 광주시 절반이 파괴될 수 있는 TNT를 터트리겠다'고 위협했다...."


광주가 계엄군의 무력에 의해 완전히 정복된 이 날, 조선일보는 <악몽을 씻고 일어나자-광주에 국민적 동포애를 호소하면서>라는, 대한민국 언론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사설을 게재했다.

"지금 오직 명백한 것은 광주 시민 여러분은 이제 아무런 위협도, 공포도 불안도 느끼지 않아도 될, 여러분의 생명과 재산을 포함한 모든 안전이 확고하게 보장되는 조건과 환경의 보호를 받게 됐고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주사태를 진정시킨 군의 어려웠던 사정을 우리는 알고도 있다. 30년전 6.25의 국가적 전란 때를 빼고는 가장 난삽했던 사태에 직면한 비상계엄군으로서의 군이 자제에 자제를 거듭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성공했다...."

"10.26 이후 거센 변혁기를 가면서 광주에서 극악화해버리고 만 이번 사태의 결과를 놓고 어찌 광주시민들에게만 그 책임을 전적으로 물을 수 있는 일일 것인가. 그것은 하나의 국민-민족집단으로서의 윤리적 차원에서 그러하며, 분단상황의 잠재적, 현재적 위기 속에 30여년을 함께 해 온 동족이요 동포로서 죄의식을 더불어 나누어가짐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마음에서이다."

5.18 민주화운동이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에 진압 당한 이후, 조선일보는 전두환을 영웅화하는 작업에 대대적으로 앞장섰다. 대표적인 기사는 1980년 8월 23일자 3면 전체를 차지한 '전두환 특집'이었다. 그것은 전두환이 대통령 되기도 전에 그에게 바친 '용비어천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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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씨를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기사
제 5공화국 시절, 1980년 8월 23일자 조선일보. 독재자+대국민학살자를 상당히 심하게 빨아대기까지 했다(...). 보기가 참 민망한 수준...[52]

그의 투철한 국가관과 불굴의 의지, 비리를 보고선 잠시도 참지 못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은 비리를 저지를 수 있는 불같은 성품과 책임감, 그러면서도 아랫사람에겐 한없이 자상한 오늘의 '지도자적 자질'은 수도생활보다도 엄격하고 규칙적인 육군사관학교 4년 생활에서 갈고 닦아 더욱 살찌운 것인듯 하다. 그가 육사를 지망한 것은 적의 군화에 짓밟힌 나라를 위하는 길은 내 한 몸 나라에 던져 총칼을 들고 싸우는 길 밖에 없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1987년 6월 항쟁까지 조선일보는 전두환 정권의 악정과 학정을 전혀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옹호하는 '친위대' 같은 구실을 하면서 독재정권의 나팔수 언론의 선두주자 위치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와 함께 조선일보는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엄청난 수혜와 혜택을 받아가며 권언유착을 즐겼고, 1980년에서 1987년 사이에 24.1%의 성장을 기록하면서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를 압살했다. 신문계 1등이 된 때는 1978년이다.[53]


4.4.1. 6월 항쟁 때의 보도[편집]


6월 항쟁의 촉발이 되었던 계기 중 하나였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박종철군이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을때, 조선일보는 '고문'이란 단어를 빼고 '조사받던 서울대생 사망'#이라고 전했다. 이는 동아일보가 고문당한 정황을 구체적으로 보도한 것과 매우 달랐다.#

이어 '직선제 개헌이 불가하다'는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이후 시민들의 저항은 거세졌고, 6월 9일에는 연세대 이한열군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항쟁의 불길은 커져갔을때, 조선일보는 '6.10 항쟁'에 대해 많은지면에 걸쳐 보도하면서 다루되, 시위 현장의 민심을 '친 민정당'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는 논조를 보였다.[54]

이어, 6월 14일자에 '벼랑에 섰다/ 다음에 올 것을 오지 않게 하려면'이라는 사설을 기고하면서 '헌정 중단'의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며 시위 자제를 촉구했다. 이는 계엄 선포 등 '일종의 협박'으로 읽히는 내용이었다.#

여야의 모든 정치인들과 재야와 학생, 종교인 및 공권력과 시민 제위에 깊은 시름을 안고서 마지막 절실한 호소를 하고자 한다. 이제 우리는 문자 그대로 천 길 낭떠러지 끝에 와 서 있다. 한 치만 더 나아가도 우리는 또다시 저 무서운 추락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중략) 시위대가 곳곳에 출몰하여 이를 경찰력만으로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될때, 그 다음 올 것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일이다. 공격을 할 때는 항상 상대방을 어디까지 밀어붙일 것인가의 그 정도를 정확하게 재야 한다. 그러지 않고 무턱대고 계속 밀어붙여서 깜빡할 사이에 적정선을 넘으면, 그 다음부터는 오히려 상대방의 역공으로 사태가 순식간에 악화된다. 야권과 학생들은 이 절묘한 '정세의 동학'을 무시하지 말기 바란다. 그리하여 지금이얌라로 벼랑의 끝에 섰음을 감지하고서, 다음에 '올 것'을 어떻게 해서든 오지 않게 하도록, 야권과 학생들은 최대의 슬기와 절제 그리고 온유함의 자세로 돌아갈 것을 당부한다. (중략) 어쨋든 우리는 올림픽도 해야하고 민주화도 해야하고 개헌도 해야한다. 이러자면 지금 필요한 것은 여야의 동시적인 대안 제시에 의한 국면 전화, 즉 '큰 정치'가 절실한 것이지, "올 것이 왔다"를 재촉하는 것이 아니다.


6월 29일, 전두환을 지지하던 조선일보는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 평화적 정부 이양을 약속한 '6.29 선언'을 발표하자, 이전의 논조를 또 한번 확 바꿨다.

6월 30일자 1면에 그 소식을 대서특필하고 2면에 '위대한 나라로의 전진을 위해/대전환의 계기가 된 노 대표의 극적 선언'이라는 통단 사설을 실으면서 노태우를 적극적으로 띄어주는 논조의 사설을 기고했다. #


4.5. 제6공화국[편집]



4.5.1. 노태우 정부[편집]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뼈대로한 '6.29 선언'을 발판 삼아 전두환의 후계자가 된 노태우 정권 시기에 조선일보는 우익의 정론지 구실을 했다. 노동조합, 특히 민주노총의 투쟁을 '반정부', '불법', '과격'으로 표현했으며, 또 이 시기에 설립된 전교조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논조를 보였다.

이 후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이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을 하겠다고 발표하자 조선일보는 그것을 호평하는 사설을 기고했다.#

또 조선일보는 학생과 재야세력의 운동을 강경하게 비판하면서 공안정국이 조성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55]

1992년 대통령 선거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한 김영삼이 '초원복국집 사건'으로 위기에 부닥치자 그를 변호하는데 전면적으로 나섰다. 당시 조선일보는 "공식적인 대책회의가 아닌 김기춘 전 법무장관의 초대에 의한 사적인 모임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 모임의 대화 내용을 공개한 통일국민당 후보 정주영의 아들 정몽준이 '도청'이라는 수단을 이용했다는 것을 비판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4.5.2. 김영삼 정부 시기[편집]


김영삼과 김대중이 맞선 대통령 선거에서 철저히 김영삼을 지원한 조선일보는 김영삼의 문민정부에 비판을 가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우호적인 논조를 펼쳤다. 하지만 '소통령'이라고 불리던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이 저지를 부정과 비리가 잇달아 드러나는데다 대통령 임기 말에 '환란'까지 터지자 조선일보의 태도는 서서히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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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터지기 직전에 조선일보 보도. IMF 구제금융 사태가 거론되기 시작하던 때는 김영삼 정부를 옹호하기 위한 보도들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가 터지자 "결국 지금의 우리 정부와 사회는 지난 30여년의 압축적 개발경제의 성장유산을 제대로 관리하는 데 실패했으며 그 가장 큰 이유는 가치지향과 정책자세로 새로운 변화와 질적 구조 전환의 시대를 관리하고 재단하려 했던 지배층의 오만과 미성숙에서 찾아야한다"며 발을 뺐다.

1997년 12월의 제15대 대통령 선거 기간에 조선일보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김대중을 공격하기 위한 기사와 논설들을 연일 쏟아냈다. 특히 DJP연합을 맹비판했다.


4.5.3. 김대중 정부 시기[편집]


김대중 정부 초창기부터 조선일보는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고수해 왔다.

대표적으로 자매지인 월간조선을 통해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 최장집씨의 사상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여 그가 끝내 사퇴하게 만드는가 하면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지 1년 3개월만에 '옷 로비 사건'이 터지자 조선일보는 '김대중 정권의 도덕성이 파탄에 이르렀다'는 논조를 펴면서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에 한나라당이 의회에서 한 공세까지 합쳐져 초창기 김대중 정부는 레임덕 직전에까지 이르었다.

그리고 이어, 김대중이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햇볕정책'과 그 결과로 나타난 '6.15 남북공동선언'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기사와 사설을 대대적으로 내보내며 북한과의 협력에 대해 회의적인 논조를 보였다.

김대중 정권은 '자민련과의 연합'이라는 약점 때문에 언론세무조사을 과감하게 추진하지 못하다가 임기 후반인 2001년 2월. 대형 언론사들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가장 주요한 표적은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였다. 세무조사에서 조선일보 사장 방상훈이 거액의 탈세를 했다는 혐의가 밝혀져 구속조치되고 실형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하자. 조선일보에서는 '세무사찰은 언론의 탄압'이라고 비난 중앙일보 사주가 탈세혐의로 구속되었을때 '언론사 사주도 납세의 의무에서 예외일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으면서#하면서 김대중 정권의 핵심 인사들과 정책에 대해 매우 강경하고 공격적인 논조의 사설을 기고했다. 2002년에는 부미방 사건 관련자 문부식5.3 동의대 사태 관련자의 민주유공자 선정에 대해 비판하는 칼럼을 쓰면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참고로 국민의 정부 시기가 조선일보가 제일 잘 나갔던 시절이었다. 특히 2000년대 초반에 종이신문 사업이 절정에 달하면서, 2001년 248만부로 최고 부수를 찍고 이듬 해인 2002년 4,817억원의 최고매출을 찍었다.


4.5.4. 노무현 정부 시기[편집]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새천년민주당 후보 노무현은 초선 국회의원 시절부터 조선일보의 적이었다. 조선일보는 한나라당의 후보인 이회창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노무현의 비리와 약점들을 파고들어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새천년민주당 국민경선 때부터 조선일보의 공격은 극에 달해서, 노무현이 경선 연설 중 "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에 손을 때십시오!"라고 일갈했을 정도였다.

또한 대통령 선거 전날 밤에 정몽준이 단일화 상대였던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갑자기 철회하자, 원래 나가기로 되어있던 사설 대신에 사실상 노무현을 찍지 말 것을 촉구하는 사설을 싣기도 한다. 이걸 대선 투표 당일 새벽에 길거리에 뿌려서, 노사모 회원들이 투표가 시작되기 전 거리로 나가 모두 주웠다고 한다. 하지만 정몽준의 지지철회 여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이회창을 상대로 2.3% 차이의 신승을 거두며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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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가 출범한 뒤 조선일보는 참여정부의 모든 정책을 비판하며 정권 내내 날을 세웠고, 2004년 탄핵 소추 당시에는 탄핵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사설과 기사를 실었으며 방송이 탄핵 반대 위주로만 보도한다며 편파적이라는 내용을 기고했을 정도였다. # 이 후에도 사학법, 대연정 파동, 대북정책 등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특히 행정수도 이전 관련 문제에서 크게 부딫쳐 청와대가 "조선, 동아는 저주의 굿판을 치우라"는 분노가 담긴 제목의 논평을 특별히 발표하기도 했었다. #

유시민2002년에 저술한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에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관계가 잘 요악되어있다.


4.5.5. 이명박 정부 시기[편집]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때는 한나라당 후보로 나온 이명박을 적극 지지하며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대통합민주신당의 후보로 나온 정동영이 이미 여론조사에서 이명박에게 크게 뒤쳐지며 해보나 마나한 분위기였지만, 당시 우파 쪽에서는 잃어버린 10년을 내세우며 정권교체에 목이 말라있었기에 한창 이기는 상황에서도 언론 차원에서의 지지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뒤 조선일보는 5년 내내 MB의 정치적 후원자가 된다. 광우병 파동, 4대강 정비사업, 미디어법, 한미FTA 체결 등[56] 여러 정치적 갈등 속에서 조선일보는 늘 이명박한나라당의 편이었다.

2009년 4~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연차 게이트 사건으로 검찰에 불려갔을 때도 조선일보는 노무현을 맹렬히 비난하며 MB 정부의 검찰 수사를 적극 지지하는 기사와 사설을 실었고, 한나라당에서 떠드는 아방궁 의혹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노무현을 공격하는데 앞장섰다.[57] 결국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새누리당의 후보 박근혜를 지지했다. 조선일보는 당시 야권에서 제기되었던 국정원의 여론조작, 과거사 문제 등을 반박하는 기사와 칼럼을 실었고, 박근혜의 당선에 기여했다.

4.5.6. 박근혜 정부 시기[편집]



4.5.6.1. 전반기[편집]

박근혜 정부 전반기 때만 하더라도 상당히 반노조[58][59], 친 신자유주의적, 반북 - 반중적인 성향을 띤 동시에 반공주의를 띤 보수언론의 선두주자로서 대한민국의 언론계를 주도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2016년 9월 이후로 박근혜 정부와 대립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4.5.6.2. 후반기[편집]

참여정부 시절 잠시 세가 꺾인 이후, 십여 년 만에 조선일보에 다시 전성기가 찾아온 것이다! 2016년 가을의 조선일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심지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우병우마저 떨어뜨리는 위세로 인해 지난 수십 년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다시 구가하고 있다.

특히 공식 매체 중에서 우병우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데는 도가 튼 매체로 소문났을 정도로, 조선일보의 공격력은 날카롭다. 하긴 우병우는 조선일보를 날리려 했으니 조선일보 입장에선 화가 나는 게 당연하며, 우병우를 열심히 족치는 중이다.

비박계를 후원한다느니 하는 의도야 어쨌든, 조선일보 입장에서는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다하고 있어 한겨레 등과도 원만한 관계를 보일 정도로 안티조선 운동 이후 무려 15년만에 조선일보의 리즈시절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4.5.7. 문재인 정부 시기[편집]


극초반기에는 문재인 정부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지만[60], 2017년 6월 이후부터는 문재인 정부가 보이는 행보의 문제점을 비롯해 청와대 인사, 민주당 인사들의 비리 의혹들을 보도하며 정권 비판을 하고 있다.

2018년에는 최저임금 인상과 임종석 비서실장 UAE 특사,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에 대하여 중점 보도했다. 이 때문에 조선일보와 진보 좌파 진영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보다도 마찰이 많다. 태극기 집회에 대해 우호적인 시선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2018년 하반기부터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이 더욱 강해졌고, 청와대 특별감찰반 비위 논란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문재인 정부 적자국채 발행 폭로 사건, 손혜원 부동산 투기 의혹, 조해주 선관위원 임명 논란, 삼척항 목선 귀순 사건, 조국 사태 등과 관련해서 문재인 정권의 행태를 비판했다.

2020년 3월 5일 창간 100주년을 맞이했고, 동월 10일에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본딴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을 개설했다.[61] 같은 해 10월 18일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조선일보가 추가 되었다. #


문재인 대통령이 창간 100주년을 축하하는 영상을 올렸다. 참고로 싫어요 수가 좋아요 수의 3배다(...)


4.5.8. 윤석열 정부 시기[편집]




5. 관련 문헌[편집]



5.1. 사측[편집]




  • 조선일보 칠십년사 (전 3권, 1990)

  • 조선일보 80년사 (전 3권, 2000)

  • 조선일보 사람들(전2권) - 조선일보 사료연구실 저. 랜덤하우스중앙. 2005.

  • 조선일보 90년사 (전 4권, 2010)

  • 신문 그 이상의 미디어, 조선일보 :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 (2010)


5.2. 안티조선측[편집]


  • 조선일보 공화국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1999.

  • 조선일보 대해부(전 5권) - 문영희, 강기석, 김종철, 김강원 공저. 안중근평화연구원. 2014.

6. 역대 임원[편집]



6.1. 상임고문[편집]




6.2. 명예회장[편집]




6.3. 명예사장[편집]




6.4. 회장[편집]


  • 방응모 (1948 ~ 1950)
  • 홍순필 (1950 ~ 1952)
  • 홍종인 (1959 ~ 1963)
  • 방일영 (1964 ~ 1993)
  • 방우영 (1993 ~ 2003)


6.5. 대표이사 사장[편집]


조선일보
역대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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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조진태

제2대

유문환

제3대

남궁훈

제4대

이상재

제5대

신석우

제6대

안재홍

제7대

유진태

제8대

조만식

제9대

방응모

제10대

장기영

제11대

방우영

제12대

방상훈



  • 조진태[62] (1920)
  • 유문환 (1920 ~ 1921)
  • 남궁훈 (1921 ~ 1924)
  • 이상재 (1924 ~ 1927)
  • 신석우 (1927 ~ 1931)
  • 안재홍 (1931 ~ 1932)
  • 유진태 (1932 ~ 1933)
  • 조만식 (1933)
  • 방응모 (1933 ~ 1953/1954 ~ 1967[63])
  • 장기영 (1952 ~ 1954)
  • 방일영(1954 ~ 1964)
  • 방우영 (1964 ~ 1993)
  • 방상훈 (1993 ~ 현재)


6.6. 대표이사[64][편집]




6.7. 대표이사 부사장[편집]


  • 안병훈 (2002 ~ 2003)
  • 홍준호 (2017 ~ 현재)


6.8. 대표이사 전무[편집]


  • 방상훈 (1984 ~ 1988)
  • 변용식[65] (2010 ~ 2014)
  • 홍준호 (2015 ~ 2017)


6.9. 부사장[편집]


  • 예종석 (1920)
  • 신석우 (1924 ~ 1929)
  • 안재홍 (1929 ~ 1931)
  • 임경래 (1932 ~ 1933)
  • 방응모 (1933)
  • 이광수 (1933 ~ 1934)
  • 이훈구 (1940)
  • 홍종인 (1952 ~ 1958)
  • 방일영 (1954)
  • 최용진[66] (1954 ~ 1965)
  • 성인기 (1958 ~ 1960)
  • 유봉영 (1960 ~ 1971)
  • 류건호 (1980 ~ 1987)
  • 방상훈 (1988 ~ 1993)
  • 신동호 (1988 ~ 1989)
  • 안병훈 (1998 ~ 2003)
  • 방계성 (2004 ~ 2006)
  • 김문순 (2008 ~ 2010)
  • 방준오 (2017 ~ 현재)


6.10. 부사장대우[편집]




7. 역대 법정등록인[편집]



7.1. 발행인[편집]


  • 예종석 (1920)
  • 최강 (1920)
  • 권병하 (1920 ~ 1921)
  • 김용희 (1921 ~ 1924)
  • 김동성 (1924 ~ 1926)
  • 안재홍 (1926 ~ 1928/1931 ~ 1932)
  • 신석우 (1928 ~ 1931)
  • 임경래 (1932 ~ 1933)
  • 방응모 (1933 ~ 1953)
  • 장기영 (1953 ~ 1954)
  • 방일영 (1954 ~ 1963)
  • 방우영 (1963 ~ 1984)
  • 류건호 (1984 ~ 1986)
  • 신동호 (1986 ~ 1989)
  • 방상훈 (1997 ~ 2006)
  • 김문순 (2006 ~ 2010)
  • 변용식 (2010 ~ 2014)
  • 홍준호 (2014 ~ 현재)


7.2. 편집인[편집]


  • 최강 (1920)
  • 권병하 (1920 ~ 1921)
  • 김용희 (1921 ~ 1924)
  • 김동성 (1924 ~ 1926)
  • 민태원 (1926)
  • 백관수 (1926 ~ 1928)
  • 장지영 (1928 ~ 1929)
  • 류광렬 (1929 ~ 1931)
  • 안재홍 (1931 ~ 1932)
  • 임경래 (1932 ~ 1933)
  • 방응모 (1933 ~ 1953)
  • 장기영 (1953 ~ 1954)
  • 방일영 (1954 ~ 1963)
  • 유봉영 (1963 ~ 1968)
  • 류건호 (1968 ~ 1985)
  • 신동호 (1985 ~ 1986/1988 ~ 1989)
  • 안병훈 (1986 ~ 2002)
  • 방상훈 (1989 ~ 1990)
  • 김대중 (2002 ~ 2003)
  • 변용식 (2003 ~ 2010)
  • 강천석 (2010 ~ 2014)
  • 송희영 (2014 ~ 2016)
  • 홍준호 (2016 ~ 현재)


7.3. 인쇄인[편집]


  • 서만순 (1920 ~ 1921)
  • 유방주 (1921 ~ 1924)
  • 김형광 (1924 ~ 1925)
  • 최익진 (1925 ~ 1926/1933 ~ 1938)
  • 이용구 (1926 ~ 1930)
  • 박창근 (1930 ~ 1933)
  • 최이복 (1938 ~ 1940)
  • 김한호 (1945 ~ 1953/1954 ~ 1966)
  • 방일영 (1953 ~ 1954)
  • 방우영 (1966 ~ 1984)
  • 류건호 (1984 ~ 1986)
  • 신동호 (1986 ~ 1989)
  • 방상훈 (1989 ~ 2006)
  • 김문순 (2006 ~ 2010)
  • 변용식 (2010 ~ 2015)
  • 홍준호 (2015 ~ 현재)


8. 역대 주요 간부[편집]



8.1. 주필[편집]


  • 남궁훈 (1924)
  • 안재홍 (1924 ~ ?)
  • 김양수 (1925)
  • 신일용 (1932 ~ 1933[67])
  • 서춘 (1933 ~ 1937)
  • 이훈구 (1938 ~ 1946)
  • 이갑섭 (1946 ~ 1947)
  • 홍종인 (1948 ~ 1949/1950 ~ 1959)
  • 김석길 (1949 ~ 1950)
  • 유봉영 (1959 ~ 1961/1961 ~ 1965)
  • 부완혁 (1961)
  • 최석채 (1965 ~ 1971)
  • 선우휘 (1971 ~ 1980)
  • 신동호 (1985 ~ 1988)
  • 이규태 (1989 ~ 1990)
  • 김대중 (1990 ~ 2002)
  • 류근일 (2002 ~ 2003)
  • 강천석 (2006 ~ 2014)
  • 송희영 (2014 ~ 2016)
  • 양상훈 (2017 ~ 현재)


8.2. 논설고문[편집]




8.3. 논설주간[편집]




8.4. 논설위원실장[편집]


  • 이규태 (1986 ~ 1988)
  • 류근일 (1989 ~ 1996)
  • 최청림 (1996 ~ 2001)
  • 강천석 (2002 ~ 2003)
  • 송희영 (2006 ~ 2010)
  • 양상훈 (2013 ~ 2014)
  • 박정훈 (2018 ~ 현재)


8.5. 수석논설위원[편집]


  • 오태진 (2005 ~ 2016)[68]
  • 한삼희 (2016 ~ 현재)[69]


8.6. 편집고문[편집]


  • 민태원 (1926)
  • 이관용 (1932 ~ 1933)
  • 문일평 (1933 ~ 1938)
  • 이광수 (1935 ~ 1937)
  • 황의돈 (1940)
  • 김형원 (1946)
  • 홍종인 (1947 ~ 1948)
  • 김규택 (1949)
  • 유봉영 (1950 ~ 1959)
  • 윤석중 (1959 ~ 1969)


8.7. 편집국장[편집]


  • 최강 (1920 ~ ?)
  • 선우일 (1921 ~ ?)
  • 염상섭 (1921)
  • 이상재 (1924 ~ ?)
  • 민태원 (1924 ~ ?)
  • 김동성 (1924 ~ ?)
  • 한기악 (1928 ~ 1932)
  • 주요한 (1932 ~ 1933)
  • 이광수 (1933 ~ 1934)
  • 김형원 (1934 ~ 1937/1945 ~ 1946)
  • 함상훈 (1938 ~ 1940)
  • 이건혁 (1946)
  • 홍종인 (1946 ~ 1947)
  • 문동표 (1947 ~ 1949)
  • 유봉영 (1949 ~ 1950)
  • 성인기 (1950 ~ 1958)
  • 천관우 (1958 ~ 1959)
  • 송지영 (1959 ~ 1961)
  • 최석채 (1961)
  • 윤주영 (1961 ~ 1962)
  • 류건호 (1962 ~ 1963/1974 ~ 1975)
  • 선우휘 (1964 ~ 1965/1968 ~ 1970/1971(대행))
  • 김병환 (1965 ~ 1968)
  • 장건호 (1970 ~ 1971)
  • 신동호 (1971 ~ 1973/1975 ~ 1980)
  • 김용원 (1973 ~ 1974)
  • 김용태 (1980)
  • 최병렬 (1980 ~ 1985)
  • 안병훈 (1985 ~ 1988)
  • 인보길 (1988 ~ 1989/1992 ~ 1995)[70]
  • 김대중 (1989 ~ 1990)
  • 주돈식 (1990 ~ 1992)[71]
  • 최청림 (1995 ~ 1996)
  • 최준명 (1996 ~ 1998)
  • 강천석 (1998 ~ 2001)
  • 변용식 (2001 ~ 2004)
  • 이상철 (2004 ~ 2005)
  • 송희영 (2005 ~ 2006)
  • 김창기 (2006 ~ 2009)
  • 홍준호 (2009 ~ 2010)
  • 양상훈 (2011 ~ 2013)
  • 강효상 (2013 ~ 2015)
  • 김창균 (2015 ~ 2017)
  • 박두식 (2017 ~ 2020)
  • 주용중 (2020 ~ 2023)
  • 선우정 (2023 ~ 현재)[72]


8.8. 편집국장 대리[편집]


  • 신석우 (1926)
  • 이선근 (1930 ~ 1932)
  • 권덕규 (1932)
  • 신동호 (1975)
  • 김윤환 (1975 ~ 1978)
  • 김용태 (1979 ~ 1980)
  • 최청림 (1992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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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장 등 겸직자 제외.[2] 대정은 당시 덴노였던 다이쇼덴노 및 연호에서 따온듯. 후일 중일전쟁 시기 일본제국 수상이던 고노에 후미마로를 수장으로 하는 군국주의 단체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와는 한국어 한자독음의 첫 2음절이 같은 것만 빼면 전혀 관련 없다. 그나마 정 자도 대정익찬회는 政.[3] 해외에서 불어닥친 '사회주의 이론'을 활발하게 소개##하기도 했다.[4] 다만 이는 창간 주체였던 친일 인사들이 갑자기 민족주의에 눈을 떠서 그러한 항일 논조 기사들을 용인했던 것은 아니다. 친일 성향이긴 하지만 결국 목표 독자는 조선인이니 조선인의 지지와 구독을 얻어내야 했기에 정간을 일부러 당하도록 유도하면서 사람들의 조선일보에 대한 인식을 바꿔보고자 시도한 것이라는 것. 이 당시 사람들은 민족언론을 조선일보가 아닌 민족주의 계열 논조를 가졌던 동아일보로 여겼기 때문에 이런 전략을 취한 것이다. 실제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정간을 오히려 환영했다고도 한다.[5] 박헌영이나 김단야, 조봉암, 김재봉, 강달영[6] 대표적인 사례로 1925년 9월 8일자 조선일보 기자 신일용(이 사람은 20년대 서울청년회 계열에서 활동한 공산주의자였다. 해방 후 우익계열에서 활동)이 '조선과 노국과의 정치적 관계'라는 사설에서 '소련의 힘을 빌려 조선독립을 쟁취하자!'라는 굉장히 과격한 사설을 실어, 총독부 당국에서 검열에 걸려 조선일보가 1개월간 정간, 윤전기까지 압수당한 사건이 있었다.# (해당 기사는 검열받아 삭제됨.) 이를 '신일용 필화 사건'이라 불리는데, 윤전기를 쥔 총독부는 해당 좌익 신문기자들을 해고시키지 않으면 신문을 내지 못하게 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조선총독부의 해고 압력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선 것은 조선일보내 보수 민족주의 성향의 기자들이었다. 그 정도로 이념에 구애받지 않았던게 당시 조선일보였다.[7] 항일지 면모를 확실히 보였던 단적인 특종 보도 한가지 사례를 들자면, 일본 경찰이 조선인 28명을 학살한 사건을 심층취재, 대서특필로 다뤄 당시로서는 매우 용기있는 언론으로서의 사명을 지닌 개념 충만한 보도들을 쏟아냈다. 1924년 9월 27일자 '渭原학살사건 현장 답사 실기. 朝不慮夕하는 국경 주민의 생명 暮夜無知中 何者의 소위인지, 1촌 6호의 전멸 극형끝에 참화/燒死한 28명/귀곡성 楸推한 초토의 폐허/정적이라고는 '지가다비'자리/방관하는 사법당국' - # [8] 당시 회원 수도 엄청났는데 약 3만 8천여명~4만여명 사이였다고 한다.[9] 1932년 '재만 조선인 동포를 위한 의연금' 가운데 일부 자금을 조선일보가 빼돌려 회사 운영비로 사용한 사건.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조선일보가 오랜기간동안 반일논조와 민족주의적인 논조를 보이면서 총독부로부터 수차례 정간과 탄압을 받으면서 경영난이 심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10] 방응모가 사장이 된 과정이 좀 복잡한데. 조선일보 측에 따르면, 1932년 2월에 조선일보 사장 안재홍이 '재만동포 자금 횡령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 의해 구속당했고 조선일보는 당시 재정악화로 고리대금업자 임경래가 조선일보 발행권을 인수했다 한다. 그리고 임경래는 6월부터 부사장을 맡아 발행인과 편집인을 겸했는데, 여기서 조선일보 사원들의 반발이 극심해졌고 조선일보 사원들은 협의를 통해 1932년 7월에 막 출소한 여운형을 조선일보 사장직으로 영입하려 했었다고 한다. 당시 감옥에 수감중이었던 전 조선일보 사장 안재홍 역시 여운형을 조선일보 사장직 후임으로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외일보(당시의 중앙일보 -현재의 중앙일보가 아니다.-) 기자로 활동했던 홍증식이 먼저 선수를 쳐 여운형을 찾아가 중앙일보 사장으로 영입. 여운형은 1933년 2월에 중앙일보 사장직으로 취임한다. 선수뺏긴 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 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지역감정(당시 서북인과 기호인들 간 대립 등)으로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당시 '광산왕'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11] 다만, 방응모 사장 시기에도 처음부터 대놓고 친일적인 논조를 보이지는 않았다. 방응모 사장 체제 초창기에는 주로 '민족개량주의'적인 범주내에 문화,상업지 등 실력양성 위주로 주장하는 위주의 입장(이는 당시 부사장이었던 이광수의 영향으로 보인다.), 기사들 위주로 내보내면서 기존 20년대~30년대 초반 사회주의에 우호적인 입장들이 30년대 초중반 전후로 갑작스럽게 반공주의적인 색채를 띠다가 1936년에 느닷없이 친일 성향으로 확실히 띠게 된다.[12] 1936년 1월 1일자 조선일보 - 각계인사의 년두사. 년두의 사. 우원조선 총독 # [13] 이 시기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는 전국 지역지국 시찰에 나서고 다녔는데, 1937년 2월 원산의 순회강연에서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는 망언을 서슴지않아 참석자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한 시민은 극도로 분개하여 탁자를 마구 두드리고 일부 시민은 마침내 완력을 써서 호소했다고...- 출처 - <조선출판경찰월보> 제102호 <중앙시보> 中 . 참고로 <조선출판경찰월보>는 조선총독부의 언론·출판·문화예술 부문 검열기구였던 경무국 도서과가 1928년 9월부터 매달 발간했던 자료로써 일제가 조선내 출판·간행물을 대상으로 검열, 삭제한 내용을 담고 있다.[14] 개전 직후였던 1937년 7월 11일에 조선일보 사내 간부회의에서 매우 중요한 회의가 있었는데, 이 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 씨' 등으로 용어를 '아군/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그러자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이에 반대입장을 나타냈지만. 사장 방응모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몇십만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3.1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후 조선일보의 지면은 철저히 '국민적 입장'으로 변했다는 조선총독부 당국으로부터 평가를 받았고, 조선일보 사원들 내부를 비롯해 안팎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러한 편집방침은 변하지 않았다.[15] 1937년 9월 12일자 조선일보 - # [16] 조선일보 1938년 1월 18일자 사설. # [17] 유럽 전쟁, 즉 서부전선과 이후 벌어질 독소전쟁.[18] 獨波戰 端開始 [19] 심지어 원본에서 해당 일장기는 붉은색으로 컬러 인쇄되었는데, 당시 신문이 흑백이었음을 생각하면 특별히 눈에 띄는 부분이다.[출처] - 조선총독부 보고서 - 언문신문통제안(諺文新聞統制案)-1939년 작성-[20] 이 시점의 일제는 중일전쟁을 도발한 이후로 전선에서 고착화되어가고 국제적으로도 고립되어가던 시기여서 물자부족등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래서 일제 총독부는 '같은 논조의 기관지가 여러개 있을 필요없다. 경성일보매일신보만으로도 충분하다!'이런 태도를 보인것.[21]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자발적'으로 폐간했다고 하고 있다.# 자발적 폐간을 뒷받침하고 있는 총독부 비밀 문건이 공개된 바 있는데, 당시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가 총독부에 동아일보와 동시에 폐간할 것을 조건으로 요구한 것과 함께 대가로 돈을 받은 것 등의 내용이 드러났다. # [22] 앞서보다 갑절의[23] 현대 맞춤법에 따른 교정을 거쳤으며, 원문은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해당 기사 참고.[24] 조선일보 1946년 10월 4일자 - # [25] 당시 조선일보는 한국독립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입장을 가져왔었는데. 당시 한독당은 '충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해왔었다. 반탁,미소공위 반대와 같이 입장 나타내고 같이 활동했던 이승만과 다른점이 바로 이 부분. 이승만이 주장해왔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안' 주장과는 이 부분에서 크게 갈렸다.[26] 이 시기를 전후로 조선일보는 김구와 결별하게 된다.[27] 제1공화국 당시 신문을 놓고 보자면, 친정부 어용기관지 서울신문, 자유신문 등이었고, 친야당(민주당) 기관지로는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이었다. 이 가운데 조선일보가 정부에 가장 날카롭게 보도를 많이 했었다고... 어디까지나 1948년~1950년 즉 6.25 전까지 한정. 50년대 중반 무렵에는 경향신문이 이쪽에서 가장 날카로웠고 50년대 말에 경향신문은 여적필화 사건으로 정간당하는 탄압 받기도 했지만..., 50년대 말에는 동아일보가 날카로웠고...[28] 오늘날 조선일보가 보이는 친일파 문제에 관한 입장과는 확연하게 정 반대를 보일 정도다.[29] 다만,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이 시기 반민특위 와해공작 중 하나였던 국회 프락치 사건 등에 관해서는 깊이있게 취재한 기사나 문제점과 의문을 제기하는 논설을 전혀 보도하지 않아 다소 좀 밋밋한면이 있긴 했다.[30] 1948년 10월 28일자 사설 '叛亂의 속보를 듣고 '- # [31] 여순사건을 일으킨 14연대 반란군들이 여수와 순천에서 민간인 동조자들과 함께 주요한 관청들을 습격해서 경찰관들을 비롯한 우익계 인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살육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그들이 벌인 행태에 대해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여순사건 이래 60년이 넘게 많은 현대사 연구가들이 조사하고 연구해서 발표한 자료들이나 당시 외국인 기자의 보도를 보면 반란군과 동조자들의 살육이나 '인민재판'에 비해 진압군의 '학살'과 인권유린도 그만큼 가혹했었다. (특히 김종원의 잔학한 진압과 학살은 특히 가혹했다. 사상이 의심되기만 해도 일본도로 죽인다거나...얼마나 심했으면 이승만 정부도 그를 직위해제했다.) [32] 조선일보가 발간한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라는 책에 따르면, "전쟁이 터진 25일 조선일보 사원들은 사장실에 모였다. 전방에 나갔다 온 기자들은 '전황이 매우 불리하다'며 비관적인 전망을 보고했다"고 전했다.[33] 헤드라인 내용 : 인민군 서울 입성 - 미국대사관 등을 완전해방[34] 이승만프란체스카 도너 여사의 사진 왼편의 문구 : 이대통령의 장수를 기원 - 뉴욕서 많은 외교관들이 축배[35] 헤드라인 내용 : 전대학생이 총궐기 - 열띤 데모의 홍수 장안을 휩쓸다[36] 조선일보 1960년 6월 23일자 - # [37] 조선일보 1960년 7월 10일자 - # [38] 조선일보 1961년 5월 6일 - # [39]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 당시 그 매일신문 주필 겸 편집부장이었으며, 1973년부터 1980년까지 문화방송-경향신문 회장을 맡았다.[40] 조선일보 1966년 1월 19일자 사설 - # [41] 조선일보 1966년 2월 18일자 사설- # [42] 이 시기 조선일보는 경쟁사 동아일보와 선의의 경쟁을 했을정도로 개념찼는데, 심지어 동아일보 주필이었던 천관우가 조선일보 신년사에 직접 칼럼 기고하고, 덕담을 여러차례 나누고 그랬다고...[43] 조선일보의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조선일보 內 주필 최석채(최석채 주필은 1971년에 물러가지만, 69년 3선 개헌무렵부터 사내에서 그의 입지가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가 물러난 것과 더불어 논설, 사설에 핵심역할했던 리영희 기자가 정부에 대한 강한 비판 사설들 연달아 기고하면서 정보당국으로부터 압력(이 시기동안 리영희 조선일보 기자는 정보당국으로부터 여러차례 협박과 회유를 받는가하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기까지 했다.)받아 강제해직 당한 것이 가장 컸다. (특히 베트남 전쟁 파병에 대한 비판 사설 글을 여러차례 기고했던것이 결정타.) 리영희가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다 강제해직 당한 이후, 그동안 박정희가 밀어붙혔던 '언론윤리위법'에 저항하던 기자들이 리영희의 강제해직 전후로 결국 무너져 '친 박정희', 반민주주의적인 논조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 전후로 조선일보 주필은 선우휘-김대중 등으로 이어지는 라인들이 주류로 자리잡기 시작해 오늘날까지 자리잡고 있다.[44] 3선 개헌을 전후로 조선일보는 정권으로부터 엄청난 특혜를 받기 시작한다. 조선일보사는 정권의 허가를 얻어내 1969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최초의 민간차관으로 일본의 이토추상사(세지마 류조가 대표로 있던 회사)로부터 거금 400만 달러를 연리 6%에 들여왔다. 이 돈으로 조선일보는 '코리아나 호텔'을 지었다.[45] 이 당시 조선일보는 4.19 혁명때 참여하다 후에 변절한 사람들 동원해가면서 '10월 유신은 4·19정신의 계승'이라는 성명서 망언를 크게 보도했다.[46] 조선일보 1972년 10월 18일자 사설 '평화통일을 위한 신체제' - # [47] 조선일보는 5.18 민주화 운동을 '폭동'내지 '난동'으로 보도했다. 지금도 조선일보는 이와 관련해서 어떠한 사과 한마디도 안하고 있다.[48] 李熺性계엄사령관의 담화문 # - 이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담화문을 통해 "군의 입장이 전 국민의 공감과 지지를 받아 마땅하다"고 강조했다.[49] 격동의 70년대를 보낸다. 허기진 과객아닌 생존의 책임자로서 # - 이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안보를 앞세우며 전두환의 군사반란세력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보였다. 그 의미는 행간에서 더욱 강조되어 전두환에 대한 절대적 지지이자 '아부'의 수준이었다.[50] "군부는 암투없다" 국방부대변인 밝혀 # - 조선일보는 국방부 대변인의 외신기자 회견내용을 실으면서 전두환의 군사반란 세력에 대한 찬사를 기회가 있을때마다 드러냈다.[51] 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취재해 '폭동','난동'이라고 매도했던 조선일보 취재 기자가 바로 조선일보 주필로 유명한 김대중이다. 오늘날 광주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주장하는 자들 상당수가 이 당시의 보도를 그대로 받아들인 경우이다.[52] 이 지면은 3면에 대서특필로 실렸다. 그런데, 오늘날 조선일보는 자신들도 이게 창피하다는것을 느끼고 있었는지 조선일보 아카이브 서비스에 3면이 없고 1면, 2면에 이어 바로 4면이 나온다. 이 문제의 '3면'은 국회도서관에서만 지면을 찾아 볼 수 있다. 2020년 3월에 조선일보가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서비스를 오픈했는데 여기서는 나온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도 나온다.[53] 전두환 정권을 전후로 조선일보는 급격히 판매부수, 회사 규모가 매우 방대하게 비중이 늘어나 엄청난 이익을 받았다. (조선일보 기자였던 허문도가 5공 정권의 실세로써 엄청나게 권한을 휘두르고 다녔음을 생각해보자.) [54] 1987년 6월 12일 - 사설 '자 이제는…"6.10" 다음에 기대한다.'# [55] 대표적으로 분신정국 시기 일관되게 보여준 논조.[56] 협상 자체는 참여정부가 했지만 체결 및 실행은 MB 정부 때 진행되었다.[57] 다만 이 시기에는 조선일보만 노무현을 공격한 건 아니었다. 같은 조중동인 중앙과 동아는 물론이고, 반대 진영인 한경오 역시 노무현에 대해 비판적인 칼럼과 기사를 쓰며 노무현에게 등을 돌렸다. 조선일보의 비판수위가 제일 심한 편이었던 건 변함이 없지만.[58] http://media.daum.net/editorial/editorial/newsview?newsid=20141024033208800 # [59] # [60] 보수언론인 조선일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 무슨 소리냐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가 문재인 정권의 출범을 간접적으로나마 직접적으로나마 약간 정도라도 지지한 것은 다름 아닌 박근혜 전 대통령과 악연이 있고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에 동조한 1등 공신 때문이기도 했고, 특히 사적으로 조선일보방상훈 사장과 문재인 대통령의 사이가 좋은 편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61]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와 마찬가지로 1999년 것까지 볼 수 있다.[62] 당시 천일은행장.[63] 등기상 재직일.[64] 사장 등 겸직자 제외.[65] 이후 조선방송(TV조선) 사장 역임.[66] 이후 학교법인 동방문화학원 이사장 역임. 1976년 작고.[67] 임경래 발간 시절.[68] 이후 TV조선 보도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69] 2018년 12월 8일자 칼럼부터 '선임논설위원' 직함으로 변경.[70] 이후 디지틀조선일보 초대 사장, 조선일보 편집대기자로 일하다가 2005년 명예 정년퇴직했고, 이후 프랑스 칸 국제광고제 조직위원회 한국사무국 고문과 세종대학교 초빙교수 등을 맡다가 2009년부터 뉴데일리 대표이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2014년부터 회장으로 추대됐다. 딸인 인지연은 극우정당인 우리공화당 정책위 부위원장 및 최고위원, 수석대변인 등을 역임했다.[71] 청와대 공보수석으로 입각하며 사임[72] 前편집국장 선우휘의 아들, 조선일보 최초의 부자 편집국장, 48년만에 나온 비서울대 출신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