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스타인브레너

덤프버전 :

}}} ||

[ 펼치기 · 접기 ]
#191919,#ffffff
||<table width=100%><width=20%><rowbgcolor=#132448> '''[[밀러 허긴스|{{{#ffffff 밀러 허긴스}}}]]''' ||<width=20%> '''[[루 게릭|{{{#ffffff 루 게릭}}}]]''' ||<width=20%> '''[[제이콥 루퍼트|{{{#ffffff 제이콥 루퍼트}}}]]''' ||<width=20%> '''[[베이브 루스|{{{#ffffff 베이브 루스}}}]]''' ||<width=20%> '''[[에드 바로우|{{{#ffffff 에드 바로우}}}]]''' ||
||<rowbgcolor=#132448> '''[[조 디마지오|{{{#ffffff 조 디마지오}}}]]''' || '''[[미키 맨틀|{{{#ffffff 미키 맨틀}}}]]''' || '''[[조 맥카시|{{{#ffffff 조 맥카시}}}]]''' || '''[[케이시 스텡겔|{{{#ffffff 케이시 스텡겔}}}]]''' || '''[[서먼 먼슨|{{{#ffffff 서먼 먼슨}}}]]''' ||
||<rowbgcolor=#132448> '''[[엘스턴 하워드|{{{#ffffff 엘스턴 하워드}}}]]''' || '''[[로저 매리스|{{{#ffffff 로저 매리스}}}]]''' || '''[[필 리주토|{{{#ffffff 필 리주토}}}]]''' || '''[[빌리 마틴|{{{#ffffff 빌리 마틴}}}]]''' || '''[[레프티 고메즈|{{{#ffffff 레프티 고메즈}}}]]''' ||
||<rowbgcolor=#132448> '''[[화이티 포드|{{{#ffffff 화이티 포드}}}]]''' || '''[[빌 디키|{{{#ffffff 빌 디키}}}]]''' || '''[[요기 베라|{{{#ffffff 요기 베라}}}]]''' || '''[[앨리 레이놀즈|{{{#ffffff 앨리 레이놀즈}}}]]''' || '''[[돈 매팅리|{{{#ffffff 돈 매팅리}}}]]''' ||
||<rowbgcolor=#132448> '''[[멜 앨런|{{{#ffffff 멜 앨런}}}]]''' || '''[[밥 셰퍼드|{{{#ffffff 밥 셰퍼드}}}]]''' || '''[[레지 잭슨|{{{#ffffff 레지 잭슨}}}]]''' || '''[[론 기드리|{{{#ffffff 론 기드리}}}]]''' || '''[[레드 러핑|{{{#ffffff 레드 러핑}}}]]''' ||
||<rowbgcolor=#132448> '''[[재키 로빈슨|{{{#ffffff 재키 로빈슨}}}]]''' || '''[[조지 스타인브레너|{{{#ffffff 조지 스타인브레너}}}]]''' || '''[[마리아노 리베라|{{{#ffffff 마리아노 리베라}}}]]''' || '''[[티노 마르티네스|{{{#ffffff 티노 마르티네스}}}]]''' || '''[[구스 고시지|{{{#ffffff 구스 고시지}}}]]''' ||
||<rowbgcolor=#132448> '''[[폴 오닐|{{{#ffffff 폴 오닐}}}]]''' || '''[[조 토레|{{{#ffffff 조 토레}}}]]''' || '''[[버니 윌리엄스|{{{#ffffff 버니 윌리엄스}}}]]''' || '''[[윌리 랜돌프|{{{#ffffff 윌리 랜돌프}}}]]''' || '''[[멜 스토틀마이어|{{{#ffffff 멜 스토틀마이어}}}]]''' ||
||<rowbgcolor=#132448> '''[[호르헤 포사다|{{{#ffffff 호르헤 포사다}}}]]''' || '''[[앤디 페티트|{{{#ffffff 앤디 페티트}}}]]''' || '''[[데릭 지터|{{{#ffffff 데릭 지터}}}]]''' || '''[[|{{{#ffffff }}}]]''' || '''[[|{{{#ffffff }}}]]''' ||




}}} ||

[ 펼치기 / 접기 ]

||<-5><tablewidth=100%><tablebgcolor=#f7f7f7,#191919><bgcolor=#132448><color=#373a3c> 볼티모어 오리올스※ ~ 뉴욕 하이랜더스 시대 ||
||<width=20%> 1대
존 맥그로
파일:미국 국기.svg ||<width=20%> 2대
데버리
패럴
파일:미국 국기.svg || || || ||
||<-5><bgcolor=#132448><color=#373a3c> 뉴욕 양키스 시대 ||
||<width=20%> 2대
데버리
패럴
파일:미국 국기.svg
||<width=20%> 3대
휴스턴
루퍼트
파일:미국 국기.svg
☆☆ ||<width=20%> 4대
루퍼트
파일:미국 국기.svg
★★★★★★★
☆ ||<width=20%> 5대
제이콥 루퍼트 부동산
파일:미국 국기.svg
★★★
☆ ||<width=20%> 6대
맥페일
토핑

파일:미국 국기.svg
||
||<width=20%> 7대
토핑

파일:미국 국기.svg
★★★★★★★★★
☆☆☆☆☆ ||<width=20%> 8대
CBS
파일:미국 국기.svg
||<width=20%> 9대
조지 스타인브레너
파일:미국 국기.svg
★★★★★★★
☆☆☆☆ ||<width=20%> 10대
행크 스타인브레너
할 스타인브레너

파일:미국 국기.svg ||<bgcolor=#e0ffdb,#073300><width=20%> 11대
할 스타인브레너
파일:미국 국기.svg ||
||<-5><bgcolor=#fff,#191919> : 월드 시리즈 우승 / ☆: 월드 시리즈 준우승
※ 현 MLB 팀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혼동 주의. ||





파일:george-steinbrenner-signed-photo-7324.jpg

뉴욕 양키스 前 구단주
조지 마이클 스타인브레너 3세
George Michael Steinbrenner Ⅲ

생년월일
1930년 7월 4일
사망일자
2010년 7월 13일 (향년 80세)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출신지
오하이오 주 베이빌리지
경력
뉴욕 양키스 구단주 (1973~2009)
학력
윌리엄스 칼리지(학사)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석사)
가족
아내 조안 스타인브레너[1], 슬하 2남 2녀[2]

1. 개요
2. 양키스 인수 초창기부터 암흑기까지
3. 영구제명에 이은 복귀 : 그 후
4. 불안한 시기, 그리고 은퇴 후의 양키스 우승
5. 흑역사-양키네츠
6. YES 네트워크
7. 총평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내게 승리는 숨 쉬는 것 다음으로 중요하다. 숨 쉬고 있다면 승리해야 한다.
(Winning is the most important thing in my life, after breathing. Breathing first, winning next)


나는 지는 게 싫다. 정말 죽도록 싫다.
(I hate to lose. Hate, hate, hate to lose)
[3]


미국기업인.

뉴욕 양키스, 나아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과 미국 프로 스포츠 역사에 길이 남을 구단주로 유명하며 오늘날의 제국 양키스를 만들어낸 주역이자, 승리를 위해서는 뭐든지 아끼지 않는 공격적인 투자와 경영, 그리고 괴팍한 성질머리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다.

1980년대 양키스의 암흑기와 1990년대 후반~2000년대의 중흥기를 함께 겪은 인물로, 이로 인해 팬들 사이에서 평가가 갈리긴 하지만[4] 그걸 떠나서 메이저리그의 모든 구단주를 통틀어서 가장 아이코닉했던 단일 구단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5]

2. 양키스 인수 초창기부터 암흑기까지[편집]


오하이오에서 운송산업으로 대성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난 조지 스타인브레너는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 구단 소유를 갈망해왔다. 스타인브레너는 풋볼 코치, 아버지가 크게 성공한 사업인 선박 사업, 농구단 운영[6]을 거쳐[7] 1973년, 뉴욕 양키스의 악덕 구단주 CBS와 1000만 달러의 매각 가격에 합의, 양키스의 구단주가 되었다. CBS가 뉴욕 시에서 구입했다가 스타인브레너 그룹에게 같이 넘긴 주차장 권리를 CBS에게 되팔아 120만 달러의 이득을 챙겼기 때문에 사실상 880만 달러로 구입한 셈이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리처드 닉슨에게 불법 선거자금을 융통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고 구단주 자격이 정지되는 홍역을 치렀지만, 때마침 시행된 FA 제도를 잘 이용했다. 1975년 캣피쉬 헌터를 5년 375만불 계약으로 영입한 것.[8] 이후 레지 잭슨을 영입하며 FA 시장에서 큰손으로 군림했다. 또한 빌리 마틴 감독과 요기 베라[9] 코치를 영입하였고, 1976년 월드시리즈 진출[10]에 이어 1977~78 2년 연속 월드시리즈를 제패하게 된다.

하지만 스타인브레너는 이들과 절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사실 폭군과도 같은 그 성격에 사이가 좋은 사람[11]이 있었겠냐마는...), 특히 감독과 단장들을 절대적으로 불신했다. 빌리 마틴은 월드시리즈를 우승하던 1978년 중반에 비록 전보다는 부진하지만 5할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음에도 감독직에서 물러나야 했고[12], 단 1경기만 맡은 딕 하우저 감독을 거쳐 밥 레몬 감독이 1년간 맡았다가 다시 빌리 마틴 감독의 복귀→딕 하우저→진 마이클→밥 레몬→진 마이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자세한 감독 변천사는 베이스볼 레퍼런스 참조. 이 혼란은 빌리 마틴이 무려 5번이나 감독 선임/해고를 반복하고[13] 요기 베라가 치를 떨면서 14년간 양키스와 의절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벅 쇼월터 감독이 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캔자스시티 로얄즈 감독으로 옮겨간 딕 하우저가 로얄즈를 1985년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면서 보스에게 빅엿을 선사한 것은 덤(...)
요약하자면, 구단주로서 첫 17년간 17번 감독을 교체했으며, 초기 25년간 11번이나 단장을 교체했다. 결국 1982년부터 1994년까지 양키스는 비밀번호를 찍게 된다. 절대 성적이 잘 나올 수가 없는 체제였다.

또한 그의 괴팍한 성품은 선수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레지 잭슨이 그와 척을 지고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떠났으며, 10년간 연평균 140만불의 특급 대우로 영입한 데이브 윈필드(자세한 사항은 윈필드 항목 참조)에게는 최고 연봉자로서 다른 최고액 연봉자가 나타날 경우 연봉 차액을 보전하겠다는 조항을 달아놨다가 최종적으로 연봉 총액이 2300만불까지 올라가는 바람에 자선단체 운영에 대해 꼬투리를 잡아 뒷조사를 시켰다가 1990년 페이 빈센트 커미셔너에게 걸리며 영구제명을 당하기에 이른다. 결국 빈센트 커미셔너가 물러난 뒤인 1993년 복권되었다. 이 시기 켄 그리피 주니어는 공개적으로 양키스를 디스하기도 했다. 그리피 曰, "난 절대 저런 팀에서 안 뛰겠다."(...)


3. 영구제명에 이은 복귀 : 그 후[편집]


선수의 자선활동에 보태주는 돈 몇푼 아끼자고 데이브 윈필드의 뒷조사를 시켰다가 쫄딱 망할 뻔 했던 3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감독들을 교체하던 그 시기는 그야말로 양키스의 흑역사였다. 오죽하면 돈 매팅리가 역대 양키 주장 중 유일하게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는커녕 월드시리즈 문턱조차 밟지 못하고 은퇴했을 정도. 하지만 그런 인고의 세월을 보낸 양키스는 1991년 진 마이클이 단장으로 복귀해 1992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6순위로 데릭 지터를 뽑고 드래프트와 국제 아마추어 자유계약을 통해 마리아노 리베라, 호르헤 포사다, 버니 윌리엄스, 앤디 페티트를 얻는 등 팜을 정비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폴 오닐, 웨이드 보그스를 영입하면서 중흥기를 열기 시작했다. 비록 1995년에는 랜디 존슨을 앞세운 시애틀 매리너스에게 패하지만 물론 이때도 쇼월터 감독의 모가지가..., 이후 1996년부터 조 토레의 지휘 하에 양키스는 제국의 면모를 되찾기 시작했다. 스타인브레너는 또한 1998년부터 취임한 현찰맨 단장을 신임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1998년~2000년 월드시리즈 3연패, 2001 월드 시리즈 진출이라는 성과로 나타났다. 수십년간 양키스를 달달 볶아온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 아자씨가 달달 볶는다고 성과가 좋은 적이 있기나 했냐

그런데...


4. 불안한 시기, 그리고 은퇴 후의 양키스 우승[편집]


사실, 이 시기에도 성적은 좋았다. 그저 우승을 못했을 뿐. 조시 베켓플로리다 말린스에게 2003 월드시리즈를 내준걸로 모자라 2004 ALCS에서 리버스 스윕을 당하면서 보스턴 레드삭스의 두 차례 우승을 바라봐야 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스타인브레너는 그에 굴하지 않았다. 2004년 초, MLB를 뒤흔든 알렉스 로드리게스 트레이드를 성사시켜 A-ROD를 3루수로 변신시켰고, 케빈 브라운, 칼 파바노, 하비에르 바스케스, 랜디 존슨 등을 영입했다. 그런데 망했다 투수 먹튀들이 대거 출현하고, 더욱이 2007년 큰아들 행크가 알렉스 로드리게스에게 10년 $275M의 계약을 안겨준 것 때문에 양키스는 더욱 꼬여만 갔다. 결국 행크는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한다.

결국 2007년을 끝으로 조 토레와 결별하고 조 지라디 감독을 영입한 2008년, 탬파베이 레이스가 갑툭튀했고 양키스는 지구 3위로 떨어졌다(...) 결국 이 해를 끝으로 공식적으로는 구단주 자리에서 물러나 막후 실권자로 올랐다. 사실 2000년대 중반부터 건강이 너무 안 좋아져서 휠체어 신세를 질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브라이언 캐시맨 단장의 권리가 확대되었고, 양키스는 팜을 재정비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스타인브레너가 아들 할에게 자리를 물려준 뒤인 2009년, 야심차게 영입한 CC 사바시아, 마크 테셰이라를 앞세워 양키스는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꺾고 통산 27번째 우승을 차지하였다. 지라디 감독과 양키의 캡틴 지터는 우승 반지를 들고 보스를 찾아갔고, 보스는 우승반지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파일:external/static.foxsports.com/071610-George-Steinbrenner-SW-PI_20100716202029_660_320.jpg

양키 스타디움에서의 추모식 장면

그리고 2010년 올스타전이 열리던 7월 13일, 자택이 있는 플로리다 탬파에서 그는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양키스는 2010년 후반기 동안 보스를 기리는 마크를 달며 뛰었고 ALCS에 진출하여 보스의 영전에 우승컵을 바치는...가 했지만 아쉽게도 클리프 리가 양키스타디움을 침묵으로 몰아넣으며 텍사스 레인저스에 패배.


5. 흑역사-양키네츠[편집]


1999년 12월에 스타인브레너는 레이 챔버스와 루이스 카츠로부터 뉴저지 네츠를 사들여 '양키네츠'라는 거대 스포츠 기업을 출범했고, 2000년에는 뉴저지 데블스를 샀으나 적자를 면치 못하고 2004년에 양키스를 뺀 두 구단을 매각해 사명도 '양키 글로벌 엔터프라이즈'로 변경했다.


6. YES 네트워크[편집]


2002년 스타인브레너가 발주시킨 YES 네트워크는 뉴욕 양키스브루클린 네츠의 경기를 중계하며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고 있으며, 프랜차이즈 방송국의 가치를 드높이고 있다. 이 방송국은 현재 양키스의 경기를 독점 중계하고 있으며, 경제계의 평가에 따르면 양키스 구단의 가치보다도 더 높은 자산가치가 있다 평가받는다. 정확히 말하면 양키스의 가치는 2010년 기준으로 16억 달러이며, YES 네트워크는 12억 달러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후로도 뉴욕 양키즈의 경기 관련으로는 대부분 YES 관련으로 나오는 영상이 많으니 여전히 잘 굴러가는 것으로 보인다.


7. 총평[편집]


많은 사람들이 스타인브레너 덕분에 양키스가 역대 최고의 구단으로 남았다 생각하지만, 사실 월드 시리즈 우승은 스타인브레너가 취임하기 이전에 훨씬 더 많이 했다. 양키스의 27회 월드 시리즈 우승 중 스타인브레너 취임 이전이 20번, 이후가 7번이다. 하지만 스타인브레너의 진짜 업적은 1960년대 중후반에 위세가 많이 꺾여 급격히 추락하던 양키스[14]를 인수하여 다시 역사상 최강의 명문팀에 걸맞는 명성, 위상을 되찾아 준 것이다.사실상 양키스 팬들에게는 '제국을 만든 사나이'로 평가받으며, 1970년대 이후의 양키스의 역사를 논하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또한, 메이저리그, 나아가 미국 프로 스포츠와 경제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리더였다.

허나 인간적인 면에서는 상당히 비판받았었는데, 단지 성질 더러운 게 문제가 아니다. 알렉스 퍼거슨은 성질 더럽기는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편이 되기로 마음먹으면 모든것을 걸고 지지해 주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거 없다. 제멋대로에 변덕은 심하고 자기 말 안 들으면 짤라버리고 뒤통수 스킬까지 보유했고 공은 내꺼로 과오는 남에게 뒤집어씌우기까지 했다.

하지만 제일 상단 사진처럼 양키스 팬들이 스타인브레너를 사랑했고 추모하는 이유는 그가 승리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아끼지 않는 구단주였기 때문이다.[15] 2000년대 후반 다저스의 구단주였던 프랭크 맥코트처럼 구단의 최우선적 역할로 '이익 창출'을 앞세우기보다는,[16] '승리의 창출'을 강조했던 것. 때문에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승리를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팬 입장에서는 절대로 미워할 수 없는 구단주였다[17].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트레이드로 데려온 2004 시즌의 홈 개막전에서 팬들이 "Thank you Boss", "We Love George" 등의 피켓을 흔드는 장면이 전광판 화면에 잡히자 눈물을 펑펑 흘리기도 했다. 2009년 개장한 양키 스타디움의 별명이 바로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지은 집(The House that George Built)"이라는 것만 봐도 그를 향한 팬들의 애정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예.[18]

성격이 좋은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선수들에게도 잘해줬다고 한다. 물론 단정함을 위해 장발 금지, 콧수염 외의 다른 수염은 금지라고 하는 규율을 만들기도 했지만 선수들과 함께 호흡하는 행보를 보여줬고 선수들이 최상의 컨디션에서 경기에 임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까지 했다고 스타인브레너 구단주 체제 하의 선수들은 증언한다. 물론 성격상 코칭스탭과 프론트와는 앞통수 뒷통수 옆구리통수 등등 버라이어티한 방법으로 대립했고 싸웠다.[19]

스타인브레너는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었으며 이런 직성이 승리라는 그런 결과로 나온 것이다. 승리보다 값진 패배나 아름다운 패배라는 단어는 이 사람에게 있어서 말도 안되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승리야말로 구단이 팬들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기쁨이라고 여겼으며 팬도 팬이지만 진다면 당장 본인부터가 열부터 내면서 참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가 보인 공격적인 투자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계산기 튕기지 않고 우승을 위해 모든 돈을 퍼붓는듯한 행보를 보이기도 했지만 스타인브레너가 천만달러에 인수한 양키즈는 현재 50억달러 이상의 자산가치가 있는 구단으로 평가받는다. 자기 기분 내키는대로 돈 쓰는 졸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른바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더 큰 수익을 창출한다는 경영 철학의 매우 훌륭한 표본을 보여준다.[20]

더 자세한 이야기는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를 되돌아보는 기사, 매거진S, 위키피디아, 베이스볼 알마낙 참조.

8.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7 05:41:18에 나무위키 조지 스타인브레너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1935년생으로 조지와는 1956년에 결혼했다. 2018년 사망.[2] 모두 조지와 조안 사이의 자녀들이다. 이들 중 막내아들인 할 스타인브레너가 현재 뉴욕 양키스의 단독구단주이다.[3] 1998년 뉴욕 타임스에 남긴 말.[4] 1980년대까지만 해도 형편없는 성적만 계속 보여 좋은 평을 듣지 못했지만 1990년대부터는 자체 선수들을 키워내며 리빌딩을 대성공하고 거기에 돈까지 퍼부으며 스타들을 데려와서 일약 최강팀으로 거듭나자 역사에 남을 구단주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 또한 이후 그의 아들들이 보여주는 운영을 생각해 보면 스타인브레너는 계속해서 좋은 방향으로 재평가를 받고 있다.[5]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투자를 보여주는 구단주는 뉴욕 메츠의 스티브 코헨이고, 다른 스포츠까지 포함하면 NBA 소속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스티브 발머가 통 큰 투자의 상징으로 불리지만, 이 둘은 우승을 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점에서 스타인브레너의 아성에는 절대 못 미친다는 평가를 받는다.[6]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ABL의 팀이었다. NBA 진출을 시도했으나 결국은 실패.[7] 한 때 고향팀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인수하려 시도하기도 했다.[8] 하지만 그는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에서부터 이어진 혹사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먹튀[9] 해당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이후 대판 싸우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베라가 양키스와 떨어져 있는 기간마다 양키스는 암흑기를 맞게 된다.[10] 이 때는 '빅 레드 머신' 신시내티 레즈에 4-0 스윕을 당했다. [11] 같은 뉴욕 지역의 사업가인 도널드 트럼프가 스타인브레너의 몇 안되는 절친 중 하나였다. 트럼프 특유의 공격적인 스타일도 스타인브레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12] 빌리 마틴이 이 엿 같은 팀에는 타고난 사기꾼(레지 잭슨) 하나와 범죄자(스타인브레너) 하나가 있다고 한 인터뷰가 결정적이었다. 범죄자라 한 것은 스타인브레너가 몇년 전 리처드 닉슨에게 불법 정치자금 제공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걸 비꼰 것이었다. 레지 잭슨과도 경기 도중 덕아웃에서 주먹다짐까지 한 사이였고[13] 여담으로 서로 츤츤대던 빌리 마틴의 경우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감독 경질 장난에 본의 아니게 1982년 올스타전 AL팀 감독으로 나서기도 했다. 1981년과 1982년 당시 양키스는 밥 레몬-진 마이클이 돌아가며 팀을 매니징해서 1981 AL 우승까지 성공은 했지만, 감독직이 무슨 보따리장수도 아니고(...) 정작 1982년 올스타전 당시에는 이미 감독이 클라이드 킹으로 바뀐 상태였다. 빌리 마틴은 1981 ALCS 준우승팀 감독 자격으로 올스타전 AL 감독을 맡게 된 것.[14] 이 당시 양키스는 KBO로 치자면 KIA 같은 느낌이다. 과거 MLB 팬이 양키스에 느낀 경외심은 KBO 팬이 해태 타이거즈에 느낀 감정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해태가 KIA 타이거즈로 팀명 변경 이후 2회 우승을 차지했다고는 해도, 오늘날 KBO 팬이 KIA에서 그 경외심을 느낄 수는 없다.[15]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본인부터가 지는 걸 못 참았다. 애초에 위에 나온 그의 명언도 그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는 명언이다.[16] 게다가 맥코트의 구단주 시절 다저스의 성적도 나빠서 더욱 나쁜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맥코트 탈출 후 구겐하임 시절엔 강팀이자 공룡 구단이 되었다.[17] 그가 인터뷰에서 했던 "팬들이 양키스를 위해 소비한 돈은 마땅히 양키스를 위해 투자되어야 한다."라는 말도 이를 반영한다. 양키즈를 단순히 돈벌이 수단으로 여긴 것이 아닌, 그 자신이 팀의 승리를 갈망하는 팬이였음을 잘 드러낸 말.[18] 참고로 구 양키 스타디움의 별칭이 "베이브 루스가 지어준 집"이었다는걸 본다면, 이는 양키즈 팬들이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인 셈이다.[19] 그래도 자신의 마음에 들었던 사람은 잘 챙겨주었다. 스타인브레너가 진정한 남자라고 인정한 그러면서도 5번이나 잘랐다 빌리 마틴이 교통사고로 죽자 자비로 베이브 루스의 묘소 근처에 묫자리까지 마련해줬다. 스타인브레너 밑에서 선수와 감독을 했던 루 피넬라야구와 얽히지만 않으면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했다.[20] 원래 스타인브레너가 운영하던 선박 회사는 1993년에 진작에 파산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양키스라는 제국의 황제로 사람들의 기억에 길이 남게 되었다. 그 엄청난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