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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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하노버 왕조 제3대 국왕
조지 3세
George II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llan_Ramsay_-_King_George_III_in_coronation_robes_-_Google_Art_Project.jpg

출생
1738년 6월 4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런던 세인트 제임스 광장 노퍽 하우스
사망
1820년 1월 29일 (향년 82세)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버크셔 윈저 윈저 성
묘소
잉글랜드 버크셔 윈저 성
재위기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아일랜드 국왕
1760년 10월 25일 ~ 1801년 1월 1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국왕
1801년 1월 1일 ~ 1820년 1월 29일
하노버 선제후
1760년 10월 25일 ~ 1814년 10월 12일
하노버 국왕
1814년 10월 12일 ~ 1820년 1월 29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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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하노버 가문
이름
영어: 조지 윌리엄 프레더릭
George William Frederick
독일어: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Georg Wilhelm Friedrich
아버지
웨일스 공 프레더릭
어머니
작센고타의 아우구스타 공녀
형제자매
어거스타, 에드워드, 엘리자베스, 윌리엄 헨리, 헨리, 루이자, 프레더릭, 캐롤라인 마틸다
배우자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1761년 결혼 / 1818년 사망)
자녀
조지 4세, 프레더릭, 윌리엄 4세, 샬럿, 에드워드, 어거스타, 엘리자베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어거스터스 프레더릭, 아돌푸스, 메리, 소피아, 옥타비우스, 알프레드, 아멜리아
종교
성공회 (잉글랜드 국교회)

1. 개요
2. 생애
2.1. 왕위에 오른 뒤
2.2. 미국의 독립 이후 겪은 위기
2.3. 말년
3. 칭호들
4. 가족관계
4.1. 조상
4.2. 자녀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6. 기타



1. 개요[편집]


"우리는 왕을 덕성의 수장으로 여기게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과 조지 3세의 덕성은 대중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우리는 도덕적인 군주를 갖는 것이 당연하며, 왕위에서 위엄을 지니는 것만큼이나 가정적 도덕도 자연히 갖출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월터 배젓(Walter Bagehot), 《영국 헌정(The English Constitution)》 中

대영제국 시기 영국과 하노버의 군주. 하노버 왕조에서 처음으로 영국 태생인 군주다.[1] 1738년 6월 4일 조지 2세의 장남인 웨일스 공 프레더릭의 아들로 태어났다.

별명은 이른바 농부왕(Farmer King)으로 대부분의 군주들과는 달리 별다른 추문 없이 검소하고 소탈한 사생활을 고수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비록 조지 3세는 유능하다고 말하기는 힘든 왕이었으나, 특유의 근면검소한 성품 덕분에 영국의 백성들에게는 성실하고 독실한 군주로 존경을 받았다. 다만 조지 3세의 군대와 격전을 치른 끝에 독립을 쟁취한 미국인들에게는 악랄하고 무능력한 폭군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재위기간이 장장 59년 3개월엘리자베스 2세, 빅토리아 여왕에 이어 세 번째이다. 영국의 남성 군주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인물이다. 긴 재위기간만큼 다사다난한 일도 많았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만 하더라도 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 등 근대 유럽사를 뒤흔든 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일어났다.


2. 생애[편집]


어머니 아우구스타런던에서 산책 중에 낳았는데 예정일보다 3개월 빠른 조산이었다. 어릴 적엔 아버지 프레더릭 루이가 정치적인 이유로 할아버지 조지 2세와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할아버지를 싫어했으며, 자폐증을 보이기도 했고 11세가 될 때까지 읽거나 쓰지 못했다. 그 후, 13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2.1. 왕위에 오른 뒤[편집]


1760년 할아버지인 조지 2세가 사망하자 2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독일 태생인 조지 1세, 조지 2세, 아버지 웨일스 공 프레데릭과 달리 독일 억양이 없는 영어를 구사했는데, 이런 배경 때문에 조지 3세는 조지 1세나 조지 2세와 다르게 영국 내정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개입이 항상 긍정적인 영향을 나타낸 건 아니었다. 이원복 교수가 집필한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편에 따르면 '조지 3세'는 부지런했지만 머리가 좋지 않아 사고 확률 100% 였던 인물이라고... 그래도 애국심 하나는 충만했다 한다.

예를 들어 7년전쟁 막바지에 대(大) 윌리엄 피트를 해임하는 삽질을 저지르다 전쟁을 망칠 뻔했다. 대 피트는 유럽 지상전에서는 국왕의 고향이자 동군연합 하노버 선제후령 보호는 잘 싸우는 동맹인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맡기고, 영국은 인도와 아메리카 등지의 식민지 전쟁에서 프랑스만 제압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할아버지 조지 2세한테도 좋지 못한 취급을 받았는데[2] 이번엔 한술 더 떠 왕조의 뿌리인 하노버에 대해서 하노버 보호는 국왕의 이익이지 영국 국익과 무관하다는 주장을 펼쳤다가 조지 3세가 회까닥해서 해임해 버린 것. 쉽게 말해 국왕 고향이 위협받고 있는데 '당신 영국 국왕이니 거기 신경 끄고 여기에만 집중하세요'라고 한 셈이다.

물론 영국인 입장에서 보면, 피트의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고 오히려 전략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다. 하노버는 동군 연합일 뿐, 영국 국민들이나 관료들 입장에서는 그냥 생판 다른 나라 땅인데 같은 군주를 모신다는 이유만으로 도와주는 건 군주만 좋은 거고 영국 입장에서는 안 좋은 게 맞다. 다만 '폐하 본관 일이지 우리가 알 바입니까?' 식으로 싸가지 없게 말해서 잘린 거다.(...) 틀린 말을 한 건 아닌데 처신을 잘못해서 잘린 것.

그 여파로 영국의 내각이 교체되자 프로이센에 재정 지원을 끊고 영국이 직접 유럽 지상전에 직접 개입을 하는데, 그 결과 그동안 유럽전에서 잘 싸워왔던 프로이센은 자금난으로 병력이 15만에서 6만으로 줄어들어 버리게 된다. 참고로, 이 시대엔 군인의 대다수가 용병이었으며, 프로이센 군대의 70%는 외국인이었다.

그 여파로 유럽전에서 한발 뺐던 프랑스하노버로 쳐들어 가는 병크가 터져버렸으며, 유일한 동맹국 프로이센은 러시아 제국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죽기 전 거의 패망 직전까지 몰렸다. 심지어 이 당시 프리드리히 2세는 동맹국의 수장인데다가, 공동의 적국이었던 프랑스를 격파해서 좀 지능이 떨어지는 '조지 3세'에 비해 영국 내에서도 인기가 많았기에 자국 국민들에게까지 비난을 받았다.

허나 이미 몇 년 간 식민지에선 압승을 거둬왔고, 유럽 전역도 갑작스런 표트르 3세의 바보짓으로 쉽게 마무리가 되었기 때문에, 뻘짓에도 불구하고 승전은 할 수 있었다.

한편, 영국의 뒷통수에 원한을 품은 프리드리히 2세미국 독립전쟁 때 '무장중립동맹'을 선포, 미국 독립군 측에 독일인 교관과 용병을 보내버렸다고. 결과적으로 무장중립동맹은 미국의 동맹국인 프랑스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이 '통상의 자유' 드립을 치며 아메리카에 군수품을 계속 지원해서 영국군이 지는데 한몫 거든다.

이후 애덤 스미스의 학설을 도입해 자유무역 등을 이끌고 수상직 도입 이후 근 50년간 정치적 실권을 쥐고 있던 휘그당과 대립하면서 새로 올라온 토리당 중심으로 정치 지형을 바꾼다.[3] 이것도 내면을 보면 좀 복잡하긴 한데, 자세한건 소(小) 윌리엄 피트 항목 참조.

산업적으론 조지 3세 재임 기간 영국 내에서 산업혁명의 기틀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2.2. 미국의 독립 이후 겪은 위기[편집]


조지 3세 재위 직후 북아메리카의 13개 주가 미국 독립전쟁으로 독립해 버리면서 미국이 건국되었고, 치세 말년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때문에 국운이 흔들리기도 했다. 한편으론 호주(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를 개척하고 거기에 죄수들을 이주시키기도 했다.

18세기 말 아일랜드 왕국에서 일어난 반영 반란을 진압하고 아예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한 나라로 합쳐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 1801년에 탄생하게 됐다. 1798년 아일랜드에서 영국과 왕정에 반대하여 독립 운동이 벌어졌는데 영국이 가까스로 진압했다. 기존까지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아일랜드 왕국이 따로 있었고 양국이 동군연합을 이룸과 동시에 국왕과 그레이트브리튼 의회(그 이전에는 잉글랜드 의회)가 아일랜드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식으로 아일랜드를 통제했었다. 그리고 아일랜드 의회 의원들도 정치적으로는 그레이트브리튼에 협력하고 종교적으로는 개신교계 종파들의 신자들이었다. 즉 당시 아일랜드는 왕국이라는 타이틀은 달고 있었으나 독립국이 아닌 실질적으로 속령 상태였다. 그런데 아일랜드 현지에서 그레이트브리튼과 왕정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나 이들이 완전히 여기서 이탈해 프랑스에 붙을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레이트브리튼에서는 자국과 아일랜드를 한 나라로 통합해서 아일랜드의 이탈을 강력하게 억제하려 하였던 것이다. 반란이 터지기 전 아일랜드 정계에서는 아일랜드의 자치권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레이트브리튼으로부터 일부 인정도 받았었다. 하지만 곧이어 터진 반란과 반란 진압 과정에서 이 정치인들은 중간에 낀 상태가 돼 버렸고, 결과적으로 이들의 꿈과 완전히 정반대로 그레이트브리튼과 완전히 한 나라로 합병돼 버렸다. 그래서 아일랜드 의회에서 자치 운동을 이끌었던 이들은 꿈도 희망도 다 없어진 상태에서 통합된 연합왕국 의회로 옮겨가 의원 노릇을 하다가 세상을 떴다.

한펀 조지 3세 시절 영국은 별도로 프랑스 제1공화국과 외교 협상을 하고 있었는데, 프랑스가 영국 왕이 계속 써왔던 프랑스 국왕 칭호와 백합 문장을 지우라고 요구를 해왔다.[4] 그 전에 부르봉 왕가에서는 영국에서 프랑스 왕을 사칭하는 거 알고서도 그냥 내버려 뒀었으나, 프랑스 혁명 세력은 처음 외교에 임하는 거라 기존 관례와 안 맞는 무리한 요구임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불과 얼마 전에 자기들이 과 사투를 벌이고 그를 처단했는데 명목상 '프랑스 왕'이 영국에 있으니 기분나쁠 법도 하다.[5] 영국은 "우리가 정말로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옛날부터의 관행이라 쓰고 있는 것일 뿐이다" "다른 나라에도 이런 예가 많다"[6]며 설득했지만, 프랑스 측이 워낙 완강해서, 영국 정부는 눈물을 머금고 조지 3세가 프랑스 왕의 칭호와 문장을 1801년부터 포기하도록 했다. 조지 3세는 할 수 없이 그에 따랐지만 기분은 썩 좋지 않았을 것이다.

조지 3세는 황제 칭호의 사용을 제안받기도 하였다. 당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 왕국을 한 나라로 합병하기로 하여 조지 3세의 두 칭호(그레이트브리튼의 왕, 아일랜드의 왕)을 하나로 통합하게 되었는데, 영국 국내에서는 두 왕위를 통합하는 김에 칭호를 황제로 승격하여 조지 3세의 서운함도 달래는 게 어떨까 하는 제안이 있었다고 한다.[7] 이 때 제안된 칭호로는 Emperor of the British Isles(브리튼 제도의 황제)#, Emperor of the British and Hanoverian Dominions(브리튼 및 하노버 영토들의 황제)# 등이 있다.

하지만 조지 3세는 이러한 제안을 거부하고 계속 왕의 지위를 유지했다. 사실 당시 중서부 유럽에서는 비록 국력이 쇠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에서만 황제를 칭하고 있었는데[8] 굳이 영국 혼자 갑자기 황제를 칭하면 외교적 마찰을 빚을 수도 있었다.[9] 게다가 조지 3세는 하노버의 선제후를 겸하여 형식상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봉신이라는 이중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봉신이 주군과 맞먹으려 든다고 비춰질 수 있기 때문에 꺼렸을 수도 있다.

조지 3세 본인은 칭제를 무르긴 했지만, 후에 그가 황제 칭호를 썼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불과 몇 년 뒤 1804년에 나폴레옹이 황제를 칭하게 됐고, 신성 로마 제국이 붕괴 직전에 놓이자 위기감을 느낀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2세가 보험용으로 오스트리아 황제라는 작위를 신설했다.[10] 그리고 나폴레옹의 프랑스 황제라는 지위를 절하하기 위해 다른 유럽 국가들에 황제 칭호를 사용할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유럽 군주들을 비롯해 조지 3세는 끝까지 황제를 자처하지 않았다. 결국 최초의 영국인 황제는 조지 3세가 아니라 그의 손녀인 빅토리아 여왕이 되었다. 다만 그나마도 영국의 여제가 아닌 무굴 제국을 멸망시키고 세운 '인도 제국의 여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ordMacartneyEmbassyToChina1793.jpg

조지 3세 재위시기 청나라에 파견한 영국 사절단을 통해 몇 개의 섬에 대해 할양을 제안했고, 이 제안이 건륭제의 심기를 건드려 사절단이 쫓겨난 적이 있었다. 중화사상 및 유교적인 예의범절에 대한 지식이 없던 당시 영국인들은 유럽에서 했듯 예의는 차리되 국가 대 국가로서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을 하려 했고, 이것이 청나라 황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었다. 영국은 이후 아편전쟁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홍콩의 지배권을 얻게 되었다.[11]


2.3. 말년[편집]


조지 3세는 말년에 이르러 정신병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몇 차례의 발작에 그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증세가 심해졌는데, 1810년에 막내딸 아멜리아가 27세의 나이로 죽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 결정타였다.[12] 그는 조울증이 도져서 궁을 뛰쳐나가기도 하고, 정원의 나무들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또한 평소보다 훨씬 일찍 깨어나서 시종들을 닦달해서 함께 들판을 내달리기도 했고, 하녀의 방에 갑자기 들이닥쳐 나폴레옹을 욕하며 요강에 오줌을 누고 가는 등의 돌발행동을 일삼았다. 이따금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는 일시적인 호전에 그칠 뿐이었다. 이런 말년의 행각 때문에 "미치광이 왕" 조지라는 유명한 별명을 얻기도 했다. 결국 1811년부터 1820년에 사망할 때까지 왕세자인 조지 4세섭정을 맡아야 했다. 의학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하노버 왕조에 유전적으로 내려오던 포피리아가 뇌에 영향을 미쳐 정신병이 생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기도 하지만 더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포르피린증보다는 정신질환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13]

조지 3세가 뒷방서 요양하는 늙은이 취급을 받게되고 얼마 뒤 영국은 미국과 마치 리턴매치 같은 전쟁을 치뤘다. 미영전쟁 항목창조. 이미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자기 집권기 초반에 최초이자 최대 식민지가 탈주해 버린게 워낙 아까웠을 터. 하지만 영국은 미국을 상대로 이기지 못했고 비록 말이야 서로 얻을거 없으니 조건 무 상태로 종전하자 였지만 정작 피날레를 장식한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앤드루 잭슨이 이끄는 미군에게 영국군이 대패하면서 또 망신만 당한 채 미주대륙을 떠나야 했다.

조지 4세가 섭정을 맡는 동안 왕실에서는 의사들을 동원해 조지 3세의 정신병을 고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정신의학은 발달되어 있지 않았기에, 의사들이 정신질환자들을 치료하는 방법이 심히 하드코어했다는 점이었다. 왕실 의사들은 조지 3세의 머릿 속에 있는 "나쁜 생각"이 정신병을 유발한다고 생각하곤 그의 머리에 일부러 물집을 만들어서 터뜨리기도 했다. 또한 오늘날 같으면 제정신으로 처방할 수 없는 독극물을 약으로 처방해서 이를 먹은 조지 3세가 보라색 오줌을 싸며 구토를 하게 만들기도 했다. 미쳐버린 왕이 싸돌아다니며 사고를 치지 못하도록 하루종일 침대에 묶어 놓기도 했고, 헛소리를 하는 증세를 막기 위해 그의 입을 틀어막은 후 그의 면전에 고함을 지르게 하는 치료요법도 사용되었다. 이쯤되면 말이 치료지, 사실상 고문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70세가 넘은 노구에 이런 가혹하고 끔찍한 치료를 받으면서도 조지 3세는 10년 가까이 생존하였다. 그러나 병환이 심해지면서 조지 3세는 시각과 청력을 잃어갔고 1818년에는 그토록 사랑했던 샬럿 왕비가 죽었음에도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죽기 몇 주 전부터는 제대로 걸을 수도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결국 1820년 1월 29일, 윈저 궁전에서 81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해서 성 조지 성당에 안장되었다.[14]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조지 4세가 즉위하였으나 아버지가 장수한 탓에 재위 10년 만에 사망했다.


3. 칭호들[편집]


조지 3세는 재위기에 칭호도 많았고 이들의 변동 사항도 상당히 복잡했다. 그래서 아래에 상세한 표를 정리한다. 단, 왕세자 시절의 칭호들은 아래에 기재하지 않았다.

그레이트브리튼 국왕 겸 아일랜드 국왕(1760~1800)
조지 2세
(George II)

조지 3세
(George III)

(양국 합병)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국왕(1801~1820)
(양국 합병)

조지 3세
(George III)

조지 4세
(George IV)

하노버 선제후/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신성로마제국 대재무관(1760~1806[15]/1814[16])
게오르크 2세
(Georg II)

게오르크 3세
(Georg III)[17]

(신성로마제국 멸망)

하노버 국왕(1814~1820)
(신규 칭호)

게오르크 3세
(Georg III)[18]

게오르크 4세
(Georg IV)

코르시카 국왕(1794~1796)[19]
(신규 칭호)

조르조 3세
(Giorgio III)[20]

(프랑스의 코르시카 탈환)

자칭 프랑스 국왕(1760~1800)[21]
조르주 2세
(Georges II)

조르주 3세
(Georges III)

(칭호 포기)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조지 3세
(George III)
웨일스 공 프레더릭 루이
(Frederick Louis, Prince of Wales)
조지 2세
(George II)
조지 1세
(George I)
첼레의 공녀 조피 도로테아
(Princess Sophia Dorothea of Celle)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공녀 카롤리네
(Princess Caroline of Brandenburg-Ansbach)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변경백 요한 프리드리히
(John Frederick, Margrave of Brandenburg-Ansbach)
작센아이제나흐의 공녀 엘레오노레 에르드무테
(Princess Eleonore Erdmuthe of Saxe-Eisenach)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공녀 아우구스타
(Princess Augusta of Saxe-Gotha-Altenburg)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Frederick II, Duke of Saxe-Gotha-Altenburg)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1세
(Frederick II, Duke of Saxe-Gotha-Altenburg)
작센바이센펠스의 공녀 막달레나 시빌레
(Princess Magdalena Sibylle of Saxe-Weissenfels)
안할트체르프스트의 공녀 막달레나 아우구스타
(Princess Magdalena Augusta of Anhalt-Zerbst)
안할트체르프스트 공작 카를
(Charles, Prince of Anhalt-Zerbst)
작센바이센펠스의 공녀 조피
(Princess Sophia of Saxe-Weissenfels)


4.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조지 4세
(George IV)
1762년 8월 12일
1830년 6월 26일
브라운슈바이크의 캐롤라인
슬하 1녀[22]
2남
요크와 올버니 공작 프레더릭 왕자
(Prince Frederick, Duke of York and Albany)
1763년 8월 16일
1827년 1월 5일
프로이센프리데리케 샤를로테 공주[23]
3남
윌리엄 4세
(William IV)
1765년 8월 21일
1837년 6월 20일
작센마이닝겐의 아델하이트
1녀
뷔르템베르크의 샬럿 왕비
(Charlotte, Queen of Württemberg)
1766년 9월 29일
1828년 10월 5일
프리드리히 1세
4남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
1767년 11월 2일
1820년 1월 23일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슬하 1녀[24]
2녀
어거스타 공주
(Princess Augusta)
1768년 11월 8일
1840년 9월 22일

3녀
엘리자베스 공주
(Princess Elizabeth)
1770년 5월 22일
1840년 1월 10일
헤센홈부르크 백작 프리드리히 6세
5남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Ernest August I)
1771년 6월 5일
1851년 11월 18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리데리케
슬하 1남 2녀[25]
6남
서식스 공작 어거스터스 프레더릭 왕자
(Prince Augustus Frederick, Duke of Sussex)
1773년 1월 27일
1843년 4월 21일
레이디 아우구스타 머레이
슬하 1남 2녀
레이디 세실리아 언더우드
7남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
(Prince Adolphus, Duke of Cambridge)
1774년 2월 24일
1850년 7월 8일
헤센-카셀의 공녀 아우구스타
슬하 1남 2녀[26]
4녀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부인 메리 공주
(Princess Mary, Duchess of Gloucester and Edinburgh)
1776년 4월 25일
1857년 4월 30일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윌리엄 프레더릭 왕자[27]
5녀
소피아 공주
(Princess Sophia)
1777년 11월 3일
1848년 5월 27일

8남
옥타비우스 왕자
(Prince Octavius)
1779년 2월 23일
1783년 5월 3일

9남
알프레드 왕자
(Prince Alfred)
1780년 9월 22일
1782년 8월 20일

6녀
아멜리아 공주
(Princess Amelia)
1783년 8월 7일
1810년 11월 2일

무려 9남 6녀의 15명이나 되는 자녀를 두었는데 굉장한 사실은 정부나 첩을 두지 않았고 자녀들을 모두 정실 부인인 샬럿 왕비가 낳았다는 점이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 조지 3세의 정신병 투병기를 다룬 조지 왕의 광기라는 영화가 있다.[28] 국내에서도 TV 방영된 적도 있고, 상당한 명작으로 평가된다. 이 영화에서도 조지 3세가 말년에 받아야 했던 그 끔찍한 치료요법들이 그대로 묘사된다. 조지 3세가 치료용 의자에 묶이지 않으려고 달아나다가 시종들에게 잡혀서 끌려가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아메리카 식민지를 상실한 것에 대해서 계속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것도 인상적이다.[29]
  • HBO 드라마 <존 애덤스>에서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서 커틀러 버켓역을 맡은 톰 홀랜더가 출연한다.
  • 뮤지컬 해밀턴[30]에서는 아메리카 식민지를 자신을 떠난 여자친구 취급하며 사랑타령을 불러대는데 가사가 제대로 시궁창이다(...).
  • 소설 테메레르 시리즈 5권에서 몇줄로만 나오는데 프랑스군이 영국을 상륙하고 런던이 함락당하자 지방으로 피신하였는데 이 작품에서도 정신상태가 좋지않아서 호위병들에게도 심상찮게 미쳤구만 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이며 주인공 로렌스도 경악할 정도로 건강이 좋은 상황이 아니다.
  • 드라마 브리저튼에서도 잠시 등장한다. 배우는 제임스 플릿. 여기서 실제 말년에서의 모습처럼 치매를 심하게 앓고 있다. 아내인 샬럿 왕비에게 막내딸 아멜리아가 어디 있냐고 묻지만 샬럿에게 그녀는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자, 인정하지 못하고 슬퍼하며 발작하는 모습을 보면 실제 역사처럼 막내딸을 잃고 증세가 더욱 심해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역사처럼 샬럿 왕비를 무척 사랑한 것이 종종 언급된다.


6. 기타[편집]


  • 엘리자베스 2세의 고조 할머니, 즉 빅토리아 여왕의 할아버지다.
  • 미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조지 3세는 미국 독립 혁명과 관련되어 대마왕급 악역으로 잘 알려져서 현대인들의 인식은 썩 좋지는 못하지만, 가정적이며 성실한 성품 때문에 영국의 민중들로부터는 많은 존경을 받았던 왕이었다. 특히 "농부왕"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이 소탈하고 담백한 성품으로 유명했다. 아내인 샬럿 왕비와의 사이도 좋았고 사생활은 깨끗한 축에 속했다. 그는 당시의 왕족이나 귀족으로서는 드물게도 일생동한 단 한번도 바람을 피우거나 정부도 두지 않았다. 9남 6녀에 달하는 자녀들도 모두 샬럿 왕비로부터 얻었다. 거창하게 시종이나 귀족을 곁에 대동하고 다니던 왕실의 산책과 달리 부부끼리만 오붓하게 산책을 즐기는걸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31] 아내에 대한 사랑이 워낙 지극해서, 샬롯 왕비에게 케이크를 선사할 때에 케익에 아내의 이름에서 따온 명칭을 붙였다. 그것이 바로 샬롯 로얄(Charlotte Royal) 케이크이다.
  • 하지만 15명이나 되는 많은 자식들을 낳았음에도 적(嫡)손자녀는 8명밖에 없었다.[32] 이마저도 성인으로 성장한 손주는 6명[33]밖에 없었고, 왕위 계승자였던 조지 4세의 하나밖에 없는 딸 샬럿 공주가 사망했을 때 조지 3세의 손자 중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에 왕자들은 차기 왕을 배출하기 위해 열심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며, 결국 4남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의 외동딸 빅토리아 공주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34]
  • 재위기간을 한국사로 따지면 조선 영조 ~ 순조에 걸친다.
  • 빅토리아 시대의 문필가 월터 배젓(Walter Bagehot)은 《영국 헌정(The English Constitution)》에서 조지 3세와 빅토리아 여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했다. "우리는 왕을 덕성의 수장으로 여기게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과 조지 3세의 덕성은 대중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우리는 도덕적인 군주를 갖는것이 당연하며, 왕위에서 위엄을 지니는 것 만큼이나 가정적 도덕도 자연히 갖출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와 대비적으로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조지 4세는 사생활이 추잡하기로 악명높아서, 월터 배젓은 아예 그를 "부도덕의 표본"이라 비판했다.
  • 남극에 있는 한국의 세종과학기지가 위치한 킹 조지 섬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 미국 독립선언서를 보면 직접 조지 3세라고는 나와있지 않지만, 3장에서 '국왕은 ~~한 일을 하였다/하지 않았다'라고 하며 당시 국왕인 조지 3세를 비판한다. 물론 독립 선언을 위한 약간의 '프로파간다'가 가미되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 그의 치세에 천왕성이 발견되었는데, 오늘날 서양에서 쓰는 '우라노스'라는 이름 대신 그의 이름이 붙었을 수도 있었다. 천왕성 항목 참고.
  • 미국에서 독립선언문이 선언 되는날, 그의 일기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Nothing important happened today)'로 기록됐는데, 멀리 떨어진 영국에는 아직 소식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제목으로 따온 매체들이 꽤 있다.
  •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과 이름이 같았다. 나중에 독립전쟁 이후 대통령이 된 워싱턴이 재선 임기를 마치고[35]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자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후에 워싱턴이 미국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를 생각하면 재미있는 부분.[36]
  • 1772년 3월, 모든 왕위계승권자는 국왕의 허락 하에만 결혼할 수 있다는 내용의 왕실결혼법을 제정했다. 이 법을 제정한 원인은 1771년에 동생 컴벌랜드와 스트래선 공작 헨리 왕자가 평민 출신 과부인 앤 호튼과 혼인했기 때문이다. 명색이 직계왕족인 자신의 동생이 평민과 결혼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 조지 3세는 이 왕실결혼법을 제정함으로서 헨리와 앤 호튼의 결혼을 무효화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헨리와 앤 호튼의 결혼은 해당 법령을 제정하기 전에 한 결혼이였기 때문에, 의회에서는 두 사람의 결혼이 정당하다며 법적으로 승인했다.(...) 국왕 니가 뭐 어쩔건데 이렇게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조지 3세는 법령을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더욱더 환장할 사실을 알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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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인 웨일스 공 프레데릭도 하노버에서 태어났다.[2] 피트에게 임명장을 줄 때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고 전해진다.[3] 조지 3세의 아버지 프레더릭 루이도 조지 2세에 반대하던 토리당과 어울리다 아버지한테 찍히기도 했다. 다만 루이 시절 토리당과 조지 3세 시절 토리당은 지금 와서 같은 명칭으로 불리는 것일뿐 성향은 꽤 다르긴 하다.[4] 영국은 백년전쟁 시작 시점부터 그때까지 프랑스 왕의 칭호와 문장을 쓰고 있었다. 중단했던 적도 잠깐 있긴 한데(백년전쟁 중 잠시 프랑스와 협상이 잘 됐을 때 일시 중단했었고, 백년전쟁 이후로는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정 시기에 중단했다), 거의 대부분의 세월 동안은 프랑스 왕의 칭호와 문장을 사용해 왔다. 물론 백년전쟁 이후로는 형식화되어서 더 이상 영국이 프랑스에 왕위와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요구하진 않았다.[5] 심지어 이미 수백 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아온 채널 제도를 내놓으라는 요구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영국이 거부했고 프랑스 공화국도 강력히 주장하진 않았다.[6] 예를 들어 스페인 국왕이 오늘날까지 쓰는 전체 칭호를 보면 예루살렘 왕국, 사르데냐, 지브롤터, 아테네 같이 현 스페인 국왕이 지배하지 않는 나라나 지역의 군주라고 기재돼 있는 경우가 많다. 체면상 지배권을 잃어버린 지역의 지배자라고 사칭하지만 실제로 그 곳의 지배권을 대외적으로 주장하지 않는 건 흔한 일이었던 것이다. 즉 영국의 항변이 틀린 말은 아니다.[7] 유럽의 황제 칭호는 로마 제국의 후예임을 자처하면서 이뤄졌다. 영국이 로마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어서 황제 칭호를 안 쓰기는 했지만 그건 중세 때의 이야기이고 근대에 와서는 사실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시기에 로마와 관련없이 스스로 칭제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예도 있고.[8] 물론 러시아도 황제를 칭하긴 했지만 중서부 유럽과 달리 동로마를 정통으로 놓고 그 동로마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제3의 로마) 그러나 대다수 서유럽 국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표트르 대제 이전에는 모스크바 대공 정도로 취급하였다.[9] 유럽의 관습상 유럽안의 제국은 로마의 황제 말고 인정되지 않고 사이비 취급을 받거나 유럽밖의 황제를 겸임하는것 말고는 인정되지 않았다. 러시아의 동로마혈통은 암살로 단계되었는데 뜬금포로 제3로마라 대공취급 받았다.[10] 신성 로마 황제로서는 프란츠 2세였지만 오스트리아 황제로서는 프란츠 1세로 불린다.[11] 포르투갈의 경우 명나라 때 이미 베이징의 조정과 중국 남부의 현지 관리의 비위를 잘 맞춰 매년 돈을 바치는 조건으로 최소한 자기들이 마카오에서 사실상의 행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결국 당시만 해도 영국이 중국인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참고로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관리해 온 건 명나라 때 부터지만, 완전히 자기 영토로 삼았던 것은 영국이 홍콩을 할양 받은 이후의 일이다. 청나라가 아편전쟁 이후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해 버렸으니 포르투갈은 이 때를 노려서 마카오를 완전히 자기 땅으로 만들고자 했고, 청나라는 할 수 없이 포르투갈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12] 아멜리아 바로 위의 두 아들들인 옥타비우스와 알프레드가 5살도 못 넘기고 요절했기에 늦둥이 막내인 아멜리아에 대한 조지 3세의 애정은 상당했다.[13] 출처:보수주의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 p.197[14] 안타깝게도 4남 에드워드 왕자가 아버지보다 6일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15] 사실상. 신성로마제국이 프랑스에 의해 멸망하고 하노버 등이 프랑스의 영향권에 들어감에 따라 조지 3세는 실질 지배권을 상실했다. 프랑스에서는 당연히 이 때부터 조지 3세의 명목상의 지배권도 인정하지 않았다.[16] 영국 내부적으로는 1814년까지 이들 칭호들의 사용을 고집했다. 1814년에 나폴레옹 전후의 질서가 새로 짜이면서 조지 3세가 하노버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 칭호들이 삭제되고 새로 만들어진 '하노버 국왕'으로 대신하게 된다.[17] 영어로는 조지 3세(George III).[18] 영어로는 조지 3세(George III).[19] 잠시 영국(그레이트브리튼 왕국)에 의해 코르시카 섬이 점령되어 아일랜드 왕국과 비슷한 형태로 영국의 통제를 받는 코르시카 왕국(일명 앵글로 코르시카 왕국)이 만들어지고 조지 3세가 코르시카 국왕으로서 군림하였다. 단 조지 3세가 국내적으로 사용하는 전체 칭호에 코르시카 국왕의 칭호가 더해진 적은 없었다. 아마 코르시카가 장기간 영국의 지배를 받았으면 그의 칭호에 코르시카 국왕도 추가됐을텐데 금방 그 땅을 상실해서인지 끝내 추가되지 않았다.[20] 여기서는 이탈리아어명으로 표기했다. 영어로는 조지 3세(George III). 영국(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지배하의 코르시카 왕국은 코르시카어와 이탈리아어가 공용어였다. 프랑스어로 적을 경우 조르주 3세(George III)가 된다.[21] 백년 전쟁 이래로 잉글랜드→그레이트브리튼 국왕은 관습적으로 프랑스 국왕을 자칭해 왔는데, 그것을 중단하라는 프랑스 혁명 세력의 포기 요구가 워낙 완강해 그의 대에서 비로소 중단하였다.[22] 웨일스의 샬럿 공녀[23]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장녀이다.[24] 빅토리아 여왕[25] 게오르크 5세[26] 테크 공작부인 메리 애들레이드 공주[27] 프레더릭 왕세자의 삼남, 즉 조지 3세의 동생인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윌리엄 헨리 왕자의 아들이다.[28] 참고로 원제가 The Madness of King George인데, George III가 아닌 이유는 영화사에서 관객들이 1편과 2편은 언제 나왔는지 헷갈려 할까봐라고 한다.(...)[29] 다만 영화의 배경은 미국 독립 전쟁 직후인 1780년대 초인지라 조지 3세의 말년을 다룬 것은 아니다. 작중에서 조지 3세는 6개월 간의 치료 끝에 정신병을 극복하는데 성공한다.[30] 앤드류 래널즈조나단 그로프 등 배우들이 연기했다.[31] 정작 그의 큰아들인 조지 4세는 왕비 캐롤라인과 사이가 무척 안 좋았다.[32] 다만 서손, 즉 사생아들까지 합하면 25명이다. 바로 위에서 보듯 조지 3세의 자녀는 모두 정실 소생이므로, 나머지 17명은 그 자녀들의 사생아들인 것.[33] 웨일즈의 공녀 샬럿, 빅토리아 여왕, 게오르크 5세, 케임브리지 공작 조지 왕자, 메클렌부르크 대공비 아우구스타, 테크 공작부인 메리 애들레이드(조지 5세의 왕비 테크의 메리의 어머니)[34] 그래도 그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 앨버트 공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낳았고, 그 자녀들이 많은 유럽 왕실과 혼인을 해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조지3세의 후손들은 아직까지 건재한 셈.[35] 다만 대통령이 아니라 미국 독립군 총사령관 시절 군권을 반납하고 민간인으로 돌아갔다는 말에 이런 말을 했다는 글도 있다.[36] 실제로 워싱턴은 당시 마음만 먹으면 독재자가 될 기회가 얼마든지 있음에도 2번의 연임을 끝으로 자리에서 내려왔다. 권력을 잡았다가 놓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점,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도 독립영웅이 독재자가 되는 아이러니한 사례가 많다는 걸 생각해보면 개국공신에 영국의 식민지배로부터 조국을 해방시킨 영웅이란 명분, 의회에서 종신 대통령 제안, 2번의 연임으로 증명된 통치력과 대중의 지지 등 그의 연임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그닥 없었음에도 본인 스스로 권좌를 포기하고 한명의 민간인으로 삶을 마쳤다는 건 대단한 부분이다. 미국에서 워싱턴이 오늘날 미국식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존경받는데는 이렇게 권력에 연연하지 않은 모습이 고평가받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