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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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제2대 국왕


영국 윈저 왕조 초대 국왕
조지 5세
George V


출생
1865년 6월 3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런던 말보로 하우스
(現 영국 잉글랜드 런던 말보로 하우스)
사망
1936년 1월 20일 (향년 71세)
영국 잉글랜드 노퍽 주 샌드링엄 하우스
묘소
영국 잉글랜드 버크셔 윈저 성
재위기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국왕
1910년 5월 6일 ~ 1936년 1월 20일
영국 자치령 국왕
1910년 5월 6일 ~ 1936년 1월 20일
인도 황제
1910년 5월 6일 ~ 1936년 1월 20일
서명
파일:조지 5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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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윈저 가문[1]
이름
조지 프레드릭 어니스트 앨버트
George Frederick Ernest Albert
아버지
에드워드 7세
어머니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형제자매
앨버트 빅터, 루이즈, 빅토리아, 모드, 알렉산더 존
배우자
테크의 메리 (1893년 결혼)
자녀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메리, 헨리, 조지,
종교
성공회 (잉글랜드 국교회)
장로회 (스코틀랜드 국민교회)[2]
신장
168cm
군사 경력
복무
영국 해군
1877년 ~ 1892년
최종 계급
중령 (영국 해군)
명예 계급
원수 (영국 육군)
원수 (영국 해군)
원수 (영국 해병대)
원수 (영국 공군)


1. 개요
2. 칭호
3. 재위 국가
4. 생애
5. 가족관계
5.1. 조상
5.2. 자녀
6. 도플갱어?
7. 알렉산드르 3세와의 공통점
8. 고달팠던 개인사
9. 기타
10. 대중매체
11.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백성은 곧 나를 일컬음이라.

영국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국왕이고 현 영국의 왕조인 윈저 왕조의 창시자이자 첫 국왕.

빅토리아 여왕의 차손으로 에드워드 7세의 차남이자 에드워드 8세조지 6세의 아버지이고 엘리자베스 2세의 할아버지인 동시에 현 영국 국왕인 찰스 3세의 외증조할아버지이다.


2. 칭호[편집]


  • 1865년 06월 03일 1892년 05월 24일: His Royal Highness Prince George of Wales (웨일스의 조지 공자 전하)[1]
  • 1892년 05월 24일 1901년 01월 22일: 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York (요크 공작 전하)[2]
  • 1901년 01월 22일 1901년 11월 09일: 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Cornwall and York (콘월과 요크의 공작 전하)[3]
  • 1901년 11월 09일 1910년 05월 06일: 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of Wales (웨일스 공 전하)[4]
  • 1910년 05월 06일 1936년 01월 20일: His Majesty The King-Emperor (국왕 폐하)

즉위 직후 칭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해외 영국 자치령의 왕, 신앙의 수호자, 인도의 황제이신 조지 5세 폐하(His Majesty George V, by the Grace of God,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and of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King, Defender of the Faith, Emperor of India)'였었다. 그런데 아일랜드 독립전쟁으로 인해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영국령 아일랜드 대부분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1927년에 칭호법을 개정(Royal and Parliamentary Titles Act 1927) 다음과 같이 칭호를 변경하였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와 해외 영국 자치령의 왕, 신앙의 수호자, 인도의 황제이신 조지 5세 폐하(His Majesty George V, by the Grace of God, of Great Britain, Ireland and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King, Defender of the Faith, Emperor of India)'

이때 국명의 경우엔 1927년 법 개정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에서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됐지만[5], 아일랜드 자유국영연방 탈퇴 전까지 영국 국왕을 군주로 하는 입헌군주제를 유지했다. 때문에 왕의 칭호에서는 '아일랜드'를 '북아일랜드'로 고치지 않고 남겨서 여전히 아일랜드 전체의 군주임을 나타내고, 대신 '연합 왕국'을 왕의 칭호에서 뺌으로써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아일랜드가 더 이상 연합 왕국에 속하지 않음을 나타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는 공식적인 칭호상의 문제일 뿐, 실질적으로 조지 5세는 여전히 연합 왕국(UK)의 왕이었다.


3. 재위 국가[편집]


파일:British_Empire_1921.png
▲ 재위 중인 1921년, 대영제국의 영토가 최대에 달할 때의 재위 영역
국가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기간
비고
영국
1910.5.6.
1936.1.20.
25년 259일

캐나다
1910.5.6.
1936.1.20.
25년 259일

호주
1910.5.6.
1936.1.20.
25년 259일

뉴질랜드
1910.5.6.
1936.1.20.
25년 259일

인도 제국
1910.5.6.
1936.1.20.
25년 259일
황제위
뉴펀들랜드
1910.5.6.
1936.1.20.
25년 259일
[6]
남아프리카 연방
1910.5.31.
1936.1.20.
25년 234일

아일랜드
1922.12.6.
1936.1.20.
13년 46일



4. 생애[편집]


본명은 조지 프레데릭 어니스트 앨버트로 웨일스 공 앨버트 에드워드덴마크의 알렉산드라의 3남 3녀 중 둘째이자 차남이고 빅토리아 여왕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의 여덟 번째 손주이자 차손으로 태어났다. 계승 서열은 아버지 앨버트 에드워드 왕세자와 형 앨버트 빅터 왕세손에 이어서 3위였다. 그의 위로는 형 앨버트 빅터 왕세손이, 밑으로는 루이즈 공주, 빅토리아 공주, 모드 공주와 남동생 알렉산더 존 왕자가 있었다. 이 중 알렉산더 존은 조산아로 태어나고 하루 만에 요절했고 앨버트 빅터는 28세의 나이에 독감으로 죽었다. 그의 왕비는 테크의 메리[7][8]인데 원래는 형 앨버트 빅터 왕세손의 약혼녀였다. 그러나 그가 결혼 직전인 1892년 1월 14일에 28세의 나이에 독감으로 요절해서 조지가 형의 약혼녀 메리를 신부로 맞은 것이다.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뜻에 따른 결혼이었으나 둘은 평생 서로를 존중하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9] 둘은 장남 에드워드, 차남 앨버트, 고명딸 메리 공주, 3남 헨리와 4남 조지 그리고 5남이자 막내인 왕자를 두었다.

군주로서의 소양이 필요한 교육은 모두 후계자였던 형 앨버트의 몫이었고, 조지는 자기가 왕이 될 거라고는 까맣게 모른 채 적성을 찾아 해군 장교의 길을 걸었다.[10] 하지만 1892년 형 앨버트 왕자가 급사하며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왕세손[11]이 되어, 전유럽의 군주제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굳건한 의지와 책임감으로 왕실을 지켜내기 위해 애썼다. 한편 군주의 소양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나중에 그의 발목을 붙잡기도 했는데, 단어 '지식인(highbrow)"과 "눈썹(eyebrow)"를 혼동하고, 심지어 철도 짐꾼의 지적 수준에 머물러있다는 평을 듣는 등 그의 형 앨버트 빅터 왕자와 더불어서 지적으로 우수하지 못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한다.

형이 사망하고 자신이 왕위 계승 서열 2위가 된 후,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요크 공작에 서임되었으며, 미래의 군주 즉위를 대비해 별도로 붙여진 교사로부터 헌법사 수업을 듣기도 했다. 한편 그는 주로 노퍽의 작은 별장인 요크 별장(York villa)에 거주했는데, 이는 그의 취미가 사냥이나 낚시처럼 일반적인 사교계나 문화생활 참여와는 동떨어진 것이었기에 그런 것이었다. 그들 내외의 삶은 왕족이라기보단 중산층의 삶에 가까웠으며, 방문자들은 그 별장을 작고 침울한 별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실제로 부인인 메리 또한 이런 삶을 지루해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당시 조지 5세는 이런 삶을 매우 즐긴 것으로 보이는데, 심지어 그가 모은 우표 수집 앨범에는 당시 대영제국에서 발매했던 모든 앨범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그 양이 무려 각각 50쪽자리 앨범 328개.

이후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하고 아버지 앨버트 왕세자가 에드워드 7세로 즉위하자 자신은 계승 서열 1위인 왕세자로서 콘월 공작과 로스시 공작 작위를 받았고 9개월 동안 해외순방을 한 뒤[12] 생일날인 11월 9일에 정식으로 왕세자인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되었다. 1901년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등 대영제국의 자치령과 식민지들을 차례로 순회했는데, 이는 당시 식민지부 장관인 조지프 체임벌린이 기획한 것으로 보어 전쟁에 참가한 식민지들에 대한 보상을 내리는 성격이 있었다. 이 행사에서 대부분의 식민지나 자치령 백인들과 여러 아프리카 지도자들로부터 환영받았지만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 거주하는 보어인들은 그를 별로 환영하지 않았는데, 이는 보어 전쟁으로 인한 영국에 대한 보어인들의 반감 때문이었다.

이와는 별개로 오스트레일리아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이 출범한 것이 당시였는데, 조지 5세는 호주 의회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의회의 개회를 맡았다. 한편 그는 뉴질랜드를 방문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오스트레일리아나 다른 지역에 비해 본토에서 별 관심을 받지 못했던 뉴질랜드에 대한 영국인들의 관심을 키우기도 했다.

한편 1905년에는 인도를 방문했는데, 그는 인도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백인의 인도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혐오감을 느껴 인도인의 참정권을 확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한편, 이와는 별개로 인도 방문 이후 스페인에서 벌어진 알폰소 13세의 결혼식에 참가했는데, 거기서 신랑과 신부를 노리는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 휘말릴 뻔하기도 했다.


파일:조지 5세 시대의 각국 군주들.jpg
조지 5세 시대의 각국 군주들.

1910년, 부왕 에드워드 7세가 죽자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의 왕이자 인도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한편 조지 5세는 즉위식에서 읽는 즉위 선언문은 성공회의 수호자라는 영국 국왕의 책무에 따라 전통적으로 반가톨릭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13], 그는 이 내용을 읽는 것을 거부했고, 결국 새로 길이가 짧아지고 반가톨릭적인 내용이 지워진 새로운 즉위 선언문이 쓰여졌다.

즉위 1년 후인 1911년 6월 2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열었다. 그 후 아일랜드와 영국령 인도 제국을 방문했는데, 이것은 영국 국왕이 인도 황제로서 델리에서 접견받은 첫 사례라고 한다. 그 후 인도 전역을 순회한 후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왕실이 본래 독일의 공작 가문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14]였기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반독일 감정을 고려해 영국 왕실의 역사적 거주지인 윈저 성의 이름을 따라 가문명을 윈저로 개명하였다.

이때 덩달아 강제로 개명된 가문 이름이 독일의 명문가 바텐베르크(Battenberg)이다.[15] 독일어로 산(山)을 뜻하는 '베르크(berg)'를 같은 의미의 영단어 '마운트(mount)'로 고치고, '바텐(Batten)'을 영어식 독음인 '배튼'으로 바꾼 뒤 본래 배열과 바꿔서 '마운트배튼(Mountbatten)'으로 개명했다. 조지 5세의 친척들이기도 했던 바텐베르크 가문 사람들은 "그동안 영국을 위해 헌신한 대가가 성씨를 갈아버리는 거냐"며 반발하기도 했다.[16] 사촌인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는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이라는 희곡 제목을 비꼬아서 "셰익스피어의 희극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즐거운 아낙네들'을 봐야겠다"고 빈정댔다.

그래도 이 바텐베르크 가문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축에 속한다. 이들은 독일어를 영어로 바꾼 수준으로 개명했지만, 독일과의 연관이 더 큰 가문들은 얄짤없이 원래 이름을 내다버려야 했다. 예를 들자면 메리 왕비의 친정인 테크 공작 가문은 원래 이름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케임브리지 가문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이름을 쓰게 되었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가문 친척들은 독일의 본가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폐위되어 버리게 되었다.

당시 자유당 정부에서 1911년에 예산안에 대해 상원의 거부권을 무력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했는데, 조지 5세는 상원을 압박해 1911년 의회법(Parliament Act)을 통과시켜 국민이 직접 선출한 서민원이 선출되지 않은 귀족원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만들었다. 한편 1928년에 대공황이 벌어지자 대공황 수습 대책을 대신들과 논의하기도 했다.

1915년에 있었던 낙마 사고와 제1차 세계대전, 지속적인 흡연 등이 맞물려 건강이 점점 악화되었다. 만성적인 기관지염으로 세 차례나 요양을 갔고 1928년 11월에는 패혈증에 걸렸다. 말년에는 산소 호흡기에 의존해야 했으며 의식이 오락가락했다. 어쩌다가 의식이 돌아오더라도 치매에 걸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헛소리를 계속했으며[17]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당시 주치의인 도슨 경은 안락사를 옹호하던 의사였는데, 조지 5세가 감기 증세까지 겹쳐 임종이 임박해지자 국왕의 위엄있고 평안한 죽음을 위하여 조지 5세의 의사를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치사량의 약물을 주입했다. 강한 종교적 신념이 있었던 메리 왕비웨일스 공은 이를 분명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들의 의사는 묻지 않았다. 아무튼 왕실 관계자들이나 간호사든 간에 그냥 통상적인 주사를 놓는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도슨경의 의도를 몰랐고, 주사를 놓은지 약 1시간 뒤인 1936년 1월 20일 밤 11시 55분에 세상을 떴다.[18] 조지 5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제국은 어떠한가?"[19]라고 당시 비서가 증언을 했지만, 진짜로 죽는 순간을 끝까지 지켜봤던 주치의 도슨 경의 기록에 의하면 조지 5세의 마지막 말은 간호사가 진통제로 모르핀을 주사하려고 했을 때 했던 "이 빌어먹을 놈아"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한참 동안 비밀에 묻혀졌다가[20] 50년 뒤인 1986년에 공개되었다. 참고로 도슨 경이 조지 5세의 승하 소식을 전한 곳이 타임지였다.

생전에는 자식들한테 매우 엄격하기로 유명했는데 이게 좀 막장 부모 수준이었다.[21] 그러나 성격이 난폭했다거나 자식들에게 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유년 시절부터 사관학교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배운 인간관계가 군대식 인간관계 뿐인 게 문제였다. 자식들이 어렸을 때에는 다정하게 대해줬는데, 좀 더 자라서 본격적으로 교육을 시작할 때가 되자 문제가 생겼다. 본인이 경험한 거라고는 군대식 교육법 뿐이었기 때문.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데이비드 캐넌다인 교수는 조지 5세에 대해서 '국민의 아버지 노릇은 완벽하게 했으나, 정작 자기 아이들 아버지 노릇하는 법은 끝내 배우지 못했다'고 평했다. 그것 때문에 자식들과의 관계도 별로 좋지 못한 편이었다고. 그래도 반항하기 일쑤였던 장남 에드워드 8세보다는 눈물 많고 소심했지만[22] 말 잘 듣던 차남 조지 6세를 좀더 편애했다고도 한다.

그래도 무서운 아버지가 손주바보 할아버지가 되는 경우가 곧잘 있는 것처럼, 손녀들이 태어난 뒤로는 할아버지 노릇은 잘 했다. 오죽하면 말년에는 차남이 왕이 돼서 손녀한테 왕관을 물려줬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였다고. 물론 속썩이는 장남이 못마땅했던 것도 감안해야겠지만, 그냥 '차라리 둘째가 낫겠다' 하는 정도를 넘어 '손녀에게 왕위가 갔으면 좋겠다'고까지 한 걸 보면 손녀바보였던 게 맞는 듯하다. 그리고 조지 5세가 차남에게 왕위를 물려주지는 못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장남인 에드워드 8세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겠다며 왕위를 포기하고 퇴위하자, 차남인 조지 6세가 왕이 되고 그의 장녀(즉 조지 5세의 장손녀)가 후계를 이어 엘리자베스 2세가 되었기 때문.

5. 가족관계[편집]



5.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조지 5세
(George V)
에드워드 7세
(Edward VII)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est 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공녀 루이제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23]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공녀 빅토리아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 and Saalfeld)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Princess Alexandra
of Denmark)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Friedrich Wilhelm,
Duke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Glücksburg)

헤센카셀의 루이세 카롤리네
(Princess Louise Caroline of Hesse-Kassel)[24]
헤센카셀의 루이제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헤센카셀의 빌헬름
(Prince William of Hesse-Kassel)
덴마크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Denmark)[25]


5.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에드워드 8세
(Edward VIII)
1894년 6월 23일
1972년 5월 28일[26]
월리스 심프슨[27]
2남
조지 6세[28]
(George VI)
1895년 12월 14일
1952년 2월 6일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슬하 2녀[29]
1녀
프린세스 로열 메리
(Mary, Princess Royal)
1897년 4월 25일
1965년 3월 28일
6대 헤어우드 백작
헨리 래슬스

슬하 2남[30][31]
3남
글로스터 공작 헨리
(Prince Henry, Duke of Gloucester)
1900년 3월 31일
1974년 6월 10일
레이디 앨리스 몬타규 더글라스 스캇[32]
슬하 2남[33]
4남
켄트 공작 조지
(Prince George, Duke of Kent)
1902년 12월 20일
1942년 8월 25일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34]
슬하 2남 1녀[35]
5남
존 왕자
(Prince John)
1905년 7월 12일
1919년 1월 18일



6. 도플갱어?[편집]




어느 쪽이 니콜라이 2세고 조지 5세인지 찾아보자.[정답]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와는 서로 이종사촌 형제 관계로 조지 5세가 세 살 연상이었다. 조지 5세의 모후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니콜라이 2세의 모후인 덴마크의 다우마가 친자매였다.


파일:Alexandra af Denmark and Maria Feodorovna.jpg

두 사진 모두 오른쪽이 영국의 왕비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왼쪽이 러시아의 황후 덴마크의 다우마다.

자매였던 어머니들이 쌍둥이처럼 빼닮았듯 사촌이었던 조지 5세와 니콜라이 2세 또한 몹시나 닮았다.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쌍둥이로 보일 정도. 외모도 비슷하고 키도 거의 비슷한 덕분에 사촌형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니콜라이 2세는 피로연에서 신랑으로 착각한 사람들에게 축하받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또한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황족들이 모조리 죽어나가는 와중에 모국인 덴마크로 망명한 이모 마리아 황태후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조카인 조지 5세를 보고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으로 착각했다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36]

반면 성격은 정반대였는데 조지 5세는 근엄하고 엄격하다 못해 혹독한 일면이 있는 성격인 것에 비해, 니콜라이 2세는 우유부단하고 남에게 끌려다니는 성격이었다. 일국의 통치자로서의 면모도 정반대였다. 조지 5세는 가족에게는 가혹할지언정 나라를 전쟁의 위기에서 지킨 반면, 니콜라이 2세는 가족에게는 다정했었으나,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갔다.

둘 다 할아버지, 아버지보다 키가 작은 것도 똑같다.[37]

독일의 빌헬름 2세와도 고종사촌 관계[38]이지만 이쪽은 그렇게 닮은 편은 아니다. 빌헬름이 형이다.

외모 뿐 아니라 평소 취향도 닮은 편이었고, 사람들에게 인기도 받는 편인데, 진짜 자녀 교육 방식은 각자 다르다. 조지 5세 집안은 아들부잣집[39]에 딸 한 명이 있고, 니콜라이 2세 집안은 반대로 딸부잣집에 아들 한 명이 있는데[40], 니콜라이 2세는 정말이지 자식들에게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아버지였지만, 조지 5세는 다혈질에 군인 특유의 괄괄한 성미 때문에 자녀들에게 항상 고함만 쳤고 특히 에드워드 8세와의 사이는 가장 안좋았다. 또한 정치 성향도 정반대였는데 내치에 전력을 다한 조지 5세와는 달리 니콜라이 2세는 나라를 사이비 교주에게 맡긴 채 사실상 방치해버렸다. 그 결과 니콜라이 2세와 그 일가족은 혁명이 일어나는 와중에 비명횡사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조지 5세와 그 일가족은 천수를 다 누렸고 그의 증손자는 현재도 영국의 국왕이다.


7. 알렉산드르 3세와의 공통점[편집]


이종사촌동생인 니콜라이 2세와 도플갱어처럼 외모가 닮아서 자주 비교되고는 하지만 그것만 빼면 오히려 조지 5세는 니콜라이 2세의 아버지이자 조지 5세에게는 이모부인 알렉산드르 3세와의 더 공통점이 많다.

  • 둘 다 차남으로 태어나서 원래는 왕위계승서열에 거리가 멀었다.
  • 둘 다 황태자인 형(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 영국의 앨버트 빅터 왕태손)이랑 사이가 매우 좋았다.
  • 둘 다 형이 키가 더 컸다.[41]
  • 둘 다 군인이었다가 형이 젊은 나이에 급사하면서 황태자가 되었다.
  • 둘 다 원래 사귀는 여자가 있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형의 약혼자(러시아 제국의 덴마크의 다우마, 영국의 테크의 메리)를 형사취수해서 결혼했다.
  • 둘 다 아버지가 여러 정부를 둔 바람둥이다.
  • 둘 다 형의 약혼자와 정략결혼 했지만 부부간에 금슬은 좋았다.
  • 둘 다 낳은 자녀 수가 6명이고, 그 중 1명이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 둘 다 아들부자다.
  • 둘 다 다음 황제는 딸만 있거나, 딸이 아들보다 더 많다.
  • 둘 다 몇몇 취미 생활을 제외하면 검소하게 살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조지 5세의 윈저 왕조는 지금도 영국의 군주를 하고 있지만 알렉산드르 3세의 로마노프 왕조는 알렉산드르 3세 사후 다음 군주인 니콜라이 2세러시아 혁명으로 멸망했다.


8. 고달팠던 개인사[편집]


살아생전 개인으로서의 삶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물론 다른 친척들이나 군주들이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빌헬름 2세처럼 군주제가 폐지되면서 폐위되거나 총살까지 당한 니콜라이 2세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하지만.[42]

  • 앨버트 왕자와 동생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조지 5세는 형과 우애가 좋았으며 동생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형 앨버트와 남동생 알렉산더 존은 요절했으며, 여동생들인 루이즈(1867년 ~ 1931년), 빅토리아(1868년 ~ 1935년 12월 1일), 모드(1869년 ~ 1938년 11월 20일) 중 루이즈와 빅토리아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조지 5세는 큰 실의에 빠졌고[43], 말썽 부리는 자식들, 두 여동생들의 죽음, 사촌들이 끔살, 폐위되는 상황 속에서 노르웨이로 시집갔던 막내 여동생 모드 왕비도 점차 위독해지자 '이제 짐의 시대는 끝난 것 같다.'며 비통해하다가 세상을 떴다.[44]
  • 연인과 이어지지 못했다. 조지 5세는 사촌 여동생 에든버러의 마리[45]를 사랑했지만 양쪽 모친의 반대로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다. 이후 에든버러의 마리는 루마니아페르디난드 1세와 결혼했지만, 사이가 나쁜 남편과 불화하며 결혼 생활 내내 고생하면서 살았다. 그래도 조지 5세는 테크의 메리와 정략결혼했지만 금슬은 좋았으며 슬하에 많은 자식을 낳았다. 현재도 영국 왕실은 조지 5세와 메리 부부의 후손[46]들로 대를 이어가고 있다.
  • 자식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차남인 조지 6세는 나름대로 유능하고 성격도 좋았지만, 말더듬이 심하고 병약해서 어렸을 때부터 마음고생을 시켰다. 막내이자 5남인 은 요절했다. 장남 에드워드 8세는 왕실 역사 상 전례가 없는 이혼녀와의 결혼을 하려고 왕위를 내던져 버리는 기행을 저질렀으며, 3남 글로스터 공작 헨리는 작은형인 조지 6세보다도 말더듬증이 심하고 소심하고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들려왔고 4남 켄트 공작 조지는 에드워드 8세마저 경악시킬 만큼 문란한 사생활을 자랑하는 희대의 개막장인 사람이었다.
  •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제정의 몰락을 보았다.[47] 결국 고종사촌 형 빌헬름 2세[48] 친사촌 동생 카를 에두아르트 등, 본인의 친척들이기도 한 군주들이 폐위되는 것을 보았다. 어쩌면 본인도 저 꼴 날까봐 두려워 했을지도.
  • 이종사촌 동생 니콜라이 2세러시아 혁명으로 폐위되어 일가족과 함께 예카테린부르크로 유배되었을 때, 고종사촌 형 빌헬름 2세보다 친했던 그를 구하고 싶어했으나 영국 각료들의 반대로 차르 일가의 구출 및 망명을 그만두었다. 결국 니콜라이 2세 가족이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했다고 한다.[49][50]

9. 기타[편집]


  • 즉위 이후인 1910년 에드워드 마일리우스라는 사람이 조지가 젊은 시절[51] 몰타에서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고 메리 왕비와의 결혼은 중혼이라는 허위 사실을 출판했다. 같은 소문은 1893년에 처음 출판되었으나 조지는 가볍게 웃어 넘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심각해졌는데 에드워드가 조지 5세를 중혼으로 고소한 것이다. 그러나 영국 재판부는 이 재판을 기각해버렸는데 영국 법에서는 국왕에게 죄를 물을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건 영국 국왕 문서 참고. 한편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에드워드 마일리우스는 체포되어 재판을 거쳐 범죄적 비방 행위로 1년을 복역하였다.
  • 그의 취미우표 수집으로, 조지 5세의 우표 수집 컬렉션은 역대 영국 국왕들에게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왕세자 시절에 보좌관이 아침에 출근해서 조지에게 농담 삼아 "전하, 제가 오늘 신문을 보니까 어떤 바보멍청이가 우표 한장에 수백 파운드나 되는 돈을 썼다는 기사가 다 실렸더군요."라고 말을 건네자, "내가 바로 그 바보멍청이일세."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그 외에 새 사냥도 광적으로 좋아했다. 영국에서는 농담삼아 '새 학살자'라고 부를 정도.
  • 위에 언급된 대로 사냥을 매우 잘했는데, 새 뿐만 아니라 각종 동물들의 사냥에 전부 조예가 있었다. 대관식 후 인도를 순회할 때 네팔에서 벌어진 사냥에 참여해 호랑이 21마리, 코뿔소 8마리와 곰을 열흘에 걸쳐 사냥하였다. 한술 더 떠서 1913년에는 번햄 경의 자택에서 6시간 동안 꿩 1000마리를 잡았고, 이때는 본인도 너무 심했다고 인정했다.
  • 그러나 이런 몇몇 취미생활을 제외하면 극도로 검소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 에드워드 7세 스타일의 화려한 사생활과는 잘 맞지 않는 타입이기도 했고, 군인으로서의 생활습관이 거의 몸에 배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적인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니라면 조지 5세의 점심식사는 수프 한 그릇이 전부였다고 한다. 심지어 후식으로 먹을 케이크를 만들 때에도 밀가루를 낭비하지 말라며 먹고 남은 빵 부스러기로 만들게 했을 정도.
  • 또한 문신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대표적인 일화로 1881년 일본에 방문했을 때 팔에 용문신을 새기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영국의 신문사들이 당시 말단 선원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화살이 코를 관통하는 문신을 새겼다며 일제히 오보를 쏟아내면서 영국 의회에서까지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런 소동은 조지 5세가 본국으로 돌아와 사실무근임이 밝혀지면서 자연스럽게 가라앉았다.
  • '백성은 곧 나를 일컫는다.'는 발언이 유명한데, 루이 14세가 했다고 알려진 '짐이 곧 국가다'와 매우 극명하게 대비되는 말.[52]
  • 그의 이름을 딴 전함이 바로 킹 조지 5세급 전함으로, 2차례 건조되었다.[53] 첫 번째는 1911년에 건조된 킹 조지 5세로, 당시 조지 5세가 즉위하여 이름이 붙었다. 두 번째는 1939년에 건조된 전함으로, 2차 대전기 영국 해군의 대들보 역할을 했다. 당시 즉위했던 에드워드 8세가 자신의 퇴위를 예감하고 조지 5세의 이름을 붙였다. 이후 즉위한 조지 6세 때는 함명을 바꾸자는 제의가 들어왔으나 왕은 아버지를 기념하고 싶다고 사양하였으며, 2번함에는 형을 기념하여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붙이고 3번함에는 자신을 지칭하는 듀크 오브 요크를 붙인다.
  • 파리 지하철 1호선에는 조지 5세의 이름을 딴 조지 5세 역이 있다.
  • 키는 168cm 할아버지(180cm), 아버지(173cm), (185cm)보다 작고, 아내(168cm)와 장남(168cm)[54]이랑 키가 같다. 그래도 아내의 키가 큰 덕분에 조지 5세의 아들들은 대체적으로 키가 크다. 에드워드 8세는 키가 작지만, 차남 조지 6세의 키는 175cm로 당시 영국인 남성 평균 키보다 컸으며, 삼남 글로스터 공작 헨리의 키는 185cm, 사남 켄트 공작 조지의 키는 180cm로 장신이다.
  • 그가 재임했던 기간에 대영제국은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다. 다시 말해 조지 5세는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군주였다.#
  • 인도의 황제로도 즉위식을 가졌는데 테크의 메리와 함께 인도로 직접가서 세기의 행사를 했다. 그러나 당시 인도의 마하라자들은 영국 관리들의 닦달로 인해 참석하여 조지 5세에게 신하의 예를 보이긴 했지만 떨떠름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바로다의 샤야지로 3세는 세 번 인사를 해야하는데 한번 인사하고, 뒷걸음쳐서 나가야 하는데 그냥 등을 돌려서 나가고, 지팡이를 휘두르며 살짝 비꼬는 미소를 보여 영국 언론의 비난을 받았다.#,#
  • 슬하 5남 1녀를 두었고 빅토리아 여왕의 손주들 중 아들 수로는 스페인의 빅토리아 에우헤니아 왕비(슬하 5남 2녀)[55]와 함께 공동 2등이다. 공동 1등은 6남 1녀를 낳은 빌헬름 2세와 6남을 낳은 프로이센의 마르가레테 공주[56]다.

10. 대중매체[편집]


  • 영화 킹스 스피치에선 알버스 덤블도어로 유명한 배우인 마이클 갬본이 맡아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공산주의히틀러가 설쳐대는 와중에 왕이란 세계에서 가장 불안정한 직업이 되었다면서 무슨 놈의 왕이 국민들에게 아부하는 광대꼴이냐고 전제군주의 시대에서 민주주의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의 갈등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6세에게 "너의 형이 저렇게 정신줄 놓고 있는데 가 아니면 누가 귀족과 노동자들을 지켜내겠느냐"며 왕족의 의무를 상기시킨다. 이 말을 한 때가 바로 조지 6세가 크리스마스 대국민 연설을 머뭇거릴 때였는데, 엄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임과 동시에 아들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렇게 자식들에게 마냥 엄하기만 한 아버지인 줄 알았지만, 살아남은 네 명의 아들들 중에서 조지 6세가 으뜸이라며 내심 아끼는 면모도 보였다.[57][58]마지막에는 병환으로 거의 정신줄을 놓고[59] 자신이 서명한 법안도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다가 숨을 거둔다.
  • 영화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에선 킹스맨의 프리퀄로 가상의 역사이지만 시대적 배경에 따라 등장한다. 배우는 톰 홀랜더가 맡는다. 이 외에도 니콜라이 2세, 빌헬름 2세까지 1인 3역을 맡는다.[60] 너무나도 나약했던 니콜라이 2세, 열등감에 찌들어 전쟁을 일으킨 빌헬름 2세와 달리 왕실을 수호하는데 성공하고, 이후 옥스포드 공작을 지원해 킹스맨 에이전시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이자 초대 퍼시벌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 Paradox Interactive사의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는 1936년 시점에 영국 국왕으로 있는데 게임 내 다른 국왕들과 같이 국가의 안정도를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 시작 후 금방 사망해서 에드워드 8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안정도가 조금씩 떨어지다가 조지 6세가 왕위에 오르면 다시 안정된다.
  • 위 게임의 모드인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1차대전이 '명예로운 평화'로 종결되고, 이어지는 독일과 영국의 건함경쟁 끝에 피폐해진 영국에서 생디칼리슴 혁명이 일어나자 캐나다로 망명했다. 그 와중에 본인의 건강(주로 정신적인 쪽으로)도 나빠져 독일과 생디칼리스트들에 대한 분노로 미쳐버렸다는 평까지도 듣고 있다.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1936년 초에 사망하며, 죽기 전 유언은 영국으로 돌아와 묻히는 것. 진행에 따라 캐나다가 영국 수복에 성공하면 이 유언을 이루게 된다.

11.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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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세자의 차남.[2] 왕의 차남이 받는 작위. 당시 조지 5세는 아직까지 왕세자의 차남이었지만, 빅토리아 여왕이 고령이라 아버지가 왕위에 오를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이어서 해당 작위를 받을 수 있었다.[3] 형 앨버트의 사망으로 왕의 장남 자격으로 콘월 공작 작위 수여.[4] 왕세자 정식 책봉.[5] 그런데 영국이 아일랜드를 분리시킨 건 1922년이다. 5년 넘게 똥배짱[6] 뉴펀들랜드는 1949년까지 형식상으로나마 자치령으로 남아 있었지만,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붕괴하여 1934년부터 영국에 직할 통치를 요청하여 실질적으로는 영국에서 파견된 뉴펀들랜드 정부위원회(Newfoundland Commission of Government)가 통치하는 속령에 가까웠다.[7] 외숙모 올가 왕비의 6촌 동생이기도 하다. 조지의 장인이자 메리 왕비의 아버지인 프란츠 폰 테크가 올가 왕비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대공비의 외사촌이다.[8] 둘 다 조지 3세의 후손이다. 조지 3세가 조지 5세에게는 진외고조할아버지가 되고 메리에게는 외증조할아버지가 된다. 따라서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장모 메리 애들레이드는 사촌 관계이기도 하다.[9] 비슷한 사례로 이모부이자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드르 3세가 있다.[10] 어릴 때부터 밀덕이었으니 덕업일치를 이룬 것이다.[11] 이때는 아직 할머니 빅토리아가 살아있었기에 아버지 에드워드도 왕세자였다.[12] 이때 자녀들은 조부모인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 왕비 부부에게 맡겨져 각별한 사랑과 돌봄을 받았고 특히 웨일스 공비 메리는 자녀들을 매우 아껴서 자녀들과 떨어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공무로 떨어져 눈물을 흘리기도 할 정도였다.[13] 이전 19세기까지만 해도 영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공공연한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14] 당시 가문의 당주는 막내 사촌동생인 카를 에두아르트[15] 19세기 중엽, 헤센-다름슈타트 대공 루트비히 3세의 동생 알렉산더와 율리아 하우케 여백작의 귀천상혼으로 생겨난 가문이다.[16] 다만 바텐베르크의 경우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제1해군경에 있었고 얼마 뒤 중순양함 세척이 독일 유보트에 1척에게 격침된 사건으로 비난을 받았던 이유가 있었다. 격침된 것 자체가 비난받을 건 아니고 고작 잠수함 한 척에게 중대형함이 격침당하는 건 분명 해군성에 스파이가 있을 것이고 그 스파이는 독일계인 바텐베르크 가문일 거라는 이야기. 결국 해군성의 바텐베르크는 제1해군경에서 사직해야 했고, 가문은 결국 마운트배튼으로 개명한다. 이 해군성의 바텐베르크의 둘째 아들이 마지막 인도 총독이자 제1해군경을 지낸 루이 마운트배튼.[17] 영화 킹스 스피치에 묘사된다.[18] 사망한 또 다른 원인은 여동생들중에서도 특히 가장 사이가 좋았던 둘째 여동생인 빅토리아 공주가 자신의 저택에서 죽자 이에 여동생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아서 조지 5세가 빅토리아의 사후 한 달만에 죽었을 수도 있다.[19] 이것도 내치를 걱정했던 왕의 마지막 의무감 같은 것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조지 5세는 마지막 순간에 치매에 걸린 상태였으며, '제국'도 무슨 살아있는 사람처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지 5세가 정신을 차렸을 때마다 기억 속에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냐는 식으로 묻는 와중에 나온 것이 제국은 어떤가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들렸다는 듯.[20] 도슨 경이 1945년 사망할 때까지도 상원의원직을 역임한 거만 봐도 왕실관계자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였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21] 원래 왕위에 오를 예정이 아니었고 본인도 직업군인으로 살려고 했기 때문에 군인 정신이 매우 강했다. 그와 반대로 아버지 에드워드 7세는 조지 5세의 자식들과 자주 놀아주며 손주들을 많이 예뻐해줬다.[22] 말더듬 증세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자세 교정을 받으면서 더 심해졌다고. 후일 언어치료를 받아 증세가 어느 정도 호전되고 연설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했다고 한다.[23] 조지 3세의 4남이다.[24] 프레데리크 5세의 외손녀이다.[25] 프레데리크 5세의 손녀이다.[26] 조지 5세 자녀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27] 살면서 유일하게 결혼했던 심프슨과의 사이에서 적자녀는 없지만, 결혼하기 전 만나던 애인과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낳았다는 루머가 꽤 있다.[28] 4남 조지 왕자와 이름 같냐는 말이 있는데 본명이 앨버트 프레더릭 아서 조지이고 왕명을 퍼스트 네임이 아닌 미들네임 중에서 채택하였다. 할아버지인 에드워드 7세와 증조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왕이 되기 전까지는 앨버트 왕자라고 불렸다. 에드워드 7세도 마찬가지.[29] 엘리자베스 2세, 스노든 백작부인 마거릿 공주.[30] 조지, 제럴드.[31] 메리 공주의 가계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상당히 복잡하고 구성원이 많은 편이다. 사생아들도 상당한 데다가 다들 자식들을 비교적 많이 낳았기 때문. 사생아의 사생아라는 가계도 있다.[32] 영국 왕실 인물 중 가장 장수한 인물. 1901년 12월 25일에 태어나 2004년 10월 29일 만 102세로 사망하였다.[33] 윌리엄, 리처드.[34] 요르요스 1세의 손녀이자 필립 공과는 사촌지간이다.[35] 에드워드, 알렉산드라, 마이클.[정답] 세 사진 모두 오른쪽이 조지 5세다. 이 둘은 성격 차이 때문에 인상이 서로 다른데 눈을 보면 알겠지만 조지 5세는 군인 성격 때문에 인상이 억세고 니콜라이 2세는 순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키는 니콜라이 2세가 더 크다. 니콜라이 2세가 170cm, 조지 5세가 168cm.[36] 사실 마리아 황태후는 죽을 때까지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죽은 아들이나 손자, 손녀를 사칭하는 자들이 있으면 호통을 치며 만나지도 않았다고 한다.[37] 조지 5세의 할아버지인 앨버트 공의 키는 180cm, 아버지인 에드워드 7세의 키는 173cm고 니콜라이 2세의 할아버지인 알렉산드르 2세의 키는 186cm,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3세의 키는 190cm다.[38] 조지 5세의 첫째 고모인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빌헬름 2세의 어머니다.[39] 참고로 아들부잣집 끝판왕은 빌헬름 2세다. 슬하에 6남 1녀.[40] 참고로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딸부잣집에 유일한 아들이 혈우병 환자여서 아들 병 고치려고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등용했다가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는 데 한몫해서 부각이 잘 안 되는데 니콜라이 1세 이래로 러시아 황실은 아들부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니콜라이 1세가 4남 4녀, 알렉산드르 2세가 6남 2녀(귀천상혼 자녀까지 합하면 8남 4녀), 알렉산드르 2세의 남동생들인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4남 2녀,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2남,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6남 1녀를 두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차남 알렉산드르 3세가 4남 2녀, 그 밑에 동생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4남 1녀를 두었고, 사촌인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이 6남 3녀,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이 6남 1녀를 두었다.[41] 알렉산드르 3세의 형 니콜라이 황태자의 키는 193cm, 조지 5세의 형 앨버트 빅터 왕태손의 키는 185cm로 190cm의 알렉산드르 3세, 168cm의 조지 5세보다 키가 크다.[42] 그래도 빌헬름 2세는 다른 군주들과는 달리 군주제 폐지 이후로도 많은 재산을 가지고 네덜란드로 망명해서 천수를 누리다 갔다.[43] 특히 빅토리아와 사이가 좋았다. 빅토리아가 사망한 1달 뒤, 조지 5세 본인도 사망했다.[44] 다만 모드 왕비는 둘째 오빠 조지 5세가 사망한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45] 빅토리아 여왕앨버트 공의 2남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 왕자의 장녀이다.[46] 장남 에드워드 8세, 차남 조지 6세, 손녀 엘리자베스 2세, 증손자 찰스 3세[47] 제1차 세계대전 전후로 승전국과 패전국, 그리고 양쪽의 식민국들 대부분은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48] 다만 빌헬름 2세는 조지 5세의 아버지이자 본인의 외삼촌인 에드워드 7세에게 사탄이라고 패드립을 친 바 있다.[49] 그 이유는 니콜라이 2세의 아내인 알렉산드라 황후가 독일 헤센 대공국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은 1차 세계 대전의 적국이었던 대독 감정이 아주 좋지 않아서, 알렉산드라 황후까지 망명시킬 경우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이 밖에도 피의 일요일 사건의 부적절한 대응으로 인해 러시아는 물론, 타국에서도 니콜라이 2세의 평가는 최악의 폭군 그 자체였다.[50] 참고로 조지 5세는 니콜라이 2세의 아내인 알렉산드라 황후와도 사촌 남매였다. 조지 5세의 둘째 고모 앨리스 모드 메리의 딸이 알렉산드라.[51] 조지가 몰타에 있었던 건 해군 장교 시절이다.[52] 실제로는 루이 14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53] 첫 번째는 건조되기 전에 HMS Monarch로 이름이 바뀌었으므로 제외하면 2차례.[54] 젊은 시절 키는 170cm이다.[55]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의 고명딸.[56]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자녀들.[57] 특히 큰아들과 넷째 아들 켄트 공작 조지가 속을 많이 썩였다. 이에 비해 병약하고 말을 더듬었지만 왕족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하려 했던 조지 6세가 조지 5세의 눈에 흡족했을 만하다.[58] 막내아들 은 뇌전증으로 1919년 1월 18일, 13살의 나이에 사망했다.[59] 약간 치매 증상을 보인다. 이런 아버지를 걱정하는 조지 6세와 달리 에드워드 8세는 "그 꼰대, 아직도 멀쩡하면서 나한테 양위하려고 쇼하는거임"이라는 막말도 서슴치 않는다.[60] 이러한 1인 다역이 가능한 이유는 앞서 서술된 문단에서도 보다시피, 서로가 친척지간인 데다 특히 조지 5세는 니콜라이 2세와 도플갱어로 착각할 정도로 많이 닮아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