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 라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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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 라베
John Rabe


파일:John_Rabe.jpg

본명
욘 하인리히 데틀레프 라베
John Heinrich Detlef Rabe
출생
1882년 11월 23일
독일 제국 함부르크
사망
1950년 1월 5일 (향년 67세)
서독 베를린
직업
기업인
정당



1. 개요
2. 생애
2.1. 전반생
2.2. 난징 대학살
2.3. 귀국과 여생
3. 기타
4. 창작물
4.1. 존 라베 - 난징대학살



1. 개요[편집]


독일의 기업가이다. 본디 지멘스 회사 소속의 중국 담당 간부로 27년간 중국에 머무른 독일인이며 나치 당원이었지만 난징 대학살 당시 동맹국이었던 일본군의 만행에 맞서 난징에 안전지대를 만들어 약 15~25만 명의 인명을 지켜냈다.


2. 생애[편집]



2.1. 전반생[편집]


1882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1903년부터 직장인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903년~1906년에는 아프리카에 있었고, 1908년부터 중국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중국에 온 뒤 1910년부터 27년간 난징/베이징/상하이 등의 지방에 걸친 지멘스 회사의 업무를 담당했다.[1]

나치당에 가입한 전력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있는데, 중일전쟁 당시는 나치가 본격적인 마각을 드러내기 이전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야욕을 노골화시키기 이전의 히틀러는 독일의 전통가치를 수호하고 사유재산제를 보호하는 전제 하에서 근로대중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한다는 국가사회주의를 지향했었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국제공산주의자로 구성되어 소련의 지배를 받는" 공산당과 달리 나치가 독일 노동자들의 진정한 친구라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이에 더해서 베를린 올림픽이나 아우토반 건설 등 대단한 경제적·문화적 성과를 올렸고 군부 역시 압도적 충성을 바쳤다. 욘 라베 역시 나치에 대해서 "러시아의 국제공산주의로부터 독일을 지키고 근로대중의 이익을 보호해줄 노동자당"이라는 순진한 시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욘 라베는 22살 때부터 아프리카, 중국 등지에서 근무를 하는 등 본토보다 해외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던지라 독일 본토에서의 나치당의 실상을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었다. 나치당에 대한 순진한 믿음 때문에 난징 학살과 관련하여 독일 대사관의 구원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무시당했고, 귀국한 후로는 나치 독일 정부에 일본에 대한 항의와 중국에 대한 지원을 요구했지만 다시 무시당했다. 이 사건은 욘 라베가 나치의 실체에 대해서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된다.

2.2. 난징 대학살[편집]


그러나 급속도로 중일전쟁의 전황이 격화되고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은 난징에 접근해 오며 폭격을 퍼붓는다. 이에 여러 서양인들이 도시를 떠나지만 몇몇 선교사 등 외국인들은 도시에 남는 쪽을 선택했다.

1937년 12월, 난징을 일본군이 점령하자 라베는 다른 외국인들과 함께 난징 안전구역을 만들고[2][3], 그 관리를 맡은 중립위원회를 구성해 일본군의 천인공노할 약탈과 살육, 강간으로부터 중국인을 지켰다. 이 과정에서 중국 정부에 연락해 협약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중국군 패잔병을 재빨리 대피시키기도 했으며, 27년간 모은 사재를 털어 난민들을 도왔다.

훗날 그 이유를 본인의 일기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그것은) 인륜의 문제였다. 나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함부로 배반할 수 없었고, 그렇게 신뢰받는 존재가 된다는 건 매우 감동적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안전구역은 난징 대학교와 대사관에 위치해 있었으나, 울타리나 철조망도 없이 오로지 '도로'를 경계로 국제위원회와 일본군간의 구두 약속으로 성립한 것이었고 군사력 또한 전무해 들락날락하는 일본군을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것을 몸으로 막은 외국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희생자가 얼마나 늘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강간, 살육을 벌이고 있던 일본군이 밀고 들어오는 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지만 욘 라베가 우호국인 독일의 나치스 당원이었다는 점 덕에 적어도 늦출 수는 있었고 그 동안 수십만명이 무사히 도시를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숫자는 약 15~25만 정도로 추산된다. 참고로 난징 대학살 사망자가 대략 20~30만 명이란 것을 감안하면, 욘 라베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삽질이긴 했지만 욘 라베는 나치당원이었기 때문에 "관대하신 히틀러 총통 각하께서 미친 일본군들을 막고 저 불쌍한 중국인들을 인도적으로 구해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편지까지 썼다. 이는 독일이 추축동맹 성립 이전까지는 중국 국민혁명군에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이라는 군사고문을 파견하고 무기와 장비를 지원하는 등 친중적인 태도를 취했었기 때문에 아무리 추축동맹 성립으로 독일이 일본 편이 되었다 해도 독일이 중국에게는 아직 우호적일 것이라 마지막 희망이라도 걸어볼려는 생각으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일기의 히틀러 찬양 부분 및 나치당원이라는 점 때문에 발굴이 늦어지고 저평가되었다는 지적이 많다.


2.3. 귀국과 여생[편집]


이 훈훈한 이야기에는 씁쓸한 뒷이야기가 있는데 욘 라베는 독일로 돌아간 후에 이 일을 보고했으나 게슈타포에게 붙들렸고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는 본인에게 도달하지도 못했다는 걸 알게 된다. 정작 히틀러는 욘 라베라는 자가 자신한테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에 관해서 편지를 썼다는것 자체를 몰랐다. 일본군이 난징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도. 게다가 히틀러는 욘 라베가 적국을 도왔다는 말까지 하였다. 안 그래도 소련 때문에 일본 제국이 소련의 뒤통수를 치게 하려고 비위를 강제로 맞춰주려다 보니 난징 대학살의 경위와 중립 위원회의 활동을 상세히 기록한 귀중한 자료였던 일기는 출판이나 공개가 금지되었고 라베는 종전까지 베를린의 지멘스 본사에서 일했다.

심지어 전후에는 나치 당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영국군에 차례로 체포되었다가 지멘스 본사의 중재 덕에 간신히 무죄로 풀려났다. 나치 당원이기는 했지만 전쟁 범죄 같은 반인륜 행위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인증을 하는 과정에서 재산을 날리고, 가족조차 부양할 수 없는 알거지가 된다. 그나마 1946년 6월에 비(非)나치화 선언을 받긴 했지만 어려운 형편은 여전하였다.

그러다 1948년에 라베 일가의 참상을 전해 들은 난징 시민들이 모금해 돈과 음식을 보내주었는데, 이는 난징시 시장이 직접 찾아가서 전달하였다. 영어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당시 중국인들이 전해준 돈이 미국 달러로 2,000달러였는데, 1949년 기준 미국 평균연봉이 대략 3,600달러였던 데다가, 2023년 환율로 환산해도 고작 2만 5천 달러도 되지 않아 정부 차원에서 모금한 돈이라 하기에는 푼돈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건 일본의 침략의 상흔이 아물기도 전에 내전까지 겹치며 국토가 쑥대밭이 되어 경제 수준이 바닥을 기던 중국에서 어렵사리 모금된 돈이다. 그 외에도 난징시 시장이 스위스를 거쳐 독일을 여행하면서 많은 음식을 사들여 그에게 보내주었다고 하며, 난징 시민들도 그가 사망하는 1950년까지 음식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에 라베는 편지를 보내 감사를 표시하였지만, 안타깝게도 라베는 여전히 가난한 생활을 면치 못한 채로 1950년 1월 5일에 베를린에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샤를로텐부르크 지구의 빌헬름 황제 기념 묘지에 안장되었다.

1997년에 라베의 묘비가 유가족들의 동의를 얻어 난징으로 옮겨졌고 라베 일가가 난징에서 살던 집은 욘 라베와 민간인 안전구역 기념관이 되었다. 난징 대학살 당시 그가 남겼던 일기는 영어로 번역되어 '난징의 의로운 이(The Good Man of Nanking)'라는 제목으로 1998년에 발행되었다.


3. 기타[편집]


늘 그래왔듯이 일본 극우파들은 조직적으로 아시안 홀로코스트를 부정하고 있으며 극우들이 점령해버린 지 오래인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라베가 국민당 측과 커넥션이 있었던 사업가이니 중국놈들에 편향된 자라 믿기 어렵다"며 오히려 라베의 선의를 의심하는듯한 기술을 해 놓았다. 물론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이런 일본 극우들의 망언을 절대 믿지 않고 오히려 지미 웨일스를 포함해 해외의 포털 사이트 등지에서는 가루가 되도록 까고 있다. 다행히 해외에서도 아이리스 장[4] 등의 역사서를 통해 잘 알고 있었기에 일본 극우파들의 말은 절대로 듣지 않고 중국인들의 입장을 최대한 따르고 있다.

영화에서도 간간히 언급되지만, 욘 라베는 오스카 쉰들러처럼 히틀러를 경외하는 나치당원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1937년으로 2차대전 개전 전이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히틀러는 베를린 올림픽이나 아우토반 건설, 실업난 해소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복지 확대, 재군비 선언 등 대단한 경제적·문화적 성과를 올렸고 학살이나 정신병적인 행동 등은 대부분 2차대전을 개전하면서 하기 시작했으니 전쟁 초기엔 독일 군부의 엘리트 장성들도, 나중에 히틀러를 암살하려 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조차도 히틀러가 조국을 구원할 천재라고 생각했을 정도라는 걸 감안해야 한다. 나치에 대한 저항운동을 전개한 백장미단 단원들도 전쟁 전까지는 죄다 히틀러 유겐트에 들어가서 히틀러를 추종하던 사람들이었다. 엄청나게 먼 중국에서 사업을 하던 일반인에 불과한 라베가 알고 있는 히틀러와 나치당의 인상은 이 전쟁 전의 화려한 업적이 대부분이니 좋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또한 당시 사상과는 별로 상관없이 그냥 일자리를 찾거나 사업에 더 수월해지기 위해 나치당에 가입한 사람들도 많았다는 것 또한 염두에 둬야 한다.[5] 오스카 쉰들러도 사업이 잘 되려고 나치에 가입한 것이었고, '나치에게 경례하지 않은 남자'로 알려진 아우구스트 란트메서[6]도 일자리를 찾기 위해 한때 나치당에 가입했었다.


4. 창작물 [편집]



4.1. 존 라베 - 난징대학살[편집]


2009년작 영화. 네이버 영화 IMDB[7]

독일인이라 '욘 라베'가 맞겠지만, 작중의 영어식 이름인 '존 라베'라고 번역되었다.

타인의 삶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슈타지 중령 안톤 그루비츠를 맡았던 울리히 투쿠르가 맡았다.

트레일러에도 나온, 대형 하켄크로이츠 깃발로 일본군의 폭격을 피한 것은 실제 사건을 각색한 장면이다. 실제로는 방공호 위에 깃발을 덮은 정도라고 한다.

물론 일본 넷 우익들이 유튜브에 몰려가서 병림픽을 치루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만든 프로파간다라면서. 물론 해외 네티즌들은 개드립이라면서 쿨하게 씹고 있다. 결국 프로파간다 드립이 안 통하자 중국의 티베트 문제와 한국의 베트남 전쟁 이야기로 물타기를 시작했다.

초반의 욘 라베는 중국인들을 인종주의적으로 대하거나 멍청한 야만인 취급하는 당시의 전형적 백인우월주의자이고, 노동자들에게 나치식 경례를 연습시키기도 하는 등 나치 이념에도 충실한 편이다. 일본이 중국을 잔인하게 침략하는 상황 자체에 대해서도 중국인들의 허풍이나 선동쯤으로 취급하고 있다. 프랑스,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재중 외국인들과 불편한 관계이면서도 은연중에 일상적으로 마주치거나 결국 가서는 협력하게 되며,[8] 나치즘에 대해서 약간 입장이 바뀌긴 하지만 순진하게도 '히총통님이 일본놈들이 저지른 일들을 아신다면 중재를 해서 중국인들을 구해 주실 것이다'라고 믿고 있다. 쉰들러 리스트와도 약간 비슷한 묘사이고, 상술되었듯이 고증된 사실이다.

중국에서 지멘스 사의 기반시설을 마련하는 등 나름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만 외교관계의 변화(국민당 정권을 지원하다가 일본과의 동맹관계 때문에 지원을 끊는다. 냉혹한 독일인 간부는 라베가 수력발전소 기반시설을 만들어 놓은 걸 보고 '적인 중국놈들을 도우기라도 할 셈인가?'하면서 으르렁댈 정도이다.)로 인해 지멘스 사가 난징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해서 자신이 해 놓은 것이 모두 무의미해져버린 현실 속에 허무감과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그러던 차에 중일전쟁 때문에 일본군이 난징 근처에까지 밀려오는 것을 알고 불안감을 느끼다가 베르너 플리스가 지사장에 취임하고 작별 파티에서 훈장을 받고 연설을 하는 그날 난징에 일본군이 공습을 가하자 눈앞에서 죽어가는 민간인들을 살리기 위해 커다란 나치 깃발을 펼쳐서 그 밑에 사람들을 숨겨 주게 되고 그 이후 점차 감정이입을 하면서 사재를 내던져 가며 헌신적으로 중국인들을 돕게 된다.

나치 이념에서도 점차 탈피하게 되다 보니 히틀러를 마구 까대고 라베도 파시스트 독일놈이라고 신나게 디스하는 의사 로버트 윌슨의 말에 불편해하다가 나중에는 오히려 죽이 맞아 가면서 같이 술을 마시며 낄낄대는 모습이 나온다. 기본적으로 두 사람 모두 중국인들을 보호하겠다는 목적 자체는 같았으니 독일인 동료의 말에 의하면 이 둘은 '똑같은 고집불통이라서 서로 싸워대는 것'이라고 했다.

히틀러는 불알이 한쪽만 있다네

괴링은 두 쪽 다 있지만 매우 작지

힘러도 뭐 비슷한 지경이고

괴벨스는 아예 그런 게 안 달렸다네


실제 노래다. Colonel Bogey March 참조.
실제로는 귀국한 뒤에야 나치의 본색을 깨닫게 되었을 뿐, 난징 학살 당시에는 히틀러가 중국인들의 학살을 막기 위해 인도적으로 개입해 줄 거라고 기대할 만큼 나치의 본질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고 히틀러와 나치 독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나치 당원이었다. 하지만 작중에서 나치에 우호적인 모습을 비춘 뒤 좋은 일을 하면 나치 미화가 되어버릴 수 있어서 라베가 나치가 아니라는 걸 구구절절 인증하는 건 어색하더라도 피해갈 수 없는 영화적 장치다. 다운폴 같은 영화가 아닌 이상 나치 당원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는 거의 예외 없이 이런 각색을 넣는다.[9]

안전구역을 위해 일본 육군 사령관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와 내키지 않는 교섭을 하기도 하는데 교섭하는 사이에 일본 육군에게 끌려간 운전수 창이 100인 참수 경쟁에서 죽임을 당한 것으로 나온다. 운전수 창은 차 밖에서 담배탐을 갖고 있다가 육군 헌병이 차로 돌아가라고 시비를 걸 때 모자를 벗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꼴을 당한 거다.[10] "일본에서 아주 인기있는 경쟁이다. 당신 운전사는 명예로운 죽음을 맞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손해는 적절하게 배상해 주겠다는 일본 육군 장교를 보며 황당해하고 이후 악몽에 시달리게 된다.[11] 당뇨병에도 시달리는데, 피난길에 쓸 정도의 인슐린밖에 없었는데 체류가 길어지면서 인슐린이 모자라 쓰러지는 등 극도로 몸 상태가 나빠진다.

그리고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와의 개인적 마찰,[12] 국민당군 포로를 합법적으로 무장해제시키고 일본군에게 인도하는 걸 도와줬는데 모조리 학살되어 버렸기 때문에 넘겨주면 죽을 게 뻔한 포로 수백명을 도저히 넘겨줄 수 없어서 몰래 숨겨놓은 프랑스인 대학 교수 사건, 안전구역 밖에 나가서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다가 강간 학살당할 뻔한 상황에서 일본군을 죽이고 탈출한 중국인 여학생 사건 등의 여러 사고가 연이어 벌어지면서 결국 안전구역이 거슬리게 된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의 일본군은 외교관들과 언론들이 오기 전 라베와 외국인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안전구역을 폐쇄해 버린 뒤 구역 내의 민간인들을 싸그리 학살해버리려는 계획을 세운다. 다행히 이 계획을 양심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일본군 장교 하나가 몰래 라베의 동료에게 통보하면서 라베는 마지막 대책을 세운다.

크리스마스날인 12월 25일 일본군은 출동해서 안전지대 앞에 모인 중국 민간인들에게 총을 겨누는데 라베를 비롯한 외국인들은 총구를 몸으로 막아선다. 하지만 라베는 사전에 서방 보도진이 탄 선박이 난징 시내에 들어오자마자 사이렌을 울려 대도록 계획해 놓았고 일본군이 막 발포하려는 찰나에 사이렌이 울리면서 라베는 '보도진들이 다 보고 있는데 감당할 자신 있으면 쏴 봐라'라는 태도로 나오고 당연히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그럴 수 없는 비겁한 일본군들은 결국 분해하면서 철수한다.

위기를 넘긴 라베는 뻔뻔하게도 보도진을 불러모아 놓고 "우리는 평화의 군대이며 안전지대도 인도주의적인 목적을 갖고 우리 일본군이 만든 것이다"라고 선전하는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를 뒤로 한 채[13] 보도진이 타고 온 선박을 타고 떠나가는데 진짜 영웅이 누군지 알고 있던 난징의 시민들이 일제히 일본군의 제지를 뿌리치고 '라베!'를 연호한다.(난징 시민들은 실제로도 라베에 대한 은혜를 갚으려 최대한 노력했고 절대 그를 잊지 않았다.) 영화의 맨 마지막에 매우 의미심장한 문구가 나오며 영화는 끝난다.

"일본 정부는 여태까지 학살의 규모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닥 인간적이지도 않고 인종차별적이던 나치 당원인 주인공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방치할 수 없어서 인명구조에 나서며 성격이 변하는 스토리는 쉰들러와도 유사하다. 하지만 서사 구조 때문에 영화가 이상하게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각색이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욘 라베가 돌아갈 때도 난징은 암울했다. 본국으로 돌아간 라베가 나치의 본색을 알게 되고 비참한 상황에 빠지는 것은 라베의 실제 사진과 함께 자막으로만 간단히 설명된다.

덤으로, 스티브 부셰미, 다니엘 브륄, 카가와 테루유키 등 조연들이 화려하다. 특히 카가와 테루유키는 일본에서 격렬한 논쟁이 되는 사건을 다루고 있는 사건인 난징 대학살을 묘사한 영화에서, 그것도 사건의 주범이라서 악질적 군국주의자이자 학살자로 묘사되는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14]를 사실 그대로 지독하게 연기하는 과감한 행동을 했지만, 다행히도 생각보다 큰 손해를 입거나 연기 커리어에 지장이 오지는 않은 듯. 넷우익들에게 협박도 많이 받았다. 참고로 카가와 테루유키의 중국 영화 출연은 꽤 오래 되었는데, 2001년 중국영화 '귀신이 온다'에서도 대학살의 원인이 되는 일본군으로 출연했었다.

영화 마지막에서 라베가 떠날 때 로버트 윌슨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부르는 노래는 For He's Jolly Goodfellow라는 노래다.위키피디아


4.2. 난징! 난징![편집]


스코틀랜드 배우 존 파이슬리가 맡았다. 배우가 영국인이라서 그런지 독일어를 구사하긴 하는데 영어 발음이 독일인치고 너무 깔끔하다.

여기서는 조금 더 후덕하고 많이 늙은 모습으로 나왔다. 이곳에서도 중국인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많이 무력하다. 결국에는 일본군들에게 100명의 여자들을 바쳐서 안전을 보장받지만 그 여자들 대부분이 살아남지 못하며 일본군들은 보란듯이 안전지대로 쳐들어와 외국인들과 중국인 관리인들을 능욕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범하며 깽판은 칠대로 다 친다. 심지어 라베의 비서인 탕의 딸도 살해되며 그 아내와 처제까지 강간당한다. 결국 라베는 본국의 소환을 받고는 미안하다고 울면서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중국인들을 뒤로 하고 독일로 무력하게 귀환해버린다. 다만 해당 영화는 난징 대학살에 휘말린 무력한 개인들의 고통에 집중한 영화였기에 욘 라베의 역할이 지나치게 축소된 감이 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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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7년 당시 욘 라베의 근무처는 독일제 수력발전소 난징 지점장이다.[2] 같은 해 11월 상하이에서 45만 명의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안전지대에서 그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3] 이 중에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 1883~1979)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에 협력했던 숨겨진 의인이었다. 업적만 해도 주중 미국대사와 여운형의 만남을 성사시킨 일, 윤봉길 의거 직전에 윤봉길을 직접 자신의 차에 태워 의거 장소까지 데려다 준 일, 그후 일제의 체포를 피해 김구 등을 자택에 숨겨주었다가 상하이시에서 탈출시켜 준 일, 안창호가 체포될 때 이를 항의하는 서한을 보낸 일, 한국광복군OSS의 협력을 성사시킨 일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직접 한국에 와서 구호활동에 전념하다가 1951년에 은퇴하고 미국에서 여생을 보냈다.[4] 중국계 미국인이다.[5] 대표적으로 환타를 만든 독일 코카콜라 지사장 막스 카이트[6] 유대인 여성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나치당에서 탈퇴당했다. 나중에는 형벌 부대에 끌려가 죽었다.[7] 국내에는 2014년에 개봉했었다.[8] 본토에서는 사이가 험악하지만 민간인들끼리 외국 나와서까지 싸울 수는 없기 때문에 영국 재향군인회와 나치 당원들의 친목회가 같은 방에서 열리고 영국 왕(조지 6세)의 사진이랑 히틀러 초상화를 그때그때 바꿔 거는 식으로 오묘한 이중적 생활 분위기가 묘사된다. 아직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시점이다.[9] 브래드 피트 주연의 티벳에서의 7년은 제작중에 주인공 하인리히 하러가 나치당원던 사실이 밝혀져서 급하게 하러가 티벳에서 지내며 스스로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장면을 넣었다.[10] 실제 사건 둘을 합친 것인데 일본군을 바라보면서 감히 모자를 벗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이가 살해당한 사건과 100인 참수 경쟁을 각색한 것이다.[11] 라베는 아무나 한명 골라서 데려가게 해주겠다는 일본군 장교의 말에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 한명을 살려보려 하지만 독일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라베는 창은 운전기술과 독일어에 능통한 인물이었으니 다른 중국인 수십명과 맞먹는 가치를 가졌다고 억지를 부려 수십명의 중국인을 데리고 나온다. 일본군 장교는 처음에는 못마땅해하지만 라베의 요구를 들어준다.[12] 창이 참수당하기 전 야만적 학살자의 우두머리인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가 미웠는지 라베는 경험 있는 외교관 동료인 게오르그 로젠이 '그는 황족이니, 그가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기 전에 먼저 손을 내밀면 안 된다'라고 예법을 알려주는데도 무시하고 손을 내밀어서 아사카노미야의 어그로를 끌고 포로를 잡지 말라고 명령해 놓고 학살 같은 건 국민당의 프로파간다라고 우기는 그 앞에서 맞대놓고 일본군의 학살을 규탄한다.[13] 한편 안전지대의 회장은 지멘스 난징 지사장인 플리스가 맡게 되었다.[14] 일본에서는 절대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터부에 가까운 황족이였다. 이것 때문에 맥아더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고, 결국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러 놓고도 기소되지 않았다. 작중에서도 상관 앞에서 '내 조카이신 천황폐하께옵서는...'하는 식으로 은근히 위압하는 등 자기 혈통을 대놓고 이용해 먹는다. 다만 기소되지 않은것 뿐이지 결국 황족 직위를 박탈당하고 전재산까지 몰수당한 후에 황실에서 쫓겨나 쓸쓸하게 죽었다.[15] 일단 15~25만사이의 사람들이 탈출한 것 만으로도 일본에서 신나게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해대는데 그게 영화에까지 나왔다면 극우들이 얼마나 그 점만을 쪼아댔을지를 생각해보면 된다. 또 일본군의 잔혹함을 중점적으로 다뤘는데 그 장면을 넣는건 불필요했을 것이다. 확실한건 욘 라베의 역할이 지나치게 축소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