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논
덤프버전 :
분류
1. 개요[편집]
영국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이자 사회운동가.
2. 위상[편집]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위대한 뮤지션 중 한 명으로 항상 꼽힌다.
20세기의 대중 음악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많지만, 존 레논은 그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20세기의 대중 음악을 상징하는 인물들 중 한 명이다.
비틀즈 시절에도 인기가 대단했지만, 솔로 커리어 역시 핵이빨로 악명 높은[7] 노엘 갤러거, 루 리드와 쟈니 로튼에게 동시에 극찬을 받을 정도로 후대 뮤지션들에게 존경을 받는 음악가이다.
물론 동료 및 후대 음악가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가장 인기가 좋은 음악가 중 한 명이다. 영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8위에 선정될 정도로 대중들에게도 존경을 받는다. 음악적 평가든간에 대중적인 인지도로던간에, 20세기 대중문화의 상징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대중 음악의 판도를 바꾸었다고 평가받는 영국의 전설적인 록밴드 비틀즈의 전 멤버였다. 비틀즈 내에서는 리드 보컬리스트이자 리듬 기타리스트이었다.[8] 다른 비틀즈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리버풀 출신으로, 비틀즈의 창립자이자 초창기 리더로서 비틀즈라고 하면 폴 매카트니와 더불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음악가가 되었다. 비틀즈가 해체한 이후로는 영국을 떠나 뉴욕에 정착해 활동했다.
1970년대 이후로는 음악 뿐만 아니라 좌익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했다. 1975년 즈음 잠정 은퇴한 이후, 1980년 다시 음악 활동을 시작했지만, 동년도에 마크 채프먼에 의해 암살당하였다.[9] 가족으로는 첫번째 아내인 신시아 레논과 두번째 아내인 오노 요코, 장남 줄리안 레논 그리고 차남 션 레논이 있다.
송라이팅, 리듬 기타, 보컬 등 그가 활약했던 모든 분야에서 전설이 된 인물이다. 비틀즈 시절에는 폴 매카트니와 함께한 대중 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사-작곡 콤비인 레논-매카트니의 일원이기도 했다.
솔로 시절 활동도 비틀즈 시절 못지 않게 고평가를 받는데, 그래서 로큰롤 명예의 전당,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오르고,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아티스트에도 솔로 자격으로 선정되었다. 다른 음악가들이 롤링 스톤에서 선정한 리스트에 많아야 3~4개씩만 선정되는 것과 달리 존 레논은 자신의 분야가 아닌 드럼과 베이스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순위에 올랐다.
그는 자전적이면서도 사회참여적이고, 몽환적이면서도 주제 의식이 뚜렷한 가사들로 밥 딜런, 짐 모리슨, 폴 매카트니, 믹 재거와 더불어 록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사가로 불리고 있다. 음악적으로도 로큰롤, 포크 록, 사이키델릭 록에서 그가 미친 영향은 말할 것 없이 크다.
비단 이런 장르들 뿐만 아니라, 대중 음악계에서 그의 영향력을 받지 않은 음악가를 찾기 힘들다. 팝과 R&B의 전설 마이클 잭슨과 헤비메탈의 전설 블랙 사바스가 동시에 존 레논의 영향력을 언급했을 정도다.
또한, 정치적으로 꽤나 유명하다. 그는 영국의 좌익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10] 로, 1970년대 솔로 활동 시기 평화주의, 반전주의적 정치 신념을 가지고 숱한 노래를 써내려갔다. 그 중에서도 Imagine은 감미로운 멜로디와 아름다운 가사로 현재에 들어서는 평화 그 자체를 상징하는 노래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단순히 노래에서 그치지 않고, 전쟁 반대 시위 등 여러 집회와 사회 운동을 직접 주도해서 20세기 중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운동가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미국의 리처드 닉슨 정부까지도 그의 사회적 영향력을 우려해 감시하였을 정도로 그는 음악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후술할 몇몇 인간적인 논란들로 인해 비판받는 부분도 있지만, 그의 음악적/정치적 업적은 현 시점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설로 평가받으며, 음악가이자 사회운동가로서의 존 레논은 영원히 전설로 남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3. 생애[편집]
I was the Walrus, But now l'm John The dream is over와 같이 문단의 영어 문구는 존 레논의 노래인, God의 가사 중 일부이다. 이는 존 레논이 말년에 생전 동안 있었던 과거, 본인의 인생사에 대해 스스로를 부정하며, 히피이자 사회운동가로써의 새 삶으로 살아갔던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Strawberry Fields Forever는 아마, 사람들은 말년의 존이 부정했던 그 비틀즈 시절의 존 레논을 기억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듯 한다.
3.1. I Was The Walrus: 유년부터 비틀즈 전성기까지[편집]
존 레논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선원이었던 아버지 프레디 레논[13] 은 집을 나갔고, 어머니 줄리아 레논 역시 다른 남자와 동거하게 되었다. 결국 줄리아의 언니인 미미, 메어리 부부 밑에서 자랐다. 6살 때 아버지가 돌아와 몇 주간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지며, 어머니와는 청소년기에 관계를 회복했다. 존은 근처 고아원이었던 스트로베리 필드(Strawberry Field)[14] 에서 자주 놀았으며, 이때 Walrus(바다코끼리)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15살 때, 엘비스 프레슬리의 "Heartbreak Hotel"을 듣고 로큰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학교 근처에 살던 어머니의 집을 오가며 밴조를[15] 배워 음악에 관한 흥미를 가지게 된 존은 16살 때 보호자인 미미 이모를 졸라 17파운드짜리 기타를 구입하고[16] , 맨날 같이 학교를 뒤집어놓던 친구들과 함께 비틀즈의 전신이 되는 밴드 "쿼리멘(The Querrymen)"을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한다.[17] 밴드 결성 직후, 퀴리맨의 멤버 아이반 본의 소개로 폴 매카트니와 만나게 되고 폴이 밴드에 합류한다.[18] 얼마 후, 밴드에 공석이 생기자. 폴의 소개로 조지 해리슨을 만났고, 조지가 밴드에 합류한다.
그러나 존 레논이 17살 때, 어머니 줄리아 레논이 만취한 경찰관인 에릭 클래그가 운전하던 경찰차에 치어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더욱 어이없는 것은 그 경찰관이 무죄선고를 받았다는 점[19] . 그 때 당시 여론과 시민단체에서는 사실상 살인이자 뭐든지 술만 마시면 다 감형해주냐면서 경찰과 법원을 강하게 비난했다.[20]
어머니의 죽음과 말도 안되는 재판은 존 레논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역시 유방암으로 어머니를 잃었던 폴과의 우정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음악에 더욱 몰입하게 된 존은 폴에게서 기타를 배우기도 했다고.[21] 이 때문에 존 레논은 특히 어머니와 관련된 곡을 자주 썼으며, 첫째 아들 이름도 줄리안으로 지었다.
1960년, 스튜어트 서트클리프가 합류하고, 밴드 명을 "실버 비틀즈"로 변경하고 활동하다가 후에 피트 베스트가 들어오자 밴드명을 "비틀즈"로 결정한다. 이후,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는 밴드에서 개인적인 사정[22] 으로 탈퇴하게 되고, 피트 베스트는 나머지 멤버의 불만 때문에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즈(Rory Storm and Hurricanes)'의 드러머 링고 스타로 교체되게 된다. Please Please Me 녹음 때까지만 해도 링고 스타의 자리는 불안 불안했으나, 결국 링고 스타로 확정된 채 본격적으로 비틀즈가 출범한다.
비틀즈 활동 초기 존 레논은 폴 매카트니와 함께 거의 대부분의 곡을 썼으며, 이 둘의 협력은 레논-매카트니라고 칭해진다.[23] 그러나 1965년부터 본격적으로 존 레논의 자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Help!', 'In My Life'[24] , 'Nowhere Man' 등이 바로 그런 곡.[25]
3.2. 예술가로의 변모[편집]
1966년, 'Revolver' 녹음을 앞두고 존 레논은 비틀즈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고 말았다. 존 레논은 "비틀즈는 예수보다 유명하다(popular)"라고 발언했는데, 이 때문에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는 비틀즈 상품을 모아놓고 불태우는 등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 때문에 비틀즈는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를 하기도 했다.[27] 이러한 해프닝과 밥 딜런과의 접촉 등 다양한 사건들은 그들로 하여금 기존 음악성을 탈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비틀즈가 아이돌 그룹[28] 에서 역사상 가장 실험적인 밴드 중 하나로 변모하는 터닝 포인트가 된다.
음악적 전환과 함께 비틀즈의 활동 스타일 자체에도 큰 변화가 생기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일체 콘서트를 중단해버린 것이었다. 이 선택은 멤버들이 공연장보다 스튜디오에 머무는 시간을 늘려, 다양한 아이디어와 악기들로 음악적 실험을 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존 레논의 실험적인 작곡의 예로는 싱글 음반 'Paperback Writer/Rain'에서 처음 등장한 백마스킹[29] 을 생각해낸 것과, Revolver에서 사이키델릭한 곡들을 작곡한 것 등이 있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서부터는 폴 매카트니가 밴드를 주도하게 되는데, 이 때부터 레논-매카트니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하지만, 그렇다고 둘이 큰 대립 구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 당시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의 곡을 합쳐 만든 'A Day in the Life'[30] 는 비틀즈 역사상 최고로 손꼽히는 명곡 중 하나이며, 폴 매카트니는 존 레논의 아들인 줄리안 레논에게 Hey Jude라는 곡을 써주기도 했다.
'Yellow Submarine'에서는 녹음 중간 폴 매카트니가 장난으로 개 짖는 소리를 냈다가 존 레논과 함께 그것을 바탕으로 곡을 작곡한 'Hey Bulldog'이 수록되어 있다.
'Magical Mystery Tour'에서 존 레논은 'Strawberry Fields Forever'[31] , 'I Am the Walrus'[32] 라는 곡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더욱 확고히 해간다.
3.3. But Now, I'm John: 비틀즈가 해체된 뒤 솔로 활동[편집]
3.3.1. 오노 요코와의 만남[편집]
1966년, 비틀즈가 투어를 중단하고, 휴식기를 갖게 되자 존은 미국에서 일본인 전위 예술가 오노 요코의 전시회를 관람한 것을 계기로 요코에게 푹 빠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화이트' 앨범을 작업하던 도중인 1968년 신시아와 이혼하고, 요코와 재혼한다.
요코는 존을 아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대학에서 신시아가 다른 남자와 얘기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신시아의 뺨을 때릴 정도로 꼴마초였던 존은 요코를 만난 뒤 페미니스트가 되었고, 사회 이슈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으며, 전위 예술을 자신의 음악에 접목시켰다. 존은 요코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일부 팬들은 훗날 요코가 비틀즈 해체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여겨 '마녀', '일본 잡귀'라며 맹렬히 비난하게 되였는데, 그녀가 미디어를 통해 비틀즈 해체의 공신 중 한명으로 비추어지며 달갑게 보기 힘들었던 것.난 늘 예술가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을 꿈꾸어 왔다. 나와 예술적 상승을 공유할 수 있는 여자 말이다. 요코는 바로 그런 여자였다.
비틀즈 해체의 직접적인 요인은 멤버들 간의 음악적, 사업적인 이견[34] 과 개인적인 불화였다지만, 바로 그 불화를 가속화 및 재점화하는데 요코가 관련되어 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다수의 비틀즈 팬들 입장에 그녀는 어느 날 갑툭튀해 존의 옆자리를 차지한 외부인이었고, 존의 음악까지 간섭했기에 굴러들어온 돌이 깽판친다는 인상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연유로 비틀즈 해체에 미친 영향 이상으로 과도하게 까이는 경향도 확실히 있다.
신혼여행 대신 언론을 호텔방에 초대한 후, 침대 위에서 파자마를 입고 앉아 반전시위를 한다던가(Bed-In for Peace 시위), 요코와 함께 발매한 실험 음반 자켓에 알몸으로 사진을 찍어 커버로 삼는다든가. 앞 뒷면 전부.
3.3.2. 비틀즈가 무너지다[편집]
폴은 존이 오노 요코와의 사랑에만 치중하고 비틀즈를 뒷전시한다고 느꼈고, 존이 스튜디오에까지 요코를 데리고 오자 이러한 내부의 분열은 극에 달했다. 물론 충분히 빡친 폴 역시 이에 질세라 자신의 약혼녀 린다 매카트니를 스튜디오에 데려오는 식으로 그와 경쟁했다. 폴 매카트니 문서로. 물론 이 갈등 과정에서 존의 자의식은 더욱 강해져만 갔다.[36]
Let It Be는 멤버들의 불화와 감정의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시점에서 제작된 앨범이지만,[38] Abbey Road는 이미 멤버들이 해체를 마음 속으로 예감한 상태에서 작업한 앨범이다. 따라서 불화가 곡들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존에게는 여러모로 폴과의 음악적 이견 차를 실감한 시간이었다.
존은 해체 직후인 1970년대 초반에는 비틀즈 후반부에 두드러진 폴의 약진과 성과를 부정했고, 폴이 주도한 애비로드 메들리와 Let It Be 등 대부분의 McCartney 주도작들을 폄훼했다. 초기 레논-매카트니 체제의 득세를 생각해보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다만, 이는 해체 직후 서로 간의 감정적 앙금이 남아있던 상황에서의 발언이고, 1970년대 중반부터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서 존 레논의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비평도 누그러들게 된다. 특히, 1980년의 인터뷰를 보면 폴의 곡을 칭찬하는 등 상당히 유화적인 태도를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비틀즈 해체 직후 이 둘은 서로를 디스해대며 싸워댔고, 특히 해체 직후인 1971년, 존은 롤링 스톤지와의 인터뷰(Lennon Remembers)에서 폴과 조지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과의 사이는 이미 옛날에 끝났다', '요코를 욕하는 그놈들을 패줘야 했었는데'라는 등.당시 인터뷰 존의 성격답게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어조가 깊기는 하지만, 존이 당시에 얼마나 쌓인 것이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인터뷰에서 그렇게 불만을 표출한 조지 해리슨과는 Imagine 레코딩을 함께 했다는 점.
이 당시 결과물들은 존의 Imagine 앨범과 폴의 Ram 앨범에 특히 잘 나타나있다. 존과 폴이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못하고 싸워댄 것은 아니었고, 1973년을 기점으로 감정적 대립이 상당히 누그러들었으며, 메이 팡의 설득과 존도 욕하지 않던 인물인 링고 스타의 중재로 연락이 닿아 1974년에는 로스엔젤레스에서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스튜디오에서 믹 재거, 스티비 원더 등과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39] 가끔씩 안부 전화도 하고, 폴이 지나가다가 존의 집에 들러 같이 연주도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비틀즈를 둘러싼 법정 공방이 1974년에 최종적으로 종결되고, 존이 아들 션을 얻게 되면서 가정주부 생활을 하게 될 무렵에는 상당히 관계를 회복했다고 한다.
물론 과거의 영혼의 콤비였던 시절 만큼은 아니고 다소 서먹서먹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적어도 비틀즈 해체 직후 서로를 향해 증오에 가득찬 디스를 하던 시절보다는 훨씬 나아진 관계였다.[40] 오히려 존과 말년에 사이가 안 좋아진 것은 자서전 <I Me Mine> 문제로 관계가 소원해진 조지 해리슨 쪽이었다.
1970년대 후반 집필해 1980년 8월에 발표한 자서전에서 조지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서술하는 부분에 존을 누락시켜 버렸고, 존은 이걸 무척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심지어 존이 살해되기 직전까지 화해조차 하지 못했다. 말년의 조지의 인터뷰를 보면 존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은 듯하다. 존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조지는 힌두교에 더욱 깊게 몰입하게 된다.[41]
3.3.3. 솔로 활동[편집]
존은 비틀즈 활동에서 점차 이탈하고, 오노 요코와 함께하는 과정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았는데, 이 때 어렸을 때의 애정 결핍과 여러 가지 심적인 문제들에 대해 직면하면서 그의 내면 세계는 부쩍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얻은 것들을 통해 만든 앨범이 바로 John Lennon/Plastic Ono Band 음반이다. 덧붙이자면 이 시점 이후로 자신이 만들고 키워온 비틀즈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됐다. 앨범의 수록곡인 'God'의 가사에서도 "I don't believe in Beatles"라 외치며 비틀즈에 대한 자기부정을 선언한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비틀즈 해체 시기를 전후하여 존은 요코와 함께 베트남 전쟁 반전 평화 운동을 시작하여, 미국 내의 반전 분위기를 북돋았다. 다큐멘터리 존 레논 컨피덴셜(원제 The US vs John Lennon)에서 이 시기의 존을 자세히 묘사했다. 특히나 Imagine은 그러한 정서를 반영한 대표적인 앨범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그의 사상은 한 단어로 된 세 곡('God', 'Love', 'Imagine')으로 압축할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반전 평화주의자(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 Imagine 중), 무신론자(God is a concept by which we measure our pain - God 중), 무정부주의자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트남전에 반대해 MBE 훈장을 반납하기도 했다. 실제 무정부주의 사상에 심취해 요코와 함께 만우절인 1973년 4월 1일, 이상향을 뜻하는 'Utopia(유토피아)'에서 본 따 'Nutopia(뉴토피아)'라는 가상 국가를 만들기도 했다.해당 지식인.
사회참여적 메세지가 돋보였던 Imagine의 상업적, 비평적 성과에 힘입어, 존 레논은 더욱 정치적인 스탠스를 띄는 앨범인 Some Time In New York City를 발표한다. 그러나 정치적 메세지에 과도하게 치중한 나머지, 사운드적인 측면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고, 상업적으로 크게 실패하고 만다.
비슷한 시기, 존 레논은 오노 요코와 별거를 결심하고, 비서인 메이 팡과 동거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잃어버린 주말이라 일컫는다. 이 시기동안 레논은 보다 내면적 감정에 초점을 둔 Mind Games와 Walls and Bridges를 발표한다. 멜로디컬하고 풍성한 사운드가 특징인 두 앨범 모두 준수한 성과를 거두었고. 빌보드 싱글차트 1위곡을 배출하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 소울메이트인 폴 매카트니와의 교류를 재개했으며, 비틀즈 시절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하던 과거와 달리 비틀즈의 음악을 긍정하는 태도로 돌아서기 시작한다.
그러다 오노 요코와의 별거를 끝내고, 베트남전이 끝난 1975년부터 존은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5년간 가정 주부로 살기로 결심한다. 이는 어린 시절 불우했던 가정 환경에서의 경험이 아내와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80년, 존 레논은 가정주부 생활을 끝내고 음악계 복귀를 선언한다.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와 내면적 이야기를 다룬 새 앨범 Double Fantasy를 발매한 것.
3.4. The Dream is Over: 세상을 떠나다[편집]
1980년 12월 8일 월요일, 'Double Fantasy'를 제작하고 활동을 다시 시작하려던 찰나, 존은 뉴욕에 있는 자택 앞에서 마크 채프먼이라는 사람에게 사인을 해 주었고, 불과 5시간 즈음 후 총을 맞았다.[44] 녹음 스튜디오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는데, 마크 채프먼이 쏜 차터 암즈 사의 언더커버. 38구경 리볼버의 할로포인트[45] 총탄 4발을 왼쪽 가슴과 어깨 부분에 맞아 쓰러졌다고 한다.[46] 그는 병원으로 즉시 이송되었고, 피격 당시에는 살아 있었지만, 도착할 즈음에 결국 심정지가 발생했고 의료진들이 필사적으로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결국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마크 채프먼이 존을 죽인 이유를 놓고 과거에는 비틀즈와 존을 너무나 동경한 나머지, 존과 자신을 동일시했고, 결국 자신이 진짜 존 레논이며, 저기 있는 존 레논은 가짜라는 망상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설이 힘을 얻었었다. 그러나 비록 채프먼의 아내가 동양인이긴 했지만, 오노 요코와는 정반대로 순종적인 타입의 여성이었고, 채프먼의 자택에서 발견된 비틀즈의 앨범 또한 그의 아내가 구입한 것으로, 채프먼이 비틀즈, 특히 존의 광적인 팬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로는 적당하지 않다.
오히려 채프먼이 레논을 살해한 동기는 그의 개인적인 정신병력과 종교적 동기가 복잡하게 결합한 결과물이다. 채프먼이 아주 어렸을 때 레논을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고등학생 무렵부터 독실한 기독교인임을 선언하며 오히려 철저한 안티로 돌아섰다. 채프먼은 법정에서 "스스로 예수보다 유명하다고 지껄이며 신성모독이나 저지르고, 노래 Imagine에서는 무소유를 주장하는데 정작 본인은 수백만달러짜리 아파트에서 호화 생활하는 위선자가 아니냐,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처단했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47] 다만 Court TV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버지가 애정을 한번도 주지 않아서 트라우마에 시달렸는데, 레논이 아버지처럼 보여서 죽였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48]
이 사건으로 채프먼은 현재 40년 가까이 교도소에 갇혀 있다. 2000년부터 2년 마다 가석방 신청을 내고 있으나, 2022년 9월 그의 열두 번째 가석방 신청이 거부되었다. 거부된 이유는 유가족과 고인을 사랑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 그러나 존 레논의 팬들이 채프먼에게 보복범죄를 저지를 우려가 있어 내보내지 않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때, ABC 방송이 먼데이 나잇 풋볼 중계 도중 암살과 관련하여 당시 스포츠캐스터인 하워드 코셀이 속보를 전했다.예, 말씀드려야만 하겠군요. 누가 이기든, 지든 간에 이것은 단지 미식축구 경기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방금 뉴욕의 ABC 뉴스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극적인 소식이 들어와 바로 전해드리겠습니다. 비틀즈에서도 가장 유명한 존 레논이 뉴욕 시의 서쪽에 있는 아파트 건물 근처에 두 차례에 걸쳐 총을 맞아 급히 인근 루스벨트 병원으로 향했으나 도착 즉시 숨졌습니다. 아무래도 이 소식 이후에는 게임에 집중하기 힘들 것 같네요.
Yes. we have to say it, remember this is just a football game, no matter who wins or loses. An unspeakable tragedy confirmed to us by ABC News In New York City. John Lennon, outside of his apartment building on the west side of New York City, the most famous perhaps of all of The Beatles, shot twice in the back, rushed to Roosevelt Hospital. Dead on arrival. Hard to go back to the game after that news.
존 레논 암살 당시 중계 도중에 전한 속보 전문[49]
채프먼이 쏜 총에 맞은 존은 병원으로 실려가면서 "당신 존 레논이죠?"("Are you John Lennon?")이라는 질문에 "네..."("Yeah...")라고 대답했고, 결국 이게 그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20세기 최고의 싱어송라이터라 칭송받던 사람의 최후치곤 무언가 안타까운 죽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존 레논의 유골은 화장 후 요코가 보관하고 있다.
이 때문에 폴 매카트니와 함께 음모론의 단골 손님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폴 매카트니 사망설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비틀즈 관련 음모론이 FBI가 마크 채프먼을 이용해 그를 죽였다는 암살 사주설이다. FBI도 이런 썰을 의식하고 있는지 지금도 존의 파일을 비공개로 지정해놓고 있다.[50]
이런 음모론이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은 존과 요코가 반전 운동을 벌이다 영국의 보수 언론에 쫓겨 미국으로 왔는데, 미국에 와서도 반전 운동을 계속해 당시 미국 정부나 보수 언론들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Some Time In New York City" 앨범을 낼 때 레논은 닉슨 = 마오쩌둥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3.5. Strawberry Fields Forever: 죽음 이후의 존 레논[편집]
비틀즈에서의 큰 비중과 수많은 명곡들, 독특하고 확고한 사상, 극적인 삶과 죽음 때문인지, 존은 비틀즈 멤버들 중에서도 폴과 함께 가장 유명하다. 지금까지도 존은 많은 음악 팬들에게 20세기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존재다."When the Music Died."
"음악이 죽은 날."
대중적인 곡을 주로 작사, 작곡해서 대중들에게 넓은 사랑을 받았던 폴과는 달리, 생전의 존은 비록 전성기 시절 히트곡 수는 폴에게 밀렸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깊은 가사와 아름다운 음악, 사회 참여적 행동들은 수많은 전문가들과 대중에 의해 재평가되며 진가를 인정받았다.[52]
4. 비판 및 논란[편집]
존 레논 사후 시간이 흐르고,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 부정적인 방향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평화주의자 존 레논의 폭력적인 사생활은 이미 널리 알려져 "인간성과 음악성이 별개인 사람"의 대표적인 예로 거론되고 있다. 일이 여기까지 온 데에는 물론 레논이 좋은 소리 듣지 못할 인물인 것이 가장 큰 이유지만, 외부적인 요인도 여럿 떠올릴 수 있다.
존 레논의 이면이 유명해진 건 거의 성자에 가깝게 알려졌던 과거 이미지에 대한 반작용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신성시되는 인물의 재탐구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재탐구의 사실은 괴리감으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을 더 받기 마련이다. 실망감이 워낙 심했던 탓인지 존 레논에 대한 각종 음해나 루머들도 생겨나고 있는 형국이다.#
예를 들어 청년 시절 문란한 사생활로 유명한 마하트마 간디나 반대로 사적으로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알려진 아돌프 히틀러가 있다. 또한, 존 레논이 이른 나이에 사망한 결과 노년에 이미지 관리를 하지 못한 것도 한 요인일 것이다. 당장 비틀즈 멤버 중 좋은 이미지의 링고 스타와 조지 해리슨이 불륜을 저지른 적 있다. 특히, 링고 스타는 불륜의 피해자이기도 한데, 아내 모린 콕스가 불륜을 저지른 배경에 대해 자신의 알콜 중독으로 인한 상습적 폭력이 있었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폴 매카트니도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판이 여러 차례 나왔고, 최근 어린 시절 자신이 무의식적인 인종차별 주의자였음을 인정하는 인터뷰를 했다.
1960년대 영국은 철저히 백인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이 만연했고, 특히 블루칼라 출신의 비틀즈 멤버들이 성장한 환경은 더욱 거칠었다. 존 레논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 영역이고, 지탄받는 사생활의 배경을 어느 정도로 고려할 것인지는 개개인의 몫이다. 확실히 존재하는 그의 인격적인 결함에서 아예 눈을 돌릴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판들이 공적마저 마냥 무마시킬 정도의 추악함이었다면 지미 새빌이나 필 스펙터, 롤프 해리스 등 처럼 기록말살형에 처해진다던지 각종 헌사들도 취소되는 후폭풍이 발생해야겠지만, 존 레논의 경우는 헌액 취소는커녕 사후에도 BBC 선정 위대한 영국인에 높은 순위에 안착하는 등[53] 오히려 늘어만가고 있으며 역작 Imagine은 아직까지도 평화와 화합의 상징으로 커버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과열된 재발굴의 분위기 속에서 위선자라고만 평하는 일부 반응들과는 달리 사생활은 별개로 구분시키는 경향이 강한 서구권에선 마냥 매장시켜야만 하는 급의 실책은 아니라는건 각종 헌사로 보여지고 있는 중이다.
4.1. 야스쿠니 신사 방문 논란[편집]
생전 존 레논은 일본을 여행하면서 일본의 문화와 신앙을 좋아하게 되었고 여러 신사를 방문했다. 허나 1971년, 야스쿠니 신사에 오노 요코와 방문해 논란이 있다.
레논와 요코 부부는 일본 신앙에 대한 관심으로 많은 신사를 방문했고, 야스쿠니 신사 방문도 그 여행 중의 일이었던 만큼 정치적 목적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오노 요코는 좌익 성향의 인물로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물론 무지한게 변명거리가 되지는 않는다. 존 레논은 단순한 뮤지션이 아니고, 반전운동과 평화사상을 외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들을 합사시킨 것은 1978년의 일이므로 당시 레논 부부가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한 것은 전범 참배와는 관련이 없다는 옹호도 있지만, 메이지 시대부터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에서 전사한 일본 군인들의 위패를 가져다 놓고 제사를 지내왔고[54] 국가 프로파간다에 활용되어 왔으므로 평화주의자로서의 행보로는 여러모로 적절치 않다고 볼 수 있다.
존 레논의 일본 여행에 관해 남아있는 기록은 오노 요코의 사촌이자 우익 인사인 가세 히데아키의 칼럼이 있다. 가세 히데아키의 주장에 따르면 존 레논은 야스쿠니 신사를 싫어하지 않았고, 일본의 전쟁은 방어의 개념이었으며 미국에게 공격당한 베트남과 비슷한 처지라는 본인의 의견을 납득했다고 한다. 물론 극우 인사인 가세 히데야키가 정치적 메세지를 담아 작성한 글인 만큼 이야기는 약간 걸러서 들을 필요가 있겠다.
서양 열강들은 미국 외에는[55] 모두 유럽 전선에만 신경썼지[56] 일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으며[57] , 존 레논의 경우에는 부인이 일본인이므로, 당연히 별 생각 없어도 일본에 옹호적인 입장을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옹호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평화를 외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 행동에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애초에 전쟁이란게 현재의 역사기도 하지만 과거의 역사 또한 공존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쟁을 일으킨 전범국이 누구인지 제대로 파악하도 않고 위의 언사를 했다거나, 야스쿠니 신사에 방문했다라는 것 자체가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전쟁의 폭력성과 참혹성을 어필한다는 사람이 역설적이게도 과거의 전쟁과 폭력을 모른다는 것 부터가 겉으로는 함구적인 평화와 전 세계적인 인류를 부르짖지만 속으로는 진지한 연구 없이 앵무새마냥 전쟁반대만 외치고 있다는 것 아닌가?
결국 2019년 존 레논의 아들과 그의 애인 샬럿 캠프 뮬이 욱일기 관련 논란을 일으키고 존 레논이 그의 아내 요코와 평화를 위한답시고 비둘기를 날린 곳이 전범들이 묻힌 야스쿠니 신사였다는 사실이 일제시대 피해국들한테 알려지자 평화를 위해 노래를 부른 자가 한 행동이 이것이였냐며 비난이 쏟아졌다.
4.2. 아동 방임[편집]
존은 신시아와의 관계에서 생긴 자식인 줄리안 레논에게도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어린 줄리안에게 존은 관심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많은 상처를 남겼다.
이후 존은 잃어버린 주말[58] 시기 줄리안과 시간을 보냈지만, 줄리안에게 아버지는 애증의 대상으로 남았다. 줄리안은 아버지가 평화와 사랑을 말하면서 외도로 자신과 어머니를 버렸다고 비판하다가도 그와 함께한 행복한 시간을 추억하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줄리안 본인이 대놓고 아버지보다 폴 매카트니와 보낸 시간이 더 많다고 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다만, 줄리안의 최근 인터뷰에서는 존이 죽기 전, 자신을 비롯한 나머지 가족과의 관계를 개선시키려는 노력을 해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기가 너무 늦었던 지라, 결국 관계를 개선시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4.3. 악담[편집]
존 라이든, 키스 리처즈와 마찬가지로 동시대나 후배 밴드에 대한 악담을 많이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아서 비판받는다.[59] 다만, 일부는 시간이 흘러 그 내용이 와전되거나 부풀려지는 등 적당히 걸러들을 필요는 있다.
생전 존 레논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음악가들은 음악적 성취도와는 별개로 인신공격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 멀리 갈 필요 없이 첫빠따로 한때 밴드의 소울메이트였던 폴 매카트니가 있는데, 1971년 폴과 존의 사이가 매우 안 좋았을 시절 존은 폴 매카트니 때문에 비틀즈 명반이 모두 망가졌다고 욕했다. 페퍼 상사는 폴의 독재로 인해 망가졌고, 화이트 앨범은 폴이 혼자서 스튜디오를 독차지했고, 애비 로드는 폴 매카트니의 메들리 아이디어 때문에 허접해졌다고 깠다.
1970년대 말, 조지 해리슨과도 사이가 나빴던 시기에는 조지를 비난한 적도 있었다. 가령 "그 녀석, 알고도 그랬던 게 분명해.[60] 멜로디만 조금만 바꿨어도 안 걸렸을텐데 그렇게 내보내니까 벌을 받지. 신이 다 알아서 해줄 거라고 생각했나보지?"라며 조지의 종교관까지 걸고 넘어가면서 신랄하게 디스를 했다.
비틀즈 내부 뿐만 아니라, 동료 혹은 후배 아티스트에게도 악담을 꽤나 퍼부은 바 있다. 롤링 스톤스를 두고 뛰어난 밴드고, 그들의 음악을 존중하나 비틀즈와는 상대가 안된다고 말했다.[61] 또한, 시드 비셔스나 짐 모리슨의 사망 사건이나, 닐 영의 철학관도 알고보면 완전 X같은 일이라고 한 바 있다.[62] 핑크 플로이드 같은 몇몇 후대 밴드들은 아예 관심조차 안가지고 무시하기도 했다.
자의식이 상당히 높았던 점과 엮여서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1971년경의 인터뷰를 보면 자신을 천재라고 지칭하는 등 유아독존의 태도를 많이 보여서 존 레논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를 나르시스트라고 까기도 한다.[63] 하지만 척 베리나 엘비스 프레슬리 등의 존 레논이 호평했던 아티스트도 있다.
그의 악담은 후배 음악가로 그치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비틀즈 초기 시절에 무대 위에서 중증 장애인을 비하한 일이 자주 언급된다. 동영상 링크 참고로 이 공연 이전에 사전에 알지도 못한 채 장애인들과의 만남을 가졌었다고 한다.[64]
사실 존 레논은 특유의 핵이빨 성향과는 다르게, 선후배 가리지 않고 대체로 음악가들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죽기 전에 퀸의 음악을 몇 번 흥얼거렸다는 카더라도 있고, 폴 매카트니에 대한 인식도 서로에 대한 감정적 오해가 풀린 1970년대 중반부터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데이비드 보위나 레드 제플린, 엘튼 존 등 몇몇 후배 음악가들도 인터뷰에서 그들의 팬이라고 밝힌 적이 있었다.
비교적 리스너들의 주목을 못받던 제네시스의 신보도 칭찬한 적이 있다. 다만, 음악적인 호불호를 넘어서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에 대해 굉장히 감정적인 비난을 남겼다는 점이 비판받는다.
4.4. 폭력적 성향[편집]
어린 시절의 폭력적인 일화들은 좋게 봐주기 어렵다. 리버풀 내에서 꽤나 유명한 양아치였고, 일진들과 어울리면서 학교폭력을 일삼았다. 그와 절친 관계였던 폴 매카트니조차 존 레논과 친구가 되기 전에는 큰 덩치[65] 에 양아치로 유명해서 눈이 마주치면 맞을까봐 2층 버스에서 일부러 떨어져 앉았다고 한다. 함부르크 시절에도 돈이 부족해서 행인을 폭행해 돈을 빼앗는 절도죄를 수차례 저질렀다고 한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런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았는지 여러 폭력의 일화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이야기가 부인인 신시아 레논이 펍에서 다른 남자[66] 와 춤을 췄다고 뺨을 때렸다는 일화. 그 일을 계기로 신시아는 그와 헤어졌다가, 3개월 후에 존이 사과하면서 돌아와 받아주었다고 한다.
신시아는 존이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불안정했다고 생전에 언급했다. 폭력이 계속 이어졌던 것은 아니었지만, 외도를 비롯해 존은 그녀에게 결코 좋은 남편이 아니었다.[67] 신시아는 반항적이고 냉소적인, 예민한 예술가 성향이 강한 존과 자신은 다른 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대인배스럽게도 이혼 이후 그에 대해서 별로 나쁜 감정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초기 캐번 클럽에서 일할 당시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같이 휴가를 다녀온 이후 캐번 클럽의 MC였던 밥 울러라는 사람이 "허니문은 어땠어, 존?" 이라고 자신을 게이라고 놀리는 농담을 했다는 이유로 그를 죽일듯이 패 갈비뼈를 부러뜨렸다는 일화도 있다.
이러한 그의 폭력적이고 마초적인 성격은, 60년대 후반 오노 요코를 만나 그녀에게서 페미니즘 등의 사상을 배우고, 이외에 히피 문화와 사회 운동의 영향을 받으며 서서히 변했고, 그에 따라서 그 이후로는 이런 폭력적이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성하기도 했다.[68] 하지만 학교 폭력과 가정 폭력 문제가 최근 들어 더욱 민감하게 다뤄지는 사안인 만큼, 이런 존 레논의 과거는 여전히 여실한 비판을 받는다.[69]
4.5. 원인 분석[편집]
존 레논은 오노 요코와 만남을 가지고, 정신적 성숙을 거치면서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평화와 사랑을 외치는 삶을 살았다. 실제로 야스쿠니 신사 방문을 제외한 모든 논란이 요코를 만나기 전에 생긴 것이며, 이후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노래를 많이 발표했다.
이 시절, 그는 원초적 외침이라고 불리는 심리 치료를 통해 평생의 트라우마였던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 대한 기억을 치유하기 시작한다. Plastic Ono Band 전반에 그런 치유의 과정이 나타나며, 이후 그가 정신적으로 안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존은 외도를 멈추지 않았고 결과적으로는 두 번째 결혼도 그다지 평탄하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자면 존과 오노의 관계는 오픈 릴레이션쉽(Open-relationship)에 가까웠으며, 일반적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고, 당사자들의 생각과 다르게 왜곡되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존과 메이 팡의 관계.
그의 사생활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존의 이러한 행동들은 자신과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 및 질투심에서 비롯된 소유욕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한다. 존이 폴을 밴드에 받아들인 것도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취향이면서도 기타 연주를 자신보다 잘 하기 때문이었고, 신시아에게 관심을 가진 것도 중산층 출신에 자신과는 다른 얌전한 무리들과 어울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시아와 속도위반으로 결혼한 존은 결혼생활 도중 그녀에게 죄책감과 더불어 상당히 복잡한 감정을 가졌었던 듯 한데, '자신이 신시아에게 아이라는 족쇄를 채워두었다'는 식으로 표현했었다고 한다. 비틀즈 활동 당시에도 존과 폴은 작곡 파트너쉽으로도 유명했으나, 밴드 내부에서는 둘 사이에 크고 작은 갈등들이 많았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부정적 평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 레논이 여전히 위대한 음악가로 평가받는 이유는 결국 그가 예술가적 재능을 발휘하는 것을 넘어 불안정한 내면을 치유하고 성숙을 이루는 과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솔로 커리어에서 이런 면이 돋보이며, '비틀즈의 아이돌'에서 '고독한 뮤지션'으로 이미지를 탈바꿈하였다. 주변 인물들과 과거의 나쁜 기억을 풀기 시작하고, 한 가정의 아버지로 자리를 잡은 것도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폴과 화해하고, 줄리안과 다시 만나기 시작하면서, 또한 두 번째 아들 션에게는 제대로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면서 그의 천재적 재능의 이면에 늘 부족했던 일반적인 행복도 어느정도 충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일반적인 부성애와 행복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둘째 아들인 션 레논에게만 해당한 것으로 상술했듯이 전처 소생인 줄리안 레논에 대해서는 죽을 때까지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신시아와의 결혼 생활 중에는, 비틀즈의 바쁜 스케줄 탓도 있었겠으나, 아들 줄리안 레논을 방임했다. 훗날 회고하길[70] 당시엔 아들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랐었다는 식으로 자조하였다.
신시아와의 이혼 후에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어느 정도 후회하고, 줄리안과 다시 만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했지만, 존이 줄리안과 제대로 된 부자간의 교류를 나눴던 시기는 오노 요코를 두고 메이팡과 외도를 하던 그 짧은 기간 동안이었다.
하지만 이후 요코와 재결합하면서 다시 아들에게 소홀해졌다. 결국 줄리안은 유년기 시절을 아버지의 부재로 외롭게 보내야 했고, 어린 줄리안에게 아버지 자리의 공백을 대물림해줄 수 없다는 이유로 그를 성심성의껏 챙겨준 사람이 바로 폴 매카트니였다.[71]
다만, 줄리안은 아버지인 존에 대해 상당히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마냥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1971년부터 1980년, 줄리안이 불과 17세였을 때 존 레논은 사망했고, 이 시기 레논이 거주했던 미국을 방문했던 줄리안은 아버지를 “매력적이고, 재미있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5. 음악성[편집]
5.1. 송라이터[편집]
I don't expect you to understand
After you've caused so much pain
But then again, you're not to blame
You're just a human, a victim of the insane
네가 이해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너는 이미 수많은 고통을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네 잘못은 아니야
넌 평범한 사람이고, 미치광이들의 피해자니까
We're afraid of everyone
Afraid of the sun
Isolation...
우리는 모두가 두려워
태양이 두려워
고립감이란...
명실상부한 대중 음악 사상 최고의 송라이터중 한명이다. 그의 작곡 파트너인 레논-매카트니는 작곡, 작사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있는 콤비였으며, 솔로 아티스트로서도 대단한 역량을 가진 송라이터였다.
존 레논은 어린 시절부터 엘비스 프레슬리와 척 베리의 열성팬이었던 로큰롤 키즈로서, 그의 음악은 데뷔 초기부터 마지막 앨범까지 1950년대 정통 로큰롤 사운드가 근간을 이룬다.
특히나 존 레논은 명실상부한 초기 비틀즈의 히트메이커였다. 빌보드 1위를 달성한 비틀즈 초기의 10곡 중 8곡이 존 레논의 주도 하에 작곡한 곡일 정도.[72]
1965년 무렵에는 밥 딜런의 영향을 받아 포크 록의 색채가 짙어지며, 예술가적인 자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단순하고, 발랄한 사랑 노래를 넘어, 가사에 다양한 주제를 담아냈으며, Help!, In My Life,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 등을 만든다.
1966년 발표된 Revolver 이후로는 사이키델릭 록과 아트 록을 기반으로 한 실험적인 사운드로 선회했다. 이 시기, Tomorrow Never Knows, Strawberry Fields Forever,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등의 명곡을 작곡한다. 레논-매카트니의 정점으로 평가받는 A Day in the Life 또한 존의 주도로 만들어진 사이키델릭 록의 대표곡이다.
1968년 이후에는 당시 유행의 바람을 타던 블루스 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그 외에도 하드 록, 프로그레시브 록, 아방가르드 음악, 자장가, 동요, 팝 록, 소프트 록, 바로크 팝, 사이키델릭 팝, 뮤직 홀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다.
비틀즈 해체 직전까지만해도 음악 세계가 상당히 다채로웠지만, 솔로 시절에는 포크 록, 소프트 록, 블루스 록에서 크게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Plastic Ono Band와 같이 록과 아방가르드를 결합시킨 앨범도 만들었고, Rock and Roll처럼 본인이 선호하던 원초적인 로큰롤의 색채가 짙은 작품도 만들었다.
작곡만큼이나 존 레논은 작사의 측면에서 매우 고평가받는다. 존 레논의 가사는 자전적인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의 알려진 곡 중 대부분의 곡은 자전적 경험에 기초해서 만든 곡이다. Strawberry Fields Forever, Mother 등 존 레논은 자신의 일대기와 자신이 처한 상황,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정치적 상황들을 솔직하게 가사에 담아냈다.
낙관적인 가사가 많은 폴 매카트니의 곡들과 달리 존 레논의 곡들은 어두웠던 유년기 때문인지 냉소적이며, 대체로 부정적인 분위기를 띈다. Glass Onion나 Sexy Sadie 같은 곡이 대표적. 그러나 Dear Prudence 같이 밝은 곡들도 많다. 이는 특정한 주제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곡에 풀어내는 그의 작사 방식 때문이다.[73]
1960년대 중후반, 비틀즈가 사이키델릭 장르에 몰두해있을 무렵에는 I Am the Walrus와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처럼 가사의 의미보다는 문장 하나하나와 사운드를 이미지화키고, 모호함을 부각하는 가사를 즐겨 쓰기도 했다.
솔로로 전향한 이후로는 정치적인 가사의 비중이 대폭 늘어났다.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를 음악에 결부시켜 만든 곡이 대표적으로 Give Peace a Chance, Imagine이다. 존 레논의 이런 가사들은 현대에 들어서도 연구 대상이고, 밥 딜런이나 레너드 코헨 등과 함께 "음유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존 레논의 음악은 '실험적이고 난해하다’라는 인식도 있으나, 존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멜로디를 만들어낼 줄 아는 천재적인 작곡가이기도 했다. 특히나 솔로로 전향한 이후 작곡한 Love, (Just Like) Starting Over, Real Love, Beautiful Boy (Darling Boy) 등에서 특유의 복고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이지 리스닝 음악을 확인할 수 있다.
선대 음악가 중에서는 척 베리, 리틀 리처드, 버디 홀리, 엘비스 프레슬리 등 로큰롤 음악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동료 음악가 중에서는 밥 딜런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대중음악가가 아닌 사람중에서는 존 케이지나 오노 요코,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와 같은 아방가드르 음악가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이래저래 선배와 동료 음악가들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지만,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폴 매카트니일 것이다. 폴 매카트니와는 음악적 관계 이상의 관계를 가졌다.
그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은 음악가는 거의 없다. 존 레논의 영향력을 언급한 음악가로는 대표적으로 블랙 사바스, 레드 제플린, 주다스 프리스트, 라몬즈, 본 조비, 브루스 스프링스틴, 핑크 플로이드, 건즈 앤 로지스, 마이클 잭슨, U2, 커트 코베인, 데이비드 보위, 엘튼 존, 빌리 조엘, 오아시스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수 없이 많으나, 가독성을 위해 이만 줄인다.
5.2. 리듬 기타리스트[편집]
비틀즈는 멤버들이 악기 연주를 하는데 있어서 다재다능하고 레코딩을 할때 서로 역할을 바꾸기도 했기 때문에[74] 멤버들의 포지션을 단적으로 정의내리기 어렵지만 존 레논은 주로 비틀즈의 리듬 기타리스트로 구분된다.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리드 기타리스트에 비해 리듬 기타리스트들은 평가가 박한 경향도 있고[75] , 같은 그룹의 조지 해리슨이 연주 실력도 매우 뛰어나서 록/팝 음악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를 논할 때 항상 매우 높은 순위[76] 에서 언급되기 때문에 존은 '작곡가' 이미지이지 상대적으로 기타리스트로서의 면모가 부각되는 편은 아니다. 또한, 같은 밴드의 베이시스트인 폴 매카트니가 베이시스트 답지 않은 엄청난 기타 실력을 가지고 있던 점도 존의 기타 실력이 저평가 되는 데 한 몫 했다.
하지만 본인이 지닌 역사에 길이 남을 작곡 실력과 조지 해리슨의 괴물같은 연주 실력에 묻혀서 그럴 뿐이지 존 레논은 기타리스트로서도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다. 특히, 리듬기타 파트를 논하는데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화려한 기타 연주와는 거리가 있지만 간단하면서 캐치한 리듬 기타 연주[77] 로 노래를 잘 구성한 것으로 유명하다.[78]
테크닉적으로는 딱히 언급할만한 부분은 없지만[79][80] , 기본에 충실하면서 개성있는 사운드와 연주 방식을 보여준 것은 충분히 고평가받을 만하다.
게다가, 존 레논이 처음 기타리스트로써 활동한 시기는 1950년대 말엽이다. 나름 명맥있는 기타리스트라는 이야기. 존 레논 본인도 "자신의 테크닉은 그냥저냥이지만, 기타를 울부짖고 살아 움직이도록 할 수 있다며 자기는 괜찮은 기타리스트"라고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Abbey Road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The End에 폴, 조지, 존이 번갈아가며 연주하는 기타 솔로도 존이 제안한 아이디어였는데, 만약 본인 기타 실력에 자신이 없었으면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실제로 존은 The End 기타 솔로 파트에서 개성있고,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다. 다른 유명 기타리스트들도 존 레논은 워낙에 뛰어난 작곡 실력에 묻혀서 그렇지 기타 연주 실력 역시 훌륭하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롤링 스톤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에서 존 레논은 55위에 랭크되어 있다. 특히나 그가 활동 시기 내내 연주력보다는 작곡 능력에서 훨씬 두각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기타 연주 부분에서 이러한 높은 순위에 랭크된 것을 보면 그가 기타리스트로써도 얼마나 뛰어난 인물인지를 알 수 있다.
5.2.1. 사용 악기[편집]
존 레논은 시기 별로 자주 사용했던 기타가 있다. 존 레논이 사용한 악기들 중 대부분 사람들이 알 만한 악기를 열거해보았다.
비틀즈 초기에 사용한 일렉트릭 기타. 함부르크 시절 구매해서 65년까지 무대에서 사용한 기타이다. 58모델은 원래 내츄럴 피니쉬인데 레논이 검정 페인트로 리피니쉬 해서 사용하다가 리켄배커에서 블랙 피니쉬로 재생산하여 준것이 63모델이다.
리켄배커 325는 다른 일렉트릭 기타에 비해 넥과 스케일이 짧은 편이다. 이런 특징은 리듬 기타인 존 레논에게 코드를 빨리 변환할 수 있어 용이한 기타였다. 숏스케일 기타는 리듬 연주시 코드 잡는데 편하다.[81]
리켄배커에서 트리뷰트 모델을 만든 적이 있다. 픽가드에 싸인이 있으며 리미티드로 출시.
Gibson의 엔도서로 조지 해리슨과 함께 받은 기타. 분실된 기타가 최근에 경매에 붙여졌다. 깁슨과 에피폰에서 시그니처가 나왔으며 특징은 픽업으로 P90 픽업이 달린 것. 일렉기타 픽업이 달린 탓에 볼륨 노브와 톤 노브가 있다. 70주년 기념 모델도 출시. 위 기타는 70주년 모델이다.
레넌은 빈티지 선버스트 제품을
비틀즈 중기, 후기, 솔로활동 초기까지 애용한 기타이며, 존 레논을 상징하는 모델이다. 처음 에피폰 카지노를 쓴 비틀즈 멤버는 스튜디오 녹음용으로 구매한 폴 매카트니이다. 이것을 보고 존도 조지와 함께 샀으며 조지는 다른 기타도 사용했지만 존은 1966년부터 Imagine 앨범을 녹음한 1971년까지 에피폰 카지노를 메인 기타로 사용했다.[82]
구입 당시에는 빈티지 선버스트에 픽가드가 달려 있었으나 존은 픽가드를 제거하고 뒷판을 회색 페인트로 칠해서 사용했으며 인도에서 수행 후 돌아와서는 내츄럴 색상으로 리피니쉬한다.[83]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제작된 모델은 비사이드 곡인 Revolution의 프로모션을 목적으로 한 라이브 무대에서 대중들에게 처음 공개되었고, 그 이후로 Revolution Casino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소리가 일반 카지노보다 날카로운 것이 특징. 워낙에 아이코닉한 기타라서 한때 에피폰에서 존 레논 시그니처 기타로 세 번이나 한정 판매했다.[84]
뉴욕 공연에서 들고 나온 적이 있으며, 특이점은 넥 픽업이 찰리 크리스천 모델이라는 것과 픽업 셀럭터가 있단 점. 브릿지는 일반 P90이다. 깁슨 커스텀 샵에서 한정판매 되었다.[85]
5.3. 보컬리스트[편집]
비틀즈에서 폴 매카트니와 함께 리드보컬 포지션을 담당했으며, 멤버들 중 가장 많은 109곡의 비틀즈 노래에서 리드 보컬을 맡았다. 롤링 스톤 선정 위대한 가장 위대한 가수 5위, 가장 위대한 록 가수 8위에 올라있을 정도로 보컬 실력 역시 출중했다.
존 레논은 상당히 얇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보컬트레이닝으로 다듬어진 가수는 아니었기에 정석적인 보컬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상당히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보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감정 표현에 있어서 매우 뛰어난 보컬이었는데, 자신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투영되는 보컬이 가사와 어우러져 곡에 이입을 불러오도록 만든다.
얇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로큰롤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존 레논은 자신의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때문에 비틀즈 초창기 시절 레논은 목소리를 더블 트랙으로 여러 번 덧입혀 자신의 목소리를 가리고, 목소리가 굵게 들리도록 진성과 샤우팅을 기반으로 한 창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창법이 부각되는 곡이 대표적으로 Please Mister Postman, Twist and Shout, No Reply 등이다. 이와 같은 보컬 스타일은 명랑한 로큰롤 사운드에 잘 어울려서 비틀즈의 엄청난 인기에 기여했다.
1965년 정도를 기점으로는 힘을 빼고, 콧소리를 살려, 얇은 목소리를 보다 자연스럽게 들리도록 창법을 바꾼다. 후에 이는 일반 대중에게 익숙한 레논의 목소리로 자리잡았고, A Day in the Life, Strawberry Fields Forever, Imagine 등의 대표곡에서 들을 수 있다.
다만, 얇상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음역대가 높은 편은 아니었다. 비틀즈 시절에도 하모니에서 낮은 음을 담당하고 폴에게 높은 음을 맡겼다. 높은 바리톤과 낮은 테너의 그 중간 쯤에 위치한 정도로, 바리톤에 가깝지만 테너 음역대도 소화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최고 음역은 A5(3옥타브 라)까지 소화가 가능했고 최저음은 B1(-1옥타브 시)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6. 정치 성향[편집]
음악적인 업적 외에도 정치적으로도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이자 사회주의자로서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사회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가 작곡했던 Imagine은 현대에 들어서는 거의 평화주의와 아나키즘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을 정도다.
오노 요코를 만나기 전까지는 신시아 레논이 다른 남자와 같이 있었다는 이유 만으로 뺨을 때릴 정도로 폭력적인 성향이 있었다. 그러나 오노 요코를 만난 이후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페미니스트가 되었으며, 좌파 운동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86] 그가 1971년 작곡한 Power to the People은 여성주의, 사회주의적인 색채가 짙은 대표적인 노래이다.
좌파적인 운동을 하면서 보수 언론과 정치권과 수많은 마찰을 겪었으며, 이 때문에 말년에는 영국의 보수 언론을 피해 미국 이민까지 준비했다.[87]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존 레논의 신좌파 운동 주도에 경계를 가지고 조치를 취하자, 그를 독재자라고 폭풍 디스하는 곡까지 발표했다.
다만, 아나키스트였기 때문에 당시 68 혁명의 주류 기류였던 호치민 및 마오쩌둥 옹호에는 비판적이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Revolution에서는 만약 너가 마오 주석의 사진을 들고다닌다면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없을거야라고 마오쩌둥과 학생 운동권을 비판했다. Some Time In New York City에서는 리처드 닉슨이 마오쩌둥급의 독재자라면서 마오쩌둥을 돌려 깠다.[88]
가까운 조수에 의하면 말년에는 레이건의 지지자였다고 한다. # 다만 이는 미국 민주당 내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존 레논은 정치적으로 조지 맥거번, 유진 매카시 등 민주당의 반전좌파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는데, 이들은 휴버트 험프리[89] 로 대표되는 민주당 주류파[90] 와 갈등이 심각했다. 그리고 1976년 대선에서 당선된 지미 카터는 비록 아웃사이더로 시작했지만, 당내 주류가 어느정도 수용할 수 있는 후보[91] 였다. 이에 반발해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논리로 많은 민주당 좌파들이 카터 지지를 거부했고, 종종 레이건을 지지하기도 했다.[92] 해당 기사에서도 그가 지미 카터를 경멸했기에(he was really sour on Jimmy Carter) 레이건을 지지했다는 식의 언급이 있는 것을 보면 존 레논 역시 이런 경우에 속한 것으로 보이며, 무엇보다 존 레논이 레이건을 정말로 지지했는지는 믿을만한 출처에 의거한 것이 아니다.
7. 인기[편집]
폴 매카트니, 엘튼 존, 믹 재거, 로버트 플랜트, 프레디 머큐리와 함께 가장 상징적인 록스타중 하나로 사망한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의 조국이었던 영국에서는 존 레논이 가장 위대한 록스타로 꼽히는 일이 흔하다. 특히나 리버풀에서 존 레논은 과장하자면 거의 신과 비슷한 수준의 대우를 받아, 리버풀의 공항 이름까지 리버풀 존 레논 공항일 정도다.
송라이팅에 대한 엄청난 인기는 말할 것도 없고, 그의 가수로서의 커리어 역시 최고의 가수 리스트 top 5 안에는 무조건 들 정도로 뛰어나다. 같은 밴드 내의 폴 매카트니보다도 발성력이 독특하면서도 뛰어나다며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
유튜브 구독자 수 역시 존 레논의 여전한 인기를 보여주는 수치이다. 존 레논의 공식 계정은 사후 40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190만명이 넘는 구독자수를 보유해 비틀즈 멤버들중 유튜브 구독자수 1위이다. 2022년 11월 기준으로 2위인 폴 매카트니가 110만명이며, 그 뒤로 조지 해리슨 75만명, 링고 스타 21만명이다.
음악가 뿐만 아니라 독특한 개인 철학관 때문에 존 레논 그 자체를 존경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일례로 BBC의 조사에서 존 레논은 영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8위로 꼽혔다. 이는 영국에서 국부급의 대우를 받는 아서 웰즐리와 호레이쇼 넬슨보다도 높은 수치이며, 현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 전후 영국 최고의 총리[93] 로 자주 꼽히곤 하는 마거릿 대처보다도 높은 수치이다. 특히나 전후 영국인만을 대상으로 했을 때 존 레논은 윈스턴 처칠과 다이애나 스펜서에 이어 3위였다.
물론 에드 시런처럼 폴 매카트니의 광팬인 경우도 많지만, 후배 록 뮤지션중에서는 존 레논을 폴 매카트니보다 훨씬 더 존경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리암 갤러거가 존 레논의 광신도인데, 폴 매카트니도 좋아하는 형 노엘과 달리 리암은 존 레논을 독보적으로 사랑하는 수준이다.[94] 그 외에 전설적인 메탈 밴드 블랙 사바스의 오지 오스본도 존 레논의 광팬이며, 퀸은 멤버 전원이 존의 팬들이다. 공산권 록 음악가들중에서도 의외로 존의 팬들이 많은데 러시아 록의 상징과도 같은 빅토르 초이 역시 존 레논의 노래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진보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은 연예인이다. 존은 1세대 좌파 연예인이라고 할 수 있고,[95] 그에 따라 사회주의, 평화주의, 아나키즘 성향의 노래를 여럿 작곡하는 등 진보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아나키스트들이 진보적인 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존 레논을 우상으로 삼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다만 현대에 들어서는 존 레논은 진보 연예인의 상징처럼 여겨질 정도라, 보수적인 사람들이나 언론 사이에서는 존 레논의 정치관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아주 높은데, 존은 롤링 스톤이 선정한 100대 기타리스트, 100대 아티스트, 100대 송라이터, 100대 가수, 500대 명반, 500대 명곡에 모두 스스로나 자신의 작품을 올린 유일한 아티스트이다. 스티비 원더, 밥 딜런 등 극소수만이 2~3개 정도의 리스트에만 자신의 이름을 올렸는데, 존 레논은 드러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에서 선정된 것이라는 점에서 다재다능한 재능으로 널리 사랑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 여담[편집]
- 존 레논은 살아생전 미 육군 제2보병사단의 부대마크와 미 육군 Sergeant[96] 계급장, 임진강 정찰대(Imjin Scout) 마크 등이 박음질된 OG-107[97] 상의를 입고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1960년대에 있었던 존 레논과의 인터뷰에서 밝히길, 해당 셔츠는 몇년 전 독일의 한 공항에서 레인코트를 입고 기다리다가 만난 피터 제임스 라인하트(Peter James Reinhardt) 육군 하사가 존 레논을 알아보고 이런 옷을 좋아한다면 주겠다고 하여 나중에 자신의 육군 작업복을 소포로 보내 준 것이다.
존 레논은 이것이 베트남전 참전용사의 것이라고 믿고 입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군복을 입은 이유가 베트남전 시기에 퍼져있던 반전의 메시지라는 분석도 있다. 당연히 이 부대는 한국에 주둔한 주한미군 소속이라 베트남에 간 적은 없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상황을 생각하면 반전, 평화 메시지를 전하는 데엔 부족함이 없는 부대이긴 하다. 실제로 60년대 후반 DMZ는 북한군의 도발이 극심해 미군 사상자도 종종 발생할 정도로 위험한 지역이었다. 오늘날 이 레논의 무대 의상대로 세팅된 OG-107, 혹은 디자인이 거의 같아 대용품으로 쓰이는 OG-507[99] 셔츠는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 국내에도 판매 중이다.
-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의 파텍필립 Ref.2499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시계 중 하나로 유명하다.# 파텍필립 Ref.2499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시계로 불리는 모델으로 1년에 10개 미만만 생산되었으며, 35년간 오직 349개만 만들어진 한정판 아닌 한정판이다. 37mm의 사이즈, 최상의 혈통을 가진 이 시계는 첫 번째 시리즈는 경매를 통해 2012년에 약 30억원에 판매되었고, 플래티넘 모델은 1989년에 당시 가격으로 무려 30억원에 판매된 적도 있다. 2023년 4월자 물가로 환산한다면 대략 96억원 5천만원이다. 더군다나 존 레논이 착용한 이 모델은 파텍필립 Ref.2499 모델 중에서도 2499/100 이라는 레퍼런스를 달고 나온 Ref.2499의 네 번째 시리즈로 추정된다. 여기에 존 레논 프리미엄까지 붙었으니 그 가치는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 스티브 잡스도 존 레논의 팬. 실제로 아이팟터치 1세대의 32기가 모델 발표였던 1월 이후 출시된 아이팟터치 제품군의 표지에는 존 레논의 Imagine이 재생되고 있으며 존 레논의 앨범아트가 붙어있다. 또한 "내 비즈니스 모델은 비틀즈다"는 등의 평소 발언과 그의 전기 내용에 비추어 볼 때, 팬임이 확실하다.
- 엘튼 존과 돈독한 사이를 지내기도 했다. 션 레논의 대부가 바로 엘튼 존이다.
- 살아있었으면 80살이 넘었을 나이임에도 아직 손자녀가 없다. 큰아들 줄리안이 60살 넘어서도 미혼이고 작은아들 션 레논도 현재 장기간 연애중이긴 하지만 결혼까지는 생각이 없기 때문.
- 비 지스의 모리스 깁을 알코올 중독의 길로 이끈 경력이 있다. 나중에 모리스 깁에게 어쿠스틱 기타를 선물해주는데 이 기타는 비 지스의 This Is Where I Came In 앨범의 동명의 곡 뮤직비디오에 등장한다.
- 비 지스의 배리 깁과는 대면하지 않은채 만난 적이 있다. 비 지스가 영국에 돌아온 1967년 3월 30일, 런던의 나이트클럽인 The Speakeasy Club에서 배리는 피트 타운젠드의 소개로 존 레논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레논은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의 커버 사진을 찍은 날이라 커버 속 코스튬을 그대로 입은 채 발코니에서 밖을 보고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있었다. 배리와 피트는 스카치 앤 코크를 마시고 있었고, 피트가 존을 소개해주겠다고하며 배리를 존에게 데려갔다. 피트는 존에게 "존, 이쪽은 비 지스의 배리 깁이야."라고 소개했고, 존은 뒤도 보지 않고 "Howyadoin"이라고 했고 곧바로 "Pleased to meet you"라고 한 후 다른 사람과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결국 배리는 존 레논을 뒷모습으로만 만나게 되었다.
- 존의 두 아들들도 가수로 데뷔하여 뮤직비디오(샘 페킨파 감독)까지 찍었으나, 결국 자기 아버지보다는 못했다. 정확히는 전처 신시아 레논의 아들인 줄리안 레논과 오노 요코의 아들 션 레논이 있는데, 둘 다 가수로 데뷔했고. 앨범 판매량은 플래티넘까지 따낸 줄리안의 압승. 다만 평론가들의 평은 션의 음반이 더 좋고 션은 사업도 잘 되고 있기에 음악은 취미로 하는 수준.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해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던 줄리안이지만 의외로 이복동생인 션하고는 2007년 션의 투어에도 게스트로 참여할 정도로 사이가 괜찮았다. 션이 어릴때 줄리안이 잘 돌봐줬다고. 하지만 줄리안이 요코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하자 션이 일방적으로 줄리안과의 연락을 끊었다고 한다. 결국 줄리안이 사과해 션이랑 같이 잘 지낼려고 노력하는 중이며, 지금은 사이가 많이 좋은 편이다. 줄리안과 션은 나이차가 많이 나는 형제로, 무려 12살 차이다. 션에 의하면 줄리안이 자신한테 기타를 가르쳐줘 자신한테 영웅같은 존재라고 밝힌 바있다. 후에 비디오 게임 GTA5를 통해서 수록된 줄리안의 곡 "Too Late for Goodbyes"가 다시 주목받기도 하였다.
- 존 레논은 숫자 9를 매우 좋아했으며 또한 특별하게 여겼는데, 실제로도 존 레논과 숀 레논의 생일은 10월 9일, 비틀즈가 처음으로 공연한 날도 2월 9일인 등 그의 삶 중 중요한 날들은 9라는 숫자와 연관되어있다. 심지어 존 레논이 죽은 날인 12월 8일은 그의 고향 리버풀 시간으로 따지면 12월 9일이였다. Revolution 9, One After 909, #9 Dream 등 노래에 9를 넣기도 하였다. 또 9번째로 만들어진, 일련번호 9가 새겨진 화이트 앨범을 특별히 자신이 소유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리마스터된 비틀즈 앨범의 발매일도 2009년 9월 9일이였다.
- 그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는 영화 <존 레논 비긴즈: 노웨어 보이>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다. 존 레논 역은 에런 존슨이 담당했다.
- 중간 이름은 전 영국 총리인 윈스턴 처칠에게서 따온 것이지만, 강경한 좌파 성향이었던 존은 보수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처칠에서 따온 자기 이름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나중에 오노 요코의 성을 따 개명했을때 중간 이름을 빼버리려고 했지만 기각당해 고치지 못했다. 상술했듯이 폴 매카트니와 집단자위를 했는데, 이 자위 룰이 상딸을 하면서 자기가 떠올린 사람을 외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존이 뜬금 없이 윈스턴 처칠(...)을 외쳤다는 사실이 폴 매카트니의 인터뷰를 통해 밝혀졌다.# 정말 어지간히 싫어한 듯.
- 한국의 가수 한대수와 만난적이 있다. 한대수가 1978년 뉴욕의 한 식당에 들렀다가 우연히 존을 보았고, 그가 존에게 훌륭한 음악을 들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하자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고...
-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 무대를 퍼포먼스와 함께 존 레논 생전에 녹화했던 Imagine 영상을 리마스터링해 장식했다. 영상. 개막식을 장식한게 폴 매카트니라면, 존 레논은 폐막식을 장식한 셈.
- 평소 자신의 얇은 목소리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남자답지 못하다며 싫어해서 비틀즈 시절에는 대부분의 곡에 더블트랙으로 보컬을 녹음했다. 대표적인 트랙이 A Hard Day's Night 스테레오 판에 수록된 'If I Fell'
- 뉴욕 센트럴 파크에 있는 그의 묘지를 포함해 세계 각지에는 그를 기념하는 기념물이 들어서있다. 이중 매우 특이한 곳에 있는 기념물이 있는데 바로 쿠바 아바나에 있는 레논 공원. 2000년에는 레논 사망 20주기를 맞아 등신대의 레논 동상도 세워졌는데, 제막식에는 한때 비틀즈를 '이기적인 소비주의의 상징'이라고 강하게 비난한 적이 있던 피델 카스트로도 참석했다. 여담으로 이 동상의 안경을 누군가 훔쳐가는 일이 하도 잦아서 자원봉사자들이 안경을 보관한다고 한다.
- 공연 영상이나 프로모 비디오 등에서 확인해 볼 수 있듯이 비틀즈 초반기때는 상당히 건장한 체격이었으나 1967년 이후로는 살이 급격히 빠지면서 마른 체형이 돼버렸다.
- 존 레논의 치아를 낙찰받은 캐나다의 한 치과의사가 2013년에 치아에서 DNA를 추출하여 존을 복제인간으로 부활시키는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물론 팬들의 반응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 영국의 유명 자동차 메이커인 롤스로이스와 '악연'이 있다. 롤스로이스는 자사의 정숙함, 고급스러움이란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인사에게만 차량을 판매하였다. 독재자와 같은 인사는 말할 것도 없고, 연예인도 이미지가 '경박한' 셀러브리티 유형의 스타에게는 판매하지 않았다. 하지만 존 레논의 경우엔 비틀즈라는 유명세를 롤스로이스도 포기하기가 아까워서 차량(롤스로이스 팬텀5)을, 그것도 다른 주문을 제쳐두고 레논에게 먼저 판매했다. 이런 뒷배경을 모를리 없던 레논은 당연히 아니꼽게 보았고 자동차에 장난(?)을 쳤다. 그 장난이란게...
팬텀에 노란 칠을 하고 여기에다 현란한 아프리카 토속 문양을 그려버렸다. 말 그대로 롤스로이스의 이미지에 먹칠을 한 격. 이 자동차는 이후 스미소니언 재단에 기증하였고,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 65년도 쯤부터 모자 쓰기를 좋아했다.
- 채식주의자의 상징과도 같은 폴 매카트니에 밀려 잘 안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역시 채식주의자였다. 다만 종교적인 이유로 채식을 했던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나 정치적인 이유로 채식을 한 폴과는 달리, 존은 건강 상의 문제로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고기를 좋아했던 존은 결국 1970년대부터는 채식주의를 포기하고 허용 범위에서만 육식을 하는 플렉시테리언 정도로 돌아섰다고 한다.
- 워낙 후대 밴드에 인신 공격에 가까운 수준의 악담을 늘어놓거나, 아예 개무시하는걸로 유명하지만 생전 인터뷰를 들어보면 후대 음악가 중에서는 레드 제플린[100] 과 데이비드 보위, 엘튼 존[101] 등을 좋아했다. 또 제네시스의 Selling England by the Pound 앨범을 칭찬한적도 있다. 선대나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음악가 중에서는 에릭 클랩튼, 밥 딜런,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폴 매카트니등을 좋아했다. 특히나 척 베리를 무척이나 사랑해서 "로큰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자면 척 베리라고 불러야한다"라고 할 정도로 좋아했다.
- 좋아하는 폴 매카트니의 노래로는 "Here, There and Everywhere", "For No One" 등이 있었다. 한창 존과 폴의 사이가 안좋았을때에는 그 외에 폴 매카트니의 곡들은 듣기도 싫다고 무진장 깠다. 페퍼 상사 앨범은 폴 매카트니가 쓸데없이 음악 더빙을 해 곡들을 망쳤고, 화이트 앨범은 폴 매카트니가 너무 스튜디오를 혼자서 오래 썼고, 애비로드는 메들리 구성이 앨범을 망쳤다며 폴 매카트니 때문에 자기가 만든 비틀즈 앨범이 쓰레기가 되었다며 비난한 바 있다(...).
- 타 뮤지션들의 노래로는 척 베리, 리틀 리처드 등 로큰롤 장르의 노래를 좋아했다. 밥 딜런, 애니멀스의 노래도 좋다고 평가했으며, 후대 밴드의 음악중에서는 Stairway to Heaven을 칭찬했다. 생전에 퀸을 언급한 적은 없었지만 죽기 직전에 퀸의 노래를 흥얼거린적은 있다고 한다.[102]
- 매부리코다.
- 비틀즈 멤버들 가운데 유일하게 셀프 타이틀 앨범이 없다. 폴 매카트니는 1970년 솔로 데뷔 앨범부터 셀프 타이틀 앨범이었으며, 이후로도 1980년과 2020년에 셀프 타이틀 앨범을 발매했다. 조지 해리슨은 1979년에, 링고 스타는 1973년에 셀프 타이틀 앨범을 발매했다. 다만 사후 컴필레이션 앨범 및 박스세트까지 확장한다면 1990년에 컴필레이션 박스세트 Lennon이 발매된 적은 있다.
8.1. 성적 지향[편집]
1963년 게이이자 비틀즈의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존 레논이 함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휴가를 보낸 후 그가 게이라는 소문이 돌았었다.[103] 폴 매카트니는 존의 게이설에 대해 "난 존과 단 둘이 한 방을 쓴 적이 여러 번 있지만, 그는 내게 아무 짓도 하려하지 않았다."라며 소문을 부인했다.
그런데 2015년 오노 요코가 인터뷰에서 밝히길, 엡스타인과의 외도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이나 그가 양성애자 성향이 있긴 했으며, 존과 이에 대해서 진지한 대화를 했었는데 우리 모두 양성애자 성향이 조금이나마 있을 수 있으나, 사회적 시선때문에 숨기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었다고 한다.[105] 그리고 존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매력적인 남자를 만난다면 거부하지 않겠다고까지 말했었다고 한다.
8.2. 레논 벽[편집]
존 레논의 이름을 따온 민주화 운동 성지.홍콩과 체코 프라하 이렇게 2군데 있다.
8.2.1. 홍콩 레논 벽[편집]
자세한 내용은 레논 벽(홍콩)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2.2. 프라하 레논 벽[편집]
자세한 내용은 레논 벽(프라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디스코그래피[편집]
9.1. 앨범[편집]
- 존 레논/음반 목록 항목으로.
9.2. 싱글[편집]
9.2.1. 빌보드 1위[편집]
-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 (1974)
- (Just Like) Starting Over (1980)
9.2.2. 빌보드 2위[편집]
- Woman (1981)
9.2.3. 빌보드 3위~10위[편집]
- Instant Karma! (We All Shine On) (1970)
- Imagine (1971)
- #9 Dream (1975)
- Watching the Wheels (1981)
- Nobody Told Me (1984)
9.2.4. 빌보드 11위~20위[편집]
- Give Peace a Chance (1969)
- Power to the People (1971)
- Mind Games (1973)
- Stand By Me (1975)
10. 어록[편집]
음악 활동 뿐만 아니라 히피 사상가, 사회 운동가로도 활동한 사람이라 많은 어록을 남겼으며, 이 때문에 그의 명언은 종종 SNS나 방송에서도 회자된다. 히피답게 평화나 사랑에 관한 어록이 많다.
당신은 저를 몽상가라고 부르겠지만, 저 혼자만이 꿈꾸는 것이 아니에요. 언젠가는 당신이 저희들과 함께하기를 바라요, 그러면 세상은 하나가 될 거예요
A dream you dream alone is only a dream. A dream you dream together is reality.
혼자서 꾸는 꿈은 몽상이지만, 우리 모두가 꾸는 꿈은 현실이다.
It's weird not to be weird.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려는 것이 더 이상하다.
Time you enjoy wasting, was not wasted.
당신이 낭비된 시간을 즐겼다면 그것은 낭비된 시간이 아니다.
Everything will be okay in the end. If it's not okay, it's not the end.
모든 것의 끝에는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 만약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다.
War is over ... If you want it.
전쟁은 끝났다 ... 당신이 원한다면.
If everyone demanded peace instead of another television set, then there’d be peace.
만약 모두가 TV 하나를 장만하려는 대신 평화를 장만하려고 든다면 평화가 만개할 것이다.
Living is Easy with Eyes Closed, Misunderstanding all you see.
눈을 감고 사는 인생은 모든 것을 오해하기 때문에 쉽다.
I can’t wake you up. You can wake you up. I can’t cure you. You can cure you.
내가 당신을 깨워줄 수는 없다. 당신만이 당신 스스로를 깨울 수 있다. 난 당신을 치료할 수 없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을 치료할 수 있다.
Art is only a way of expressing pain.
예술은 고통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You’re all geniuses, and you’re all beautiful. You don’t need anyone to tell you who you are. You are what you are.
당신은 천재이고 아름답다. 당신은 당신이 누구인지 말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당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We live in a world where we have to hide to make love, while violence is practiced in broad daylight.
우리는 대놓고 사랑하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 대신 이 세상의 낮에는 폭력이 공공연히 일어난다.
Reality leaves a lot to the imagination.
현실의 많은 것들이 상상에서 비롯된다.
[107]행복은 따뜻한 총이다.
When I was 5 years old, my mother always told me that happiness was the key to life. When I went to school, they asked me what I wanted to be when I grew up. I wrote down ‘happy’. They told me I didn’t understand the assignment, and I told them they didn’t understand life.
내가 5살일 때 우리 엄마는 행복이 삶의 열쇠라고 늘 말하셨다. 내가 학교에 갔을 때 선생들은 내가 자라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행복"이라고 답했지만, 그들은 내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난 그들이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해줬다.
Peace is not something you wish for; It’s something you make, something you do, something you are, and something you give away.
평화는 당신이 원해야할 것이 아니라, 당신이 만들어야할 것, 해야할 것, 그 자체인 것 그리고 줘야할 것이다.
It matters not who you love, where you love, why you love, when you love or how you love, it matters only that you love.
당신이 누구를, 어디서, 언제, 어떻게 사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당신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Count your age by friends, not years. Count your life by smiles, not tears.
당신의 나이를 햇수가 아니라 당신의 친구로 세어라. 당신의 삶을 눈물이 아니라 웃음으로 세어라.
Love is a promise, love is a souvenir, once given never forgotten, never let it disappear.
사랑은 약속이자 기념품과도 같다. 한번 주어지면 결코 잊지 않으니, 결코 그것을 잃어버리지 마라.
We need to learn to love ourselves first, in all our glory and our imperfections. If we cannot love ourselves, we cannot fully open to our ability to love others or our potential to create. Evolution and all hopes for a better world rest in the fearlessness and open-hearted vision of people who embrace life.
우리는 모든 영광과 불완전성 속에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가장 먼저 배워야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나 창조의 잠재성을 결코 얻을 수 없다. 진화와 더 나은 세계를 위한 희망은 삶을 열린 태도로 받아들일것이냐, 혹은 닫힌채 내버려둘것인가에 달려있다.
The more I see, the less I know for sure.
당연하지만 더 많이 볼수록 더 모르는 것이 많아진다.
If everyone could just be happy with themselves and the choices people around them make, the world would instantly be a better place.
만약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과 주변 사람들의 선택에 대해 만족할 수 있다면, 세상은 즉시 더 나은 곳이 될 것이다.
There are no problems, only solutions.
세상에 문제라는 것은 없다. 해결책만이 있을 뿐이다.
How can I go forward when I don’t know which way I’m facing?
내가 직면한 상황을 모르고 있다면 어떻게 전진할 수 있겠는가?
Everything is as important as everything else.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소중하다.
당신이 필요한 모든 것은 사랑이에요
I believe in God, but not as one thing, not as an old man in the sky. I believe that what people call God is something in all of us. I believe that what Jesus and Mohammed and Buddha and all the rest said was right. It's just that the translations have gone wrong.
나는 신을 믿는다. 하늘 위에 떠있다는 노친네 말고. 나는 사람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속에 잠재되어있다고 믿는다. 난 예수 그리스도와 무함마드, 그리고 부처와 나머지 모든 신들이 모두 옳았다고 믿는다. 그냥 그들의 가르침이 곡해되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