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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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미국 상원 문장.svg 미국 연방 상원의원 (매사추세츠 주 클래스 2)
제96~98대
폴 송가스

제98~113대
존 케리


제113대
모 코언[1]







2004년 미국 대선 민주당 후보
미합중국 대통령 기후특사
존 포브스 케리
John Forbes Kerry
[1]


출생
1943년 12월 11일 (80세)
미국 콜로라도 주 오로라[2]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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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재임기간
제66대 매사추세츠 부지사
1983년 1월 6일 ~ 1985년 1월 2일
제68대 국무장관
2013년 2월 1일 ~ 2017년 1월 19일
초대 대통령 기후특사
2021년 1월 20일 ~ 현직
서명
파일:존 케리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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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리처드 존 케리
어머니 로즈메리 포브스
배우자
줄리아 토른 (이혼)
테레사 하인즈 (재혼)[1]
종교
가톨릭
학력
예일 대학교 (B.A.)
보스턴 칼리지 (법학 / J.D.)
신장
193cm
의원 선수
5 (상원)
의원 대수
98, 99,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상원)
소속

경력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참전용사 모임 회장 (1970~1971)
1972년 하원의원 선거 후보 (매사추세츠 제3구)
매사추세츠 부주지사 (1983~1985)
연방 상원의원 (매사추세츠 클래스 2 / 1985~2013)
상원 소기업 위원회 의장
상원 외교 위원회 의장
2004년 미국 대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제68대 국무장관 (2013~2017)
조 바이든 대통령 기후 특사 (2021~현직)
군사 경력
복무
미합중국 해군
1966년 ~ 1978년
최종 계급
대위
참전
베트남 전쟁
수훈
은성훈장
동성훈장
퍼플하트 (3회 수훈)


1. 개요
2. 일생
3. 논란 및 사건사고
3.1. 베트남전 참전 관련 논란
3.1.1. 반론: 정말로 존 케리는 과장된 전쟁 영웅이었나?
4. 선거 이력
5. 가족 관계
6. 여담



1. 개요[편집]


미국정치인.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민주당 후보였으며, 2021년 이후 조 바이든 행정부의 기후변화 특사를 맡고 있다.

정치 명문가에서 태어났고 일찍이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으로 유명해졌다. 민주당 내에서의 성향은 중도보다 약간 진보 성향으로,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당내 진보파에 속했으나 민주당이 좌경화된 현재로서는 주류적인 현대자유주의로 분류된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실세 인사 중 하나로 "기후 차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2. 일생[편집]


1943년 12월 11일 오전 8시 3분[3] 콜로라도 주 오로라에서 태어났다. 매사추세츠 주에 기반을 둔 부유한 집안 출신인데, 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 군복무 중이라 덴버에서 태어났다. 친가쪽은 가톨릭 집안이고, 외가쪽은 보스턴의 명문가인 보스턴 브라민으로 분류되는 포브스 집안으로 개신교 집안이었다. 존 케리는 친가 집안의 신앙을 따라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자랐다. 친가 집안은 아일랜드계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실은 그의 친조부모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출신의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성씨도 유대계 성씨 콘(Kohn)에서 아일랜드의 지명에서 따온 케리로 바꾸고 미국으로 이민와서 아일랜드계로 행세하며 보스턴 지역사회에서 부를 쌓았다. 존 케리는 이런 것도 모르고 자신이 아일랜드계인줄 알았는데, 이 사실이 그가 대선에 출마하기 전에야 언론에 의해 폭로되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존 케리가 잘못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4]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매사추세츠의 명문가 출신에 가톨릭 신자, 같은 민주당 당적, 미합중국 해군 위관급 장교 신분의 소형함 지휘관 참전용사, 거기에다가 JFK라는 이니셜까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비교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젊은 시절에 케네디 대통령과도 직접 알고 지내던 사이로, 케네디 대통령이 고향 매사추세츠로 여름 휴가를 보내러 왔을때 같이 요트를 타기도 했다. 케네디 대통령의 막내동생 에드워드 케네디 연방 상원의원과도 친분이 두텁다.

1966년 예일대를 졸업한 뒤 해군 예비역 수병으로 입대한 뒤, 같은 해에 다시 해군 OCS에 지원하여 항해소위가 되었으며, 리히급 순양함 DLG-21 USS 그리들리(Gridley) 함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 이후 함이 베트남전에 참전하며 같이 투입됐고, 이후 제1연안전대(Coastal Squadron 1)로 옮겨 고속경비정(Patrol Crafe Fast)인 PCF-44정과 PCF-94정에서 근무했다. 교전 중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음에도 불구, 각종 전투에 참가해 은성무공훈장 등 다수의 훈장을 받았다. 훈장 몇 개가 뭐 그리 중요하냐 하겠지만, 그의 추후 경력에 결정적 역할을 한 듯 하다. 전쟁영웅이면서도 반전을 웅변하는 대영웅의 이미지는 그를 성공과 부의 길로 이끌어 준 듯 하다. 재산만 몇 천억이라고 하니. 이후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이후 미 해군대위로 전역후, 반전주의운동에 뛰어들어, 1971년 미 의회 청문회에서 베트남전을 신랄하게 비판하여 유명세를 탔다. 이 청문회에서 토마스 페인이 책에 조국을 지키는 '섬머 솔져'라고 칭한 것에 빗대어 음지에서 일하는 군인을 윈터 솔저라고 말해 윈터 솔저란 말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전쟁 영웅이 반전 운동을 웅변하니 그야말로 인기가 폭발한 셈. 이 여세를 몰아 1972년 민주당에 입당해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 그 후 다시 학업에 뛰어들어 보스턴 칼리지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1983년부터 마이클 듀카키스 주지사 밑에서 부지사로 재직했다.[5]

1984년 매사추세츠 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1985년 1월, 부지사직을 사퇴하고 연방 상원의원에 취임했다. 이후 그는 2013년 국무장관에 임명될 때까지 상원의원직을 유지하게 된다.

케리는 이란-콘트라 사건 청문회를 주도하는 등, 각종 외교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하여 유명한 상원의원이 되었고, 차츰 잠재적인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마침내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6] 그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전쟁 정책을 비난했으나, 범생이 같으면서도 말을 바꾸거나 우유부단한 이미지가 강하게 남으면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 가장 큰 문제는 존 케리가 선거 승리를 위해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바꿨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존 케리는 교육 정책, 이라크 전쟁 등 여러 분야에서 자신의 상원 의원 시절 표결과 다른 입장을 내비치며 지나치게 입장을 많이 바꾼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를 Flip flop이라고 부르는데, 미국 정치계에서 "말 뒤집기" 정도의 뉘앙스로 사용되는 일상적인 말이었지만 조지 W. 부시 진영 측에서 존 케리를 비판하는 캠페인을 진행하며 절찬리에 사용하여 오늘날에는 존 케리를 상징하는 말 중 하나가 되었다.

  • 그의 개인사도 공화당 진영의 비난 대상에 올랐다. 젊을 때 결혼했던 아내와 이혼한 후, 하인즈 케첩으로 유명한 하인즈 가문의 후계자와 결혼했던 과부재혼한 것도 논란의 대상이었다. 더군다나, 그 하인즈 가문의 후계자는 생전에 케리와 함께 의정 생활을 하던 존 하인즈[7]였다. 아무튼 재혼한 아내가 전 남편의 재산을 상속받아, 케리 역시 하인즈 케첩과 굉장히 밀접한 사람으로 알려졌고, 일부 공화당 지지자들은 하인즈 케첩을 사먹으면 그 돈이 고스란히 케리의 정치자금으로 들어갈 것이라 주장하며 불매 운동을 했다. 친조부모가 원래 유대계였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으로도 네거티브 전략으로 활용됐다.

  • 덤으로 그 자신이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이혼을 하고, 동성결혼낙태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가톨릭계에서도 그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고, 심지어 대죄를 짓고 있는 그에 대해 영성체도 허락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사람도 많았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남부 출신 인사인 존 에드워즈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음에도, 보수적인 남부 주에서 지지율이 대폭락해 이전에 앨 고어가 승리하거나 접전으로 패한 아칸소,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 플로리다에서 모조리 참패했다.

한때 케리의 우세가 점쳐지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에다가 부시 진영의 네거티브 전략까지 먹혀들여 결국 부시 대통령의 재선이 확정되었다. 이로써 케네디 이후 두 번째로 가톨릭 신자인 미국 대통령이 탄생한다는 예측도 맞지 않게 됐다. 상당한 접전이었던 선거였는데, 특히 오하이오 주의 석패가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2% 정도의 표차로 부시가 앞섰는데, 여기서 만약 케리가 앞섰다면 케리가 당선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고 한다. 다만, 앨 고어와 달리 케리는 전국 득표에서 51%:48%로 부시에게 밀렸다. 캘리포니아, 오리건, 하와이, 워싱턴 주 등 서부 지역에서 55% 정도밖에 득표하지 못했고(4년 후 이 지역에서 버락 후세인 오바마의 득표율은 60%에 달했다.), 네바다, 콜로라도, 뉴멕시코, 플로리다, 버지니아, 아이오와, 오하이오 등 주요 격전지 에서 전부 패했다.

오늘날에는 직전 대선에 밀려 잊혀졌지만 당시에는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상당히 충격이 큰 선거였는데, 투표가 워낙 박빙이어서 다음날 아침까지도 승부가 결정나지 않았던데다 출구조사에선 케리가 앞서는 것으로 나왔으나 실제 투표결과 뒤바꼈기 때문. 그때문에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부정선거 음모론도 돌았으나 케리는 승복했다.

존 케리의 부통령 후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2등이었던 존 에드워즈였다. 존 에드워즈는 노동자 집안에서 변호사를 거쳐 노스캐롤라이나상원의원까지 자수성가한 인물이었고 2004년 대선때는 나름의 역할을 했지만 낙선하고 만다. 케리와 에드워즈 간 사이는 나쁘지 않았지만 2008년 대선 과정에서 에드워즈가 불륜 혐의가 터지면서 에드워즈는 정계에서 강퇴당하고 만다.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후로도 계속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며, 외교분야에서 활동했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고, 버락 오바마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8] 2008년에 다시 상원 선거에 당선되어 계속 상원의원 직을 유지하다 2012년 버락 오바마가 재선된 후 힐러리 클린턴의 후임 국무장관으로 지명되었다. 상원 인준을 받아, 2013년 2월 1일, 상원의원직을 내놓고 국무장관으로 취임했다.[9]

그의 친동생 캐머런 케리가 잠시 상무부 장관대행을 겸직하여, 친형제가 함께 미국 장관직을 맡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2014년 7월 가자지구 분쟁에서 여전히 이스라엘 편을 들고 있으나,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가 너무 심하다고 이스라엘도 좀 무력을 자중하라는 그동안 보이던 의견과 달리 약간 중립적인 의견도 보이고 있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그만 휴전하라고 제의까지 했지만 그 이스라엘이 2014년 7월 가자지구 분쟁 항목만 봐도 알겠지만 배째라를 시전 중. 현재 오바마 정권 내에서 미러관계에 한하여 러시아에 우호적인 거의 유일한 각료라고 할 수 있다.

2020년 미국 대선에서 대권 재도전을 고려했으나 결국 출마하지 않았다.

설령 출마해도 고령의 나이가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최고령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 보다 3살 연상인데, 그래도 트럼프는 첫 임기의 절반 가량을 채운 시점에서 72세이고 존 케리는 당선된다고 쳐도 첫 임기를 여는 시점에서 무려 만 77세(!!)다. 재선은커녕 첫 임기를 건강하게 마칠 수 있을지나 모르는 나이이다.[10] 하지만 만 77세의 조 바이든이 4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이 점은 무색해졌다.

국무장관직 사임 후 사실상 정계 은퇴 상태였으나 2020년 대선에서 승리한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이 케리를 기후 특사로 임명했다.# 상원, 국무장관까지 지낸 과거 대선 주자였던 케리를 기후 특사에 앉힘으로서 환경 문제 쪽에도 본격적으로 무게를 싣겠다는 메시지로 평가받는다.

1월 20일,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 공식적으로 대통령 기후특사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바이든 행정부, 시장, 또한 여타 지역 지도자들은 기후변화를 억제하는 것이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경제적 변화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미국민들에게 설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월 27일, 대한민국한정애 신임 환경부장관과 통화해 기후변화 협력방안을 논의했는데 미국 측의 요청으로 회담이 성사되었다는게 이례적이다.#

바이든 행정부 실세 중 한명으로, 바이든을 대신해 많은 외교 정책 실무를 담당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찰스 3세 대관식에도 바이든 대신 참석하였으며 국무장관을 지낸 경험으로 바이든이 맡기 어려운 잡무들을 많이 처리하고 있다.



3. 논란 및 사건사고[편집]



3.1. 베트남전 참전 관련 논란[편집]


존 케리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여러 공적을 세운 것은 맞으나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과정에서 존 케리가 정말로 여러 훈장을 싹쓸이하고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의 대표격 인물로 불릴만큼 많은 전공을 세웠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2004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도중, Swift Boat Veterans for Truth(SBVT)라 불리는 참전용사 조직이 결정되어 존 케리의 전공에 반론을 제기했다.

존 케리가 실제로 메달을 따기까지의 과정 SBVT의 주장에 따르면, 존 캐리는 1968년 11월 17일에 베트남에 도착하였다. 이후 고속정(swift boats) 에 자원하여 배속된 모양이다. 브라운 워터 네이비들은 돌아다니며 보통 민간인, 어부, 그리고 농부들을 괴롭히거나 종종 죽이곤 했다. 주로 농부들을 위협하여 항복시키는 이 작전에서 케리는 대단히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12월 2일, 케리는 수로 중 하나에서 자신의 첫 정찰업무를 맡는다. 자정쯤 승조원들이 삼판(베트남 전통 어선) 하나를 발견했다. 케리는 섬광탄을 터트린 후 팀원들에게 고속정의 기관총 2정과 M16 라이플로 사격을 명했다. 케리는 어부들이 "가젤처럼 도망갔다(running away like gazelles)"라고 묘사했다. 그 과정에서 아마 아군의 총알 파편에 의해 매우 작은 부상을 팔에 입었고, 이 긁힌 상처를 통해 명예전장훈장(퍼플하트)를 받는다. 그나마도 아군이 응사했다거나 심지어 케리가 전장에 있었다는 것 조차 증거가 없다는 의혹이 있다. 하지만, 미국의 훈장수여는 엄격한 절차하에 행해질 것이기에 어쨌거나 전장에서 다친 것 자체는 사실이라면 메달은 절차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 이 의혹은 케리 자신이 쓴 기록에서, 훈장이 수여된 9일 후인 1968년 12월 11일의 글에 그가 "우리는 아직 총을 맞지 않았기 때문에...(because we hadn’t been shot at yet...)" 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위키피디아따르면 1969년 2월 20일 보 더 강에서 두번째 퍼플하트 훈장을 추가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속정들은 지원 헬기와 함께 갈 예정이었으나, 올라가던중 헬기가 공격을 받고 재급유를 위해 귀환하여 몇 시간 동안 참전이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케리의 기록에 따르면 더 늦어지기 전에 지원없이 빠져나가기로 하였다. 배들이 Cua Lon 강에 접근하던중 케리의 고속정이 RPG탄에 맞고 파편이 케리의 왼쪽 다리에 박혔으며,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물론 부상중에도 의무는 계속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두번째 명예전장훈장 을 받는다.

그리고 겨우 8일 후인 28일에 무려 "은성훈장"을 받는다! 공식적 수여 기록에는 그가 이 작전에서 여러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성공적 작전을 수행하여 받았다고 기록한다. 하지만존 케리가 실제로 메달을 따기까지의 과정알렉산더 콕번의 글 번역에 따르면, "베트남에서 케리는 보기 드물게 호전적인 살인자였다. 그는 전투 현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미국 귀환 후의 정치적 출세를 위해 명예전상(戰傷)훈장을 받으려고 3개월 동안 미쳐 날뛰었다. 케리는 스스로 베트남 남쪽 끝에 있는 안 토이로 갔다...주간 임무에서는 코브라 헬기들이 보트들을 지원했다. 네이팜탄과 고엽제로 황폐해진 강둑과 앙상해진 숲을 향해 코브라 헬기들은 기총소사를 해댔다... 주민들이 통행금지 제재를 받지 않는 낮이었다. 케리의 고속정이가0 운하를 따라 올라가고 있었고 코브라 헬기가 그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삼판 한 척과 맞닥뜨렸고 그 배에는 여러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헬기가 삼판 바로 위에서 맴돌다가 이내 기관총을 발사하기 시작했고 탄환이 바닥날 때까지 사격을 계속해 배에 탄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배를 침몰시켰다. 케리가 자신의 일기장에 남긴 후회의 말은 죽은 사람을 애도한 것이 아니라 탄환을 모두 소모한 헬기 조종사의 어리석음을 개탄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조종사는 “재무장을 위해 탄환을 남겨두라는 요청을 받았는데도 탄환을 다 소모해 버려, 엄호가 필수적인 지역에서 우리가 45분 넘게 엄호를 받지 못한 채 작전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참전 이후에 우리가 생각하는 공적이 아닌 다른 규정상의 공적을 통해 은성 훈장을 비롯, 훈장들을 쓸어 담았다는 것이다. 존 케리는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참전용사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꾸준히 내세우며 이라크 전쟁 정국에서 부시에 비해 우위를 잡고자 했으나[11] 오히려 이런 과장된 전공 의혹이 드러나며 역풍을 맞았고, 이는 존 케리가 2004년 대선에서 낙선하는데 큰 영향을 줬다.


3.1.1. 반론: 정말로 존 케리는 과장된 전쟁 영웅이었나?[편집]


그러나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차차 해군민주당에서 조사가 이루어지며 SBVT의 주장 자체에도 과장이 심했다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선 문제가 된 것은 SBVT라는 조직 자체의 문제였다. 존 케리는 1980년대부터 공직 생활을 한 민주당의 대표적인 중진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SBVT는 뜬금 없이 2004년이 되어서야 조직되었다. 존 케리의 전공이 정말로 과장되었다면, 그가 베트남 전쟁 반대 인터뷰로 주목을 받은 1971년, 아무리 늦어야 그가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1986년에는 그런 주장이 나와야했다. 그런 이유로 조지 W. 부시와 존 케리가 경합을 펼치던 2004년 대선의 정국에 느닷 없이 등장한 SBVT라는 조직은 매우 정치적인 목적으로 등장했다는 의혹을 받았고 이중 상당수가 사실로 드러났다.

SBVT는 "공식적으로는" 초당적인 참전용사 조직임을 자처했지만 정작 세무조사 결과 SBVT의 개인 기부금 중 절반이 텍사스 주 공화당원에게서 나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를 총합하면 거의 2,000만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다. 그리고 텍사스는 조지 W. 부시의 홈스테이트이기도 했다. SBVT의 초기 컨설턴트 중 한명은 빌 클린턴 탄핵 당시 탄핵정국을 주도한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의 조언자였던 것으로 드러났으며, 더 나아가 2000년 대선에서 부시의 공화당 경선에서 라이벌이었던 존 매케인을 낙마시키는데 도움을 준 것까지 드러났다. SBVT에 관여한 또다른 인물은 전국 공화당 상원위원회의 정치 이사인 것으로 나타났고 심지어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을 지지한[12] 공화당 원로 인사까지 포함되어있었다.

SBVT의 조언자 뿐 아니라 조직 자체도 공화당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이 드러났다. 케리의 퍼플하트 훈장 의혹을 제기한 첫번째 퇴역 제독인 윌리엄 샤크(William Schachte)는 2000년, 2004년 모두 조지 W. 부시를 지지하고 후원금까지 보낸 초강성 공화당 지지자임이 밝혀졌다. 그의 회사 동료들은 공화당 전국위원회(RNC), 연방 정부 등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모두 조지 W. 부시 혹은 텍사스 지역 공화당과 밀접하게 연관된 인물이었다. 심지어 SBVT 본부의 우편 주소를 대조한 결과, 공화당의 전 의원이었던 딕 아미(Dick Armey)의 재무 담당자의 주소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것들이 사실로 드러나자 여론은 급격하게 조지 W. 부시 진영 측이 부당하게 존 케리를 음해했다라는 것으로 기울었고 조지 W. 부시는 시치미를 때며 관련 담당자들을 해임하거나 물러나게 했다. 하지만 2005년 1월, 조지 W. 부시의 재선 취임식을 전후해 젭 부시 플로리다 주지사가 SBVT에게 "귀하의 노고를 감사드립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사실이 드러나자, 존 케리는 격노했고, 연방 선거관위원회(FEC)에 부당 개입 혐의로 고발하기까지 했다. 결론은 조지 W. 부시와 SBVT를 연관지을 명확한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에 흐지부지되는 것으로 끝났지만, 조지 W. 부시의 백악관이 묵비권을 행사하며 중요한 증거들을 대부분 넘기지 않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에 가까웠다. 결국 조지 W. 부시의 지지율만 떨어졌다.

더구나, 조사가 진행되며 SBVT의 주장보다는 케리의 주장이 더 이치에 맞는다는 공식적인 조사 결과가 속속 나왔다.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SBVT를 비롯한 의혹 제기파가 자신의 일방적인 주장을 뒷받침할 명백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오히려 자료 조사를 할수록 케리의 주장이 사실인 것으로 나타났다. 케리와 함께 고속정에서 근무한 여러 참전용사들이 존 케리의 영웅적인 행적들을 증언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베트남 현지 주민의 증언이 존 케리의 주장과 들어맞았다. SBVT가 주장한, 존 케리의 과장된 전과를 입증할 "존재하지 않았던 전투"가 베트남 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일어났었고 존 케리가 거기에서 활동했던 것까지 확인된 것이다.

결국 SBVT는 오로지 정치적인 이익만을 위해 공화당과 조지 W. 부시 진영 측에서 허위적으로 만들어낸 조직임이 드러났고, 현재는 존 케리의 전과가 일정부분은 과장되었다고 볼 수는 있겠으나[13] 근본적으로 전쟁영웅이 아닌 것은 아니다인 것으로 기울었다. 2006년, 해군마저 존 케리의 훈장 수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공식적으로 입증하며 SBVT와 조지 부시는 망신만을 샀다. 반대로 Swift boat는 정치적 이익을 위해 상대방의 전과를 공격하는 행위라는 대명사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한다.

이렇게만 쓰면 존 케리가 좀 억울할 수도 있지만, 사실 존 케리도 완전히 억울한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문제가 된 것은 존 케리가 자신의 안보 정책에서 무엇을 하겠다라는 명확한 메시지 없이, 시종일관 "내가 퍼플하트 3개를 받았다"라는 사실만 강조했던 것이다. 즉 전과가 과장된 것은 아니지만 존 케리는 선거운동 중 이를 너무 과장해 말했고 이것 때문에 존 케리에 대한 반감이 조성되어 SBVT의 주장이 더 먹혀들어간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전반적으로 선거운동을 잘 짠 조지 부시에 비해 존 케리가 퍼플하트와 같은 것에만 집착하며 선거를 망쳤다는 점은 민주당 지지자들도 순순히 인정하는 바이다.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72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매사추세츠 5구


92,847 (44.72%)
낙선 (2위)

1982
미국 부지사 선거[14]
매사추세츠
1,219,109 (59.48%)
당선 (1위)
초선[15]
1984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1,393,150 (55.05%)
초선
1990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1,321,712 (54.51%)
재선
1996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1,334,345 (52.21%)
3선
2002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1,605,976 (72.33%)
4선
2004
미국 대통령 선거
미합중국
59,028,444 (48.27%, 251명)
낙선 (2위)

2008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매사추세츠
1,971,974 (65.84%)
당선 (1위)
5선[16]


5. 가족 관계[편집]


  • 프레데릭 A. 케리 (조부)
    • 에릭 케리 (백부)
    • 밀드레드 케리 (고모)
    • 리처드 존 케리 (父)
      • 마가렛 케리 (누나)
      • 다이애나 케리 (여동생)
      • 카메론 포브스 케리 (남동생)
  • 로즈마리 이사벨 포브스 (母)
  • 아이다 로우 (조모)

  • 줄리아 스팀슨 토른 (전처)
    • 알렉산드라 포브스 케리 (장녀)
    • 바네사 브래드포드 케리 (차녀)
  • 브라이언 발라 나헤드 (차사위)
    • 알렉산더 케리 나헤드 (외손자)
    • 리비아 포브스 케리 나헤드 (외손녀)
  • 테레사 하인즈 (2처)
  • 헨리 존 하인즈 4세
  • 앙드레 하인즈
  • 크리스토퍼 드레이크 하인즈


6. 여담[편집]



  • 신장이 193cm로 매우 크다. 만약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역대 최장신 자리 공동 1위를 차지했을 것이다.[17]

  • 2011년 MSN 닷컴 선정 미국의 전쟁영웅 16인에 선정되었다.
2011년 MSN 닷컴 선정 미국의 전쟁 영웅 16인
1
조지 워싱턴 (1732 ~ 1799)
2
너새니얼 그린 (1742 ~ 1786)
3
율리시스 S. 그랜트 (1822 ~ 1885)
4
로버트 E. 리 (1807 ~ 1870)
5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1890 ~ 1969)
6
조지 S. 패튼 (1885 ~ 1945)
7
필립 커니 (1815 ~ 1862)
8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1839 ~ 1876)
9
피에르 G.T. 부리고드 (1818 ~ 1893)
10
더글러스 맥아더 (1880 ~ 1964 )
11
어디 머피 (1925 ~ 1971)
12
윌리엄 딘 (1899 ~ 1981)
13
김영옥 (1919 ~ 2005)
14
존 매케인 (1936 ~ 2018)
15
존 케리 (1943~)
16
노먼 슈워츠코프 (1934 ~ 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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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 F. 케네디(JFK)와 이니셜을 맞추려고 대선 직전에 미들네임을 개명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Forbes가 원래 미들네임 맞다고 한다. 미들네임은 외가의 성씨에서 따온 것.[2] 덴버의 교외에 있는 도시이며 덴버와 매우 가까워서 흔히 덴버 출신이라고 하기도 한다. 성남시와 자매 결연을 체결한 사실도 있어서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있는 편이다. [3] 한국 시간으로 1943년 12월 12일 오전 0시 3분.[4] 존 케리의 부친부터 태어나서 가톨릭 세례를 받았고, 유소년기때에는 가톨릭 사제가 미사를 집전할 때에는 로마 가톨릭성공회에서 사제의 전례를 집전함을 돕는 평신도복사로써 성당에서 일할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살았으니 몰랐을만 하다.[5] 듀카키스는 1988년 대선에 출마하여 아버지 부시에게 패한다. 본인이 모신 주지사는 아빠 부시한테 낙선하고 본인은 아들 부시한테 당하고[6] 여담으로 이 때 당선되면 조 바이든을 국무장관에 지명하겠다고 약속했었다고 한다.[7] 공화당 소속, 펜실베이니아 연방 상원의원이었다. 1991년 헬리콥터 사고로 사망하였으며 존 케리는 존 하인즈의 미망인인 테레사 하인즈와 1995년 재혼하였다.[8] 사실 케리는 오바마가 중앙 정계 화려하게 데뷔하고 결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는데 주춧돌을 놓아주었다. 케리가 2004년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최종 지명된 후 본인의 지지 기조 연설자로 그를 지명하였고 이 때 오바마는 대단한 연설문 실력과 웅변으로 중앙 정계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이는 오바마가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 초선 의원으로서 워싱턴 중앙 정치로의 정식 데뷔 및 2008년 대선에서 승리하는데 기반이 된다.[9] 어떻게 보면 자신을 대통령까지 이끌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사실 대통령 첫 당선 때에도 국무장관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오바마가 힐러리를 장관으로 발탁하면서 그는 상원 외교위원장으로 선회한다. 전임자는 바이든 당시 부통령 당선인.[10] 정치를 포기하고 무병장수에 집중한다면 100살 넘게 건강히 살아도 이상하지 않지만 미국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막중한 스트레스와 격무에 시달리는 자리 중 하나이다.[11] 조지 W. 부시는 아버지와 달리 형편 없는 군 경력으로 이미지가 나빴다. 사실 부시 행정부에서 제대로 된 군 경력을 밟은 사람은 콜린 파월 등 극소수이며 전쟁광으로 유명한 딕 체니 같은 많은 네오콘 정치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군대 문턱도 안밟은 사람들이었다(...).[12] 악명 높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진 대선이자, 존 케리가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폭로한 시기와 맞물린 대선이기도 하다.[13] 애초에 "전쟁 영웅"치고 과장된 전과가 없는 사람은 없다는 점을 기억하자. 명백한 전쟁 영웅인 조지 S. 패튼이나 더글러스 맥아더도 "신화"라는 말이 나오지만 그들이 전쟁 영웅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14] 주지사는 마이클 두카키스[15] 연방상원의원 선거 당선 후 부지사직 사퇴[16] 국무장관 임명으로 상원의원직 사퇴[17] 또 한 명은 에이브러햄 링컨(193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