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베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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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RAI 2에서 이탈리아인들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이탈리아인’ 명단이다. 고대 로마 제국 시기의 인물들이 완전히 배제되고 투표율도 6%에 불과했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레오나르도 다 빈치
주세페 베르디
지오반니 팔코네
갈릴레오 갈릴레이
토토
6위
7위
8위
9위
10위
라우라 파우지니
안나 마냐니
루이지 피란델로
엔리코 페르미
단테 알리기에리
11위부터는 영문 위키 참고.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주세페 베르디
Giuseppe Verdi


파일:Giuseppi_Verdi_by_Ferdinand_Mulnier_c1870.jpg

본명
주세페 포르투니노 프란체스코 베르디
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출생
1813년 10월 10일
프랑스 제국 파르마현
(現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주 파르마시)
사망
1901년 1월 27일 (향년 87세)
이탈리아 왕국 롬바르디아 주 밀라노
국적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display: none; display: 이탈리아 왕국"
행정구
]]

직업
작곡가
사조
후기 낭만주의
부모
아버지 카를로 주세페 베르디
어머니 루이지아 우티니
배우자
마르게리타 바레치 (1836년 ~ 1840년, 사별)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1859년 ~ 1897년, 사별)
자녀
비르지니아 마리아 루이지아 베르디
이치리오 로마노 베르디
종교
가톨릭(냉담자)
서명
파일:Giuseppe_Verdi_signature.svg

1. 개요
2. 생애
3. 주요 작품들
3.1. 오페라
3.2. 그 외의 작품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27.media.tumblr.com/tumblr_la3um7qfmv1qzdxojo1_400.jpg
파일:external/www.paulfrasercollectibles.com/PT104-Giuseppe-Verdi_410.jpg
파일:/img/img_link7/457/456317_1.jpg
청년 시절
장년
노년

이탈리아 왕국의 오페라 작곡가. 이탈리아를 넘어 세계 오페라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오페라의 거인이라고 불린다. 한때는 오페라의 아버지라는 말도 있었으나, 이 별칭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1]

베르디는 낭만주의 시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작곡가 계보를 형성하는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즉 이탈리아 낭만파 오페라의 효시인 조아키노 로시니를 시작으로 가에타노 도니제티빈첸초 벨리니의 뒤를 잇는 작곡가가 바로 베르디이며 후배인 자코모 푸치니가 이 베르디의 위상을 이어받는다.


2. 생애[편집]


북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론콜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버지 카를로 주세페는 식료품 가게 겸 여인숙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출생 시 증명서에는 그의 이름이 프랑스어로 조제프 포르튀냉 프랑수아 베르디로 기록되어 있다. 1814년에 러시아 제국군오스트리아 제국군의 침입을 받았고, 론콜레는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유명한 요제프 라데츠키 장군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유린되었다. 어린 베르디는 어머니에게 안겨 마을 중앙에 있는 성 미카엘 교회의 종루 밀실로 피해서 재난을 면했다.

그 당시 아버지의 가게를 찾아오는 떠돌이 음악사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베르디를 음악의 길로 나아가도록 말했다고 한다. 이윽고 마을 교회에서 오르간을 배우고, 8세에 오르간을 선물받았으며 10세 때 노령의 오르가니스트의 뒤를 잇고 교회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덧붙이자면 베르디가 처음 쓴 그 오르간은 현재 이탈리아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파일:external/farm5.static.flickr.com/5010613689_4e46ed0468.jpg
이 오르간이다. 스칼라좌 속에 있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파일:external/www.mazzate.com/antonio-barezzi.jpg
안토니오 바레치
1823년, 아버지의 친구로서 가까운 부세토 시의 유복한 술집 주인인 안토니오 바레치(Antonio Barezzi 1787년 12월 23일~1867년 7월 21일)의 도움을 받고 시의 초등 중학교로 진학하게 되는데, 바레치 또한 열렬한 음악 애호가로서 주세페의 음악적 재능을 사랑하여 시의 지도적인 음악가 프로베시를 찾아가 작곡을 배우게 했고 프로베시 역시 음악학교의 강의를 청강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줬다.

1831년, 오르간 주자 바레치는 베르디를 자택에 입주케 하고 피아노를 가르쳤다. 더 훌륭한 음악 선생을 만나게 해 주기 위해 음악의 도시 밀라노로 보내 그곳 음악원에 입학을 시키려고 하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실력과는 상관없이 입학을 거절당한다.[2] 그러나 그는 3년간 밀라노에 머물며 최고의 극장 일원이던 라비냐 선생을 만나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음악적으로 성숙해진 베르디는 21세에 다시 고향 부세토로 돌아와 그곳에서 음악감독 직을 맡게 되었다. 또한 바레치의 딸 마르케리타와 두 사람이 연탄을 행하고 있는 동안에 미모로 유명한 마르게리타와의 사랑이 싹텄고, 부세토의 음악 감독에 취임한 1836년 5월 그녀와 결혼했다. 그 당시 둘의 나이는 23세로 동갑이었다.

1836년에 장녀 비르지니아와 장남 이치리오가 태어났지만 불행하게도 장남이 태어난지 1개월 후 장녀 비르지니아가 병에 의해서 생후 17개월 만에 죽게 되고, 베르디는 슬픔을 잊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게 된다.

1839년 2월 마르게리타와 어린 이치리오를 데리고 밀라노로 출발했다. 그 무렵 그는 최초의 오페라 '로체스텔'을 작곡하고 밀라노에서 상연하고 싶었으나 좀처럼 실현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유실되어서 오베르토를 최초의 오페라로 간주하고 있다.

당시의 스칼라 극장의 소유자 ‘메렐리’와 서로 알게 되어, 그로부터 직접 의뢰도 받고 다음의 오페라 작곡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아들 이치리오가 1839년 10월 22일 병에 걸려 죽자 슬픔을 달래기 위해 신작 오페라 오베르토 초연에 더욱 힘쓰게 되고 그 결과 대성공하게 되어 14회나 반복 상연되고 스카라 극장이나 빈의 오페라 극장과 계약하게 되었다.

파일:/img/img_link7/814/813261_2.jpg
베르디의 첫 번째 아내 마르게리타 베리치(Margherita Barezzi)
(1814년 5월 14일~1840년 6월 19일)
그러나 이듬해 봄 이탈리아는 음울한 날씨가 계속되었고, 5월 말에는 아내 마르게리타가 수막염으로 쓰러져 6월 19일에 겨우 27세로 사망했다. 그렇게 베르디는 결혼 4년 만에 아내와 아이를 모두 잃었다.

매우 낙담한 베르디는 밀라노를 떠나 부세토에 틀어박혔다. 당시 작곡하고 있었던 것은 '가짜 스타니슬라오(또는 하루만의 임금님)'로 1840년 9월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나, 첫날의 실패 때문에 하루 만에 중지되고 만다. 그는 더 이상 오페라를 쓰지 않으려고 했고 자살까지 결의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도 햇볕이 들 날이 왔으니, 메렐리와 가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Giuseppina Strepponi, 1815년 9월 8일~1897년 11월 14일)의 도움과 조언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동거하다가 1859년 8월 말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스트레포니를 처음 알게된 게 후술하는 1842년 나부코 때였으니 17년만이다.

1842년 3월 스칼라 극장에서 오페라 '나부코'를 공연했는데 그 내용이 애국적이어서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압제하에 있던 이탈리아인들에게 크게 어필해 성공을 거두고 그는 자신을 가리고 있던 어두운 그늘을 말끔히 거둬 내고 오페라의 샛별로 자리하게 된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당시의 이탈리아의 정치 정세에 영향을 받고 있는 면이 많았는데, 특히 그 당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압정에 반발하여 통일운동이 전개되었고 베르디는 이러한 애국적 풍조에 자극되었다. 나부코의 성공으로 스칼라 극장과 매시즌 신곡 하나씩을 작곡해주기로 계약한 베르디는 다음의 신곡으로 '제1회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을 채택했다.

그는 연이어 '이 롬바르디', '에르나니'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들은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탄압에 대하여 이탈리아인의 저항 의식을 고취시킨 애국적인 작품들로서 지금까지의 어떤 작품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851년(38세)에 초연된 '리골레토'[3]프랑스 국왕의 배덕 행위를 다룬 내용을 오스트리아 관헌이 문제삼아 개정 끝에 완성되었는데, 특히 공작이 부르는 '여자의 마음'은 곧 항간에 퍼지고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다만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꼽히는 '라 트라비아타'[4]의 초연(1853년)은 완전히 실패했는데, 비올레타를 맡은 도나텔리라는 가수가 너무 뚱뚱해서 폐병을 앓다가 병약한 몸으로 가련하게 죽어가는 비올레타 역에 맞지 않았다는 등 여러가지로 부족했다.

그 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의 암살 사건을 주제로 한 '가면 무도회'도 그 내용이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고 역할을 변경해서 예정보다 1년 늦은 1859년에 로마에서 초연되었는데, 이 무렵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민중의 지지를 얻어 커다란 세력이 되고 있었다. 통일파 사이에서는 'Viva VERDI(베르디 만세)'라는 말이 널리 쓰였는데, 이는 위대한 작곡가 베르디를 찬양함과 동시에 Viva Vittorio Emanuele, Re D'Italia, 즉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만세'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베르디도 통일 운동에 가세하게 된다.

이듬해에는 최초 이탈리아 국회의 의원으로 추천되어 정계에 진출해 5년 동안 정치인 생활을 하였다. 이 때 이탈리아 3대 극장인 밀라노, 로마, 나폴리의 가극장에 재정적인 원조를 주어 오페라 진흥을 꾀했다. 창작 활동도 여전히 전개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 제실 오페라극장의 의뢰로 '운명의 힘'(1862)과 파리에서 초연된 '돈 카를로'(1867)가 작곡되어 간다. 다만 이때부터는 이전의 애국적인 모습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비극적인 심리주의가 멋진 효과를 거두었다.

1869년 수에즈 운하 개통을 기념하여 카이로에 대 오페라극장이 세워지고, 이집트 술탄 이브라힘 파샤[5]는 낙성식의 오페라를 베르디에게 위촉했다. 창작을 중단하고 농사를 짓던 그는 이 의뢰를 두 번이나 사절했지만 결국은 10만 프랑의 사례금을 받고 작곡한다. 다른 주장으로는 이집트 총독이 베르디에게 "영 싫다면 바그너에게 의뢰하면 되겠네."라는 말을 하여 바그너를 라이벌로 여기던 베르디가 받아들이게 했다는 것도 있다.

오페라 '아이다'는 이렇게 해서 완성되었는데, 때마침 일어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문에 의상과 배경의 선적이 늦어져 낙성식에는 공연되지 못했고, 2년이 지난 1871년 12월 24일에야 상연되고 2년 후인 1873년에는 문호 만초니(Manzoni)의 죽음을 애도하는 「레퀴엠」이 완성되고 곧 스칼라 극장에서 상연된 바 있다. 레퀴엠 중 '진노의 날'(Messa da Requiem 'Dies irae')은 베르디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웅장하고 압도적인 포스가 넘쳐 대중매체에서 bgm으로 자주 쓰인다.

1879년에는 신진 대본 작가 보이토(A. Boito)와 친하게 교제하고 셰익스피어의 '오텔로'를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신중하게 써 내려간 신작 오페라 '오텔로'는 7년이 지난 1886년에 겨우 완성, 이듬해 1887년 2월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청중은 늙은 베르디가 '아이다' 이상의 걸작을 새로 낳고, 마침내 독자의 세계를 쌓아올린 사실에 경탄했다. 풍부한 선율이 소용돌이 치는 관현악은 압도적인 박력을 발휘했고, 공연 후 흥분한 청중은 호텔 발코니에 베르디를 불러내고는 환성을 질렀다고 한다. 이 때 그의 나이는 73세였다.

보이토와의 친교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고 셰익스피어의 원작에 바탕을 둔 신작 오페라 '팔스타프'[6]의 계획이 두 사람 간에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 작품이 1893년에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때, 청중은 또다시 경탄하고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팔스타프'는 곧 이듬해에 파리의 오페라 코뮈크 극장에서 상연되었는데, 이 때가 베르디의 마지막 파리행이 되었다.

베르디의 아내 주세피나가 1897년 11월 14일에 폐렴으로 사망해 그는 완전히 고독해졌다. 아내의 사망 전부터 베르디의 건강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으나, 그는 1898년에 '코러스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4개의 종교곡 (성가4편)'을 완성시켰다.

1901년 1월 21일 밀라노의 한 호텔에서 하인이 의식을 잃고 침대에 쓰러져 있는 베르디를 발견했다. 그리고 1901년 1월 27일[7] 오전 2시 50분에 87살을 일기로 사망했다. 그 시대 당대 유명 음악가 중에서는 가장 장수한 셈이며, 오늘날에도 유명한 클래식 작곡가들 중에서 베르디보다 장수한 사람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장 시벨리우스 정도밖에 없다.[8] 그러나 스트라빈스키와 시벨리우스는 인생의 과반을 20세기에 산 반면, 베르디는 의학이 덜 발전하던 19세기에 거의 모든 삶을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9] 87살이란 나이는 엄청난 장수이다.[10]

그와 많이 견주는 인물은 바이에른 왕국독일 제국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같은 해에 태어났고 둘다 오페라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정치적인 행동에 적극적인 것도 같았으나 오페라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일단 바그너는 독일의 민족적 신화와 전설적인 내용 등 초현실적인 내용을 다루었지만 베르디는 주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었다. 성격에서도 바그너는 독선적이고 카리스마를 갖춘 반면, 베르디는 검소하고 소박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는 60년 동안 작곡가로 활동했으며, 만년에는 사재를 털어 '음악가를 위한 휴식의 집', 일명 카사 베르디밀라노에 세웠다. 자신과는 달리 재능과 운이 따라주지 못한 음악가들이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양로원으로 설립한 카사 베르디에 대해 베르디는 '이곳이야말로 내가 만든 최고의 작품'이라며 상찬했고 세상을 떠난 후 이곳에서 아내와 함께 영면에 들었다. 베르디의 유지에 따라 지금도 이곳은 이탈리아 국적을 가진 고령의 음악가라면 누구든지 입주할 자격을 가진다.


3. 주요 작품들[편집]



3.1. 오페라[편집]



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아이다 중 개선 행진곡


일 트로바토레 중 대장간의 합창


리골레토

이 중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 아이다, 오텔로가 이른바 5대 작품으로 가장 사랑 받고 있으며, 다소 엉성한 대본에도 불구 웅장한 음악으로 사랑 받는 가면 무도회, 운명의 힘, 돈 카를로스도 자주 공연되고, 그 밖에 나부코, 에르나니, 멕베스, 시몬 보카네라, 시칠리아 섬의 만종, 팔스타프 등도 심심치 않게 공연된다. 대부분 오페라 작곡가들이 많아야 서너 곡의 대표작으로 기억되는 것을 생각하면, 오페라계에서 베르디에 비견할 만한 작곡가는 사실상 모차르트, 바그너, 푸치니 정도 밖에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실제로 세계 여느 오페라 하우스의 어느 시즌이든 베르디 작품이 하나 정도 포함 안 된 경우를 보기란 드물다. 이래저래 이탈리아 오페라의 신적 존재.


3.2. 그 외의 작품[편집]



레퀴엠 중 진노의 날
  • 현악 4중주 E단조
  • 레퀴엠(베르디): 가톨릭의 죽은 이들을 위한 미사인 레퀴엠 미사의 통상문을 텍스트로 하여 쓰여진 곡이다. 이 작품 중 <진노의 날(dies iræ>이 특히 유명하다.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도 절망적인 상황에 많이 쓰인다.
  • 4개의 성가
  • 교향곡 C장조
  • 관현악 반주에 의한 바순의 카프리치오
  • 기타 종교곡, 관현악곡, 가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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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르디의 위상과는 별개로 오페라는 이미 베르디가 태어나기 200년 전에 시작되었고, 베르디 이전의 이탈리아에도 조아키노 안토니오 로시니, 가에타노 도니체티, 빈첸초 벨리니 등 재능 있는 오페라 작곡가들이 많았기 때문. 때문에 굳이 '오페라의 아버지'라는 명칭을 사용한다면 오페라를 확실한 극음악 장르로 확립한 몬테베르디가 가장 잘 어울린다. 또한 베르디와 동시대에 활약한 오페라 작곡가 중에는 음악사적인 측면에서 베르디를 능가하는 위상을 지닌 리하르트 바그너가 있다.[2] 재미있는게 베르디가 사망한 후 이 음악원은 그의 이름을 따서 '주세페 베르디 음악원'이 되었다.[3] 원래 제목은 '저주'였다.[4] 이탈리아어로 '길을 잃은 여자'라는 뜻인데 당시의 엄한 검열을 두려워하여 이 이름으로 했다고 한다.[5] 메흐메드 알리의 아들.[6] 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이자, "임금님의 하루"의 흥행 실패 이후 53년 만에 작곡한 희극 오페라이다.[7] 공교롭게도 이 날은 모차르트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8] 클래식 음악계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인물까지 따지면 103세에 사망한 작곡가 엘리엇 카터가 이 분야의 끝판왕이 될 것이다.[9] 20세기는 1달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를 역으로 보자면, 나폴레옹 1세의 전성기에 태어난 사람이 20세기를 1달 가까이 겪었다는 말이 된다.[10] 안그래도 요즘보다 그 당대의 평균수명은 꽤나 짧았으니, 50대에 죽은 베토벤차이콥스키나, 60대에 죽은 바흐비발디 아니면 70대에 죽은 헨델 등도 비교적 장수한 편인데, 베르디 정도면 엄청 장수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