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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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직 군인. 13대 공군참모총장, 22대 국방부 장관, 42대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2. 생애[편집]
1927년 9월 30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現 함안군 칠원읍) 무기리에서 아버지 주판회(周判會, 1892. 2. 22 ~ 1934. 10. 1)[4] 와 어머니 안동 김씨(1892. 8. 18 ~ ?)[5] 사이에서 5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45년 일본 육군항공학교를 수료하고 1949년 공군사관후보생 소위 임관, 1950년에는 공군사관학교 소집 2기로 해 중위로 재임관했다. 1959년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뒤, 1963년 국방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50년 8월부터 1953년 7월 휴전 때까지 F-51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해, 총 77회의 출격 기록을 세웠다. 1960년대 한국 영화의 최고 히트작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 및 배경의 실존 인물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1974년에는 옥만호에 이어 공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어 1979년 4월까지 4년 7개월 동안 최장수 공군참모총장을 지냈다. 같은 해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후임자는 첫 공군사관학교 출신 공군참모총장인 윤자중이었다.[6]
12.12 군사반란 이후 노재현의 뒤를 이어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었다.[7]
하나회 반란군들이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으려는 해군과 공군의 불만을 수습하고, 대외적으로 비 하나회 출신 인사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민심을 가라앉히며, 또한 하나회 출신[8] 에서 장관을 선임할 경우 이에 따라 발생할 내분을 막으려는 이유로 선택한 것이었다. 비하나회 육군 대장은 자신들이 통제하기 어렵고, 장관 권한과 윗 기수의 권위로 하나회를 되려 역공할 수 있으니 아예 논외로 할 수 밖에 없다.
1980년 5.17 내란 때 중앙청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계엄령 확대를 주장하였다. 이후 1982년까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을 지냈다. 그러다가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으로 인한 민심수습책으로 물러났다. 한국반공연맹(현 한국자유총연맹) 이사장(1983), 내무부(현 행정자치부)장관(1983~1985),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1985~1989) 등을 지냈다.
국방부 장관 시절 광주학살을 벌인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을 결정한 장본인으로서, 김영삼 정부 때 12.12 군사반란 및 5.18 민주화운동 관련 재판에서 내란-반란 중요임무 종사 등의 혐의로 7년형을 선고받았다.
2005년 3월 14일에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사망했으며 사망 후 유해는 서울 도봉구의 한 암자에 봉안되었다.
2.1. 제공호(KF-5E/F) 도입에 대한 비판[편집]
박정희 정부 당시 1974년 8월에 개량형인 F-5E/F 146대를 직도입(구입) 계약하여 주영복 공군참모총장 취임 이후 1975년에 F-5E/F 110대 F-5A/B 22대를 일시에 발주하였다. 물론 당시에 F-5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F-16으로 전환하여 F-5가 순차적으로 퇴역하고 있었지만 양적으로도 국군의 전력을 증대하는 상황이 필요했기 때문에 F-5E/F를 1974년에 직도입을 계약하였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의 국군 전력 증강 사업으로 1974년부터 시작한 율곡사업으로 추진 계획으로는 원래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초반부터 운용할 계획으로 F-16A/B의 면허생산이 추진되고 있었으며, 당시 제너럴 다이나믹스의 해외진출 영업전략과 맞아 떨어지면서 F-16A/B의 면허생산이 매우 구체적으로 추진되고 있었고 제너럴 다이나믹스에서 미국내 로비를 진행하며 한국에 F-16 조립공장의 설립을 적극 추진하였다. 같은 시기 미국의 보우트 사에서는 A-7 공격기의 생산라인을 한국에 판매하고 항공기 생산기술을 모두 이전하겠다는 제안도 받았다. 그러나 박정희가 암살 당한 10.26 사건, 이후 곧이어 발생한 12.12 군사반란이후 모든 계획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1979년 12월 14일 F-5 전투기를 사랑한 주영복장군이 국방장관에 취임하면서 F-16A/B 면허생산 계획이 F-5(노스럼) 면허생산(녹다운방식)으로 급변하게 되어 1982년부터 1986년까지는 대한항공의 조립생산 모델인 KF-5E/F 제공호 68대를 도입하게 되었다. 결국 이 결정은 대한민국 항공산업 발전의 기틀이 박살내 버렸고 공군 전력 강화에도 악영향을 주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F-5는 F-16에 의해 전세계적으로 도태되는 기종이였고 국내외 도입 수요가 없는 기종이였다. 주변국을 살펴보면 대만은 F-5의 국내생산을 중단하고 있었고, 일본은 F-4EJ, F-15를 이미 면허생산하고 있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1981년 12월 피스 브릿지 사업이 진행되어 F-16A/B보다는 상위 기종인 F-16C/D 블록 32 40기를 1986년부터 직도입하게 되었고 1990년대 KFP 사업으로 F-16C/D 블록 52가 선정되어 초기에는 직도입, 이후 면허생산을 진행하게 되어 항공 산업의 발전이 늦게 되어 대한민국 공군의 전투기 전력이 부족해져 2020년대 현재도 노후화 된 F-5E/F 계열을 운용하게 되었고 노후화로 인해 잦은 기체 추락이 발생하게 되어 안타까운 파일럿의 희생이 이어지는 중이다.
정말 말도 안되는 석양이 지고 있는 F-5 시리즈를 도입하면서 공군의 전력증강이 10년 후퇴란 결과가 일어났다.
3. 둘러보기[편집]
4. 관련 문서[편집]
[1] # 상주 주씨 집성촌이다.[2] #.[3] 참판공파(參判公派) 19세 영(永) 항렬.[4] 자는 현윤(賢允).[5] 김상동(金相東)의 딸이다.[6] 아마 주영복 장관 시절에는 학사는 받지 않고 단기 교육만 받고 수료했을 가능성이 높다. 육사도 10기까지는 단기 교육만 받고 수료했으며 4년제가 된것은 11기부터이다.[7]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중에서 공군 출신으로는 두 번째다.[8] 하나회 출신을 앉히는 건 어려웠던 것이 하나회에서 가장 높은 11기 윗 기수 장성들이 군 내에 아직 여러명 남아 있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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