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 영국 대사관 점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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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의 전개 순서
7.20 사건

주중 영국 대사관 점령 사건

상산하향 운동
정권회수 운동 발생

5.16 조직 숙청

홍위병의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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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습격후공관1.jpg
습격 이후 촬영된 영국 대사관의 모습. 곳곳에 그을음이 있다.


대한뉴스에서도 보도된 적 있다.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베이징의 상황
3.3. 대사관 습격
3.4. 저우언라이의 분노
4. 결과
5. 평가
6. 여담
7. 참고문헌
8. 문화대혁명 중의 사건



1. 개요[편집]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67년 8월 22일 밤, 홍위병들이 베이징영국 대사관을 점령하고 22명의 외교관들과 영국 대사관 직원들을 포로로 잡아 구타하고 조리돌린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중국의 외교적 위상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중국 공산당도 이를 인정하고 혁명외교를 포기하게 된다. 또한 중국 내부 조반파의 입지도 극심한 손상을 입어 5.16 조직이라 불리던 관펑, 왕리, 치번위 등 문혁소조의 급진파들이 숙청되고 린뱌오를 중심으로 하는 군부가 득세하면서 문혁의 광기가 수그러들게 된다.

2. 배경[편집]


1967년 상하이 1월 폭풍 사건 이후 중국 전역에는 탈권 현상이 몰아닥쳐 홍위병들이 지역당부와 군 부대까지 습격하여 당과 군의 간부들을 비판하고 조리돌리는 대혼란이 몰아닥쳤다. 펑더화이, 허룽을 비롯한 원수들까지 조리돌림을 당하는 처지가 되자 문혁의 광기를 경계하게 된 군 원로들은 마오쩌둥에게 상신하여 군대가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게 해달라는 <8항 명령>에 재가를 받아 전국 각지에서 홍위병들을 대대적으로 진압하였다.[1] 그리고 마오쩌둥이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천보다, 장칭을 비롯한 문혁소조원들이 제멋대로 코뮌을 수립한 일에 대해 크게 질책하자 이를 틈타 2월 역류라 불리는 정치적인 공격을 문혁소조에 퍼부었으나 마오쩌둥이 문혁소조의 편을 드는 바람에 원로들은 몰락하고 문혁소조가 중국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여기에 1967년 7월, 우한의 보수파 홍위병 조직인 <백만웅사>가 중앙문혁소조원 셰푸즈왕리를 억류한 7.20 사건이 발생하면서 군의 원로들은 배후자로 비난받고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군 원로들이 완전히 실각하자 홍위병들은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문혁소조는 대중에게 무장하고 싸움에 나갈 것을 촉구했고 홍위병들은 군함, 기관총, 대공포까지 장악하고 군수물자를 싣고 가는 소련 기차까지 습격하는 등 중국의 혼란은 절정에 치달았다.

장칭, 캉성, 천보다, 린뱌오, 야오원위안, 장춘차오 등으로 구성된 문혁소조는 정부, 당, 군에 극좌적인 공격을 퍼부어 정부를 장악하고 산업을 마비시켰으며 자신들에 반대했던 외교부장 천이와, 간부들을 보호하려는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를 무력화하기 위해 이들을 마구 공격했다. 특히 천이의 외교부를 장악하기 위해 문혁소조는 린뱌오가 1965년에 한 연설인 <인민전쟁 승리 만세>를 근거로 혁명 국제주의 정책을 선포, 홍위병들을 동원하여 각국 외교공관들을 공격하고 외교관들을 학대하는가 하면 저우언라이의 사무실을 습격하고 외교부 건물을 점령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홍콩에 문혁의 기운이 퍼지면서 문혁소조와 외교부의 싸움은 국제적인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3. 전개[편집]



3.1. 베이징의 상황[편집]


파일:문혁시기영국대사관.jpg
홍위병들이 붙힌 대자보로 둘러쌓인 영국 대사관의 전경

혁명 국제주의 선포 이후, 베이징의 외교관들에겐 힘든 나날이 찾아왔다. 홍위병들은 공산주의, 자본주의를 가리지 않고 모든 나라의 외교관들을 반동으로 몰아 공격했다. 소련 대사관이 수정주의자 소굴로 몰려 170명의 소련 외교관들이 포위당했으며 홍위병들은 이들에게 음식을 전달하려는 다른 나라 외교관들을 구타하고 모욕했다. 소련 대사관 앞에서는 홍위병들이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소련 지도자들의 인형을 만들어 화형식을 거행했고 소련 대사관 직원들은 베이징 시 당국이 물을 차단할 가능성을 염려하여 수영장에 물을 채웠다.

또한 인도네시아 대사관 역시 공격 대상이 되었다. 1967년 4월, 자카르타에 있는 주 인도네시아 중국 대사관이 습격을 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 영웅적인 행동으로 활약을 하여 칭찬을 받은 야오덩산이란 젊은 외교관은 조리돌림당해 무력화된 천이를 대신하여 사실상 외교부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야오덩산은 천이로부터 정권을 회수하기 위해 탈권을 부추겼고 그 과정에서 인도네시아 대사관 역시 홍위병들에게 포위되어 출입문이 완전히 폐쇄되었다. 이어 몽골 대사관과 케냐 대사관도 홍위병의 공격을 받았다. 케냐 대사관 앞에서는 홍위병들이 얼굴을 까맣게 칠한 밀짚인형의 목을 매달아 몇달이나 전시하며 케냐 대사관 직원들을 위협했다.

이들의 배후에는 문혁소조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왕리와 관펑이 있었다. 이들의 지시로 홍위병들은 <권력 탈취 지휘부>를 조직하여 외국 대사관을 공격함은 물론 외교부 건물을 점령하여 외교 문서들을 마구 불사르고 지펑페이, 차오관화를 비롯한 고급 외교관들을 억류하였으며[2] 저우언라이를 납치하기 위해 저우언라이의 사무실을 이틀 반이나 점령하기도 했다.

3.2. 67폭동[편집]


그러던 중 마오이즘에 고무된 홍콩의 운동권들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혹사당하던 일부 노동자들이 문화대혁명에 동조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홍콩 당국이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자 1967년 5월 15일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는 성명을 발표하여 영국이 홍콩에서 파시스트적인 잔학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고 반발하면서 주중 영국대사 대리인 도널드 홉슨을 소환하여 강력항의하며 영국 정부가 구금된 모든 사람들을 석방하고 배상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전달했지만 영국은 중국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에 저우언라이는 영국 대사관 앞에서의 시위를 승인하여 100만명이나 되는 시위대가 대사관을 포위하고 며칠동안 구호를 외쳤으며 저우언라이 본인도 홍콩 당국을 비난하는 군중 대회에 참여했다.

중국은 홍콩인들이 문화대혁명을 수입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신화통신사 홍콩분사를 통해 반영 대자보를 붙히는 등 홍콩의 혼란을 부추겼고 저우언라이 총리는 일부 홍위병들이 국경을 넘어 영국 경찰들을 공격하는 작전을 승인했다.[3] 7월 8일 홍위병들이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신계 지역에서 홍콩 경찰들을 습격해 살해했으며 홍콩의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식민당국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홍콩의 공산주의자들을 닥치는대로 체포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은 폭탄테러를 감행하고 반공인사들을 마구 살해하며 저항했다. 중공이 곧 무력으로 홍콩을 회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지만 중국 정부는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접촉 창구가 필요했기 때문에 홍콩을 회수할 생각이 없었으며 홍콩으로 가는 식수도 차단하지 않았다.

허나 배경 문서에서 보았듯이 홍위병들이 외교부를 장악하기 위해 갖은 행패를 부리고 있던 상황이었고 저우언라이 역시 부르주아적 반동 노선을 따른다는 공격을 받고 있었다.[4] 8월 7일에는 셰푸즈가 "공안기관, 검찰기관, 사법기관을 철저히 파괴하라."라고 지시했으며 7.20 사건으로 발목이 부러졌던 왕리도 붕대를 감은 채로 직접 조어대 국빈관에 나타나 저우언라이의 "외교대권은 중앙에 속하며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는 지시를 공격하며 외교부를 점령하자고 호소했고 8월 11일, 그간 홍위병들에게 억류당해 있던 외교부장 천이가 군중 대회에 끌려나와 조리돌림을 당했다. 문혁소조는 저우언라이와 영국을 마구 난타하며 이를 탈권에 써먹으려 했고 저우언라이는 홍콩에 무력을 사용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치적 입장 때문에 8월 20일, 홍콩의 식민당국에 폭동 기간 동안 체포된 19명의 기자를 48시간 안에 석방하고 홍콩에서 공산주의 출판물을 금지한 식민당국의 조치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리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3.3. 대사관 습격[편집]


파일:습격후공관3.jpg
약탈당한 대사관 내부

중국 정부가 영국에 최후통첩을 보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홍위병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최후통첩이 만료되던 날인 8월 22일 아침, 30개 조직으로 구성된 수만명의 조반파 홍위병들은 곳곳에서 휘발유 통 등을 들고 영국 대사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영국 대사관 앞에 반영시위를 지휘하기 위해 반제국주의-반수정주의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오후 1시가 되자 너무나도 몰려온 군중 때문에 영국 대사관에 있던 22명의 외교관과 대사관 직원들은 그대로 영국 대사관에 갇히게 되었고 최후통첩이 만료될 시에 홍위병들이 대사관을 공격할 것은 너무도 명백해보였다.

베이징 시 당위원회는 즉각 이를 외교부와 베이징 수비대에 알렸다. 군대가 영국 공관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외교부 직원들이 현장에 나가 시위대를 설득하려 했지만 시위대는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에게 성명을 발표하여 학생들이 영국 공관에 침입하지 않게 설득해달라고 요청했고 천보다는 확성기를 통해 홍위병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이미 너무 흥분한 홍위병들은 천보다의 말도 묵살해버렸다. 저녁이 되자 홍위병들은 휘발유를 담은 드럼통을 굴리며 공관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를 본 폴란드 대사관 측에서 영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경고하려 했지만 홍위병들이 이미 전화선도 다 끊어놓은 후였다. 영국 외교관들은 공관 안에서 브리지 게임을 하거나 피터 셀러즈 주연의 <The Wrong Arm of the Law>를 시청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사이 홍위병들은 탐조등으로 대사관을 비추며 공격을 준비했다.

밤 10시가 되자 외교부 건물에서 축포가 발사되었고 10시 반에 홍위병들은 "이미 시간이 다 되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 우리는 행동을 개시한다!"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대사관 바깥에서 줄을 지어 포위하고 기다리던 군중들이 일부 군인들과 함께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공관으로 난입했다. 외교관들은 두꺼운 철문이 보호하고 있던 문서 창고 뒤로 피신하여 의화단 사건 당시에 영국 공관을 방어할 때 썼던 황동 연설대와 여러 캐비닛을 쌓아 문을 보강했다. 허나 홍위병들이 철문을 뚫을 수는 없었지만 홍위병들이 지른 불이 퍼지면서 외교관들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졌다. 홍위병들이 공성망치로 벽을 부숴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자 외교관들은 비상구를 열고 그곳으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홍위병들이 몰려와 외교관들을 린치했다. 홍위병들은 외교관들이 부상당하지 않을 정도로 구타한 후 양팔을 붙잡고 머리채를 잡아 들어올린 자세로 사진을 찍게 했다. 극히 일부의 외교관들만이 핀란드 대사관으로 피신했고 일부는 길거리로 달아났다. 미처 달아나지 못한 외교관들은 군인들이 개입하여 트럭에 태워 안가로 이송시켰다.

3.4. 저우언라이의 분노[편집]


다른 나라도 아니고 영국과 같은 강대국 대사관을 습격해 불태워버리고 영국 대사 도널드 홉슨을 포함한 외교관들까지 마구 구타해버린 사건에 저우언라이는 멘탈이 나가버렸다. 8월 22일 심야, 저우언라이는 즉각 베이징 수비대 장교들과 외교부 관리, 홍위병 대표들을 불러 영국 대사관 점령 사건 브리핑에 참석하게 했다. 분노한 저우언라이는 홍위병들이 무책임했다고 질타한 후 외교부 관리들에게 학생들을 설득하지 못한 책임을 물으며 조금이라도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외교 공관 침범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또 외교관의 개인적 안전이 주재국에 책임이 있다는 걸 알 거라고 발언했으며 홍콩 사무실이 섣불리 최후통첩을 보냈다고 비판했다.

8월 23일, 저우언라이는 상하이에 머물고 있던 마오쩌둥에게 왕리가 그간 해온 급진적인 연설문을 보내 왕리가 이 사건을 부추겼다고 지목했다. 예상 밖의 상황에 역시나 경악한 마오쩌둥은 보고를 듣는 내내 담배를 피우더니 인민해방군 참모총장 대리 양청우에게 "청우야! 자네 피곤하겠다. 먼저 돌아가 쉬어라! 내가 자료를 살펴보고 숙고해보겠다. 일이 있으면 자네를 부르겠다."고 하였다. 자료를 살펴본 마오쩌둥은 양청우를 다시 불러 베이징에 돌아갈 수 있는 비행기편을 알아보게 한 다음, 다음과 같은 명령을 구두로 전달했다.

"왕리, 관펑, 치번위는 문화대혁명을 파괴했다. 좋은 사람이 아니다. 자네는 총리 한 사람에게 총리가 책임을 지고 그들을 체포해 보고하라. 자네는 돌아가 이렇게 총리에게 즉시 처리하도록 하라. (...) 고려할 것이 있다. 치번위는 잠시 놔두고 자아비판을 시키도록 하라.


8월 23일 정오, 베이징에 도착한 양청우는 조어대에 달려가 저우언라이에게 마오쩌둥의 명령을 전달했고 저우언라이는 그날 심야 저우언라이는 천보다, 캉성, 장칭 등을 불러모아 비밀 회의를 소집했다. 11시간 동안 진행된 회의에서 저우언라이는 먼저 이 회의가 주석의 중요 결정을 전달하는 회의라고 말한 후 왕리와 관펑을 체포하라는 마오의 지시를 낭독했다. 그리고 저우언라이는 왕리와 그 가족 전부가 한 무더기의 흑방 쓰레기라고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왕리와 관펑은 신속하게 체포되었으며 체포가 잠시 유보되었던 치번위도 6개월 뒤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반혁명 행위로 기소되어 격리 심사를 받았다. 조사 결과, 이들은 국민당과 소련에 충성하여 간첩행위를 한 것으로 규정되었다. 마오쩌둥은 격노하여 왕리가 대독초라고 비난했고 극단주의자들을 색출하라고 지시했다. 문혁소조원 중 역시나 극좌파였던 무신과 린제 역시 좌천되었다.

4. 결과[편집]


영국 대사관을 습격한 사건은 2월 역류와 7.20 사건으로 폭주 상태에 놓인 문혁에 제동을 거는 계기가 되었다. 8월 말에 문혁소조가 개편되었으며 문혁을 부추기던 천보다의 홍기는 발행정지 처분이 내려졌다. 또한 저우언라이를 공격하는 대자보도 금지되었으며 이를 붙힌 홍위병들에게 책임을 물으라는 명령도 내려졌다.

9월 5일, 중앙위원회, 중앙군사위원회, 국무원, 중앙문화혁명소조가 연명으로 전국의 무장 투쟁을 끝내고 추락한 인민해방군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홍위병 조직의 무기 강탈을 금지하고 군대가 중앙의 지시 없이 대중조직에 무기를 제공하는 일을 금지했다. 그리고 인민해방군에게 부득이한 상황에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날 장칭은 연설을 통해 숙청된 소위 <5.16 조직>을 극좌분자로 비난하며 발을 뺐으며 누구도 군대의 무기를 뺏을 권리가 없다고 발언했다. 이후 중국은 한동안 소위 계급대오 정돈과 5.16 반혁명 조직 색출에 들어가게 된다.

이로서 문혁에서 급진파의 최대의 고조기는 종식되었고 린뱌오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득세하게 된다.

5. 평가[편집]


다 필요 없고 중국 공산당의 공식 평가가 이렇다.

베이징에서 수만명이 영국 대리판사처를 차단, 포위하고 사무 청사를 불태우고 영국대리판사처 직원들을 비판, 투쟁하는 심각한 외교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중국의 국제적 형상이 전례없는 손해를 입었다. 이 같은 일련의 심각한 사건들은 '천하 대란'과 '전면적 내전'의 국면이 이미 좌지우지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음을 말해주었다.
중국공산당 역사 2권 하,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88~89페이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6. 여담[편집]


이때 대사관 여직원들을 상대로 심각한 성적 학대가 자행되었다는 썰이 있는데 이 사건을 다루고 있는 프랑크 디쾨터, 바르바라 바르누앙, 알렉산드르 판초프의 저서 어디에도 관련 내용이 교차검증되지 않는다.

7. 참고문헌[편집]


  •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중국공산당역사 제2권 하,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권, 모리스 마이스너, 이산.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레빈, 민음사.
  •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 북스.
  • 중국현대정치사, 로더릭 맥파커, 푸른길.
  • 중국-북한 동맹관계, 최명해, 오름.
  • 중국지 하, 현이섭, 인물과사상사.

8. 문화대혁명 중의 사건[편집]


[1] 이를 3월 흑풍이라 한다.[2] 이들은 차관급 각료들이었다.[3] 하지만 전면적인 반영투쟁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 지원을 해야 했지만 먹고 살기 빠듯했던 중국 정부는 가망이 없어 보이는 반영 투쟁에 돈을 줄 생각이 없었다.[4] 이 시기에 저우언라이가 민국 시절에 공산당을 탈당했다는 신문 기사까지 발굴되어 저우언라이를 공격하는 재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