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춘계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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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춘계공세
中共軍春季功勢


파일:중공군포로.jpg

춘계공세를 마무리 지은 파로호 전투에서 사로잡힌 후 국군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중공군 포로들
시기
1951년 4월 22일~1951년 5월 22일(중공군의 공세)
1951년 5월 20일~1951년 7월 1일(유엔군의 반격)
장소
경기도, 강원도 북부 일대
원인
1951년 봄 38선으로 후퇴한 공산군의 서울 재점령 및 한반도에서의 유엔군 축출 기도
교전국
파일:UN기.svg UN군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1921-1957).svg 캐나다
파일:호주 국기.svg 호주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뉴질랜드
파일:필리핀 국기.svg 필리핀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튀르키예
파일:벨기에 국기.svg 벨기에
파일:룩셈부르크 국기.svg 룩셈부르크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지휘관
파일:UN기.svg 매튜 리지웨이
파일:중국 국기.svg 펑더화이
병력
418,500명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245,000명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152,000명
파일:영국 국기.svg 11,500명
파일:필리핀 국기.svg 1,500명
기타 국가 10,000명 미만
3개 야전군 총 700,000명
(서울 방면 337,000명)
피해
사상자 15,679명
[사상자 110,000명~160,609명
결과
유엔군의 승리
영향
공산군의 개성시 점령
공산군 서울 점령 실패 및 적화통일 포기
전쟁의 교착화 및 휴전협상 시작

1. 개요



1. 개요[편집]


1951년 중공군 춘계공세(Chinese Spring Offensive of 1951/中共軍春季功勢) 또는 제5차 공세(Fifth Phase Offensive/第五次战役)는 6.25 전쟁 와중인 1951년 4월 말부터 중국 인민지원군이 실시한 군사 작전이다. 이 작전에서 중공군은 지난 1950년 11월 말의 제2차 공세 이후 최대 규모의 병력인 3개 야전군, 총 7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지난 1951년 3월 14일 유엔군에게 다시 빼앗긴 서울의 재점령과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에 작전의 목표 달성에 실패하였고 5월 말부터 시작된 유엔군의 반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북으로 후퇴하여야 했다.

춘계공세를 끝으로 유엔군과 공산군 모두 서로를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후 소련의 제안으로 휴전을 위한 휴전회담이 시작됨과 동시에 지난 1년여 동안 이어졌던 전면전이 끝나고 차후 전술적 요지를 점하기 위한 전선교착전으로 전쟁의 양상이 바뀌게 된다.

중공군의 춘계공세는 5월 22일에 종료되었으나 편의상 후속 전투인 5월 말부터 6월까지 진행된 유엔군의 반격까지 모두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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