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청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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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 담당: 제1무임소
경제 담당: 제2무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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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대 무임소 장관
지청천[1]
池靑天 | Ji Cheong-cheon


파일:45a157cf0dbf00d32e20c5111c35f62d.jpg

출생
1888년 2월 15일[2]
한성부 북부 진장방 삼청동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사망
1957년 1월 15일 (향년 68세)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 자택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15호
본관
충주 지씨[3]
자 / 호
석규(錫奎) / 백산(白山)
재임기간
초대 무임소 장관 (이윤영과 공동 재임)
1948년 7월 21일 ~ 1948년 9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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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지재선, 어머니 경주 이씨
형제자매
누나 2명
배우자
윤용자[1]
자녀
아들 지달수, 지정계
딸 지선학[2], 지복영
학력
교동소학교 (졸업)
배재학당 (졸업)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 (26기)
종교
유교 (성리학)
신체
178cm[3]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 2
약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제헌 국회의원(성동구)
제2대 국회의원 (성동구 갑)
전원위원장
외무국방위원장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26기)
복무
일본 제국 육군
1914년 ~ 1919년[4]
한국광복군
1940년 ~ 1946년
최종 계급
소위 (일본 제국 육군)
중장 (국민혁명군)
정장 (한국광복군)
주요 보직
신흥무관학교 교관
고려혁명군관학교장
뤄양 군관 학교 한인 특별반 교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참전
자유시 참변
쌍성보 전투
대전자령 전투, 동경성 전투 등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소속 정당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PYH2019083001000001300_P4.jpg

"조국광복을 위해 싸웁시다. 싸우다 싸우다 힘이 부족할 때에는 이 넓은 만주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을 맹세합니다."

백산 지청천

대한민국독립유공자이자 군인, 정치인. 본명은 지대형(池大亨), 아명은 수봉(壽鳳), 호는 백산(白山), 자는 석규(錫奎).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생도일 때도,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할 때도, 혹한의 시베리아에서 혈전을 벌일 때도, 만주에서 중국군과 연합해 전투를 벌일 때도 그의 총 끝은 오직 조국을 짓밟은 일본 제국을 향했고 그의 가슴에는 오직 조국 광복이라는 일념이 새겨져 있었다.

구한말의 서화가인 지운영종두법을 도입해 온 지석영 형제는 그의 9촌 삼종숙(三從叔)이다.

2. 생애[편집]


1888년 2월 15일 한성부 북부 진장방 삼청동계(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의 중인 가문에서 아버지 지재선(池在善, ? ~ 1892. 9. 5)과 어머니 경주 이씨(? ~ 1916. 1. 5) 사이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6대조 지여항(池汝沆, 1652 ~ 1740. 1. 17)은 본래 관상감(觀象監)에서 통사랑(通仕郞:정8품 문관의 품계)의 품계를 갖고 근무하던 관원이었는데, 1708년(숙종 34) 신지도 수군만호(水軍萬戶:종4품)에 제수되면서 무관으로 전환되었다. 그 뒤 1716년 임치진 수군첨절제사(臨淄鎭水軍僉節制使), 1724년(경종 4) 충장위장(忠壯衛將:정3품)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를 지냈다. 그러나 지여항 이하 5대가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5살이 되던 1892년 아버지를 여의고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899년 교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배재학당을 거쳐 1907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에는 이미 대한제국군 해산(1907.08.01)이 이뤄진 뒤라 조선보병대 정도만이 유일하게 남은 군사 조직이었다. 1909년 육군무관학교마저 폐쇄되면서 1학년과 2학년 사관생도들은 일본 도쿄의 육군중앙유년학교[4]편입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퇴를 택하게 되었다. 이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각오로 일본행을 택한다. 4~5살 어린 이들과 수학을 하다가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탄을 당하자 아오야마의 맹세[5]를 한다.

1914년 5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26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졸업 동기로는 쿠리바야시 타다미치(1891년생), 이응준(1891년생), 홍사익(1889년생), 김경천(1888년) 등이 있다. 1914년 7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칭다오(청도)에서 주둔했던 독일군을 공격하며 승리한다. 이때 견습사관 신분으로 참전, 다리에 부상을 입으면서 실전경험을 쌓고 같은 해 12월 25일 소위로 임관한다. 1919년 동기 김경천과 함께 일본군 중위의 신분으로 탈영해 남만주 삼원보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망명 당시 일본군 교범 등을 들고 갔으며 아내에게도 자신의 행방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라는 당부를 남겼다. 뒤늦게 일본군이 수배령을 내렸지만 이미 지청천은 만주로 빠져나간 뒤였다.

이후 서로군정서의 간부로 활동하다가 1920년 청산리 전투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서일, 김좌진과 함께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자유시로 이동했으나 자유시 참변을 겪었다. 이후 오하묵 등과 잔여 병력을 이끌고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다시 고려혁명군을 결성하는데 참여하였고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하지만 교육 방침 등에 있어 당시 고려혁명군을 장악해 통제하고 있던 소련 당국과 대립하였고 결국 소련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명 활동으로 3달 후 풀려났고 이후 만주로 돌아왔다.

파일:ndTwFTG.jpg

북만주로 돌아와 정의부와 혁신 의회에 참여하였다. 1930년대 초 한국독립군을 조직해 중국의 호로군과 함께 한중 연합 작전을 펼쳐 쌍성보 전투, 사도하자 전투, 대전자령 전투, 동경성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만주사변으로 만주 전역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가고, 중국 구국군에서 공산당 세력이 커짐에 따라 만주에서 더이상 활동하기가 어렵게 되자 중국 본토로 이동해 1934년 김구가 설립한 뤄양군관학교 한인 특별반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김규식, 김원봉, 조소앙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 설립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민족혁명당 내부의 권력 투쟁 결과 김원봉, 김두봉사회주의 계열이 당권을 장악하자 지청천, 조소앙, 김규식, 신익희우파 민족주의자들은 집단 탈당하게 된다. 민족혁명당 탈당 후 지청천은 조선 혁명당을 창당, 조소앙은 한국 독립당을 재창당, 김구는 한국 국민당을 창당하였는데 이 3당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돌아가게 되었다. 이후 1940년 3당을 합당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합 정당한국독립당이 탄생된다.

파일:FB_IMG_1474743092863.jpg
사진은 충칭 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절 지청천. 오른쪽은 김구.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고 지청천은 총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충칭에는 역시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던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본대가 머물고 있었는데 조선의용대는 1941년 확대 간부 회의에서 화북 연안에 있는 중국공산당으로의 합류를 결정했고 이에 반대하는 김원봉 및 예하 본대 90여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병력이 모두 이탈하여 조선의용대 화북 지대가 되었다. 이후 김원봉은 1942년 조선의용대 잔여 병력을 이끌고 한국광복군에 편입하여 부사령관이 되었으나 과거의 앙금 때문에 총사령관 지청천의 지시를 받기를 거부하여 부대를 따로 돌렸고 이 때문에 지청천은 온전히 부대를 운용하지 못했다. 당시 장준하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소속으로 지청천의 밑에서 복무했다.[6]

1945년 광복이 이뤄지자 1946년 귀국해 우익 청년 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세웠다. 1948년 남북 협상에 반대하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했으며 제헌 국회의원 선거서울특별시 성동구로 출마하여 제헌 국회의원 중 최고득표율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었다. 대한국민당(1948년)에 대동청년단의 잔존 정치 세력을 이끌고 합류하였고 대한국민당이 민주국민당(1949년)에 합류하면서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초대 무임소장관[7], 국회 전원위원장, 외무국방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제2대 국회의원에도 당선되어 재선 의원이 되었다.

6.25 전쟁 발발 직전 이승만에게 수비 태세를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 결국 6.25 전쟁이 터지자 지청천은 "이 박사가 내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이런 일이 터졌다"며 한탄했다.[8]

이름
출신경력
직책
주장
채병덕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일본 육군
총참모장
결전
신성모
파일:영국 해군기.svg영국 해군
국방장관
결전
김홍일
파일:한국광복군 휘장.png한국광복군
육군사관학교 교장
지연전
유동열
파일:한국광복군 휘장.png한국광복군

결전
지청천
파일:한국광복군 휘장.png한국광복군
국회의원
지연전
이범석
파일:한국광복군 휘장.png한국광복군
국무총리
지연전
김석원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일본 육군
1보병사단장
지연전
이종찬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일본 육군
수도경비사령관
결전

1957년 1월 15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9] 자택에서 숙환으로 급서했다. 향년 68세. 장례는 중앙청 야외음악당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유해는 당초 성북구 우이동[10]에 안장되었다가 1994년 4월 14일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이장되었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서울
제6선거구[11]

[[대동청년단|
대동청년단
]]

41,532 (75.21%)
당선 (1위)
초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제6선거구 [12]


10,551 (28.34%)
재선
1951
제2대 부통령 선거
대한민국
2 (1.32%)[13]
낙선 (5위)
[14][15]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민족혁명당|
민족혁명당
]]

1935 - 1938
결성

[[무소속|
무소속
]]

1937 - 1940
당내 의견 차이로 탈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정당#s-6.8|
조선혁명당
]]

1940 - 1945
결성

[[대동청년단|
대동청년단
]]

1945 - 1948
입당
정계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48
정당해산

[[대한국민당(1948년)|
대한국민당
]]

1948 - 1950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50
민주국민당 입당을 위한 탈당


1950 - 1955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55 - 1957
정당해산
작고


5. 기타[편집]


  • 가족으로는 아내인 파평 윤씨 집안의 윤용자가 있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두었다.[16] 아들인 지달수지정계, 딸인 지선영[17], 지복영[18]도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했고 해방 후 화교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 맏딸 지선영의 남편이자 맏사위인 심광식도 광복군 및 국민혁명군에서 활동하였고, 해방 후 행적이 묘연하다. 6.25 전쟁 중 납북되었다는 설과 중국에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다만 여느 납북자와 달리 1963년 광복군 활동을 인정받고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지복영의 아들이자 지청천의 외손자인 이준식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핵심 인사 중 1명이었고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위원회에서 위원장으로 활동했다가 2020년 현재 제11대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 당시 지하 활동을 하는 투사의 숙명과도 같이 가명을 많이 썼다.[19] 독립운동을 하면서 일제의 지명수배를 피해 여러 이름을 돌려가면서 사용하기도 하여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지청천이라는 이름 이외에도 호나 자, 외가의 성인 이(李)를 이용하여 지수봉(池壽鳳), 지을규(池乙奎), 지석규(池錫奎), 이청천(李靑天), 이대형(李大亨) 등 여러 이름을 사용하였다. 성인이 된 후 자신이 지은 '청천(靑天)'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드물어 눈에 띄기 쉬운 성씨인 지씨 성 대신 어머니의 성씨이며 흔한 성씨인 이씨 성을 자주 사용했기 때문에 '이청천(李靑天)'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었고 많이 쓰였는데[20] 실제로 오래된 기록이나 서적에는 본명 못지 않게 이청천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등장하며 적잖은 사람들은 본명이 이청천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독립운동 때문에 도망을 다니다 보니 아무래도 이름을 자주 고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성씨를 이씨로 표기한 이유가 많은 것이 지씨는 상대적으로 희귀한 성씨이기 때문에 조선인 중 성씨가 지씨인 이들이 보복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서였다는 후문이 있다.

  •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한터라 일본어를 잘했다. 신흥무관학교 교장에 재직할 당시에도 일본인 같은 어투를 사용했다고 한다. 연설 때 에-또(ええと, 한국어의 '어...음...')를 연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 해방 이후 병역법을 창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징병제, 징집병 제도의 초안은 모두 지청천의 병역법에서 기초하였다. 그런데 일본 제국의 병역법을 베꼈다는 이 있다.[21]

6.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5년 KBS 국군의 날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서는 배우 권성덕이 연기했다.



  • 뮤지컬 <신흥무관학교>에서는 김성규온유가 맡아 연기하고 있다. 본래 초연에서는 성규 혼자 모든 회차를 연기했지만 온유 입대 후 앙코르 공연부터 더블 캐스팅으로 진행 중이다. 초연 캐스팅 보드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정말 더블 캐스팅이 아닌 이상 쉴새없이 공연에 나서야 한다. 성대에 무리가 오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

  •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는 본편에는 등장하지 않고 일부 유저 제작 모드에서 등장하는 편이다.
    • 국산 대체역사모드 <레볼루션 오브 1896>[22]에서 대한제국 장군으로 등장한다.
    • 대체역사모드 <Thousand-Week Reich>[23]에서는 무너지지 않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장군으로 등장할 예정이다. 여러 파벌로 나눠진 한국군 파벌 중 '구일본군' 파벌을 이끌고 있는데 이 세계관에서는 지청천이 친일파라는 뜻이 아니고 친일 유무와 관계 없이 일본군 출신들을 묶어둔 파벌이다.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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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명은 수봉(壽鳳), 본명은 지대형(池大亨), 일명 지석우(池錫禹).[2] 음력 1월 4일.[3] 경력공파 32세 석(錫) 항렬. 충주지씨중앙종친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4] 예과 3년, 본과 2년의 구성됐고, 5년을 마치면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하여 1년의 과정을 거쳐 임관하게 된다.[5] 학교 근처의 묘지에서 조선인 생도들이 모여서 국가가 없어졌는데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면서 "중정 앞에서 가서 할복을 하자", "전부 자퇴를 하고 조국으로 돌아가자" 등의 의견을 낼 때, 지청천 장군은 "열심히 배우고 경험을 쌓아서 독립운동을 하자"라며 동료들을 다독였고 맹세에 앞장선다.[6] 한국광복군은 1지대, 2지대, 3지대로 나뉘는데 1지대는 김원봉이 지휘, 2지대는 지청천이 지휘, 3지대는 김학규가 지휘했다. 여기서 1지대와 2지대 간의 내분이 생각보다 심했다.[7] 전두환 정부에서 정무장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국민의 정부에서 폐지되었고,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특임장관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하였으나 박근혜 정부에서 다시 폐지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8] 지청천은 이승만을 지지했지만, 이승만은 그가 김구와 가까웠다는 이유로 푸대접했다.[9] 1975년 중구에 편입되었다.[10] 1973년 7월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리·신설되어 도봉구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3월 도봉구에서 강북구가 분리·신설되어 강북구에 편입되었다.[11] 성동구[12] 성동갑구[13] 2차 투표에서의 결과[14] 제2대 국회에서의 간접 선거.[15] 1차 투표 2표 1.32%로 5위[16] 충주 지씨 대종회에 따르면 1남 2녀라고 한다.[17] 지선학 이라고도 한다.[18] 한국광복군 최초의 여자 광복군이라고 한다. 실제로도 참전해서 일본군과 싸운 전적이 있다.[19] 한국의 독립운동가 외에도 다른 나라에서도 레닌, 스탈린 등 지하 운동가들은 다들 당연히 가명을 썼다.[20]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이 이름으로 출마했다.[21] 사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전후와 초기에 제정된 법이 일본 법의 영향을 받아 베낀 부분이 많다.[22] 정조의 장수가 스노우볼로 굴러 대한제국이 근대화에 성공해 경술국치만주사변등이 일어나지 않은 세계관[23] 소련이 무너지며 유럽은 나치독일의 손에 들어갔지만 반대로 일제가 미국과 국공합작의 손에 현실보다 처절히 박살난 세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