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삼국사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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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원문과 번역
3. 기타
4. 같이보기



1. 개요[편집]


進三國史記表
삼국사기를 올리며 드리는 표문

김부식고려 17대 임금 인종에게 삼국사기를 바치면서 올린 표문. 현대에 출간되는 삼국사기 번역본에는 으레 이 글이 들어있기 마련이라서 원래부터 그랬던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삼국사기 임신본, 정덕본 등 옛 판본에는 들어있지 않다. 이 표는 조선 성종 때 삼한의 빼어난 문장을 모아둔 책인 동문선에 실려있다.


2. 원문과 번역[편집]


의역을 배제하고 최대한 직역하였다.

臣某言。古之列國。亦各置史官以記事。故孟子曰。晉之乘,楚之擣扤,魯之春秋。一也。惟此海東三國。歷年長久。宜其事實。著在方策。乃命老臣。俾之編集。自顧缺爾。不知所爲。中謝。

伏惟聖上陛下。性唐堯之文思。體夏禹之勤儉。宵旰餘閒。博覽前古。以謂今之學士大夫。其於五經諸子之書。秦漢歷代之史。或有淹通而詳說之者。至於吾邦之事。却茫然不知其始末。甚可歎也。况惟新羅氏高句麗氏百濟氏。開基鼎峙。能以禮通於中國。故范曄漢書,宋祁唐書。皆有列傳。而詳內略外。不以具載。又其古記文字蕪拙。事迹闕亡。是以君后之善惡。臣子之忠邪。邦業之安危。人民之理亂。皆不得發露。以垂勸戒。宜得三長之才。克成一家之史。貽之萬世。炳若日星。

如臣者本匪長才。又無奧識。洎至遟暮。日益昏蒙。讀書雖勤。掩卷卽忘。操筆無力。臨紙難下。臣之學術蹇淺如此。而前言往事幽昧如彼。是故疲精竭力。僅得成編。訖無可觀。祗自媿耳。

伏望聖上陛下。諒狂簡之裁。赦妄作之罪。雖不足藏之名山。庶無使墁之醬瓿。區區妄意。天日照臨。

신 아무개는 아룁니다, 옛날의 여러 나라 역시 각자 사관을 두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맹자는 가로되 "(晉)의 『승(乘)』, 의 『도올(檮杌)』, 의 『춘추[1]

가 다 한 가지다."라고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이 바다 동쪽의 세 나라도 역년(歷年)이 길고 오래되어 마땅히 그 일을 드러냄이 있어야 할 방책이 있어야 하는데, 늙은 신으로 하여금 이것을 모아서 엮게 하셨으니 스스로 돌아보건대 흠이 많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성상 폐하(인종)[2]

께옵서는 당우(唐虞)[3]의 문사(文思)를 갖추시고 의 근면하고 검소을 본받으셔서 바쁘신 중 틈이 날 때마다 이전 시대의 역사책을 두루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지금의 학사대부(學士大夫)가 다섯 경전과 제자백가의 책이라든지, 진과 한의 역사시대의 『사기』에 대하여는 혹 널리 통하여 자세히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우리 나라의 사실에 이르러선 도리어 막막하여 그 시작과 끝을 알지 못하니 매우 유감된 일이다, 더구나 신라, 고구려, 백제의 세 나라가 세 발 솥처럼 나란히 서서 능히 예(禮)로써 중국과 교통한 때문에 범엽의 『후한서(後漢書)』라든지 송기의 『당서(唐書)』에다 그 열전이 있지만, 그 역사서는 자기 나라의 안에 관한 것은 상세히 하고, 외국에 관한 것은 간략히 해서 자세히 실리지 않았습니다. 또 그 옛 기록으로 말하면 글이 거칠고 졸렬하며 역사적 족적을 놓친 것이 많으니, 이런 까닭에 임금의 선· 악이라든지 신하의 충성과 간사함, 나라의 안위, 인민의 잘 다스려짐(治)과 어지러움(亂)에 관한 것을 다 드러내어 써 후세에 권하고 경계함을 보이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삼장(三長)의 재능[4](있는 인사)을 얻어 일가의 역사를 완성하여 이를 만세에 끼치어 해와 별과 같이 환하게 하고 싶다."라고 하셨습니다.

신과 같은 자는 본래 삼장의 재능도 없고 또 깊은 지식도 없으며 노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날로 정신이 혼몽하여, 비록 독서를 부지런히 하여도 책만 덮으면 곧 잊어버리며, 붓을 잡아도 힘이 없고 종이를 대하면 죽죽 내려가지 아니합니다. 신의 학술이 이와 같이 천박하고 이전 시대의 사적(事蹟)이 저와 같이 아득합니다. 이러므로 한껏 정신과 힘을 다하여 겨우 권책을 이루었으나 결국 보잘것이 없어 스스로 부끄러울 뿐입니다.

바라오니 성상 폐하께옵서 이 거칠고 남루한 편찬을 양해하여 주시고 망령된 저작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이것이 비록 이름난 산에 비밀스러이 소장될 거리는 되지 못하나 간장항아리 덮개와 같은 쓸모 없는 것으로는 돌려보내지 말기를 바랍니다. 신의 구구하고 망령된 뜻을 굽어살펴주십시오.

삼국사기 편찬의 총 책임자 김부식이 이 글을 써서 올리며 인종의 말을 빌려 왜 삼국사기를 만들었는지 설명했다.

(김부식은) 우리 나라의 식자층들조차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첫째 중국 문헌들은 우리 나라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 둘째 현존의 (구삼국사를 비롯한) 『고기』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해야겠다는 것, 셋째 왕·신하·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 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국사기



3. 기타[편집]


  • 2005년 수능 언어영역에도 번역본이 출제된 바가 있다.


4.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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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추시대에 각국이 쓴 역사서로, 이들은 모두 전해지지 않고 다만 공자가 임의로 편집한 춘추만이 지금까지 전한다. 도올은 남방의 짐승으로 성질이 악해 악한 사람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에 빗대어 역사를 통한 반성을 강조하는 내용을 썼으리라 추정된다. 여담으로 김용옥의 호로 잘 알려진 도올이 바로 이 도올이다.[2] 고려는 외부로는 왕을, 내부로는 황제를 자칭하거나 그에 준한 체제를 따르는 국가(외왕내제)였다. 삼국사기가 에 대한 사대를 결정한(1126) 후 쓰여진(1145) 책임을 생각하면 당시 국제 관계의 미묘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도 삼국을 천자국으로 취급해서 본기(本紀)로 엮었고(제후로 취급했다면 세가(世家)로 엮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에서 편찬한 고려사는 고려를 제후국으로 간주해 세가를 썼다) 김부식이 올린 이 글도 천자에게 올리는 '표문'이다. 고려가 스스로 제후국의 격식을 쓴 간섭기 이후와 조선시대에는 국왕에게 올리는 글을 표문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전문(箋文)이라고 했다. 표문이라는 명칭을 회복한 건 갑오개혁으로 대군주 칭호를 도입한 이후의 일이다.[3] 도당씨(陶唐氏)와 유우씨(有虞氏), 곧 을 말한다.[4] 중국 당나라의 유지기(劉知幾)가 말한 재능(才), 학술(學), 지식(識)으로, 역사서를 편찬하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재능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