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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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辰韓
진한(辰韓)은 고대 한반도 남부 삼한(三韓) 지역 중에서 오늘날의 경상도 지역에 위치했던 12개의 제국(諸國)[1] 이었다. 고조선이 한(漢)과 중계 무역을 하던 진국은 바로 이 나라를 의미한다. 한자를 다르게 써서 진한(秦韓)이라고도 불렀다.
2. 상세[편집]
고대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했던 소국들을 지칭한다. 지금의 경상도 지역에서 낙동강 동쪽 지역이, '대부분 옛 진한에 해당'되며 그 중 하나였던 '경주 사로국이 점점 성장'해, 다른 '소국들을 흡수'하면서 《삼국사기》 기록 상으로는 1세기~3세기, 고고학적으로는 4세기~6세기 경, 대부분 '사로국이 발전한 신라에 완전히 흡수/통합'되었다.
진왕에게 복속되어 있었던 12개국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을 존중해 마한의 목지국 왕으로 보는 설이 있다. 한편《양서》 <신라전>에서는 진왕 대신 '진한 왕'이라고 하고 있으며 《진서》 <진한전>에서는 '진한 왕'이 중국에 조공하고 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적인 '진한 왕'에 대한 기록에서 후대 판본으로 넘어가면서 글자가 빠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전자는 마한의 진한에 대한 영향력을, 후자는 진한 12국을 아우르는 중심적 정치체의 존재(아마도 사로국?)를 입증해야 하는 과제가 있지만 어느 쪽도 확실하지는 않다. 일단 어느 쪽이 됐든 서로간에도 영 따로 놀던 진한 지역을 후대의 중앙집권국가마냥 직접적으로 관할하는 능력이 있었다기는 힘들고, 명목상의 지배자였다고 보는 편이다.
고고학적으로도 3세기 진한 각 지역을 비교해봤을 때 경주 덕천리, 조양동, 황성동, 울산 중산리, 하대리, 포항 옥성리, 경산 임당 등의 목곽묘 크기와 부장품을 비교해 보면 서로 비슷비슷한 수준이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다. 서열 정도는 존재했겠지만 세력간 격차가 커서 특정 국가가 나머지 소국들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강력한 진한 왕 같은 건 이 무렵에 존재하기 힘들다. 초기 신라(사로국)가 독보적으로 강해지는 것은 100여 년이 지난 4세기 경부터였다.
2014년 5세기 후반~6세기에 조성된 경북 의성 지역 고분에서 전형적인 백제식 금동관모[2] 가 출토되어 논란이 되었다. 이 지역은 진한 소국 중 하나인 소문국(조문국)이 있었던 지역으로서, 백제식 금동관모와 함께 '의성 양식 토기'#[3] 와 규두대도(圭頭大刀), 삼엽문 환두대도(三葉文 環頭大刀) 등의 최상위 신분을 상징하는 유물도 출토되었다. 《삼국사기》에 ‘조문국은 서기 185년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 벌휴 이사금에 의해 정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역 사학자들은 당시 의성 일대의 진한이 신라에 의한 ‘정벌’이나 ‘합병’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독자적인 세력이나 정치체제를 유지했으며, 그 과정에서 신라뿐만이 아닌 백제와도 교류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경북 상주 일대의 진한 사벌국의 경우 삼국사기에서는 사로국 첨해 이사금 시기(3세기)에 사벌국이 백제와의 결속을 도모하자 군대를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여 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상주 일대의 토광묘 유적을 보면 4세기 중반까지는 독자성을 유지한 것으로 보이며, 최종적으로는 6세기 법흥왕대에 사벌국의 옛 지역에 상주(尙州)를 설치하고 군정과 행정을 담당한 군주를 파견함으로써 사벌국은 독자성을 완전히 상실했을 것으로 보인다.#
문화는 마한과는 달리 성벽과 집이 있었으며 각 마을에는 우두머리 군장을 두었다고 한다. 이들 군장중 최고 우두머리는 신지(臣智), 그 다음은 검측(儉側), 그 다음은 번지(樊秖), 그 다음은 살해(殺奚), 그 다음을 읍차(邑借)라 했다고 한다.
낙동강 건너편의 변한과는 편의상 구분을 하긴 했지만 《후한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언어, 법속, 의식주가 다 똑같고, 다만 제사 풍속만 약간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4][5] 애초에 진한과 변한 사람들은 '뒤섞여 산다'(雜居)고 표현하고 있었으므로 경계 자체가 뚜렷하지 않았다. 고고학적으로도 《삼국지》에서 말하는 2세기 진한과 변한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부장품을 보면 그다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무덤만 해도 진한과 변한이 거의 공통 양식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만큼 비슷하다가 4세기 후엽쯤 가야 가야의 석곽묘, 신라의 적석목곽묘로 구분되기 시작한다. 얼핏 보면 낙동강이 변한과 진한의 경계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세세하게 따지면 부산 지역 같이 낙동강 동쪽이 변한권이라든가 반대로 낙동강 서쪽이 진한권인 경우도 있었다. 칼 같이 나뉘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낙동강 상류는 진한에, 중류와 하류는 변한인 편이었다.
변한과 마찬가지로 철이 풍부한 지역이라 철을 화폐로 삼았으며,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머리를 돌로 눌렀다고 한다. 이걸 '편두'라고 하는데, 이 전통은 후에 가야로까지 이어져 가야 시대 무덤을 발굴하면 두개골이 납작하게 눌린 채로 발견되는 무덤이 있다. 진한의 후신인 신라도 편두를 했다고 추정되는 몇몇 기록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고 그런 두개골은 발견된 적이 아직 없다. 편두한 것으로 추정되는 변형 두개골이 실제로 발견된 곳은 김해 예안리 고분군인데 여기가 진한이랑 가까운 편이긴 하지만 어쨌든 낙동강 건너 변한권이다. 근데 또 그 옆에 있는 금관가야의 중심지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편두 유골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신생아의 머리를 돌로 누르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이다. 신생아의 두개골은 숨골이 열려 있기 때문에 어른의 손으로 눌러도 아기에겐 위험한데 무거운 돌로 누르면 아기를 죽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머리를 돌로 누르는 건 어른도 버티기 힘들다. 이 문제 때문인지 청나라의 《만주원류고》[6] 에서는 건륭제가 직접 집필한 《어제삼한정류》(御製三韓訂謬)를 인용해 《후한서》의 기록을 반박하고 있다. 만주족의 풍습에 아기가 태어나면 요람에 아기가 하늘을 바라보는 자세로 반듯이 오랫동안 눕혀두었는데 그렇게 하면 머리 형태가 편두처럼 평평해진다는 점을 들어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볼 때 정말로 머리를 돌로 눌렀다기보다는 아이를 요람에 반듯하게 눕혀서 재웠기 때문에 머리가 평평해졌다고 보는 게 훨씬 더 합리적이라는 추측도 있다.
3. 진한 12국[편집]
기록에는 진한이 12국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 12국은 기록 당시 파악한 나라가 12개라는 것이며, 다양한 기록에 따라 나라 이름이 다른 것 등으로 미루어보아 여러 나라가 없어지고 생겨나는 과정을 반복했을 것으로 보인다.
3.1.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편집]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소개된 진한 12개국의 구성국 목록 및 추정되는 위치이다. 진한의 역사는 아직까지는 많은 부분이 추측 뿐이며 추정되는 위치 또한 많은 나라들이 그때 그때 다르다. 이병도설과 천관우설, 정인보설 등등이 있다.
3.2.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에는 신라에 병합된 소국들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삼국지》 <위지> - 동이전-과 겹치지 않는 나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3. 기타 서적이나 야사 기록[편집]
3.4. 구전[편집]
4. 관련 역사기록[편집]
4.1. 중국[편집]
4.1.1. 《후한서》 <동이열전>[편집]
辰韓 耆老自言秦之亡人 避苦役 適韓國 馬韓割東界地與之. 其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有城柵屋室. 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次有儉側 次有樊秖 次有殺奚 次有邑借【皆其官名.】土地肥美, 宜五穀. 知蠶桑, 作縑布. 乘駕牛馬. 嫁娶以禮. 行者讓路. 國出鐵, 濊、倭、馬韓並從巿之.凡諸(貨,貿)易, 皆以鐵爲貨. 俗憙歌舞飲酒鼓瑟. 兒生欲令其頭扁, 皆押之以石.【扁音補典反.】
진한(辰韓)은 늙은 노인이 스스로 말하기로 진(秦)나라 망명인인데, 힘든 노역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왔을 때 마한이 그 동쪽 경계를 나누어 주었다 한다. 국(國)을 방(邦), 궁(弓)을 호(弧), 적(賊)을 구(寇), 행주(行酒.술을 권하는 행위)를 행상(行觴)이라 하고 서로를 부를 때 도(徒)라 하여 진나라 말과 유사했는데 이 때문에 때로는 진한(秦韓)이라 불리기도 한다. 성책(城柵)과 옥실(屋室)이 있다. 여러 작은 별읍들은 각각 거수(渠帥.우두머리 혹은 군장)를 두는데, 큰 것은 신지(臣智), 그 다음은 검측(儉側), 그 다음은 번지(樊秖), 그 다음은 살해(殺奚), 그 다음을 읍차(邑借)라 한다.[17]
토지가 비옥하고 오곡에 적당하다. 잠상(蠶桑)을 알고 겸포(縑布.비단의 일종)를 짓는다. 우마(牛馬)를 타고 혼인하는 예법이 있다. 보행하는 자들은 길을 양보하는 풍속이 있다. 나라에 철(鐵)이 산출되고 예(濊), 왜(倭), 마한(馬韓)에서 모두 와서 사 간다. 무릇 재화를 교환할 때 모두 철을 화폐로 삼는다. 그 풍속으로 가무(歌舞), 음주(飲酒), 고금(鼓瑟)을 좋아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모두 돌로 누른다.[18]
4.1.2. 《삼국지》 <위지> -오환 선비 동이전-[편집]
辰韓在馬韓之東,其耆老傳世,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界地與之。有城柵。其言語不與馬韓同,名國爲邦,弓爲弧,賊爲寇,行酒爲行觴。相呼皆爲徒,有似秦人,非但燕、齊之名物也。名樂浪人爲阿殘;東方人名我爲阿,謂樂浪人本其殘餘人。今有名之爲秦韓者。始有六國,稍分爲十二國。
진한(辰韓)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진한의 어느 노인이 대대로 전해지는 바를 말했는데, 옛날 망명인이 진(통일왕조)(秦)의 사역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왔고 마한이 그 동쪽 땅을 나눠 주었다고 한다. 성책(城柵)이 있고 그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않다. 국(國)을 방(邦), 궁(弓)을 호(弧), 적(賊)을 구(寇), 행주(行酒.술을 권하는 행위)를 행상(行觴)이라 부른다. 서로 부르기를 모두 도(徒)라 하여 진(통일왕조)(秦) 사람과 비슷한 점이 있는데 연(燕), 제(齊)의 명칭은 아니다. 낙랑 사람을 불러 아잔(阿殘)이라 하고 동방인(東方人)은 스스로를 아(阿)라고 했으니, 이는 낙랑 사람이 그들의 잔여인(殘餘人)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지금 진한(秦韓)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 6국이었는데 점점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다.
弁辰韓合二十四國,大國四五千家,小國六七百家,總四五萬戶。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辰王不得自立爲王。【魏略曰 明其爲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土地肥美,宜種五穀及稻,曉蠶桑,作布. 乘駕牛馬嫁娶 禮俗男女有別。以大鳥羽送死,其意欲使死者飛揚。【魏略曰 其國作屋 橫累木爲之 有似牢獄也。】 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市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俗喜歌舞飮酒。有瑟,其形似筑,彈之亦有音曲。兒生 , 便以石厭其頭,欲其。今辰韓人皆頭。男女近倭,亦文身。便步戰,兵仗與馬韓同。其俗,行者相逢,皆住讓路。
변한과 진한은 모두 24개 국인데 대국은 4천 - 5천 가(家), 소국은 6백 - 7백 가(家)로 총 4만 - 5만 호다. 그 12국은 진왕(辰王)에 속한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이 맡아 세세토록 계승한다. 진왕은 스스로 즉위하지는 못한다.【위략에 이르기를 유이민이 뛰어났으므로 마한의 제어를 받았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벼농사에 적합하고 누에 치는 법을 알아 겸포(布)(비단의 일종)를 만든다. 결혼할 때 우마(牛馬)를 타고 예속에 남녀의 구별이 있다. 장사 지낼 때 큰 새의 깃털을 쓰는데 죽은 자가 날아 오르도록 한다는 뜻이다. 【위략에 이르기를 그 나라가 집을 지을 때 나무를 가로 질러 묶는데 그 모습이 감옥과 비슷하다 】 철(鐵)이 산출되는데 한(韓), 예(濊), 왜(倭)에서 모두 와서 취한다. 시장에서는 모두 철을 사용하는데 중국에서 전(錢)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한 2군(낙랑, 대방)에도 공급한다. 그 풍속이 음주 가무를 좋아한다. 금(瑟)이 있는데 그 형태가 축(筑)과 비슷하고 또한 연주하는 음곡(音曲)이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돌로 누르는데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려는 것으로, 지금 진한 사람들은 모두 편두(頭-납작머리)다. 남녀가 왜(倭)와 가까워 또한 문신을 한다. 보전(步戰)에 익숙하고 병장기는 마한과 같다. 그 풍속으로, 길가던 사람이 서로 마주치면 모두 멈추어 길을 양보한다.
4.1.3. 《진서》 <동이열전>[편집]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진한 사람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로서 진(秦)의 고역(苦役)을 피하여 한(韓)에 들어왔는데, 한(韓)이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성책(城柵)을 세웠으며, 언어는 진(秦)나라 사람들과 비슷한 점이 있어 이로 말미암아 혹은 진한(秦韓)이라고도 하였다.
4.1.4. 《양서》 <동이열전>[편집]
신라(新羅)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辰韓)의 종족이었다.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도 하는데, 양(梁)나라와는 서로 1만리 쯤 떨어져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진(秦)나라 때 유망인(流亡人)들이 역(役)을 피하여 마한(馬韓)으로 가니, 마한에서는 동쪽 땅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고, 그들이 진(秦)나라 사람인 까닭에 그 나라 이름을 진한(秦韓)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언어와 물건 이름은 중국 사람이 쓰는 것과 비슷하니 나라(국,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궁,弓)을 고(孤), 도둑(적,賊)을 구(寇), 연회석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행주,行酒)을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데는 모두 도(徒)라고 하여 마한과 같지 아니하다. 또 진한(辰韓)의 왕(王)은 항상 마한(馬韓) 사람을 세워 대대로 이어 가고, 진한 스스로 왕을 세울 수 없었으니, 그들이 분명히 흘러 들어와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한(辰韓)은 항상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4.1.5. 《북사》 <열전>[편집]
그들의 언어와 물건 이름은 중국 사람이 쓰는 것과 비슷하니 나라(국,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궁,弓)을 호(弧), 도둑(적,賊)을 구(寇), 연회석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행주,行酒)을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데는 모두 도(徒)라고 하여 마한(馬韓)과 같지 아니하다. 또 진한(辰韓)의 왕(王)은 항상 마한(馬韓) 사람을 세워 대대로 이어가고, 진한(辰韓) 스스로 왕을 세울 수 없었으니, 그들이 분명히 흘러 들어와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한(辰韓)은 항상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진한은 처음 6국(國)이었다가 차츰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는데, 신라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일설에 의하면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인들은 옥저(沃沮)로 쫓겨 갔다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新羅)를 세웠다고 한다. 신라는 사로(斯盧)라고도 한다. 그 나라는 중국· 고구려· 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沃沮)·불내(不耐)· 한(韓)·예(濊)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의 왕(王)은 본래 백제(百濟)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당초에는 백제에 부용(附庸)하였는데,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군역(軍役)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와 신라에 귀화하니, 신라는 마침내 강성하여졌다. 그리하여 백제를 습격하고, 가라국(迦羅國)을 부용국(附庸國)으로 삼았다.
4.2. 한국[편집]
4.2.1. 《삼국유사》[편집]
《삼국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왕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진한(辰韓)의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 혹자는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한다. 혹은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하고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제2대 남해왕
5. 진(秦)나라 피지배층들이 만든 세력인가?[편집]
앞서 살펴본 중국 측 기록들에 따르면 진한(辰韓)은 진(秦)나라에서 노역을 피해 망명한 진(秦)나라 피지배층들이 마한(馬韓)에 빌붙어 세력을 만든 게 그 기원이라고 기록해놨다. 심지어 마한(馬韓)과 언어가 다르며 상고 중국어와 비슷하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진한(辰韓)이 후에 그대로 신라로 발전하기 때문에 만약 이러한 내용들을 필터링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신라의 기원은 진(秦)나라 피지배층들이 노역을 피해서 도망쳐와 만들어진 집단에서 시작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된다. 최근 중국학계에서는 이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진한(辰韓)을 진(秦)나라의 유민들이 세운 망명 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동북공정은 고구려 뿐만 아니라 삼한(三韓)의 역사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럼 정말 진(秦)나라 피지배층들이 만든 세력일까?
진(秦)나라 피지배층들이 노역으로 부터 도망쳐 진한(辰韓)을 세웠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기록에 대한 의문점들은 시공간적으로 그 중간에 위치한 위만조선의 존재를 염두에 둘 때 어느정도 해소된다.
중국 역사의 첫 통일 제국 진(秦)나라가 얼마 못가 멸망하고 그 유명한 초한전쟁이 일어나 중원이 다시 혼란해지니 기원전 3세기를 기점으로로 중원계 유민들이 고조선으로 대거 망명한다. 위의 사료에 따르면 당시 이들은 진(秦)나라에 의해 멸망 당한 옛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세력들로 추정된다. 이들은 진(秦)나라에게 패배 후 강제로 진(秦)나라 피지배층으로 흡수 되었으니 중국 역사상 첫 통일 제국 진(秦)나라가 유지되는 약 20년 간의 짧은 기간 동안은 진(秦)나라의 백성들로 살았을 것이다.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故) [收] 中國亡命 何焯曰, 故字當作收. 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 爲 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진(秦)나라의 통일 이후) 20여 년 후 진승과 항우가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 · 제(齊) · 조(趙)의 백성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하여 점점 준에게 망명하여 갔는데 준은 이에 그들을 서쪽에 두었다. …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오랑캐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항복하였다. 준에게 말하여 서쪽 경계에 살게 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중국의 망명인을 거두어 조선의 번병(蕃屛)이 되겠다고 준을 설득하였다. 준이 (그를) 믿고 총애하여, 그에게 박사직을 주고 홀[圭]을 내렸으며 100리를 봉하여 서쪽 변경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으로 망명한 이후 이들은 위만[19] 을 주축으로 준왕[20] 세력을 몰아내고 왕위 찬탈에 성공하고 조선인 집단에 동화되어 고조선의 주요 구성원으로 합류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위만조선은 86년간 존속하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와의 왕검성 전투 패배 후 멸망하고 위만조선 유민들은 한반도 남부로 남하하기 시작한다.
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
일찍이 우거왕이 격파되기 전에, 조선의 상(相) 역계경이 우거왕에게 간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들이 따라 나선 것이 2,000여 호가 되었다. (그들도) 또한 조선에 공납하는 번국(蕃國)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위략》에 따르면 기원전 110~109년 즘 위만조선 멸망 직전 우거왕의 신하인 역계경이 전한의 전쟁을 피해 2,000호(약 8,000~10,000명)를 데리고 다른 나라로 망명한 사실이 나오는데 이 망명한 나라가 진국(辰國)이다. 《삼국지》에서는 진한(辰韓)은 옛 진국(辰國)이라는 내용도 서술하고 있다.有三種, 一曰馬韓,註 二曰辰韓,註 三曰弁韓校勘. 辰韓者, 古之辰國也.
한(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인데, 진한(辰韓)은 옛 진국(辰國)이다.
이 진국(辰國)은 고고학적 관점에서 기원전 4세기 즘에 삼한(三韓) 이전 한반도 중부, 남부 즘 존재 했던 세력으로 추정된다. 진국(辰國)은 《후한서》 내용에 따라 이후 삼한(三韓) 전체로 이어진다고 보기도 하고 《삼국지》의 기록과 진국(辰國)과 진한(辰韓)의 이름의 연계성을 들어 진국(辰國)이 그대로 진한(辰韓)으로 이어진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던 위만조선 세력들이 전한과의 전쟁 전후로 해서 한반도 남부로 대거 이주한 사실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렇게 한반도 남부로 들어온 위만조선 세력들은 마한 구성원 중 하나인 침미다례로 들어가고 일부는 진한(辰韓) 땅에 들어오게 된다.
중국 측 사료 말고 한국 측 사료에서는 《삼국사기》에서 진한(辰韓)에 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는데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신라의 모체인 사로국을 세우기 전에 조선계 유민들이 먼저 들어와 산과 계곡 사이에 나누어 살며 진한(辰韓)이라는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시조의 성은 박(朴)이고,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B.C. 57) 갑자년(甲子年) 4월 병진일(丙辰日)에 즉위하여 호칭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하니, 이때 나이가 13세였다. 나라 이름은 서나벌(徐那伐)이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으로, 이들이 바로 진한(辰韓)의 6부이다.
"진(秦)나라 피지배층들이 노역을 피해서 도망쳐와 만들어졌다." 식의 내용은 《삼국지》에 처음 등장하는데 《삼국사기》의 참고문헌에 《삼국지》가 있는 것을 보아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 역시 이 내용들을 읽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해당 내용이 전혀 나와있지 않는 것을 보면 진한(辰韓)의 어느 한 노인 말이 전설처럼 전승되어 내려온 내용들을 서술한 《삼국지(정사)》의 내용보다 《삼국사기》의 참고 문헌 목록에 있는 《국사(신라)》, 《신라고기》, 《제왕연대력》같은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선조에 대해서 직접 저술한 다수의 신라 측 문헌들을 더 신뢰했다고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해당 문헌들은 소실되어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해당 문헌들 중에서 당대 신라인들 시각에서 서술한 진한(辰韓)의 기원이 나와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당시 진한(辰韓) 땅에는 위만조선 유민들이 들어오기 전에도 기원전 3세기 즘 고조선-연 전쟁 당시 남하한 조선인 집단, 기원전 194년 위만조선 성립기에 내려온 조선인 집단들이 먼저 들어와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 멸망기에 내려온 조선인 집단까지 합세하면서 크게 3개의 조선인 집단들이 어느 쪽도 명확한 주도권을 쥐지 못하고 병립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진한(辰韓)의 유물에서 위만조선의 영향을 받은 유물들은 발견되지만 중원계 문물 요소들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으니[21] 설령 진한(辰韓)으로 망명한 위만조선 집단 내에 중원계 이민자 집단을 선조로 두고 중원계 정체성을 유지하던 소수 세력들이 있었다 한들 신라의 모체가 되는 진한(辰韓) 6부 성립에 존재감을 나타내지 못했으며 대부분은 위만조선 성립기부터 멸망 후 진한(辰韓) 땅으로 남하하는 거의 100년이 조금 넘는 세월 동안 조선인 집단과 부대끼면서 아예 흡수 내지 동화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진한(辰韓)이 마한(馬韓)에 빌붙어서 세력을 유지하고 자체적으로 왕을 세우지 못했다는 부분 역시 모호한 대목이다.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註 自號韓王. 魏略曰: 其子及校勘 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준왕은 가까운 궁인(宮人)들과 도망쳐 바다로 들어가서 한(韓)의 땅에 자리 잡았으므로, 호칭을 한왕(韓王)이라고 하였다. <위략>에서 말하기를, "그 아들과 친척들 중에 나라(고조선)에 남은 자들이 이를 모방하여 한씨라고 하였다."고 했다. 준왕은 해외(마한)에서 왕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위 사료들 살펴보면 기원전 194년 위만의 고조선 왕위 찬탈로 인해 준왕이 마한(馬韓) 땅으로 망명하여 '한왕(韓王)'을 자칭하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준왕이 위만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측근 일부와 몇 천의 병력만 이끌고 남하한 상황에서 큰 저항 없이 마한(馬韓)을 지배한 것을 보아 기원전 194년까지만 해도 마한(馬韓)이라는 세력이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初 朝鮮王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당초 조선의 준왕이 위만에 패했을 때 남은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깨트리고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절멸되자, 마한(馬韓)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
마한(馬韓)이 삼한(三韓) 중 제일 강력했을 수는 있지만 기원전 194년 위만 세력에게 쫒겨 내려온 준왕 세력에게 쉽게 제압 당했다는 것을 보면 기원전 57년 사로국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약 150년 간 진한(辰韓)을 속국화했을 만큼 강했는지 의문점이 드는 대목이다. [22]
그리고 상고 중국어 비슷하다는 기록 역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의 기록은 진한(辰韓)의 군장 중 한명인 염사치[27] 라는 인물이 한나라가 설치한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에 항복하러 가는 내용이다. 여기서 염사치는 통역을 맡았다는 것을 보아 진한어와 상고한어를 모두 구사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보이며 호래(戶來)라는 사람은 한사군 출신 한족으로 벌목하다가 진한(辰韓) 사람들한테 잡혀 노예가 된 것으로 보인다. 해당 기록을 통해 당시 진한어는 상고 중국어와 명확하게 구분됐으며 진한인과 중국 한족은 정체성 역시 달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漢時屬樂浪郡, 四時朝謁. 范書東夷傳,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諟等, 詣樂浪貢獻. 光武, 封蘇馬諟, 爲漢廉斯邑君, 使屬樂浪郡, 四時朝謁. 章懷注, 廉斯, 邑名也. 魏略曰: 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註 漢書,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乃使人殺朝鮮王右渠, 來降.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註 亦與朝鮮貢校勘 蕃不相往來. 貢, 疑作眞.至王莽地皇時, 廉斯鑡爲辰韓右渠帥, 聞樂浪註 土地美, 人民饒樂, 亡欲來降. 出其邑落, 見田中驅雀男子一人, 其語非韓人. 問之, 男子曰:「我等漢人, 名戶來, 我等輩千五百人伐材木, 爲韓所擊得, 皆斷髮爲奴, 積三年矣.」 鑡曰:「我當降漢 樂浪, 汝欲去不?」 戶來曰:「可」 (辰)校勘 鑡因將戶來(來)校勘 出詣含資縣, 兩漢志, 樂浪郡含資, 三國魏, 改爲帶方郡. 晋志, 屬帶方郡. 一統志, 故城, 今朝鮮京畿道城之南境. 官本考證云, 辰鑡辰字·來出來字, 疑皆衍.縣言郡, 郡卽以鑡爲譯, 從芩中乘大船入辰韓, 逆取戶來. 降伴輩尙得千人.
왕망의 지황(기원후 20년 ~ 23년) 때에, 염사치(廉斯鑡)가 진한의 우거수[23]
가 되었는데 낙랑 땅이 비옥하여 사람들의 삶이 풍요롭고 안락하다는 말을 듣고 도망쳐서 내항하고자 했다. 살던 읍락을 나오다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명을 만났는데 그가 쓰는 말이 한(韓)[24] 사람(의 것)과 같지 않아 이유를 물어보자, 남자가 말하기를 "우리는 한(漢)[25] 의 사람으로 이름은 호래(戶來)라고 불린다. 우리들 1,500명은 목재(材木)를 벌채하다가 한(韓)[26] 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우고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 고 하였다. 이 때 염사치(廉斯鑡)는“나는 한나라의 낙랑군(樂浪)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가지 않겠는가?" 하니, 호래(戶來)는,“좋다.”하였다. 그리하여 염사치(廉斯鑡)는 호래(戶來)를 데리고 출발하여 함자현(含資縣)으로 갔다. 함자현(含資縣)에서 낙랑군에 연락을 하자, 군(郡)에서는 염사치(廉斯鑡)를 통역으로 삼아 금중(芩中)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辰韓)에 들어가서 호래(戶來) 등을 맞이하여 데려갔다.
진한(辰韓)은 사로국을 주축으로 그대로 신라로 발전했고 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신라어는 현대 한국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만약 진한어가 상고 중국어와 어족이 같았다면 지금 현대 한국어 역시 중국어와 비슷했어야 한다. 따라서 진한어가 상고 중국어와 비슷하다는 기록이 있는 건 두 언어의 어족 자체가 같다고 해석하기 보다 삼한(三韓) 언어 중에서 진한어가 중원계 어휘를 적극적으로 차용했기 때문에 해당 기록들이 남아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물론 중원계 어휘만 사용했던 것이 아니라 《삼국사기》를 통해 진한(辰韓)만의 자체적인 어휘 역시 사용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진한(辰韓) 사람들은 박(瓠)을 박(朴)이라 일컬었는데, 처음에 큰 알이 마치 표주박과 같았던 까닭에 박(朴)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辰韓)의 말로 왕을 뜻한다(혹은 존귀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라고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해당 내용들을 총 종합해 봤을 때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 멸망 후 내려온 고조선 유민들이 진한(辰韓) 성립에 일정 기여를 했고 이들 중 소수는 앞서 언급된 것처럼 중원계 이민자들을 선조로 모시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들은 늦어도 진한(辰韓) 6부가 성립되는 시점에는 조선인 집단으로 완전히 흡수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인 집단에 흡수되는 과도기에 중원계 이민자들이 진한(辰韓) 땅으로 들어갔다는 식의 내용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중국 측에 흘러 들어갔고 이게 몇 번 꼬여서 후대의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전승되면서 진(秦)나라에서 노역을 피해 도망친 노역꾼 집단들이 진한(辰韓)을 세웠다는 식의 와전된 기록이 남게 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