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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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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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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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전[2]으로 쓴 진()
파일:진나라 지도.png
기원전 210년의 강역
기원전 9세기~기원전 206년
(통일왕조) 기원전 221년~기원전 206년

위치
섬서 → 중국 전역
수도
옹(雍) → 약양(櫟陽)[3]함양(BC 350)[4]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영(嬴)
국가 원수
백작황제[5]
주요 군주
목공 임호
효공 거량
혜문왕 사
소양왕 직
시황제 정
주요 섭정
선태후
여불위
주요 재상
상앙
위염
이사
언어
상고한어
문자
금문전서
종교
중국 토속 종교[6]
면적
2,300,000km² (기원전 220년 기준)[7]
정치 이념
법가[8]
종족
화하족, 융족
통화
포폐(춘추전국시대)
반량전(통일 이후)
성립 전
주나라
멸망 후
한나라
현재 국가
[[중국|

중국
display: none; display: 중국"
행정구
]]


1. 개요
2. 역사
3. 역대 군주
4. 기타
5. 매체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중국서주-동주 교체기부터 존재해왔던 제후국이자 중화제국의 첫 군사대제국으로 전국칠웅 중 하나이다. 현대 중국어 발음은 Qin(친).[9]

동주의 낙읍 천도 이후 중원이 여러 개의 제후국으로 갈라져있던 춘추전국시대를 종결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나라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으로 유명하다. 춘추전국시대의 전반기라고 할 수 있는 춘추시대에 공존했던 문공의 진나라(晉)나 훗날 중국을 재통일하는 사마씨의 진나라(晉)와는 다른 나라다.

중국 서부에 있던 나라로, 척박한 땅과 야만적인 국가란 이유로 무시당했지만 꾸준히 무력으로 주변국을 강하게 압박하였으며, 진시황 대에 이르러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이후 만리장성을 쌓고,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하나된 세계로써 중국의 기틀을 다졌지만 진시황 바로 이후엔 2세 황제에 이르러 전국은 반란으로 분할되고, 진왕 자영대에 이르러 단 3대 만에 제후국으로 내려앉아 멸망하고 말았다.

국색은 검은색이었다. 황제의 의복, 관리들의 관복, 군복, 군기의 색을 검은색으로 통일했고 심지어는 백성들도 검수(黔首)라고 불렀다고 한다.[10]

국호 '진'이 서양권에서 중국을 지칭하는 이름인 시나(Sina)[11]차이나(China)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12]


2. 역사[편집]




2.1. 서주[편집]


사기》에 의하면 진은 상나라 주왕 제신의 시중을 든 간신 '오래'의 후예라고 한다. 오래의 아버지는 비렴인데 비렴에게는 오래 말고도 계승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 계승의 후손 중에 조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보는 말을 잘 몰아 서주 목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목왕이 기, 온, 화류, 녹이라는 명마를 얻어 서쪽으로 순수를 떠났는데 너무나 즐거워 돌아오는 것을 잊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서언왕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보는 목왕의 수레를 끌고 하루에 1,000리를 달려 주로 돌아와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니 목왕은 조성을 조보에게 분봉했고, 조보는 이때부터 조씨가 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오래의 자손들도 조성에 살며 조씨로 살고 있었는데, 기원전 900년 즈음에 서주의 효왕을 시중들고 있던 비자가 말의 생산을 실시해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이에 효왕이 "옛날 백예가 순 임금을 위해 가축을 잘 번식시켜 봉토와 영씨 성을 받았는데 그 후손이 다시 가축을 잘 관리하니 땅을 주고 부용국으로 삼는다."라고 하여 영(嬴)이라는 성, 조(趙)라는 씨를 받아 영씨의 제사를 잇고, 대부가 되어 진(秦)읍에 영지를 받았다고 한다.


2.2. 춘추시대[편집]


통일 이전에는 제후국 중 가장 서쪽에 위치한 변방국으로 시작했다. 진이 최초로 흥한 장소는 현재의 간쑤성 리 현 부근이며 현재 이 땅에서 진의 선조의 능묘라고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춘추시대에는 수도가 옹[13]이었으나 전국시대에는 함양[14]이 수도가 되었다. 본디 시작은 서융의 변방국이자 소국이었으나, 기원전 770년에 주나라가 견융의 침략으로 주 유왕이 살해당하고 도성을 동쪽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진양공이 진(晉)과 함께 가장 먼저 달려와 주 평왕을 호위한 공로로 백작위를 제수받으면서 제후의 반열에 오르고 융족이 점령한 주의 구지인 기(岐)에 봉해지게 된다. 이후 진양공은 영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견융족을 대거 공격했지만 사망할 때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수많은 군주들의 노력으로 끝내 옹주를 제패함으로써 실질적인 천승지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를 서융지패라고 하는데, 옹주를 평정하는 과정에서 진나라 국군(國君)이 몇 명이나 전쟁터에서 사망한다. 결코 그저 거저먹은 게 아닌 것.[15]

진나라는 춘추전국시대에 들어가는 동시에 제후가 되었지만 풍속적으로는 중원 제후국과 크게 달라 야만스러운 나라로 여겨졌다. 위에서 언급하면서 진나라 제후들은 주로 서융과 항쟁함과 동시에 그들을 포섭해가며 영토를 확장했고 법률의 정비 등을 실시하여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 갔다. 전국시대의 순자는 진나라를 방문하고 방문기를 남겼는데, 그 묘사를 보면 개미굴의 느낌을 준다. 순자가 감탄한 점은 엄격하게 집행되는 법률 아래서 각 백성들이 불평없이 각자 맡은 일을 척척 한다는 것인데, 순자는 어디까지나 유자였기 때문에 순자가 든 유일한 진나라의 단점은 유학자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민족적으로 봐도 진나라의 반은 서융의 이민족이었으며[16] 이렇게 이민족과의 부단한 투쟁 및 사방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군국주의적인 분위기가 나라에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목공 시절에는 오랜 전란에 시달린 중원에서 많은 인구가 유입되면서 그중 백리해와 건숙을 등용하여 국력을 착실히 키워나갔고, 서쪽에 치우친 위치 때문에 중원의 제후국들에게는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서융에서 신하로 일하던 유여를 포섭하여 그가 건의한 방법으로 서융의 여러 부족들을 복속시켜 서방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목공은 진(晉)나라의 내전에 두 차례나 개입하여, 결국 진 혜공을 사로잡은 후 영토를 뺏고 후에 그의 아들이 진(秦)나라를 거스르니 폐위시키고 진 문공(晉文公)을 연상의 사위로 맞아들인 후 진(晉)나라 군주로 세워 친선 관계를 유지한다. 이후 진(晉)나라와 힘을 합하여 반역으로 쫓겨난 주 양왕을 복권시켜 주 왕실을 보위하는 등 춘추시대 최고의 리즈시절을 맞는다.

그러나 중원 진출을 노리는 진(秦)나라는 중원으로의 길목에 위치한 진(晉)과는 자웅을 가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미 진 문공의 사후, 진(晉)과 진(秦)은 적대 관계로 돌아섰고, 이 대립 관계는 진(晉)이 멸망하고 삼진(三晉)으로 불리는 , , 이 일어선 후까지도 계속되었다.

진(晉)의 국력이 유지되는 동안 진(秦)나라는 중원에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17] 진 목공 시절 얻었던 하서 지방을 다시 빼앗김으로 인해 하동과 하서지방의 영유권, 즉 황하 유역을 진(晉)나라가 꽉 쥐고 있었고 따라서 영토는 위수 지역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진 문공 사후 벌어진 효산 전투에서는 전군이 몰살당하는 등 진(秦)나라 입장에서는 대참사를 겪었으며 3년 뒤에 벌어진 전투에서 또 졌고 이후 마지막으로 벌어진 복수전도 배수진을 친 진(秦)의 예기를 피해 진(晉)이 한 발 물러난 듯한 기록의 전투라 사실상 정신승리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진 목공도 미개한 관습이었던 순장을 없애지는 못해 진 목공 사후 대규모의 순장으로 인해 인적 인프라를 상당수 상실하게 된다.

그럼에도 훗날 관중이라고 불리는[18] 위수 인근의 비옥한 황토 지대는 어디 가는게 아니었고 외부의 침략도 외부로의 침공도 없이 수백 년간[19] 진(秦)은 착실히 국력을 쌓아나간다.

참고로 훗날 대립하게 되는 삼진 왕실도 영성 조씨로 시조가 조보다. 조보의 장남의 후손이 진나라, 조보의 차남의 후손이 조나라다.[20]


2.3. 전국시대[편집]


이렇게 풍부한 진의 잠재력에 불을 붙인 촉매는 공손앙(혹은 위앙 또는 상앙)의 개혁. 공손앙은 (衛)나라 사람으로 법가의 선두주자였다. 공손앙이 법치를 이념으로 진나라를 뜯어고쳐 최강대국으로 만들어놓았고, 이를 바탕으로 후에 범수가 원교 근공을 기치로 패도를 쌓아나갔던 것이다.

진이 황하 유역에 진출하는 데 가장 처음 방해가 되던 나라는 위나라였다. 최전선인 하서 지방을 오기가 점유하고 있던 시절에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으나, 오기가 없는 위나라는 그때 그 시절의 위나라가 아니었고, 변법 이후의 진나라도 그때 그 시절의 진나라가 아니었다.

당시 위나라는 위문후, 위무후 시절의 팽창 정책이 한계점을 맞이한 데다, 중국 한가운데 위치한 영토의 특성상 사방 팔방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그 혼란함을 놓칠 진나라가 아니었다. 기원전 342년 마릉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위나라의 동방 정책은 종언을 고했고, 기원전 341년 진나라는 상앙이 위나라 공자를 포로로 잡는 계략을 성공시켜 하서 지방에 상당한 영토를 얻어낸다.

결국 기원전 330년 숙원이었던 하서의 영유권을 공고히 하게 된다. 이후로도 위나라를 지속적으로 압박해 옛 수도인 안읍을 포함한 하동 지방까지 정복하고, 이렇게 얻어낸 황하 유역과 진령산맥 사이에 설치하게 된 것이 바로 함곡관이다.

진순신의 '이야기 중국사'에서는 기원전 316년의 파촉 정벌이 중국 통일에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진(晉)이 분열된 이후 국토와 인구 등을 따져 전국 칠웅 중 양대 강국은 진과 초였는데, 두 강국 중 '천부(天府)의 땅'이라 불릴 정도로 생산력이 높았던 파촉 땅을 먼저 먹는 국가가 중국을 통일할 운명이었다는 것. 초나라가 지도층 간의 내분에 휩싸여 있는 동안 진의 명장 사마착이 파촉을 점령해 초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에 서게 된다. 파촉 땅의 생산력에 더해 장강의 상류를 점령함으로써 군사적으로도 초나라에 대해 우위를 쥐게 된 것.

이러한 시점에서 이미 진은 전국시대의 최대 강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고, 전국시대에 들어오고 나서는 진나라의 위력 앞에 감히 대적할 나라가 없어졌다. 남방의 강국 초나라도 단독으로는 진나라에게 대적할 수 없음이 단양 및 남전 전투의 대패로 증명되었고, 다른 국가들은 연합해서 진에게 대항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특히 기원전 296년에 있었던 합종군에 대한 보복적 성격이 강했던 이궐 전투에서 한-위 연합군 24만이 진군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면서[21] 사실상 합종이 아니면 진나라를 막을 수 없음이 증명되었다.#

이미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범수를 등용한 소양왕 때는 원교근공책을 채택해 힘의 절정을 이루었으며, 황하 유역의 한나라 영토를 지속적으로 잠식해 황하 이남과 이북의 영토를 분단시켜 장평대전을 유발한다. 결국 장평대전에서 백기(趙)나라의 대장 조괄을 깨부수고 조군 40만을 생매장시키기도 했다.

효문왕과 장양왕 시절에는 조금 주춤했다고 할 수 있지만 진왕 정이 등장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승상 이사를 발굴하고 한비자의 의견을 중용하는 등의 혁신을 통해 진은 전국시대의 최강국을 유지하었다.


2.3.1. 진의 중국 통일 과정[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진(영성)/통일 과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4. 제국[편집]


진왕 정은 활발한 정복 사업을 통해 주변국을 차례차례 무너트렸고, 결국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진왕 정은 왕의 지위보다 높은 황제에 올랐으며, 중국 최초의 황제이므로 진시황, 즉 시황제가 되었다.

진시황은 외부의 이민족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고, 각 지방별로 다르던 문자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하나된 세계로써 중국의 기틀을 다졌다. 하지만 진시황의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들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또 폭압적으로 이루어지는 바람에 부작용이 심했고 진나라 이외에 옛 6국 출신 백성들의 불만이 대단하여 진 제국은 이미 통일 직후부터 내부에서 곪아들어가기 시작했다.

전국시대부터 이어진 거대한 궁궐인 함양궁보다도 더 거대한 아방궁을 지었다는 소리도 있다. 다만, 아방궁은 실존 자체는 의문시되는 상황이다.


2.5. 멸망[편집]


시황제가 죽고난 이후 진나라는 이세황제 호해, 진왕 자영을 끝으로 통일 이후 15년 만에 멸망한다.[22] 중국사상 최초의 통일 왕조임과 동시에 가장 단명한 통일 왕조기도 하다.[23]

시황제가 흉노를 막고자 만리장성의 축조에 들어갔고, 자기 무덤을 짓고, 도로를 만드는 등 거대하고 무리한 토목 공사를 일으켜 민심을 잃고 말았다. 진시황이 죽자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가 장남 부소를 제치고 호해를 황제로 옹립했는데, 조고는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고 온갖 악행을 벌였고 호해는 조고에게 정사를 맡기고 자신은 유흥에 빠지면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트렸다.

결국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이 반란을 일으켜 장초라는 나라를 세웠다. 진승의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진나라 전역을 장악했고 진승의 부하들에 의해 육국이 부활했으며 심지어 주문이 이끄는 무리가 함곡관 앞까지 진군하기도 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소부 장한이 나서 주문의 군대를 쳐부수고 장초를 짓밟은 뒤 되살아난 육국을 하나하나 제압했지만 그마저도 초나라의 장군 항우에 의해 막혔다. 장한의 군대는 기원전 207년 거록대전에서 항우에게 패배했고, 장한은 은허에서 항우에 항복했다.

한편 진군이 항우에 박살나고 있을 때 역시 초나라의 장수였던 유방이 이끄는 군대가 함양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모르던 호해는 모반을 꾀한 조고에 의해 시해당했고, 조고는 인망이 두터운 자영을 옹립했지만 자영은 조고와 그 일족을 멸문시켜버렸다. 하지만 이미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고 자영은 기원전 206년 유방에 전국옥새를 바치며 항복했다. 유방은 자영의 항복을 받아주고 주위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으며, 진나라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군대를 함양 밖으로 물리고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대체할 약법삼장을 반포하여 민심을 다독였다.

그러나 뒤늦게 관중에 입성한 항우가 자영을 죽이고 이듬해에 수도를 불태워 진나라는 멸망했다. 이후 항우와 유방이 가장 큰 군웅으로 떠오르면서 결국 초한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유방이 승리하여 한나라를 건국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최초의 중화제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를 다룬 소설이 바로 초한지.[24]


3. 역대 군주[편집]



파일:传国玺.png
진(秦)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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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
-
비자
진후
공백
진중
추존 국군
초대 국군
제2대 국군
제3대 국군
장공
양공
문공
헌공
제4대 국군
제5대 국군
제6대 국군
제7대 국군
출자
무공
덕공
선공
제8대 국군
제9대 국군
제10대 국군
제11대 국군
성공
목공
강공
공공
제12대 국군
제13대 국군
제14대 국군
제15대 국군
환공
경공
애공
혜공
제16대 국군
제17대 국군
제18대 국군
제19대 국군
도공
여공공
조공
회공
제20대 국군
제21대 국군
제22대 국군
제23대 국군
영공
간공
후혜공
출공
제24대 국군
제25대 국군
초대 국왕
제2대 국왕
헌공
효공
혜문왕
무왕
제3대 국왕
제4대 국왕
제5대 국왕
초대 황제
소양왕
효문왕
장양왕
시황제
말대 황제
말대 국왕
이세황제
자영
추존
정공 · 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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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십국 · · 서하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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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 이전의 군주들의 정확한 계보나 재위 기간은 정확하게 알려진 게 없다. 기원전 841년경 주나라에서 국인(國人)의 반란이 일어나 많은 사료들이 없어져서 사기에서도 기원전 841년부터 연표를 작성하고 있다. 이른바 공화 원년이다.

대수
시호/제호(왕호)
성명
재위연수
재위 기간
국군
국왕
황제
-
-
-
-
비자(非子)
?
기원전 ???년 ~ 기원전 858년
-
-
-
진후(秦侯)
?
10년
기원전 857년 ~ 기원전 848년
-
-
-
공백(公伯)
?
3년
기원전 847년 ~ 기원전 845년
-
-
-
진중(秦仲)
?
23년
기원전 844년 ~ 기원전 822년
-
-
-
장공(莊公)
영기(嬴其)
44년
기원전 821년 ~ 기원전 778년
01
-
-
양공(襄公)[25]
?
12년
기원전 777년 ~ 기원전 766년
02
-
-
문공(文公)
?
50년
기원전 765년 ~ 기원전 716년
03
-
-
헌공(憲公)
?
12년
기원전 715년 ~ 기원전 704년
04
-
-
출자(出子)[26]
영만(嬴曼)
6년
기원전 703년 ~ 기원전 698년
05
-
-
무공(武公)
?
20년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78년
06
-
-
덕공(德公)
?
2년
기원전 677년 ~ 기원전 676년
07
-
-
선공(宣公)
?
12년
기원전 675년 ~ 기원전 664년
08
-
-
성공(成公)
?
4년
기원전 663년 ~ 기원전 660년
09
-
-
목공(穆公)
영임호(嬴任好)
39년
기원전 659년 ~ 기원전 621년
10
-
-
강공(康公)
영앵(嬴罃)
12년
기원전 620년 ~ 기원전 609년
11
-
-
공공(共公)
영도 / 영화 / 영가[27]
5년
기원전 608년 ~ 기원전 604년
12
-
-
환공(桓公)
영영(嬴榮)
27년
기원전 603년 ~ 기원전 577년
13
-
-
경공(景公)
영석(嬴石)
40년
기원전 576년 ~ 기원전 537년
14
-
-
애공(哀公)
?
36년
기원전 536년 ~ 기원전 501년
15
-
-
혜공(惠公)
?
10년
기원전 500년 ~ 기원전 491년
16
-
-
도공(悼公)
?
14년
기원전 490년 ~ 기원전 477년
17
-
-
여공공(厲共公)
?
34년
기원전 476년 ~ 기원전 443년
18
-
-
조공(躁公)
?
14년
기원전 442년 ~ 기원전 429년
19
-
-
회공(懷公)
?
4년
기원전 428년 ~ 기원전 425년
20
-
-
영공(靈公)
?
10년
기원전 424년 ~ 기원전 415년
21
-
-
간공(簡公)
영도자(嬴悼子)
15년
기원전 414년 ~ 기원전 400년
22
-
-
혜공(惠公)
?
13년
기원전 399년 ~ 기원전 387년
23
-
-
출공(出公)[28]
?
2년
기원전 386년 ~ 기원전 385년
24
-
-
헌공(獻公)
영연 / 영사습(嬴連/嬴師隰)[29]
23년
기원전 384년 ~ 기원전 362년
25
-
-
효공(孝公)
영거량(嬴渠梁)
24년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8년
26
1
-
혜문왕(惠文王)
영사(嬴駟)
27년
기원전 337년 ~ 기원전 311년
27
2
-
무왕(武王)
영탕(嬴蕩)
4년
기원전 310년 ~ 기원전 307년
28
3
-
소양왕(昭襄王)
영직(嬴稷)
56년
기원전 306년 ~ 기원전 251년
29
4
-
효문왕(孝文王)
영주(嬴柱)
1년
기원전 250년
30
5
-
장양왕(莊襄王)
장양태상황제(莊襄太上皇帝)
영이인(嬴異人)[30]
3년
기원전 249년 ~ 기원전 247년
31
6
1
시황제(始皇帝)
영정(嬴政)
37년
기원전 246년 ~ 기원전 210년
32
-
2
이세황제(二世皇帝)
영호해(嬴胡亥)
3년
기원전 209년 ~ 기원전 207년
33
7
-
진왕(秦王)
영자영(嬴子嬰)
1년
기원전 207년


4. 기타[편집]


  • 농담으로 진나라가 망한 이유는 나라 이름을 ''나라라고 지었기 때문에 망했다는 말도 있다. 배한성의 고전열전에서 유선이 한 대사.

  • 중국의 자동차 제조사인 BYD에서 생산하는 BYD 친의 이름의 유래가 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5. 매체[편집]




  • 2017년에 방영된 드라마 진시려인명월심에 중국 배우 장빈빈이 진시황의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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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진 /*dzin/. 현대 발음은 친 qín. 秦은 현대의 한자이며 진나라 시대의 전서 소전체 표기는 이렇다. 참조[2] 소전체(小篆體)는 시황제가 중원을 통일한 뒤에 보급한 자체이다.[3] 헌공~효공[4] 수도가 서안으로 알려져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다르다. 함양은 서안에서 25km 정도 떨어져있는 도시이다.[5] 기원전 325년부터 칭왕, 기원전 221년부터 칭제.[6] 단, 춘추전국시대 사람들은 세속적인 편이었다.[7] Taagepera, Rein (1979). "Size and Duration of Empires: Growth-Decline Curves, 600 B.C. to 600 A.D.". Social Science History. 3 (3/4): 121. #[8] 기원전 4세기 이후.[9] 중국을 뜻하는 영단어 China의 어원이자 현 섬서성의 별칭이기도 하다.[10] 음양 오행에 따라 화(火)의 나라였던 주나라 이후의 통일 왕조이므로 수(水)의 색인 검은색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북쪽을 상징하는 색이 검은색이어서 사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만약 단순한 썰이 아니라 정설이라면 고대인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도교적 세계관 속에서 살았다는 이야기.[11] 과거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권에서 중국을 지칭하던 다른 이름인 '지나(支那)' 역시 이 Sina를 음역한 것에서 유래한다.[12] 중국을 뜻하는 아랍어 الصين의 발음 또한 as-sin(앗-신)이다. 이 역시 진나라가 어원.[13] 현재의 보계(바오지 시). 보계라는 이름은 당나라 시절 붙었으며, 옛 이름 중 하나가 그 유명한 진창이다.[14] 기원전 350년에 천도했다.[15] 실제로 진목공 당시 유여를 포섭하여 서융을 복속한 이후에도 서융은 계속해서 잔존하였고, 헌공이 완전히 안정시키기 전까지 서융은 상황에 따라 위수까지 넘봤다. 효공이 융 원왕을 죽이면서 거의 토벌된 것으로 보인다.[16] 서융은 시대마다 다른 민족을 칭했는데, 진나라에서 부르던 서융은 티베트 계통이었으며 현 중국의 소수민족 강족이족의 선조였다고 한다.[17] 진(晉)은 춘추시대의 사실상의 패자나 다름없는 위치였고 그러다보니 진(秦)은 춘추시대에는 그다지 힘을 쓰지 못했다. 진 문공 사후, 두 진은 일진일퇴의 싸움을 거듭한다.[18] 당시에는 함곡관이 없었음을 기억하자.[19] 진 목공 사후 역사에서 한 발짝 물러난 듯한 진은 200여 년간 지도자의 교체를 제외한 별다른 기록이 없고, 진 애공 시절 멸망 직전의 초나라에 원군을 보낸 기록 정도만이 주목할 만한 기록이다.[20] 이 문단은 앞선 문단의 설명과 배치된다. 앞 문단에서 서술한 대로면 진의 시조인 비자는 비렴의 장남 악래(오래)의 후손이고 조보는 비렴의 차남 계승의 후손이니 한 집안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조보가 공통 조상일 수는 없는 것. 물론 고대의 족보인 만큼 출전마다 세부 내용이 조금씩 다른 건 어쩔 수 없긴 하다. 아무튼 피터지게 싸우고 또 싸운 나머지 포로 40만 명을 갱살하기까지 한 진나라와 조나라가 소호의 후손을 자처한 영성 조씨로 같은 계통이라는 점은 당대인들도 인식은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1] 대패했을뿐만 아니라 사령관인 공손희가 포로가 되며 5개 성이 함락당할 정도.[22] 사실 진나라는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사에서 처음으로 통일을 했지만 당시 중국에서는 통일에 대한 사상 및 자신이 진나라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통일만 달성하면 칭송하는 풍조와 다르게 당시 지배층들이나 피지배층들이 승자인 진나라에게 불만을 가졌고, 여기에 진나라의 가혹한 압제로 불만이 더욱 커져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에 반란이 시작되었다.[23] 단명한 국가들 중 서진, 수나라조차 통일 왕조였던 기간만 따지면 진나라의 2배다.[24] 진나라 때의 한 해의 첫 달은 단월(진시황의 정(政)과 겹쳐서 정(正)월이 단월이 되었다)이 아니라 10월이었는데, 진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자영이 항복한 달이 기원전 206년 10월이었다. 만약 시황제가 한 해의 첫해를 10월로 바꾸지 않았으면 진나라의 멸망연도가 기원전 207년이 되고 해하 전투가 기원전 203년으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25] 견융 족에 의해 수도인 종주가 함락되어 주 왕실이 동천할 때에 호위한 공으로 백작으로 봉해진다.[26]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곧 살해당하였다.[27] 춘추좌씨전에는 도(稻), 사기에는 화(和), 사기색은에는 가(貑)로 나온다.[28] 찬탈당하고 어머니와 같이 살해당하여 어머니의 시체와 함께 우물에 파묻혔다.[29] 여씨춘추에는 연(連), 사기색은에는 사습(師隰)으로 나온다.[30] 후에 자초(子楚)로 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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