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 롯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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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cccc,#323232><colcolor=#20272c,#d3dade> 모기업 정보 ||파일:롯데(일본) 로고.svg 롯데홀딩스 ||
|| 일본시리즈 우승
★★★★ ||1950 · 1974 · 2005 · 2010 ||
|| 리그 우승
(5회)
||1950 · 1960 · 1970 · 1974 · 2005 ||
|| 퍼시픽리그 전·후기 우승
(4회)
||1974후기 · 1977후기 · 1980전기 · 1981전기 ||
|| 클라이맥스 시리즈 ||2007 · 2010 · 2013 · 2015 · 2016 · 2020 · 2021 · 2023 ||
|| 시즌별 요약 ||2018 · 2019 · 2020 · 2021 · 2022 · 2023 ||
|| 현역 선수 경력 ||이시카와 아유무/선수 경력 · 사사키 로키/선수 경력 ||
||<width=20%> 핵심 인물 ||<width=80%>구단주 신동빈구단주 대행 카와이 카츠미| 감독 요시이 마사토2군 감독 토리고에 유스케
선수회장 마스다 나오야 | 주장 나카무라 쇼고 ||
|| 경기장 ||1군 ZOZO 마린 스타디움2군 롯데 우라와 구장 ||
|| 홈 중계 채널 ||파일:닛테레뉴스24 로고.jpg ||
|| 구단 상세 ||역사선수단 및 등번호역대 선수 | 유니폼 | 응원가 | 집시 롯데 | 10.19 | 칠석의 비극 ||
||<-2><bgcolor=#20272c> 틀 문서 ||
||<-2>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 | 역대 감독 | 역대 1라운드 지명선수 | 롯데그룹 산하 구단 ||



1. 개요
3. 잔혹한 이동
4. 1974년의 우승과 무시당한 센다이
5. 수도권으로의 복귀



1. 개요[편집]


집시 롯데는 일본프로야구치바 롯데 마린즈롯데 오리온즈[1][2] 시절인 1973년~1977년에 특정 본거지에 홈구장을 가지지 않고 여러 구장에서 홈경기를 치르면서 구단을 운영하던 침체기를 비하하는 호칭이다.

이 5시즌 동안 롯데는 수도권미야기현 센다이시 등을 전전하면서 홈게임을 가졌는데 특정 거점을 가지지 않고 이곳저곳을 떠도는 모습을 팬들은 "집시 구단"이라고 야유했다.


2. 연고지 이전[편집]


롯데는 다이마이 오리온즈 시대인 1962년부터 도쿄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했지만 다이마이 야구단을 인수한 롯데에서 도쿄 스타디움을 사용하지 않기로 함에 따라[3] 1972년 시즌 종료 후 구장은 폐쇄되었다.[4] 이듬해인 1973년에는 수도권을 연고로 하는 다른 구단들의 홈구장을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경기 일정을 결정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닛타쿠홈 플라이어스[5]고라쿠엔 구장, 야쿠르트 아톰즈[6]메이지진구 야구장, 다이요 훼일즈[7]가와사키 구장 등에 경기가 없는 날에 홈경기를 편성했지만[8] 그래도 절반 이상은 개최지가 미정 상태였으며 진구구장에서 20경기 가량의 홈경기를 치루려 했으나 대학야구 리그 등으로 인해 6경기로 대량 축소된 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 와중에 미야기현 센다이시에 있는 미야기 구장을 사용하는 방안이 부상했다.

프로 야구 실행위원회의 허가를 받아 1973년부터 미야기 구장에서의 홈경기를 편성했으며 그 해 5월 22일 미야기 구장에서의 첫 홈경기가 對 긴테츠 버팔로즈 전으로 열리면서 많은 관중이 몰려들었다. 첫 경기날 최대 수용량인 2만 3천명을 넘는 3만명 이상의 관중이 미야기 구장을 찾을 정도였다. 같은 해에는 가네다 마사이치 감독이 취임하여 그의 엄청난 인기와 당시 후쿠오카를 연고로 하던 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의 라이벌전 등과 전후기 리그 우승을 위한 피터지는 싸움[9] 등이 관객 증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10] 이 해 시즌의 관객수가 작년 시즌의 31만명 이란 처참한 성적에서 94만 6500명 으로 그해 관객수 1위를 차지하면서 대량 증가하는 호조를 보이면서 퍼시픽 리그 신기록을 달성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그 해 11월 롯데는 이듬해인 1974년부터 미야기현을 연고지로 할 것을 발표했고 12월 실행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미야기현으로 임시 연고지 이전이 결정되었다. 그와 동시에 특별 혜택으로[11] 수도권에서의 개최 경기수도 확보하였다. 그렇게 하여 이듬해인 1974년 개막전을 포함해 미야기 구장에서 총 27번의 공식전이 열렸다.

여담으로 도쿄에서 나갈 때 쳤던 개드립이 유명하다. "우리는 도쿄시민뿐만 아니라 일본국민 전체에게 사랑받는 구단이 될 것이다.", "우리의 연고는 일본 그 자체다." 등등(.....) 교진군 : 개소리 집어쳐! 우릴 냅두고 무슨 전국구 구단이라는 거야! ???: “적어도 우리 정도는 돼야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거지..


3. 잔혹한 이동[편집]


그러나 구단 사무실과 합숙소 등의 제반시설은 계속 도쿄에 있었고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도 도쿄 근교에 거주하고 있었다. 수도권 경기 때는 가정이나 팀 합숙소에서 직접 구장으로 출퇴근이 가능했지만 센다이미야기 구장에서 홈경기가 있을 때는 센다이 시내의 호텔에 숙박하면서 유니폼 차림으로 버스로 구장과 호텔을 왕복하는 원정 경기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12] 센다이로 이사 온 선수는 단 1명도 없었다. 당시 주전이었던 야마자키 히로유키(山崎裕之)[13]"센다이가 본거지라고 해도 대부분 원정 경기와 같은 호텔 거주였기 때문에 신경이 편안해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더불어 당시 퍼시픽리그 6개 구단의 홈구장은 센다이(롯데 오리온즈)와 도쿄(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 이외엔 간사이(난카이 호크스,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한큐 브레이브스), 규슈(다이헤이요 클럽→크라운 라이터 라이온즈)등 일본 서부 지방에 집중되어 있어서 이동 거리가 길어지는 문제가 있었으며 당시 센다이는 고속 교통망의 정비가 막 시작되으므로 도호쿠 신칸센도 미개통 상태였기 때문에 항공기로 이동하거나 도호쿠 본선특급 열차 등의[14] 일반 노선을 이용해야만 했다. 특히 센다이에서 후쿠오카 원정 경기를 떠나야 할 때는 당시 이 두 지역의 항공을 연결하는 직항편이 없어서 하네다 공항에 들렀다가 공항 로비에서 가족을 잠깐 보고 후쿠오카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 웃지 못할 장면도 연출됐다. 이런 가혹한 이동 탓에 1개월 가까이 수도권의 집이나 합숙소를 비우기도 했다. 그래서 한신 타이거스교세라 돔 오사카 개장 이전까지의 "죽음의 원정"[15]보다 더 잔혹한 이동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러한 고생을 자초한 롯데의 센다이 이전은 수도권에 새로운 거점을 확보하기까지의 잠정 조치에 불과했다.

여담이지만 이 해 오프시즌에 도쿄닛타쿠홈 플라이어스와의 합병 계획이 있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이후 닛타쿠홈은 닛폰햄에 구단을 매각해 닛폰햄 파이터즈가 탄생하게 되었다.


4. 1974년의 우승과 무시당한 센다이[편집]


1974년 롯데 오리온즈는 후기 우승을 거두면서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플레이오프에서 전기 우승팀이었던 한큐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3전 전승을 거두면서 1970년 이후 4년 만의 퍼시픽리그 우승을 달성했다.[16] 다만 당시 미야기 구장의 관객수용량이 2만 8천명 가량에 불과했기 때문에 플레이오프가 개최되기 전 프로야구 실행위원회에서 일본시리즈를 개최하는 야구장은 관중수용량이 3만 명 이상이어야 한다는 야구협약에 따라 만약 롯데가 일본시리즈에 진출할 시 코라쿠엔 구장에서 홈경기를 개최하기로 결정했고 결국 센다이의 팬들은 미야기 구장에서 일본시리즈를 개최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17] 센다이 팬들은 홈에서 일본시리즈가 열리지 않는 것에 실망했지만 시설의 미비로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하는 팬들도 적지 않았고 대다수는 멀리서나마 롯데를 응원했다.

이후 롯데는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 드래곤즈[18]와 격돌하여 4승 2패로 원년 우승 이래 24년 만에 구단 사상 2번째 일본시리즈 제패를 달성했다. 적지인 나고야에서 귀경한 롯데 선수단은 도쿄에서 우승 퍼레이드를 개최했고 센다이의 팬들도 "우리 지역에서도 축하 행사를 개최하겠지?"라는 기대와 함께 롯데의 센다이 이벤트를 기다렸지만 롯데 구단은 시즌이 끝날 때까지 센다이에서 어떠한 우승 축하 행사도 개최하지 않았다. 배신감을 느낀 센다이 시민들로부터 비판의 목소리가 일었고 센다이 지역에서의 응원 열기는 단번에 떨어지고 말았다.

1974년 롯데의 관객수는 87만 2천 명으로 작년에 비해 6만 명 정도 감소했지만 그래도 그 해 리그 1위를 기록했으며 1975~76시즌에 롯데는 미야기 구장의 홈경기를 이전보다 늘린 33경기 가량으로 개최했으나 1974년 우승 직후 센다이를 무시한 롯데 구단의 처사에 실망한 현지 팬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관객 동원 수가 60만 3300명(1975년), 64만 3300명(1976년)으로 20% 이상 떨어졌다. 그나마 1976년엔 관중수가 어느 정도 늘긴 했으나 이조차도 본래 수도권에서 개최하기로 한 경기가 우천취소되어 시즌 막판에 재편성된 경기를 미야기 구장에서 개최했던 점이 작용했다.


5. 수도권으로의 복귀[편집]


1977년 시즌 말 롯데가 홈구장을 가나가와현으로 이전하는 구상이 표면으로 올라왔다. 이것은 다이요 훼일즈가 다음 해인 1978년 홈구장을 가와사키 구장에서 요코하마 스타디움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한 것[19]에 따라 롯데도 다시 수도권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위에 서술한 것과 같이 5년에 걸쳐 센다이 등에서 열린 경기 때마다 장거리 이동을 거듭해 온 롯데나[20] 원정 구단 모두에게 선수들의 신체적 및 정신적 부담 증가가 뚜렷했고, 이동 경비의 부담도 매우 컸다. 센다이에서는 이전이 거의 기정사실화되자 "센다이에 남아 달라"고 수도권 이전 중지를 요구하는 정재계나 시민단체 등에 의한 서명 활동이 있기도 했지만 시민들 사이에서는 "롯데가 도쿄에 돌아가는 것은 기본 노선" 이라는 견해가 다수였다.

그 해 시즌 롯데는 전기리그 우승을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내주고 뒤이어 후기리그 우승을 향해 달리고 있었지만 후기리그 땐 실속을 거듭하면서 똑같이 후기리그 우승을 위해 쾌질주하던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따라잡혀 결국 그 해 10월 4일 미야기 구장에서 열린 최종전에서 패배하면서[21] 자력 후기리그 우승을 놓쳤지만 그 다음 날 한큐 브레이브스긴테츠 버팔로즈에게 패배하면서 간신히 후기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플레이오프에서 2승 1패로 선제했지만[22] 2연패로 리그 우승을 놓쳤고[23] 패배가 결정된 5차전이 미야기 구장에서 열리면서 이것이 집시 롯데 시대 최후의 미야기 구장에서의 경기가 되었다. 이 해 미야기 구장에서는 38경기가 개최되면서 집시 롯데 시대 최다수의 홈경기가 개최되었고 롯데의 관객수는 75만 2000명으로 전년도보다 대량 증가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관중수와 설비 문제로 1번도 올스타전이 열리지 않는 아쉬움을 겪었다. 3만 1천명 수용가능한 전용구장인 후지이데라 구장이 있는데도 주민들의 님비 때문에 조명탑을 설치하지 못해 올스타전도 개최 못하고 남의 홈구장에서 일본시리즈 홈경기 개최한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만 하겠냐만

롯데와 다이요는 시즌 종료 후 사용 구장에 대한 절충을 실시한 결과 타이요는 당초 계획대로 요코하마 스타디움을 전용 구장으로 하고 롯데는 타이요가 기존에 쓰던 가와사키 구장을 사용하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다. 이에 따라 롯데의 수도권 복귀가 확정되었고 5년간에 걸친 집시 롯데 시대는 여기서 종지부를 찍었다. 야마자키 히로유키는 "응원해준 센다이 팬들에게 미안했지만 선수의 대부분은 '아, 이제 겨우 도쿄에 돌아가는구나'고 안심했다"고 회고했지만 미야기현 출신 사사키 노부유키[24]"롯데 입단 2년째에 센다이로 홈구장이 옮기면서 1군에 오르면 센다이로 돌아갈 수 있다고 목표로 해왔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굉장히 아쉬웠다"고 말했다.[25]

이전 결정이 내려진 후인 12월 24일 가와사키시 시내에서는 롯데의 퍼레이드 및 격려회가 열렸다. 카와사키 시민들은 다이요의 요코하마 이전을 카와사키 팬들에 대한 배신이라 생각하여 새로운 팀인 롯데를 환영했지만 구장의 노후화 및 관중수 침체로[26] 롯데는 또 다른 고난과 맞닥뜨렸다. 롯데는 카와사키 구장으로 이전한 후에도 미야기 구장에서 연간 10경기 전후의 시합을 개최했지만 1990년대 이후에 구장 시설의 노후화로 경기수는 점점 감소하였다. 결국 1992년 롯데는 다시 치바현으로 연고지를 이전하였고 2005년부터 퍼시픽리그에 새로 합류한 신생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미야기 구장을 홈구장으로 삼으면서 롯데의 미야기 구장에서의 홈경기는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되었다. 라쿠텐이 롯데와 같은 퍼시픽리그 소속이어서 롯데의 미야기 경기 자체는 증가했다. 물론 그 때와는 달리 모두 원정경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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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9년 9월 21일 일본 유력 일간지인 마이니치 신문에 의해 마이니치 오리온즈(1950~57년)라는 이름으로 창단한 이후 다이마이 오리온즈(1958~63년), 도쿄 오리온즈(1964~68년)로 이어져 왔다가 1969년 한일 다국적 기업인 롯데그룹이 네이밍 스폰서를 맡고 1970시즌 종료 후 구단을 정식으로 인수하면서 롯데 오리온즈(1969~91년)로 팀명이 변경되었고 1992년부터 치바현으로 연고이전하면서 현재의 팀명인 치바 롯데 마린즈(1992~현재)를 사용하고 있다.[2] 흔히 한국인들이 원년 롯데 자이언츠 하면 떠오르는 남색과 빨간색을 일본 롯데가 쓴 때가 이 시기다.[3] 다이마이에서 롯데가 구단을 인수할 때 홈구장의 인수도 제안했지만 롯데 기업은 물론 구단에서도 구장 크기가 너무 작다며 거절하였다.[4] 위치선정 미스와 비인기였던 파리그 소속 팀인 오리온즈의 홈구장이라 관객이 적어 적자가 많았던 사정도 있었다.[5] 1974년부터 닛폰햄이 구단을 운영하게 되면서 닛폰햄 파이터즈로 구단명 변경[6] 1974년부터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구단명 변경[7] 지금의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8] 그 외에도 교토니시쿄고쿠 구장, 시즈오카시즈오카 쿠사나기 구장에서 홈경기를 치루기도 했다.[9] 가네다 마사이치의 쇼맨십 항목 참조[10] 그러나 이 해 시즌은 결국 전후기리그 전부 2위로 끝나며 리그 우승에 실패했다.[11]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프로야구협약 제41조에는 보호구역(연고지) 내 1개의 전용구장(홈 구장)에서 50% 이상의 공식전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 다만 이 해 그러나, 실행위원회 및 구단주회의의 승인을 얻은 경우 그 수를 변경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을 추가하였다.[12] 2023년 기준으로 한국프로농구V-리그 구단 대부분이 이와 비슷하다. 제2 홈구장경기도 비슷하지만 실질적으로 중립구장 경기이기 때문에 비교하기는 어렵다. 한마디로 20~30여년 째 용인시리그[13] 통산 2081안타 270홈런을 기록하며 베스트나인 5회, 다이아몬드 글러브 3회 등을 수상한 명선수.[14] 도호쿠 신칸센은 1982년 개통되었다. 도호쿠 신칸센 이전에 도쿄와 센다이를 연결하던 특급은 하츠카리야마비코였다.[15] 이 쪽은 한신 고시엔 구장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를 치르다 보니 벌어진 일이다. 최대 4시리즈 이상의 연속 원정을 다녔다. 중간에 홈 경기를 끼운다고 해도 지방구장 경기였으니 사실상 원정 경기였다. 1985년엔 아찔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는데 후쿠오카 지방 경기를 치른 한신 선수단이 후쿠오카에서 하네다까지 타고 왔던 비행기가 바로 다음 이타미행 비행 때 추락하는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16] 여담으로 이 시즌이 현재까지 치바 롯데 마린즈마지막으로 정규시즌 1위를 달성한 해다. 50여 년이 지나도록 롯데는 정규시즌 1위에 오른 적이 없으며 2005년 31년 만의 퍼시픽리그 우승을 달성했을 땐 정규 시즌에서 2위를 기록한 후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에서 1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17] 훗날 토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퍼시픽리그 첫 우승을 달성했던 2013년에도 비슷한 이유로 원칙상으로는 개최가 어려웠으나 관중 수용량을 맞추기 위해 가변석 설치로 문제점을 보완하여 일본시리즈를 개최하였고 7차전까지 가는 승부 끝에 라쿠텐이 미야기 구장에서 첫 일본시리즈 제패를 확정지었다.[18] 이 해 주니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근소차로 우승을 차지하며 요미우리의 10년 연속 센트럴리그-일본시리즈 제패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19] 신축된 요코하마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삼고자 했다. 근데 문제는 롯데도 요코하마 스타디움을 노렸는데 요코하마 스타디움이 건설된 배경 자체가 너무 낡은 가와사키 구장을 더는 쓸 수 없었던 다이요가 요코하마시에 경기장 지어주면 요코하마로 옮겨가겠다고 해서 지어진 것이라(...)[20]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당시엔 도호쿠 신칸센이 없었다. 도쿄에서 센다이 가는 데만 특급으로 4시간이 걸리던 시절이었다.[21] 이 날 9회 2사 때 경기장 스탠드로 이물질이 날아들면서 가네다 감독이 직접 구장 마이크로 "선수들도 저도 열심히 해왔습니다. (경기를) 플레이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관객들에게 말할 정도로 경기가 일시 중단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22] 이때도 롯데가 리그 우승을 달성할 시 고라쿠엔 구장에서 일본시리즈 홈경기를 개최하도록 결정되었다. 근데 이 해 센트럴리그 우승팀이 당시 고라쿠엔 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여서 만약 롯데가 우승했다면 1981년의 최초이자 마지막 더그아웃 시리즈보다 4년 앞서서 최초의 더그아웃 시리즈가 열릴 수도 있었다![23] 사실 1차전에서 1-18로 대패하는 등 조짐이 보이긴 했다. 이 해 플레이오프에서 롯데는 5전 전부 합쳐 9득점 밖에 못하는 물빠따를 선보이며 한큐에게 졌다(...) 참고로 5차전도 7-0으로 영봉패하는 굴욕을 겪었다(...)[24] 1971년 드래프트 10위란 엄청 낮은 순위로 데뷔한 포수로, 결국 주전으로 발탁되지 못하고 1982년 은퇴했다. 프로 생활 11년 중 1군 기록은 4시즌에 불과했으며 통산 46경기에서 42타수 10안타 1홈런에 그쳤고 그 46경기 중에는 위장 오더로 명단만 올리고 실제로 안 뛴 경기도 있어서 표본은 더 적다(…). 은퇴 후 롯데에서 20년 이상 코치를 해 왔고 2군 감독까지 맡았다. 이후 롯데를 떠나 야구해설가로 10년 넘게 일하다가 2019년부터 해설가를 그만두고 토호쿠공업대학 야구부 코치로 근무(해설가 말년부터 대학야구 코치 겸임이었기 때문에 취임 자체는 이미 몇 년 전에 했었다.).[25] 그러나 사사키는 집시 롯데 시절인 1974년과 1976년 1군 경기에서 단 1안타도 기록하지 못했다(..)[26] 롯데 오리온즈 최후의 해인 1991년을 제외하곤 단 한번도 100만 관중을 기록하지 못했다. 경기 승/패에 대한 관심은 커녕 TV 프로그램의 카메라에 잡히기 위해 나가시 소면을 만들어 먹거나 마작을 치고 마스크를 쓰고 춤추거나 대걸레로 광고판을 닦는 퍼포먼스를 시전하는 관중들이 생겨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