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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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짚신(볏짚)
미투리. 삼베모시 등의 로 만든 것으로 일반 짚신보다 정교한 고급품이다.

1. 개요
2. 소개
2.1. 고대 한국의 짚신
2.2. 일본의 짚신 (와라지)
2.2.1. 일본 짚신
2.3. 슬라브권의 짚신
3. 기타



1. 개요[편집]


한국의 전통 샌들이자 으로 만든 신발. 로 만든 것은 따로 미투리라고 부른다. '짚신도 제 짝이 있다.'는 속담으로 솔로들의 마음에 못을 박은 물건이기도 하다.[1] 짚신벌레라는 명칭은 길쭉한 것이 짚신의 모양과 닮았다 하여 붙었다.

우리말에는 짚신이나 미투리를 만드는 행위를 표현하는 '삼다'라는 동사가 따로 있다. 옛날 소설들에는 '할아버지께서는 집에서 소일거리 삼아 짚신을 삼으셨다.' 같은 문장이 흔히 나왔다.


2. 소개[편집]


볏짚으로 만든 것이 대표적이지만, 사실 볏짚뿐 아니라 왕골이나 부들. 모시, , 면실을 꼬아 만드는 등 짚신의 재료는 다양하다.

이라는 단어가 식물줄기를 뜻하기 때문에 볏짚만이 짚은 아니다. 일례로 부들로 삼으면 부들짚신. 왕골로 삼으면 왕골짚신 등으로 부른다

과거에는 서민들의 대표적인 신발이었다. 부들이나 왕골로 만든 정교한 짚신은 귀족들이 신었다고 한다. 의외로 내구도가 높지만 그래봤자 짚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사용하다 보면 닳아서 못 신는다. 그래서 먼 여행을 떠날 땐 예비 짚신을 챙기기가 상식이었다. 멀리 여행 나가는 사람은 봇짐에 엽전 뭉치처럼 짚신 서른이나 마흔 개쯤 묶어 매다는 식으로 휴대했는데, 가볍고 부피가 작기 때문에 가지고 다니기도 편하다. 그러나 착용감은 영 좋지 않고 특히 겨울이나 비오는 날에는 신기가 참으로 난감했다. 오늘날처럼 잘 정비된 길도 아니었기에 짚신을 신고 오래 걸으면 굉장히 불편하지만 맨발보다는 나으니 신는 수준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장점은 있다. 짚신은 접지력이 매우 좋아서 신으면 빙판 위에서 거의 아이젠을 신은 것과 비슷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

사실 튼튼한 갑피로 발등을 감싸고, 밑창과 중창으로 발바닥과 발가락을 잘 보호해주는 신발을 어렸을 때부터 주로 신는 현대인이 짚신을 신으면 상당히 괴롭다. 짚신만 신고 걸으면 발바닥에 짚으로 만든 얇은 돗자리를 붙이고 걷는 것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구조상의 문제로 충격흡수도 없고 발을 보호할 수도 없다. 자갈밭에서 걷는다면 땅바닥의 요철이 전부 느껴지는 수준이다. 물론 호주인이나 에티오피아인들, 박수무당들처럼 평소에도 맨발로 걸어다니는걸 즐겨해서 발바닥이 단련된 사람들은 그 불편함이 줄어들기는 하겠지만... 스님들이 신던 짚신은 더 상태가 나쁘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인지라 혹시나 길을 걷다가 개미라도 밟아 죽일까 봐 짚신을 일부러 얼기설기 삼아서 신었기 때문에, 벌레들이야 당연히 그 사이로 빠져나가겠지만 발바닥에는 매우 안 좋았다.

조선시대에는 신바닥을 삼을 때 씨줄을 빼서 푹신하게 삼은 짚신[2]도 있는데, 동시기 다른 나라나 고대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방식이다.


2.1. 고대 한국의 짚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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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짚신 유물
백제 짚신 일러스트[3]

궁남지관북리 유적의 배수로와 연못 등에서 뻘 층에 보존된 백제 짚신이 64점이나 발견된 적이 있다. 연구 결과 백제 시대 짚신은 부들로 삼았다. 밑판만 존재하고 끈을 감아 조리처럼 발가락을 고정하던 원시적인 형태이다.[4] 유물 사진에 보이는 끈은 도갱이(뒤축)와 뒤당감잇줄[5] 부분. (참조) 일본 짚신인 와라지(草鞋초리[6])와 형태가 상당히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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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이(異)형토기. 국립경주박물관 소장품 (5세기)
가야 짚신모양토기 (부산 복천동 53호 무덤 출토)

가야신라의 짚신은 백제의 것과는 달리 실제 유물로 전해지는 것은 매우 적으나 대신 죽은 이가 신고 가도록 무덤에 같이 묻었던 부장품인 짚신모양 토기에서 줄을 엮은 방향이나 줄의 모양 등, 신라/가야 짚신의 형태가 상당히 상세히 남아있다. 돌기총의 형태나 높이로 보아 신라나 가야의 짚신이 조선을 위시한 후기형 짚신의 전신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고구려 짚신은 자료가 거의 없고 연구 또한 정체되었다. 동시기 한반도나 중국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7]

한반도와 일본의 고대 짚신은 비슷비슷하긴 해도 국가마다 조금씩 다르다. 기본적으로 삼는 기법이나 방향에서부터 조금씩 차이가 난다. 신라와 가야, 그리고 조선의 짚신은 돌기총[8]이 3~4 cm 정도로 길지만 백제와 일본의 짚신은 매우 짧다. 일본 짚신은 끈을 샌들처럼 발목까지 올려 돌려감는 데 반해 한반도 짚신은 모두 돌기총에서 매듭을 짓는다. 백제, 신라, 가야 짚신의 돌기총은 양 옆으로 3개씩 총 6개, 조선 짚신은 하나씩 총 2개, 와라지는 2개씩 총 4개였다. 백제 짚신의 도갱이는 가늘고 긴 반면 신라 짚신과 와라지의 도갱이는 짧고, 조선 짚신은 길고 두껍다. 일본 짚신은 갱기[9]가 없는 등... 깊이 따져보면 여러 가지가 다르다. 이것이 짚신을 삼는 장인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논문에서는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고 보고 있다.

조리 샌들 형식이던 고대 한국의 짚신이 조선시대와 같은 앞총이 촘촘한 후기형 짚신으로 변화한 과정은 밝혀지지 않았다. 유물들을 토대로 통일신라~고려시대쯤에 바뀌었다고 추정할 수 있지만, 변천과정 역시 유물과 자료가 부족해서 연구는 거의 되지 않았다. 밝혀진 사실이라면 한반도와 중국은 후기형 짚신을 받아들였고, 중국의 몇몇 소수민족들과 일본은 초기형 짚신의 형태를 비교적 많이 간직했다는 것 정도.

2.2. 일본의 짚신 (와라지)[편집]


일본 짚신은 와라지라고 부르는데, 조리나 게다처럼 발가락 사이에 끈을 넣어 묶는 방식이다. 블리치의 사신들이 신는 짚신을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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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했듯이 돌기총은 좌우 2개씩 총 4개이고, 한반도의 짚신과는 달리 갱기가 없고 끈을 교차해서 감아 착용한다. 끈이 발목까지 감겨 올라가는 것이 특징이다. 묶는 법은 정석이 따로 없이 착용자의 취향대로 묶으면 되는 듯하다.

와라지는 백제에서 전래된 것 같다. 참조 밑창에 끈으로 발을 고정시키는 원시적인 신발은 고대 국가에 널리 퍼졌는데, 게다처럼 초창기에는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서 와라지와 유사한 짚신을 신은 듯하다.


2.2.1. 일본 짚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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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편자가 아닌 으로 만든 일종의 짚신 같은 보호장비를 사용했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에서는 말에게 말 짚신만 신겼는데,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에서 말 편자 기술자들을 초빙한 뒤부터 비로소 말 짚신 또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3. 슬라브권의 짚신[편집]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비롯한 동슬라브권에는 라프찌(лапти)라는 일종의 짚신이 쓰였다. 다만 재료는 짚이 아니라 피나무, 자작나무의 속껍질을 주로 썼는데, 동양의 짚신처럼 저렴한 신발의 대명사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널리 쓰였다. 다만 현재 러시아에서는 라프찌를 싸구려 신발을 경멸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짚신 신은 사람이라는 뜻의 라포트닉(лапотник)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 교양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3. 기타[편집]


사극에 등장하는 짚신은 절대로 옛날식이 아니다. 현대인이 짚신을 신으면 너무 불편하기 때문에, 배우보조출연자든 먼저 실내화를 신고 그 위에 버선을 신고 나서야 짚신을 신는다. 안 그러면 발이 못 견딘다. 이 때문에 고무 밑창을 단 연기자용 짚신을 개발했다. 마찬가지로 사극에서 인물들이 현대적인 밑창이 달린 개량형 목화를 신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고대를 다루는 사극에서 제대로 고증되지 않는 소품이다. 조선이나 고려 시대를 다루는 작품에서 앞총이 촘촘한 후기형 짚신이 나오는 것까지는 좋은데, 삼국시대를 다루는 작품에서조차 시대를 초월해서 후기형 짚신을 사용한다. 명백히 유물이 전해지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고대사극 중에서 고증 좋기로는 손에 꼽는 근초고왕대왕의 꿈에서도 고대 짚신은 고증되지 않았다. 물론 맨발이 드러나는 부분이 많은 고대식 짚신은 출연진의 발을 보호할 만한 눈속임을 하기 애매하기도 하고 또한 사람들 눈에 잘 안 들어오는 부분을 고증해봤자(그것도 출연진의 부상과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노력 대비 효율이 영 좋지 못하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10]

국립 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는 궁남지와 관북리 등 백제 유적에서 발굴한 짚신 유물 64점을 토대로 짚신의 형태나 재료, 와라지와의 유사성 비교, 등을 분석하여 2003년에 <백제의 짚신>이라는 보고서를 출간한 적이 있다.

청일전쟁시기, 산둥에 상륙한 일본군이 겨울철에 짚신 신고 행군하다 동상에 걸렸다는 기록이 있는 등 상당히 최근까지 현역이었다.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인 유비는 어릴 적 부친을 잃고서 돗자리와 짚신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 때문인지 숙적인 조조는 유비에게 칠 때 '돗자리나 짚신이나 짜던 촌놈'이라며 뻑하면 디스하였다. 현대식으로 재편되는 2차 창작물에서도 손재주가 좋다, 수공예가 취미다 같은 식으로 종종 언급된다. 청두 유비혜릉 앞에서는 그의 후손이 직접 짚신을 만든다는 말도 있었는데, 실제로는 그가 능 관리자고 짚신 만들기는 마케팅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도전 골든벨 의정부여자고등학교 편에서 골든벨 문제로 출제되었다. 다만 이것이 답이지만 죽장망혜에 관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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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데 사실 짚신은 좌우 구분이 없기 때문에 짝이라고 할 게 없다.[2] 예를 들어 본 문서 상단의 왼쪽 이미지의 짚신이 이렇게 만든 것이다. 잘 보면 신바닥이 복슬복슬하다.[3] <백제의 짚신>논문에서 묘사한 백제 짚신의 모습과 현대에 만든 한국, 일본의 짚신의 형태를 참조하여 그린 상상화이므로 실제 백제 짚신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4] 흔히 아는 조선시대 짚신은 후기형으로 촘촘한 앞총이 발을 전체적으로 감싸준다.[5] 신둘레에서 발을 잡아주는 끈[6] 초리는 짚으로 만든 샌들을 뜻하는 단어로, 일본의 짚으로 만든 조리가 현대에 들어 여름에 신는 '조리' 혹은 '쪼리'라고 부르는 슬리퍼의 형태와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7] 오히려 고구려 고분벽화에 간략하게나마 묘사되는 신발은 갖신이 더 많다. 부여 역시 혁답(革鞜)이라는 갖신을 신었다고 중국 기록에 전한다. 둘 다 수렵문화가 많이 발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8] 당감잇줄을 지지해주는 신날에 달린 기둥.[9] 총을 고정하고 표면을 매끄럽게 정리하기 위해 당감잇줄 겉에 감아주는 끈.[10] 판타지긴 하지만 다른 예를 들어보면, 반지의 제왕에서 호빗족은 톨킨 설정상 신발을 신지 않는다. 때문에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감지네 샘와이즈 역을 했던 배우 숀 오스틴은 물에 들어가는 씬에서 신발이 아닌 호빗발 분장을 하고 들어갔다가 유리 파편에 찔려서 발에 큰 부상을 입은 적이 있다. 짚신도 고중세에는 보기 드물었지만 현대에는 어디나 흔한 유리 파편 등에 전혀 방호력이 없으므로 안전상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