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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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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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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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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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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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삼성
2대




차범근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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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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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 2008
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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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1973 · 1974 · 1975 · 1976 · 1977· 1978
파일:Kicker 로고.svg

1979-80 · 1985-86


차범근의 기타 정보











파일:분데스리가 워드마크.svg
분데스리가 레전드 네트워크 앰버서더

이름
차범근
車範根|Cha Bum-kun

출생
1953년 5월 22일 (70세)
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송산리
(現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179cm[2], 78kg[3]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4]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해설가
주발
오른발(양발)
소속
선수
한국신탁은행 축구단 (1976)
공군 축구단 (1976~1979 / 군 복무)
SV 다름슈타트 (1978~1979)[5]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79~1983)
바이어 04 레버쿠젠 (1983~1989)
감독
현대 호랑이 (1991~1994)
대한민국 대표팀 (1997~1998)
선전 핑안 (1998~1999)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4~2010)
기타
MBC (2001~2003, 2006 / 해설 위원)
SBS (2010~2014 / 해설 위원)
FIFA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2016~2017 / 부위원장)
분데스리가
(2017~ / 레전드 네트워크 엠버서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2018~ / 인터네셔널 브랜드 엠버서더)
국가대표
136경기 58골[6][7] (대한민국 / 1972~1986)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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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연안 차씨
학력
화산초등학교 (졸업)
경신중학교 (졸업)
경신고등학교 (졸업 / 65회)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 학사)
병역
공군 제8전투비행단 병장 제대[1] (병 270기)
종교
개신교(예장통합)[2]
가족
배우자 오은미[3]
장녀 차하나[4]
사위 정병훈
장남 차두리
차남 차세찌
며느리 한채아
서명
파일:차범근서명.png


1. 개요
2. 축구인 경력
2.3. 해설자 경력
2.4. 행정가 경력
2.5. 차범근 축구교실
2.5.1. 차범근 축구교실 고발 논란
2.5.2. 운영 중단
2.5.3. 새로운 출발
3. 플레이 스타일
3.1. 피지컬과 주력을 살린 돌파
3.2. 양발을 활용한 슈팅
3.3. 위협적인 헤더
3.4. 연계 플레이 및 개인기
4. 평가
4.1. 오해와 진실
4.1.1. 1980년대 분데스리가의 위상
4.1.2. 1980년대 UEFA컵의 위상
4.1.3. 포지션 논쟁
4.2. 선수로서의 평가
4.2.1. 축구인들과 전문가들의 평가
4.2.2. 구단과 팬들의 평가
4.2.3. 분데스리가의 평가
4.2.4. 기타 일화
4.3. 감독으로서의 평가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1.2. 개인 수상
5.1.3. 개인 기록
5.1.3.1. 세계
5.1.3.2. 아시아
5.1.3.3. 국가대표
5.1.3.4. 분데스리가
5.1.3.5. 프랑크푸르트
5.1.3.6. 레버쿠젠
5.1.4. 키커 랑리스테
5.1.5. 출전 기록
5.1.5.1. 클럽
5.1.5.2. 국가대표
5.2. 감독
5.2.1. 대회 기록
5.2.2. 개인 수상
5.3. 서훈
6. 미디어 활동
6.1. 방송
6.2. 광고
6.3. 도서
7. 차범근에 대한 언사
8. 여담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축구인.

국내에서 고려대학교, 서울신탁은행 축구단, 공군 축구단에서 활약한 뒤 만 26세의 나이에[8] 당시 분데스리가에 진출하여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바이어 04 레버쿠젠 소속으로 뛰었다.

차범근은 불과 24세의 나이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00경기 출장을 기록했고[9], 국가대표팀 통산 최다 출장 공동 1위(136경기), 최다 득점 1위(58골)를 비롯한 여러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10]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바이어 04 레버쿠젠에서 전성기를 보냈고 두팀에서 UEFA컵[11] 2회 우승 및 DFB 포칼 1회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키커 올해의 팀에 2회 선정되고 분데스리가 역대 외국인 선수 최다골 기록(98골)을 10년간 보유했다.[12]

두팀에서 모두 UEFA컵 우승을 들어올렸으며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에 2회 선정되고[13] 분데스리가 통산 98골로 11년간 외국인 최다 득점 타이틀을 보유하였고,[14] 컵대회를 포함하면 121골을 넣었다. 또한 국가대표 통산 136경기 58골로 한국 남자 국가대표팀 역대 A매치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했다.[15][16]


2. 축구인 경력[편집]


국가대표 136경기 출장, 58골 기록[17], 한국인 선수 최초의 센추리 클럽에 가입, 한국인 남자 축구 선수 중 역대 최다 A매치 득점 기록[18], 세계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24년 139일), 독일 분데스리가 1부 리그에서 11년간[19] 총 308경기 출장(당시 외국인 선수 중 역대 2위),[20] 98골(당시 외국인 선수 중 역대 1위)[21][22] 기록. 참고로 분데스리가 98골 중 페널티 킥 득점은 0골이다.[23][24] DFB-포칼이나 UEFA 컵 기록까지 포함하면 372경기 121골. 차범근은 인터뷰에서 멀티골은 20번이나 해 봤지만, "해트트릭은 한 번도 못해봤다."고 말했다.[25]

1976년, 아시아에서 큰 국제대회이던 박스컵에서 말레이시아[26]를 상대로 7분 남기고 1:4로 뒤진 상황에 차범근이 혼자 세 골을 몰아치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무승부를 만드는 기적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방송국도 그 경기의 테이프가 없다고 했고 차범근도 두 골은 기억이 나지만, 나머지 한 골은 어떻게 넣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박스컵도 그렇지만, 1950년대~80년대 중반 이전의 국대 축구는 방송사에서 비디오 테이프와 필름을 비싸다고 재활용했던것이 당연시 되었기 때문에, 영상자료로는 영영 볼수없는 경기가 대다수이고, 문헌자료들은 영상자료에 비하면 낫지만 자료보존이 철저하지 못해서 차범근의 육체적 전성기인 20대 초반의 활약상은 직접 본 사람 외엔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현역 시절 자료가 부족하다 보니 자연스레 발생한 것이 포지션에 관한 논란이었다. 중앙 공격수였는지 아니면 윙어였는지 논란이 분분하였는데 차범근 본인의 말에 따르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주로 오른쪽 윙어, 분데스리가에서는 최전방 투톱으로 뛰었다고 한다.

또한 현재 유럽에서도 지면 자료들의 인터넷 전산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기도 하였고 유튜브의 활성화로 차범근의 플레이 영상을 몇 개 나마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구단에서 포지션 자체는 투톱 체제의 중앙 공격수로 뛰었지만 라인업 상 그렇게 표현되었을 뿐 현대에서 말하는 세컨드 스트라이커로서 활약한 것을 알 수 있다. 국가대표에서처럼 윙포워드로 출전하기도 했으며 말년에는 미드필더로 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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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된 현역 시절의 모습[27]
독일의 축구 잡지, 키커(Kicker)의 표지 모델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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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 시절
인맥대장, 차붐(Tscha Bum)![28][29]


2.1. 선수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차범근/선수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2.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차범근/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3. 해설자 경력[편집]


1998년의 실패 이후 K리그 감독으로 복귀하기까지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국가대표 감독 이후 국내의 심각한 비난 여론에 의해 도망치듯 중국 프로축구 선전 핑안[30] 감독으로 부임했다.[31][32] 1년 6개월만인 1999년 12월 재계약이 불발되었고 이후로 국내외를 오가며 눈에 띄지 않는 야인 생활을 거듭했다. 하지만 차범근 축구교실만큼은 직접 챙기면서 유소년 육성에 대한 의지만큼은 뜨거웠는데, 2001년 초에 한 어린이가 "우리들이 다치는 걸 걱정해 직접 얼음을 깨고 있는 저 분이 바로 전설적인 축구선수 차범근 감독님이다."라는 글과 차범근의 뒷모습을 Daum의 차범근 팬 카페에 올린 사연도 있다.[33]

그러다 당시 대한축구협회장 정몽준이 1998년 차범근에게 내려진 자격정지 5년에 대해 사면조치를 취하면서 차범근의 국내 활동이 자유로워졌고 신문선, 송재익을 SBS에 빼앗긴 MBC가 2000년 12월부터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34] 2001년 2월 2일 2억원에 MBC 해설 위원으로 계약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해 5월에 개막한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부터 본격적으로 해설을 맡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축구 해설은 여러 분석을 내놓는 신문선과 이를 재치 있는 입담으로 포장하는 송재익 콤비를 내세운 SBS가 대세였고 차범근 본인이 딱히 말을 잘하는 타입이 아니다 보니 허정무를 해설 위원으로 내세운 KBS에 오히려 시청률이 뒤지는 상황까지 있었다.

하지만 차분한 목소리에 또박또박한 말투, 그리고 수십 년간 쌓은 선수 시절 내공 덕에 경기를 한 수 앞 먼저 읽는 해설로 차츰 호평이 많아졌고, 2002년 월드컵 본선 때는 오히려 SBS의 신문선-송재익 콤비를 누르고 MBC가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정타가 된 것이 월드컵 개막 직전인 2002년 5월 26일 프랑스와의 평가전. 이 때도 SBS와 동시 중계로 해설을 했는데 당시 김남일의 태클로 지네딘 지단이 부상을 당한 뒤 허공으로 손을 돌리자 신문선은 판정 불만에 대한 항의하는 거라고 했지만 차범근은 표정을 보고 지단이 부상으로 뛸 수 없다고 해설했으며 벤치에서 얼음찜질을 받고 알약 먹는 장면이 잡히자 신문선-송재익은 영양제를 먹으며 컨디션을 관리한다고 언급했지만 차범근은 "지금 진통제를 먹고 있네요."라는 언급을 했다. 실제로 지단이 이 날 부상으로 인해 본선에서 제대로 뛰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차범근의 해설은 저 멀리서 선수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매의 눈을 가진 예언자급 해설. 이후 신문선의 삽질이 거듭되면서 시청자들도 MBC로 눈길을 돌리고 월드컵 기간 내내 MBC가 일방적인 1위를 달렸고 신문선-송재익 콤비를 야심차게 영입한 SBS는 2위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신문선은 2006년을 끝으로 다시는 메인스트림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2002년 월드컵 해설을 맡을 당시 해설에 대한 조언을 얻고자 자신이 아는 해설자 선배에게 조언을 구한 적이 있는데 다름 아닌 베켄바워이다. 당시 베켄바워는 월드컵이나 주요 대회의 해설자로도 활동을 한 적이 있는데 차범근이 월드컵이라는 큰 대회의 해설을 맡게 되어 부담도 되고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을지 노하우를 묻자 "우리가 말하면 다 맞는 거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베켄바워고 너는 차붐인데 우리가 말하는 게 맞지 뭐가 걱정이냐'는 위엄 넘치는 답변인데 재밌는 건 2002년 월드컵이 유독 이변이 많았던 대회라서 결과 예측을 했다가 많이 틀렸었는지 당시 한국에 체류 중이었던 베켄바워가 차범근을 만났을 때 "왜 우리가 말하면 다 틀리는 거냐?"는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35]

한편 2002년 월드컵 당시 독일 대표팀 감독 루디 푈러와 소소하게 티격태격한 적도 있다. 차범근이 독일과 파라과이의 16강전을 중계하던 중 '오늘 독일은 지금까지의 경기 중 가장 나쁘고 준비도 덜 된 경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당시 중계 멘트를 그대로 옮겨 적자면 "이런 경기는 한강 고수부지 가면 볼 수 있죠?"라고 말했다. 그러자 루디 푈러는 '레버쿠젠에 있을 때 아스피린[36]을 너무 먹은 것 같다'고 맞디스를 했다. 말만 들으면 살벌한 독설 배틀 같지만, 차범근의 선수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사적으로도 매우 친한 사이다. 애당초 저 아스피린 드립은 푈러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루디 푈러 역시 레버쿠젠에서 선수로 뛴 적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냥 친한 친구끼리 틱틱거린 수준. 당시 독일의 국내 여론은 차범근보다 푈러에 대한 비판이 더 강했는데, 그만큼 당시 독일 팀의 경기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푈러와 차범근이 따로 만나서 화해는 했다고. 독일과의 경기를 앞두고 서로 만나 얼싸안으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중계방송 시작때 그대로 나왔다,

2003년까지도 계속해서 MBC 해설을 맡았으나 계약기간이 만료된데다 마침 수원 삼성 감독직 제의가 들어오면서 해설 위원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2006 독일 월드컵 기간에 한해 MBC 해설을 또 맡기로 이면합의가 되어 있었고 여기에 엔트리에서 탈락한 차두리까지 가세하면서 '부자(父子) 해설 위원'이라는 진풍경으로 또 다시 MBC가 시청률 1위를 기록. 다만 당시 감독을 맡은 수원의 성적이 안좋을 때라 중요한 시기에 해설하러 자리를 비우는 것이 팬들에게 좋게 보일리 만무했기에 비난을 받아야했고 차범근은 모 스포츠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 '미안하다'고 답한 바 있다. 다만 후반기 앞두고 이관우와 백지훈을 영입해 반등에 성공했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 SBS 해설 위원으로 배성재 캐스터와 함께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경기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경기를 해설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그의 인기는 여전했으나 브라질 월드컵에선 나이가 들어서 인지 순발력이 좀 느려지고 말을 버벅대는 부분이 많아지고[37] 다른 방송사의 해설 위원들이 선전하면서 그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리는 분위기다.

다만, 전문 해설가가 아니라 방송인으로써도 달변가가 아니기 때문에 해설자로써 한계는 있다. 특히 순발력이 떨어져 머릿속에서 상황은 읽지만 말로 옮겨내지 못해 버퍼링이 걸리기도 한다. 이게 빠른 시간 내에 적당한 말로 옮겨지면 여지없이 명해설이 터지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도 많다. 또한, 특유의 사람 좋은 면 때문에 선수단에게 나쁜 말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 하거나[38] 직접 해결책을 지시하지 않는 해설 스타일은[39]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해설까지 집중할 코어 시청자의 대부분은 공격적이며 직설적인 해설을 더 선호하나 한국에 말주변 좋고 직설적이면서 경기를 읽는 눈까지 갖춘 해설자는 없기 때문에[40] 호불호의 문제다.[41]

축구 중계 시 카메라에 잡힌 축구계 유명 인사들을 잘 소개하지 못하기도 한다. 장지현, 한준희 등이 축구계 인사는 물론 때로는 정재계 인사들마저 귀신 같이 소개하는 반면 차범근은 잘 소개하지 못한다. 요아힘 뢰프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해 버벅거리거나[42] 올리버 비어호프가 카메라에 몇 차례나 잡혔음에도 캐스터와 함께 침묵을 지킨 사례가 있다. 물론 축구 해설자의 본분은 잡학 자랑이나 선수 프로필 읊어주는 게 아니라 경기를 풀어주는 것인만큼 큰 단점은 아니나[43] 어쨌든 중계 카메라가 이들을 잡아주는 건 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스포츠 중계 특성상 멘트가 중간에 끊어지는 걸 시청자들은 매우 어색해하기 때문에 이 점이 축빠들에게 약점으로 지적된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4강전 미네이랑의 비극에서 전반에만 독일이 5:0으로 브라질을 상대로 압도적으로 앞서나가자 남의 일 같지 않다면서 셀프 디스를 시전했다.[44]

독일 대표팀의 중계를 맡으면 중립을 지키다가도 은연 중에 독일 쪽으로 편파 해설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45] 하지만 프로야구의 편파중계 정도의 완전하게 치우친 모습은 당연히 아니고 잘 들어봐야 알아차릴 그런 정도다.[46] 오히려 차범근 본인의 독일에 대한 애정에 비하면 꽤 중립을 잘 지키는 편이라고 봐야 한다. 단, 독일이 2014 브라질 월드컵 토너먼트에서 가장 고전한 16강전 알제리와의 경기에서는 외질이 두 번째 골을 넣자 기쁨을 감추진 못했다.[47]

2014 브라질 월드컵을 마친 후 SBS와 계약이 만료됐고, 재계약하지 않았다. 다만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남자 축구 결승전 때 SBS의 객원 해설로 마이크를 잡은 적은 있다. 계약이 끝난 현재까지도 SBS 직원들과의 친분은 계속 이어가고 있다. 사실상 브라질 월드컵 이후로 해설자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대회부터는 박지성배성재가 월드컵 해설을 담당하고 있다.


2.4. 행정가 경력[편집]


2016년 4월2017년 FIFA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지금껏 축구인 생활을 하면서) 감투를 쓸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말하면서, "앞으로는 감독이나 해설자가 아닌 축구 행정가로서 한국 축구에 기여하겠다."는 꿈을 밝혔다. #


2.5. 차범근 축구교실[편집]


축구인 차범근 최대의 업적을 꼽는다면 '차범근 유·소년 축구 교실'로 대표되는 한국의 축구 유·소년 인재 발굴·육성의 토대를 잡은 것이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1978년 다름슈타트에 도착했을 때부터 독일 축구를 배워서 대한민국 축구계에 크게 기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선수 생활 말년에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선수 은퇴후 1군팀 코치직 제의가 들어왔었으나 일본 아이들이 잔디구장에서 축구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일본인들은 지금 30년을 내다보고 축구 선수를 키우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처음 독일에 왔을 때 생각했던 계획을 이루기 위해 1990년 독일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돌아와 축구교실을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차범근 축구교실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서, 아니 대한민국 스포츠 전 종목을 통틀어 학원 스포츠 밖에서 유·소년 양성을 시도한 최초의 사례이다. 오래 전부터 학원 축구의 폐해를 지적하고 유·소년 축구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많았으나, 이를 실천에 옮긴 이는 차범근이 처음이었다. 차범근 축구교실을 시작할 때는 외부의 지원 없이 차범근이 개인 재산을 사용해야 했지만 2002년 월드컵을 성공리에 마치고 스포츠토토 수익금으로 자금력을 확보한 대한축구협회가 비로소 유·소년 육성 정책을 시작했고, 이들 2002 키즈가 바로 훗날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의 주역이 되었으니 차범근의 선구자적 면모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차범근축구상을 제정해 이동국, 박지성, 기성용 등 축구 꿈나무를 지원하기도 했다.

야구전문기자 박동희가 밝히길, 학원야구 밖에서 운영되는 한국 유소년야구클럽에도 롤모델이 된 것이 차범근의 축구교실이라고 말했다. 이외에 다른 종목에서 운영되는 어린이 클럽의 롤모델이 차범근 축구교실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자신의 많은 재산으로 해외의 시스템을 이식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시에는 사실상 차범근이 유일했기 때문. 차범근 축구교실이 안정적으로 결과를 내면서, 모범선례가 되자 다른 유소년 교실도 투자 및 운영이 가능했던 것인데, 이를 생각하면 차범근의 업적은 한국 유소년 축구를 넘어, 한국 스포츠 전반의 유소년 시스템에 영향을 줬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2021년 3월 서울시의회 회의록에 따르면, 차범근 축구교실은 1997년 차범근 개인 재산으로 축구장 시설을 설치하고 그 조건으로 2005년까지 독점 이용 후, 2005년 서울시에 시설을 기부채납 했다고 한다. 이후 매 3년마다 공개경쟁을 통한 최고가 입찰 방식을 유지했지만 다른 경쟁자가 없어서 2022년 까지는 차범근 축구교실에서 단독입찰로 낙찰받아 운영해왔다.

유·소년 육성과 지도자 교육이라는 부분에, 유럽 축구를 먼저 경험한 차범근이 그 터를 닦았고 이는 한국 축구계의 크나큰 자산이 되었다.

날아라 슛돌이에도 등장했으며 1기 첫 화에 21 대 0으로 대승을 거뒀다. 이강인이 뛰던 3기 슛돌이의 최고의 난적으로 거의 유일한 팀.


2.5.1. 차범근 축구교실 고발 논란[편집]


2016년 차범근 축구교실에서 해고된 코치 노모 씨가 차범근 축구교실에 대한 비리를 폭로해 논란이 되었다. # # MBC 시사매거진 2580의 보도에 따르면 차범근 축구교실은 이촌한강공원 내 축구교육장을 서울시에 기부채납 한 이후 서울시에서 정한 시설 이용 기준보다 높은 수강료를 받아왔던 것으로 나타났으며, 적발 이후에도 시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아디다스와 독점 스폰서 계약을 체결하고 무상으로 제공받은 축구 용품을 수강생들에게 착용을 강제하면서 이를 유상으로 판매한 것, 직원들에게 차범근이 골프를 치고 있는 골프장으로 카드를 가져오게 하거나 차범근의 아들 차세찌의 동원훈련 불참신청서 작성하게 하는 등 개인 용무를 시킨 것, 차범근 축구교실에 채용된 친인척들의 근태 불량 및 개인 운전기사, 가사도우미 등에 대해 법인 돈으로 급여를 지급한 것, 퇴사한 여러 스태프들의 퇴직금이 지급되지 않은 것 등이 방송되었다. 논란에 휩싸인 차범근 축구교실…‘높은 수강료’에 ‘친인척 채용’까지

또한 해당 직원은 "10년 동안 차범근 축구교실에서 일하며 상가 월세 관리부터 잔심부름까지 맡아 왔다. 그런데 부당한 이유로 퇴직금도 못 받고 해고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7월 19일 사단법인 차범근 축구교실 법률대리인인 법무법인 대호(담당변호사 박동균)는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 보도한 것이다. 제보자(노 코치)와 방송국을 상대로 법적 조치를 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보도자료 전문을 올린 기사

이 보도자료에서 축구교실 측의 대리인은 노 코치에게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 아니고, 오히려 노 코치가 차범근 일가의 재산을 일부 횡령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강습료 문제에 대해서는 일부 인정하고 행정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했으며, 축구 용품을 유상으로 판매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법적이나 도의적인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2018년 11월 2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1부(부장판사 박종택)는 차범근 축구교실 전 코치 노모씨가 축구교실과 차범근 등을 상대로 낸 퇴직금 청구 소송에서 "노씨에게 3300여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다만 법원은 노씨가 차범근 가족이 소유한 건물 3곳의 관리를 맡은 것에 대한 보수 1억원을 청구한 것에 대해선 "월 30만원씩 상가관리비 명목으로 지급했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 차범근 축구교실은 노씨를 횡령과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으나, 노씨의 횡령 혐의에 대해서는 "횡령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기각했다. 또한 재판부는 노씨의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노씨의 게시글 내용이 허위라는 점에 대해 원고(축구교실)의 구체적인 주장이나 입증이 없다"며 청구를 기각했으며, 노씨의 주장을 보도한 시사매거진의 방송 내용에 대해서도 "제보 내용이 전체적으로 진실에 해당하고, 공공의 이해에 관련된 사항임이 분명하다"라고 판시했다. 기사 1 기사 2


2.5.2. 운영 중단[편집]


차범근 축구교실은 25년간 품질 높은 교육과 한달(주 1회 1시간)에 6만원이라는 공익적 수준의 강습료로 1400여 명의 회원을 둔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성장했다. 선술했듯이 차범근이 개인 재산으로 설치 운영하다가 기부채납한 시설이라는 점과, 차범근의 명성과 공익적 활동을 고려하여 다른 축구계 인사들의 경쟁입찰 참가는 자제해왔고, 그동안 시설의 감정가의 2배가 넘는 수준의 고액으로 단독입찰해 낙찰받아 운영해왔는데, 2022년에 한 치과의사가 설립한 법인이 4천여 만원 높은 3억 50원으로 낙찰받는 바람에 운영을 중단하게 되었다. 차범근 축구교실, 이촌 축구장 사용 못해 운영중단 낙찰받은 법인은 업력1~2년 정도로 너무 짧은데다가 업종이 교육, 체육, 임대등으로 특징조차 없는것으로 보인다.

차범근 축구교실 측은 1400여 명의 회원을 수용할 대체 부지 등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태여서 운영 중단이 불가피한 상태라고 밝혔다. 한편 새로운 사업자는 인근지역 맘카페 등에 마치 차범근 축구교실을 인수인계받아 운영하게 되었다는 듯한 내용의 홍보글을 작성해 물의를 일으키고 강퇴당한 상태로 알려져 있다. '차범근 축구교실' 문 닫는다…학부모들 "단순 축구교실 아닌데 속상해" 차범근 축구교실은 이를 부인하고, 새로운 업체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담당코치진이나 수업일정 및 수업방식 등을 인수인계한 바 없다고 밝힌 상황이다. #

이후 박문성 해설 위원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상회입찰로 낙찰받은 법인 측은 차범근 축구교실 측에 일방적인 인수인계(심지어 불법이다)를 요구하였고, 거부당한 후 아르바이트 사이트에 축구 강사 모집 글을 올리는 등 아무 준비 없이 상회입찰했다는 정황들이 드러났다고 한다.[48] # 그동안 차범근 축구교실이 감정가의 2배가 넘는 가격을 단독 입찰해 왔는데 첫 입찰 참가에서 감정가의 3배에 해당하는 3억원에 50원을 더 붙여서 입찰을 했다는 것은 기존의 입찰가격에 대한 힌트를 받았다는 의혹을 받기에도 충분하다.

경쟁입찰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라는 말도 간간히 나오지만 축구 관계자나 인사들도 경쟁입찰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와 함께 위에도 나와있듯이 입찰의 목적, 불법 인수인계, 경력,학력 무관의 일반인 직원채용 3개만으로도 충분히 문제삼으라면 삼을수 있다. 법인 또한 차범근 축구교실을 빼앗아간 혹은 없애버린 이라는 꼬리표가 달릴수밖에 없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한다면 보이지 않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데 학부모는 불안감에 아예 다른 곳을 이용하는게 마음 편할것이고 교육 관계자들 또한 뒷말 나오는 걸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입찰받은 법인과는 인연이 없는게 더 좋을수 있다. 현재까지 천만 다행?인건 강습료는 서울시에서 정해놓은 이용조례에 기준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인상이 되는 일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서울시는 운영자, 조직구성과 인력현황, 세부 운영계획을 검토하기로 했고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운영을 할 수 있다고 했으며 1년치 사용료는 선지급해야한다.#

결국 10월 9일, 계약 만료 날짜인 13일을 4일 앞두고 이촌 한강공원에서 ‘굿바이 페스티벌’ 을 진행, 차범근 축구교실은 이촌을 떠나게 되었다. 비가 오는 와중에도 원생 800여명과 코칭스탭들, 차범근과 아들들이 모두 참여해 이촌에서의 마지막을 함께하였다.

차범근 축구교실은 입찰 실패 이후 공백이 생기는 것 때문에 원생들에게 수강료를 환불해주는 등 절차를 밟아왔지만, 이는 운영을 완전히 관두는 것이 아니라며 빠르게 새로운 장소를 찾아 운영을 빠르게 재개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동아일보 기사 전문


2.5.3. 새로운 출발[편집]


2022년 10월 13일, 차범근 축구교실은 위의 서술된 사건으로 인해 25년간 사용했던 이촌축구장을 떠나 용산HDC아이파크몰 내 야외풋살장으로 터전을 이전했음이 알려졌다.# 기존의 회원 1400여 명 모두를 수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 과정에서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2022년 11월 23일, 낙찰받은 사업자가 사업을 포기하면서 낙찰이 취소되었고, 서울시가 이촌 축구장 재입찰 공고를 냈다. 차범근 축구교실측은 복귀를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

결국 2023년 3월 1일부로 차범근 축구교실은 예전 이촌 한강 공원 터로 복귀하였다.

또한 2023년 5월 30일 고흥군에서도 문을 열었다.
[리포트] "차붐처럼 될래요"‥고흥 차범근 축구교실 개강


3. 플레이 스타일[편집]






1980년대 분데스리가에서 차범근과 함께 뛴 루디 푈러에 따르면 좌우 양발로 슛을 쏘았고 헤더, 드리블 등 못하는 게 없었다고 한다. 여기에 아시아 대륙 출신 선수로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무지막지한 속도와 괴물 같은 피지컬을 동시에 갖춘 선수였다.[49] 사기적인 신체 능력을 뒷받침하는 강철같은 체력과 정교하고 빠른 슈팅 능력 또한 이에 버금갈 정도로 뛰어났으며, 치달을 위주로 하는 플레이 스타일에 가려져서 눈에 띄지 않았을 뿐 드리블, 패스, 헤더, 오프 더 볼, 연계, 수비 가담 등 모든 능력치들이 수준급이었다. 한마디로 만능 공격수.

뛰어난 피지컬로 등지는 플레이가 가능하고 강한 슈팅력, 왕성한 활동량, 높은 체공력과 더불어 헤더 슈팅과 연계 능력이 뛰어난 무결점 스트라이커의 대표격이다. 저 당시 차범근과 비슷한 플레이 스타일을 가진 선수는 대표적으로 카를하인츠 루메니게가 있다.[50][51]

활동량도 뛰어나서 밀린다 싶으면 미드필더 진영까지 내려가 공을 따오기도 하는 등, 당시의 전형적인 골게터 스타일 공격수와는 상당히 다른 선수였으며 현대로 따지자면 강력한 피지컬을 갖춘 세컨드 스트라이커[52] 역할을 담당했다. 여기에 부상 빈도도 적은 편이었으며, 전방에서 몸싸움을 구사하고도 신사적인 플레이로도 명망이 높아 현역 전체를 통틀어서 수집한 카드는 옐로카드 단 1장에 불과하다. 이렇듯 경기 투입 안정성까지 덤으로 갖췄으니, 그야말로 현대 완성형 공격수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순수 퍼포먼스와 임팩트로만 봐도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선수임에 틀림없다. 클럽에서는 본인의 이타적인 플레이로 인해 오히려 저평가를 받았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그런 점들을 감안하더라도, 당대 리그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고, 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고의 선수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3.1. 피지컬과 주력을 살린 돌파[편집]


가장 눈에 들어오는 능력은 역시 속도와 경합력이다. 당시 함께 뛰었던 동료나 취재했던 기자들 혹은 경쟁했던 상대편 선수들 등 당시 차범근의 플레이를 증언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의견에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평가가 '굉장히 빨랐다'일 정도로 차범근의 속도는 가히 자타 공인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수비수들을 만나더라도 자신 있게 치고 달리면서 스피드/몸싸움 경합을 거는 편인데, 대부분의 경우 최소 반칙 이상의 성과를 얻어내는 편. 다만 주력 자체는 엄청난 편인데, 그에 반해 민첩성이나 순간속도는 그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최전방에서 오프사이드라인을 깨는 능력보다는 한 단계 아래에서 볼 운반과 치달을 통한 돌파에 훨씬 더 강점이 있다.

기본적인 신체조건은 평균적이나 피지컬이 어마어마한 데다 그 흉기같은 몸에 100m 달리기 11.02초라는 엄청난 주력을 겸비했다. 전통적으로 강한 피지컬적 능력을 자랑하던 분데스리가에서도 강력함을 과시했을 정도로 타고난 피지컬이 대단했다고 한다.[53]

1980년대 당시 경기 관련 독일 언론 기사나 독일 쪽 전문가들이 차범근의 플레이를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wirbelten', 독일어로 소용돌이치다, 선회하다, 어지럽히다라는 뜻인데 문맥상 강력한 피지컬과 빠른 주력을 이용해 경기장을 전방위적으로 휘젓고 다니는 차범근의 모습을 표현하는 의미이다. 조금 의역하면 그야말로 '회오리 친다'는 것이다.

차범근의 돌파 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는 증언이 있는데, 류청에 따르면 그 유명한 차두리의 2015년 우즈베키스탄 전 돌파 장면을 이야기하던 중 심판 운영실장 송기룡이 "차범근은 현역 시절 매 경기 저런 돌파를 3~4번씩 보여줬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3.2. 양발을 활용한 슈팅[편집]


오른발 왼발 가릴 것 없이 양발을 이용한 강력한 슈팅을 찼으며, 적재적소에 기술적인 슈팅으로 허를 찌르는 플레이까지 보였다. 다만 김호의 언급으로는 왼발을 더 잘 썼다고 한다. 허리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슛조차 공 속력이 느리기는커녕 키퍼가 다이빙 하기도 전에 들어가는 골이 많은데, 그렇다고 높이 못 차는 것도 아니라서 그야말로 키퍼 입장에서는 이지선다(...).


3.3. 위협적인 헤더[편집]


체공력을 이용한 강한 헤더 슈팅으로 헤더골의 비중이 상당한데,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 두 구단에서의 첫 골이 모두 헤더골이기도 하다. 몸싸움에 능하다보니 직접적인 헤더 슈팅 외에도 동료의 공격 활로를 만들어주는 역할도 훌륭히 소화했다.


3.4. 연계 플레이 및 개인기[편집]


차범근은 골을 넣지 않아도 높은 평점을 받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골을 넣지 않은 경기에서 평점 1점[54]을 받은 적이 있을 정도이고 커리어에서 받은 81회에 달하는 평점 2점 중 무려 45차례가 무득점 경기일 정도인데, 남아있는 경기 영상을 보더라도 득점과 상관없이 뛰어난 모습을 보여 줬다는 걸 알 수 있다.

우선 득점력 못지 않게 연계 플레이에서 강점을 보였다. 인사이드 패스와 원터치 패스가 뛰어났으며, 크로스도 수준급이었다. 자신이 골을 넣을 수 있는 상황이어도 주변에 동료가 골을 더 잘 넣을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 지체하지 않고 패스하는 이타적인 플레이 스타일을 보이기도 했다.

차범근 하면 흔히 빠른 돌파만을 연상하지만 평균 이상의 테크닉을 가지고 있어 속도로 압도하지 못한 상대를 개인기로 뚫고 가는 경우가 꽤 많다.

공격에만 치중하는 전통적인 스타일의 공격수가 많던 당시로써는 드물게, 전방 압박이나 수비 가담을 통해 상대방의 볼을 차단하거나 인터셉트 후 그대로 상대방 골문까지 치고 들어가는 모습도 곧잘 보여준다.


4. 평가[편집]



4.1. 오해와 진실[편집]


차범근을 평가하기 앞서 인터넷에 떠도는 잘못된 정보 중 1980년대 분데스리가와 UEFA 컵의 위상 및 포지션 관련 내용을 바로잡아 서술한다. 차범근의 선수 시절에 대한 정보는 차범근/선수 경력 참조.


4.1.1. 1980년대 분데스리가의 위상[편집]



차범근을 폄하하는 논리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당시 차범근이 뛰던 분데스리가는 최고의 리그가 아니었고 이탈리아 세리에 A가 최고였다는 것이다. 애초에 그 당시 4대 리그 중 한곳에서 뛰었다는 것 자체만 가지고도 대단한 일이지만[55], 줄 세우며 평가절하하는 이들의 주장에 반박하고자 정확한 정보를 말한다면 분데스리가는 1976년부터 1984년까지 UEFA 리그 랭킹 1위의 리그였다. 차범근이 뛰던 시기인 1979년부터 1989년까지의 분데스리가 UEFA 리그 랭킹은 1-1-1-1-1-1-3-2-3-3-2위에 해당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막강한 자본을 통해 세계의 뛰어난 선수들을 끌어모으던 세리에 A가 UEFA 리그 랭킹 1위를 차지하지만 그래도 유럽 리그 3위안에 드는 최상위 리그였다. 즉 차범근은 동양인의 유럽 출전이 극히 드물던 1980년대에 유럽 최상위 리그 팀에 속해 있는 두 팀에서 주축 선수로 활약한 것이다.


4.1.2. 1980년대 UEFA컵의 위상[편집]


현재 인터넷 상에는 당시 UEFA컵에 대한 과대평가와 과소평가가 동시에 퍼져 있다. 과대평가하는 세력은 UEFA컵에 더 많은 팀이 출전할 수 있었으므로 유러피언 컵보다 더 쳐주는 대륙간 컵이었고 현재의 챔피언스 리그와 같은 별들의 전쟁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반대로 과소평가하는 세력은 UEFA컵이 명목상 3티어 유럽 대항전이었다는 점을 들어 1980년대 UEFA컵의 위상을 2000년대까지의 인터토토 컵이나 현재의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와 동일하게 보기도 한다. 물론 둘 다 틀린 말이다.

우선 가장 큰 오류는 각 대륙컵 대회는 각각 그 의의를 가지기 때문에 이런 비교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현재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은 각 유럽 리그 우승팀들 간의 경쟁 대회, 유로파 리그의 전신인 UEFA컵은 각 유럽 리그 상위팀들의 경쟁 대회, UEFA 컵위너스컵FA컵 대회를 운용하는 유럽 리그의 FA컵 우승 팀들 간의 경쟁 대회이다.[56] 유럽의 각 리그를 대표하는 팀들간의 대회는 그 자체로 가치 있고 그 대회의 우승은 분명히 값진 것이다.

그래도 굳이 위상을 따진다면 현재나 과거나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이 제일이긴 했다. 다만 흥행성 면에서는 UEFA컵이 유러피언컵을 앞지르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진출팀들이 유러피언컵 보다 더 많아 볼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현재와 달리 유러피언컵은 각 리그의 1위 팀만이 진출했고 UEFA컵은 1위와 컵 대회 우승 팀을 제외한 상위 4팀이 출전했다.[57] 간혹 1980년대의 UEFA컵을 현재의 챔피언스 리그와 같다고 하는 의견이 이와 같은 사실에 기인한다. 현재의 유로파 리그보다는 위상이나 진출팀의 이름값이 분명히 높은 대회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20/21 시즌 결과를 바탕으로 현재 4대 리그 출전팀을 따진다면 다음과 같다.

첼시 FC, 토트넘 홋스퍼 FC, 아스날 F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FC 바르셀로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세비야 FC, 레알 소시에다드
SSC 나폴리, 유벤투스 FC, SS 라치오, AS 로마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바이어 04 레버쿠젠, 1. FC 유니온 베를린

파일:72-99 발롱도르 TOP 5 분포도.png
간혹 UEFA 컵이 발롱도르에 영향을 못미친다며 평가절하는 의견도 있는데 역시 잘못된 정보이다. 위 표는 1971/72 시즌부터 컵 위너스컵이 UEFA컵에 통합되기 전 마지막 대회인 1999년까지 발롱도르 5위에 들어간 선수들이 당시 뛰었던 대회를 표시한 것이다. 출처: ITALIA10

원 글에 따르면 선수가 3개의 UEFA 클럽 대항전 중 어느 대회도 참가하지 않았거나 소속팀이 해당 대회에서 조기 탈락한 경우 X 표시하였고 당시 월드컵이나 유로 대회 같은 국가 대항전이 있던 해에는 그 대회에 참가한 선수에 한해 * 표시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국가 대항전 성과에 비해 클럽 대항전 성과가 좋지 않았던 경우에는 회색으로 처리했고 국가대항전에서 잘했으나 UEFA 클럽대항전에서도 좋은 성적을 올린 선수는 원래 색대로 표시했다고 한다.

해당 자료를 보면 UEFA 컵이 유로피언컵과 현격한 위상의 차이가 있었음을 방증하는 동시에 1979년 발롱도르처럼 아예 3개의 유럽 대회에 참가하지 않은 선수들이 Top 5에 든 것을 보면 지금처럼 유럽 클럽 대항전 출전 및 성적이 발롱도르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에도 다소 애매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즉, 과대평가와 과소평가 모두 옳지 못하며 당대의 위상은 그 중간쯤 어딘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1.3. 포지션 논쟁[편집]


사실 차범근의 포지션은 현재로서는 그다지 논쟁거리가 되지 못하지만, 국가대표에서는 윙으로 뛰었다더라 클럽에서는 중앙 공격수였다더라 등 여러 난립하는 내용이 많아서 이에 대해 한동안 혼란이 있었다.

가장 논쟁인 것은 당시 클럽에서 차범근이 어느 포지션으로 뛰었는지인데 중앙 공격수로 스트라이커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부터 중앙 공격수가 아닌 윙 포워드였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유럽 축구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는 데 한계가 있던 과거에 국한된 이야기로 유럽 축구의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진 현재는 차범근의 포지션은 정립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차범근에 관해 잘못된 과거 지식을 가지고 평가절하하거나 혹은 과대평가하며 논쟁이 계속되는 경우가 있어 이를 바로잡고자 정확한 포지션을 고지하고 이에 관련해 몇 가지 정보를 추가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당시 차범근의 주된 포지션은 센터포워드 즉, 중앙 공격수가 맞다. 간혹 윙 포워드로 뛴 적도 있고 말년에 3시즌은 미드필더로 뛰었지만 차범근이 가장 오랜 세월 뛴 포지션은 투톱의 중앙 공격수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중앙 공격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득점에만 전념하는 1970~80년대의 전통적인 공격수와는 달리 차범근은 좌우 중앙 할 것 없이 상대 진영을 활보하는 선수였다. 피지컬과 스피드, 오프더볼로 상대 진영을 돌파하여 헤집으며 공간을 만들었으며 특히 2선까지 내려와 공격의 활로를 만들고 볼을 운반하는 등 현재로 따지면 딥라잉 포워드 즉, 세컨드 스트라이커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각종 경기 기록이나 유튜브의 영상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가 있다.

1980년대 당시 차범근의 포지션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문의한 키커 온라인 편집장 알렉산더 바그너(Alexander Wagner)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박물관장 마티아스 토마(Matthias Thoma)의 답변으로 갈음한다.

매우 빠르고 신사적이었던 선수의 포지션은 센터포워드도 윙어도 아니었습니다. 혼란스럽겠지만 사실입니다. (중략) 차범근은 전술적인 변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분데스리가에서 훌륭히 적응한 공격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중략) 당시 우리는 새로운 유형의 선수들의 등장을 지켜보았고 고전적인 센터 포워드보다 유연하고 기동성 있는 선수들에 열광했습니다. 차범근은 완벽하게 유연하지는 않았지만 전통을 무시하고 서포터 능력을 장착해 공격의 흐름을 통제했습니다.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은 흥미로운 사실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활발히 경기장을 어지럽히며 골라인에 민첩하게 출몰하여 결정지었다는 것입니다. 눈앞에 놓인 승리를 놓치지 않고 결정하던 주인공의 모습은 꼭대기의 가장 위쪽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특별하게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중략) 3-5-2로 전술적 진보가 시작된 80년대 중반에 차붐 역시 진화했고 공격적으로 성숙했습니다. (중략) 이를 성공적으로 받아들인 차범근은 이전과 달리 주요 해결사는 아니었지만 센터서클에서 젊은 선수들을 지휘하며 분데스리가에서 활동한 기간 중 가장 효율적으로 골을 넣었습니다. (이하 생략)

알렉산더 바그너 키커 온라인 편집장, 차범근 관련 질문에 대한 답변 중 포지션 부분 발췌[58]


위대한 독수리 중 한 명[59]

에 관해 말하게 되어 기쁩니다. 차붐은 내가 알기로 절대적으로 중앙 공격수가 맞습니다. 매우 빠르고 신체적으로 강력했던 레전드는 가운데와 측면을 가리지 않고 적을 파괴했으며 우리는 이 선수 한 명이 상대의 공간 전체를 어지럽히는 모습을 즐겼고 환호했습니다.

마티아스 토마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박물관장


2010~20년대 시점에서 보면 "중앙 공격수가 3경기당 1골은 좀 적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1970~80년대 분데스리가는 경기당 평균득점이 3.5골에 육박하는 매우 공격적인 축구가 펼쳐지던 리그였음을 감안하면 차범근의 득점력에 의문부호가 붙을 수도 있다.[60][61] 그러나 차범근은 패널티 박스 안에서 냅다 골만 때려박던 포지션이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많은 골을 몰아넣는 스타일의 선수가 아닐 뿐 득점력이 결여된 스트라이커라고는 절대 볼 수 없는 수준이다.


4.2. 선수로서의 평가[편집]



4.2.1. 축구인들과 전문가들의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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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회자하기로는 로타어 마테우스를 포함한 독일인들이 차범근을 처음 봤을 때 크고 튼실한 다리 근육 덕에 허벅지 밖에 안 보였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차범근 자신도 전성기 시절 허벅지를 보면 감동을 받는다고 하니 피지컬은 자타공인으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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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rtbild지에서 선정한 79/80 시즌 분데스리가 베스트 11. 3톱에 같이 선정된 다른 두명은 해당년도 발롱도르 수상자 케빈 키건과 해당년도 발롱도르 2위이자 그 이듬해 발롱도르 수상자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그리고 이 둘은 각각 2회의 발롱도르 수상자들이다.

1980년 12월 당시 UNICEF가 후원한 FC 바르셀로나 vs 세계 올스타 경기에서 세계 올스타팀에 선정되어 후반전 교체 출전하였다. 베스트 11을 보면 요한 크루이프, 미셸 플라티니,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올레흐 블로힌 등 화려한 선수진으로 구성되었다. 일본의 레전드 가마모토 쿠니시게 또한 이 경기에서 교체로 출전하였다. 경기 결과는 바르셀로나의 3:2 승리. 참고로 이 경기 이후 세계 올스타팀을 지휘한 당시 서독 국가대표팀 감독 유프 데어발은 '공격수 가운데 차범근이 가장 멋진 플레이를 보였다'며 '차범근이 서독 선수였다면 국가대표로 뽑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1979/80 시즌부터 마지막 시즌인 1988/89 시즌까지 총 10시즌 동안의 각 시즌 별 Kicker 선정 공격수 부문 분데스리가 평점 순위는 다음과 같다.[62][63]

1979/80 시즌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2) 1980 발롱도르

2. 케빈 키건(2.42) 1979 발롱도르

3. 차범근(2.45)

4. 지그프리트 헬트(2.52)

5. 라이너 게예(2.67)


1980/81 시즌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24) 1981 발롱도르

2. 프리드헬름 푼켈(2.74)

3. 만프레드 벅스뮬러(2.79)

4. 베른트 홀첸바인(2.81)

5. 게오르그 볼케르트(2.83)

6. 차범근(2.85)


1981/82 시즌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4)

2. 뤼디거 벤첼(2.53)

3. 라스 바스트룹(2.59)

4. 로날드 보르허스(2.64)

5. 만프레드 벅스뮬러(2.82)

5. 우베 라인데르스(2.82)

7. 차범근(2.87)

19. 호르스트 흐루베슈(3.13) 리그 득점왕


1982/83 시즌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2)

1. 루디 푈러(2.32) 리그 득점왕

3. 차범근(2.52)

4. 위르겐 밀렙스키(2.63)

5. 라이너 게예(2.84)


1983/84 시즌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1) 리그 득점왕

2. 루디 펠러(2.55)

3. 클라우스 알로프스(2.58)

4. 크리스티안 슈라이어(2.79)

5. 프랑크 밀(2.84)

6. 차범근(2.91)


1984/85 시즌

1. 클라우스 알로프스(2.81) 리그 득점왕

1. 프리드헬름 푼켈(2.81)

3. 클라우스 피셔(2.82)

4. 루드비히 쾨글(2.96)

5. 카를 알괴버(2.97)

15. 차범근(3.31)


1985/86 시즌

1. 카를 알괴버(2.73)

2. 만프레드 벅스뮬러(2.85)

2. 허버트 바스(2.85)

4. 크리스티안 슈라이어(3.00)

5. 토마스 알로프스(3.13)

6. 위르겐 베그만(3.15)

7. 차범근(3.18)

20. 스테판 쿤츠(3.39) 리그 득점왕


1986/87 시즌

1. 우베 란(2.50) 리그 득점왕

2. 미로스와프 오콘스키(2.72)

3. 프랑크 밀(2.74)

4. 클라우스 알로프스(2.88)

5. 브워지미에시 스몰라레크(3.03)

18. 차범근(3.38)


1987/88 시즌

1. 위르겐 클린스만(2.74) 리그 득점왕

2. 프랑크 밀(2.90)

3. 카를 알괴버(3.00)

3. 크리스티안 슈라이어(3.00)

5. 마크 휴즈(3.18)

6. 차범근(3.21)


1988/89 시즌

1. 카를 알괴버(2.66)

2. 루트비히 쾨글(2.93)

3. 헬무트 헤르만(3.04)

4. 차범근(3.11)

5. 위르겐 클린스만(3.12)

9. 토마스 알로프스(3.36) 리그 득점왕


1980년대 상반기 79/80 시즌부터 83/84 시즌까지 5시즌의 키커지 공격수 부문 평균 평점[64]

1.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2.306

2. 차범근 2.72

3. 루디 푈러 2.727 - 3시즌 평균[65]

4. 라이너 게예 2.886

5. 클라우스 알로프스 2.966

6. 카를 알괴버 2.9925 - 4시즌 평균[66]

7. 만프레드 벅스뮐러 3.004

8. 프라이드헬름 푼켈 3.012

8. 위르겐 밀렙스키 3.012

10. 프랑크 밀 3.083 - 3시즌 평균[67]


1980년대 하반기 84/85 시즌부터 88/89 시즌까지 5시즌의 키커지 공격수 부문 평균 평점

1. 카를 알괴버 2.90

2. 프랑크 밀 3.078

3. 클라우스 알로프스 3.133 - 3시즌 평균[68]

4. 프라이드헬름 푼켈 3.226

5. 위르겐 클린스만 3.21

6. 차범근 3.238

6. 루트비히 쾨글 3.238

8. 클라우스 피셔 3.335 - 4시즌 평균[69]

9. 허버트 바스 3.338

10. 우베 란 3.35


80년대 79/80 시즌부터 88/89 시즌까지 10시즌의 키커지 공격수 부문 평균 평점[70]

1. 카를 알괴버 2.946 - 9시즌 평균[71]

2. 차범근 2.979

3. 클라우스 알로프스 3.05 - 8시즌 평균[72]

4. 라이너 게예 3.066 - 7시즌 평균[73]

5. 프랑크 밀 3.08 - 8시즌 평균[74]

6. 프라이드헬름 푼켈 3.119

7. 만프레드 벅스뮐러 3.195 - 9시즌 평균[75]

8. 허버트 바스 3.22 - 7시즌 평균[76]

9. 에발트 리넨 3.266 - 8시즌 평균[77]

10. 토마스 알로프스 3.303 - 9시즌 평균[78]

말 그대로 1980년대 분데스리가의 정상급 공격수로서 차범근의 위상과 현역 시절 독일 현지 전문가들에게 어느 정도로 평가받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포인트.[79] 특히 리그 평점의 경우 명단에 공격형 미드필더로 분류되던 선수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선수들을 제외하고 포워드만 놓고 순위를 매긴다면 시즌 별 차범근의 순위는 더욱 올라간다. 위 표를 볼 때 참고할 사항은 독일에서의 축구 평점은 낮을 수록 좋다. 고등학교 내신 등급을 생각하면 쉬운데, 1점을 받으면 최상급 활약을 했다는 평가를 들은 것이고 2점 또한 단순히 골만 넣는다고 받을 수 있는 점수가 아니었다. 3점 역시 현재 무난한 경기력에 대한 평점으로 매겨지던 것과 달리 한 경기 기준 보통 good 정도로 받아 들여졌는데 멀티골을 기록하고도 3점을 받은 선수들이 있을 정도였다.[80]

현재는 경기 평점에 소수점이 추가되어 평가되지만 당시에는 소수점 점수도 없었을 뿐더러 득점왕을 차지한 선수라도 시즌 평점 3점대를 받을 정도로 점수가 매우 까다롭게 매겨지던 시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시즌 평점을 상위 점수로 유지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시즌 평점 1점대는 현재 레전드라 불리는 선수들조차 받기 어려웠던 점수대로 1980년대를 통틀어 단 두 명의 선수만 평점 1점대를 받았으며[81] 당시 점수가 유독 박하던 공격수 중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82] 시즌 평점 2점대 역시 공격수가 받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점수였는데, 당시 득점 왕을 차지하거나 상위 득점 순위를 차지한 선수 혹은 이름값 높은 선수들조차 전체 커리어에서 1~3회 정도만 시즌 평점 2점대를 기록했으며, 2점대는커녕 3점대 초반만 받더라도 상위급 공격수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런 박한 평가 속에서도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다섯 시즌 연속 시즌 평점 2점대를 기록했으며 이렇게 5연속 평점 2점대를 받은 공격수는 1980년대를 통틀어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차범근 단 둘뿐이다.


파일:79-80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png


파일:85-86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png

특히 키커가 선정한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에 무려 '36회'나 선정되었는데 이는 분데스리가에서 뛴 역대 아시아 선수 중 독보적인 1위 기록이다. 또한 과거 키커는 주간 베스트 11 횟수로 시즌 베스트 11를 선정했기 때문에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11에도 두 차례 선정되었다.[83] (1979/80, 1985/86)

79/80 전반기: WK-1(외국인)

79/80 후반기: IK-5(외국인)

80/81 전반기: K-4(외국인)

80/81 후반기: K-7(외국인)

81/82 전반기: K-7(외국인)

81/82 후반기: K-6(외국인)

82/83 전반기: IK-2(외국인)

82/83 후반기: K-2(외국인)

83/84 전반기: K-3(외국인)

83/84 후반기: K-5(외국인)

84/85 전반기: B(외국인)

84/85 후반기: B(외국인)

85/86 전반기: IK-2(외국인)

85/86 후반기: IK-5(외국인)

86/87 전반기: X

86/87 후반기: B(외국인)

87/88 전반기: B(외국인)

87/88 후반기: K-12(외국인)

88/89 전반기: X

88/89 후반기: K-8(수비형 미드필더)

다음은 차범근의 키커 랑리스테. 평점과는 별개로 키커가 선정하는 포지션별 선수 랭킹이다. 여기서 차범근의 등급은 WK(월드클래스) 1회, IK(인터내셔널 클래스) 4회, K(리그에서 경쟁력 있는 수준) 9회, B(주목할 만한 수준) 4회로 선정되었다.

키커 랑리스테는 평가 기준이 상당히 까다롭기로 유명한데 평가를 받는 것 자체도 어렵다. 특히 가장 높은 등급인 WK(월드클래스)는 세계에서 손꼽힐 만한 활약이나 실력을 보여준 선수에게 주는 등급으로 한 시즌에 한 명도 선정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가장 평가 기준이 높은 등급이다. 차범근은 이 등급을 데뷔 시즌에 바로 받았는데, 심지어 리그와 국가대표 모두에서 활약해야지만 WK 등급 심사를 받을 조건이 된다는 기존의 키커의 기조에 예외를 둘 정도였다. 당시 차범근은 국가대표 경기를 뛰지 않았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WK 등급을 준것이다.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인 IK(인터내셔널 클래스) 역시 세계적 수준의 뛰어난 선수를 말하며 이 분류에만 들어가도 이미 리그의 톱클래스 선수라 할 수 있다. K는 독일 내(분데스리가+DFB포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국가 대표로 거론될 만한 선수들에 해당하며, B는 기복이 있지만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준 평균 이상의 선수들이 받는다. 모든 등급이 활약이 동반되어야 받을 수 있는 등급으로, 앞서 말했듯 랑리스테 등급 자체를 못 받는 선수들도 허다하다. 물론 랑리스테가 선수들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이라 할 수는 없지만 당대 분데스리가에서 차범근의 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84]

랑리스테 등급 옆에 붙은 숫자는 등급과 별개로 전체 선수들 중 해당 선수의 활약 순위를 뜻하는데 (예를 들어 80/81 전반기 K-4는 전반기에 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낼 정도의 활약을 했으며, 전체 외국인 선수 중 4위로 평가한다는 뜻) 이는 전 포지션을 통틀어 매긴 순위이고[85], 공격수만 놓고 본다면 차범근은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하기 전인 1985/86 시즌까지 외국인 공격수 중 1위 8회, 2위 1회, 3위 3회를 기록했다.

2010년 골닷컴 인터내셔널이 선정한 '분데스리가 용병 TOP10'에서 3위에 선정되었다. 2위는 아트사커의 일원이자 세계 최고의 윙백 중 한명이었던 비셴테 리사라수, 1위는 1977년 덴마크인으론 유일하게 발롱도르를 받은 작은 거인 알란 시몬센. 알란 시몬센의 경우 축구 선수들이 역사상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뽑는 라우드럽을 제치고 덴마크 최고의 선수로 뽑힌 선수다. 그리고 바이에른 뮌헨의 레전드인 지오반니 에우베르가 4위로 평가 받았다.[86]

요약하자면 분데스리가에서 선수로 활동할 당시에는 가히 리그 최고 수준의 용병으로 평가받았고 세월이 흐르고 뛰어난 용병들이 늘어난 현재 시점에의 평가는 살짝 떨어졌을지언정 여전히 분데스리가 역사의 톱급 용병이자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는 분데스리가의 레전드 선수라고 할 수 있다.


4.2.2. 구단과 팬들의 평가[편집]


파일:2003 분데스리가 40주년 키커 구독자 역대 센터포워드 투표.png
[참고] 2003년 분데스리가 40주년을 맞이하여 키커에서 독자들을 대상으로 각 포지션 별 역대 분데스리가 선수 랭킹을 투표하여 베스트 11을 선정했는데, 2003년 5월 26일 키커지에 수록된 중앙 공격수 포지션 순위에서 차범근이 9위에 올랐다. 차범근이 은퇴한지 14년이 흐른 시점이었고 독일 축구 팬들이 투표했음에도 동양인 선수가 분데스리가 역대 중앙 공격수 순위에 오른 것을 보면[87] 독일 현지 축구팬들에게 차범근이란 이름이 얼마나 각인되었는지 알 수 있으며 한편으론 차범근의 활약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는 결과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점은 함께 순위에 든 선수들의 이름인데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한 게르트 뮐러를 시작으로 우베 젤러, 클라우스 피셔, 울프 키르스텐, 스테판 샤퓌자, 지오반니 에우베르, 호르스트 흐루베슈. 클라우스 알로프스, 카를하인츠 리들레, 디터 뮐러 등 하나같이 분데스리가 및 독일 축구사에 한 획을 그은 레전드 선수들이다.

참고로 중앙 공격수 목록에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루디 푈러, 위르겐 클린스만 등이 없는 이유는 각각 쓰리톱 중 좌우 공격수 목록 후보에 올랐기 때문이고 루메니게의 경우 다음 호에 발표된 위 이미지에 물음표로 나와있는 왼쪽 공격수 위치에 1위로 뽑혔다.

대한민국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역사를 통틀어 봐도 흔치 않은 대우를 받기도 했는데 바로 '한글 전광판'이다. 차범근이 맹활약하자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는 홈 경기장 발트슈타디온에 한글이 표기되는 새로운 전광판을 설치했고 이로 인해 홈경기에서 스타팅 멤버를 소개하거나 차범근이 골을 넣을 때마다 전광판에 차범근의 이름이 한글로 명시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로마자로 'BUM KUN CHA' 혹은 'CHA BUM'이라 먼저 뜬 뒤 한글로 '차범근'이라는 글자가 등장했으며 구단 선수들 중 유일하게 차범근에게만 적용되었다. 단순 1회 성 이벤트가 아닌 차범근이 구단을 떠날 때까지 유지되었는데 단 한 선수만을 위해 그 선수의 이름을 그 선수의 언어로 띄워주는 일은 분데스리가뿐 아니라 세계 축구 리그에서도 극히 이례적인 것으로 선수 시절 차범근의 위상을 느낄 수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독일 현지에서의 차범근의 위상을 느낄 수 있는 2014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SBS에서 기획한 차범근 다큐멘터리. 국내 환경이 열악했던 시절에 독일에 진출하여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88]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낸 성적인 만큼 정말 대단한 것.[89] 국내에선 '갈색폭격기', 독일에선 '차붐'이라 불리며 유명세를 탔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시 독일인들은 이 조그만[90] 동양인 축구 선수에게 세 번이나 놀랐는데, 하나는 축구를 너무 잘해서, 또 하나는 Korea University 출신이라서[91] 마지막으로 대학교 출신인데 영어를 전혀 못해서라고 한다.


프랑크푸르트 지하철 '빌리-브란트-플라츠'역에 '프랑크푸르트의 기둥'(Säulen der Eintracht)이라고 불리는 12개의 기둥이 존재하는데, 각 기둥에는 2013년에 선정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역대 베스트 11을 지칭하는 '아인트라흐트 레겐덴 11'(Eintracht Legenden 11)과 감독의 사진이 새겨져 있다.[92] 차범근 역시 이 레전드 11에 선정되었기 때문에 역사 기둥에 차범근의 현역 시절 사진이 새겨져 있다.

또한 프랑크푸르트 홈구장인 도이체 방크 파르크에도 차범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데 구장의 지하 주차장에는 구단 역대 베스트 11이 벽화로 그려져 있으며 79/80 시즌 UEFA컵 우승 멤버, 80/81 시즌 DFB-포칼 우승 멤버의 벽화가 새겨져있다.

2015년에는 구단에서 공식적으로 발간하는 Adlerträger에 실린[93] 프랑크푸르트 드림팀 27인의[94] 삽화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해당 드림팀은 팬 투표를 통해 역대 프랑크푸르트 선수 및 감독들로 풀 스쿼드를 구성한 것이었는데 여기에도 어김없이 차범근이 선정된 것이다.

파일: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국제 브랜드 홍보대사 6인.png
2018년에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국제 브랜드 홍보대사 6인에 위촉되었다.(Eintracht unveil six international brand ambassadors) 이외에도 프랑크푸르트 구단 관련 각종 행사에 초청되는 등 현재까지도 여전히 레전드 대우를 받는다.[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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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어 04 레버쿠젠 역시 차범근을 레전드로 대우한다. 2004년 레버쿠젠 구단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팬 투표를 통해 선정한 레버쿠젠 세기의 팀(Bayer 04-Elf des Jahrhunderts) 18인에 선정되었으며[96] 애초에 차범근이 들어 올린 UEFA컵 자체가 레버쿠젠 구단 자체적으로 각별한 트로피로 여겨지기 때문에 2013년 UEFA컵 우승 25주년 기념 행사에 우승 멤버로서 초청을 하기도 했다.[97] 2019년에는 분데스리가 승격 40주년을 기념하여[98] 40인의 구단 역대 올스타를 뽑았는데[99] 그중 한 명이 차범근으로, 40주년 기념 책자에는 차범근의 영입을 '최고의 영입 중 하나'라고 표현하며 레버쿠젠 홈 경기장 바이아레나 기둥에 당당히 벽화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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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바이어 04 레버쿠젠 모두 은퇴한지 30년이 넘은 차범근의 생일을 공식 SNS를 통해 축하해 주는 등 아직까지 각 구단의 레전드로 예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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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문제로 단 한 경기만을 뛰고 계약을 해지해야 했던 SV 다름슈타트 98에서조차 차범근을 기억하고 예우한다. 2017년 7월 21일 2017/18 시즌을 앞둔 다름슈타트의 출정식에 초대되었는데 출정식이 끝난 후 다름슈타트 회장 뤼디거 프리취는 차범근과의 만남에서 "전설과 마주하게 돼 큰 영광이다. 차붐이 다름슈타트에서 뛴 사실을 구단은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인사말을 하기도 했다.# 또한 그곳의 팬들에게 무수한 사인 요청을 받았는데 그중에는 1978년 다름슈타트 소속으로 치룬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첫 경기인 보훔전을 직접 관람한 팬들도 있었다.

프랑크푸르트나 레버쿠젠과 달리 단 한 경기만 출전했을 뿐인데 구단의 시즌 출정식에 정식으로 초대할 뿐만 아니라 구단의 회장이 직접 만나러와 인사를 나누는 모습은 굉장히 이례적이면서도 새삼 차범근의 대단함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파일:갤스도프 살해 위협 관련 기사.png
1980/81시즌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뛰던 시절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상대팀의 겔스도프에게 등 뒤에서 고의성이 짙은 육탄공격을 받아 척추에 금이 가는 심한 부상을 입은 적이 있다. 이 때, 프랑크푸르트 팬들은 난리가 나서 레버쿠젠까지 가서 겔스도프에게 살해 위협 소동까지 벌였다. 프랑크푸르트팀은 겔스도프를 고소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차범근의 동의를 구했으나 차범근은 고소를 취하하고 그를 용서했다고 한다. 차범근이 고소를 취하한 소식이 신문에 나자, 시민들이 감동을 받아 어린아이부터 할머니까지 마구 면회 신청이 오고, 병실에 꽃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한다. 그런데 기존에 선수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부상으로 진단 받았으나 차범근은 놀라운 회복력을 보이며 한 달만에 경기장에 복귀했다. 그리고 레버쿠젠으로 이적했을 때 겔스도프와 재회하는데, 그 이후 겔스도프는 타 팀 선수의 거친 수비로부터 차범근을 지켜주게 된다. 이후 겔스도프와는 절친한 사이로 지내는 모양이다. 이 사건 이후 분데스리가는 엄격하게 파울을 제재하는 분위기로 변하게 된다. 여담으로 이 사건은 거친 파울 이후 살해 협박을 받은 선수들을 주제로 한 독일 다큐멘터리에서도 소개되었다.

대한민국의 축덕들 사이에서는 최근의 선수로 비유하자면 세비야의 레전드 프레데리크 카누테라는 반응이 많다. 카누테 또한 유로파 리그를 두 차례 우승했고, 개인 수상으론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으며, 클럽 통산 559경기 215골의 준수한 득점력을 가진 만만치 않은 선수다.


4.2.3. 분데스리가의 평가[편집]


파일:분데스리가 레전드 엠버서더.png
2017년 분데스리가에서 공식 선정한 분데스리가 레전드 네트워크 앰버서더 9인에 위촉되었다. 이에 따라 분데스리가 레전드 투어의 일환으로 '분데스리가 레전드 투어 in 코리아'가 2017년 11월 2일부터 4일까지 진행되었으며 분데스리가 우승 트로피인 마이스터샬레가 아시아 최초로 공개되기도 하였다.

이후 2019년 11인, 2021년 17인으로 2년 주기로 앰버서더 인원이 추가되어 발표되고 있는데, 차범근은 초창기 멤버로서 지속적으로 앰버서더에 포함되어 활동 중이다.


4.2.4. 기타 일화[편집]


독일에서의 현재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분데스리가 2008-09 시즌 바이어 레버쿠젠과 에네르기 코트부스와의 경기를 차범근이 독일에 가서 관람한 적이 있었다. 차범근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부인과 같이 경기를 관람했기에 들어갈 때는 사람들이 못 알아봤었으나 전광판의 카메라가 딱 비추자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쳤고, 경기를 진행하던 레버쿠젠과 코트부스의 선수들도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다가 상당히 놀랐다고 한다. 심지어 파트리크 헬메스와 슈테판 키슬링, 카어슈텐 라멜로프같은 선수들은 직접 차범근에게 찾아가서 사인을 요청하고 사진 찍기를 요청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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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차범근이 첼시 FC에 수원 감독 자격으로 방문했을 때, 레버쿠젠 출신인 미하엘 발락[100]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얘기한 것도 유명한 얘기. 한때 귀화 요청도 있었는데 거절했다는 루머까지 있었을 정도.[1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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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19일 수원 삼성 블루윙즈첼시 FC의 친선전을 앞두고 기자회견에서 주제 무리뉴는 세계적인 명장의 위치에 오른 비결을 묻는 질문에 "나는 옆에 있는 차범근 감독처럼 훌륭한 선수 시절을 보내지는 못했지만 대신 지도자가 되려는 열정이 컸고 그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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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18일 수원 삼성첼시 FC의 월드시리즈 오브풋볼 경기가 끝난 이후 차범근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주제 무리뉴 당시 첼시 감독.# 어 그래 무리뉴 왔구나

분데스리가 11시즌과 A매치 135경기를 포함한 선수 생활 동안 퇴장 0회, 경고 1회를 기록한 페어 플레이어기도 했는데 현재보다 거친 파울이 잦았던 1980년대의 과격한 축구에서 저러한 태도로 경기에 임했다는 것도 존경스러운 부분. 유일한 경고는 슈투트가르트 원정 경기때 독일 국대이자 당대의 명수비수 칼 하인츠 푀르스터를 상대로 기록한 것인데, 차범근의 술회로는 자신을 10번이나 거칠게 넘어뜨렸는데도 경고를 받지 않고 되려 푀르스터에게 태클을 하자마자 역으로 경고를 받았다고 회상한다.

독일 대표팀 감독 요아힘 뢰프는 선수 시절 차범근과 같이 선수 생활을 했는데, 주전에서 밀려 항상 서브 멤버였다. 차범근이 2006년 독일 월드컵 독일 경기 중계 당시, 당시 수석코치[104] 요아힘 뢰프가 카메라 화면에 잡혔다. 그러자 차범근이, "아, 저 코치가 예전에 저랑 팀 동료였는데...이름이..." 그러자 옆에 있던 김성주가 "요아힘 뢰프 코치입니다."라고 하자 차범근이 "아, 맞습니다. 선수 시절 제 동료였었죠. 좋은 선수에서 이제는 좋은 지도자가 되었군요."[105]라고 말했다. 그러자 캐스터가 다시 묻는다. "선수 시절 요아힘 뢰프는 어땠나요?"라고 묻자, 차범근은 시크하게 "제 교체 선수였습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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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일 월드컵 조 추첨 행사 당시, 차범근이 추첨자가 되지 못하자 여기저기서 말이 많았다. 특히 독일에서는 "차붐이 죽은 게 아닌가?"라고 의심했을 정도. 그도 그럴 것이 바로 다음 월드컵인 2006년 독일 월드컵 준비 위원회에서 각국을 상징하는 현수막을 거리에 설치했는데 한국을 소개하는 현수막에 차범근을 넣어 놨을 정도로 한국=차범근의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도 이 정도였으니 축구협회에 대한 국내 비판 여론은 어마어마했다.[106] 더군다나 차범근 대신 뽑힌 추첨자가 축구와 관련 없는 여배우였으니...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해설을 하던 차범근이 독일과 파라과이 전을 중계하던 중 '오늘 독일은 지금까지의 경기 중 가장 나쁘고 준비도 덜 된 경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107] 당시, 독일 감독 루디 푈러가 이 말을 듣고 '레버쿠젠에 있을 때 아스피린을 너무 먹은 게 아니냐?'[108]며 농담을 섞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루디 푈러 본인도 또한 바이어 레버쿠젠 출신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화를 낸 건 아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들은 독일 시민들은 '어떻게 감히 차붐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고 오히려 자국 대표팀 감독인 루디 푈러를 깠는데, 너 따위가 차범근에게 실례되는 말을 하다니라는 뉘앙스라기보다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말을 했기 때문에 농담이어도 정도껏 해야지라고 까인 측면이 크다. 거기에 더해, 독일 국민들도 차범근과 똑같이 독일의 예선전 경기력에 대해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루디 푈러는 차범근에게 개인적으로 사과를 전했다고 하며 차범근도 훈련장에 찾아가 화해했다고 한다. 당시 뉴스 소개 영상. 참고로 루디 푈러는 로타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과 함께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서독을 우승시킨 최고의 스타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차두리에게는 푈러 아저씨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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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남아공 월드컵 당시 아르센 벵거가 차범근에게 엄지를 지켜드는 장면이 찍히기도 했다. 그리고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 중계가 끝난 후 나오는 길에 또다시 아르센 벵거가 축하 인사(?)를 했다고 한다. 아마 독일이 우승 차지하자 독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차범근에게 축하 인사를 한 듯싶다. 2022년도에도 독일 vs. 일본전에서 VIP석에 바로 옆에 앉아서 경기를 관전했는데 차범근에게 웃으면서 말을 거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다. #

요아힘 뢰프와 같이 따봉을 선보였다.

은퇴 직전 레버쿠젠 감독을 한 리누스 미헬스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리누스 미헬스는 바로 네덜란드 토탈 풋볼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세계적인 명장이다. 차두리에게는 리누스 할아버지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2014년 1월 대한민국미국과의 친선 경기 전 당시 미국 대표팀 감독 위르겐 클린스만이 SBS 해설 위원으로 온 차범근을 알아보고 다가와 포옹과 환담을 나누는 장면이 찍히기도 하였다.#

현역으로 뛸 당시 독일의 시인인 에크하르트 헨샤인트[109]가 차범근에게 헌정하는 시가 있을 정도니 그의 독일에서의 평가는 말하면 입이 아픈 수준이다.
헨샤인트의 차범근 찬가
[ 펼치기 · 접기 ]

“Hymne auf Bum Kun Cha”

Schön ist, Mutter Natur, deiner Erfindung Pracht,

Die den großen Gedanken vermochte, den

Knaben zu träumen, zu denken - und dann auch zu

Bilden mit den schnellen, beseelten, jauchzenden

Füßen des Jünglings: Flink, flitzend,

Flirrend und flackernd - nicht lange fackelnd,

Doch feuernd und feiernd; den fühlenden Herzen

Frankfurts zur Freude.

Bum Kun Cha! Freund aus dem Osten! Fremdling bist

Du nicht länger - nicht bitt'res Los ist Exil

Dir! Heimat, die zweite, du fandst sie.

Wunderbar ist die Gunst denn des Gottes des

Fußballs. Zwar niemand weiß, wann und von wannen

Er schenket nach Puskas und Pele und Kempes den

Neuen Erwählten - nie doch und nimmer vergißt

Er sein hoffendes Volk. Über Indien hinaus

Und den Ganges spähet sein

forschender Blick, ins ferneste Land, da

Seit Alters Männermut blühet und hoher Sinn.

Tapf'res Korea! Du schenktest uns Cha!

Festlicher klinge mein Saitenspiel! Denn lang

Lieb ich dich, Cha, schon, drei Monde -

Drei Monde schon fällt dein verjüngendes

Licht auf die scheinbar gealterte Eintracht. Wir

Sahen dich erstmals, Lieblicher, gegen Stuttgart,

- und das Herz war bezaubert, verzaubert bald

Gar. Ach! Wie du da Förster, den Holzer,

Versetztest und Martin, den Rammler, so daß selbst

Sie dein Lob dann sangen - wie du dich

Schlängeltest durch die Abwehr - um endlich,

Endlich, kurz nach der Halbzeit, hoch in die

Lüfte dich reckend, die Flanke von Borchers

Nahmst mit der Stirn, der klugen, das

Leder versenktest im rechtesten Toreck - es war

Wie ein Herzkrampf, ein schöner, in Freude und

Ahnendem Jubel in eins.

Am Abendhimmel blühte ein Frühling auf, und

Sein Name war Cha. Die Eintracht aber, jahrlang

Von Klippe

Zu Klippe

Geworfen, glühte mit dir, o mein Trauter, zu

Neuschönem Glanze. Aus dem Schlaf des

Dornröschens erwachte die alte, die beinah

Vergeß'ne Primadonna sehr rasch. Vergessen das Alter

Grabowskis, vergessen der Streit mit dem Trainer.

O neues heilig' Herz der Mannschaft! Uns zur

Erhabenen Lust stürmst du, Schönster, so viel ich

Sah, seither, wie der Vogel des Waldes über die

Wipfel fliegt, schwingst du, Zierer, leichter und

Mühlos und sonder Gewalt dem Tore dich zu, dem

Beschützten - Östling unter Deutschen,

Und ihnen dennoch verwandt in der Seele,

Nah auch in Tordrang und Technik und

Teilung des Raumes in all seiner

Tiefe . . .

Kenntnisreicher Künstler am schwarweißen Balle!

Der Mann aus Korea allein hat die Präzision deines

Abspiels. Trocken schlägst du die Pässe, den

Kurzpaß sowie auch den raumgreifenden Vetter, den

Steilpaß. Nicht fremd ist dir der

Fallrückzieher, wir sahen's. Du zeigtest, daß

Auch in Asia, dem fernen, bekannt ist der Trick

Mit dem kunstreichen Haken - doch mehr noch

Erstaunen den Gegner die nicht-orthodoxen, die

Tricks, die im Lande noch unbekannt. Freilich,

Nie ähneln sie je doch der Tücke des Panthers,

Nie schielet Verschlagenheit Asiens durch -

Fair play ist Bum Kun Chas Religion!

Ach, abermals weiden die Augen auf dir! Hurtig

Treibst du das Leder nach links, kühner umkurvst

Du den grätschenden Stopper, zaubernden Fußes

Entläßt du den Lib'ro in Scham. Leichthin,

Euphorion erinnernd, vergleichbar auch durchaus

Der zarten Gazelle, dribbelst du torwärts und

Spannst doch den Fußnerv alljetzt schon zur Bombe -

Denn kaum hinkt die Macht deines Schusses der

Pracht nach Bernd Nickels, genannt "Dr. Hammer":

Dem du, so liest man, längst Brücken der

Freundschaft gebaut hast, auch menschlich . . .

Herzschöner Mann! Flutlichtumschwärmt auf den

Flügeln der Flanke, jetzt plötzlich der rechten,

Füllhorn der Technik, Fülle des Seins!

Samtschwarzen Seraphkopfs sehr schönen Scheins!

Seht nur den Doppelpaß jetzo mit Nachtweih und

"Holz"! Tripelpaß ewiger Klarheit!

Genius des Ostens! Sel'ges Korea!

Ein Flankengott jener Abramczik? Da lachen die

Gütter des alten Olymp! Sie lachen Schorsch

Volkerts und

Lächeln ob jenem, der, unrhythmisch seltsam,

Rummenigge sich nennt! Wer kennt Okudera? Cha

Aber - ob er nun "Cha Bum Kun" heißt, so wie die

"Frankfurter Rundschau" es will; oder doch

"Bum Kun Cha", wie die FAZ ihn besingt; oder

"Tscha Bum", wie "Bild" ihn begrüßte - dich,

Cha, kennt Deutschland, kennt Asien, die Welt so und so - -

Ew'ges Korea!

Im Winde klirret die Fahne zum Eckstoß. Gefahrstufe

Eins. Anläuft Cha Bum, herrlich die Flank' in die

Fluten der Zeit! Schon steht Cha Bum wieder nah

Dem Elfmeter, lauert des Zuspiels, hilft

Hinten aus. Schneisen schlägt er in Spielfeldmitte,

Schleusen öffnet sein schneller Fuß: Sammelnd der

Gegenwart hohes Vergang'nes, einend die Künste

Grabowskis mit denen des Pfaff, Kressens gedenkend

Und eingedenk Sztanis. Fußball berückend - und

Rührend selbst Toni, den treuedlen Zeugwart, der

Dir, Cha, im Air-Bus von Braunschweig nach

Frankfurt die Wange gar küßte; so stand's in der "Rundschau" . . .

Geh' unter, HSV! Trunken dämmerte die

Seele selbst dir (3 : 2)!

Ja, in den Ozean all deiner Tricks will ich mich

Stürzen, Bum, sturztrunken einfallen laut in die

Chöre des Jubels, Sohn einer fußballträumenden

Mutter. Anbeten will ich - gleich dir, der du

Betest vor Spielbeginn und auch während des

Kampfs "ständig vertieft bist im Gebet", wie

Wieder die "Rundschau" weiß. Anbeten will ich,

Singen dein Lob all mein Lebtag und

Endlich, wenn's gut geht, warte nur balde,

Berückt in Verzückung unendlicher Schöne vergeh'n - - -

Nur, Bum, daß du, folgt man einem Bericht in

der FAZ, nach deiner Aktiven-Laufbahn Deutsche

Predigend zu Gott bekehren willst, das, Bum,

Muß ja wohl nicht sein.

이하는 위 시의 일부 번역본이다. 전체의 번역은 이곳에 있다.

"차범근 찬가"

태고적부터

남성다움과 고결함이

찬란했던 곳.

용맹스런 한국이여

그대가 차붐을 우리에게 보냈도다

환희의 음악이여 더 크게 울려라.

차붐. 자네를 오랫동안 사랑하리

바다와 같은 당신의 발재간속으로

나는 빠져들고 싶다

관중들의 우레 같은 함성 속에서도

당신의 이름은 울려 퍼진다

축구를 태몽으로 잉태된 아들이여

나는 그대를 찬미하리라

내 평생 동안

그대를 칭송하는 노래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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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프랑크푸르트 동물원에 차범근의 이름을 딴 호랑이가 있었다. '범근'이라는 이름의 새끼 수마트라호랑이인데, 당시 서독 교민회장을 통해 한국을 상징하는 동물이 호랑이라는 이야기를[110] 들은 프랑크푸르트 구단 측에서 시에서 운영하는 프랑크푸르트 동물원과 협업을 맺고 진행한 이벤트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차붐' 혹은 '갈색 폭격기' 다음으로 '아시아에서 온 호랑이'란 별칭이 서독 언론 기사에 많이 애용되기도 하였다.

차범근의 피지컬적인 능력에 관해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노르베르트 나흐바이(Norbert Nachtweih)[111]의 이야기에 따르면 차범근은 구단 선수들 중 메디신 볼 훈련을 가장 오래 견딘 선수였다고 한다. 사실 말이 메디신 볼 훈련이지 현재와 달리[112] 그저 메디신 볼을 들고 하프라인을 왕복하며 뛰는 단순한 훈련이었는데 문제는 그 강도가 극악이라는 것.

당시의 메디신 볼 훈련은 총 3단계로 이뤄져 있었는데 1단계는 10kg 무게의 메디신 볼을[113] 양손에 하나씩 든 채로 하프라인을 따라 왕복 3차례 뛰기, 2단계는 양손에 메디신 볼을 들고 한쪽 발로 메디신 볼을 드리블하며 출발하여 돌아올 때는 반대 발로 드리블해 오는 식으로 3차례 왕복, 3단계는 볼 없이 3차례 왕복 뛰기로 이뤄진 훈련이었다. 이 3단계를 1세트로 취급하여 10세트를 기본 사이클로 진행하였다고 한다.[114]

사진에서 차범근 뒤로 주저앉아 있는[115] 프랑크푸르트 선수들만 봐도 대충 느껴지지만 극악의 훈련 중 하나였기 때문에 선수들 대부분이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며 훈련을 하거나 중도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차범근은 항상 마지막까지 쉬지 않고 훈련을 마무리했을 뿐 아니라 정식 훈련이 끝나고도 메디신 볼 훈련을 포함한 추가 개인 훈련을 했다고 한다.

사실 이것은 차범근에게 박혀있던 한국식 마인드 때문이기도 했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정식 훈련 외에 남아서 훈련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응당해야 할 덕목처럼 여겨졌던 시절이었고 차범근 역시 그런 시스템에서 수년을 생활하다 온 것이기 때문에 한국에서처럼 추가 훈련을 한 것일 뿐이었다. 이런 차범근의 성실함에 대해 독일에서도 칭찬을 했지만 대한민국보다 축구 수준이 높았던 만큼 적절한 훈련량과 휴식 역시 중요하단 걸 고지시키며 계획된 수준 이상의 트레이닝은 자제시켰다.[116] 당시 프랑크푸르트 감독 부크만은 이런 차범근을 만류하기 위해 오버 트레이닝을 할 경우 1천 마르크(현재 기준 약 137만 원 상당)의 벌금을 부과하겠다고 할 정도였는데 당시 취재를 온 한국 특파원에게 "한국 사람은 모두 저렇게 다부지냐"고 묻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에 차붐을 상대해야 했던 팀의 팬들한테도 차붐이 얼마나 인상에 강하게 남았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0여년 전에 한 축구팬이 알싸에 레버쿠젠에 가서 차범근을 아느냐는 질문을 했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질문을 받은 상대가 젊은 팬이어서 잘 모른다라는 대답을 했는데, 그 옆에 앉아있던 나이 지긋한 샬케04팬이 "어떻게 레버쿠젠 팬이라는 녀석이 차붐을 모를 수가 있느냐"라고 말하며 젊은 레버쿠젠 팬에게 차붐에 대한 강의를 한 적 있었다고 증언한 적이 있었다.


4.3. 감독으로서의 평가[편집]


차범근은 독일에서 은퇴한 후 체계적인 지도자 수업을 받고 코치 자격증을 따 왔는데, 이는 당시 한국 축구계에서 몹시 희귀한 케이스였다. 물론 외국에서도 얼렁뚱땅 자격증만 따서 감독하는 얼치기 감독들은 얼마든지 있다. 핵심은 제도권 스쿨을 거쳤느냐 하는 점이다. 차범근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라이선스를 따오면서 지도자가 되기 위한 선진적인 모델을 보여줬고, 차범근 이후 코칭 방법을 몰라 외국 감독이 하는 걸 어깨 너머로 훔쳐 배우고, 그저 가오 잡기만 하던 기존의 지도 관행은 개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감독으로서의 업적은 공과가 크게 갈린다. 가장 먼저 지적할 부분은 세계 축구의 유행과 발전상에 뒤처졌다는 점이다.[117] 차범근의 축구 철학이 1970년대 분데스리가 스타일을 숭상하기 때문에, 감독을 맡은 수원 삼성도 이 영향을 크게 받았다. 재임기간 동안 트로피는 따줬기 때문에 간과하기 쉽지만, 사실 이 시기 수원 팀 자체는 내부적으로 곪아가고 있었다.

차범근 해임 이후 K리그의 빅5 추세를 본다면 귀네슈-빙가다-최용수로 이어지는 무공해 서울, 김정남-김호곤으로 이어지는 철퇴 울산, 최강희가 구축한 닥공 전북, 파리아스-황선홍으로 이어지는 스틸타카 포항은 모두 고유한 팀 컬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수원은 무전술 뻥축구라는 조롱을 길게 받았다. 과거 김호 시절의 수원발레리 니폼니시부천 SK와 더불어 리그 최고의 미드필더를 운용하며 포백 시스템과 존 디펜스 도입 등 선진 축구로 팬들의 찬사를 샀던 시절을 떠올린다면 명백한 퇴보다.

또한 당시 수원은 레알 수원으로 불릴만큼 모기업의 막강한 재력으로 감독이 원하는 만큼 선수들을 영입하게 해줬기 때문에 소위 선수빨, 돈빨이라는 소리도 들어야 했다. 이렇게 큰돈을 써가며 원하는 선수들을 매시즌마다 영입해줬음에도 성적이 이를 따라가지 못한 시즌이 많았기에 재임 기간동안 이에 대한 비판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 ACL을 병행하는 시즌은 성적이 죽을 쒔다. 수원의 최초이자 유일한 두자릿수 순위 기록은 전부 차범근때 나온 것이고 10위를 기록한 두번의 시즌 모두 ACL을 병행한 시즌이다. ACL에서도 성적을 전혀 내지 못했다. 거기에 팀 성적이 죽을 쓰던 와중에 월드컵 해설한다며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한 비판도 받았다.

차범근 재임 시절 유스팀이 만들어지긴 했으나 이는 프로축구연맹의 지시사항이었기 때문이고 차범근이 퇴임하는 2010년에 첫 유스팀 배출 선수 민상기, 주재현이 입단했으나 이들의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프로팀, 대표팀 감독으로 상당히 앞서가는 면모를 보인 것도 있다.

  • 첫째, 국가대표팀에서 처음으로 4백 수비를 시도했다. 1990년대 중반 K리그에서는 김호 감독과 조광래 코치[118]가 이끄는 수원 삼성발레리 니폼니시부천 유공 등이 4백을 시도했지만 아직 한국 축구계는 내려앉은 스위퍼가 자리잡는 3백이 주류였다. 특히 대표팀에서 3백을 놓기 어려웠던 것은 '홍명보' 때문이다. 홍명보는 3백에 최적화된 선수로, 4백 시스템의 센터백으론 대단히 수준 이하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때문에 히딩크도 부임 초기 4백을 실험하다가 결국 3백으로 돌아갔으며, 결국 한국 국대에 4백이 정착된 건 홍명보가 은퇴한 이후이다.[119] 이는 단순히 수비수의 숫자나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포메이션 전체의 압축 정도를 좌우한다.

  • 둘째, 일찌감치 체력 집중 트레이닝을 강조했다.

  • 셋째, 선·후배 관계는 중요하지만 경기장에서는 형&선배 호칭을 빼라 했고, 기자회견 시간을 정해놓고 언론의 무차별 인터뷰를 차단하는 등 여러모로 서구형에 가까운 팀 운영을 보였다.

  • 넷째, 대표팀 감독으로 지원 파트를 중요시해서 비디오 감독관[120]을 포함한 대규모 지원 스탭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잘 살펴보면 위의 4가지 모두 차범근 이전부터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감독들이 일찌감치 지적한 문제들이다. 다만 국내 축구인들이 한국 실정을 모르는 외국인의 헛소리 정도로 치부해 버린 것이 문제였다. 예를 들어 K리그 대우의 비츠케이 베르탈란나 올림픽팀의 비쇼베츠는 항상 피지컬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체력에서 기술과 정신력이 나온다고 이야기했다. 비디오 감독관을 포함한 대규모 지원 스탭도 모두 대한축구협회에서 예산 낭비라는 이유로 거부해버렸다.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여 거스 히딩크가 대표팀 감독이 부임하며, 위의 사항 등이 개선되었고 그것은 4강이라는 성적으로 증명되었다. 즉, 비디오 감독관, 피지컬 트레이닝, 평등한 선·후배 관계 등 히딩크의 성공 요인으로 꼽히던 요소들 대부분이 차범근이 먼저 이야기한 것인데, 2002년 전까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이다. 다시 말해, 2002년 이전까지 한국 축구계가 그만큼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이야기다.

다만 당시에는 이런 공적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성적 부진에만 초점이 맞춰져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평가가 부정적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대회 도중 경질은 너무 가혹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인데 당시에도 분노와 좌절에 휩싸여 원색적인 비난을 하던 국내 언론 및 축구 협회와는 달리 해외의 평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특히 차범근과 분데스리가를 함께 뛴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의 경우 차범근의 경질 소식에 "축구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는 차범근 같은 인물을 경질시킨 것은 한국 축구가 아직 개발도상국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강한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5. 기록[편집]



5.1. 선수[편집]



5.1.1. 대회 기록[편집]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72~1986)
    •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78[121]
    • 메르데카컵: 1972, 1975, 1977, 1978


5.1.2. 개인 수상[편집]


명확한 출처가 없거나 날조된 정보들은 제외한다.[제외내용]

  • KFA 베스트 XI: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122]
  • KFA 최우수 선수: 1973 #
  • KFA 명예의 전당: 2005 #
  •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최우수 선수: 1976 춘계 #
  • 키커 올해의 팀: 1979-80, 1985-86 ##
  • 분데스리가 40주년 키커 분데스리가 역대 센터 포워드 9위: 2003[123]
  • 빌트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1979-80 #
  • 슈테른 세계 4대 상승 인물: 1979 #
  • UNICEF 세계 올스타: 1980 ##
  • 분데스리가 페어플레이상: 1980 # #
  • 메이어 80년대 가장 위대한 선수: 1980 #
  • 일본 일레븐 세계 100인의 축구스타: 1984 #
  • 아벤트포스트 올해의 선수: 1986[124] #
  • 옹즈 몽디알 88명의 월드스타: 1987-88 #
  • 킥AIDS88 세계 올스타: 1988 # #
  • 동독 드레스덴 재건 세계 올스타: 1990[125] # #
  • 스포츠라이브 분데스리가 역대 최고 용병: 1997 #
  • 독일 축구 역사가 협회 20세기 최고 아시아 선수: 1998 #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역대 베스트 XI: 2013 #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역대 Top 10 Goals: 2014 #
  • 바이어 04 레버쿠젠 창단 100주년 세기의 팀: 2004 # #[126]
  •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진출 40주년 올스타 40인: 2019 # #
  • 마스터카드 20세기 아시아/오세아니아 베스트 XI: 1998 #
  • 월드 사커 20세기 세계 축구를 움직인 100인: 1999 # #
  • MBC 한국갤럽 한국 축구 역대 베스트 XI: 2002 #
  • 골닷컴 분데스리가 역대 외국인 선수 3위: 2010 #
  • 베스트일레븐 한국 축구 역대 베스트 XI: 2010[127] #
  • AFC 황금 공로상: 2010 #
  • ESPN 아시아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 2015 #
  • 대한민국 스포츠영웅 명예의 전당: 2017 #
  • IFFHS 레전드: 2016 #
  • IFFHS 아시아 세기의 선수: 1999 #
  • IFFHS 세기의 선수 60위: 2000 #
  • IFFHS 20세기 아시아팀: 2021 #
  • IFFHS 올타임 아시아 드림팀: 2021 #
  • 골닷컴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드림팀 11: 2022 #


5.1.3. 개인 기록[편집]



5.1.3.1. 세계[편집]



5.1.3.2. 아시아[편집]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랑리스테 WK(월드클래스)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랑리스테 IK(인터내셔널클래스)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랑리스테 K(리그 내 경쟁력 있는)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300경기 출전(88/89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5시즌 연속 리그 두자리수 득점(85/86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7시즌 연속 시즌 두자리수 득점(85/86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리그 10 득점 달성(79/80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데뷔 시즌 리그 10 득점 달성(79/80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리그 3경기 연속 득점(79/80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리그 4경기 연속 득점(83/84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키커 주간 MVP(Spieler des Tages)(79/80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79/80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분데스리가 페어플레이 상(80/81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리그 종합 평점 2점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5시즌 연속 리그 종합 평점 2점(83/84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초 리그 공격포인트 100포인트 돌파(88/89 시즌)[128]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통산 리그 최다 득점: 98골(88/89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한 시즌 리그 최다 득점: 17골(85/86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통산 리그 최다 출전: 308경기(88/89 시즌)[129]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리그 최다 공격포인트: 103개[130]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키커 주간 베스트 11(Elf des Tages): 36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키커 주간 MVP(Spieler des Tages): 6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멀티골: 20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리그 선발 출전: 306경기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리그 풀타임(무교체) 출전: 274경기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전경기 출전: 2시즌(83/84, 85/86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키커 올해의 팀: 2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랑리스테: 18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랑리스테 WK: 1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랑리스테 IK: 4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랑리스테 K: 9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최다 리그 종합 평점 2점: 5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리그 최고령 득점: 만 36세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한 시즌 최다 리그 연속 출전: 34경기(83/84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한 시즌 최다 리그 선발 출전: 34경기(83/84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한 시즌 최다 리그 풀타임(무교체) 출전: 32경기(83/84 시즌)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한 시즌 리그 최고 평점: 2.45
  •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랑리스테 최고 평점: 2.12
  • DFB-포칼 아시아 선수 최초 결승골(80/81시즌 vs 카이저슬라우테른)
  • DFB-포칼 아시아 선수 최다 멀티골: 3회
  • DFB-포칼 아시아 선수 한 시즌 최다 득점: 6골
  • UEFA컵 아시아 선수 최초 우승(79/80 시즌)
  • UEFA컵 아시아 선수 최초 결승 출전(79/80 시즌)
  • UEFA컵 아시아 선수 최초 결승 득점(87/88 시즌)
  • UEFA컵 아시아 선수 최초 2회 우승(79/80, 87/88 시즌)
  • UEFA컵 아시아 선수 최다 우승: 2회(79/80, 87/88 시즌)


5.1.3.3. 국가대표[편집]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출전: 136경기[131]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득점: 58골[132][133]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최초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최연소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5.1.3.4. 분데스리가[편집]

  • 분데스리가 300경기 이상 출전한 최초의 비유럽 선수
  • 분데스리가 외국인 득점 1위(88/89 시즌)[134]


5.1.3.5. 프랑크푸르트[편집]

  • 구단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최초의 비유럽 선수
  • 구단 역사상 역대 10번째 외국인 선수
  • 구단 역사상 최초의 UEFA컵 우승 선수
  • 구단 역사상 최초의 UEFA컵 우승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최초의 UEFA컵 우승 외국인 선수
  • 구단 역사상 최초의 UEFA컵 결승 출전 선수
  • 구단 역사상 50골을 돌파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분데스리가 100경기를 돌파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분데스리가 100경기를 돌파한 3번째 외국인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분데스리가 10골 이상을 기록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분데스리가 10골 이상을 기록한 역대 9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팀내 득점 1위를 기록한 역대 3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팀내 득점 1위를 기록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분데스리가 3경기 연속골을 기록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분데스리가 3경기 연속골을 기록한 역대 5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분데스리가 3경기 연속골을 기록한 역대 14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한시즌 분데스리가 10골 이상을 기록한 역대 13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분데스리가 역대 득점 8위


5.1.3.6. 레버쿠젠[편집]

  • 구단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최초의 비유럽 선수
  • 구단 역사상 역대 3번째 외국인 선수
  • 구단 역사상 최초의 UEFA컵 우승 선수
  • 구단 역사상 최초의 UEFA컵 우승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최초의 UEFA컵 우승 외국인 선수
  • 구단 역사상 UEFA컵 결승전에서 득점한 3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60골을 돌파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분데스리가 100경기를 돌파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분데스리가 150경기를 돌파한 최초의 외국인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분데스리가 10골 이상을 기록한 역대 3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분데스리가 10골 이상을 기록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분데스리가 4연속 골을 기록한 최초의 선수
  •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분데스리가 4연속 골을 기록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
  • 구단 역사상 분데스리가 4연속 골을 기록한 역대 2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한 시즌 분데스리가 득점 10골 이상을 기록한 역대 3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3시즌 연속 분데스리가 두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역대 3번째 선수
  • 구단 역사상 분데스리가 한 시즌 최다 골: 17골(85/86 시즌)[135]
  • 구단 역사상 분데스리가 역대 득점 6위


5.1.4. 키커 랑리스테[편집]


시즌(전)
클럽
포지션
WK
IK
K
B
시즌(후)
클럽
포지션
WK
IK
K
B
1978-79
다름슈타트
X




1978-79
다름슈타트
X




1979-80
프랑크푸르트
외국인 선수
WK-1



1979-80
프랑크푸르트
외국인 선수

IK-5


1980-81
프랑크푸르트
외국인 선수


K-4

1980-81
프랑크푸르트
외국인 선수


K-7

1981-82
프랑크푸르트
외국인 선수


K-7

1981-82
프랑크푸르트
외국인 선수


K-6

1982-83
프랑크푸르트
외국인 선수

IK-2


1982-83
프랑크푸르트
외국인 선수


K-2

1983-84
레버쿠젠
외국인 선수


K-3

1983-84
레버쿠젠
외국인 선수


K-5

1984-85
레버쿠젠
외국인 선수



B
1984-85
레버쿠젠
외국인 선수



B
1985-86
레버쿠젠
외국인 선수

IK-2


1985-86
레버쿠젠
외국인 선수

IK-5


1986-87
레버쿠젠
X




1986-87
레버쿠젠
외국인 선수



B
1987-88
레버쿠젠
외국인 선수



B
1987-88
레버쿠젠
외국인 선수


K-12

1988-89
레버쿠젠
X




1987-88
레버쿠젠
CDM[136]


K-8

차범근의 키커 랑리스테에서 WK(월드클래스) 1회, IK(인터내셔널 클래스) 4회, K(리그에서 경쟁력 있는 수준) 9회, B(주목할 만한 수준) 4회를 받았다.


5.1.5. 출전 기록[편집]



5.1.5.1. 클럽[편집]

시즌
클럽
소속 리그
리그
DFB-포칼
UEFA 컵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78-79
다름슈타트 98
분데스리가
1
0
-
-
-
-
1979-80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분데스리가
31
12
4
0
11
3
1980-81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분데스리가
27
8
6
6
5
2
1981-82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분데스리가
31
11
1
0
6
1
1982-83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분데스리가
33
15
1
0
-
-
1983-84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34
12
1
0
-
-
1984-85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29
10
3
4
-
-
1985-86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34
17
4
2
-
-
1986-87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33
6
2
1
3
2
1987-88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25
4
0
0
10
2
1988-89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30
3
5
0
2
0
합계
11시즌
308
98
27
13
37
10
프로 통산
리그 308경기 98골 / 총합 372경기 121골[137]


5.1.5.2. 국가대표[편집]

  • 1972-1978/1986년[138][139]
연도
출전

1972
23
6
1973
17
8
1974
13
2
1975
18
9
1976
20
13
1977
26
15
1978
16
5
1986
3
0
종합
136
58


5.2. 감독[편집]



5.2.1. 대회 기록[편집]




5.2.2. 개인 수상[편집]


  • AFC 올해의 감독: 1997
  • AFC 이달의 감독: 1997년 2월ㆍ5월ㆍ9월
  • K리그 올해의 감독: 2004, 2008
  • FA컵 최우수 감독: 2009


5.3. 서훈[편집]


  • 체육훈장 기린장: 1975
  • 체육훈장 백마장: 1979
  • 독일 공로훈장 공로십자장: 2019[140]


6. 미디어 활동[편집]



6.1. 방송[편집]


  • 1978년 KBS - 황금의 다리[141]
  • 1978년 WDR 서독 방송국 - 특집 아시아에서 온 황색의 공격수[142]
  • 1980년 서독 헤센 방송국 - 와일드차징에 멍드는 갈색의 진주[143]
  • 1980년 서독 헤센 방송국 - 차범근 부상 특집 토크쇼[144]
  • 1980년 네덜란드 국영TV - 분데스리가의 신성 차범근[145]
  • 1980년 MBC - 특집 차범근의 생활
  • 1983년 서독 공영방송 1TV - 특집 스포츠쇼 100만 마르크의 차범근[146]
  • 2006년 MBC - 독일 월드컵 특집 독일의 코레아너, 차붐
  • 2014년 SBS - 브라질 월드컵 특집 두리아빠, 축구바보 그리고 전설
  • 2021년 JTBC - 축구로 하나되다 - 팀코리아

※ 신문이나 뉴스 매체 등에서 검색 혹은 확인 가능한 목록만 작성한 것으로 더 존재할 수 있으며, 선수 시절과 은퇴 후 차범근을 특집으로 다루거나 고정으로 출연한 방송 외에 예능에서 게스트로 출연한 것은 제외하였다.


선수 생활 당시에는 한국의 경우 보통 차범근의 경기 실황을 가끔씩 특집 형식으로 녹화 방송해주거나 독일 생활을 다룬 다큐를 방송했다. 놀라운 건 독일에서의 방송인데 당시 차범근의 부상을 특집으로 다룬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차범근이라는 선수를 단독으로 다룬 특집 방송이 상당히 많이 방송되었다. 작게는 지역 TV 방송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독일 메이저 TV 방송국에서도 방영을 하였고 심지어 다른 나라의 방송국에서도 방영을 하였다. 현재도 매우 드문 일이지만 동양인 선수가 거의 없던 시절의 1980년대를 생각한다면 놀라운 일이다.

은퇴 후에는 워낙 이룬 업적들이 대단하다보니 월드컵 같은 국제 대회를 맞아 제작되는 특집 다큐가 주를 이룬다.


6.2. 광고[편집]



※ 신문이나 뉴스 매체 등에서 검색 혹은 확인 가능한 목록만 작성한 것으로 더 존재할 수 있다.


차범근의 광고 출연은 선수 시절 때부터 이어져 온다. 1980년대 당시 세계 유수의 기업에서 한창 스타플레이어들을 광고에 내세우던 시절인 만큼 서독에서도 많은 축구 선수들이 광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47] 차범근 역시 시즌이 끝난 후 한국에서 광고를 찍었는데 분데스리가 진출 전 1천만 원이었던 광고료가[148] 1980년에 4800만원까지 치솟았다.[149] 당시 국내 최정상급 배우 최불암의 광고료가 800만 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다. 특히 1986년의 한국 베링거인겔하임[150]의 차범근의 광고료는 6천만원에 이르는데 당시 국내에서 최정상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만기의 광고료가 3500만원이었다.[151] 이때의 광고가 연이 되었는지 한국 베링거인겔하임은 2015년부터 차범근 축구 교실에 3년간 3억 6천만 원을 후원하기도 하였다.

선수 시절 이후에도 꾸준히 광고 출연을 이어갔는데, 진중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델로 출연하던 선수 시절과는 달리 의외로 코믹한 광고가 굉장히 많다. 은퇴 이후에는 아들인 차두리와 함께 출연하는 광고가 많았는데 2010년대 후반부터 단독으로 출연하는 빈도가 많고 한국 축구 레전드의 느낌을 살려 진중한 느낌의 광고가 주를 이룬다.

애초에 서독에 진출한 것도 개인의 축구에 대한 욕심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축구 발전을 위한 것이 컸던 것처럼 광고조차 애국자적인 출연 결정이 많았다. 물론 당시 사회적인 통념 자체가 요즘과는 달리 다소 국수주의 적이기도 했지만 국내 기업의 신제품이나 세계 시장을 노리는 도전적인 시도의 상품 광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고 특히 1998년 기아자동차 광고의 경우 IMF로 인해 법정 관리에 들어간 기아자동차의 정상화를 위해 무상으로 광고에 출연하였다. 여담으로 기아자동차는 회생 후 감사의 의미로 기아 엔터프라이즈를 기증했다.

이외에도 상업광고가 아닌 공익광고(지면)에 출연한 적도 있다. 가족계획으로 산아제한 정책을 추진하던 1980년 당시 첫째인 차하나씨(당시는 3살 아기였다)와 부은 오은미씨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고 그 하단에 "하나만 더 낳고 그만 두겠어요"란 문구가 적혀있는 캠페인 신문 광고다.#보기 하지만 정작 이 이후 차범근의 가족은 한 명이 아니라 둘이 더 태어나 총 3자녀가 되었다.(...) 여담으로 차범근은 공익광고이기 때문에 무료로 출연했다고 한다.#당시 신문기사


6.3. 도서[편집]


  • 에세이 내가 너무 못생겼다구요(1990, 우석출판사)
  • 에세이 슈팅메시지(1997, 우석출판사)
  • 에세이 그라운드 산책(1997, 우석출판사)
  • 학습만화 네 꿈을 펼쳐라(1998, 진선출판사)


7. 차범근에 대한 언사[편집]



“여기가 차붐의 나라입니까? 꼭 와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나의 우상입니다.”

미하엘 발락, 2002년 한일월드컵 독일팀 입국 당시 인터뷰에서.[152]


“우리가 풀지 못한 주요 문제는 차붐이었다. 차붐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해결할 수 없는 존재였다.”

알렉스 퍼거슨, 1979년 애버딘 감독 당시 프랑크푸르트와 UEFA컵 1라운드 경기 패배 후


“당신에게서 사인을 받고 싶었습니다. 이 자리는 제게 정말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올리버 칸, 2004년 월드컵 예선 대비 친선경기 차 방한 후 차범근을 만나서 한 말


”나는 차붐을 존경한다. 어릴 적 차붐을 보고 자랐고, 나도 그 선수처럼 되고 싶었다.”

마이클 오언


“방한의 궁극적인 목적은 양국의 발전과 우호증진이어야 한다. 하지만 난 차붐부터 만나고 싶다.”

2002년 정상회담을 위해 방한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총리


“나도 어느 정도 성공한 공격수로 평가받지만 차붐 만큼은 아니다.”

위르겐 클린스만


“퍼펙트라는 말이 어울리는 공격수였다. 슛이 좋은 데다 스피드가 폭발적이었다. 첫 대결 이후로도 나를 상대로 많은 골을 넣었다. 내가 멕시코 월드컵에서 마라도나를 상대로도 골을 안 먹었는데, 차붐은 도저히 못 당하겠더라. 만약 차범근이 지금도 현역이었다면 1억 유로를 이적료로 줘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 팀에 차붐 같은 선수가 있다면...”

하랄트 슈마허


“결승전 당시 차붐은 최고의 선수였다.”

로타어 마테우스


“차범근이 세계 최고의 공격수인 건 분명하다. 그는 나의 자만을 깨우쳐 줬다.”

로타어 마테우스


“내가 프랑크푸르트에 뛰던 시절 한국인 선수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선수가 바로 당시 최고의 선수였던 붐근차였다.”

요아힘 뢰프[153]


“난 차붐을 낳은 어머니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가 독일인이라면 어김없이 독일 대표팀에 넣고 싶다.”

에크하르트 헨샤인트(eckhard henscheid)[154]

[155]


“차범근은 매우 위대하고 훌륭한 선수다. 아직도 독일에는 그의 뛰어난 기량을 기억하는 팬들이 많다.”

프란츠 베켄바워, 1995년 방한 당시 MBC NEWS 인터뷰


“차붐은 진정으로 축구를 할 줄 알고 즐길 줄 안다.”

펠레


“차붐은 나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큰 영웅이다.”

루이스 피구[156]


승부차기까지 가서 이겨 더욱 기뻤죠. 차붐은 매우 중요한 선수였어요.”

에리히 리벡


“차붐은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한 엄청난 스타입니다. 그는 리그를 주름잡았죠”

아르센 벵거


“차붐은 당시 독일에서 정말로 특출한 존재였다.”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차붐의 영입으로 UEFA컵을 우승할 수 있었다. 레버쿠젠 구단 역사에서 첫 우승이었다.”

루디 푈러


“차붐은 케빈 키건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이다. 세계 어느 클럽의 최전방에 배치해놔도 주전을 꿰찰 수 있을 것이다.”

귄터 네처


“현재 서독대표팀의 왼쪽 윙포워드가 시원찮다. 차(Cha)가 서독선수라면 당장 그자리에 넣고 싶다.”

유프 데어발, 1980년 UNICEF 세계 올스타 전 경기 후 언론사 인터뷰


“전설을 마주하게 돼 큰 영광입니다. 차붐이 다름슈타트에서 뛰었다는 사실을 구단은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뤼디거 프리치 SV 다름슈타트 98 회장, 2017/18 시즌 출정식에 초대된 차범근을 만나며 건넨 인사말


“차범근은 나의 롤모델이자 우상이다.”

디미타르 베르바토프


“차붐이 50%만 해내도 나는 다른 어떤 선수보다 먼저 차붐을 기용할 수 밖에 없다”

에리히 리베크


“직접 대결해 본 적은 없으나 유럽 컵 등의 대회에서 그의 활기찬 플레이에 여러 번 감탄했다. 차범근을 묶지 못하면 한국에 당할 가능성이 크다. 그는 현역 최고의 스타플레이어 중 한 명이다.”

파올로 로시,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과의 조별 예선을 앞두고 인터뷰[157]


“왜 그런지 여러분은 몰라요.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에 그는 유럽의 최고의 선수 중 한명이었죠. 독일에서, 아마 프랑크푸르트 선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는 최고의 유럽 선수 중 한 명이었죠.”

거스 히딩크, 손차박 중 최고의 선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에 차범근을 뽑으며.


“타고난 기량에 노력을 더한 불세출의 스트라이커. 비교 거부.”

최순호, 역대 한국 스트라이커들을 평가하던 중 차범근에 대한 평가.[158]


“차범근을 존경한다. 그의 출장기록을 넘어섰다고 해서 내가 그를 뛰어넘은건 절대로 아니다.”[159]

하세베 마코토



8. 여담[편집]


  • 본관은 연안(延安, 현재 황해도 연안군)이며,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에서 아버지 차금동(車今同)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차금동은 농업협동조합에서 근무하다가 퇴직 후 농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차범근은 아내 오은미와 1977년에 결혼했다고 한다. 오은미와의 결혼 스토리는 1976년 당시 대학교 1학년에 재학중이던 오은미의 친구는 본인 대신 미팅에 나가 달라고 부탁했고, 친구 대타로 미팅에 나와서 차범근과의 첫 만남을 가지며 그 계기로 인해서 차범근과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어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1977년에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당시 차범근의 나이는 25살, 오은미는 22살 이었다고 했다. 결혼 후 가족은 배우자 오은미로부터 딸 1명(차하나)과 아들 2명(차두리, 차세찌)을 낳았다. 그 중 장남 차두리는 대를 이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뛰었고, 이후 차두리가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 회장 신철호의 장녀 신혜성과 2008년에 결혼하며 며느리가 됐으나 이혼으로 가족의 연은 끊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차남 차세찌가 2018년 배우 한채아와 결혼하여 배우 며느리를 맞이하게 됐다. 손주는 차두리와 전처 신혜성 사이에 1남(차아일) 1녀(차아인)와 차세찌와 한채아 사이에 1녀(차봄)로 총 3명이 있다고 한다.

  • 1979년 독일 슈테른이 발표한 '세계4대 상승세 인물'로 선정
파일:차범근 대화의희열.jpg

  • 2021년 포포투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레버쿠젠 이적 당시 AC 밀란SSC 나폴리에서도 오퍼가 왔었다고 한다. 이탈리아로 갔었다고 가정하고 행복회로를 돌려보면 1984년 파올로 말디니의 밀란 1군 데뷔 또는 디에고 마라도나의 나폴리 이적을 동료로서 환영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160]

  • 차범근이 현역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고 가족과 함께 귀국한 1989년 11월 10일은 바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이었다.[161] 당시 MBC 뉴스데스크 꼭지들. 당시 베를린 장벽 붕괴 사건 말고도 삼양라면 우지 파동이라는 사회를 크게 흔든 사건이 규명되는 기사들이 잇달아 나왔던 때라 차범근의 귀국 소식이 마치 단신처럼 처리된 듯 싶지만, 인류 역사는 물론 대한민국 역사를 뒤흔든 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그래도 메인뉴스의 주요소식 중 하나로 다뤘으니 당시 차범근의 명성을 새삼 느끼게 한다.

  • 현역 때도 유명했지만, 차범근의 전성기 시절 허벅지 둘레는 무려 31인치.# 웬만한 남자 허리둘레 수준으로, 차범근의 엄청난 주력과 힘은 여기서 나왔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또한 축구계에서 월드클래스 피지컬을 자랑하는 아들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국가대표 선수가 될 때까지도 어떤 신체능력으로도 차범근을 이길 수 없었다고 한다.[162] 심지어 2014년에도 매일 2시간씩 러닝과 웨이트를 거르지 않고 소화 중이며, 한 번은 차두리가 같이 운동하다 먼저 손들고 올라온 일이 있었다고(...)... 현역 당시 그의 허벅지 모음. 그야말로 펄떡거리는 역동적이고 생생한 허벅지 근육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차범근이 위 인터뷰를 한 것은 2014년으로 만 61세, 환갑을 넘긴 나이였다.

  • 상당한 공처가이기도 하다. 것도 늘 자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아내라고 이야기하고 다닐 정도로 말이다. 다만 이렇게 공처가가 된 건 어찌보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데 독일 진출 당시 차범근은 도착 직후 제대로 된 환대를 받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당시 프랑크푸르트에는 감독과 선수단간의 불화가 있었던 상황이었고 감독이 새로 영입한 차범근을 기존 선수들이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163] 이렇게 힘든 시기에 아내 오은미는 당시 시대상으로 상당히 곱게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억척같이 뒷바라지하면서 차범근의 영양 관리를 도왔기 때문.[164] 또한 오은미는 남편 차범근이 축구에 완전히 몰두할 수 있도록 축구 이외의 모든 것을 전담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결혼 직후 차범근이 내가 할 일은 축구밖에 없으니 다른 것들을 신경쓰지 않고 축구만 하게 해 달라 고 말해 아내는 흔쾌히 받아들인 뒤 온갖 고생과 뒷바라지를 하면서 남편이 선수 은퇴할 때까지 인생을 남편에게 맞추어 살아왔다. 차범근이 버는 모든 수입의 관리 뿐만 아니라 대외 활동의 매니지먼트, 심지어는 차범근이 쓰는 글 대부분의 대필까지도 해주고 있다는 건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이다.[165]

  • 슬하에 2남 1녀를 뒀다. 장녀 차하나(1978년생).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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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극후반 공익 광고. 그때는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던 시절이니...[166]
어린이: 아저씨는 아들을 낳으면 축구를 시키실 겁니까?
아나운서: 아들을 낳는다면 축구를 시키겠느냐고 그러는데요...
차범근: 공교롭게도 제가 지금 딸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아들이 원하면 축구를 시키고...

1970년대 KBS의 '어린이 만세'에 출연해서 당시 영상
그리고 아들 둘을 더 낳았다. 장남 차두리(1980년생), 차남 차세찌(1986년생). 장녀는 현재 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막내아들은 해병대를 전역 후(2009년 입대. 병1103기로, 1사단 7연대 3대대에 입대했으며 7연대 1대대 현관에도 차범근의 싸인볼이 있었다.) 형과 아버지와 함께 간때문이야 광고에 출연하였다. 딸은 결혼해 아들을 두었는데, 이 아이[167]가 축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차범근으로선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차두리가 결혼할 때 기자회견에서 손자가 태어나면 자신의 노하우를 총동원해 축구 선수로 키워보고 싶다고 밝혔다. 자신이 바빠서 아들 두리를 제대로 봐주지 못한 게 너무나 아쉬웠다고. 2010년 11월 29일 차범근의 소셜 네트워크에 내년 5월에 태어날 차두리의 둘째가 아들이라는 소식이 올라왔다. 링크 네티즌들이 예상하는 아이 이름은 차바인, 차쯔바(독일어로 2는 zwei(쯔바이)) 등등이었는데, 정작 한 달 늦은 6월 말에 태어난 둘째 아이의 실제 이름은 '차아일(Ail)'. 독일어가 아닌 웨일즈어로 '2'라는 뜻의 이름으로, 많은 네티즌들의 허를 찔렀다.[168] 어쨌거나 많은 이들은 벌써부터 "2030년 월드컵 국대 원톱"으로 단정짓는 중. 자녀 이름을 하나, 둘(두리), 셋(세찌)으로 짓는 비범함을 보였다.

  • 여타 운동 선수와는 달리 일찌감치 광고 출연이 많았다. 이미 독일 진출 전이던 1970년대 후반, 남양유업요구르트 광고에 나온 것을 비롯해 1980년대에는 레버쿠젠의 모기업 바이엘 제약의 광고에도 자주 나왔다. 대우전자에서 제작한 베타맥스 VCR 광고에도 출연했는데 영상(51~55초 부분)을 보면 차범근이 화질이 정말 좋다는 것을 알리는 대사("화질이 정말 깨끗하군요")를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2000년대 들어 SK텔링크 00700 CF에 고정 출연하며 김선아와 함께 개그감도 뽐냈다. 원래 파트너 싸이병역비리에 걸려서 하차. 이때 대사는 "국제전화 비싼 줄 알았지? 아니야!!"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당시 신문선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MBC 해설로 합류하여 이후 해설계에서 오랜 기간 활동했다.[169][170] MBC는 당시 간판 콤비 신문선과 송재익을 SBS에 뺏긴 상황이었으나 차범근이 그 자리를 잘 메꿔줬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 때는 대표팀에 탈락한 차두리도 해설에 합류해 부자가 같이 해설했다. 이 때 대한민국과 스위스의 조별 예선 최종전에서 스위스의 2번째 골이 들어간 상황에 대해 차두리가 심판 판정을 문제삼으며 "이건 사기입니다."라고 말했는데, 나중에 중계석을 비춘 화면에서 차범근이 차두리를 노려보면서 말조심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한게 밝혀지며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뿐만 아니라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이전 거스 히딩크가 오대영이라고 비난받을 무렵, 그를 지지한 몇 안 되는 축구인이기도 하다.[171] 다만, 수원의 성적이 부진할 땐 감독 때려치우고 해설이나 하라고 욕을 먹었다.

  • 기자들과 악연이 많다. 1980년대 초반에는 기자들이 독일까지 가서 "양주를 내놓으라, 대접 잘해라" 이딴 무개념 쓰레기 짓거리를 해서 정나미가 떨어진 차범근은 문전박대를 해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한국에서 신문으로 "차범근 독일에서 무개념으로 군다" 이렇게 왜곡을 하는 기사를 써재꼈다. 이런 일로 아버지가 속상해하던 걸 보던 아들 차두리도 커서 기자들을 꺼리며 갈등이 많았다.[172] 김병현이 모 기자와 갈등을 겪었을 때(일명 '김중지 사건') 차범근은 김병현을 옹호하다 그런 기자에게 욕설을 듣기도 했다.

  • 동년배의 다른 스타들과 비교했을 때 겸손한 사람이다. 인터뷰를 해도 옛날 얘기를 한두 문장 이상으로 이어서 하는 일이 없고, 해설할 때도 그 흔한 현역 시절 에피소드가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다. 이런 자기 자랑을 자제하는 것에는 아쉬운 측면도 있는데 당장 선수 경력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그의 분데스리가 커리어에 대한 문서화 작업이 굉장히 부족한 상황에서 본인의 입에서 나오는 구술사도 전무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축구팬들이 그의 과거를 온전히 이해하기가 대단히 힘들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축구팬들도 차붐, 차붐하고 그가 분데스리가에서 유명했다더라 하는 정도만 알지, 어떤 플레이를 보여줬으며 어떤 선수인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러니 젊은 축구팬들에게도 해외에 나가 있는 수많은 현역 축구선수들의 선조뻘로만 다가오지, 예컨대 박찬호박지성처럼 차범근을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보통 이쯤 되면 야구의 선동열 같은 사례처럼 전성기 시절의 커리어를 폄하하는 사람들도 나올 법도 하지만, 이미 여러 에피소드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아들의 스코틀랜드 리그 활동에 관련한 행정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친구한테 추천서를 부탁했는데 그 친구란 사람이 무려 프란츠 베켄바워라던가... 남아공 월드컵 때 해설 위원으로 활동하던 아르센 벵거가 옆에 마련된 중계석에 있던 차범근을 쳐다보며 해설과 함께 차범근이 옆에 있다고 전설적인 선수라고 소개하고는 차범근을 향해 엄지를 치켜든다거나. 수원 삼성과 첼시의 경기 때 주제 무리뉴가 와서 악수하고 다가와서 인사를 한다. [173] 프랑크푸르트 100년 역사의 레전드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프랑크푸르트 역 기둥에 12명의 프랑크푸르트 레전드의 사진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차범근이다. 루디 푈러와 서로 약 먹었냐며 시시덕거리는데, 아무도 이를 어색하게 여기지 않는다.[174]
특히 1970년대 독일의 선수 출신 축구인들이 전 세계의 주요 축구 지도자로 나선 이후, 월드컵을 비롯한 국제 대회에 해설자로 한번 나갔다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부쩍 늘어났다. 그러나 그들과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사실관계 뿐이다. 대단한 과거가 있다고 짐작만 할 뿐, 디테일을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 프란츠 베켄바워와는 한국 축구팬들이 알고있는 것 그 이상으로 친한 것으로 보이는데,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첫 해설을 맡은 차범근이 해설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몰라 조언을 구한 사람이 베켄바워였고[175] 2013년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 정몽준에게 독일 대십자공로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베켄바워가 내한했을 당시 행사에 초청된 차범근을 보고 대뜸 귓속말로 "너 이혼했어? 와이프 어디가고 혼자 왔어"라고 묻자 "나만 초대해서 혼자 왔지"라며 잡담을 하거나 차범근이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당시 그 유명한 SBS '따봉' 영상을 찍기 위해 베켄바워를 찾아갔을때 차범근이 "곧 내 생일이니 축하 인사나 한마디 해달라"는 말에 온갖 미사여구를 쓰며 축하 인사를 하더니 당시 현장에 같이 있던 차범근의 부인 오은미에게 "잘 된 것 같아?"라고 묻는 등 단순히 개인적인 친분을 넘어 가족끼리도 친한 듯 하다.#

  • 독일 축구 연맹(DFB) 회장을 '집사람 옆에 있는 친구'라 부르기도 한다. 해당 인물은 볼프강 니어스바흐(Wolfgang Niersbach)로 2012년부터 2015년까지 독일 축구 연맹 회장직을 맡았다. 차범근이 뛰던 당시 스포츠 기자로 활동한 덕에 차범근과 매우 잘 알아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상식적으로 단순히 분데스리가에서 뛰었다고 이렇게 신임 DFB 회장을 만찬장에서 만나진 못한 다는 걸 생각한다면 차범근의 위엄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구자철을 비롯해 독일 전문 스포츠 기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구단의 초청이나 분데스리가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암암리에 각종 독일 축구계의 임원들을 만난다고 하며 그저 대한민국에 잘 알려지지 않을 뿐이라고 한다.

  • 79/80 시즌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가 UEFA컵을 우승하고 축하 행사를 가진 프랑크푸르트 뢰머 광장은 과거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대관식을 끝낸 후 화려한 축하연을 열던 곳으로 그 유서가 매우 깊은 곳이다. 특히 차범근을 비롯한 선수들이 올라 트로피 셀레브레이션을 한 오스트차일레 발코니는 카이저르차르, 일명 '황제의 방'이라고 불리며 평상시 엄격히 출입이 통제되어 아무나 올라 가지 못하는 곳으로 특별한 행사에만 허용되는 장소였다. 차범근은 이곳에 오른 최초의 아시아인인데 2014년에 방영된 다큐에서 얘기하기론 당시 올라갈 때는 마냥 신나기만 했지 이 장소에 대한 특별함을 알지 못했으며 나중에 그냥 올라가려니까 턱도 없었다고 소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첫 시즌에 UEFA컵 우승을 거두고 두 번째 시즌엔 DFB-포칼 우승을 하며 2년 연속 올라갔기 때문에 실감이 안 났을 수 있다.


한국이 16강에 진출하자, K리그 구단들에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선수들을 잘 키워줘서 고맙다는 감사 코멘트를 했다고 한다.

  • 독실한 개신교 장로회 신자이고[176], 여러 번 자신의 신앙에 대해 간증을 했는데, 종교 문제 때문에 구설이 오른 적이 있다. 1997년 월드컵 예선 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골을 넣으면 기도를 드려 자주 카메라에 잡혔다. 김용옥이 신문 기고로 이를 비판했고, 이후에 차범근도 반박 기고를 하여 키배가 벌어진 적이 있다. 또한 선수 기용에서도 종교가 개입한다는 의혹도 유포되곤 했다. 예를 들어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본선 첫 경기 멕시코전에서 최용수 대신 김도훈을 출전시킨 것이 최용수가 불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소문이 돌았고, 부적을 사용하는 고정운을 잘 기용하지 않는 것도 종교 문제라고 회자되었던 것.[177] 이 외에도 당시 대표팀에는 서정원, 최영일, 홍명보, 하석주, 이동국불교계 선수가 여럿 있었다.[178]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원수라 할 수 있는 통일교 계열의 K리그 구단 천안 일화 천마성남으로 연고를 옮기려 할때 성남 기독교계가 반발하자 차범근은 신문 기고로 "축구와 종교는 상관없다."고 한 적이 있다.[179]

  • 2010년에 나온 차두리 로봇설과 관련하여, 차두리 로봇 설계도를 알려달라는 팬들의 장난스런 요청에 로보트...그거 일급비밀이야. 많이 알면 다친다고!!! 로보트 아빠는 상관없지만 로보트 엄마는 비밀로 부치고 싶어해. 이해해줘. 로보트 가족 중에는 엄마 힘이 젤 세다고!!!라고 답하며 축구 실력뿐 아니라 유머 감각도 레전드급임을 과시했다. 그보다 며칠 전, 차두리가 로봇설에 대해 한 말을 보면 부자가 다 유머 감각이 뛰어난 듯하다.

  • 감독직 사임 후, MBC에서 SBS로 옮기며 배성재[180]와 함께 국가대표 축구 해설로 활동했는데 평가는 굉장히 좋다. 선수 출신답게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경기 내적인 내용들을 잘 짚어주며, 감정적인 애국 해설을 자제하고, 경기의 흐름과 풀어나갈 방향을 거론하는 방식. 보다 보면 후배이며, 제자들인 선수 한 명 한 명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게 보인다.[181] 2011년 2월 1일, 박지성이 은퇴한 것에 대해, 축구 유망주들이 유년기에 훈련을 너무 많이 하는 관행을 고치려 자신이 노력하지 않은 것이 부끄럽다며 인터넷 상에 글을 올린 게 화제가 되었다. 기사.

  • 선수로서는 이견이 없을 정도로 대한민국 선수들 중 가장 명예로운 커리어를 보냈지만, 지도자로서는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당시 대회 도중 경질된 사건과 그 이후 승부조작 드립을 쳤다가 5년간 자격정지(이후 3년으로 하향)를 먹은 뒤 중국 리그를 전전했던 아픔이 있는 사람이다. 참고로 차범근이 경질당하게 된 네덜란드 전에서 상대팀의 수장은 다름 아닌 거스 히딩크다. 그러나 차범근은 히딩크에게 매우 우호적인데, 자신이 불명예스럽게 해임되고 자격정지까지 먹으면서 사실상 한국 축구계에서 매장당한 와중 아들 차두리마저 세간의 눈총을 사지 않을까 우려했으나, 히딩크가 차두리를 대표팀에 전격적으로 발탁하고 월드컵 본선에까지 기용하면서 신경써줬기 때문이라고... 실제로 히딩크호가 2001년에 프랑스체코에 5:0 으로 내리 깨지면서 히딩크마저 오대영으로 통하며 숱한 비난을 받던 와중에도 당시 대표팀 기술위원장 이용수와 더불어 히딩크를 옹호해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차범근이었으며,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직전의 SBS 특집 방송에서는 차범근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방문한 김에 히딩크를 직접 만났는데,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마냥 훈훈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담소를 나누는가 싶더니만[182] 히딩크가 1998년 월드컵 때 이야기를 꺼내자 "그때 저를 정말 힘들게 하셨어요."라고 한 방을 날렸다(...). 물론 이 말을 들은 히딩크는 어쩔 줄 몰라하며[183] "그 때 일은 잊어버리셔야 해요. 그 때 네덜란드 멤버가 워낙 좋았거든요"라는 말과 함께 미안하다는 말로 사과했고, 나중에는 서로 그 때를 얘기하면서 쩔쩔매기도 했다.

  • 반면 월드컵 커리어는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하나 뿐이었고, 이 때의 조 편성마저 전전 대회 우승팀 아르헨티나직전 대회 우승팀 이탈리아가 포함되는 등 대진운이 지지리도 안 좋았던지라 큰 활약을 펼치기도 어려웠다. 실제로 본선에서도 3경기에 나와 무득점에 그쳤다. 그러나 당시 경기 영상을 보면 차범근에게 기본적으로 수비 2명이 달라붙는 형태로, 저 강호들의 수비도 차범근을 1차적으로 막는데 초점을 두고 수비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일종의 어그로가 되며 최순호, 변병주, 김주성 등에게 조금 더 활발한 공간 침투를 가능하게 만드는 이점으로 작용했다. 대한민국 대표팀이 사실상의 첫 출전[184] 대회에서 안좋은 대진운 속에서도 4골이나 뽑아낸 이유기도 하다.



  • FIFA 시리즈에서 전설의 팀(팀명은 '클래식 XI') 멤버 중 한명인데, 유일한 아시아인이기도 하다. 스탯은 전설의 선수 아니랄까봐 메시와 거의 동급인 90.

  • 피파 온라인 3에도 등장했다. 유럽 리그 레전드(팀명은 'EL') 멤버 중 한 명이다. 울리 슈틸리케, 히바우두 같은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초기 오픈빨을 빼고 거품이라고 가격이 폭락한 선수들이 많음에도 차범근은 만인이 인정하는 성능으로 초기 고가격대를 그대로 유지[185]했다. 일명 개떡같이 줘도 찰떡같이 골을 넣는다고 할 정도로 성능이 아주 출중하다.

  • 2013년 10월 17일부터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차범근의 따뜻한 축구'라는 칼럼을 연재했다. 독자들의 평도 상당히 좋은 칼럼으로 유명하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이 끝난 후로는 비정기적으로 기고한다. 링크.

  • 한때 딸 차하나의 독일인 친구 아버지를 마중하러 김포공항에 나갔다 당시 김포공항 경찰대의 불심 검문을 받게 되었는데, 주민등록증을 안 가져와서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186]

  • 1998년 국가대표 감독일 때는 서정원의 벤피카 진출에 대해서도 불화가 있었다고 하는데 경향신문에는 "입단을 구걸하러 가서 무엇 하겠습니까?"고 서정원이 속고 있다고 인터뷰했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그래서 축구협회에 이적동의서를 발급하지 않아서 벤피카로 가서 연습경기까지 뛰던 서정원은 해외 진출이 무산되었다. 최강희와는 최강희가 선수 시절 얽힌 일 때문에 지금도 사이가 별로 안 좋다.[187] 하지만 서정원의 경우에는 차범근과 같이 월드컵 본선에 갔으며 수원 삼성 시절에도 2004년에 함께 리그 우승을 일궈냈으며 서정원이 감독되고 처음으로 우승컵을 얻은 2016년 FA컵 우승 시상식에서도 서정원을 안아주었다.

  • 이임생김호 감독 시절 대표팀에 소집되어 훈련 중 고연전이 열려 무단이탈한 탓에 그 후 국가대표에 소집되지 않았는데 차범근이 국가대표 감독일 때 다시 발탁했다. 이때 같은 고려대 선, 후배라서 다시 기용한 게 아니냐는 루머가 있었는데 이임생은 부천 르네상스의 핵심 수비수였으며 벨기에전 붕대 투혼과 수원 삼성에서의 수석코치로 우승까지 함께 한 실적이 있는 사람이다. 말 그대로 쓸 만해서 썼다. 그리고 차범근은 국가대표 감독일 때 장대일도 발탁해 홍명보 대타라는 중임까지 맡겼는데 장대일은 고려대 출신이 아니다.

  • 부자가 함께 대표팀에 발탁되어서 유명한데, 가장 유명한 사례인 것은 맞지만 최초는 아니다. 최초의 부자 국가대표는 김찬기 - 김석원 부자로 김찬기는 1960 AFC 아시안컵 한국 우승을 이끈 멤버 중 한 명이고 김석원은 1979년과 1981년에 FIFA U-20 월드컵에 출전했고 이후에 국가대표에도 발탁된 인물. 다만 워낙 옛날 일이고 차범근 - 차두리 부자의 무게감이 엄청난지라 현재의 젊은 세대는 차범근 부자가 최초의 사례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선수 생활을 결산하면서 남는 아쉬움이 있다면?

분데스리가 베스트 11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그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높은 한 단계, 즉 루메니게, 브라이트너 등이 서있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더욱이 처음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정열과 패기였다면 충분히 오를 수 있었던 곳에 나는 적지 않은 사람들과의 오해와 갈등으로 혼란에 빠져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아쉬움이 지워지지 않습니다.[188]

  • 하리보를 굉장히 좋아한다. 독일 시절 접한 뒤로 계속해서 좋아한다고. 선수들 사이에서는 차범근에게 하리보를 얻어먹는 게 이쁨받는 상징이라고...[189]

  • 1978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땄다. 당시 결승 상대가 북한이었는데, 120분의 혈투 끝에 승부를 가리지 못해 공동 금메달을 받았다.[190] 다만 이 당시는 금메달을 획득하더라도 바로 전역시켜주지 않아 차범근은 군복무를 끝까지 채워야 했다.

  • 차두리와 재미난 언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디에고 마라도나지네딘 지단 둘 중 누가 더 축구를 잘하냐는 것. 마지막에 서로 주고 받는 말이 압권이다. 아빠 지단이랑 뛰어 봤어요? 넌 마라도나랑 뛰어봤냐?

  • > 누구도 막지 못한 단 한명의 공격수에게
메르세데스-벤츠 G클래스를 소유했었다. 현재는 단종된 숏바디 모델이다. GE230 모델로 무려 구형 초록번호판[191]이다! 벤츠사에서 리스토어를 해주었다. 영상 차범근은 해당 차량을 받지 않고 기증했다. 다만 후에 밝혀졌지만 복원된 차량은 본인이 보유중인차가 아니라 동일한 모델로 연출된 것이다. 이는 위의 복원 영상 1:01에서 자막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실제 차범근의 차량은 중고로 매각되어 다른 사람이 보유 중이다.

  • 2013년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UEFA컵 우승 25주년을 맞아 진행된 기념 행사에 차범근을 포함한 당시 우승 멤버들이 초청되었다. #[192]

  •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이 한 해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대한축구협회장이 바뀌고 내부 임원이 대대적으로 갈리면서 그동안 대한축구협회와 갈등을 빚었던 차범근이 한 자리 맡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다. 어떤 구체적인 자리에 선임된 것은 없었지만, 브라질 월드컵 예선 바레인전에 신임 협회장 정몽규와 나란히 경기를 관전하는 것이 TV에 잡혔다. 축구협회 임원진을 태운 전용기에 같이 동석하여 관람을 하고 왔다고 한다. 이로서 소문은 사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월드컵을 앞두고 축구협회에서 그에게 어떤 직책을 내릴지 주목된다. 하지만 2014년 10월이 지나도록 차범근에게 어떤 직책이 주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아서 그냥 축구협회가 그간 껄끄러웠던 차범근과 화해만 한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오는 중. 그러나 이후 2017년 FIFA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이는 차범근 역사상 축구 관련 행정가로 처음 맡은 자리.

  • 2014년런닝맨 촬영을 마쳤다. 그리고 박지성 자선경기에 교체 출전하여 25년 만의 경기 출전을 했다. 그의 라이브 경기를 본 올드팬들도, 라이브 경기를 보지 못한 현 세대의 팬들, 그리고 수많은 축빠들이 한 마음이 되어 차붐의 활약을 기대하며 동점골을 넣기를 바랐으나 눈치 없는(...) 인도네시아 올스타 선수들이 이를 악물고 뛰어 그다지 많은 기회를 받지는 못했다. 애당초 뛴 시간이 10여 분 남짓이었고 기대한 슈팅은 나오지 못했지만, 좌우 사이드를 가리지 않고 뛰고 중앙에서 킬 패스도 뿌리는 등 현역 시절 말기의 공격형 미드필더에 가깝게 뛰며 클래스는 영원한 것을 보여주었다. 중간에 백 힐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해서 웃음을 주기도 하였다.

  • 차두리의 은퇴식에서 전반 42분 차두리가 교체되어 나올 때 라커룸에서 차두리를 맞이하며 "이제 차범근 아들로 태어난 거 후회 안 하지?"라는 말을 했다. '차붐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에 평생을 짓눌려 살아온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느껴지는 말이다.

  • 유럽에서 뛰면서 한국과 유럽의 축구 수준 차이를 여실히 느낀 차범근은 독일을 비롯한 축구 선진국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유소년 시스템을 확인하고 어릴 때부터 축구를 경험해야 이러한 유럽과의 차이를 극복할수 있다고 판단, 은퇴 후 차범근 축구교실을 설립했다.

  • 차붐은 별명을 넘어 칭호처럼 불리웠는데, 일단은 그의 이름 때문이다. 차범근의 로마자 표기는 'BUM KUN CHA'인데, 독일 사람들이 CHA가 성씨인 것은 알았지만 BUM KUN을 이어서 이름이라 생각하지는 못하고 KUN을 middle name으로 생각해서 생략해 버렸다. 한국처럼 성씨를 앞에 두니 CHA BUM이기에 독일식으로 읽으면 '차붐'이 된다. 영어로는 bum이 엉덩이를 뜻하는 속어라 좋은 의미가 아니지만 독일어의 bum은 대포 소리 등이 "쾅!" 하는 의성어라, 골을 뻥뻥 터트리면서 활약을 하자 널리 쓰이게 되었다.


  • 애플 제품을 애호하는 듯 한데, 2014년 5월에 아들이 맥북을 선물하기도 했다. #

  • 2014년 분데스리가에서 공식 유튜브를 통해 역대 한국인 베스트 골 10과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역대 골 TOP 10을 선정해 업로드 하였는데,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한국인 베스트 골 중 3위와 8위#, 프랑크푸르트 역대 베스트골 10위에 랭크되었다. #

  • 2017년 8월 7일, 분데스리가 앰버서더로 임명되었다.

  • 원투펀치 282회 3부 마지막에 Q: 차범근과 비교 대상이 될 현역 선수는 누구냐?는 질문에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받고 왠지 엄청나게 부담스러워 했다. 계속 포지션이 달라서 누구를 특정할 수 없다며 말을 피하다가, 현역 시절 같은 포지션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케빈 키건을 비교하면서 당시 분데스리가에서는 세 손가락에 들어가는 공격수라는 점에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루메니게만큼은 아니라고 언급하였다. 장지현의 의견으로 종합하면 "득점력이 아주 높지는 않지만 화려한 플레이를 하면서도 팬들을 즐겁게 해준 최고 레벨의 선수"라고 평가했고 한준희는 "다재다능한 공격수로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루메니게, 케빈 키건에 비견되는 선수다"라고 평가했다.

  • 배성재와는 아버지와 아들과 비슷한 관계고,[193] 박찬호와도 골프치고 같이 집에서 장어구이 구워먹는 사이인 듯. 칼럼[194] 배성재가 차범근이 자는 모습을 찍은 적이 있는데 '실신한 차범근'짤로 유명해졌다. #

  • 본인의 별명 차붐이라는 랩 네임을 가진 래퍼가 있다. 똑같이 성이 차씨인데, 중학생 시절 별명이라서 차붐이라고 지었다고...

  • 독일에 'Bum Khun Cha Youth'라는 인디밴드가 존재한다. 밴드 명칭을 보면 알 수 있듯 멤버 모두 차범근 광팬으로, 차범근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밴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

캐스터: 자. 2018년 피파 월드컵 어떻게 보십니까?
차범근: 저는 우리 선수들이 잘 할 거라 생각합니다.
캐스터: 아 그런데 상대편이 너무 강해서.
차범근: 바로 그 생각을 뒤집어야 합니다. 2002년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해보기 전까지 결과는 아무도 모르죠. 포기하면 이미 승패는 결정납니다.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뒤집어야 승리를 얻을 수 있죠. 이길 수 없는 상대란 없습니다.
안정환: 뒤집어버려.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카스 광고 30s 버전#

  • 자신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있을 때, 월드컵 중도 경질에 가족 전체의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맹비난을 받은 경력 때문인지 해설할 때 선수들에 대한 비판을 가급적 삼간다. 평상시에도 감독 및 일부 선수에 대해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평소에 화를 잘 안 내는 성격임에도 언론사에서 분노라고 표현할 정도. 차범근의 메시지 "선수들의 용기, 밖에서 꺾지 말아라" 장현수·조현우 악플에 분노한 차범근…“선수들 독일보다 언어폭력에 겁 먹어”[195][196] 손석희와의 전화 인터뷰에서도 굉장히 조심스러워하고, 착잡해하면서 신태용의 감독 유임에 대한 의견을 말하기도 했다.[197]

  • 프랑크푸르트 최다 출전 기록 보유자인 쾨벨이 루카 요비치의 활약상을 보고 차범근의 재능과 게르트 뮐러의 피지컬을 합친 것 같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는 요비치의 뛰어남을 알 수 있는 발언인 동시에 차범근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발언이기도 하다.


  • 2018년 11월 3일 전 소속팀인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해외 앰버서더로 임명되었다. 함께 임명된 5명의 레전드들 중에는 제이 제이 오코차도 있는데, 이 다섯 명이 함께 셀카를 찍은 사진 또한 공개되었다. 중국의 양첸은 먼저 잡힌 일정 때문에 불참. #

  • 2019년 11월 독일 정부로부터 공로십자장을 받았다. 차범근은 외국인이라서 주한독일대사관에서 수여식이 거행되었다.

  • 2020년 유럽 축구 통계 사이트 트랜스퍼마르크트에 따르면 차범근과 차두리 부자가 세계 축구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A매치 출전 합산 기록 1위에 해당한다고 한다.# 2021년 현재까지도 1위를 유지하는데 2위인 슈마이켈 부자가 197경기로 차범근 부자와 달리 아직 현역인 카스페르 슈마이켈 덕에 조만간 경신될 확률이 높다.#



  • 박항서경신고등학교 5년 선후배 사이다. 차범근이 1972년 졸업생(65회)이고 박항서가 1977년 졸업생(70회)이다. 이 때문에 2008년 K리그 리그컵 결승전에서 격돌할 때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다.#

  • 손차박논쟁의 당사자들중 유일하게 성인대표팀으로 아시아대회 우승한 경험이 있다. 박지성의 경우에는 아시안컵에서 두차례 3위를 기록하고 손흥민은 아시안컵 준우승 및 아시안게임(u23) 우승 기록이 있는 반면 차범근은 국가대표로 나선 78아시안게임(당시 성인대회)에서 북한과 함께 공동 우승했다.


9. 둘러보기[편집]





[1] 화성군의 시 승격은 2001년, 태안읍의 동 전환은 2006년에 이뤄졌다.[2] 공식적으로는 179cm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조금 작다고 한다. 인터뷰 기사[3] 대한축구협회 기록. 링크[4] 클럽팀에서는 대부분 투톱의 중앙 공격수로 현대의 세컨드 스트라이커처럼 뛰었으며 4-3-3을 쓸 때는 원톱으로 뛰기도 했고 30대에 들어서는 윙어로도 뛰었다. 말년, 은퇴 직전에는 미드필더로도 뛰었다. 국가대표팀에서는 주로 오른쪽 윙어로 뛰었고 1977년부터는 김재한과 투톱, 김재한과 뛰지 않을 때는 원톱으로도 뛰었다.[5] 리그 1경기만 치르고 병역 문제로 계약 파기.[6]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출장 2위, 역대 최다 득점 1위[7] 한동안 공식 기록은 121경기 55골로 알려져 있었으나 2014년 11월 4일 축구협회가 데이터베이스 조사를 통해 누락된 기록들을 포함하면서 '136경기 58골'로 수정했다. 그러나 이 기록은 FIFA에서 A매치로 인정하지 않는 올림픽 축구 지역 예선 경기 6경기(2골)를 포함한 것이어서 FIFA는 일부만 인정하여 결론적으로 130경기 56골이 FIFA 공식 기록이다. 다만 대한축구협회 자체적으로는 '136경기 58골'로 기록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선수별 A매치 기록 참고. 차범근은 1972년에 데뷔해 1979년 서독 진출 전까지 국가대표를 뛰었고, 이후 1986년 대한민국이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되면서 국가대표에 복귀하기 전까지는 차출이 어려워 A매치에 뛸 수 없었다.[8] 정확한 분데스리가 데뷔 나이는 만 25세이나 당시 소속팀이었던 다름슈타트에서 그 데뷔 경기 밖에 못 뛰고 바로 한국으로 복귀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선수 경력 문서에 서술.[9] 24세 139일, 세계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10] 서독으로 진출한 이후 국가대표팀에서는 한동안 뛰지 못했고 1986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자 복귀해 본선 3경기를 뛰었고 대표팀을 은퇴했다.[11]UEFA 유로파 리그의 전신. 단 현 유로파 리그보다는 위상이 높은 대회였다.[12] 1987년부터 윌리 립펜스의 92골을 넘어서며 98골로 최다 득점 외국인 선수가 되었다. 이는 차범근 은퇴 당시 외국인 최다골 기록이었고 이 기록은 스테판 샤퓌자가 1998년에 99번째 골을 넣을 때까지 11년간 깨지지 않았다.[13] 독일의 대표적인 축구 매체 kicker 선정. 키커 선정 베스트 11이 분데스리가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그 선정 방식에 논란이 되기는 하나 전통적으로 분데스리가의 베스트 11을 선정한 매체는 키커와 Bild였다. 키커는 또한 랑리스테에서 1979/80 시즌 전반기에 차범근을 월드 클래스로 선정하기도 하였다.[14] 1987년부터 윌리 립펜스의 92골을 넘어서며 98골로 최다 득점 외국인 선수가 되었다. 이는 차범근 은퇴당시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골 기록이었고 이 기록은 스테판 샤퓌자가 1998년에 99번째 골을 넣을 때까지 11년 간 깨지지 않았다.[15] 대한축구협회의 공식 기록이며 FIFA의 공식 기록은 130경기 56골이다. 본래 대한민국 남녀 통합 축구 국가대표 A매치 최다 득점자였으나 2021년 9월 17일 2022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아시안컵 예선 몽골과 E조 1차전에서 지소연이 경신했다.[16] 무엇보다 공군 축구단에서 군복무(27개월+5개월)를 하고 병장으로 만기 전역한 후 만 26세의 나이로 분데스리가에서 뛰기 시작했기에 더욱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군복무가 아니었다면 더 일찍 유럽 축구 무대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고, 그렇게 됐다면 유럽에서 더 뛰어난 활약과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실제로 27개월 단축 군복무 후 분데스리가의 다름슈타트에서 데뷔전까지 성공적으로 치렀으나, 군복무 단축에 대한 논란이 생겨 남은 5개월 군복무 기간을 끝내야 했기 때문에, 다름슈타트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17] 대한축구협회 기록 기준. FIFA 공인 기록은 130경기 56골이다.[18] 남녀 축구 선수 통합 최다 득점 기록에 해당했으나 2021년 여자 축구 선수 지소연이 경신했다.[19] 1978년 다름슈타트 시절은 12월 30일에 첫 경기를 가진 후 군 문제로 계약 취소 및 국내로 돌아갔기 때문에 사실상 본격적인 분데스리가 경력이 시작되는 건 프랑크푸르트 시절인 1979년부터로 햇수로 11년이라 보는 경우가 많다.[20] 2021년 7월 기준 외국인 선수 역대 18위[21] 2021년 8월 기준 외국인 선수 역대 8위[22] 당시 기준 분데스리가 역대 통산 득점 28위에 해당했다. 2021년 8월 기준으로 55위[23] 페널티 킥을 모두 실축했다는 것이 아니라, 페널티 킥을 아예 차지 않았다는 의미다. 고교 시절 페널티킥을 실축한 이후 트라우마가 생겨 프로 선수가 된 이후론 한 번도 페널티 킥 키커로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24] 국가대표 선수 시절에는 페널티 킥을 성공시키고 경기가 끝나고 중계 아나운서와 현장 인터뷰를 한 기록이 있다. 1977년 4월 3일에 벌어진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조 예선 최종전인 일본과의 2차전이다. 경기 종료 6분을 남기고 차범근이 페널티 킥을 성공시켜 1:0으로 이겼다. 기사[25] 한동안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는 정보가 돌아다녔는데 실제로 레버쿠젠 시절 85/86 시즌 분데스리가 13 라운드 브레멘 전에서 5:1 승리 당시 해트트릭을 했다는 국내 기사가 존재한다. 다만 아쉽게도 실제 해트트릭을 기록하진 않았는데, 당시 전반전에 멀티골을 기록하고 후반전에 추가로 넣은 한 골이 자책골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중계하던 독일 캐스터조차 차범근이 골을 넣었다고 멘트를 할 정도로 굉장히 애매한 판결이었다. 참고로 자책골로 기록된 선수는 역대 분데스리가 통산 출전 순위 5위(546경기)에 빛나는 독일 레전드 미로슬라프 보타바(Miroslav Votava)이다.[26] 과거 농구의 필리핀이 그러했듯이 이때의 말레이시아는 아시아의 축구 강호였다. 모든 과거의 강호가 그러하듯, 높으신 분들이 망쳐놔서 지금은 아시아에서도 하위권이다.[27] 사진은 바이어 04 레버쿠젠 시절이다. 눈여겨봐야 할 곳은 대퇴 사두(오른쪽 전방)가 아니라 대퇴 이두(왼쪽 뒷부분) 부분이다. 보통은 운동 선수라도 저렇게 튀어나올 정도로 단련하기 힘든 부분이다.[28] 맨 위 사진은 1998 프랑스 월드컵을 생각하면서 보면 분위기가 좀 묘하다.[29] 현역 시절 뢰브는 차범근의 백업 선수였다. 하지만 차범근은 그에게 잘 대해줬었고 때문에 뢰브는 지금까지 차범근을 좋게 생각하고 있다.[30] 훗날 핑안은 보험회사에서 외연을 확장해 중국 최대의 금융회사 중 하나가 되며, 김판곤아랫동네 팀을 감독으로 이끌게 되었다.[31] 본인 스스로 중국으로 귀양갔다고 표현을 한 바 있다. 대표팀 실패의 책임을 전부 뒤집어 쓴 상처가 깊었던 듯...[32] 칼럼[33] 허정무가 이끌던 대표팀이 2000 시드니 올림픽2000년 AFC 아시안컵에서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서 차범근에 대한 동정 여론이 많아지던 시기기도 했다.[34] 여담으로 이때 고려대 동기(72학번. 나이는 허구연이 2살 형이다.)인 허구연이 차범근을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해설가는 선수 출신이 잘 하는 거라고. 훗날 경남 지역에 있던 강연에서, 허구연은 대학 시절 차범근이 고려대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모습을 회고하며 역사상 최고의 프로 선수를 차범근이라고 언급하였다. 당시 강연 내용 그와중에 까인 3시간 연습 드립의 정수근[35] 2014년 풋볼리스트에 차범근이 연재한 칼럼 '차범근의 따뜻한 축구'에서 발췌#[36] 레버쿠젠의 모기업 바이엘이 바로 아스피린의 제조사이다.[37] 거기에 추가로 중간중간 존댓말이 아닌 반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잦은 편이었다.[38] 옳던 그르건 자기 맘에 안 들면 히딩크부터 시작해 죄다 깠던 조광래와는 성격이 정반대다. 아스날에서의 부진과 군문제로 인해 여론의 질타를 받던 박주영조차 최대한 감싸고 기운을 북돋아주려 했고, 월드컵 전부터 졸전을 거듭하던 대표팀에 대해서도 해설이나 칼럼에서 비판하는 것은 자제했다.[39] 본인이 지도자로 오래 재임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게리 네빌이 해설자하며 벵거를 비롯한 감독들을 강도 높게 비판하니 무리뉴가 현장의 축구는 화면으로 보는 것과 다르다는 요지로 한 소리 했는데 같은 이치다.[40] 비선수 출신들은 잡다한 상식이 많고 말을 잘하나 경기 보는 눈이 떨어져서 해설이 안 되는 경우가 많고 선수 출신들은 아는 건 많은데 말로 표현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41] 또한 더 나아가서 매니아들은 직설적인 걸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 매니아들 가운데에서도 진짜 끝까지 가서 객관적으로 잘하고 못하고가 보여서 레전드 선수의 해설에 확실하게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의 매니아들이 아니고서는 그냥 자기들 비위에 맞는 소리나 직설적으로 해 달라는 얘기에 가깝다. 직설적이고 공격적으로 해설하면 그 매니아들로부터도 비난이 쇄도해 해고된다. 까고 말해서 코어팬들의 경기 읽는 수준이 야구보다 못하기 때문이다.[42] 이 경우는 얼굴은 아나 순간적으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상황이다.[43] 이런류의 최악의 해설이 이상윤. 선수 프로필 읽고 잡스러운 얘기는 많이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경기 해설을 못한다.[44] 그러나 차범근보다는 브라질이 훨씬 더 참혹한 상황이었다. 차범근이 겪은 대패는 그래도 전반 40분 가까이 무실점이었다가 2골을 허용한 것이었다. 물론 김병지 덕을 많이 보긴 했다. 또한 브라질과 독일보다 대한민국과 네덜란드의 실력차가 훨씬 더 컸다. 차범근이 잘한 건 아니었지만 당시 여론이 현실을 인정할 줄 몰랐다.[45] 2006년 독일 월드컵 8강전 독일vs아르헨티나 경기 해설 중 연장전에 접어들자, 우스갯소리로 본인 스스로가 해설자로서 그러면 안 되는데 마음이 자꾸 독일 쪽으로 기운다고 인증한 적도 있다. 당시 옆에 있던 캐스터는 김성주.[46] 독일이 골을 넣으면 목소리 톤이 미묘하게 다르다거나 상대방이 완벽한 찬스를 맞이했을 때 '위험해요!'라고 외친다던가.[47] 공교롭게도 독일은 차범근이 해설을 그만둔 이후 치러진 두 번의 월드컵에서 두 번 모두 조별리그에서 광탈하는 망신을 당했으며, 심지어 2018년은 차범근의 고국팀에 0:2로 져서 조 꼴찌로 탈락하는 수모를 당하기까지 했다. - 차범근의 저주에 걸려든 독일 -[48] 경력무관, 학력무관, 업계 최고연봉으로 모집중이다. 즉 전문성없고 경력도없는 사람이 축구를 가르칠수도있다는 뜻이된다.[49] 사실 차범근처럼 속도와 피지컬을 동시에 갖춘 월드클래스 선수는 전 세계적으로도 많지 않다. 한국 축구팬들이 유난히 한국 선수의 피지컬을 과소평가하고 유럽, 남미, 아프리카 출신 선수의 피지컬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50] 선수 시절 루메니게의 클래스가 차붐보다 한단계 위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에 차붐보다 확실하게 낫다고 할 만한 공격수는 루메니게를 비롯해서 몇명 되지않으며 루메니게도 차붐의 기량을 인정했다.[51] 다만 스피드와 피지컬만큼은 차범근이 루메니게를 뛰어넘는다고 평가된다. 루메니게는 준수한 스피드와 신체 능력 또한 발군이었지만, 그의 주특기는 환상적인 테크닉과 공격수임에도 경기 전체를 조율할 수 있는 플레이메이킹 능력이다. 세세한 결은 다르나, 요한 크루이프와 가장 흡사한 스타일을 가진 선수라고 볼 수 있다.[52] 포지션과 선수의 체격조건이 편견대로 맞아떨어지는게 아니지만 최전방에 선 선수보다 조금 아래로 내려온 세컨드 스트라이커 포지션의 선수가 상대적으로 경합을 덜하는 편이다. 실제로 체격조건이 좋더라도 몸싸움을 가급적 피하고자 하는 선수들도 많으며, 세컨드 스트라이커 역할은 체격조건보다 선수의 플레이스타일이 우선적으로 고려된다. 예시를 들자면 김신욱 같은 경우가 있다.[53] 당시 분데스리가 선수들도 하나같이 차범근의 체격 조건(특히 굵고 강한힘을 가진 허벅지)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오히려 웬만한 독일 선수보다 체격이 더 좋다는 소리까지 들었다.[54] 다른 지역과 달리 지금까지도 분데스리가 평점은 숫자가 낮을수록 높은 평점이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점수가 아니라 등급을 매긴다고 생각하면 다른 나라 평점 방식과 헷갈리지 않을 것이다.[55] 예를 들어 EPL라리가가 유럽 1위 리그 자리를 두고 다투는 상황에 김민재가 그 둘에 밀리는 세리에 A에 갔다고 해서 '최고의 리그가 아니니 의미가 없다'라고 비판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최고의 리그를 꼽는 게 어렵다는 것과 상위 리그에서 뛴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이다.[56] 리그 우승 팀이 컵 대회를 우승하여 컵위너스 컵에 진출 가능하더라도 선택권 없이 유러피언 컵에 나가야 했으며, 컵 대회 우승 팀이 UEFA컵에 진출 가능한 리그 순위를 기록했다면 선택권 없이 무조건 위너스컵에 나가야 했다. 만약 리그 우승팀이 FA컵까지 우승을 한 상황에서는 FA컵 준우승팀이 위너스컵에 출전했다.[57] 이는 작년도 UEFA컵 우승 팀을 제외한 리그 순위만의 진출 숫자로 UEFA 리그 랭킹 3위 리그가 4팀, 4~8위 리그는 3팀, 9~21위 리그는 2팀, 21위~30위 1팀이 출전했다.[58] 해당 서술은 내용이 너무 길어 관련 답변 중 일부분만 발췌 했다.[59] 독수리 군단(Die Adler)의 일원이라는 뜻.[60] 리오넬 메시크리스티아누 호날두라는 두 괴물들이 비상식적인 골 경쟁을 해서 사람들이 눈높이 또한 올라가버린 것이 큰 몫을 하기도 했다.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인 2020년대에도 3경기당 1골은 현재 최고 리그인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어지간한 중위권 팀에서 붙박이 주전 스트라이커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다.[61] 3경기당 한 골이면 한 시즌동안 총 38라운드인 리그를 풀타임 출장한다고 가정했을 때 리그에서만 총 12~13골을 넣는 셈이며 팀당 34라운드를 치르는 분데스리가에서도 11골 가량의 기대 득점이 나오는 수치다. 앞선 각주에서는 중상위권 붙박이 주전 스트라이커라고 써놨지만 실제로는 빅리그에서 두자리 수 득점이면 중상위권이 아니라 우승권 팀에서 기를 쓰고 데려가는 클래스의 선수다.[62] 공격수와 공격형 미드필더를 구분하는 키커 랑리스테와 달리 키커 리그 평점은 공격수 부문(Sturm)에 공격형 미드필더(OFFENSIVES MITTELFELD)로 분류되는 선수들이 포함되었다.[63] 키커는 평점숫자가 낮을수록 점수가 높은 것이다.[64] 84/85 시즌을 앞두고 키커지에서 1980년대 상반기를 정리하며 포지션별로 발표한 목록이다.[65] 79/80-81/82 시즌 2. 분데스리가 소속[66] 79/80 시즌 2. 분데스리가 소속[67] 79/80-80/81 시즌 2. 분데스리가 소속[68] 87/88 시즌 리그앙 이적[69] 87/88 시즌을 끝으로 은퇴[70] 분데스리가 7시즌 이상, 한 시즌 50% 이상 경기를 뛴 선수 기준[71] 79/80 시즌 2. 분데스리가 소속[72] 87/88 시즌 리그앙 이적[73] 85/86 시즌을 끝으로 은퇴[74] 79/80-80/81 시즌 2. 분데스리가 소속[75] 84/85 시즌 2. 분데스리가 소속[76] 81/82 시즌 데뷔, 2. 분데스리가 소속[77] 1987년~89년까지 코치 라이센스 취득 후 89/90 시즌 선수 복귀[78] 86/87 시즌 50% 미만 출전[79] 한 언론사의 평점이 절대적인 지표라고 할 순 없지만 독일에서 키커의 위상과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굉장히 유의미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분데스리가는 공식 연맹(DFL)에서 뽑는 '올 시즌의 선수'가 2019년에 시작되었고, 프로 축구 선수 협회(VDV)에서 선정하는 '올 시즌의 선수'와 '올해의 팀' 역시 1997년부터 시작되었을 정도로 공식적인 수상이나 평점이 없던 리그다. 그런 분데스리가에서 공식적인 평점과 시상으로 취급되던 것이 1920년에 창간된 키커의 평점과 랑리스테, 주간 베스트, 올해의 팀 등이었다. 특히 분데스리가 설립 이전부터 매겨진 랑리스테의 경우 독일 국가대표 선발에 활용할 목적으로 매겨지기 시작하여 오랫동안 유의미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독일 축구계에서 공식 시상 중 가장 유서 깊은 상으로 평가받는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역시 독일 기자 협회(VDS)의 투표를 취합하여 키커에서 수여하는 상일 정도로 독일 축구계에서 키커지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1970~80년대 키커의 평점은 단순한 언론사의 평점이 아닌 유의미한 지표로써 활용될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80] 79/80 시즌을 일례로 들자면 호르스트 흐루베슈의 경우 팀이 승리한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고도 3점 혹은 4점을 받은 횟수가 6차례나 있고, UEFA컵 득점왕을 차지하며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UEFA컵 준우승을 이끈 하랄트 니켈(Harald Nickel)은 멀티골을 넣고도 3점을 받은 적이 두 차례나 있을 뿐 아니라 해트트릭을 기록하고도 2점을 받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를 통해 당시 공격수에 대해 상당히 까다롭고 박한 평가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키커 평점 1점과 2점을 받기 위해 어느 정도 활약을 보여야 했는지 알 수 있다.[81] 79/80 시즌 파울 브라이트너 1.87점, 81/82 시즌 베른트 프랑케(Bernd Franke) 1.94점[82] 범위를 1970년대까지 넓혀도 공격수 중 시즌 평점 1점대를 받은 공격수는 단 한 명뿐인데, 78/79 시즌 1.94점을 받은 케빈 키건이다. 참고로 케빈 키건은 78, 79년 2년 연속 발롱도르 수상자이다.[83] 82/83 시즌 키커 평점에서 루메니게와 푈러에 이어 공격수 3위를 기록했는데, 평점으로 시즌 베스트 11을 선정하는 현재 방식이라면 82/83 시즌도 평점이 낮은 밀렙스키를 제치고 시즌 베스트 11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84] 참고로 랑리스테 등급은 애초에 서독 시절 국가 대표를 뽑을 때 기준점이 되라 만든 등급으로 K 등급에서 말하는 국가대표에 거론될만한 선수란 건 독일 대표팀을 뜻했으며, B 등급의 경우 랑리스테 초기만 해도 번뜩이는 활약을 하던 유망주들이 많이 받던 등급이었다. 이런 옛 명칭과 기준을 개선하기 위해 키커는 20/21 시즌 등급 B를 없애고, K 등급은 기존의 'IM WEITEREN KREIS'에서 내셔널 클래스라는 명칭으로 변경하였다.[85] 1980년대 당시 독일인 외 모든 선수들은 포지션과 상관없이 외국인 부문으로 분류되어 순위가 매겨졌다. 88/89 시즌부터 독일 선수들과 통합되어 포지션 별로 평가되었고 이에 따라 커리어 막바지인 88/89 시즌 미드필더로 뛰던 차범근도 '수비형 미드필더로' 8위에 랭크되었다.[86] 물론 이후 레반도프스키, 리베리, 로번 등 기록이나 활약면에서 차범근보다 뛰어난 용병들이 더 늘어났기 때문에 현재는 이보다 평가가 떨어질 수도 있다.[참고] 해당 이미지는 현 독일 키커지 Christoph Huber 데이터 편집자(Datenredaktion)에게 받은 자료에서 센터 포워드 순위 부분만 편집하여 올린 것으로 위키에 사용하는 것을 승낙 받았으나 저작권상 이외에 일체의 어떤 용도로도 활용할 수 없음을 명시.[87] 차범근은 전 포지션을 통틀어 유일하게 순위에 오른 아시아 선수다.[88] 다만, 제일 처음 차범근을 소개할 때 나오는 프랑스 풋볼 선정 세계 4대 축구인, Kicker 선정 80년대 최고의 선수는 출처가 없으며,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다.[89] 어떤 경기에선 골을 넣었더니 상대방 수비수가 인종차별적 말과 함께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다만 이건 독일에서의 일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클럽 에버딘과의 UEFA컵(유로파 리그 전신) 경기에서 일어난 일이다. 독일은 오히려 인종차별이 비교적 적은 국가라 볼 수 있다. 프리미어 리그세리에 A는 인종차별 관련 기사가 자주 나오는 반면, 분데스리가는 그런 기사를 보기 힘들다. 차범근 또한 자신이 실력으로 보여주니 인종차별을 하는 독일 팬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다만, 독일을 벗어나 유럽 대회에 나가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90] 사실 서양 축구 선수 기준으로도 딱히 작은 키는 아니지만, 독일에 왔을 당시 말랐던 탓에 키가 작은 걸로 느껴진 듯. 그는 진출한 뒤에 서양인들의 피지컬에 대항하기 위해 징그러울 정도로 육류를 먹으며 몸을 불렸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한국 음식을 먹고 경기를 하면 초중반에 허기가 져서 힘이 떨어졌는데, 스테이크를 두 덩어리 먹고 뛰니 경기 내내 배가 든든해져 효과를 봤다고 한다. 그래도 피 뚝뚝 떨어지는 레어 스테이크를 울면서 먹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애초에 그건 취향에 맞춰서 더 구워 먹던지 하면 될 일이다.)[91] 사실 이는 뒤의 영어를 전혀 못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여겨진다고 하는데, 사실 축구 선수가 대학교 나온 것 자체가 당시 독일에도 그리 흔한 이야기가 아니다. 당시에는 한국이 좋게 봐도 '이제 겨우 입에 풀칠은 해가는 나라' 이상의 이미지를 가지기 어려웠다는 것도 생각하자. '명문'이라는 인식까지는 없더라도, 위에서 말한 수준의 국가에서 대학까지 나온 축구 선수라는 건 당시로서도 놀랄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고려대학교의 영문명은 Korea University라 더 놀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 주장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우선 독일에는 '명문대'라는 개념이 없으며, 당시 대한민국의 위상을 생각해 볼 때 유럽에서 '아시아의 작은 나라의 대학교'에 대한 인지도가 전무한 수준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다만 상기한 대로 고려대학교의 영문명을 듣고 한국 최고의 국립대학쯤이겠거니 짐작했을 가능성은 있다. 독일을 비롯한 대다수 유럽 축구 선수들이 대학을 안 가는 이유는, 대학은 '가면 좋은 곳'이 아니라, '재능이 없어서 딴 직업 알아봐야 할 때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차범근 본인이 우스갯소리로 언급한 내용이니만큼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고, 한국인들 인식에 맞춰 경험담을 살짝 비틀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그대로 말했다면 농담이 아니라 한국 교육 제도에 대한 비판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실제 현지인들의 놀라움은 '그런 명문대를 나온 선수가 축구까지 잘하네?'가 아니라 '이렇게 축구를 잘하는 선수가 어째서 대학까지 가야 할 정도로 프로 축구 환경이 안좋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은골로 캉테가 무명 시절, 축구 선수로의 성공을 확신 못해 회계 공부를 한 것이, 한국에서는 '회계사 자격증을 딴 엄친아'로 알려지는 것과 비슷한 케이스.[92]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뽑은 선수 45명과 감독 4명이 후보 대상으로 15,000명 이상의 프랑크푸르트 현지 팬들이 참여하였으며 영구적으로 존치한다고 한다. 해당 선정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문서의 레전드 목록 참조[93]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연대기를 다루고 있는 책으로 단행본으로 출판된다.[94] 선수 24인+감독(코치) 3인[95] 구자철의 말에 따르면 언론에 노출이 안될 뿐 분데스리가 및 독일 축구와 관련된 상당히 많은 행사와 인적 모임에 참여를 한다고 한다.[96] 총 4000여 명 이상의 현지 팬들이 참여하였다. 차범근은 공격수 중 3위에 해당하는 득표를 받았으나 아쉽게도 베스트 11에는 선정되지 못했는데, 레버쿠젠이 선택한 베스트 11의 포메이션이 4-4-2다 보니 투톱에서 서브로 밀려났기 때문이다.[97] 5년 뒤 열린 30주년 행사에서도 초청받았으나 개인 사정으로 불참.[98] 레버쿠젠은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한 79/80 시즌 처음으로 분데스리가에 승격했다.[99] 2주 동안 레버쿠젠 서포터즈 약 12,000명이 투표하여 선정하였다.[100] 1999년부터 2002년까지 레버쿠젠에서 뛰었다. 발락의 출생지는 구 동독의 괴를리츠라는 도시이다. 하지만 발락이 태어날 당시는 서독과의 해빙기였기 때문에 서독 스포츠 채널을 볼 수 있었다.[101] 엄밀히 말하면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코치로서 요청한 건 사실이다. 다만 선수로서 요청인지는 확인된바 없다. https://www.youtube.com/watch?v=gjfg4NpwSIQ[102] 해당 이야기는 1980년 유니세프가 주관한 세계 올스타전에서 당시 서독 국가대표팀 감독이자 세계 올스타팀 감독을 맡은 유프 데어발이 올스타전이 끝난 후 맹활약한 차범근을 극찬을 했는데 그 내용 중 "현재 서독 대표팀 왼쪽 윙포워드가 부실하다. 차붐이 독일 선수였다면 당장 기용하고 싶다"라는 내용이 와전된 것이다.[103] 물론 경기 자체가 첼시와 삼성의 5년 후원 계약 체결을 기념하는 경기인 만큼 무리뉴 역시 특유의 독설보다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으며 수원을 만만치 않은 팀으로 평가하거나 한국 선수들을 첼시에 영입하고 싶다는 등 립서비스 발언을 많이 하기도 했다. 가장 비중을 많이 차지한 내용은 역시나 삼성과 첼시의 협약에 관한 부분이었고 자신의 첼시 계약과 삼성의 후원 계약 기간이 같다며 좋아하기도 했다. 물론 차범근에 대한 발언만큼은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닐 것이다.[104] 당시 감독은 위르겐 클린스만으로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2골을 기록했다. 본프레레호와의 친선전 패배 당시에도 독일 감독이었다. 다만 당시 위르겐 클린스만은 전술을 요아힘 뢰프에게 다 일임했다고 한다.[105] 사실 뢰프의 선수 커리어는 성공적이라 말하기 힘들다. 일종의 립서비스라고 봐야 할 듯.[106] 대한축구협회와 차범근은 현재도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것으로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하다.[107] 당시 중계 멘트를 그대로 옮겨 적자면 "이런 경기는 한강 고수부지 가면 볼 수 있죠?"라고 말했다.[108] 레버쿠젠의 모기업이 약제 아스피린의 제조사 바이엘이기 때문이다. 팀 엠블럼에도 사자 두 마리가 좌우에서 아스피린을 붙들고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109] 뛰어난 독일 문학가에게 수여하는 Italo-Svevo-Preis를 비롯해 독일의 문학상을 여럿 탄 풍자 작가이다.#[110] 차범근의 '범'자가 호랑이를 뜻한다고 얘기하기도 했는데, 사실 차범근의 범은 '법 범()'자를 쓰기 때문에 잘못된 정보다. 호랑이를 뜻하는 한자는 '범'이 아니라 '호()'다. '범'은 호랑이의 순우리말이다. 그래도 이런 동음이의어에 따른 의미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2013년에 토니 예보아와 함께 진행한 프랑크푸르트 팬미팅에서 차범근의 통역을 맡은 아내 오은미가 차범근의 이름의 뜻을 호랑이의(범) 뿌리(근) 차라고 설명하기도 했다.[111] 1979년부터 1982년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범근과 함께 뛴 동료로 분데스리가에서만 345경기 46골을 기록했으며 포지션은 미드필더다. 프랑크푸르트 생활 이후 FC 바이에른 뮌헨에서도 200경기 이상을 뛰며 분데스리가 4회 우승을 경험했으며 프랑스 리그에 진출하여 AS 칸에서 당시 떠오르는 천재로 서서히 이름을 알리고 있던 지네딘 지단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112] 의료적인 효과를 비롯해 근력 훈련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만큼 현재 분데스리가에서도 계속 메디신 볼을 이용한 훈련을 하는데 1980년대와 달리 각 구단마다 훈련 방식이나 활용이 다양하다.[113] 메디신 볼은 5~7kg의 무게가 일반적이지만 좀 더 크고 무거운 메디슨 볼을 훈련용으로 만들어 이용했다고 한다.[114] 차범근과 같은 시기에 분데스리가를 뛰었고 쾰른 체육 대학에서 지도자 교육을 함께 받은 펠릭스 마가트VfL 볼프스부르크 감독을 맡은 2011년에 이런 1980년대식 메디신 볼 훈련을 팀의 피트니스 프로그램에 넣어 실행하기도 하였다. 유로스포츠에서 해당 훈련을 취재를 간 적이 있는데 기사에 따르면 언제까지 해야 하냐는 선수들의 질문에 마가트는 '토할 때까지 할 것이다'는 경악스러운 답변을 했다고 한다.#[115] 한 명은 바닥을 보고 주저 않아 있고 한 명은 드러누워있는데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 때문에 마치 다리를 감싸 쥐고 앉아있는 것처럼 보인다.[116] 차범근의 이런 마인드는 경기를 뛰는 자세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차범근의 회고에 따르면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뒤 감독 및 코치진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가 "90분 내내 온 사력을 다할 필요가 없다.", "페이스를 조절할 줄 알아야 더욱 성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는데 레버쿠젠에서 뛸 시기에 이르러서야 그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고 한다. 사실 차범근은 경기에서 죽어라 뛰지 않으면 선배들에게 흔히 '빠졌다'는 소리를 들으며 혼나던 한국식 스포츠 문화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경기 내내 열심히 뛰어야지 저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차범근은 경기가 끝나고 나서도 힘이 남아있음을 느끼면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다고 한다.-그건 그냥 현역시절의 감독님이 대단하신거에요-[117] 차범근 감독 개인의 노력 부족도 있겠지만 정보를 구할려고 해도 지금처럼 온라인 인프라가 없다시피하던 시절이라 유럽의 최신 견해를 습득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차범근 감독은 -독일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도- 독일어나 영어 등 외국어 능력이 상당히 부족하기도 하다.[118] 수원 코치 시절에는 '4-4-2 전도사'라고 불리기도 했다.[119] 과거 독일도 마찬가지였는데, '마테우스'라는 걸출한 수비수 때문에 4백 전환이 굉장히 늦었다.[120] 훗날 압신 고트비가 이 보직으로 감독 커리어까지 가게 된다.[121] 이 때는 A매치로 인정되는 성인대회였다.[제외내용] 당시의 기사 출처가 없으나 소문만으로 퍼진 수상 내역으로는 프랑스 풋볼 세계 4대 축구인 (연도 불명), Kicker 80년대 분데스리가 외국인 선수 1위 (1989), UEFA컵 결승 2차전 맨 오브 더 매치 (1980)가 있다. 프랑스 풋볼 4대 축구인은 아래 수상 목록에 나와있는 슈테른지 4대 상승 인물과 프랑스 메이어지에서 선정한 80년대 외국인 선수 1위가 와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UEFA컵 결승 2차전 맨 오브 더 매치는 위키피디아에 처음으로 서술되었고, IFFHS가 위키피디아 내용을 인용하면서 소문이 퍼졌으나, 위키피디아가 이 내용의 출처를 첨부하지 않았으며, 당대에 UEFA가 UEFA컵 결승전의 최우수 선수를 선정했는지도 불분명하다.[122]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123] 팬 투표로 진행되었으며 출처는 해당 문서 구단과 팬들의 평가 참조[124] 차범근이 독일 올해의 선수(분데스리가 MVP)로 선정되었다는 정보는 날조이다. 분데스리가 공식 MVP가 아니라 지금은 폐간된 서독 지역 언론사 선정 MVP인 것. 실제 1986년 독일 올해의 선수는 하랄트 슈마허이다.[125] 서독과 동독으로 나눠져 있던 독일이 통일한 뒤 처음으로 동서독 출신의 선수들이 한 팀으로 뛴 경기로 세계 2차 대전으로 폐허가 된 동독 지역의 드레스덴시의 재건을 위해 개최된 자선경기다. 차범근은 이 경기에서 바비 무어자이르지뉴, 마리오 켐페스, 요니 렙 등이 포진된 세계 올스타팀에 뽑혀 동서독 연합 대표팀과 경기를 펼쳤고 2골을 넣는 활약과 함께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다.[126] 베스트 11에는 들지 못했으며 서브에 포함되었다.[127] K리그 감독 15명, 축구 해설 위원 5명, 기자 5명이 선정에 참여했다.[128] 공식적으로 확인 가능한 어시스트 5개 포함[129] 2020년 하세베 마코토에 의해 경신[130] 공식적으로 확인 가능한 어시스트 5개 포함[131] FIFA 공인 기록은 130경기[132] FIFA 공인 기록은 56골[133] 남자 축구 선수 최다 득점 기록으로 본래 남녀 통합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으나 2021년 지소연이 경신했다.[134] 11년 후 스테판 샤퓌자에 의해 경신. 2021년 8월 기준 8위[135] 92/93 시즌 울프 키르스텐에 의해 경신. 현재 역대 6위[136] 88/89 시즌부터 외국인 선수 부문이 폐지되었다.[137] 한국인이 유럽 클럽에서 300경기 넘게 출전해 100골 이상을 넣었다는 유일무이한 기록은 30년이 흐르고 나서야 후배에 의해 깨지게 된다.[138] 1979년 분데스리가 진출 후 국가대표 잠정 은퇴,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로 국가대표 복귀[139] 대한축구협회 기준 경기/골 기록[140] 대한민국 매체들은 훈장의 등급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으나 훈장의 형태를 볼 때 5등급인 공로십자장(Verdienstkreuz am Bande)으로 추정된다.[141] 차범근의 이야기를 엮은 장편 라디오 드라마[142] 다름슈타트에서 첫 경기 후 지역 방송에 편성된 차범근의 이적 및 경기 활약상을 다룬 15분짜리 특집 방송이다.[143] 차범근이 부당하게 차징 당하는 장면을 모아 차범근의 보호의 필요성과 와일드차징의 부당함을 다룬 특집 방송이다.[144] 갤스도르프에 의해 큰 부상을 당한 차범근을 다루고, 분데스리가 파울 완화 캠페인을 목적으로 제작된 토크쇼이다. 차범근이 직접 출연했다.[145]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활약상을 소개한 30분짜리 특집 방송이다.[146] 차범근의 레버쿠젠 이적 과정과 활약상을 담은 특집 방송[147] 대표적으로 1978년, 1979년 발롱도르 수상자 케빈 키건이 있는데 말보로 광고 계약을 비롯해 1981년 한 해 동안 광고로만 3억이 넘는 수익을 내어 당시 영국 스포츠 선수 중 최고 수익을 내었다.[148] 남양유업 광고료[149] 해태제과 광고료[150] 여담으로, 당시 차범근은 바이어 04 레버쿠젠 소속으로 뛰고 있었고, 모기업인 바이어가 저 당시에 이미 한국바이엘약품으로 진출한 상황이었기에 한국바이엘약품 쪽의 광고를 찍을 법했겠지만 해당 기업의 광고가 없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151] 다만 광고 수입이 최상위에 해당하지는 않았다. 광고 한 편의 단가는 가장 높았지만 스케줄 상 한국에서 많은 광고를 찍을 수는 없었어서 광고를 업으로 삼는 연예인이나 찍을 기회가 많은 국내 스포츠 스타들에 비해 총 광고 수익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152] 이 말에 대한 오해가 있는데 한국기자가 먼저 발락에게 "여기가 차붐의 나라인걸 아십니까?" 라는 질문에 발락이 답한 것이다. 사실 대화의 앞뒤 문맥을 생각해보면 저절로 답이 나오기는 한다. 입국하자마자 한 말도 아니고 인터뷰 중에 뜬금없이 여기가 차붐의 나라냐며 운을 뗄 리는 없기 때문.[153] 선수 시절 당시 차범근의 백업선수였다. 이후 독일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 사실 차범근도 해설자 시절 뢰프가 자신의 교체선수였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154] 차범근의 찬양시를 쓴 독일의 작가이다. 이에 관한 정보는 차범근/선수 경력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란에 나와 있다.[155] 원래 프란츠 베켄바워가 한 말로 알지만, 슛포러브에서 차범근이 베켄바워가 한 말이 아니라고 언급했다.[156] 다만 피구는 2019년 리오 퍼디난드가 진행한 인터뷰에서 본인이 본 최고의 선수 3명으로 펠레, 에우제비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꼽았다.[157] 해당 인터뷰에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대해 여느 아시아권의 팀과 달리 특이한 축구를 하는 팀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158] 여기서 최순호는 황선홍, 이동국, 안정환, 박주영부터 심지어 또 다른 전설적인 스트라이커인 이회택에 이르기까지 근성, 의욕 면에서의 단점, 약한 체력, 자기관리 부족 등 각각 모든 선수들의 크고 작은 단점을 언급했었다. 그러나 차범근 만큼은 단점을 언급하기는 커녕 불세출의 스트라이커라며 극찬을 남긴 것. 최순호 역시 대한민국 월드컵 최다 공격 포인트 기록의 소유자이자 당시 유벤투스 FC, 인테르 등에서도 노릴 정도의 재능과 능력을 가진 공격수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가히 차범근의 위엄을 알 수 있는 부분.[159] 이에 차범근도 "이 기록이 30년 넘게 이어졌고, 하세베가 발자취를 이어간다는 사실이 정말 자랑스럽다." 라고 격려를 해줬고, "하세베는 수년간 아시아에서 명성을 떨친 선수였고 젊은 선수들의 본보기와 귀감이 되는 선수다." 라며 극찬을 보냈다.[160] 다만 마라도나의 경우에는 차범근의 협상이 결렬되자 대체자로 데려온 것이기 때문에 말디니의 데뷔만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161] 베를린 장벽 붕괴의 시발점이자 동독 SED의 당 서기인 귄터 샤보프스키가 기자회견을 가진 게 1989년 11월 9일 오후 6시였으니,파일:차범근 대화의희열.jpg 이때는 한국시각으로 이미 11월 10일로 넘어갔던 상황이다.[162] 보통 운동 선수의 신체 능력은 20대 초중반이 전성기인데, 당시 현역 운동 선수인 20대의 차두리가 40대인 아버지에게 뒤졌다는 충격적인 말이다. 게다가 차두리가 한국 국가대표 선수를 통틀어 독보적인 피지컬과 체력을 자랑하는 선수라는 것까지 고려하면 정말 엄청난 신체 스펙이다.[163] 팀의 주장이자 원클럽맨 위르겐 그라보브스키를 비롯한 노장 선수들을 방출하고 새롭게 재편하겠다는 라우쉬 감독에 따른 갈등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차범근/선수 경력 참조[164] 연세대학교 종교음악과 출신으로, 차범근과는 미팅으로 처음 만나 결혼했다. 1970년대에 여성이 대학을 다녔다는 건 상당히 좋은 집안이 아니었다면 매우 힘든 일이었다. 실제로 차범근 또한 곱게 자란 아내가 이 시기에 너무 고생을 많이 했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165] 이와 관련해서 유명한 이야기로는 차범근은 자동차를 상당히 좋아해 만약 오은미가 돈 관리 안 했으면 자긴 진작에 집안에다가 각종 차를 종류별로 모아놨을 거라고 한 이야기. 차범근이 오은미와 차를 사러갔다가 축구장 만들어준다는 이야기에 포기했다고. 그렇게 만들어진 게 경기도 연천의 축구장이다.[166] 참고로 아래 사진은 저출산 광고를 찍기 위해 따로 찍은 사진이 아니라 당시 서독의 스포츠 전문 잡지 중 하나인 푸스발 보헤에서 차범근을 1979년 스타플레이어로 선정하며 성탄절 특집 기사에 차범근의 자필 편지와 함께 기재하기 위해 찍은 사진이다. 한마디로 차범근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족사진을 정부 마음대로 저출산 공익 광고에 가져다 쓴 것이다. 이런 것이 너무나 당연시 되던 시절[167] 태어났을 때, 뉴스 제목이 '차붐 할아버지 되다'인데 당시 차범근의 자녀로서는 차두리의 인지도가 워낙 압도적이었던 탓에 딸이 있는 줄 알 리 없었던 네티즌의 상당수는 제목만 보고 '차두리(당시 미혼)가 사고친 줄 알았다.'고 댓글을 남겼다.[168] 여아인 첫째의 이름은 '아인'이다. 독일어(Ein)로 1.[169]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직전에 수원에서 열린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지네딘 지단이 교체되는 것을 보고 그가 부상당했다고 해설했는데, 그 말이 정확했다.[170] 또한 독일과의 준결승전에서 미하엘 발락이 결승골을 넣기 불과 몇 분 전에 "지금 상황은 절대로 조심해야 합니다. 단 한 방으로 경기가 끝날 수도 있거든요."라고 말했을 정도.[171] 물론 차범근 개인의 인성이 좋은 일화로도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차범근의 아들 차두리를 히딩크가 대표팀에 발탁한 것도 있다. 즉 히딩크와의 관계가 좋을 수밖에 없었던 것.[172] 원래 차두리는 축구 전문 언론인을 꿈꾸었다.[173] 무리뉴를 아는 사람은 알테지만, 축구계에서 자존심과 고집만큼은 세계 최고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강단 있는 감독이다. 그런 그가 먼저 다가와 차범근에게 악수를 청했으며, 허리를 숙여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174] 당시 차범근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력을 비판했는데, 당시 독일 국가대표 감독이던 루디 푈러는 차범근의 선수 시절 소속팀 레버쿠젠의 모기업이 제약회사인 점을 이용해 "아스피린을 너무 많이 먹은 거 아님?"이라는 농담을 했다가 자국인들에게 대차게 욕을 얻어먹고 찾아가서 사과했다고 한다. "감히 차붐을!"이라는 느낌보다 농담도 정도껏이지 너무 심한 말 아니냐는 비난과 경기력에 대한 비난을 함께 받았다. 이후 차범근도 훈련장을 가서 사과하고 시시덕거렸다고...[175] 월드컵을 비롯해 해설가로서 활동한 적이 있다.[176] 이촌동 충신교회 안수집사이다. 차범근의 신앙 생활은 국내 개신교계 내에서는 워낙 유명한 사실. 현역 시절 다른 동료 선수들이 성인잡지를 볼 때 차범근은 성경을 읽었다는 전 동료의 증언도 있다. 출처는 2013년, '안정환의 사커 앤더 시티 2화 차붐의 도시에서 손흥민을 만나다!'[177] 실제로는 반대로 김도훈이 불교, 최용수가 개신교이며, 만약 진짜로 종교 때문에 최용수를 기피했다면 최종예선에서 줄곧 최용수를 기용했을 턱이 없다. 실제 최용수의 컨디션이 떨어져 있던 것은 이후 경기에서 출전한 최용수의 폼으로 쉽게 알 수 있다. 고정운 또한 잘 내보내다가 일본전에서 선제골을 허용한 치명적인 실수 때문에 낙마한 것이지 그 전에는 아무런 문제 없이 기용했다. 참고로 고정운도 김도훈처럼 불교.[178] 단, 하석주는 후에 개신교로 개종했으며, 이동국은 집안이 불교일 뿐 본인은 불교색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알려진 것과 달리 홍명보는 오히려 어떠한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은 무종교인이다. 다만, 단체 생활이 많은 스포츠계에서 개신교 선수들의 전도가 활발하다 보니 감독의 호불호 이전에 일반적으로도 크리스천이 은근히 많다.[179] 아이러니하게도 동대문구에서 성남시에 이르기까지 일화 축구단에는 통일교 신자 선수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오히려 태반이 개신교 신자다. 드래프트 때문에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입단하는 것도 있지만, 구단 측에서도 선수들을 종교 가지고 흔들지 않았다.[180]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 배성재는 사내 선발을 거쳐 중계를 처음 맡은 상황이었다.[181] 그리고 SBS는 축구뿐만 아니라 야구에서도 이순철-정우영 콤비로 스포츠 중계의 세대교체에 성공했다.[182] 참고로 통역없이 독일어로 대화했다. 히딩크는 네덜란드인의 종특(?)이라 할 수 있는 다국어 구사가 가능한데 그 중 하나가 독일어고(독일어와 네덜란드어는 친연 관계에 있는 언어라 네덜란드인과 독일인은 어느 정도의 학습만 하면 서로의 언어를 쉽게 구사할 수 있다.), 차범근이야 분데스리가 시절에 독일어를 섭렵해놓은지라....[183] 이 때 히딩크는 방송 스탭에게 이 부분을 편집해달라고 요청했다.[184] 첫 출전이 1954년이었으니 선수단엔 월드컵을 경험한 이가 아무도 없었다.[185] 60억 야프 스탐의 뒤를 잇는 50억대의 가격대로 2위를 유지 중이다. 월드 레전드 선수를 포함하더라도 엄청난 상위권. 참고로 다른 유럽리그 전설 선수들은 스탐을 제외하고 20~30억대, 심하면 10억 이하로 폭락했다.[186] 차범근이 1997~1998년 중 날짜 미상의 '전경'지에 기고한 글 중에서[187] 이 건에 대해선 선수 시절 자기관리 개판으로 유명한 최강희 잘못이라는 게 축구계 중론.[188] 루메니게와 브라이트너라는 이름만 듣고 감이 안 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데, 둘 모두 뮌헨 명예의 전당에 오른 레전드다. 루메니게는 발롱도르 2회에 빛나는 80년대 최고의 공격수였고 브라이트너는 수비수의 위치로 발롱도르 2위까지 오른 당대 최고의 사이드백. 현 시대의 선수로 따지면 각각 레반도프스키와 람 정도가 비견될 만 하다. 참고로 이 중 루메니게는 현 뮌헨 CEO를 맡고 있기도 하다. 쉽게 말해서 한국인이 '좀만 더 노력했으면 레반도프스키급도 될 수 있었는데 아쉽게 그 바로 아래 급에서 멈춰버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 무서운 건 이 말을 부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차범근은 군문제로 3년을 낭비하고 군문제로 독일 진출이 한차례 무산되기도 하면서 독일에 진출하는게 많이 늦어졌었다. 26살에 진출했는데 만약 차범근이 20대 초반에 빠르게 독일에 진출해 선진 축구를 경험했다면 더 엄청난 커리어를 쌓았을 수도 있다.[189] 대표적으로 마인츠에서 뛸 당시의 박주호. 2014 브라질 월드컵 특집 다큐에서 차범근이 마인츠에서 뛰는 구자철과 박주호를 찾아갔는데 박주호가 발가락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해있자 들고 간 것이 하리보. 병실에서 나가기 전 "꼭 먹어"하며 챙겨주는 부분에서 하리보 사랑을 엿볼 수(?) 있다.[190] 당시 승부차기 제도가 국제 축구 대회에 적용된 게 2년밖에 안 된 상태고, 그때 당시에 UEFA 유로, FIFA 월드컵을 제외하고는 국제 축구에서 시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36년 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결승 당시 남북전이 다시 성사되었는데, 이번에는 대한민국이 120분간의 혈전 끝에 임창우의 극적인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해서 28년 만에 금메달을 얻었다.[191] 1973년 제정되어 1995년까지 쓰인 번호판으로, 이런 번호판이 달린 차는 못해도 20년이 넘은 차이다.[192] 5년 뒤 진행된 30주년 행사에는 개인 사정으로 불참.[193] 2014년 브라질 월드컵 특집 다큐에서는 배성재가 대놓고 "어엿한 이 집의 주워 온 아들"이라는 언급을 했고, 2016년에는 배성재의 TEN 방송 시작 때 전화 출연을 하기도 했다.[194] 사진을 보면 장지현, 차두리도 보인다. 또한 SBS 스포츠국, 타 부서 구성원들과도 사이도 돈독해 PD와 잘 지내고 다른 사진에는 장예원, 박현석도 보인다.[195] 얼마나 격하게 반응했냐면, 칼럼이나 발언을 통해 축구팬들을 직설적으로 비판했는데, 차범근이 누군가를 그것도 축구팬에 대해 이 정도로 격하게 반응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196] 결국 한국 대표팀이 독일을 꺾는 기적을 이뤄내자, 경기 후 라커룸으로 달려가 선수들과 펑펑 울었다고 한다. 경기 후 슛포러브 팀의 영상#에 출연했는데,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있었고, 차범근 본인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평소 점잖은 이미지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모습을 보였다.[197] 실제로 차범근과 신태용 둘은 사적으로도 교류하는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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