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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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다른 무기와의 비교
6. 역사
7. 가공 매체에서의 창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 Spear

길다란 장대 끝에 뾰족한 끝 혹은 칼날이 있어, 휘두르고 찌르고 베고 던지는 게 가능한 병기. 보통 길이에 따라서 단창과 장창으로 구분한다.


2. 역사[편집]


창은 인류가 역사 초창기부터 사냥용으로 쓴 유서깊은 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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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을 든 후부터 대형 포유류를 멸종시켰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에 따르면 인간은 수십만~수만 년 전부터 가는 곳마다 대형 포유류를 족족 멸종시켜 왔다. 위의 그림처럼, 현존 아프리카 코끼리보다 훨씬 거대한 매머드조차 인간 앞에서는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어야 했다. 그 원동력이 창이다. 인간이 확실하게 먹이사슬 최정상에 올라선 시점은 창을 쓴 후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창은 찌르기 공격의 접촉면적이 아주 작기 때문에 운동에너지의 효율성도 뛰어나서, 잘 만든 창에 적당한 힘과 기술이 실리면 베는 무기두들겨 패는 무기에 비해 훨씬 확실하게, 하마 같이 무식한 피부와 근육도 한 방에 뚫어 버릴 수 있다. 거기에 두 사람 이상 조직력이 더해지니 동물에게는 정말로 답이 없는 것이다. 기린, 아프리카물소, 심지어 하마조차 인간의 집단 투창 짤짤이를 버티지 못하고 과다출혈쇼크로 쓰러진다.

기본적으로 인간 자체가 의외로 신체적 스펙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인간도 스스로 잘 모르는 능력이지만, 수십km 이상을 계속하여 뛰거나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지구력과 무언가를 집어 던질 수 있는 힘만큼은 인간이 모든 동물을 통틀어 가장 우수한 편이다. 물론 운동부족에 시달리기 일쑤인 현대인 대부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겠지만, 어차피 천부적으로 타고난 스펙이라 훈련하고 단련하면 충분히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인간이 마라톤행군, 야구를 할 수 있는 이유도 이것이다.

창이 준 또 다른 의의는, 사냥과 전투에서 개인 무력에 의존하는 비중이 매우 줄어 들었다는 점. 현장까지 쫓아올 수만 있다면, 그리고 조직력을 갖추면 전술(진형), 다양한 작전(치고빠지기나 유인, 함정 등)으로 개개인에게 특별한 무력이 없어도 맹수들을 언제든 사냥할 수 있게 됐다.

사용법을 익히기 쉽고, 공급이 용이해서 세계 어디에서나 인간은 창을 수렵과 전투무기로 사용했다. 다만 대양에 의해 고립되어 있던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는 부메랑을 먼저 개발했기에 석창을 수렵, 전투용 병기로 사용한 시점이 상당히 늦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사냥꾼이 창을 가지고 다녔고, 보어스피어 같이 서양에도 사냥창이 있었다.

고려조선에서는 호환이 발생하면 관청에서는 사냥꾼들을 모집하여 퇴치하였다. 이때 호랑이 사냥꾼들은 이나 조총 몇 발로 타격을 준 후 계속 추적하여, 마지막에는 창으로 직접 찔러 쓰러 뜨리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다.[1]

이후 싸움 규모가 부족 단위를 넘어 국가 단위 전쟁으로 커져가면서, 창은 수렵도구보다는 전쟁무기로 쓰인다. 에 비해 제작비가 저렴하며 대량생산이 쉽고[2], 진형짜는 법, 찌르는 법만 집중적으로 훈련해도 (개인전이 아닌) 전쟁터에서 제구실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훈련기간[3]과 병력확보에 어떤 무기보다 수월했다. 그래서 조선의 '검계' 등 고대~중세의 깡패집단들이 은 흔히 가지고 다녔지만, 창을 들고 다닌 경우는 드물었다. 현대의 갱단이나 조폭이 권총, 커봤자 기관단총까지는 가지고 다녀도 돌격소총을 들고 다니지는 않는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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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폴암의 예시.

창은 기본적으로 끝부분에 있는 창날로 찌르는 무기이다. 그러나 창의 자루 부분을 타격 병기로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며 제대로 타격했을 때의 위력도 생각보다 뛰어나다. 쇳덩이가 달린 막대기를 전력으로 휘두르면 타격무기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중국에서는 봉술과 창술의 발달이 상호보완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으며, 전국시대 일본에서는 장창병들이 일제히 창을 들어올렸다가 내리치면서 그 타격으로 상대편 진형에 피해를 주는 전술을 구사하기도 했다.

길이를 최대한 늘린 장창의 경우 일대일이나 정면싸움은 우월한 길이로 제압할 수 있었으나 측면으로 적이 소수라도 돌아올 경우 측면을 지켜주는 다른 아군이 없는 장창병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거나 단검이라도 들어 저항할 뿐이었다. 때문에 막무가내 징집병이 아닌 제대로 된 부대의 장창병들은 언제나 다른 병종들과 함께 측면을 보완해 상호보완적으로 운영되었고, 개인의 이탈은 옆사람에게 줄줄이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많은 훈련이 필요했다. 장창 자체는 사리사처럼 고대에 이미 한번 등장했지만 로마에게 패배한 뒤 주력 병기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그 로마조차도 정면 힘싸움에 한해선 극강의 위력을 자랑하는 장창병을 보조부대로 종종 운영하기도 했으며, 특히 파르티아의 기병들과 머리끄댕이 잡고 드잡이질을 하던 동방의 군단에서는 단창과 함께 장창도 꽤나 자주 사용되었다. 로마의 동/서 분할 시기 즈음 가면 주력이 기병으로 전환되며 보병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자 장기간의 훈련과 보급을 받은 정예 보병이 대폭 줄어들었고 그 때문인지 보다 다루고 훈련하기 쉬운 란케아를 다루는 창병들이 정규 군단병 내에서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13세기 들어서자 스위스, 란츠크네흐트 같은 전문 용병단은 많은 경험에서 나오는 파이크 운용으로 무적을 자랑했고, 파이크를 상대할때도 대검을 이용해 멀리서 창자루를 자르거나 창을 쳐서 창병방진을 흐트려서 상대 창병방진에 깊숙히 침투하거나 아군 창병방진이 상대방 창병방진을 무너뜨리도록 지원하였다. 정면에서 흐트리기가 수월치 않거나 측면으로 공격하는 것이 더 나을 때에는 측면에서 돌격해 상대 장창병들을 박살내는 노련함을 보였다.

참고로 총안법에서 창은 도검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일부 폴암도 마찬가지. 사실 형법 등에서는 도검류에 무기가 될만한 날붙이 전반을 집어넣는다.


여담이지만,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에서는 사람을 공격한 인도호랑이가 주민 10여 명이 휘두른 막대기에 맞아 죽은 일이 발생했다[4]. 창 등 간격있는 무기를 집어든 인간 집단이 얼마나 막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3. 다른 무기와의 비교[편집]



창은 일반적으로 검보다 제작단가가 싸고 제작하기가 매우 쉽다. 굳이 금속이 아니어도 적당한 길이의 날카로운 무언가만 충족되면 되며 그것만으로 충분한 살상효과를 가질 수 있다. 일례로 죽창과 같이 대나무를 끝부분만 뾰족하게 자르더라도 매우 위험한 흉기가 된다. 조금 더 공을 들여 주변의 뾰족한 돌을 막대기의 끝에 줄로 묶기만 해도 완성된다. 또한 금속으로 만들더라도 창날에만 철을 투자하면 되는 탓에 중요한 자원인 철을 아낄 수 있었다.

다만 민간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검과 창을 비교했을 때, 검은 검집만 허벅지에 매달아 두면 운신에 불편함 없는 은닉과 휴대 용이성이 있었다. 따라서 배우기만 하면 거의 모든 상황에서 사용이 가능했지만, 창의 경우 휴대하려면 경비병이 잡아가는건 둘째치고창을 들고 다니거나 등 뒤에 매야 함으로 휴대성에 상대적 단점이 있었으며, 휴대한다 하더라도 필요할 때 거창하는 속도가 칼이나 곤봉에 비해 느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민간에서 창술은 일본의 고류무술쪽을 제외하면 전승되기 어려웠다. 단 단창을 이용한 창술은 사용법이 유사한 스몰소드에서 영향을 받아 발달할 수 있었고, 따라서 스몰소드 검법에서 발달하거나, 창과 특성이 유사한 봉술로 이어졌다. 창을 들고 다니면 역적이라는 말은 무협소설에서 쓰이던 문학적 창작이며, 중국을 지배하는 유목민족들은 한족이 무기를 든 것을 규제했지, 딱히 종류를 가리지는 않았다. 물론 이게 완벽하게 시행되진 않았다. 한족이 지배하는 시기나 조선에서도 무술을 닦는 것 자체를 규제하거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빌미로 썼을 뿐, 무기 종류를 딱히 따지지는 않았다. 즉 누군가가 사람들 불러모아서 무술과 신체단련을 하는 등, 군사훈련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숙청을 위한 빌미로 삼거나 반체제행동으로 규제를 했지,[5] 딱히 무기 자체를 규제하지는 않았다. 당장 조선시대 때만 하더라도 사냥꾼은 창을 가지고 다녔다.

검병 같은 경우 창병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6] 거의 모든 방면에서 대응할 수 있는 유동성이 있었지만, 이러한 장비를 제대로 다루려면 전문적인 훈련 과정을 통한 숙련이 필요하여 병사 하나당 유지비가 매우 비쌌다.

거기다 숙련도를 유지하기 위한 지속적인 훈련과 충분한 방호를 위한 장비의 보급에 들어가는 재정상의 문제로 로마의 레기온이나 에스파냐의 로델레로들이, 그리고 조선의 팽배수 등의 검병들은 동서를 막론하고 정예군으로 취급되었다.

반면 창은 높은 숙련도를 필요로 하는 검병들과 다르게, 위급할 때 농민을 징집하여 장창을 쥐어주고 훈련 몇 번을 끝으로 줄을 세운 뒤 탈영을 막기 위해 독전관을 세우고 방벽으로 세우기만 하면, 다른 병종들이 제 일을 해준다는 전제 아래에서 효율이 꽤 높다. 또한 중세 유럽은 행정능력이 사라지고 지역 하나하나가 각자도생하게 되면서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할 여력이 사라지다보니 징집병들로 머리수를 불리는 경우가 잦았으므로, 큰 훈련 없이 자리만 지켜도 제 역할은 해주는 창병이 숫적으로는 많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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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팔랑크스를 파고드는 로마군[7]

이처럼 창은 무장화 측면에서 매력적인 장점이 있는 만큼, 치명적인 단점도 있었다. 검에 비해 휴대성이 좋지 않고, 지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따라서 창은 보통 저숙련도 병력을 대량 소집할 필요성이 있을 때 주 무장으로 활용되었으며, 이렇게 징집된 병사들이 길이가 긴 창을 들고 대규모로 전개해 기병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곤 했고, 상대 측에서는 팽배수, 레기온, 도펠죌트너같은 검병들과 투사무기들을 이용해 창병진을 기병 돌격 이전에 와해하고자 했다. 다만 검병의 경우 특성상 기동전을 펼치며 싸워야 하고, 병과 특성상 오랜 양성기간이 필요했으며, 집단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도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창병에 비해 쉽게 양성되는 편은 아니었다. 투사무기 역시 활이나 투석구처럼 검보다 더 길면 길지 짧지는 않은 훈련시간이 문제가 되거나, 쇠뇌처럼 기술이 필요하다보니 대량생산이 어려운 편이었다.

총기가 등장한 후에도 창은 여전히 전장의 주력으로 남았는데, 스페인의 테르시오 방진처럼 근접전 능력이 떨어지는 초창기의 총병을 보호하기 위한 이동식 방벽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창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총검이 등장하고[8] 총병도 대기병 업무를 수행 할 수 있게 되면서 창병들도 전부 총병으로 교체되게 되어 전장에서 사라졌다. 또한 입문하기가 쉬울 뿐, 정예병 소리를 들으려면 창병도 상당한 훈련을 필요로 했다. 스위스 장창병의 경우 5년을 해야 쓸만하다는 소리를, 10년을 해야 고참병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9] 아예 스웨덴에서 북방전쟁같이 전쟁이 많아지자 자국군이 강군 취급받는데도 외국에서 고문관들을 데려왔는데 이들은 스웨덴군 장창병들을 보고 처음 서유럽 출신 고문관들이 파이크 제대로 집지도 못하고, 방진도 제대로 못 만든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예 한국같이 총병들에게도 도검류를 쥐어줘서 근접전을 수행하게 한 경우도 있다. 다만 이것은 소속된 집단에 대한 소속감, 충성도가 높아야 하고 집단 상층부가 하층부에 대한 통제력과 영향력이 높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일본은 테르시오마냥 장창병의 비율을 높게 유지하였다.

창기병의 경우에는 양손으로 잡다가 겨드랑이에 창을 끼우는 카우치드랜스 방법을 도입하여 충격력을 극대화시켜 냉병기 중에서는 비할 데 없는 강력한 정면 충격력을 이용, 대 보병전을 수행했다. 하지만 창기병 돌격은 창보병들 처럼 대열을 이루지 않으면 효율이 몹시 떨어져서 열을 유지한 채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방향 전환이 어렵고 측면이 약하며 상대도 순순히 아무 대책도 없이 정면 충돌해 주지 않는 데다가, 진형이 풀리거나 창의 거리 안쪽으로 파고들면 급격하게 불리해지는 단점이 있었다. 거기에 돌격거리 계산을 잘못 하기라도 하면 죽어나가는 건 창기병들 몫. 거기에 창에 상대가 100% 맞아준다는 보장도 없다. 19세기 영국군 내에서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훈련받은 검기병들은 검으로 창의 공격을 어떻게 받아내는지 알기 때문이다. 창기병들도 검도 가지고 있었지만, 급할 찰나에 빠르게 뽑아서 대응하기가 어려웠고 뽑는다 쳐도 검기병보다 검에 대해 숙련도가 떨어져서 발악밖에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훈련 강도와 기간도 일반 기병보다 강하고 길어 쉽게 양성할 수 없었다. 기병 전투는 측면 잡히는 쪽이 지게 되어있는 싸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래서 나폴레옹 이후로도 기병의 주력은 검과 총을 사용하는 후사르가 될 수밖엔 없었다.

보병들도 하도 당하다보니 마차, 거치형 방패, 말뚝, 이동식 목책, 마대자루, 기타 수단을 동원한 야전축성, 투사무기 도배같이 별의 별 대책들을 강구하여 가면 갈수록 이전에 비해서는 효용이 떨어지다가 아예 화기까지 등장하자 16세기에 기병창 돌격으로 대표되는 기병창과 중갑을 위시로 한 충격력 위주의 기병 전술이 쇠퇴하면서 같이 쇠퇴하였다. 아예 기병의 위상이 이전시대보다 확 낮아졌을 정도라 검기병들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예시를 든다면 1503년 4월 28일에 일어난 체리뇰라Cerignola 전투가 있는데 이 전투에서 활약한 에스파냐의 명장인 'El Gran Capitán' 코르도바는 1495년 세미나라 전투에서 스페인군이 프랑스군에게 패배한 뒤로 아르퀘부스 또는 아키버스라고 부르는(사용하는 부대명도 각자의 발음 차이 덕분에 아케버시어 또는 아르퀘부시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부대의 숫자를 크게 늘려놓고 있었던 것을 이용해 프랑스군이 잘 볼 수 없는 위치에 야전 참호와 토담을 만들고 총병과 쇠뇌(크로스보우)병을 다수 배치함으로서 프랑스군 기병대는 지근거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해야 했고, 총지휘관인 느무르 공작 루이도 그 피해자 중 하나로 기록되고 말았다. 이후 프랑스군의 포병대는 에스파냐군의 야전축성을 파괴하는 데 실패했고, 이후 에스파냐군의 기보 총돌격은 프랑스군을 패주시키며 에스파냐군의 승리를 확정지었다. 그래도 1512년 라벤나 전투에서는 여전히 기병이 승패를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덕분에 기병의 위상 약화는 백 년 정도 늦출 수 있었다.

1759년 7년 전쟁 당시 민덴 전투에서는 전투 중 명령 착오로 중앙에 있던 영국-하노버군 8개 보병 대대, 대략 5천명이 평지에서 정예 기병대가 버티고 있는 프랑스군 중앙으로 전진하는 자살행위를 저지르게 되는데 이를 보고 7천 5백 명의 프랑스 기병대들이 5천 명의 영국군을 항해 돌진했지만 3번에 걸친 돌격에서 27미터 거리에 들어왔을 때 영국군이 쏜 사격을 맞고 전부 실패했다. 심지어 마지막 돌격에선 메종 뒤 루아(국왕근위대)기병여단이랑 카라비니에 드 프랑스(프랑스 기총병대)라는 프랑스 최고의 기병 2천을 투입했는데도 대기병 방진조차 짜지 않은 영국군 23보병연대 로열 웰시 퓨질리어한테 막혔다.

이후 창기병은 울란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거진 사라졌다. 물론 동양의 경우에는 동원되는 숫자가 서양과는 아예 차원이 다르고 게다가 대량의 병력이 발사하는 투사무기에 의해 이득보다 피해를 더 볼 확률이 많아 창기병이 전열 돌파를 위해 동원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팔기군 재현만 보더라도 갑옷을 충실히 갖춘 건 검이나 다른 근접전 무기를 든 경우고 창을 든 경우는 이보다는 경장으로 입거나 아예 궁기병처럼 입기도 했다. 서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서 흉갑이라던지 방어구를 충실히 입은건 총을 가진 검기병 또는 검을 든 총기병들이었다. 그래도 창기병은 울란과 퀴레시어를 적절히 조합해서 쓰던 나폴레옹 덕분에 나폴레옹 전쟁 이후 약간은 살아났지만 이미 주력은 이전시대부터 그랬듯 총을 가진 검기병 또는 검을 든 총기병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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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카봉

창보병들의 경우 로마시대까지도 정면 힘싸움에서는 대적할 무기가 없었다. 다른 무기들이 어느정도 공간이 필요하거나(대부분의 냉병기) 길이가 짧은 반면(글라디우스 등의 짧은 검) 창은 찌르기라는 특성상 좁은 공간에서도 전투력이 발휘된다는 특징과 길이가 길다는 점을 이용해서 사정거리와 숫자의 힘으로 상대를 짓밟을 수 있었다. 위의 그림만 봐도 창을 쳐내고 들어가려 해도 첫번째 창병과 근접전을 벌이기까지 창이 최소 세 개다. 그러다보니 창진을 상대로 정면돌격하는 병사들은 그야말로 갈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창병방진은 방향전환조차 어려울 정도로 기동성이 낮기에 전술행동이 어려워 단독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대표적인 전투를 뽑자면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는 측면공격으로 무너뜨렸고 피드나 전투에서는 정면승부에서는 무참히 패배했지만 구릉지로 팔랑크스를 유인한 후 팔랑크스의 진형이 혼란스러워지자 전면에 생긴 틈을 통해 무너뜨렸으며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도 불리한 지형으로 유인한 후 정면에서 싸움을 걸어 무너뜨렸다.

또한 단창이야 구석기 시대부터 잘만 만들어 썼지만 장창의 경우는 조금 다른 게, 세조 이후 조선 후기인 1625년에 경기도 속오군에 화포수(火砲手) 3000명, 장창수(長槍手) 1000명, 대검수(大劍手) 1000명씩을 조직하기 위해 무기를 조달하려고 했지만 10년 뒤인 1635년에도 창대로 쓸 목재 조달이 되질 않았다. 조총(조선군에서는 조총병이 화포까지 맡은 듯 하다고)들이나 장검들은 어떻게 조달이 되었는지 별 큰 언급이 안되었지만 창은 전혀 그렇지 못했는데, 대놓고 구굉이 장창 1000개를 만드려고 하는데 자루가 없어서 자루로 쓸 만한 나무를 구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 경기도의 참나무는 너무 무거워 들 수도 없어서 가시나무나 종가시 나무를 써야하는데 적합한 나무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고 한다. 장창을 제대로 만들 경우 창대로 쓸 재료의 문제(아무 나무나 쓸 수 없다)와 제작 난이도 문제(가운데의 심에 쓸 목재와 주변부에 결합할 부품 등)로 인해 생각보다 큰 돈이 필요했다. 조선기준 조총가격이 3.5석일 때 창대가격만 2석이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조선 선조도 피난 중 명군에게서 장창을 받아보고 장창을 만들려고 하는데 장창으로 만들 목재 재료가 부족하다(구득할 방법이 없다)는 보고를 받고 대나무 대를 이용한 창을 쓰라 할 정도였고, 인조도 조선에서는 창이 요긴한데 우리나라에서는 대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일이 매우 형편없다. 각별히 정밀하게 만들어 정벌하는 데에 쓰는 것으로 삼으라는 말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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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으로 총병을 보조하는 스페인 테르시오[10]의 Pike & Shot을 묘사한 삽화.

이렇게 테르시오의 등장으로 장창이 총병의 보조 병과로 전쟁 전면에 나오면서 다시 창병의 중요성이 올랐다. 중국의 기록이나 맘루크들의 전투경험에서도 드러나듯이 기병을 척살하는 용도로는 창은 효용이 매우 낮았고(특히 중국 기록에서 이것이 드러난다.) 오히려 검이나 다른 단병기를 든 병사들이 효과적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이는 기병이 굳이 창병 상대로 꼬라박을 이유가 없기에 그런 것일 뿐, 창 자체는 기병에게 효과적이기는 했다. 척살하는 용도로야 어쨌건 기병의 돌격을 막는 것은 단병기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총병이 등장하여 원거리 딜링을 넣어 화살정도는 튕겨내던 기병들조차 고꾸라뜨리게 되자 기병들은 총병을 향해 돌격할 수밖에 없었고, 총병들을 호위하던 창병들 역시 자신들이 기병 상대로 얼마나 효율적인지를 다시 증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병도 갑옷을 입어도 총에 어차피 뚫리는 판이니 비싼 전신 갑주 대신 중요 부위만 방호하거나 아예 갑옷을 얇게 만들어 입기 시작했기에 창병에게 본격적으로 데미지를 입게 되어 창병은 총병과 함께 제2의 전성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총검의 등장과 화약무기의 지속적인 발달로 창병의 보조가 없어도 총병만으로 충분한 저지력을 가지게 되었다. 창병이 막아야 하는 충격기병이 대부분 사라져 버리고 테르시오의 상징으로 대표되던, 방어력은 좋은데 돌격력이 애매한 장창 기반의 밀집 방진을 잡기 위해 사격전에 치중한 선형진(Line formation)이 나타났다. 결구 장창 방진은 날이 갈수록 사거리와 위력이 강해지는 대포와 총으로 인하여 입지가 좁아졌고 기다란 총에 뾰족한 날을 단 총검의 개발로 창의 자리를 대체하면서 전장에서 보병이 사용하는 전투용 창은 완전히 사라진다. 반면 카라콜로 한번 망했던 기병의 트렌드 변화로 기병용 병기로서는 장점이 남아있어 더 오랫동안 쓰이긴 했다. 이후 창은 주력 무기의 위치를 상실하고, 의장용이나 사냥용으로 주요 용도가 변화하게 되었다.

4. 창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창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창잡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창잡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창을 사용하는 사람을 창잡이라고 한다.

5.1. 창병[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창병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창을 사용하는 병과.


5.2. 랜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랜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창(랜스)를 사용하는 기마병.

6. 역사[편집]



6.1. 유럽[편집]


창은 그 특성상 밀집해서 사용할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 그것을 극한으로 끌어낸 것이 그리스 시대에 개발된 팔랑크스라는 진형이다. 롱 스피어의 장점인 길이를 최대한 늘린 사리사라는 장창이 등장하면서 상대의 접근조차 불허하는 단단한 진형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창의 특성상 길이가 길어질수록, 무게가 급증하고 다루기도 힘들어졌으며 그러다보니 정면을 제외한 측면과 후면을 들이치는 근접전에 대응하기도 힘들었고 진형이 깨질시 너무나도 취약하게 되었다. 때문에 전술적으로 움직이며 틈을 비집거나 만들면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로마군의 레기온에 그리스의 팔랑크스는 무너지고 동부 지중해는 로마 군의 손에 떨어진다. 물론 이 단점은 팔랑크스를 운용하는 국가들은 다 알고있었지만 이들은 국력의 한계와 타성에 젖어 단점을 보완하지 못했다.

고대 로마 말기 이후 동로마 제국과 그 근방을 제외하고 유럽에서는 중세 초까지는 로마수준으로 대규모 전투병을 유지하는 국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전과 같은 형식의 팔랑크스는 사라지게 된다. 물론 로마의 레기온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편제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고, 바이킹등의 민족들이 2~3미터의 짧은 창을 이용하여 사용하는 방진 같은 것은 계속 이어지지만 이 시대의 기록이나 이 시대풍으로 만든 문학작품들에게서 나타나듯이 전투의 주력이면서 군대의 정예는 검을 든 전사들이나 기사들이었고 실트론은 원래 검과 방패로 구성하던 것이니만큼 창은 징집병들의 무기로 지내게 되었다. 다만 스위스 용병이나 란츠크네히트같은 전문 용병단은 장창이 주무기였다.

그러다 화약무기의 개발로 주 무기가 화기인 총으로 변해갈 때 테르시오전술의 주축으로서 과거의 영광을 다시 차지하게 된다. 로크루아 전투이때의 창은 과거의 주력 병기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장전속도가 느린 초기형 총병과 상대방 총병과 창병에게 돌격해서 진형을 무너뜨리거나 전과확대를 꾀하는 검병들을 엄호하기위한 역할이었다.

18세기에 이르면 총의 성능향상과 대포의 발달로 인해 밀집대형이 자살행위가 되어버리고, 총을 이용한 라인배틀이 주류가 되면서 주무기로써의 쓰임새가 다했다. 19세기경까지 부사관의 지휘용/상징용 무기로 스펀툰이라는 단창이 남아있긴 했으나, 19세기 말이 되면 그마저도 깃발을 매다는 깃봉의 형태로 간략화되어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 오는 것을 제외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현대에도 총검이 남아있기는 하나 현대의 총검술은 단창술이라 불러야할지 하프소딩이라 불러야할지 애매할 정도로 총의 길이가 짧아진데다 거의 사장되다시피 한 상태이다.


6.2. 중국[편집]


영어로 쓰면 여전히 spear지만(병음으로 qiang이라고 쓰기도 한다), 무기의 분류법인 창 외에도 창(槍)이라고 불린 무기가 따로 존재했다. 즉 보다 큰 집합의 창과 그 안에 든 창이라고 보면 된다. 중국은 창(槍), 조선은 궁(弓), 일본은 도(刀)로 유명하다. 중국에서 창이 저리 각광 받는 이유는 바로 숙련의 용이성으로 인한 훈련기간의 짧음과 유교적 병농일치제에서 나오는 인구 수의 조합 때문. 특히 중국은 워낙 인구수가 방대하여 창의 사용 빈도가 다른 국가들보다 높았는데 병농일치제로 서양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징집병 물량을 뽑아내려면 창만한 물건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징집병이 아닌 숙련병은 검을 중시하여 한나라 시대 때 양손 검술이 융성했고, 이는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져 당 태종은 1000명의 검사들을 휘하에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의 양손검이라는 검의 길이가 87cm가 약간 못 되어서 서양의 롱소드에 비하면 좀 짧았다고 한다.

긴 나무 자루 끝에 크고 작은 날붙이를 단다는 개념은 이미 금속으로 된 무기를 만들기 시작하기 전부터 있었다.. 중국에서도 이런 개념으로 맨 처음 만들어진 찍는 가 있고, 이건 최소 상나라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유물이 발견되고, 찌르는 투겁창인 가 동주 시대에 유물이 있고, 둘을 합친 이 있었다. 본디는 슴베창을 특칭하던 槍은 전국시대 말에는 이미 등장했다.

창이 특히 발달했던 중국의 창은 기본적으로 긴 막대 끝에 나뭇잎 모양의 창날과 창날 밑에 영이라 불린 붉은색의 끈 묶음이 있다. 이 끈 묶음이야말로 중국 창만의 특징이라 할 만한데, 이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세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는 적을 찔렀을 때 그 사람의 피가 손잡이를 타고 내려와서 손을 미끄럽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간단한 장식이라는 설, 세번째는 칭기즈 칸이 서방 원정시에 적의 머리를 잘라서 창 끝에 매달아서 용맹을 과시한 것이 영이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칭기즈칸이 생각 외로 빨리 죽어 중국을 지배한 기간이 짧기에 세번째는 별 의미없어 보인다.

그리고 실제 창을 사용시의 효과를 보면 아마도 1번과 2번의 이유가 모두 맞는 것으로 추정된다. 영문 위키백과의 설명에 따르면, 이 qiang은 최고급 목재로 만들어서 세게 휘두르면 탄성을 받아 휘는데, 고수가 창을 휘두를 때 창날의 이런 기동과 영의 시야 방해 효과가 겹치면 적은 지금 창날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저 적을 견제 하기위해 창끝을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리기만 해도 눈길을 끄는 특유의 붉은 영 덕분에 적의 집중을 상당히 흐트리게도 할 수 있다.

창의 뒷면에는 창준(槍鐏 / Spear tail)이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창날이 있다. 이는 창을 지면에 고정시키기 위해 사용하거나 창날로 인해 생기는 무게 중심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하여 사용했고, 창날이 부러질 경우 임시방편으로 쓰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유사하게 그리스의 팔랑크스가 사용했던 사리사에도 달려 있었다. 다만 사리사는 지면에 고정시키기보다는 팔랑크스를 유지하며 들고 찌르는데 필요한 무게 중심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끝에 무게추 달았다. 민간용 창은 보통 준이 달려 있지 않다.

길이는 상당히 다양하나 최소한 사용자보다는 길어야 한다. 그러나 너무 길면 기동성이 떨어지니 사용자의 세배[11]가 넘는 길이는 안 된다는 중국 장병기의 원칙이 있었다. 단창을 제하면 2미터 이하는 없고 오히려 그 아래면 창을 쓰는 의미가 없다.

창의 단점을 해소하기 위해서 철창(鐵槍)이라는 것도 존재하였다. 나무를 전혀 쓰지 않고 모조리 로 만든 것으로, 당연히 속은 비어있지만 철이 다보니 자루가 손상될 염려가 적고 타격 무기로도 사용 가능하기 때문에 공격력은 크게 상승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무거워 다루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널리 쓰이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창이 전장에서 도태되면서 실전형 창술이 사라진 것은 서양 뿐이 아닌지라 남아있는 것은 민간의 물건들인데 이로 인해 대단히 섬세하고 오묘해 숙달하려면 긴 기간이 필요한 창과 창술이 남아 있다. 쿵후나 우슈에서 사용하는 창은 백낙곤을 이용해 만든 것으로 무협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창이 이것이다.

한편 중국은 화창의 영향인지 총(銃)이란 한자가 있음에도 총기류를 창(槍)이라 적는다. 이를테면 권총을 수창(手槍)이라 부르거나 기관총을 지창이라고 표기한다. 건슬링거 걸을 신창소녀神槍少女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6.3. 대한민국[편집]


조선 왕조 이전 고대에는 동예 병사들이 길이가 3장짜리[12] 긴 창을 들고 싸웠으며 보병 전술에 뛰어났다고 한다. 다만 여기서 쓰인 창은 매우 크고 아름다워 한 사람이 쓰기에는 힘들고 두 명 이상이 함께 썼다고 한다.[13]

삼국통일전쟁 말기에 일어난 나당전쟁에서 매소성 전투 때 역시 신라의 장창병이 큰 활약을 했다고 한다.[14]

파일:external/thumbnail.egloos.net/a0101184_496e395d2579d.jpg
안압지 출토 쇠창.출처 서양의 할버드와 비슷하게 생겼다. 해당 유물은 드라마 해신에서 신라군의 창으로도 나온 바 있고, 비슷한 유물이 개성에서 출토된 적도 있다. (북한에선 철검이라고 한다.)

조선의《무예도보통지》에서는 24기 중 창법이 첫번째로 소개된다. '장창이 무예의 왕이다'라는 구절도 적혀 있으며, 무예가들 사이에서도 '천 번 내려치는 것이 한 번 찌르는 것보다 못하다.'라는 속담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찌르는 것은 베는 것보다 빠르게 가능하며 힘을 집중하기에 좋다. 편곤도 사실상 조선 창기병이 멸종된 상황에서 숙련이 쉬우며 강력하여 기병의 장병기로 들어온 것이지 멀리서 찌르는것의 강력함은 변함이 없다.

임진왜란 당시 한 군관이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을 받아 창술의 기록을 남겼고, 훗날 스스로 연구하여 독자적인 세법을 추가하였다고 한다. 이중 명에서 배운 것이 12세, 스스로 깨우친 것이 12세로 모두 합쳐서 장창 24세라고 부른다.


파일:창석반.jpg

창 날 밑에 석반이 뚜렷하게 보인다.
한국의 장창이 중국의 장창과 다른 점은 혈조가 있고 날 아래에 석반이 있다는 점 등이다. 특히 석반을 날카롭게 갈아서 적이 자루를 잡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준은 거의 예외없이 달려있다. 길이는 1장 5척으로 3미터가 조금 넘는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에서 삼지창의 일종인 당파가 도입되었는데 사극의 포졸들이 들고 나오는 바로 그 물건으로[15] 장창과는 다른 운용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곁가지를 이용해 적의 무기를 걸어 재껴 적의 장병기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주 용도였다. 길이는 7척 정도로 장창의 절반 길이였는데 길이가 너무 길 경우 적의 공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의 무기를 막아낼려면 최전선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용도에 맞게 운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력과 담력이 필요했다고 한다. 또한 화전을 비롯한 화약무기를 발사할 때 받침대로 사용되기도 했다. 날 사이에 발사체를 끼우는 형식이었다고 한다.

죽장창의 길이는 2장으로 4미터를 훨씬 넘는 통대나무에 얇은 칼날을 달아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강도가 약한 단점이 있지만 길이가 길고 탄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기창[16]은 지휘용, 의전용으로서의 무기이지만 24기 중 하나에 속하며 세법이 따로 존재한다. 기창을 하나의 무기체계로 인정한 것도 조선군만의 특성. 물론 실제 전장에서 활용될 기회는 적었다.

조선 전기에 무과 시험과목에 기창을 포함했었고, 오위진법에서도 사용한 것을 보면 주로 보병용 단병접전에 썼으며, 개인 호신용 무술로서 남아있던것 같다.

《무예도보통지》에 따르면 2.5미터 정도의 창의 무게가 2.5 Kg라고 한다. 또한 창자루의 재질로는 척계광의 기록을 인용해 조목(稠木, 치밀하고 단단한 나무)이 제일이고, 합목(合木, 여러 나무를 합친 것(참조))이 그 다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6.4. 일본[편집]


일본식 창은 '야리(槍)'라고 한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야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5. 서아시아·북아프리카[편집]


아시리아궁기병과 함께 창기병도 발달했었다. 페르시아 역시 창이 발달한 나라 중 하나였다.

7. 가공 매체에서의 창[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창잡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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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활과 조총에 타격을 입고 도주한 호랑이가 마지막까지 상당한 체력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을뿐더러 사냥꾼은 가죽 값을 제대로 치기위해 주로 다리나 배 심장을 노렸으니, 호랑이 사냥꾼들에게는 확실한 사냥을 위해 갑옷도 필수품이었다. 경번갑 등 좋은 갑옷의 방어력은 일반인이 상상하는 정도를 훨씬 능가하여, 호랑이의 앞발 공격에도 몸통의 직접적인 외상은 확실히 보호할 수 있다. 물론 얻어 맞은 뒤 날아가 나무나 바위에 부딪히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다이렉트로 흉곽이 열리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 갑옷이야 부숴지든 찢어지든, 고치고 꿰매고 덧붙이고, 아예 새로 만들거나 사면되지만, 저 당시 의술로는 재수없게 호랑이 발톱에 찔리기만 하더라도 파상풍이나 패혈증으로 손쉽게 죽던 시대다. 그리고 호랑이 같은 맹수한테 치명타를 입은 신체는 현대 의술로도 완벽히 고치기 어렵다.[2] 참고로, 창날보다도 수급이 어려운 재료는 창대였다. 본격적인 군용 창은 3m를 훨씬 넘기는데, 이처럼 곧고 길며 단단한 목재를 대량으로 구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 어려웠기 때문이다. 목재는 금속과 달리 접합도 불가능하며, 설령 못 등을 활용해 억지로 붙여도 내구도는 바닥을 치게 된다.[3] 창에 비해 이나 은 매우 어렵다. 제대로 된 궁수, 검사가 되려면 아무리 열심히 수련해도 3~5년 이상은 너끈히 걸린다. 활로 이름을 날린 우리나라잉글랜드에서는 궁수 양성에 최소한 7년을 잡는다. 반면 창은 몇 주 동안 기본기만 열심히 굴려도 아쉬운대로 머릿수를 채우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하다못해 훈련없이 그저 창만 들고 늘어서 있어도 제법 그럴듯한 인간 방벽이 완성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식무기로서 그렇다는 것이고, 장창을 휘두르는 창술까지 들어간다면 오히려 검보다 더 높은 숙련도를 요구한다.[4] 심지어 이 주민들은 창도 아니고 그냥 긴 막대기를 사용했다.[5] 대표적인 사례로 정여립의 난이 있다.[6] 기병의 접근을 위해 진을 치거나 등[7] 이밖에도 로마군과 마케도니아군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삽화들을 보고 싶다면, 옆의 링크를 참조하기 바람.링크[8] 이 당시는 총도 총검도 길었기에 착검하면 거의 단창 수준이었다. [9] 코앞까지 달려들어 싸우는 육박전투에 필요한 담력, 그리고 우회기동에 필요한 제식능력이 요구되는 다른 무기들과는 달리 일단 대열만 맞춰서서 창을 찌르기만 해도 기본적인 전투력은 발휘할 수 있는 창은 신병에게 주기에는 좋은 무기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전술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베테랑이 되기 위해서는 결국 다른 병과들과 같은 수준의 훈련이 필요했다.[10] 테르시오는 전근대 스페인의 부대 편제 명칭이다.[11] 6척(180cm) 기준 5.4m. 서양 장창과 길이가 비슷하다.[12] 1장은 10척이고 삼국시대 한국에서 1척의 기준은 후한척인 23cm였으니, 계산하면 무려 6.9미터가 된다![13] 사실 창이 너무 길면 그 무게 또한 늘어나기 때문에 혼자서는 들기가 어렵다.[14] 하지만 이는 방송 다큐멘터리에서의 추측으로 재구성한 것일 뿐 삼국사기에 나온 매소성 전투 기록은 너무나 소략해서 전황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심지어 당측 기록도 아닌 신라측 기록임에도 기본적으로 기록해야 할 신라측 지휘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전투이다.[15] 사실 그 이전부터 한국에는 삼지창이 있었다. 초기 철기시대부터 유물이 나온것이 중요한 증거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한국의 삼지창은 중국의 당파와는 날의 형상이 달랐다.[16] 깃발 달린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