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두슈

덤프버전 :

파일:중국 공산당 문장 옐로.svg
중국공산당 당수


[ 펼치기 · 접기 ]

||<tablewidth=100%><tablebgcolor=#ee1c25> 1대(제1-5차) ||<width=33%> 임시(제5차) ||<width=33%> 2대(제6차) ||
||<rowbgcolor=#ffffff,#191919> 천두슈 || 취추바이 || 샹중파 ||
|| 임시(제6차) || 3대(제6차) || 4대(제6차) ||
||<rowbgcolor=#ffffff,#191919> 왕밍 || 보구 || 장원텐 ||
|| 5대(제6-10차) || 6대(10-11차) || 7대(제11-12차) ||
||<rowbgcolor=#ffffff,#191919> 마오쩌둥 || 화궈펑 || 후야오방 ||
|| 8대(13차) || 9대(제13-15차) || 10대(16-17차) ||
||<rowbgcolor=#ffffff,#191919> 자오쯔양 || 장쩌민 || 후진타오 ||
|| 11대(제18-20차) || || ||
||<rowbgcolor=#ffffff,#191919> 시진핑 || || ||



천두슈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파일:W020161128601490673900.jpg
중국 공산당 초대 총서기
출생
1879년 10월 8일
청나라 안휘성 화녕현[1]
사망
1942년 5월 27일 (향년 62세)
중화민국 충칭시 장진현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본명
천첸성(陳乾生)
정체
陳獨秀
간체
陈独秀
한국식 독음
진독수
영문
Chen Duxiu

실암(實庵)

중부(仲甫)
학력
와세다대학
직업
정치가
종교
무종교(무신론)
총서기
재임 기간

1대 1921년 8월 1일 ~ 1927년 8월 7일
1. 개요
2. 생애
3. 가족
4. 여담
5. 대중 문화
6. 관련 문서
6.1. 인물
6.2. 사건



1. 개요[편집]


근대 중국의 언론인, 철학가, 혁명가. 중국공산당의 창립자이자 초대 총서기(서기장)였으나, 1차 국공합작 실패의 책임을 지고 우경 기회주의자로 비판받아 실각되고 이후 제명되었으며, 사상적으로도 전향하여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병사했다.


2. 생애[편집]


1879년 안후이성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1896년 지방에서 과거 시험에 급제했으나, 전통 학문에 회의를 느껴 일본 명문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 및 프랑스로 유학을 다녀왔다. 이후 1915년 상하이에서 '신청년'을 발간하며 신문화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자, 마르크스주의에 크게 경도되었다. 이때쯤 베이징대학 총장 차이위안페이의 초빙으로 베이징대학 문학원장이 되었다. 이후 리다자오와 의논하여 중국에서 공산주의 정당의 창당을 논의해 소련의 지원으로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을 창당하고 총서기로 취임하였다.

1920~1922년에는 천중밍과 협력하여 광동의 교육개혁 운동을 지도했으며, 광동에서 임조함, 담평산, 천궁보와 함께 공산주의 소조를 결성했다. 쑨원2차 호법운동에 대해서는 이를 시기상조라 여겨 반대했다. 1921년 쑨원과 코민테른 대표 마링의 만남을 주선했고, 천중밍이 1922년 영풍함 사건을 일으키자, 천중밍과 단절하고 쑨원 지지 선언을 발표했다. 1923년 3차 광동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선전주임을 맡아 쑨원을 원조했다.

1922년 홍콩 선원 파업을 지원했으며, 1922년 코민테른이 중국국민당과의 당내 합작을 지시하자 반대를 표명했다. 그러나 결국 국민당의 개조, 쑨원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폐하는 조건으로 합작에 동의하여 중국국민당 당적을 획득하였다. 1924년 1차 국공합작이 일어난 이후 국민혁명에 종사했다. 이후 1927년 장제스4.12 상하이 쿠데타로 1차 국공합작이 사실상 붕괴되고 마일사변 등 반공 폭동이 계속 일어나는 와중에도 국민당에 대한 양보 정책을 취하며 국공합작을 지속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27년 7월 우한 정부마저 분공을 결정, 국공결렬이 확정되자, 결국 코민테른으로부터 "혁명에 기회주의적인 노선으로 일관했다"는 이유로 비판당했다. 이후 7월 12일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지시에 따라 공산당 지도부가 개조되자, 7월 14일 잠적하였고 7월 15일 총서기 사퇴 의사를 밝혔다. 난창 폭동 직후에 일어난 8.7 긴급회의에서는 기존 노선의 오류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했고, 취임한 지 6년 만에 총서기직을 박탈당했다. 이후 1929년 11월 중국공산당의 세력이 심각하게 약화된 책임을 지고 당적까지 제명당했다.

이후에는 트로츠키주의에 관심을 가져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합작했고 중국좌익반대파의 총서기로 취임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1932년 국민당에게 체포됨으로써 조직이 붕괴되었다. 1937년 출옥한 이후에는 공산주의 사상을 버리고 민주주의자로 다시 전향하였다. 그러나 장제스와 국민당에 대한 정치적 지지는 거부했으며 무당파적 입장을 취했다. 만년에는 충칭 인근에서 저술에 힘쓰다가 1942년 병사하였다. 중일전쟁 당시 충칭에 공산당 대표로 머무르던 저우언라이가 중병에 걸린 입원한 천두슈를 문병 오기도 했다. 저우언라이는 치료비에 쓰라고 거액을 건넸지만 천두슈는 거절했다고 한다.

공산당에서 제명되고 공산주의 사상도 버렸지만[2] 현재 중국에서는 그래도 당 시조로서 어느 정도는 평가받고 있다. 고향에 동상과 기념관까지 세워졌다. 다만 그와 별개로 중공 공식 역사상에서는 여전히 제명된 당적이 회복되지 않고 있다. 다만 공산당 창설자로서의 공적은 인정하는 어느 정도 편이고, 2021년에는 원래의 우경투항주의자에서 우경기회주의자로 규정되는 등 재평가 아닌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거기서 거기인거 같지만[3] 어쨌든 공식적으로 비판의 강도를 줄인 것.

3. 가족[편집]


본처와는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맏아들 천옌녠(1898-1927)과 둘째 아들 천차오녠(1902-1928)은 공산당원으로서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국민당에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현재 공산당에서는 열사로 기념하고 있다.[4] 셋째 아들 천쑹녠 (1910-1990) 은 안후이성 문화역사박물관의 직원으로 근무했다.

천두슈의 장손이자 천쑹녠의 장남은 허페이공업대학 기계공학원 원장이다.

둘째 처는 본처의 이복 언니이다. 1남 1녀를 낳았다. 4남 천허녠 (1913~2000)은 항일유격대에서 통신 및 교육을 담당했다.

셋째 처는 천두슈보다 29살이나 어리다. 둘사이의 친자식은 없고 딸을 입양했다고 알려져 있다.

4. 여담[편집]


천두슈는 신청년과 천두슈선집을 통해 마오쩌둥,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같은 신청년들을 출현시켰고, 김일성조차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

1933년 천두슈가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굉장히 특별 대우를 받았는데, 그가 수감된 곳을 찾아온 판란전이라는 여인과 굉장히 다양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들은 상하이에서 만났던 사이였으며, 서로 교분을 나누었다. 감옥 책임자였던 전옥장은 그 보고를 듣고는 "판 여사가 와 있는 동안은 천두슈의 방 근처에 가지 말라"고 간수들에게 전했다.


5. 대중 문화[편집]


  • 중국공산당의 최초 무장봉기인 난창 폭동을 영화화한 건군대업 (2017), 그리고 CCTV의 대하사극 각성연대 (2021)에서 삼국에서 유비, 초한전기에서 진시황제역을 담당했던 위허웨이가 천두수역을 맡았다.


6. 관련 문서[편집]



6.1. 인물[편집]




6.2. 사건[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8 12:19:38에 나무위키 천두슈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안칭시 소속[2] 전향이지만 국민당으로의 전향은 아니다. 그는 충칭시 시절 지인 및 친구들과의 서신 교환에서 마오쩌둥, 주더,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의 신진 지도부 인사들을 매섭게 비판하면서도 장개석과 국민당 또한 마찬가지로 강하게 비판했다.[3]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배신자'와 '배신할 수도 있는 자'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4] 이 둘을 체포 처형한 국민당군 지휘관은 양후(楊虎:1889-1966)인데, 이 사람은 대단한 변신을 자랑한다. 처음에 안휘 군벌로서 위안스카이의 부하였다가, 위안스카이가 칭제하자 그를 배신하고 반원 운동을 벌여 북양 정권의 한자리를 했고, 장제스의 북벌 때 다시 북양 군벌을 배신하여 국민당으로 전향했고, 국공내전 말기에는 전황이 기울어지자 공산당에 투항했다가, 본인이 요구한 관직이 안 주어지자 불만을 품고 다시 대만의 장제스와 내통했다가 1958년 체포되어 사형 집행유예 2년을 받는다. 저우언라이가 바로 무기징역으로 감형해 주었고, 복역 중 베이징 병원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