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이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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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이볜
마잉주
차이잉원

°: 계임총통(부총통이 승계)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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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10·11대 총통
천수이볜
(Chén(Shuǐ(biǎn(진수편) | Chen Shui-bian[1]


파일:천수이볜_총통2.jpg

출생
1950년 10월 12일[2] (73세)
중화민국 타이완성 타이난현 관톈향
(現 타이난시 관톈구)
재임기간
제10대 총통
2000년 5월 20일 ~ 2004년 5월 20일
제11대 총통
2004년 5월 20일 ~ 2008년 5월 20일
서명
파일:Signature_of_Chen_Shui-bian.svg.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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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우수전
자녀
딸 천싱유, 아들 천즈중
학력
국립타이완대학 (경영학 / 중퇴)
국립타이완대학 (법학 / B.L.)
종교
무종교 (불가지론)
소속 정당
[1]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2. 정치 입문
2.3. 총통 재임
2.4. 재판
2.5. 옥중 행보
2.6. 가석방 이후
3. 저서
4. 아들
5. 평가
6. 소속 정당
7. 선거 이력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천수이볜_총통1.png


중화민국 제10, 11대 총통.

대만 역사상 최초의 민주진보당(민진당) 출신 총통이자, 최초로 선거를 통한 수평적 정권 교체를 실현한 총통이다. 태어난 곳이 당시 중화민국의 영토 타이난이었고, 현재도 그 영토가 중화민국의 땅인 최초의 총통이기도 하다.[3]

한글 표기로는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 천수이볜이 일반적이지만, 1990년대 중반 SBS에서 그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에서는 천수빈이라고 했고, 총통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한 1999년 이전에는 천쉐비안이나 천쉬비엔 등의 명칭으로도 불렸으며 현재도 가끔 이런 표기가 발견된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이력[편집]


본성인 출신으로 타이난 현(臺南縣) 관톈 향(官田鄉)(현 타이난시 관톈 구)에서 태어났다. 당시 국민당이 본토에서 쫓겨온 이래로 대만의 기득권층은 대부분 대륙 출신의 피난민(외성인)들이었다. 즉 천수이볜은 뿌리부터가 대만 사회의 비주류였다.

원래는 그의 아버지가 도교 사원에서 받은 '陳水'이란 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하려고 했지만, 담당 공무원의 실수로 '陳水'으로 신고되었고[4],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집안은 소작농으로 매우 가난했으나 머리는 있어서 학교 다닐 때부터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뒀고, 1969년에 국립대만대학 상학부(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당시 있었던 입법원 선거에 출마한 민주화 운동가인 황신제(黃信介)의 연설을 듣고 정치에 관심이 생겨 학교를 휴학한 후 반수해서 법학과에 수석 입학했다.[5] 국립대만대학 법학과에 수석 입학한 후[6] 3학년 때 사법 시험에 최연소 수석 합격하여 변호사 신분으로 졸업했다. 한국으로 치자면 서울대 법대 수석 입학 후 졸업하기도 전에 사법 시험에 합격한 것과 같다. 이후 해상법 전문 변호사로 잘 나갔다. 에버그린그룹의 법률 고문을 맡기도 했다.


2.2. 정치 입문[편집]


1980년메이리다오 사건 변론을 하면서 정치계에 뛰어들었다.

파일:XTsh0hh.jpg
(변호사 시절의 천수이볜. 정치 입문 초기에 쓰인 포스터 속의 모습)

당시의 대만은 이른바 '3당 훈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3당 훈정'은 아주 강력한 총통제와 3개 정당의 연립 내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헌정과 실질적인 훈정을 동시에 추구하는 1946년 체제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1946년에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만 아니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을 차례로 초청하여 최고위급 관직에 등용을 약속했고, 곧이어 3당 훈정의 여당으로 변신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은 연립 내각의 여당으로서 중앙 정부의 장차관으로 출세했다(1949년까지는 대륙에 있었다).

1940년대에 중국 대륙에서 유권자들이 직선제로 선출한 국민 대회와 입법원과 감찰원의 국회의원들은 종신직이었다. 장제스 총통은 '중공의 반란을 토벌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을 발효했으며, 그 다음에 중화민국 사법원의 대법관들을 움직여서 헌법 재판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국민 대회와 입법원과 감찰원의 총선거를 중지했으니, 중앙 정부의 선거 제도는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보궐' 선거였다.

천수이볜 변호사는 1946년 체제의 해체를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여 여러 번 투옥되었으나, 석방된 뒤에 1981년 총선에서 무소속으로(당시에는 야당이 불법) 타이베이 시의회 의원이 되었고,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이름을 날리는 인물이 되었다. 1985년 지방선거에서 타이난 현장 시장에 출마했는데 간발의 차이로 낙선하게 된다.

하지만 정보부에서 천수이볜이 거물급 정치인사로 성장할 것으로 우려하면서 천수이볜을 암살대상으로 삼았고, 운전사를 사주해서 죽이려고 했는데, 이 때문에 자신의 아내인 우수전은 지지자들에게 인사를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죽지는 않았지만 하반신이 마비되어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이는 천수이볜의 투쟁심을 더욱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고, 1986년 메이리다오지를 통해서 국민당 정부를 재차 비판했다가 다시 구속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하지만 옥중에서도 우수전이 민진당 소속으로 입법위원이 되는 것을 도왔고 정치테러에 대한 동정심으로 우수전은 입법위원(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듬해에 천수이볜은 풀러나게 되었고, 우수전의 보좌관으로 활동하다가 1987년에 우수전과 함께 민주진보당에 가입했으며, 1989년 입법원 증원선거에서 타이베이 제1선거구에 출마해 입법위원이 되었다. 1992년에 재선에 성공했으며 1994년입법위원직을 사퇴하고 최초의 성급 행정 구역 단체장 선거에 출마하여 타이베이시장에 43.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7]


1994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 후보 토론회에서의 천수이볜 연설. 표준중국어 발음은 썩 괜찮은 편이다. 대만어 어투가 한번씩 들어가는게 옥의 티 정도였다.

파일:VdpZONu.jpg
(타이베이 시장 시절의 모습)



그의 재임 기간 가장 큰 성과는 무엇보다도 부패 척결 이었다. 당시의 천수이볜은 타이베이를 깨끗한 도시로 만들겠다면서 부패와의 전쟁을 치렀고, 유흥업소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갔는데 심지어는 조폭들이 연관되어 있는 불법 도박장 및 퇴폐 업소 등을 말 그대로 싹쓸어버렸다. 당연히 그 뒷골목 세력들이 뇌물 제의도 해오고 나중에는 대놓고 협박까지 했지만 민주화 운동 때 산전수전 다 겪은 천수이볜한테 통할 리가 없었다. 단순히 유흥업과의 전쟁을 벌인 수준을 넘어 리덩후이와 절친한 기업가가 운영하던 음식점을 불법건축물이라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철거하고, 국민당이 운영하는 기업에게 세금을 물리고 각 관공서에 걸려있던 장제스의 초상화를 떼내는 등 당대로써는 파격적인 행정을 선보였다.

1995년에는 서울의 자매도시 시장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이때 경남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야당인사였던 김대중과도 만났다.

타이베이 첩운이 개통되는 김에 교통체계를 개편해서 타이베이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교통난도 어느 정도 해소하면서 좋은 평을 들었고, 차기대권 주자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지만, 1998년 선거 때는 51대 45로 패하면서 재선을 놓치는데, 사실 1994년 지방 선거에서 당선된게 당시 현직이었던 국민당 후보가 워낙 지지율이 낮았던데다 국민당에서 갈라져 나온 신당 후보까지 가세하면서 표를 갈라먹는 등의 운이 좋았던 거고, 1998년에는 표가 갈리지 않아서 6%P차로 패배했던 것. 타이베이 등의 북부 지역은 국민당의 지지세가 강한 편이기도 했다.[8] 다만 일각에서는 천수이볜에게 앙심을 품은 뒷골목 일당이 국민당과 내통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묘하게도 후임 시장이 마잉주였다.


1998년 시장 선거 홍보영상

파일:QrA2dY9.jpg
(1998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 기간 중, 당시 국민당 후보였던 마잉주와 함께)


2.3. 총통 재임[편집]


타이베이 시장에서 낙선한 뒤에, 민주 진보당의 2000년 총통 선거 후보로 거론되다가 마침내 출마했으나 당초에는 당선권에서 밀려난 상태였다. 이 때의 판세를 보면 전무후무한 민선 타이완 성장을 지낸 무소속 쑹추위가 독주했다. 쑹추위는 원래 중국 국민당 소속이었으나 총통 후보를 놓고 갈등을 벌인 끝에 제명되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 밑으로 현직 부총통이자 국민당 후보였던 롄잔민주진보당의 천수이볜이 2위를 두고 경합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국민당의 이런저런 부패 스캔들을 놓고 롄잔쑹추위간에 병림픽이 벌어지면서 쑹추위의 지지도가 하락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당시 총통이자 중국 국민당 주석이었던 리덩후이의 치밀한 각본이라는 설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리덩후이는 1994년 타이페이 시장 선거 때 국민당 출신 자오사오캉(趙少康)이 신당 후보로 출마한 상황에서 국민당 소속 현직 시장 황다저우(黃大洲)가 이런저런 실책으로 당선권에서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 없이 수수방관한 끝에 기어이 천수이볜이 당선되는 것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산데다, 퇴임 후에는 공식적으로 천수이볜과 같은 대만 독립론자임을 밝혔다.

1위 쑹추위의 지지도 하락이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청렴한 이미지를 내세워 몇몇 여론조사에서 근소한 차이로 1위를 차지하는 상승세를 타게 된다. 결국 천수이볜 4,977,737표, 쑹추위 4,664,932표, 롄잔 2,925,513표로 최초의 민주 진보당 출신 총통으로 등극함과 동시에 대만 정치 역사상 최초의 정권 교체를 이룩한다.

파일:Bpb2Ext.jpg
(2000년 5월 거행된 총통 취임식 모습. 오른쪽은 러닝메이트이자 대만 최초의 여성 부총통인 뤼슈롄)

천수이볜은 기존의 국민당이 주창했던 국민당판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반대하였고, '타이완 독립'을 주장했다. 이 때문에 중국 본토와 국민당 정치인들과 대립하였다. 사실 천수이벤 총통은 초기에는 중국을 자극할 생각은 없었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하나의 중국을 반대하는 천수이볜 총통이 눈엣가시이니 대륙과의 사이가 좋아질래야 좋아질 수가 없었다.


천수이볜 - 롄잔 2004년 총통 선거 텔레비전토론. PTS에서 진행되었다.

제11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 결과
기호
후보명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선 여부
총통 후보
부총통 후보
1
천수이볜
민주진보당
6,471,970
50.11%
1
당선
뤼슈롄
민주진보당
2
롄잔
중국 국민당
6,442,452
49.89%
2
낙선
쑹추위
친민당
선거인수
16,507,179
투표수
13,251,719
무효표수
337,297
투표율
80.28%

파일:ROC_2004_Presidential_Election_Township_level.svg.png
총통 재임 기간 동안 경력이 화려했다. 2004년 총통 선거 유세 중에는 타이난 시에서 암살 미수 사건도 있었다. 바로 다음날 치러진 총통 선거 결과, 0.2%p 남짓한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였던데다가 주요 방송국에서 시청률을 이유로 득표를 미리 추산해서 발표하는 막장사태 때문에 개표 초반에 국민당 후보가 앞서나가고 예측치가 실제 득표치보다 더 많이 나오는 막장사태가 터져버렸고, 이때문에 개표가 마무리 되었을 때 즈음에는 롄잔중국 국민당 쪽에서는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대만 대법원에서 재검표까지 갔는데, 25,563표차로 표차가 줄어들기는 했는데 승부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한 '타이완 독립!' 선언으로 인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전면전까지 갈 기세였지만 당시는 2000년대 초중반이라 중국의 군사력이나 국력이 일정 궤도에 오르기 전이라서 별 일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롄잔 측은 타이베이를 비롯한 대만 북부와 타이둥을 중심으로 한 동부에서 크게 이겼지만,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진 타이난을 비롯한 남부 지역에서 크게 패하면서 결국 근소한 차이로 천수이볜이 당선 되었다.

그러나 천수이볜이 집권하면서 2001년 닷컴버블 붕괴의 여파로 인한 전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사상 최초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면서 한차례 몸살을 앓았던바 있고 2002년과 2003년에는 IT 버블의 충격에서 회복되면서 다시 경제가 성장하나 싶었지만 얼마 안가서 (대만 입장에서는) 운 안좋게도 삼성전자하이닉스, LG전자 LG디스플레이한국 대기업들의 치킨게임 공세에 대만 IT 기업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간다. 대만 중소기업들은 경쟁 대기업들이 경쟁 상품 가격을 내려버리는 치킨 게임을 시작해버리면 자본력이 딸리기 때문에 얼마 버티지 못한다. 이때 일본반도체 기업(엘피다 등)도 줄줄이 쓸려나갔다. 자연히 대만 경제는 침체했고, 그 와중인 2004년 대한민국한테 1인당 국내총생산이 역전당하게 되어 보수 언론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 대한민국이 대만보다 국민총생산이야 당연히 컸지만, 인구가 많아서 1인당 GDP는 2004년에 와서야 역전하게 된다. 다만 2004년부터 2007년까지의 경제 성장률로만 본다면 이 당시 대만의 경제 상태는 의외로 나쁘지는 않았다. 2004년에 6.5%, 2005년에 5.4%, 2006년에 5.6%, 2007년에 6.5%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기 때문에 사실 한국보다 경제성장률은 높았다. 다만 문제는 경제성장률이 상당하다 한들 임금수준이 오르지 않았던데다가[9] 부동산 가격상승으로 집세가 오르다보니까 출산율이 급속히 떨어지는 참사[10]가 벌어지게 되어버렸다.

대만 기업들이 싼 노동력을 찾아 본토로 옮겨가는 동안, 천수이벤 정권은 이런 변화에 대해 별다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고, 그것 때문에 한국에 뒤쳐지는 계기가 되긴 했다. 싸구려 노동력만 쫓는 대만 기업의 속성과 무모한 중국과의 적대 정책으로 중국의 경제 성장에 대만을 동조시키지 못한 것이 큰 실책이다. 반면, 한국과 일본은 중국의 개방기 당시 싼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중국 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중국 시장을 선점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중국 정부의 중국 기업 편애나 지식재산권 침해같은 문제점 때문에 대중 투자가 다시 줄어드는 추세이지만 초창기 중국시장의 엄청난 소비자들과 노동력을 활용하지 못한 점은 한국과 일본 산업계를 이롭게 했다. 그렇다고 반중을 명분으로 삼고 있는 천수이볜 정권으로써 중국 경제에 의존하는 것이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므로 천수이볜으로써는 어찌 해야될지 모를 노릇이었을 것이다. 결국, 천수이변의 외교정책은 표 결집같은 인기 몰이에 집착하고 명분에 치우쳐 실리를 놓치는 외교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버렸다.

설상가상으로 2006년부터 천수이볜 본인과 뤼슈롄 부총통, 천수이볜의 부인인 우수전 여사 부정부패 의혹이 제기되면서 지지율을 까먹었고 천수이볜 버전 중화민국송 같은 조롱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천수이볜의 부패 의혹은 2000년 총통 선거 직후부터 계속되었다. 2000년 총통 선거가 끝나고 선거 비용을 정산하기 위해 대만의 선관위에 제출한 자료에서 선거 비용이 지나치게 적었던 것(2위였던 쑹추위 선거 비용의 1/4 수준밖에 안 됐다. 심지어 1998년의 천수이볜 타이베이 시장 재선 선거 비용보다도 작았다.)[11]. 2004년 총통 선거에서도 경쟁자였던 롄잔의 선거 비용에 비해 천수이볜의 선거 비용은 절반 정도로 제출되었고, 계속해서 선거 비용을 유용한게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다. 이게 2006년 천수이볜 아들(천즈중 말고 한 명 더 있는데 이쪽이다)과 처가 쪽의 주가조작 사건과 더불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2008년 퇴임하자마자 구속을 당하게 된 것. 결국 2008년 재판을 앞두고 "2000년과 2004년 선거 자금을 모금하여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나(천수이볜)의 부귀를 위해 사용하지는 않았다"라며 공금 유용을 인정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민진당은 대충격에 빠졌고(천수이볜의 저 발표가 나오고 민진당 지지율이 한자리수로 떨어졌다!) 차이잉원이 구원 투수로 당 대표에 오르는 계기가 된다.(출처 : 차이잉원 자서전 '보통 사람의 특별한 인생')

2008년 2월에는 대만 정부에서 코소보독립국가로 공식 승인했다. 유럽에서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는 곳은 바티칸 뿐이다(정확하게는 바티칸이 직접 외교를 안 하고 교황청(Holy See)이 외교를 처리하지만 바티칸 문서 참고). 대만/외교 참조. 물론 많은 유럽 국가들이 대한민국처럼 대표부를 두거나 해서 비공식적으로 대만과 교류하고 있지만 포르투갈, 노르웨이처럼 대표부도 두지 않는 국가들도 꽤 있다. 여기 지도에서 푸른색 말고 회색으로 표시된 국가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한편 대만 정부가 코소보를 공식 승인한 것에 대해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논할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 마잉주 정권도 코소보의 승인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2.4. 재판[편집]


파일:rRdU5ba.jpg
(2008년 5월 퇴임 총통 자격으로, 후임자인 마잉주와 함께)

2008년 중국 국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어 총통직 퇴임 후 불기소 특권이 사라지자마자 출국 제한 조치가 취해지고 공금 유용과 돈세탁 혐의로 검찰에 체포되었다. 2009년 9월 11일, 천수이볜은 무기 징역과 2억 달러의 벌금을 선고받았으며, 3심에서는 징역 19년이 선고되었다.[12]

천수이볜 총통의 부정부패 의혹은 집권 당시부터 있었던 것이었고, 돈 세탁 액수도 엄청나다. 재판 시 밝혀진 것만 10억 타이완 달러(약 330억원)에 달한다. 아울러 대만은 부정부패에 관한 처벌의 강도가 높은 편인데, 장제스는 국민당이 국공내전에서 패퇴한 원인 중 하나가 부패에 있었다고 보아 부패를 엄벌에 처하도록 했던 영향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부정부패와 관련된 범죄는 형량이 높은 편이라고 한다.

천수이볜은 이 의혹에 대해 마잉주의 정치적 보복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 때 부인과 함께 민진당을 탈당했다.

파일:3Ma3DoL.jpg

이 판결에 대해 이 사람은 "대만은 미국 영토이기 때문에 대만 법원 판결은 불법"이라는 말을 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내용인즉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 대만의 점령권이 승전국이자 일본을 점령한 미국에게 넘어갔고, 전후에도 미국이 이를 명시적으로 포기한 바 없다'는 논리였다.

이 주장은 넓은 의미에서 '대만은 중국에 귀속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대만 독립 진영의 시각과 맥을 같이 한다. 이 입장을 대만 주권 미정론이라고 한다. 물론 이건 어떻게든 자신에 대한 법적 조치가 부당하다고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이었겠지만, 국민의 선거로 뽑혀서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까지 지낸 인물이 자국의 사법권을 부정하는 모습에 여론만 더 악화될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문제의 발언 직후, 천수이볜의 출신 정당이었던 민진당조차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저 주장은 사실 관계에서부터 틀렸다. 미국은 이미 일본군의 항복을 받을 군대와 그 관할 지역을 다 정해놨다. 대만은 1943년 카이로 선언 이후로 일관되게 중국에 '원속'시킨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고, 당연히 연합군의 아시아 총사령관인 장제스가 영도하던 중화민국이 관할하는 지역이었다. 저 말대로라면 대만에 미 군정부터 들어섰어야 했다.

2.5. 옥중 행보[편집]


감옥에서 <대만의 십자가(臺灣的十字架)>, <막을 수 없는 목소리(關不住的聲音)>, <1.86평의 총통부(1.86坪的總統府)>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한국의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 23일 자택 뒷산에서 투신하여 세상을 떠났는데, 이 소식을 접한 천수이볜은 "나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며 꼭 살아서 교도소를 나가겠다."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천수이볜 하면 수갑 찬 사진이 떠오를 정도로 민주화 운동과 부패 척결의 상징이었던 자신의 이미지가 나락까지 떨어진 데에서 인격적 모욕감을 느끼고 거기에 가족들도 수모를 겪은 데서 정신 질환이 비롯돼 자살을 3차례나 시도했다고 한다. 참고기사

사실 노무현과 천수이볜은 닮은 꼴로 자주 언급되곤 했다. 일단 동년배인데다가[13] 출신 성분이 그야말로 깡촌에서 나고 자란 비주류지만[14] 스스로의 노력으로 사법 시험에 합격하고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정계에 입문해 대권까지 거머쥔 모습이 죄다 판박이었던데다, 민주-진보 계열의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고 보수 야권에게 정권을 넘겨준 후 그 보수 신정권과 갈등을 빚은 모양새까지 일치했던 것. 더군다나 한국이나 대만이나 보수세력이 당시 기준으로는 말이 야당이었지 일당 우위 정당제 하에서 수십년 장기집권을 했었고 수평적, 평화적 정권교체는 처음 맞아보았던 거라서 노무현과 천수이볜 입장에서는 야당 같지 않았던 막강한 야당과 어색한 동거를 했던 것도 공통점이었다. 그렇다보니 천수이볜을 이해해줄 사람은 한국의 노무현 밖에 없다는 중화권 언론의 촌평이 있었을 정도였다.

후임자인 마잉주와의 관계를 대입하면, 한국의 노무현 - 이명박 전 대통령 사이의 관계와도 유사점이 많다. 첫째, 마잉주와 천수이볜은 1998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서 경쟁한 적이 있었고, 노무현과 이명박은 1996년 국회 의원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를 놓고 경쟁했다. 둘째, 마잉주는 이명박의 747 공약을 흉내낸 6-3-3(경제 성장 6%, 실업율 3%, 국민 소득 3만 달러) 공약을 내세워 총통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셋째, 후임자의 집권 후 전임자가 부패, 비리 혐의로 사법 수사 대상이 되고, 전임 측은 이를 정치적 박해라고 반발했다.

파일:attachment/Gold.jpg
파일:황안의 선조.png

대만대나체예술부에서도 골 D 수이볜으로 패러디되었다. 이미지의 대사는 로저의 유언과 동일한 내용이다. 한때 민주화운동의 총아이자 산물이었던 이 양반은 수갑을 찬 모양으로 영원히 역사에 남을 듯하다.

2013년 또다시 자살 시도를 했다.

2013년 5월에는 민진당 복당을 신청했고 민진당은 이를 승인하여 복당했다.

2.6. 가석방 이후[편집]


2015년 1월 5일 타이중 교도소에서 복역 중, 치료 차원에서 1개월 간 일시 출소하였다. 그러나 장기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료진의 의견에 다음해 5월까지 치료가 연장되었다. 그 후 현재까지 치료 명목으로 가석방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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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천수이볜 총통의 모습. 이런저런 잔병 치레와 정신 질환, 자살 시도 때문인지 총통 재직 당시에 비해 상당히 쇠약해졌다.

2016년 차이잉원의 민진당이 정권을 다시 가져오게 되자, 신정부 여권의 선배 격인 천수이볜의 특별 사면 논의가 여러차례 나왔다. 하지만 그 때마다 흐지부지되고 천수이볜은 사면되지 못하는 중이다.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천수이볜 본인의 범죄가 너무 확실해서라고 한다. 돈 세탁 및 공금 유용, 선거 비용 착복 등을 저질렀다고 본인 입으로 말을 했으니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차이잉원이 특별 사면을 못 하는 이유도 천수이볜 사면했다고 오히려 비판을 받을 정도로 천수이볜이 저지른 범죄의 죄질이 안 좋아서다. 차이잉원은 여전히 그에 대해서 달갑지 않은 듯 편법으로 사면 논의를 부결시켰다. 관련 기사 물론 법원의 확정판결이 있었고, 재판 중에 그가 혐의를 시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도 있지만, 여전히 천수이볜 본인은 자기가 무죄라고 주장하고 있다.

차이잉원 정부의 출범 후 처음 개최된 2016년 10월 10일의 쌍십절에서는 초청장까지 받아 놓고서도, 막판에 참석이 불허되었다. 현재 건강 쇠약 명목으로 가석방 상태에 있는데, 공개적인 국가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그러한 취지에 어긋난다는 것었다.

2018년 2월 28일에는 리덩후이 전 총통, 분리독립파 단체 등과 함께, 중화민국 국호를 대만으로 바꾸는 국민투표를 주장했다.[15]

가석방 중에 민간전민 텔레비전의 도움을 받아서 개인 방송 阿扁踹共[16]을 진행했다. "자신은 죄가 없고 나는 나랏돈을 나라를 위해 썼을 뿐인데 마잉주는 나랏돈을 딸자식을 위해 썼다. 누구 잘못인가"부터 시작해서 국민당과 한궈위, 커원저 등을 주로 저격하며 심지어는 차이잉원을 저격할 때도 있었다. 참고로 천수이볜 본인은 자신의 부패사건에 대해 자신은 공금을 횡령하지 않았고 대만의 외교활로를 위해 특활비조로 쓴 돈을 국민당이 횡령으로 누명씌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민투표도 여기서 주장했으며, 지방선거에서 민진당이 참패하고 국민투표가 기각되자, 국민투표 얘기는 쏙 빼고 지방선거 참패는 대선 승리 후의 징크스라고 남일처럼 얘기했다.

차이잉원보다 더 대만 독립을 추구하고, 사면을 해줄 거라고 믿고 있었던 라이칭더 지지 선언을 했으며 라이칭더가 경선에서 탈락하고 차이잉원이 정식 후보가 되자 분열의 시작이냐고 평했다.

2019년에는 민주진보당을 다시 탈당하고 일변일국행동당(一邊一國行動黨)이라는 정당을 창당했다. 제10대 대만 입법위원 선거에 자신을 포함한 당원들을 비례대표 후보로 선출하여 출마시켰으나 자신은 복역 중이라는 이유로 선관위에 막혀 출마가 불허되었고, 다른 후보들도 봉쇄조항인 5%를 넘지 못해 당선되지 못했다. 2020년 1월 12일에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며, 일변일국행동당 역시 1월 19일에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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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11일 제15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에서 자신의 주소지(타이난)에서 투표를 하고 언론 인터뷰를 가졌다. 가석방된 상태로 바깥 공기를 많이 마셨는지, 출소의 기적을 일으켜 건강해진 모습이다.

3. 저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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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만의 아들>(台灣之子). 총통 선거 출마를 앞둔 1999년에 출간한 자서전이며 본성인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동명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파일:대만을 믿습니다:아볜 총통의 대국민 보고.jpg
  • 대만을 믿습니다:아볜 총통의 대국민 보고(相信台灣:阿扁總統向人民報告)[17] : 총통 재임 중에 쓴 책.
파일:대만의 십자가.jpg

파일:막을 수 없는 목소리.jpg

파일:1.86평의 총통부.jpg

옥중 저서가 세 권이나 되는데, 중국 국민당범람연맹 측에서는 천수이볜 아들인 천즈중의 정치 자금 마련을 위해 쓴 게 아니냐며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왜냐하면 대만의 십자가, 막을 수 없는 목소리, 1.86평의 총통부 전부 2009년 ~ 2010년 사이에 출판되었고 천즈중은 2011년에 입법 의원(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2012년 이후로는 옥중 저서가 없다. 다만 건강 문제가 이 무렵부터 급격하게 악화된 걸 보면 섣부른 판단은 위험하다. 재미있게도 전직 총통에다 추종자들도 꽤 있어서 저 책들 모두 꽤 잘 팔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4. 아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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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이볜 아들 천즈중(陳致中, 진치중). 확실히 아버지 천수이볜과 꽤 닮은 모습이다.

2000년 총통 선거 때 직접 아버지의 광고에 출연해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내용은 "저는 민주 진보당 천수이볜 총통 후보의 아들 천즈중입니다. 내년에 대학을 졸업하면 입대하겠습니다."라고 지극히 단순한 지면 광고에 불과했지만 쑹추위롄잔의 아들 및 손자들이 죄다 병역 면제였던지라 정권 교체 열풍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천즈중은 실제로 대학을 졸업한 후 2001년 중화민국 해군군관역으로 입대하여 소위로 임관했고 2003년 만기 전역하면서 자신의 공언을 그대로 실천했으며 이 점은 확실하게 까방권을 얻은 듯 하다.

2011년 12월, 위의 천즈중이 2012년 1월에 총통 선거와 같이 열릴 입법의원(대한민국의 국회의원에 해당) 선거에 가오슝 지역에서 무소속 출마를 감행했다. 참고기사 민주 진보당에서는 펄펄 뛰며 반대했고. 가오슝 9선거구 결과는...

가오슝시 제9선거구
샤오강구 전역, 첸전구 일부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천즈중(陳致中)
48,941
3

[[무소속|
무소속
]]

26.64%
낙선
2
차이마푸(蔡媽福)
2,779
4

[[무소속|
무소속
]]

1.51%
낙선
3
궈원청(郭玟成)
59,258
2


32.25%
낙선
4
린궈정(林國正)
70,600
1


38.43%
당선
5
린제정(林杰正)
2,142
5
대만국민회의
1.17%
낙선

선거인 수
245,843
투표율
75.89%
투표수
186,569
무효표 수
2,849

팀킬을 해버렸다. 민주 진보당 후보와 천수이볜 아들인 천즈중 후보의 표가 갈려서 중국 국민당 후보 당선되었다.

한국을 예시로 들어서 아주 쉽게 설명을 하면, 국회의원 총선의 광주광역시 지역구에서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등 여러 정당의 후보들과 무소속 후보들이 출마하는데 더불어민주당에서 공천이 쪼개져서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전직 대통령의 아들 후보가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사이 좋게 팀킬해서 광주광역시에서 국민의힘 후보가 당선된 상황이나 마찬가지다.[18]

천즈중의 저런 무소속 출마 감행은 민진당에 천즈중 본인과 그의 부친 천수이볜을 버리지 말라며 위협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후보 본인이 당선되지 못하더라도 민진당이 공천한 후보의 지분을 빼앗아 낙선시킬 정도의 득표력은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민진당으로서는 불쾌한 일이겠으나 향후 천즈중을 끌어 안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후 민주진보당 소속 가오슝시 제10선거구(첸전구, 샤오강구) 시의원을 지내고 있었지만 2023년 4월 26일 돈세탁 혐의 유죄가 확정되어 징역 1년형을 받아 의원직을 잃었다. 2011년에도 위증죄로 징역 6개월을 받아 의원직을 잃은 적이 있다.

5. 평가[편집]


전체적으로 보자면 천수이볜 정권은 실패한 정권이라고 봐야되겠고, 당시 민진당이 의회에서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점때문에 실현되지 못한 일도 적지 않았지만, 정치개혁을 추진하면서 비민주주의적이거나 권위주의적인 조항을 폐지하고, 국민대회도 사실상 폐지했으며, 입법원 선거제도도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개편했다. 더 나아가 225명이었던 의원수를 절반인 113명으로 감축했다.[19][20] 또한 임기 2기 중에 대만화 정책을 실현하면서 여러 기관들의 이름에서 중국을 떼고 대만으로 바꾸었으며, 개혁정치의 연장선상으로 대만 본성인들 입장에서 눈엣가시였던 장제스를 기리는 중정기념당의 이름을 대만 민주 기념관으로 바꾸고 대만 민주화 운동 관련 자료를 전시하기도 했다. 다만 마잉주가 집권하고 바로 다시 중정기념당으로 바꿔버렸다. 한편 의료보험, 국민연금, 고용보험의 보장성 강화 등 사회안전망 강화에 힘을 썼으며, 성소수자 인권을 포함한 성평등 교육 과정을 신설해 훗날 대만이 아시아에서 가장 성소수자 친화적인 국가로 변모하는 데 기여한 소소한 업적도 있다.

중국 대륙에서는 천수이볜을 매우 싫어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역린이라 할 수 있는 대만 독립을 대놓고 추진했기 때문이다. '한간'(漢奸)이라는 멸칭으로 부르는데 이건 한국에서 이완용에게 붙는 매국노라는 표현과 동급이다.

그의 부패와 온갖 헛소리로 인해 대만 독립파들이 큰 타격을 입었기에 독립파들은 그를 중국 국민당이나 대륙과 거의 동급으로 취급하며 싫어한다. 재임시절 부패로 인해 국민당에게 정권을 넘겨준 일등공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범록연맹 정치인들 중 적어도 대만 총통을 한번 이상 역임한 적이 있는 이들 중 대만 독립파들이 정신적 지주로 삼을만한 인물이 이 천수이볜 아니면 리덩후이 정도인데,[21] 문제는 리덩후이의 경우 천수이볜과 달리 퇴임 이후에 감옥만 안 갔다 뿐이지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천수이볜보다도 더 정상적이지 못 한 인물이라 여전히 독립파의 정신적 지주로 삼기에는 문제가 많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래서 대만 독립파들 중에서도 본인들이 추진하는 바가 아직 지지부진한 상태임을 자조하는 측에서는 "애당초 정신적 지주로 삼을만한 인간들이라는 게 리덩후이나 천수이볜 따위 뿐이니 우리가 이 모양 이 꼴 아니겠느냐?"고 자조하기도 한다(...). 두 사람보다 홍콩의 민주화 요구를 탄압하고 대만 침공 협박을 일삼아 범록 결집을 이끈 어둠의 민진당 선대위원장이 정신적 지주에 가까울 듯


6.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70 - 1987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87
민주화 이후 탈당


1987 - 2008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2008 - 2013
부정부패 의혹으로 탈당


2013 - 2019
복역 중 복당
[[일변일국행동당|

일변일국행동당
]]
2019 - 2020
창당


2020 -
정당 해산
복당
정계 은퇴



7.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9
입법위원 선거
타이베이 제1선거구



당선
초선
1992
제2대 입법위원 선거

당선
재선
1994
성시장선거
타이베이시
615,090 (43.67 %)
당선 (1위)
초선
1998
성시장선거
688,072 (45.91 %)
낙선

2000
제10대 정부총통 선거
중화민국 자유지구
4,977,697 (39.30 %)
당선 (1위)
초선
2004
제11대 정부총통 선거
6,471,970 (50.11 %)
당선 (1위)
재선


8.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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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만 총통 중 드물게 로마자 명칭이 병음 표기와 일치하는 경우다.[2] 아버지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호적을 늦게 올렸기 때문에 호적에는 1951년 2월 18일생으로 되어 있다.[3] 리덩후이는 타이완섬에서 태어났지만 당시 타이완섬은 중화민국이 아닌 대만일치시기였다.[4] 두 한자의 발음이 거의 비슷하다. 遍은 4성이고 扁은 3성이다.[5] 황신제는 1979년 12월 메이리다오 사건의 1급 주동자로 투옥되면서 천수이볜의 변호를 받았고, 대만의 민주화가 본격화된 1988년 ~ 1992년에 민주 진보당의 주석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9년에 타계하여 천수이볜의 총통 당선, 민진당의 첫 집권을 지켜보지는 못했다.[6] 후임 시장이자 총통 마잉주 역시 그와 동문이다. 나이는 같은데 천수이볜이 반수를 해서 천수이볜이 1년 후배.[7] 본래 대만에서는 기초 자치 단체장 선거는 계속 하고 있었지만 직할시와 성 등 성급 행정 구역의 수장은 중앙 정부에서 임명했다. 1994년부터 헌법이 개정되어 성급 행정 구역 수장도 선거로 뽑게 되었다. 그러나 푸젠 성은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고 여전히 중앙 정부에서 수장을 임명하였고 1998년부터는 타이완 성의 기능이 축소되면서 타이완성장도 다시 임명제로 바뀌었다.[8] 1980년대 후반 - 90년대 중반 시기까지는 지역 구도가 아주 뚜렷하게 드러나던 때는 아니었다. 1994년 지방 선거에서 타이베이 시장 선거와 같이 치러진 가오슝 시장 선거에서 민진당 후보가 아닌 국민당 우둔이 후보가 근소하게 앞섰을 정도고 1989년 지방 선거 때부터 2005년 지방 선거 때까지는 타이베이 현장을 민진당이 차지했을 정도였다.[9] 사실 90년대 후반부터 대만의 임금수준이 동결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대만기업들의 중국진출에 따른 산업공동화를 막을려면 이 길밖에 없다는 산업계의 논리에 정부가 굴복한 결과물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20년가까이 지속되다보니까 대만의 임금수준이 한국보다 훨신 쳐져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물가는 안정세를 유지하고는 있다는 것이 다행이지만 그럼에도 중국 진출에 따른 수익의 상당수가 부동산으로 흘러가면서 부동산 가격은 몇 배로 상승했고 집세까지 상승하면서 결혼을 늦추는 신혼부부들이 늘어나고 말아 결과적으로 대만의 출산율이 밑바닥 수준까지 떨어지는데 공헌하게 되었다.[10] 1990년대 당시 대만의 출산율은 1.6-1.8명대로 한국보다 조금 높았는데 2000년대 중반 들어서 출산율이 1명대 초반으로 급속히 떨어지게 되었다. 대만이 한국처럼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던 것도 아니고 출산율이 급속히 떨어지게 된 원인이 임금정체와 월세비 상승이 큰 요인으로 분석되고 있다.[11] 대한민국에서도 선거가 끝난 이후 선거에 출마한 모든 후보들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선거 비용을 정산해서 영수증과 사용 내역을 제출해야 하는데, 예측된 선거 비용(중앙 선관위에 가면 볼 수 있다. 각 선거구 별로 선거 비용 최대 상한선이 있고, 지금까지 해온 선거들을 평균내서 만든 평균 선거 비용도 있다)보다 지나치게 선거 비용이 적게 제출되면(당연히 상한선을 초과한 선거 비용이면 당선 무효) 선관위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한다.[12] 다만 2028년까지 수감 생활을 이어나가게 될줄 알았으나 2015년 초에 지병 치료 명목으로 깜짝 가석방되어 하단에도 후술되어있기는 한데 공적 행사 참여 같은 대외적인 활동은 규제되고 있지만 신변의 제한없이 자유로이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13] 정확히는 노무현이 1946년생으로 4살 위.[14] 단 비주류의 양상이 서로 다르다. 노무현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고졸이었다는 점이 소위 비주류성의 포인트인 반면, 천수이볜은 대학을 자국 내 최고 학부인 국립타이완대학을 나왔지만 출신지와 출신성분이 각각 타이난과 본성인이었다는 것이 포인트다.[15] 최근 대만은 국민투표 발의, 투표 참여 연령을 낮추어 특정 주제에 관한 국민투표 실시를 쉽게 하고 있다. 다만 주권 관련 문제는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밝혀, 독립파가 주장하는 국호 변경 문제의 국민투표 실현 여부는 미지수다.[16] 대만어 발음으로 '아삐아 촤이꽁'. 阿扁은 천수이볜의 별명이고, 踹共은 공산당을 짓밟는다는 뜻이 아니라, '(감옥에서) 나와서 얘기한다'라는 出來講을 소리나는 대로 썼을 뿐이다. 다만 중의적 표현일 수도 있다.[17] 아볜(阿扁)은 이름 마지막 자인 볜(扁) 앞에 아(阿)를 붙인 애칭이다.[18] 실제 이런 비슷한 사례로 당선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그 유명한 민주당을 탈당하기 이전의 조경태다. 수도권으로 예시를 들어보면 2015년 재보궐선거 당시 민주당 강세 지역이던 서울 관악구 을에 무소속 출마를 해서 표를 갈라서 새누리당 오신환 후보가 당선되게 만든 정동영이 있겠다. 물론 그쪽은 뿌리깊은 계파 갈등으로 발생한 이이제이라는 점이 다르지만 그 충격만큼은 비슷한 셈.[19] 단 의원 정수를 줄이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리를 항상 강화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20] 이 조치는 2008년 총선에서 민진당 참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단 민진당의 득표율은 38%로 천수이볜이 낮은 지지율과 레임덕을 겪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생각보다는 잘 나왔기는 했는데, 소선거구제로 개편하면서 주요 선거구를 국민당이 싹쓸이하는 바람에 전체 의석수 가운데 개헌저지선에도 못미치는 27석에 그쳤다.[21] 범록연맹 출신 총통들 중에 지지도가 제일 높은 인물은 단연 차이잉원이지만 차이잉원의 경우는 총통 본인이 대만 독립 주장에는 선을 긋고 있어서 대만 독립파가 본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삼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게다가 사실 리덩후이도 퇴임 이후에나 범록연맹으로 갈아탄 거지 본인의 총통 재임 시절에는 엄연히 국민당 소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