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피복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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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jpg

1. 개요
2. 활동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70년, 전태일분신 이후 그의 뜻을 이어받은 어머니 이소선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노동조합. 평화시장의 피복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하여 20년이 넘도록 투쟁하였다.


2. 활동[편집]


평화시장의 여공들을 위해 싸우다가 결국 분신을 하게 된 전태일은 죽기 전에 어머니 이소선에게 "어머니, 내가 못 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주세요."라고 말했다. 또한 그의 친구들에게도 자신의 못 다 이룬 일을 이뤄달라는 부탁을 했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이소선과 전태일의 친구들은 앞장서서 전태일의 뜻을 따라 평화시장의 노동조합을 건설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소선은 근로조건개선, 노조결성 등 8개 요구사항을 내밀며 이행하지 않을 시에는 장례식을 진행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사회적 파장을 우려한 당국에서는 노동조합 결성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11월 20일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 결성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전태일의 분신을 보고 들은 평화시장의 노동자들도 힘을 모아, 1971년 11월 27일 평화시장 옥상에서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청계피복노조)'가 결성되었다.

청계피복노조 결성 이후 조합원들과 대의원들은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싸웠다. 조합원들은 사사건건 노동자들을 옥죄려고 하는 사업가들, 노조 운영에 간섭하려 드는 한국노총 출신 간부들, 사업가들의 편을 드는 당국에 맞서야 했다. 1972년에는 '노동교실'이라는 노동자 교육 기관[1]을 만들었으나 지원을 약속한 사업주가 노동교실의 주도권을 빼앗으려 하자 여기에 맞서 7시간 동안 농성을 벌여 노동교실을 지켜내었다. 또 노동자들을 향해 노동조합을 믿고 지지할 수 있도록 홍보를 하기도 했고, 장기표 등 대학생 및 노동운동가들과의 제휴도 이뤄냈다. 1977년에는 이소선이 구속되고 노동교실이 폐쇄되는 시련을 겪자 조합원들과 노동들이 9월 9일 목숨을 걸고 노동교실에서 농성을 하기도 했다.[2]

하지만 1980년 5.17 내란이 터지면서 청계피복노조는 창립 이래 최대의 시련을 겪게 된다. 이소선이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고 노조 간부들도 계엄사에 끌려가 수사를 받더니, 끝내 해산 통보를 받은 것이다.[3][4] 결국 거리로 나앉게 된 조합원들은 1981년 1월 30일 미국노동총연맹(AFL) 한국지부[5]로 달려가 미국인 사무소장까지 붙잡고 농성에 들어갔지만 무참히 진압당하고 말았다. 이 일로 이소선은 물론이고 조합원들도 징역 살이를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시장의 노동자들과 조합원들은 노조를 재건하기 위한 운동에 들어갔고, '법외 노조'[6]를 처음으로 시도하여 준비위원회를 거쳐 마침내 1984년 4월 8일 청계피복노조를 복구하였다. 노조가 복구되었지만 아직도 서슬퍼런 전두환 정부 시절인지라 경찰과 당국은 집요하게 조합원들을 괴롭히며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청계피복노조는 합법성 쟁취를 위한 투쟁에 들어갔다.

합법성 투쟁을 벌이면서 청계피복노조는 독일 인권단체의 지원으로 노동조합 소유의 '평화의 집'과 '전태일기념관'을 건립하였다. 또 다른 곳의 민주노조들과 연합하여 1985년 구로동맹파업과 1986년 인천 5.3 운동에도 참여하고,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에 참여하기도 하였다.[7] 이렇게 진행된 노동운동과 합법화 투쟁은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1988년 구로구청에서의 농성을 계기로 마침내 청계피복노조는 합법화를 이루었다. 이후 청계피복노조는 1998년 4월 서울의류노조로 통합되었고, 서울의류노조는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 소속으로 현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에 속해있다.

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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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놀랍게도 이 교실의 설립에는 육영수의 입김도 한 몫 했다. 청계피복노조에서 활동하던 한 조합원이 모범근로여성으로 뽑혀 청와대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육영수를 만나 근로자들을 위한 교실이 필요하다고 건의한 것이다. 그러자 육영수는 노동청장에게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노동교실이 만들어졌지만 초청인사 가운데 재야운동가 함석헌이 있는 것을 당국이 트집을 잡으면서 노동교실은 시작부터 파장을 겪어야 했다.[2] 이들은 노동교실이 있던 건물 3층에서 뛰어내리거나 할복을 시도하기도 하였다.[3] 이 해산 통보는 청계피복노조 간부들이 풀려난 이후 서울시에서 보낸 공문 한 장으로 이루어졌다. 해산 이유는 노동조합법 제32조를 위반했기 때문이었다. 노동조합법 제32조는 다음과 같다. "행정관청은 노동조합이 노동관계법령에 위반하거나 공익을 해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노동위원회의 의결을 얻어 그 해산을 명하거나 임원의 개선을 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조항은 당국이 노동조합을 제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독소조항에 불과하다. 설령 그 조항이 옳다 하더라도 당국은 청계피복노조에 사실 확인이나 변호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으니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이후 2015년 대법원은 청계피복노조의 강제 해산은 불법이었으며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4] 한편 청계피복노조 간부들이 계엄사에 잡혀갔을 때, 대령계급의 수사본부 2단장은 이런 말을 지껄였다고 한다. "청계피복노조는 내가 없애버린다. 청계피복 같은 노조는 노조도 아니야!"[5] 당시 이 단체는 한국에서 '아프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6] 법외 노조는 합법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노동조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법 노동조합은 아니었기에 재건 운동을 향한 탄압을 막을 수 있었다.[7] 다만 나중에 서울노동운동연합에서 청계피복노조는 탈퇴하였다. 서노련은 노동자들의 정치투쟁에 무게를 두었는데, 그 노선은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하는 활동을 지향했던 청계피복노조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