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멸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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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멸망전
蜀漢滅亡戰 | 魏灭蜀之战[1]

시기
263년 여름 ~ 263년 11월[2]
장소
한중, 답중, 검각, 음평, 부현, 면죽
원인
사마소의 진왕 즉위를 위한 치적쌓기
촉의 작계 변화로 인한 한중 방어 약화
교전국
조위
촉한
군주
황제 조환
대장군 사마소
황제 유선
지휘관
정서장군 등애
옹주자사 제갈서
진서장군 종회
대장군 강유
우대장군 염우
좌거기장군 장익
우거기장군 요화
보국대장군 동궐
위장군 제갈첨
참전 장수
등애군
농서태수 견홍
정서사마 단작
등충
번진
정서사마 사찬
금성태수 양흔
천수태수 왕기
진로호군 원소

종회군
중령군사마 가보
낭중 양수
장하독 구건
장군 구안
진서장사 두예
주부 등은
참군 양수
전장군 이보
참군 원정
감군 위관
위흥태수 유흠
아문장 허의
호군 호열
호연
방회
호군 순개
장군 왕매
참군 황보개
진서사마 하후함
산장 왕기
전장
전속
좌중랑장 부첨
비령 상욱
감군 왕함
황금위독 유은
우림우부독 이구
수무장군 장빈
상서 장준
아문장 조광
상서랑 황숭
제갈상
강유수장 마막
장서
병력
등애군▶ 3만 명

종회군▶ 10만~12만 명

제갈서군▶ 3만 명
5~6만 명+@[3]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촉한 멸망
영향
사마소의 진왕 즉위
사마염의 수선[4]
동오의 영안 침공

1. 개요
2. 전쟁 발발 이전의 상황
2.1. 사마소의 전쟁 준비
2.2. 257년까지 촉의 한중작계
2.3. 258년 강유의 작계 변경
2.4. 262년경 촉의 정치적 혼란
2.5. 위군의 작계
3. 전쟁의 전개
3.1. 263년 8~9월
3.1.1. 8월 말 ~ 9월 초. 전쟁 발발
3.1.2. 9월 초 ~ 9월 중. 한중 장악
3.1.3. 9월 중 ~ 9월 말. 관성 함락
3.2. 263년 10월
3.2.1. 검각 전투와 등애의 우회
3.2.2. 위의 정치적 변화와 제갈서 축출
3.3. 263년 11월
3.3.1. 등애의 우회와 제갈첨 격퇴
3.3.2. 등애의 성도 진입. 촉의 멸망.
3.3.3. 촉군의 퇴각과 종회의 포위망
3.4. 오나라에 보낸 구원요청
3.5. 원정 이후의 뒷수습과 종회의 반란
4. 결과
5. 민간전승
6. 기타
7. 기타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촉한멸망전(蜀漢滅亡戰), 또는 위멸촉지전(중국어 간체: 魏灭蜀之戰, 정체: 魏滅蜀之戰(중국어 위키백과))

263년, 위나라의 권신이었던 대장군 사마소종회, 등애, 제갈서를 지휘관으로 삼은 16~18만의 원정군으로 촉을 멸망시킨 사건이다. 약 두달 동안 지속되었다. 전쟁 도중 사마소는 진공이 되었다. 전쟁 후 사마소는 진왕에 즉위하였다.

촉은 강유의 방어전략 개편으로 위나라에서 촉의 거점인 한중으로 진입하는 길목의 보루들을 비운 채였다. 이를 기회로 판단한 사마소종회는 촉 공격을 결의하고 원정 계획을 수립, 실행한다. 각각 3만여를 이끈 등애와 제갈서군이 촉의 북쪽 접경지대인 답중에 주둔한 강유군을 저지하며 피해를 강요하는 사이, 본대인 종회의 10만 군은 한중에 피해 없이 진입하여 전쟁 발발 한달여 만에 촉의 주요 거점인 한중, 그리고 한중과 성도를 잇는 길목의 핵심 관문인 양안관구까지 장악하였다.

한중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어 당초의 계획이 틀어진 촉군은 한중에서 성도로 나오는 입구인 검각에서 농성하며 위군을 저지하였으나, 정서 장군 등애가 음평의 산길을 통하여 강유관[5]으로 진격하였다.

촉 조정은 위군의 우회를 막기 위해 제갈첨을 파견하였으나,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험지 방어에 나서지 않았거나, 혹은 대단히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하였다. 등애가 이끄는 군대는 제갈첨이 주저하는 사이 강유관의 항복을 받아내고, 큰 방해 없이 검각의 후방, 성도 인근인 평야로 진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성도로 접근하는 적을 막아설 방도가 사라진 촉 조정에서는 항복론이 강하게 대두되었고, 황제 유선은 건의를 받아들여 등애에게 항복하였다. 검각에서 항전하던 강유의 군대는 제갈첨의 패배 소식을 듣고 종회군의 방해 속에서 퇴각하였으나, 성도에 도달하기 전에 항복 소식을 전해듣고 동광한군 오성(五城)현에서 위군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써 삼국시대의 세 국가 중 하나인 촉은 멸망했다.


2. 전쟁 발발 이전의 상황[편집]



2.1. 사마소의 전쟁 준비[편집]


삼국시대(중국)의 세 나라 중 가장 강대한 조위에서는 황제 조모사마소에게 살해당하였다. 어린 허수아비 황제 조환을 올려 정계를 장악한 사마소는 허수아비 황제의 구석과 진공(晉公) 하사를 끊임없이 거부하였는데, 아무래도 진공-진왕 즉위를 합리화할만한 거대한 군공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사마소는 강유가 촉의 기존 방어체계를 변경하여 답중에 주둔하자 이를 기회로 판단하고 자신의 심복인 종회와 함께 비밀리에 정벌을 계획했다. 다른 신하들에게는 오나라를 정벌할 생각이라고 알려 정보가 세어나가지 않도록 막고 상대를 기만하려 했다. 후에 사마소는 "오직 종회만이 나와 뜻이 비슷했다." 고 평했다.

이전까지 위나라의 대외원정은 대체로 동오를 중시하여 일어났고, 촉나라를 향한 공격, 혹은 방어 작전에 10만 단위의 병력이 투입되는 일은 드물었다. 유일하게 계획을 공유한 종회를 진서 장군, 가절 도독 관중 제군사에 임명하고 청주, 서주, 연주, 예주, 형주, 양주 등 모든 주에 큰 전함을 포함하여 다량의 배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 지역에서 위나라가 배를 타고 공격할 나라는 오나라 뿐이었으므로, 실제로 당대 사람들은 사마소가 곧 오나라를 치리라 여겼다. 당시의 정국으로 볼 때에도 오나라 공격은 허황된 일이 아니었다. 손휴가 승상이었던 손침을 주살함으로서 일어난 혼란, 복양흥에 의한 포리당 건설 사업과 승상 즉위 등으로 인해 오나라 쪽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장 일 년간 오나라 원정을 위장하던 사마소는 263년 여름, 촉 원정을 공표했다. 주된 사유는 다음과 같았다.

  • 수춘을 평정한 이래로(제갈탄의 난을 가리킨다.) 6년동안 전쟁이 없었고, 병사의 훈련과 병기의 준비가 다 마춰진 상태이다. 그런데 만약 오나라를 친다면 배를 만들어 강을 건너야 하고, 물길을 통해 오가야 한다. 전쟁 준비만으로도 10만 명의 인력과 백수십일의 기간이 들어가 비효율적이다.
  • 설령 이러한 준비를 거치고 오를 친다고 해도 남방은 지세가 낮고 습해 역병을 피할 수 없다.
  • 촉을 먼저 치고 3년을 준비하여 파촉의 물길을 통해 수륙으로 양동 작전을 펼치면 오나라를 쉽게 물리칠 수 있다.

중신들은 대체로 동의를 표했으나, 대촉 전선 담당이었던 등애는 이 전역이 어렵다고 여겼다. 사마소가 주부(主簿) 사찬(師纂)을 파견하여 거듭 설득한 끝에 결국 등애도 원정에 동의했다. 동원령을 내린 사마소는 가을 8월 낙양에서 대규모 사열식을 가지면서 필승을 기원했는데, 등돈(鄧敦)이라는 장군이 촉 정벌에 반대 의사를 밝히자 그 자리에서 등돈을 처형하고 시신을 사람들 앞에 조리돌림했다. 삼국시대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뤄진 대규모 촉 원정의 시작이었다.


2.2. 257년까지 촉의 한중작계[편집]


위와 촉의 사이에 놓인 진령산맥은 인구밀도가 적고 이동이 어려운 산맥지대라 현지보급이 어려웠다. 보급 부담은 군대의 수에 따라 가파르게 증가하기 때문에, 양측 군대는 모두 대규모 공세를 취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제갈량의 북벌이나 흥세 전투를 모두 고려해도, 위-촉 전선에서 군대가 2달 이상 적지를 오가며 작전을 수행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었다.

촉은 국가 성립기에 벌어진 한중 전투 이후부터 이런 자연환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 노력했다. 유비는 한중으로 향하는 길목을 통제하여 상대방이 평지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어 체계를 만들었다. 이 방어 체계는 258년 강유가 방어 전략을 변경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흥세 전투는 유비의 전략이 실제로 어떤 식으로 작동했는지 검토할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휴전선에 익숙한 현대 한국인은 산맥의 주요 통로마다 상시 병력이 주둔하는 요새가 박혀서, 압도적인 위군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치는 광경을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흥세 전투나 다른 사례를 볼 때, 촉이 한중 북부의 산맥지대에 지연전용 요새를 유지했다는 근거는 전무하다. 흥세 전투에서 위군은 한중의 바로 지척인 흥세산까지 어떤 '요새'나 '지연전'도 경험하지 않고 남하했다. 촉군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했으며 산맥 통로에 미리 만들어진 요새를 지원하여 지연전을 펼치는 방안은 결코 언급되지 않았다[6].

반면에 촉군은 공세에 나선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주둔군을 둔 보루 자체는 분명히 존재했다.[7] 흥세 전투에서 왕평의 전략 수립 과정과 늘어선 산맥 요새에서 지연전을 벌인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함께 고려하면, 기존 방어체계에서 보루들은 지연전을 위한 요새라기보다 상대의 움직임을 관측하기 위한 초소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한중 주둔군은 보루로부터 적의 접근 사실을 전달받고 이동하여, 적이 평야로 나오지 못하도록 산지에서 평야로 나오는 길목의 험지를 점거한다. 즉, 지연전은 한중 근처에서 발생한다. 어찌되었건 이 단계에 도달해 상대의 평지 접근만 막아서면 위군의 보급은 한달을 넘기기 어려웠다. 따라서 상대가 몇 만을 이끌고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살펴보았듯이 한중을 둘러싼 산지는 촉의 방어를 위해 자연이 내려준 선물과도 같았다. 하지만 안전하고 무척이나 잘 작동하는 이 방어 전략에도 사소한 오점은 있었다. 상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여 한중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만큼이나, 위군도 안전하게 퇴각하기 쉽다는 점이었다.

촉군의 가장 성공적인 방어전이자, 상대에게 큰 피해를 입힌 예외적인 케이스인 흥세 전투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이 드러났다.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되지 않는 한진춘추의 촉군 전과를 전적으로 신뢰하더라도, 위군의 손실은 지휘관인 조상이 퇴각을 늦춘 탓에 발생하였다. 적당한 시기에 퇴각을 선택한 곽회의 군은 손실을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상대방이 무리하지 않고 적당한 시기에 퇴각한다면, 촉군은 상대방에게 손실을 강요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이런 단점은 진령산맥이 촉에 안겨준 안전에 비하면 한없이 사소했다. 어쨌거나 촉은 매번 위나라의 공세에 정면 승부로 맞서서는 생존할 수 없는 약소국이었고, 유비가 만들어낸 방어 전략은 부담스러운 정면 승부를 피하면서 영토를 지킬 방법을 제공했다.

그러나 체제에 최선인 전략이 반드시 구성원 개개인에게도 최선은 아니라는 사실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수십 년간의 성과없는 원정과 패배로 군부를 향한 회의적 시선이 높아지는 가운데, 이겨도 "대박"이 나기는 어려운 방어 전략은 지휘관들의 아쉬움과 불만을 자극해 불필요한 모험주의를 야기할 여지가 있었다. 그리고 잇다른 실책을 만회할 "대박"을 간절히 바라는 지휘관은 누구보다도 이런 함정에 빠지기 쉬운 인물이었다.


2.3. 258년 강유의 작계 변경[편집]


촉의 군권을 장악한 강유는 256년, 257년에 연달아 이어진 성과 없는 원정 이후 기존의 방어 체계를 근본적으로 뒤바꾸었다. 강유는 적이 침입할 경우 적의 길목을 막아서는 대신, 한중 주변의 보루들을 비워 위군이 한중의 평지로 진입하게 놔두기로 했다. 기존에 보루에 주둔하던 군대들은 한중 평야의 중앙인 낙성과, 성도와 이어지는 길목인 평야 서쪽의 한성으로 퇴각해 농성한다는 계획이었다. 흥세 전투 당시 한중 주둔군은 약 3만 미만이었는데,[8] 강유는 이중 한성과 낙성에 들어갈 1만의 병력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한중에서 성도를 잇는 길목에 위치한 물길인 한수에 주둔하도록 했다.[9]

강유는 한중 민간의 곡식을 한성과 낙성에 미리 모아둠으로서 평지로 들어온 적이 한중에서 현지보급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장안에서부터 한중까지 백수십여 Km 거리의 보급을 유지하기란 이 시대의 군대에게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후한말 내전기를 포함해 철도 등장 이전까지 군대의 보급은 현지에서의 조달, 즉 약탈에 의존하는 비중이 대단히 높았다. 따라서 청야로 적의 현지보급을 원천차단할 수 있다면, 적은 최초에 가지고 온 치중(군수물자)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군대가 가지고 다니는 식량으로는 불과 한두달을 넘기기 어려우므로, 위군이 한성과 낙성에서 농성하는 촉군을 공격하느라 기진맥진하고 굶주림으로 약화될 것이라는 발상이었다.

이렇게 상대가 약화되었을 때야말로, 이 계획에서 가장 빛나는 역할을 맡은 강유가 멋지게 구원투수로 나설 차례였다. 강유는 저 멀리 어딘가에 고이 보전해둔 주력군을 이끌고 나타나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위군을 멋지게 포위섬멸할 예정이었다. 한중 안의 요새인 한성과 낙성에서 구원군만 바라보며 버티던 군대는 요새의 문을 열고 나와 강유의 위대한 귀환을 돕는 조력자였다.

새로운 작계를 요약하면 한중을 거대한 미끼로 삼아 위군을 유인하고, 약화된 위군을 일거에 섬멸한다는 문장이 된다. 위군에게 큰 손실을 입히는 것만이 목표인 도박적이고 위험한 작계였다. 만일 적군이 바라는 방향으로만 움직여서 계획이 성공하더라도, 촉의 가장 중요한 전략 거점인 한중은 위군의 손에서건, 촉군의 손에서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될 운명이었다.

이 계획의 핵심은 한중 전역의 완전한 청야였다. 만일 청야가 실패할 경우 아무 저지 없이 평야로 진군한 위군은 약탈을 통해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할 수 있다.일단 위군이 현지보급에 성공하면 이어지는 작전은 모두 엇나가게 된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청야의 실현가능성은 대단히 불투명했다.

한중에 거주하는 백성이 생존하려면 매 끼마다 뭔가를 먹어야 한다. 전근대 백성들이 평시에 모든 식량을 요새에 저장해두고, 매 끼니 때마다 인근 관아까지 며칠씩 걸어가서 식량을 받아오는 식으로 생활하기란 당연히 불가능하다. 결국 대부분의 식량은 나라의 창고가 아니라 백성들이 사는 취락의 곳간에 비축될 수밖에 없다. 전근대 군대는 이렇게 민간에 비축된 식량과 자원을 징발해 "현지보급"을 수행했다. 따라서 위군의 현지 보급을 막기 위해 "청야"를 하겠다는 강유의 계획은, 결국 촉군이 한중 전체의 민가들을 돌아다니며 수십만 백성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비축한 식량을 모조리 징발해 한성, 낙성으로 옮기고, 불가능하다면 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모두 불태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는 실질적으로 한중 백성 전체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약탈로서, 아사 위기에 놓인 수십만 단위 민간인의 광범위한 저항을 계산에 넣지 않더라도 물리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10]

잔혹성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계획은 물리적인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점에서 문제가 컸다. 멸망 당시 촉의 호구상 인구는 90만이며, 통계에서 누락된 인구를 포함한 전체 실인구는 (추정에 따라 다르지만) 보수적인 수치도 3백만에서 4백만 사이를 제시한다.[11] 또한 촉의 인구는 후한 대부터 성도가 자리한 쓰촨 분지(부현-성도 일대)와 익주의 제 2 수도라 할 수 있는 한중에 집중되었다.

이렇게 인구가 밀집된 한중은 경상도와 유사한 크기이며, 강유가 한중에 배치한 군대는 고작 1만에 불과했다.[12] 따라서 청야를 담당하는 한중 주둔군은 고작 1만 명으로 경상도 넓이 전체에 분포한 취락을 돌면서, 수십만 백성이 당장 내일 먹을 식량까지 남김없이 징발해 정해진 요새까지 운송해야만 했다. 모든 운송작업과 요새 주둔은 적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마무리되어야 했는데, 중국 전근대 부대의 일반적인 이동속도가 불과 하루 12km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그리고 계획의 기본 단계인 청야가 실패한다면 한중에 도달한 적은 자연스레 민간에서 식량을 징발하여 현지보급에 성공할 것이고, 강유는 "약화되지 않은" 적군과의 결전을 치뤄야 할 터였다.

두 번째로, 요새에 모인 주둔군이 구원군 도착까지 기다린다는 부분도 어려운 묘기이긴 마찬가지였다. 만약 뭔가 사정이 생겨 구원이 늦어지고 요새가 함락된다면 어렵사리 밀어붙인 불완전한 청야조차 의미를 잃게 된다. 이 작계에서 주둔군은 반드시 적을 막아내고 정확한 시점에 문을 열고 나와 구원군과 협력할 필요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늦거나 빠르면 (이 작계가 이루고자 하는 유일한 목표인)위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데 실패하거나, 최악의 경우 각개격파당할 위험이 있었다. 게다가 "분산되어 버티던 소규모 군대들이 정확한 순간 본대에 합류하여 적을 격파한다"는 작전은 현대적인 통신수단이 도입된 2차대전에서조차 곡예에 가까웠다. 전근대의 부대는 적이든 아군이든 다른 부대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었고 자신들의 주관대로 작전을 진행하였다. 잘못된 정보로 인한 오판은 너무나 흔한 일이었고 부대가 계획대로 완벽한 합동 작전을 성공하는 일은 드물었다. 후한 말의 군벌 공손찬원소의 위장 신호에 속아 출진하여 본거지가 함락당한 사례처럼, 적을 사이에 둔 상태에서의 연락은 더욱 더 위험성이 높았다. 심지어 강유 본인조차 군대의 합류 일정이 어긋나 패퇴한 전례가 있으므로, 이 전략은 당대 기준으로는 상당히 힘든 묘기를 요구하는 것이 분명했다.

세 번째로, 이 계획은 한중이라는 거대한 대가를 지불하면서도 거둘 수확은 확실하지 않았다. 강유는 한중을 내어주는 대가로 상대에게 커다란 희생을 강요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놀랍게도 이 계획에는 퇴각하는 위군을 막아설 수단이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 위군은 위험한 순간이 오면 다양한 길을 따라 언제든 퇴각을 시도할 수 있었다. 혹여 퇴각 과정에서 피해를 입힌다고 한들, 위군이 입을 수천에서 수만의 손실이 촉군이 스스로 벌인 청야와 위군의 현지보급으로 촉의 제 2 수도인 한중이 입을 막대한 손해보다 크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중이 가지는 전략적, 정치적, 국가적 중요성은 이렇게 도박성이 짙은 계획의 일회용 미끼로 사용하기엔 너무나 컸다. 설령 성공하더라도 한중의 수십만 주민을 고작 수만 군대와 맞바꾸는 결과물이 될지 몰랐다.

마지막으로, 강유는 철저하게 위군이 촉군의 생각대로 움직일 것이라 가정했다. 위군이 별도의 부대로 구원군을 막아서거나, 너무 빨리 움직여 촉군의 청야가 실패하거나, 혹은 위군이 너무 많아서 강유의 군대가 지원군으로 나서도 걷어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어떻게 일어날지에 대해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즉 이 계획은 오직 위군이 지금까지처럼 6만 이하의 군대를 움직여, 강유가 바라는 실책을 범해주는 경우에만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다.

이렇듯 강유의 계획에는 문제가 산재해 있었다. 이 계획은 가장 좋게 표현해도 도박적이었고, 적이 예상과 다른 규모나 방향으로 진군할 경우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단히 태만했다. 그리고 태만함의 대가는 정말로 잔인한 형태로 촉을 찾아왔다.


2.4. 262년경 촉의 정치적 혼란[편집]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촉군은 258년에 방어 체제를 재편했다.[13] 263년 위군의 공격을 감지한 강유는 이 방어선을 초안대로 작동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지난 수십년동안 이어진 대규모 원정들의 실패 이후, 촉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북벌과 강유에 대해 회의적인 분위기가 짙게 형성되었다. 심지어 군부조차 여론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요화는 262년 강유의 원정에 앞서 한탄했고[14] 장익은 노골적으로 강유와 맞섰다.[15] 환관인 황호와, 그 환관과 거리를 둔 한중 막부의 후계자들인 제갈첨, 동궐마저 강유에게서 군권을 빼앗아 염우에게 주고자 했다.

북방 원정에 대한 회의감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강유는 262년에 또다시 패배했고, 실각을 두려워한 나머지 성도 조정이나 한중으로 귀환하는 대신 답중에 자신 휘하의 군대와 함께 틀어박혀 실각에서 도망쳤다.[16] 군부를 틀어쥔 강경파 장군이 실각을 피하려 군대를 들고 도망친 형세로서, 촉 정부와 백성들에게 무척이나 의미하는 바가 클 사건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군의 침공 준비를 알아차린 강유는 수도인 성도에 장익요화를 보내 각각 양안관구(陽安關口)와 음평교두(陰平橋頭)를 지키게 하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미 신뢰에 금이 간 상태에서 황제인 유선이 그의 요구를 신뢰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후주 유선은 무당의 점궤를 근거로 강유의 요구를 거부했다[17]. 또한 지원 요청마저 한중을 내주고 적을 섬멸한다는 당초 계획에 충실했으므로, 이 시점에서 한중 민간의 막대한 피해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가고 있었다.


2.5. 위군의 작계[편집]


한편 정치적 중요성이 높은 대규모 원정을 기획한 사마소와 종회는 촉의 지형 등을 검토하며 칼날을 가다듬었다. 사마소는 촉의 총 군사 수를 약 9만으로 파악했고, 이 중에서 수도인 성도를 포함하여 각 지역에 주둔하여 수비하는 군대를 4만으로, 별도로 기동 가능한 군대를 5만으로 추산하였다. 전쟁에 앞선 위군의 추산치는 원정이 끝나고 항복한 촉 정부가 제시한 장부상의 수치 10만 2천과 상당히 유사하여, 고대 기준으로는 나쁘지 않은 수준의 정확도였다.

이렇게 촉의 여력을 파악한 뒤, 사마소가 내놓은 작계는 다음과 같았다.

  • 강유가 이끄는 군대는 현재 답중에 머물러 있다.
  • 등애가 답중에 주둔한 강유의 군대(촉의 '기동군')를 묶어 놓는 사이, 별도로 군대를 보내 강유군을 포위, 섬멸한다.
  • 한편 본대는 이와 동시에 낙곡을 통해 한중으로 진입, 공격한다.
  • 만일 한중의 지역 수비군이 험지의 요새에 들어가 저항한다면, 그들의 병력은 분산될 수밖에 없다.
  • 대군으로는 (수비군이 분산된)험지의 요새들을 포위하는 한편, 정병들은 분산시켜 한중 평야를 점령하게 한다.
  • 한중을 점령하면 관두(關頭)[18]는 혼자서 버틸 수 없고, 한중에서 성도로 나오는 입구인 검각도 의지해 지킬 입지가 되지 못한다.
  • 이렇게 한중을 점령하고 검각, 양안관이 떨어져 (성도로 가는 길이 열리면), 우둔한 유선은 항복을 택할 수밖에 없다.[19]

원정에 동원된 병력은 사료상 16만 명(정사 삼국지)~18만 명(진서)이었다. 위군과 오군이 나란히 10만 단위의 군을 동원하던 남부 전선에 비해, 대촉전선에서는 상호간 10만 이하의 군대만을 동원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따라서 사마소의 계획은 본래 대오전선에 투입되던 규모의 군대를 촉 방면으로 투입함으로써 분명한 수적 우위를 점하는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대대적인 변화에 대한 대비는 커녕 현상유지를 믿고 도박적인 작계를 준비한 촉군은, 여태껏 경험이 없는 이례적인 규모의 군대와 맞상대하게 될 것이었다. 촉 원정군의 총 지휘관은 사마소였고, 이 군은 세 명의 지휘관 아래에 편성되어 각기 다른 역할을 맡아 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예정이었다.

  • 정서 장군 등애: 대촉 전선에서 강유를 상대하던 베테랑으로서, 3만 군대를 이끌고 적도에서 답중으로 침공하여 강유군의 시선을 끄는 역할을 수행했다. 금성 태수 양흔, 농서 태수 견홍, 천수 태수 왕기 등이 협력하였다.
  • 옹주 자사 제갈서: 3만을 이끌고 기산 방면으로 진군한다. 강유가 퇴각하거나 한중을 구원하려 시도하면 퇴로를 막고 포위한다. 즉, 앞에서는 등애가 강유를 치고 뒤에서는 제갈서가 퇴로를 막아 강유를 고립, 섬멸한다.
  • 진서 장군 종회: 현장 지휘관 중 가장 이른 시기부터 원정을 계획해온 인물이며 본대를 지휘했다. 18만 대군 중 본대인 10만(혹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포야-당락-자오 세 갈래 잔도로 병력을 이동하여 한중을 침공한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등애가 강유의 주의를 끌며 군대를 묶어놓은 사이, 종회는 촉의 산길을 빠르게 돌파하여 한중을 장악함으로서 보급을 해결한다. 한편 제갈서는 퇴로를 막아 강유의 군을 가둔다. 등애와 제갈서는 갇힌 강유군을 포위섬멸한다. 이렇게 촉의 주력군이 전멸하고 한중이 넘어가면 상대는 붕괴하게 된다.

이렇듯 위군은 과거 한중전 이후 최초로 대촉 전선에 투입되는 10만 이상의 군대를 허투루 쓸 생각이 없었다. 이들은 수적인 우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상대 주력군의 기동을 제약하기로 마음먹었으며, 자신들의 군대가 취할 행동만 아니라 상대방의 가용 전력을 파악하고, 나아가 상대가 택한 도박적인 작계의 약점들을 역으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촉군보다 탁월했다.

3. 전쟁의 전개[편집]



3.1. 263년 8~9월[편집]



3.1.1. 8월 말 ~ 9월 초. 전쟁 발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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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월, 위는 최초의 작계대로 촉을 공격한다. 서쪽 방면에서는 등애가 이끄는 군대가 강유의 군대를 붙잡아 두기 위해 출진한다. 중앙에서는 제갈서가 무도를 거쳐 강유의 퇴각로를 장악하기 위해 출진한다. 동쪽 방면에서 종회가 이끄는 주력군이 야곡, 낙곡, 자오곡 등으로 진군해 왕함이 지키는 낙성, 장빈이 지키는 한성, 장서와 부첨이 지키는 관성, 즉 양안관구를 목표로 삼는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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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편 촉 정부는 적의 원정이 현실화되었음을 파악하고, 요화를 답중으로, 장익과 동궐을 양안관구로 파견한다.[22] 이는 일전에 강유가 지원군을 제안했던 곳과 같은 위치이다.[23]
    • 전쟁 직전 강유의 조언이 거부된 탓에 촉의 초기 대응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후주전에는 여름 도중 지원을 명시하였으므로 사실과 다르다. 이후 살펴볼 내용이지만 요화는 실제로 강유군에 합류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장익과 동궐은 음평교두에 적보다 먼저 도착해 한달여를 기다릴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따라서 촉 조정의 대응은 느리기는 커녕 빠른 편이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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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유가 이끄는 촉의 핵심 군대는 위군의 계획에 휘말려든다. 9월 초까지 전투가 벌어진다. 등애는 강유를 붙잡아두고 시간을 소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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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애가 성공적으로 강유를 붙잡아둔 사이, 제갈서는 강유의 퇴로를 막기 위해 남부로, 그리고 종회가 이끄는 본대는 오래동안 촉의 정치적 중심지였던 한중으로, 거의 아무 저항도 없이 찌르고 들어갈 시간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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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중의 촉군은 종회의 남하를 감지한다. 원래 계획대로 한중의 모든 위(보루)를 포기[24]하고 한성과 낙성으로 후퇴할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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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촉의 구원군인 동궐과 장익은 음평에 도달할 무렵 제갈서가 건위 방면을 지나친다는 소식을 듣고 음평에 한 달이나 머무른다. 제갈서가 건위 방면으로 나아가 음평교두를 점령하면 강유의 퇴로가 틀어막히기 때문이다.[25] 요화가 동궐, 장익과 달리 강유군에 미리 합류해있었다는 서술로 볼 때, 요화가 답중에 주둔한 강유군에 합류하여 퇴각을 돕는 역할을 맡고, 동궐/장익은 강유의 퇴각에 필요한 후방거점인 음평교두를 확보하고 제갈서군의 강유 포위를 막으려던 의도로 보인다.
    • 즉, 촉 조정에서 보낸 구원군은 제갈서가 막 건위 방면으로 향하는 시점에 이미 음평에 도착하였으나, 답중에 주둔하던 강유가 포위망에 갇혀 패망하는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한중 수비군 지원을 포기하고 음평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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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까지의 흐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촉군은 전쟁 전야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 비록 위험천만한 작계이지만 - 강유의 작계대로 움직였으며, 위군 역시 계획에 충실한 움직임을 보였다. 위군의 계획은 성공적으로 작동하여, 강유가 등애에게 말려들어 대응이 늦어지는 사이 다른 방면의 주력군은 계획대로 포위와 한중 공격을 위한 시간을 벌었다. 촉 조정은 비록 빠르게 대응했지만, 강유가 실각을 피하기 위해 군을 이끌고 본토에서 너무 먼 답중에 주둔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강유를 포위하려는 위군의 움직임을 관측한 촉군은 강유를 지원할지 한중을 지킬지 선택을 강요당한다. 결국 촉 조정의 빠른 대응에도 불구하고, 동궐, 장익이 이끄는 촉군은 강유 구원을 우선시해 한중 구원을 포기하게 되었다.


3.1.2. 9월 초 ~ 9월 중. 한중 장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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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회가 한중에 도달했을 때, 촉군은 한성과 낙성에 결집한 상태였다. 호군 장빈 휘하의 5천이 한성을, 감군 왕함 휘하의 5천이 낙성을 수비하여 병력은 총합 만 명이었다.[28][29] 종회는 순개와 이보에게 각각 1만을 주어 한성, 낙성을 총합 2만 군으로 포위했다.[30]
    • 촉군으로서는 절망적이게도 소규모 요새들의 퇴각 과정은 원활하게 수행되지 않았다. 종회군이 한중을 동서로 가르지르는 한천(한수), 혹은 한중으로 진입하였을 때[26] 해당 방면의 위수(방어진과 둔영)들이 다수 항복하였다는 기록이 남았기 때문이다.[27] 오직 황금곡의 유은만이 항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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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점에서 위군은 단순히 한중에 손해 없이 입성했을 뿐만 아니라, 방어군이 주둔한 한성과 낙성을 포위한 상태로 한중 북부의 평야를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한중 전체에 촉군이 바랐던 것과 같은 수준의 만족스러운 청야가 이뤄졌다고 간주하기는 아주 어렵다.
    • 촉군이 한, 낙을 제외한 한중의 다른 모든 요새를 포기하였다는 점. 즉, 한성과 낙성 일대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청야의 주체가 불분명하다는 점.
      • 게다가 본디 청야를 수행하며 한성/낙성까지 향해야 했을 다수의 위수(보루)가 종회군이 도착하자 항복했다는 기록이 남은 점.
    • 전근대의 제한된 연락망과 도로망으로는 인간과 물자의 빠른 이동이 힘들다는 점.
    • 경상도와 비슷한 한중의 규모에 비해 청야를 수행해야 하는 한중의 촉군은 고작 1만여에 불과하였다는 점.
    • 위군의 진군 속도가 2~3주 내외로 빠른 편이었기에 촉군의 한정된 병력으로는 청야할 시간이 모자라고, 위군은 처음부터 빠른 민간 장악을 중요시했으며, 또한 한성/낙성 포위 이후 위군이 실제로 자유롭게 한중의 평야지대를 활보하며 이동한 점.
  • 이러한 맥락 속에서, 종회는 전쟁 개시 후 한달이 채 되지 않아 한중군의 치소가 있는 분지 중심부를 아무런 저항 없이 차지하였다. 그는 제갈량의 묘까지 가서 제사를 올리고, 수비군의 대장과 편지를 교환하는 등 퍼포먼스를 벌일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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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유는 종회가 한중으로 진입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후방인 음평으로 후퇴를 시도한다.[31] 등애와 제갈서의 협공을 받아 고립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한 기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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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애 휘하의 양흔(楊欣)은 강유가 이끄는 군을 추격해 강천구(彊川口)에서 큰 전투를 벌인다. 퇴각하는 강유에게 손실을 강요한다. 강유는 퇴각이 아니라 도주라고 적힐 정도의 손실을 입는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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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점에서 제갈서가 어느 경로를 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동궐과 장익이 음평에서 "한 달여간" 머물렀다는 서술, 그리고 강유가 음평에 도착할 무렵에 동궐과 장익은 음평에 없었다는 점을 함께 고려하면, 이 시점에서는 아직 제갈서가 이끄는 위군은 강유의 퇴로인 음평교두를 틀어막지는 못한 상태로 보인다. 즉, 동궐, 장익이 이끄는 촉군은 아직 음평교두를 확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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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중순까지의 흐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위군은 적은 시간 동안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종회가 이끄는 군은 적의 지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일찍 한중 일대를 장악했고, 등애의 군은 강유에게 손실을 강요했으며, 제갈서는 아무런 방해 없이 상대의 배후를 찌르는 움직임에 성공했다. 반면 강유의 군대를 구원해야 했던 촉군은 상당히 우울한 결과들과 마주했다. 강유는 포위 위험에 처한 상태로 여전히 수백 km 거리에서 피해를 강요당했고, 강유를 구원하려던 군대들은 음평 일대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상태였다.

3.1.3. 9월 중 ~ 9월 말. 관성 함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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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군은 10월이 되기 전에 한중에서 더 나아가 성도에서 한중을 잇는 주요 거점인 관성(양안관)을 함락한다. 부첨이 싸우다 사망한다. 이로써 위군은 원정 후 불과 1개월을 채우기도 전에 적국의 중요 전략거점을 장악하고 현지에서의 식량 보급에 확실히 성공하였다. 이제 종회가 이끄는 대군의 성도 인근의 평야 진출을 막는 요새는 검각 뿐이다. 8~10만에 달하는 위군은 그대로 검각을 향해 진군한다.
    • 이에 반해 촉군은 양안관의 함락으로 한중에 접근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이제 한중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보급 부담을 안고 양안관을 '공성'하거나, 혹은 남부의 대파산맥을 거쳐 접근하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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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갈서는 교두를 장악해 음평에 도달한 강유를 포위한다.
    • 본래 교두에 주둔했던 동궐, 장익의 군대는 제갈서의 군대에 의해 '밀려나' 후방인 백수로 향한다. 별도의 교전 기록은 없으므로 교전이 발생했는지, 아니면 동궐, 장익이 제갈서의 군세를 보고 뒤로 물러났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혹은 양안관성의 함락소식을 먼저 전해듣고 급히 검각으로 향하던 상태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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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유는 음평에 도달하여 관성 함락 소식을 듣고 검각 수비를 결정한다. 하지만 백수를 경유하는 동쪽 길은 교두를 점령한 제갈서 군에게 가로막혔기 때문에, 그가 요화의 군대는 포위섬멸당할 위기에 놓인 상태다.[33]
  • 강유는 공함곡, 즉 북쪽 길을 통해 양주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는 제갈서를 기만하기 위한 계책이다.
    • 제갈서는 강유의 기만에 넘어가 교두를 비우고 북쪽으로 이동한다.
    • 제갈서가 기만에 넘어가 교두를 비운 사이, 강유의 군대는 빠르게 교두로 전진한다. 제갈서는 속은 사실을 깨닫고 군을 물리지만 강유는 불과 하루 차이로 교두를 통과하는데 성공한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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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유는 교두를 통과하여 백수로 향하고, 백수에 막 도착해 있던 동궐, 장익의 군대와 합류에 성공한다.[35]
    • 이로서 전쟁 발발 후 약 한달여만에 촉군은 처음으로 예정된 군대 통합에 성공한다.
    • 강유는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검각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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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중순에서 말까지의 흐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강유는 독 안에 갇힌 상태였고 한중은 떨어졌으며 촉군은 한중에 도달할 수단마저 잃었다. 원정이 모두 위군의 계획대로 흘러가는 상황에서, 강유는 훌륭한 기동으로 제갈서를 속이고 백수에서 다른 촉군과 합류하는데 성공했다. 강유의 후퇴는 원정 전체를 통틀어 위군의 계획에 발생한 처음이자 마지막 오차였고, 자멸적인 작계를 세운 강유가 아직까지도 나름의 전술적 역량을 갖췄음을 나타내는 작은 증명이었다.

그러나 강유는 간신히 도망친 군대의 우두머리일 뿐이었고, 그의 작계로 인해 촉이 입은 손실과 소모된 시간들은 고작 이 정도의 작은 이벤트로 해소될 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헤아릴 수 없는 물적 손실과 더불어 귀중한 한달이 소모되었다. 그가 멋지게 구원하기로 계획되었던 관성은 이미 함락되었고 촉군은 더이상 한중으로 진입할 수 없게 되었다. 종회군은 한, 낙의 포위군을 유지하고 나머지 10만여를 이끌어 한중에서 성도로 나가는 입구인 검각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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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양 군은 서로의 작계대로 행동하며 힘을 겨루었다. 위군은 합리적이었고 자신들의 강점을 잘 이용하여 익주의 목젖이라 할 수 있는 한중에 진입, 촉군의 구원까지 막아서는데 성공했다. 설사 원정을 여기서 중단한들 그들이 거둔 성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반면 처음부터 도박적인 작계를 밀어붙인 촉군(혹은 강유)의 경우, 위군에 맞서 각각의 요새들이 버틴다는 가정, 주력군이 제 시간에 한중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정이 모두 산산조각나면서 한중에 접근권마저 잃어버린 최악의 사태로 치닫고 있었다.

위군이 한중을 장악하고 검각을 두드리는 상황에서, 위군은 이 원정을 한중에서 마무리할지, 아니면 더 나아갈지를 결정해야 했다. 이제 익주의 운명은 세 지휘관의 손에 달려 있었다.

3.2. 263년 10월[편집]



3.2.1. 검각 전투와 등애의 우회[편집]


강유를 쫓던 등애와 제갈서는 강유가 도주에 성공하자 고민에 빠졌다. 등애는 제갈서에게 서쪽으로 나아가 검각을 우회하자고 제안하였다. 제갈서는 자신이 본래 받은 명령이 강유와의 교전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검각에 위치한 종회와 합류했다. 종회는 촉의 관리와 선비, 장교를 포로로 잡고 항복을 권유했으나 검각의 촉군은 제안을 거부했다.[36]

강유와 요화, 장익, 동궐이 군세를 합친 촉군의 주력은, 그 때까지 거침없었던 종회의 공세를 검각에서 저지하는 데에 성공한다. 종회는 강유에게 강유를 치켜세우면서 위나라에 봉직하였던 것을 은근히 언급하는 서신을 보내 강유의 심중을 떠보지만, 강유는 무시했다. 종회는 나아가 검각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으므로 병사들을 인솔하여 퇴각했다.[37]

세 지휘관 중 한 명인 제갈서가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등애는 여전히 우회 기동으로 촉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았다.

  • 촉군의 역량은 이미 크게 훼손되었다. (따라서) 위군은 검각을 우회해 촉군의 중심부로 나올 수 있다.
  • 일단 촉의 중심지인 쓰촨 분지(익주 자동군 부현)까지 나오는데 성공하면[38] 검각의 촉군은 대응하기 위해 부현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 검각의 촉군이 자리를 비우면 본대인 종회군은 아무런 방해 없이 진군할 수 있다.
  • 만약 촉군이 검각을 고수한다면, 우회한 위군을 막아설 촉군의 수는 적을 수밖에 없다.[39]

총 지휘관인 사마소에게 이러한 상소를 올린 등애는 음평에서 병력을 모집한 뒤, 험로를 통해 검각 서쪽으로 우회를 시작했다.[40][41] 종회는 등애를 도와 장군 전장(田章) 등을 파견하여 강유관으로 가는 길에서 촉군의 복병 세 부대를 격파하였다. 등애는 전장을 선봉으로 삼아 진군했고, 우회에 투입된 병력은 약 1만여 명이었다.[42]

군대는 산을 뚫고 다리를 만들며 행군했다. 인적이 없는 길이기에 현지 보급은 불가능했고, 자연스레 군대는 식량 문제에 시달렸다. 사료상의 묘사에 따르면 '장수와 병사들은 나무를 붙잡고 낭떠러지를 기어오르며' 행군했다고 한다.[43]

촉 조정은 위군이 검각을 우회해 성도를 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거나, 혹은 등애의 우회를 파악하는데 성공했다. 후주 유선은 위장군 제갈첨과 상서랑 황숭을 보내 위군을 요격하도록 했다.[44][45] 그러나 제갈량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린 나이에 부마가 되어 권력의 심층부에 오른 제갈첨은 명성이 실질을 넘어선 인물이었으며,[46] 실전 경험이라곤 전혀 없었다. 황숭은 울면서 적이 평야로 나오기 전에 험지를 장악하자고 진언했지만, 제갈첨은 강유관을 구원하거나 강유관에서 평야로 나오는 길인 좌담도를 장악하려 시도하는 대신 주저하며 부현에 머물렀다.[47]


3.2.2. 위의 정치적 변화와 제갈서 축출[편집]


등애가 막 우회 기동을 시작할 즈음 위나라의 정국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사마소의 즉위를 합리화할 커다란 업적을 만들어내기 위해 계획된 원정이었다. 그리고 원정군은 불과 한달여 만에 촉의 제 2 수도인 한중을 장악했다. 최초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고, 한중을 장악한 이상 설령 등애의 시도가 실패하더라도 원정 전체가 실패로 규정되는 일은 없었다.

사마소는 아직 원정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진공에 즉위해 구석을 받았으며 황제의 수레와 의복 사용을 허락받았다. 천자가 사마소의 진공 즉위를 "권유"하기 위해 보낸 길고 예식적인 문장에는 파한巴漢을 떨게 만든 원정, 진행중인 바로 이 원정이 언급되었다. 위나라 정계에서는 이 원정을 "성공"으로 규정한 셈이었다.[48]

끝나지 않은 군사 작전에 방심은 금물이라지만, 위나라의 자신만만한 태도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촉군이 한중을 탈환할 가능성이 대단히 희박해졌기 때문이다. 촉이 한중을 탈환하기 위해서는 공격자의 입장에서 험로 보급을 감수하며 양안관구를 공성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한중을 장악한 11~13만에 달하는 위군[49]을 격퇴해야만 했다. 촉의 장부상 총 병력이 10만에 불과하다는 점, 그나마도 보급 문제로 인해 전 병력이 단일 지점에 투사될 수는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황은 더 암울해진다.

종회는 원정 자체보다 자신의 입지와 야심을 우선순위에 두기로 결정했다. 검각에 합류한 제갈서가 두려움에 빠져 교전을 회피한다는 거짓 상소를 몰래 사마소에게 올린 것이다. 종회의 음모는 결실을 맺어 제갈서는 죄인용 수레로 압송되었고, 제갈서의 군대는 모두 종회에게 귀속되었다. 이는 원정 후에 이어질 종회의 난을 알리는 작은 신호였다.

제갈서의 군세까지 흡수한 종회는 계속하여 검각을 두드렸지만, 이미 강유는 험요지에 대한 수비 태세를 마친 상태였다. 전선은 교착되었고, 종회는 군량을 운반하는 길이 매우 멀었으므로 장차 군대를 퇴각시켜 귀환할 것을 의논한다.[50]

3.3. 263년 11월[편집]



3.3.1. 등애의 우회와 제갈첨 격퇴[편집]


원정이 점차 정치적 영역으로 접어들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제갈첨이 험지 주둔을 거부하며 촉군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사이, 등애의 선봉이 강유관에 도착했다. 그가 이끄는 군대는 처음에는 공격을 거부할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등애는 교전에 소극적인 전속(田續)을 다그쳐 선봉에 세워 마막이 지키는 강유관을 공격했다.[51] 수비대장인 마막은 항복했다.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는 일설이 돌지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비롯된 오해로서, 진서 단작전에는 량주 출신의 5천 병사들이 강유관 공격에 공을 세웠음에도 오직 금성태수 양흔 휘하의 병사 30명만이 상을 받았으며 금성 이서 출신들은 단 한 명도 상을 받지 못했다는 기록이, 손초전에는 강유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제갈첨의 망설임과 등애의 과감한 판단이 선명하게 대조되면서, 1만여의 위군은 허무할 정도로 순탄하게 성도 인근의 평지인 부현에 도달했다. 평지에 진입한 위군을 본 백성들은 산으로 달아났고 촉은 통제할 수 없었다.[52]

부현에 주둔하던 제갈첨은 선봉이 격파되자 면죽까지 물러났다.[53][54] 여기서 선봉은 강유관의 마막을 뜻할 수도 있고, 부현에서 작은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등애전에는 부현에서의 전투는 전하지 않는다.) 강유가 이끄는 검각의 촉군은 부현으로 나아가 제갈첨을 지원하는 대신 계속 검각을 수비했다. 이제 등애와 성도 사이를 가로막을 방패막이라곤 이번이 첫 전투인 제갈첨이 이끄는 군대 뿐이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제갈첨은 낭야왕 임명을 거론하며 회유를 권하는 등애의 사자를 참수했다.[55] 황숭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평지에서의 싸움이 다가오고 있었다. 등애는 아들인 혜당정후 등충에게 우익을, 사마 사찬에게 좌익을 맡게 하여 면죽에 주둔한 제갈첨에게 싸움을 걸었다. 전투는 상당히 격화되었던 것 같다. 전투 중간 등충과 사찬이 퇴각하자 등애는 이들을 참수한다고 위협하여 싸움을 지속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위군은 촉군을 크게 격파했다.[56] 제갈첨과 그 아들 제갈상, 황권의 아들인 황숭, 이구, 장비의 손자 장준 등이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등애의 앞에는 무방비한 성도만이 놓여 있었다.


3.3.2. 등애의 성도 진입. 촉의 멸망.[편집]


성도 조정에서는 제갈첨의 패배 소식에 혼란이 퍼져나갔다. 오나라로 도주하자는 의견, 혹은 남중으로 도주하자는 의견이 거론되었다. 하지만 초주는 어차피 신하가 될 거라면 오나라의 신하보다 위나라의 신하가 나으며, 제대로 된 도주 계획도 없이, 적의 대군이 가까워 민중의 저항의지가 사라진 상황에서 어떻게 남중으로 향할 수 있겠냐며 일갈했다. 누군가 이미 성도에 인접한 적군이 과연 항복을 받아주겠냐며 쏘아붙이자, 초주는 위나라 역시도 오나라를 적으로 남겨둔 상황이니 우리의 항복을 자비롭게 받아줄 수밖에 없다며 반박했다.[57]

성도 조정의 논의에서는 수도에서 항전하는 방안이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부현을 위군이 점거한 이상 검각의 촉군도 퇴각할 수밖에 없다는 점, 그러면 10만이 넘는 위군의 본대가 성도로 진입하는 사태를 막을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종회의 대군이 사천평야에 진입한 이상, 설사 강유의 부대가 무사히 성도에 합세한다고 가정해도 수적으로 열세인 촉군의 전력 상 이를 격퇴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이 가정조차 후술할 종회의 방해 때문에 무리가 많은 상황이었다. 항전하자는 의견을 펼친 사람은 유심 뿐이었고, 그조차도 '싸워 이길 수 있다'가 아닌 '싸우다 죽자'라는 의견으로서 무척이나 비관적인 의견이다. 검각에 있던 강유의 병력과 한, 낙에 사로잡힌 병력, 제갈첨의 손실을 감안하면 성도에서 자체적으로 동원할 군사력은 이 시점에서 모두 소진된 상태로 보인다.

아무도 초주의 말을 반박하지 못하는 가운데 유선은 여전히 남중으로 도주하는 방안을 저울질했다. 초주는 남중이 단지 무력에 굴복한 이민족의 땅일 뿐이며, 우리를 원수로 여기는데 과연 도망쳐서 남만인들을 착취한들 과연 더이상의 항쟁이 가능하겠냐고 물었다.[58] 유선은 결국 초주에게 항복문을 작성하도록 했다. 등애가 항복을 받아들임으로서, 불과 두 달간의 원정으로 촉은 멸망하게 되었다. 등애는 성도를 점거했다.


3.3.3. 촉군의 퇴각과 종회의 포위망[편집]


제갈첨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강유가 이끄는 촉군은 검각을 버리고 남하하기 시작한다. 이 때 강유의 병력은 종회전에서는 4~5만, 화양국지에서는 10만이라 기록했다. 종회전에서의 병력 언급이 자신의 전공을 보고하기 위해 올린 공식 문서(표)로서 과장되기 쉽다는 점, 그리고 전쟁 직후 위나라에 제출된 촉의 호구 기록에서 10만 2천을 총병력으로 명시한 점을 고려하면, 화양국지의 10만 기록은 현실성이 없으며 4~5만이 현실적인 수치로 여겨진다. 검각에는 촉의 전 병력 중 절반이 집결해 있던 셈이 된다.

등애의 군대가 성도를 직접 위협하는 상황에서 강유와 중앙 조정과의 연락은 단절되었다. 강유는 조정이 성도 수비, 오나라 도주, 남중 도주 등 여러 선택지 중에서 뭘 고를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검각의 촉군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수도 구원을 위해 퇴각을 시도하였고, 검각을 완전히 비웠다. 10만여에 달하는 종회군이 성도가 있는 평지로 나갈 길이 활짝 열린 순간이었다.

종회는 강유가 성도를 구원하는 모습을 구경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입지를 위해 다른 지휘관을 희생시킬 정도의 야심가였지만 여전히 원정에 필요한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종회의 본대는 동서로 흩어진 군대를 모두 지원할 수 있도록 검각과 성도의 중간에 놓인 부현을 완전히 장악했다. 참군 황보개와 왕매는 부현의 남부에서 병사를 징발했다. 사마 하후함과 호군 호열은 검각에서 성도로 향하는 길을 끊고 침군 원청, 장군 구안은 이를 지원했다.[59]

강유는 4~5만의 병력이 한데 모여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종회의 방해를 무시하며 성도를 향한 행군을 느리게나마 이어나갔다. 종회는 남부의 오나라로 통하는 길과 북부의 탈출로를 모두 막았다. 촉의 마지막 병력이 희망없는 행군을 이어나가는 와중에도 그는 경계심을 유지하며 군대를 집결시켜 포위망을 촘촘하게 조여나갔다.[60] 잔존 촉군은 종회의 방해를 뚫어가며 성도 동쪽, 광한군 처현의 도로에 진입하였으나,[61] 성도와 광한군 처현 사이에 있는 대도와 신도는 이미 종회군에게 점거당한 상태였다.[62]

광한군 처현의 도로에서 절망적인 행군을 이어가던 촉군에게, 유선이 항복해 성도가 점거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싸우지 말고 항복하라는 유선의 칙령이 전달되었다. 강유는 창(과戈)를 던지고 갑옷을 벗어던진 채 부현에 주둔한 종회에게 나아가 항복하였다.[63] 휘하의 병사들은 칼로 돌을 내리치며 분노를 표출했다.


3.4. 오나라에 보낸 구원요청[편집]


촉 조정이 오나라에 보낸 구원 요청은 10월에서야 도착했다. 오나라는 한쪽으로는 수춘을 치면서 다른 쪽으로는 촉을 지원할 병력을 보냈다. 10월 22일, 오나라 황제 손휴는 촉을 구원하고자 군대를 세 방향으로 보내니, 이 중 둘은 위나라를 공격하는 것으로 대장군 정봉은 수춘을 공격하게 하고 장군 정봉(丁封)[64]손이(孫異)는 면중(沔中)을 공격하게 했다. 다른 하나는 유평을 남군에 주둔한 시적에게 보내 진군 방향을 논의하게 했다. 시적은 얼마 전 독자적으로 촉의 염우와 연계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공조할 것을 꾀한 적이 있었다. 이 군대들은 유선이 위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에 모두 철수하였다.[65]


3.5. 원정 이후의 뒷수습과 종회의 반란[편집]


등애는 유선을 행표기 장군으로 삼고 유선이 원래 지내던 궁궐에 머물게 했으며, 태자 유선(劉璿)은 봉거 도위로, 다른 여러 왕들은 부마 도위로 삼았다. 옛 한나라의 관리들은 예전에 황제의 관리이던 것을 원래 지위 고하에 따라 왕의 관리로 삼아 임용하고 일부는 등애 자신의 관속을 겸하게 했다. 사찬은 익주 자사를 겸하게 했고, 견홍 등은 촉의 각 군 태수를 겸하게 했다. 또 유선은 상서랑 이호(李虎)에게 사민부(士民簿)를 보내니, 촉 지역 28만호, 남녀구 94만 명, 또 장수와 군사 10만 2000명, 관리 4만 명, 창고의 식량 40만 섬, 금은 4000근, 금(錦),기(綺),채(綵), 견(絹), 각 20만 필과 그 외의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태복 장현을 보내 강유에게 항복하도록 칙서를 보냈다.

이후 등애는 다소 무난하게 군정관으로서 촉 땅을 일시적으로 다스렸으나 자신의 성공에 취했는지 자충수를 계속 둔다. 등애는 자신의 전공을 뽐내기 위해 경관을 지으며 촉을 이용해 오까지 정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조정에 계속 하며 위의 조정에 등애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으며 '강유는 영웅이나 자신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는 말을 주변에 해 대니 많은 촉한 인사들이 비웃었다. 어쩌면 진성 군인이기에 정치력이 부족한 등애라는 인물의 특징일지도.

한편 강유는 위의 정치적인 상황과 종회의 야심을 이용하여 촉한의 부흥을 꾀했다. 종회는 등애를 모함하여 역적으로 몰아 장안으로 송환하고 강유를 위시한 촉한의 장수들과 가깝게 지내며 자신을 따르지 않는 위의 장수들을 모두 죽이고 촉을 접수하려는 반란을 도모했는데, 기밀이 유출되어 결국 264년 1월 18일 최후로 촉한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 강유마저 촉한의 부흥을 끝내 이루지 못하며 종회와 함께 위군과 싸우다 전사하고 장익 등 성도의 수많은 장수, 관리들과 촉한의 마지막 태자인 유선이 살해당하여 촉한 부흥의 불씨마저 완전히 꺼지고 말았는데 유비가 입촉한 지 50년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종회의 난이 진압된 후에도 종회의 난을 진압한 위관에 의해 등애, 등충, 사찬 등은 암살 당했으며, 등애의 다른 아들들 또한 낙양에서 반역자로 사형당했다. 그리고 낙양으로 이동 중에 요화 마저 생을 마감하며 촉한멸망전은 주요 인물 대부분이 죽는 결말로 끝이 난다.

4. 결과[편집]


촉한이 멸망하는 순간 촉은 가구 28만 호, 인구 94만 명, 병력 10만 2000명, 관리 4만 명, 식량 40만 섬, 금과 은 4000근, 비단 40만 필의 규모와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식량의 수치가 낮은 점이 종종 거론되곤 하는데, 촉은 최소한 유장 대부터 군대에 비단을 공급했다.[66] 그 자체로는 전쟁에 별다른 가치가 없는 비단을 군대에 직접 공급했다는 사실은, 익주 지역의 군대가 필요에 따라 민간에서 보급품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보급을 수행했다는 간접적인 근거가 된다. 예컨데 유장이 성도에서 항전을 고심할 때에도, 강경파의 주장에서 비단은 주요한 비축물자로 언급되었다. 적에게 세력 중심지가 공성당하는 상황에서도 비단이 보급품과 교환 가능한 재화로 여겨졌다는 간접적 근거인데, 멸망 이후 촉의 사민부에서 상당한 양의 비단 비축량이 확인되는 바, 촉의 전쟁 준비(재화를 보급품으로 교환)가 강유와 중앙정부의 대립으로 인해 늦어졌거나, 혹은 그 멸망이 지나치게 빨라 준비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던 흔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마소는 촉정 중간인 10월에 그도록 사양하던 진공의 작위와 구석을 받았으며 종회의 난이 진압되자마자 진왕이 되었다. 사마소는 "대진이 용흥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우주를 깨끗하게 하는데 있어 용촉(庸蜀)[67]으로부터 시작한다.[68]"라고 일컫으며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했다. 그는 종회의 난이 마무리되자 곧 진왕의 모든 의례와 격식을 황제와 동일하게 했고, 아들 사마염이 조환에게 선양받아 서진을 건국했다. 그리고 15년 후, 오나라도 서진에 의해 멸망하고 서진이 삼국을 통일했다. 오 멸망 과정은 오멸망전 항목 참고.

한편 서진이 멸망한 이후 남쪽으로 이주한 동진 정권은 황권이 실추되었고, 동진의 역사가 습착치는 중원을 잃고 남부로 밀려난 동진의 정통성을 옹호하기 위해, 촉이 한의 정통을 이은 국가이며, 사마씨가 세운 서진이 촉을 멸망시켰으므로, 그 서진의 후예인 동진이 유일한 정통이라는 논리를 주장하였다. 이렇게 중국의 심장부를 상실한 남조 정권이 정통성을 세우려는 정치적인 목적 하에 촉 정벌의 중요성을 과장하면서 후대로 이어지는 촉한정통론의 기본적 기틀이 마련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조가 성리학의 대두와 남송 이전에는 주류를 차지하지 못했다.

5. 민간전승[편집]


성한 정권이 들어선 후 347년경에 환온이 촉을 평정할 때에 손성은 촉의 여러 나이든 이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말하길 강유가 이미 항복한 뒤에 은밀히 유선에게 표를 올려 ‘종회에게 거짓으로 항복하여 섬기고 이를 틈타 그를 죽이고 촉 땅을 회복하고자 한다.'라고 말했으나 때 마침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마침내 멸망되기에 이르렀으니 촉인들이 지금도 그를 안타깝게 여긴다고 하였다고 한다. 촉한이 멸망하고 강유도 죽은 지 80년이 넘어서도 촉 사람들은 촉한의 멸망과 이를 막기 위해 마지막까지 분투했던 한 장수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6. 기타[편집]


성도방어전 당시 남중에 있던 곽익의 지원 요청을 유선이 거부하고 그를 소환하지 않은 부분[69]에 대해서 유선의 실책이라는 의견이 있다. 이는 어느 정도는 참작할만한 의견이긴 하나[70]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곽익이 위군이 공격해 들어오자 촉 내부를 방위하기 위해서 유선이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지원을 하겠다고 요청한 것 자체다. 이게 무슨 의미냐면 곽익은 강유의 한중을 내주는 작계에 따라 일이 잘못되었을시 촉 내부가 위험해 질 수도 있다는 예상을 했고, 그게 실제적인 위협임을 사전에 인지한 촉 내부의 몇 안되는 사람이었던 얘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곽익은 이전의 작계에 따른 '상식적인' 전략 판단을 했고, 따라서 상식적으로 정석적인 판단을 하는 지휘관인 곽익이 대체할 대상은 제갈첨이 아니라 애초부터 강유급의 최고지휘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대 위, 오에 비해 열세인 촉의 상황에서 필요한 총사령관은 흥세 전투를 승전으로 이끈 왕평 같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총사령관이지 강유 같은 무책임한 도박사가 아니었다.

7. 기타 창작물에서[편집]



7.1. 삼국지 시리즈[편집]


전반적으로는 이 시기가 사실상의 삼국지 본편이 다루는 최후반 시나리오 시계열의 마지노선이 되는 경우가 많다. 대체적으로는 후반부에 장수가 없어서 내정이 안 되는터라 치안이나 병력 동원이 개판이 되는 경우가 잦아 도적이나 이민족이 침공하는 등 여러모로 플레이하기 곤란해진다. 더군다나 장수들이 금방 수명이 다해 우수수 죽어가기 때문에 수명없음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그래도 더 재미없어진다. 그래서 사서에는 나오는 후반부 무장들의 출연이 많이지기 시작했다. 현재까지는 삼국지 8, 삼국지 9, 삼국지 14에서 시나리오로 등장하였다.

삼국지 14에선 PK 초회한정판 기준 '촉한의 멸망' 시나리오로 제공되었으며 이후 판매되는 삼국지 14에서는 제공되지 않는 시나리오라 사실상 현재 시점에서 삼국지 14를 구입했을때 진행할 수 있는 마지막 시나리오는 249년 정시정변이다. 다만 나레이션 오프닝이라도 있는 정시정변과 달리 촉한의 멸망 시나리오는 오프닝도 없고 당대 벌어졌던 주요 이벤트 역시 하나도 없어 매우 성의 없는 시나리오이며, 수명없음이 아니면 촉한쪽 인물들이 시작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수수 죽어나가서 촉이 금방 무력화되는 단점이 있기에 역시 그다지 해볼만한 시나리오가 아니다. 위나 오도 상황이 그다지 다르지 않아 10년 정도 진행하면 전 중국에 무장이 100명도 남지 않는다. 후반부 시나리오는 정시정변만 해도 장수 운용에 곤란을 겪는지라 굳이 해볼만한 가치는 후반기 팬이 아니면 없는 셈이다.

7.2.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편집]


연의에서 등애전에서는 답중 전투, 면죽관 전투, 강유전에서는 답중후퇴전, 검각방어전 등으로 전투가 묘사된다.

등애전에서는 등애가 후화에서 강유를 격파한 직후에 제갈서가 등애에게 사신으로 파견되어 등애 덕분에 서부전선이 안정되었다는 판단에 따라 사마소의 지시에 따라 종회와 군대를 나누어 촉 정벌을 위해 답중과 한중을 동시에 공격하기로 한다.

등애는 강유가 퇴각하기 전에 답중성을 포위하고 강유는 조광이 성 안에서 시간을 끄는 동안 서쪽으로 퇴각하며, 조광이 문앙과 단기접전을 벌이지만 문앙에게 사망한다. 강유는 수많은 피해를 입으면서도 빠져나가려 하며, 등애와 단기접전을 벌이지만 무승부가 된다. 동쪽에서는 제갈서가 나타나 강유를 달아나지 못하게 하려고 추격하며, 제갈서가 실수해서 잠깐의 틈을 주자 강유는 그 틈을 이용해 빠져나간다.

등애가 이끄는 위군은 촉군이 검각을 틀어막아서 방도가 없자 약초꾼에게서 들은 험로인 강유성으로 가는 길인 잔도를 통해서 가기로 하며, 제갈서는 위험한 길이라면서 홀로 반대하고 떠난다. 강유성으로 가서 마막의 항복을 받고 등애는 면죽관으로 진군하며,장준, 조광이 이끄는 촉군의 복병이 나타나 등애군을 공격하며, 등충이 단기접전에서 장준을 죽인다.

조통이 동생의 원수라면서 분노에 사로잡혀 문앙을 공격해 단기접전을 벌이지만 전사하며, 나헌이 문앙과 단기접전을 벌이다가 상대가 강한 것을 깨닫고 적당히 싸우다가 자신은 해야할 일이 있기에 여기서 죽을 수 없다면서 물러난다. 결국 제갈첨도 전사하고 면죽관은 등애가 이끄는 위군이 함락하며, 그대로 성도로 진군해 포위하자 유선이 항복하면서 촉이 멸망한다.

강유전에서는 후화에서 패하자 강유가 위군이 촉 정벌을 할 것을 예측하고 성도에서 지속적으로 원군을 요청했지만 묵살되며, 위군이 한중을 공격하고 부첨이 양평관에서 배신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이에 강유는 검각으로 퇴각해서 막기로 하는데, 등애가 추격할 것을 우려해 조광, 영수가 답중에 남아 적을 막아서 시간을 끌기로 한다.

제갈서가 서쪽 길목의 음평교를 장악한 것을 보고 영수가 조광을 통해 검각으로 곧장 가지 않고 공함곡을 거쳐 옹주로 가는 척을 하자 제갈서가 일부 병력을 빼서 조광이 있는 북쪽으로 가게 하며, 북쪽에서는 조광이 위군을 막고 문앙과 단기접전에서 부상을 입지만 필사적으로 위군을 막는다. 강유가 음평교로 진입하자 남쪽에서 등애가 이끄는 복병이 등장해 강유를 추격해 단기접전을 벌이지만 강유가 등애를 부상입게 만들어 물러나게 하며, 강유는 답중에서 퇴각하는 것에 성공하지만 조광, 영수는 전사했다.

강유는 검각으로 가는 도중에 조통이 조광의 죽음에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조통을 시켜 성도에 원군을 요청하는 서신으로 보내며, 강유는 검각에 들어가고 종회가 검각을 공격했지만 여러 차례 종회를 격퇴해 강유가 이끄는 촉군은 사기가 올랐다.

검각에서 강유에게 올 원군이 가까운 곳까지 도착했을 무렵에 종회가 군사들을 시켜 다시 검각을 공격하며, 강유가 위군을 막는 도중에 장익이 이끄는 원군이 도착하자 강유는 요화와 함께 산을 올라타 우회해서 위군의 본진을 공격하기로 한다. 그 사이에 검각을 방어한 촉군은 2차례 공격하는 위군을 막아내며, 강유와 요화는 본진을 기습하는 것에 성공해 위군을 격퇴해 물러나게 한다. 그러나 등애가 이끄는 위군이 성도를 포위해 유선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자 강유는 종회에게 항복한다.


7.3. 진삼국무쌍 시리즈[편집]


진삼국무쌍 6에서는 진의 최후 상대로 등장. 그 후 1년 뒤 사마소가 죽고 손오도 망해 진이 통일했다는 나레이션이 나온다.

진삼국무쌍 7에서는 진의 정사와 IF의 무대로 등장. 정사에서는 진의 최종 무대로, 갈라졌다가 합류한 진의 대군이 남쪽에서 북쪽의 성도성으로 밀고 들어간다.[71] IF에서는 생존한 사마사가 4년간 국력을 키우다가 자신은 촉으로,[72] 사마소는 오로 침공을 개시한다.[73] 정사의 본진과는 달리 서쪽에 본진이 있으며, 성도성으로 가면 남쪽에서 촉의 군세가 나타난다. 하지만 촉이 멸망했음에도 강유를 비롯한 촉의 잔당들이 성도를 탈환하려했지만 실패하고, 오의 잔당들과 연합하여 적벽에서 최종결전을 벌이지만 결국 패배하고 만다.

진삼국무쌍 8에서는 촉군과 진군의 최후 시나리오로 성도 공략 시나리오가 등장한다. 촉군의 경우 성도에 침입한 왕원희, 가충을 격파하는 것이 승리조건이며, 강유관에 침입한 등애의 격파, 검각으로 진입하는 종회의 격파 등이 세부 임무로 구성된다. 진군의 경우 성도의 유선 격파[74]가 승리조건.


여담으로 브금이 6, 7, 8편 다 굉장히 좋다.
[1] 위멸촉지전[2] 『삼국지』 권4 「진류왕기」, 『진서』 권2 「문제기」. 전쟁 이후의 '종회의 난'까지 포함하면 264년 1월까지.[3] 촉한의 사민부에 기록된 촉의 전 병력 총합은 10만 2천 명으로, 사마소가 출병 전 파악한 9만보다 소폭 많다. 정확히 얼마만큼의 병력이 전선에 투입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종회가 강유의 항복을 받고 난 후 올린 표에 의하면 강유가 병사 4~5만 명을 데리고 있었다 하며, 한성, 낙성에 각각 5천 명씩 주둔 중이었으니 5~6만 명은 확실히 참전했다. 허나 제갈첨 군대의 규모가 미상이다.[4] 선양받음을 뜻한다.[5] 江油關, 강유수(江油戍)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출전: 『中国历史地图集』第三册 22-23쪽. 여기서 수(戍)는 수자리(변방을 지키는 일), 둔영(屯營), 병사(兵舍)를 뜻한다.[6] 이상한 일이 아닌게, 진령산맥이 험준해 방어에 유리하다는 뜻은, 반대로 촉한도 진령산맥 내에서는 주둔이 쉽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당장 21세기 대한민국도 GOP 오르내리기 얼마나 힘든지를 생각해보자. 언제 올지도 모를 위군의 침공을 위해 시시때때로 쏟아지는 비와 짐승들의 습격을 견디며 요새의 유지를 위해 험준한 산맥을 뚫고 병력과 보급을 수십년간 유지하는 것은 되려 촉한을 재정파탄으로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다.[7] 촉서 강유전[8] 촉서 왕평전[9] 촉서 강유전[10] 민간의 입장에서 군대는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보급을 위해 자신들을 수탈하여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이다. 특히나 아군이 청야를 명목으로 민간의 식량을 완전히 제거하려 든다면, 차라리 자신들이 소모할 식량만을 요구하는 침공군에게 협조하는 쪽이 유리할 수 있다.[11] "삼국시대 호구수의 변화상과 추정"[12] 전쟁 발발 직전 강유의 증원 요청이나 유선이 보낸 지원군도 어디까지나 양안관구 주둔군으로서 한중 평야에 진입할 계획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특히나 실제 파견된 군은 양안관의 외조外助가 목표로서 한중 평야에 진입할 예정은 없었다. 이상의 내용은 화양국지 유후주지, 촉서 강유전을 따른다.[13] 화양국지 유후주지[14] 촉서 요화전[15] 촉서 장익전[16] 촉서 강유전, 화양국지 外 다수[17] 전근대의 '점궤'는 진짜 점술이라기보단 지도층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로서 조작되는 결과물에 가까웠다. 고려의 개경귀족은 공민왕의 천도를 막고자 점궤를 조작했고, 고대 로마군은 닭이 모이를 쪼는 점궤의 결과를 항상 승리로 조작했다. 이것과 유선이 결국 지원군 보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유선이 진짜로 점궤를 믿었다기보단 할거한 군벌과 반역자 사이를 오고가는 강유군을 두고 중앙군을 빼고 싶지 않아 점궤 핑계를 댄 것이라 보는것이 옳다.[18] 양안관두를 일컫는다. 촉서 법정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 표기방식.[19] 이상의 사안은 모두 진서 문제본기를 출처로 한다.[20] 위서 등애전[21] 촉서 강유전. 한수에서 동궐, 장익과 합류하기 전에 요화가 강유 측에 합류하였음이 확인됨.[22] 촉서 후주전, 화양국지[23] 촉서 강유전[24] 위서 종회전, 촉군이 각 보루의 병사들에게 싸우지 말고 물러나 한성과 낙성 두성으로 돌아와 지키라고 명령했다는 서술이 있다.[25] 자치통감, 촉서 강유전.[26] 한천은 한수를 가리키는 말로도, 한수 인근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다.[27] 화양국지 유은전.[28] 위서 종회전[29] 촉서 강유전[30] 위서 종회전[31] 촉서 강유전[32] 위서 등애전[33] 촉서 강유전[34] 위서 등애전[35] 촉서 강유전[36] 위서 종회전[37] 위서 종회전[38] 음평에서 경곡을 통해 진군하면 강유관을 거쳐 익주 자동군 부현으로 나갈 수 있다. 등애는 이 길을 이용하였다.(화양국지-한중지) 자동군 부현은 검각, 성도와 약 100~120km 정도 떨어진 둘 사이의 중간 지점이다. (거리 정보는 『中国历史地图集』를 토대로 한다.)[39] 이상의 내용은 모두 위서 등애전이 출처이다.[40] 위서 종회전[41] 위서 등애전[42] 진서 문제본기[43] 위서 등애전[44] 화양국지 유후주지[45] 학경 속후한서 제갈첨전[46] 촉서 제갈량전[47] 촉서 황권전[48] 진서 문제본기[49] 한성, 낙성을 포위한 병력은 제외한 값이다.[50] 촉서 강유전[51] 등애전 주석으로 인용된 한진춘추. 진서 위관전에도 나온다.[52] 촉서 후주전, 자치통감[53] 촉서 제갈량전[54] 촉서 황권전[55] 촉서 제갈량전[56] 위서 등애전[57] 촉서 초주전[58] 촉서 초주전[59] 위서 종회전[60] 위서 종회전[61] 촉서 강유전[62] 위서 종회전[63] 촉서 강유전[64] 대장군 정봉의 동생이다.[65] 삼국지 손휴전[66] 촉서 선주전, 촉서 유장전[67] 여기서 '용'은 옛 한중 지방에 있던 나라의 이름이다. 즉 한중 지방을 이른다.[68] 배수의 발언 인용.[69] 촉서 곽준전 주석 한진춘추[70] 곽익이 과연 등애를 이길 수 있었을지는 IF의 영역이겠으나 등애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군사적인 무능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제갈첨과 달리 곽익은 오래전부터 군사적 실적이 있으니 당연히 제갈첨보다는 촉의 명운을 가리는 전투의 지휘관으로썬 쓸만했을 것이다.[71] 철롱산 전투에서 곽회를 살리면 아군 장수로 등장한다.[72] 하후패, 곽회, 등애, 종회, 문앙이 참전.[73] 가충, 왕원희, 제갈탄이 참전.[74] 세부 임무들을 모두 달성할 경우 유선의 항복으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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