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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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崔敬嗣
(? ~ 695)

당나라, 무주의 관원. 활주(滑州) 영창현(靈昌縣) 출신으로 본관은 박릉 최씨 제3파[1]였다. 구당서신당서에서는 손자인 최광원의 열전을 통해 최경사의 행적이 언급된다.


2. 생애[편집]


최경사는 노름과 술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측천무후가 권력을 잡던 당시 방주(房州) 자사로 재임하고 있었다. 중종 이현이 측천무후에 의해 폐위되어 여릉왕(廬陵王)으로 강등되고 방주로 유배된 뒤 많은 관리들이 중종에 대해 무례한 행동을 일삼았는데 최경사는 전임 방주 자사였던 장지건, 동현질과 더불어 여릉왕에게 예의와 공경을 갖추었다.

705년, 신룡정변으로 중종이 복위한 당시 최경사와 동명이인인 익주(益州) 장사 최경사가 있었는데 관리 명단이 중종에게 올라올 때마다 그에게 4번 이상 관직을 수여했으나 나중에 이 최경사를 소견한 뒤에야 착오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중종은 최경사에 대해 수소문했으나 그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위안석을 통해 최경사의 아들인 최열(崔悅)[2]에게 관직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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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문에서는 제3방(第三房)으로 나오는데 중국에서는 한국의 파(派)를 방(房)이라고 한다.[2] 구당서와 자치통감에서는 최왕(崔汪)으로 나오지만 이는 오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