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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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서초구 갑)
제13-14대
박찬종[1]

제15대
최병렬
[2]

제15-16대
박원홍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강남구 갑)
제15대
서상목

제16대
최병렬


제17-18대
이종구


제29대 서울특별시장
대한민국 제8대 노동부장관
최병렬
崔秉烈 | Choi Byung-ryul


파일:최병렬 상임고문.jpg

출생
1938년 9월 16일
경상남도 산청군 차황면
사망
2022년 12월 2일 (향년 84세)
서울특별시
본관
화순 최씨
재임기간
노태우 정부 초대 정무수석비서관
1988년 2월 25일 ~ 1988년 12월 5일
제28대 문화공보부 장관
1988년 12월 5일 ~ 1989년 12월 27일
초대 공보처 장관
1989년 12월 28일 ~ 1990년 12월 20일
제8대 노동부 장관
1990년 12월 27일 ~ 1992년 6월 25일
제29대 서울특별시장
1994년 11월 3일 ~ 1995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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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백영자
자녀
장남 최희준, 차남, 장녀[1]
학력
진주중안국민학교 (졸업)
진주중학교 (졸업)
부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 / 학사)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언론학 / 석사)
종교
천주교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최종 당적

병역
대한민국 육군 상병 만기전역
신체
171cm, 71kg
의원 선수
4
의원 대수
12, 14, 15, 16
약력
한국일보 기자
조선일보 기자
조선일보 정치부장
조선일보 사회부장
조선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이사
제12대 국회의원 (전국구 34번 / 민주정의당)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노태우 정부)
제18대 문화공보부 장관 (노태우 정부)
초대 공보처 장관 (노태우 정부)
제8대 노동부 장관 (노태우 정부)
제14대 국회의원 (전국구 10번 / 민주자유당)
김영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인수위원
제29대 서울특별시장 (관선)
제15대 국회의원 (서울 서초구 갑 / 신한국당)
신한국당 당무위원
한나라당 부총재
제16대 국회의원 (서울 강남구 갑 / 한나라당)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
한나라당 상임고문
새누리당 상임고문
자유한국당 상임고문
미래통합당 상임고문
국민의힘 상임고문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언론인(기자), 정치인, 관료.


2. 생애[편집]


1938년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태어났다. 진주중안국민학교[1], 부산고등학교(10회)[2],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959년 한국일보 기자로 있다가 1963년 조선일보로 옮겼다.[3] 이후 1980년 편집국장이 되었고 1983년 이사에 선임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민주정의당 정책연구소 정세분석실장을 지내면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는 데 기여하였다.

1988년 2월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할 무렵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면서 5공 청산을 주도하여서 전두환 전 대통령 및 그의 측근들과는 사이가 매우 불편해졌다.[4] 같은 해인 1988년 12월 문화공보부장관이 되었고, 1990년 1월 초대 공보처(후일 국정홍보처)장관에 임명되었다.[5] 같은 해 12월 노동부장관이 되어 1992년 6월까지 재직하였다. 노태우 정부 5년 중 3년 반을 장관, 그 중에도 요직인 공보부-공보처에서 2년 장관을 지낸 셈.

1992년 4월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김영삼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의 후보로 지지하였다. 이른바 '신민주계'. 문민정부에서도 관운이 좋아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이후 전국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다. 본래 우명규 경상북도지사가 28대 서울시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성수대교 시공 당시 서울시 건설본부장(책임자)임이 알려지면서 한 달도 되지 않아 자진사퇴했다. 그래서 후임으로 최병렬이 그것도 서울특별시의 마지막 관선시장으로 온 것이다.

그러나 퇴임 전날인 6월 29일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겪었는데, 사고현장에 도착해서 그 참상을 보자 기가 막혀서 말 한마디 못하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후술하다시피 최병렬은 업무 스타일이 강하게 밀어붙이는 저돌적인 타입으로 강골에 속하는 인물. 그런 그조차 눈물을 흘릴만도 한 것이 서울 한복판에 있는 한강 다리가 붕괴된 직후 기껏 8개월 남짓 근무했건만, 퇴임 전날에 또 대형사고가 터졌으니... 심지어 둘 다 안전불감증으로 인한 부실공사 때문에 벌어진 참사이니 눈물을 흘리는 것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6]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7]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관선 서울특별시장이었던 경력을 토대로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새정치국민회의 고건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8]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갑 선거구[9]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4694표, 18.26%의 득표로 2위에 그쳤다.[10] 16대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이 낙선 후 정계를 은퇴하고 서청원 대표최고위원이 사임[11]하자 2003년 조기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전당대회에서 최병렬은 재출마한 서청원과의 경쟁에서 신승[12]하고 한나라당 대표에 선출되었다. 최병렬은 구심점을 잃은 한나라당을 중흥시켜야 할 포스트 이회창과 제1야당 단일지도체제 대표라는 막중한 지위를 부여받은 것이다.

임기 초에는 오세훈 같은 소장파를 기용하면서 공백을 잘 극복하는 듯 했으나, 2003년 10월 2002년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 전달사건, 일명 차떼기 사건이 불거지면서 한나라당은 다시 총체적 위기에 빠졌다. 최병렬은 이회창 책임론으로 혼란을 타개꼬리 자르기하려 했으나 서청원 등 과거 이회창을 지지했던 비주류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여 입지는 더 위태로워졌다.

파일:나라를 구하겠습니다.jpg
한편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에서 가결된 측근 비리 의혹 관련 특검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데 대한 항의의 표시로 2003년 11월 26일부터 단식투쟁을 벌였다. 단식의 파급력은 상당[13]했고 그 여파로 대통령이 재의를 요청하여 12월 4일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 규명을 위한 특검법안을 국회에서 재의결, 이후 가결되자 12월 5일 최병렬은 단식을 중단했다. 농성 이후에도 한나라당이 차떼기당의 이미지를 탈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나 대통령과 여당에 승리하는 제1야당의 모습과 대표로서의 영향력을 알리는 데는 성공했다. 별개로 당시의 단식투쟁 사진은 나라를 구하겠습니다라는 강렬한 구호의 현수막과 최병렬의 모습이 잘 어우러져 여러 커뮤니티 등지에서 개그와 합성요소로 사용되었다.[14]

2004년 2월 9일, 한화그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 수감된 서청원의 석방결의안이 한나라당 주도로 가결되었다.[15] 이 사태로 남원정 등 한나라당 소장파를 필두로 퇴진론이 불거졌고 자신이 임명한 김문수 공천심사위원장에게도 총선 불출마 권고를 받자 최병렬은 조기 전당대회 후 대표직 사퇴와 총선 불출마를 약속했다.[16]

설상가상으로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때 탄핵소추안을 제출하여 가결된 이후 거세게 불어온 탄핵 역풍은 한나라당을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뜨렸고[17] 이 여파로 최병렬은 재기할 기회마저도 잃어 2004년 3월 23일 임시 전당대회 직후 대표직 사퇴와 동시에 정계에서 은퇴해야 했다. 이후 최병렬을 이어 난파에 봉착한 한나라당의 키를 잡을 선장으로 박근혜가 선출되었고 한나라당의 천막당사가 시작되었다.[18] 한때 '포스트 이회창'을 꿈꿨고 2002년 경선에서 2위였기에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으나, 자신이 주도한 탄핵의 역풍 속에 정계은퇴를 피할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 현경대, 김용갑, 강창희와 더불어 대통령이 신임하는 보수원로들의 모임인 7인회 구성원 중 하나로 다시 입에 오르내렸고 사망 전까지 국민의힘 상임고문직을 역임하였다.2022년 12월 2일 별세하였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이다. #


3. 여담[편집]


  • 정치인 시절에는 자신의 노선을 강경하게 밀어붙이는 게 마치 독재자 히틀러를 연상시킨다 하여 최틀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 그의 장남 최희준 역시 언론계에 종사하였다. SBS 1기 기자로 입사(특채입사)하여 뉴욕 특파원, SBS CNBC 보도본부장을 거쳐서 TV조선 앵커, 편성본부장을 역임하였다. 한찬식 변호사(연수원 21기)[19]가 사위이고, 최재경 변호사(연수원 17기)는 조카[20]
  • 그의 조카(동생의 아들)는 천정배 의원의 장녀와 결혼하여 성향이 다른 정치인 가문간의 사돈관계로 화제가 되었다.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 중 연극배우로 잠시 활동했던 적이 있는데, 이 때 최영한이라는 예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의 예명과 겹친다는 이유로 최불암[21]이 본명을 사용하지 못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 이런 영상도 있다. 2003년 당시 정부 여당에 항의해 단식을 했는데 여당 지지자들에게 '웰빙단식'이니 '단식다이어트'니 하는 비난을 받았다. 정치인의 단식에 대해 웰빙이니 다이어트니 하는 조소가 시작된 것은 최병렬 당시 대표의 단식이 최초였다.
  •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야인시대이석재[22]로 유명한 배우인 손호균이 맡았는데, 해당 배우가 풍채가 좋은 인상파여서 선 굵은 역할을 많이 맡은 터라 실제 최병렬과는 그다지 닮지 않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 박근혜 정부 당시 포스코 회장으로 거론되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이미 정계 은퇴에서 10년이 지난 터라 보은 낙하산으로 밖에는 해석이 불가능한 건이었기 때문이다. 친정인 조선일보의 취재에 따르면, 측근이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역정을 냈다고 한다(...) 머니투데이 취재에서는 본인이 직접 전화통화를 하고는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회신했다.[23] 결국 포스코 회장은 권오준 사장이 내부승진하여 취임했다.
  •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전에 이미 상황을 어느정도 알고 있었고, 대통령과 김기춘 비서실장을 포함한 청와대 사정을 매우 비판적으로 보고 있었다. '7인회'의 일원 치고는 이례적인 직언이었는데, 2014년의 코멘트가 특히 압권으로 훗날 국정논란이 터진 뒤에 보면 구구절절하게 옳은 말들이었다(...) # "김기춘, 흔들리고 정신 없더라."[24]
  • 노태우의 가신이었던 만큼, 해당 기사에서는 노태우에 대해서 칭찬 일색의 평가를 내렸다. "특별히 문제가 없으면 모든 사람을 편하게 해줬어요. 아랫사람을 보면 어깨를 툭 치며 격려했어요. 가끔 용돈도 주고. 조금만 노력하면 주위 사람들을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가 있어요. 대통령이 좀 따뜻하면 좋지 않을까." 물론 박근혜에 대한 애정 섞인 비판 와중의 맥락이긴 했다.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1985 - 1990
정계 입문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0 - 1995
합당[25]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1997
당명 변경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1997 - 2004
합당[26]

[[무소속|
무소속
]]

2004 - 2007
탈당[27]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2007 - 2012
복당
정계 은퇴

[[새누리당|
파일: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2 - 2017
당명 변경

[[자유한국당|
파일:자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7 - 2020
당명 변경

[[미래통합당|
파일:미래통합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20
합당[28]

파일:국민의힘 흰색 로고타입.svg

2020 - 2022
당명 변경
사망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7,040,811 (35.25%)
당선 (34번)
초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7,923,718 (38.49%)
당선 (10번)
재선[29]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초 갑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40,191 (48.56%)
당선 (1위)
3선[30]
1998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1,512,854 (43.99%)
낙선 (2위)
[31]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남 갑
62,489 (56.46%)
당선 (1위)
4선



6. 둘러보기[편집]


파일:민주정의당 심볼.svg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제12대 국회 전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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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
이진[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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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위[C]
박성태[C]
김정균[C]
김태수[C]
홍희표[C]
김문기[C]
정동윤[C]
심국무[C]
김종열[C]
[B] A B C D E F G H I J K 임기 중 사퇴.[C] A B C D E F G H I J K 승계.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전국구 제12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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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의당

61석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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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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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서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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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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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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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동

현홍주

이영욱
----
김영작

조상현

김영정

안갑준
----
김성기

조종호

이상희

류근환

한양순

홍종욱

정창화

김종인

김영구

최병렬

강용식

송용식

지연태

임두빈

정현경

진치범

최영덕

임영득

김집

지갑종

최명헌
~~~~
이종률

조경목

김형효
----
김학준

서정화

김두종

양경자
----
문희갑
~~~~
김양배

정휘동

김장숙
----
박혜경

이철우

안영화

최상진

이성호

이진

정호근

김중위

박성태

김정균

김태수

홍희표

김문기

정동윤

심국무

김종열
신한민주당

17석


신달수

임춘원

고한준

김형경

정재문

한석봉

윤영탁

신병렬

박종률

조영수

김병수

김동욱

이길범

김용오

장충준

최훈

신경설
민주한국당

9석


이태구

박해충

신재휴

손태곤

정상구

최운지

신동준

황대봉

송현섭

한국국민당

5석

----
김종철

정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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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구

조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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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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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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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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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F]
정옥순[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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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성[F]
이연석[F]
이민헌[F]
이수담[F]
배길랑[G]
김정숙[F]
김현배[F]
박승웅[F]
진경탁[F]
김무성[G]
허세욱[F]
김영순[G]
[B]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임기 중 사퇴.[C] 임기 중 사망.[D] A B 승계 후 사퇴.[F] A B C D E F G H I J K L M N 승계.[G] A B C 승계 전 사퇴.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전국구 제14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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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는 진주초등학교로 이름을 변경했다. 참고로 이 학교는 대한민국 최초의 남녀공학 학교다.[2] 전두환의 측근들이었던 허문도, 허삼수, 김진영, 안상영부산광역시장과 고등학교 동기다.[3] 조선일보의 상징과도 같은 김대중보다도 먼저 입사한 것이다. 김대중은 1965년에 입사하여 1989년부터 2003년까지 주필을 역임했고, 2004년에 이사가 되었다.[4] 한 예로 시대극인 MBC 제5공화국에서도 전두환을 흔들어서 노태우의 권력 안정화를 돕는 역할로 나온다. 김윤환김용갑보다 더욱 강경한 성향이 특징이다. 이 작품에서는 야인시대에서 이석재를 연기한 손호균이 최병렬 정무수석을 연기했으나, 외모상 싱크로율이 전혀 맞지 않는다.[5] 공보처 장관 재임 중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선배인 윤세영 태영건설 창업주가 민영방송SBS를 개국할 수 있도록 힘을 썼다는 평가가 있다. 더군다나 아들인 최희준이 1기 기자로 입사해서 SBS 뉴욕특파원과 자회사인 SBS CNBC 보도본부장 같은 요직을 지냈다는 점에서 나름 신빙성이 있다.[6] 그 후 최병렬의 정치적 후예서울 한복판에서 발생한 또 하나의 대형참사를 접하고 눈물을 보였다.[7] 서초구 갑은 무주공산이었다.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은 박찬종이었는데 1995년에 지방선거가 시행되자 서울특별시장 출마를 이유로 사퇴한 상황.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前 의원 신분이 된 박찬종은 신한국당에 입당하지만 전국구 공천(21번)을 받았고 전국구 의원과 관선 서울시장을 지낸 최병렬을 서초구 갑에 배치했다.[8] 사실 최병렬과 고건은 이전까지 민자당에서 한솥밥을 먹던 사이였고, 특히 고건은 김영삼 정부의 마지막 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1998년 지방선거를 위해 국민회의가 문민정부 내각 출신들(고건 국무총리,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 우근민 총무처 차관 등)을 줄줄이 빼갔던 것이 원인.[9] 이 쪽도 세풍사건을 일으킨 서상목 의원이 총선에 나올 수 없게 된데다가 한나라당의 여론이 부정적으로 변하자 당시 야인이던 최병렬 前 의원을 배치한 것이다. 공심위에서 패배가 뻔했던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최병렬이 출마하자 선당후사 정신을 높이 샀다고 볼 수 있다.[10] 참고로 그 전까지 당 총재를 맡았던 이회창이 68%를 득표했다(...) 서울과 대부분의 지방에서 이회창에 이어 2위였으나, 호남 지역의 표를 얻은 이부영 후보에게 인천/경기/광주/전남북에서 3위로 밀렸다. 텃밭인 서울에서는 자그마치 1668표, 34%를 득표했는데, 이는 이회창의 47.9%에 그나마 비벼볼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었다. 그 밖의 지역에서는 더블은 커녕 트리플 스코어로 밀렸다. 그 만큼 1997년 이래로 이회창의 당 장악력이 상당히 컸음을 의미한다.[11] 서청원 대표는 16대 대선 개표 과정에 부정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당선무효소송을 제기하여 법원이 재검표를 진행하였으나 결과가 거의 변함 없자 대표로서서 책임을 져야했다.[12] 최병렬은 46,074표(35.8%)를 득표했고 서청원은 42,965표(33.4%)를 득표했다.[13] 당시 김영삼이 최병렬을 위로 방문했을 때 단식 중단을 권유하면서 "나도 23일간 단식해봤지만 굶으면 죽는다"라는 말을 남긴 것은 유명하다.[14] 특히 일반적인 단식과 다르게 쌀뜨물을 마셔왔다는게 들통나 한동안 조롱을 당하기도 했다. 훗날 주진우는 이 당시 최병렬이 마신게 그냥 쌀뜨물이 아닌 아침햇살이라는 주장을 했다. 한 끼에 세 병씩을 마셨다고 하는데, 만약 사실이면 사실상 단식이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의 칼로리 섭취다.[15] 직전까지 반대 입장을 고수했던 최병렬이 가결로 돌아선 이유에 대해 "자신이 서 전 대표와 가까운 사이였다면 석방결의안이 가결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았겠지만 서 전 대표와 다소 불편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옹졸한 사람으로 비춰질 것을 우려해 결국 막지 못했다."고 해명했다.[16] 아이러니한 것은 소장파 세력을 당 지도부에 기용한 장본인이 최병렬이었다.[17] 당시 탄핵 역풍으로 TK에서도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에 밀리는 충격적인 여론조사가 나오기도 했다.[18] 천막당사와 탄핵 역풍에서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서, 박근혜의 지지도는 막강해졌고 한나라당의 주류 세력은 민주계, 이회창계로 대표되는 개혁보수에서 민정계로 대표되는 강경보수로 넘어가게 된다.[19] 울산지검장, 수원지검장 서울동부지검장을 지낸 검사장 출신 변호사이다.[20] 형의 아들이다. 최재경은 대검 중수부장 등을 지낸 특수통 검사(검사장) 출신으로 박근혜 정부 말기에 민정수석비서관을 지냈다.[21] 본명이 최영한(崔英漢)이다.[22] 1부(1~50회)에서는 상하이 박.[23] 내정설이 돌 때의 평론가 진중권의 코멘트가 압권. "최병렬 포스코 회장? 적어도 한 명의 노인에게는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 주는 데에 성공했군요".[24] 참고로 김기춘이 젊은 나이에 입지전적인 출세를 해서 그렇지, 최병렬이 김기춘보다 한 살이 많고 서울대 법대 동문이다. 두 사람 모두 노태우 정부에서 중용되었고(김기춘은 검찰총장-법무부장관), 14~16대에 국회의원을 지냈다.[25]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26]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27] #[28]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29] 1994.11.3 의원직 사퇴 (관선 서울특별시장 임명)[30] 1998.4.29 의원직 사퇴 (서울특별시장 선거 출마)[31] 4번의 선거 중 첫 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