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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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최병무
2. 대동군 출신 독립운동가, 최병무



1. 진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최병무[편집]


파일:최병무1.jpg
성명
최병무(崔秉茂)
이명
최무웅(崔武雄)
생몰
1922년 7월 5일 ~ 1999년 6월 29일
출생지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
사망지
대전광역시 보훈병원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최병무는 1922년 7월 5일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0년 5월 11일 충암 금산읍의 각종 업소에 근무하는 18세 내외의 청년 동지 7명과 함께 친목을 위장한 항일결사 시장친우계(市場親友契)를 조직했다. 시장친우계는 그해 7월 진락동지회(進樂同志會)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펴나갔다. 그들은 항일투쟁의 방안으로 우선 일제의 지원병 강제모집에 반대하여 불합격자초운동(不合格自招運動)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매월 15일에 모임을 갖고 이의 추진상황을 검토하였다.

또한 그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독립군과 접선하기 위해 중국으로 파견되었고, 이에 필요한 여비는 동지들이 160원을 모금하고 자신이 45원을 부담하여 마련하였다. 그렇게 마눚로 가서 독립군과 접선한 후 귀국하던 그는 1941년 3월 26일 신의주역에서 잠복중이던 일경에 붙잡혀 1942년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 1999년 6월 29일 대전광역시 보훈병원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최병무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9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 대동군 출신 독립운동가, 최병무[편집]


파일:최병무2.jpg
성명
최병무(崔秉武)
생몰
1918년 4월 19일 ~ 1942년 7월 7일
출생지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외제리
사망지
평안남도 대동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최병무는 1918년 4월 19일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외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6년경 평양에 소재한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숭실상업학교(崇實商業學校)에 재학하던 중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체험하면서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독립을 달성하여 공화정체를 수립하기려 결심했다. 그리하여 1936년 6월 13일 비밀결사 일맥회(一麥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10월 중순 평양시내의 목단대(牧丹台)에서 조국독립의 달성을 위하여 농민의 정신적 계몽과 경제적 갱생을 목적으로 조직된 열혈회(熱血會)에 가입하고, 임무로서 부여된 과실재배의 연구를 위해 1939년 4월 일본 동경의 일본대학(日本大學) 전문부 척식과 농업전공과에 유학하여 장차 농민도장(農民道場)을 개설하고 민족의식의 앙양과 실력향상으로서 일거에 독립을 쟁취할 것을 맹약하였다.

이후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회비를 모으다가 1939년 11월 28일 도쿄에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1941년 11월 27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에 집행유예 4년을 언도받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붙잡혀 심문중에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1942년 7월 7일 24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최병무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