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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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해
崔曙海

파일:웨스트씨.jpg
본명
최학송
崔鶴松
출생
1901년 1월 21일
대한제국 함경북도 성진군 학중면 임명동
사망
1932년 7월 9일 (향년 31세)
일제강점기 경성부
직업
작가, 언론인
장르
소설,
배우자
전처 3명
조분녀 (1926년 결혼)
자녀
1남 1녀

1. 개요
2. 생애
3. 작품 경향
4. 작품 목록
5. 일화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소설가로, 본명은 최학송(崔鶴松)이며 서해는 아호이다. 1920년대 경향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2. 생애[편집]


1901년 1월 21일 함경북도 성진군 학중면 임명동[1]에서 한의사를 겸업하던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진보통학교에 3년 정도 재학한 것이 학력의 전부였던 서해는 그가 어릴 적에 독립군 활동을 하러 떠났다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1917년 경에 만주로 이주했으며, 그 곳에서 두부도 만들어 팔고 건어물 장사도 하는 등 온갖 궂은 일을 다 하며 살았다. 하루하루 빈곤하게 살던 서해는 예전부터 취미가 있었던 문학을 하기로 마음 먹고 1923년에 조선에 돌아오며, 그 뒤로 당대 최고로 존경받던 소설가 춘원 이광수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가르침을 받다 춘원의 도움으로 순수시 3편으로 등단하고 홀로 상경한다. 채만식, 한설야와 함께 이광수가 키우고 등단시켜준 후배 문인이다.

1924년 10월 춘원 이광수의 소개로 양주시의 봉선사라는 절에서 3개월 동안 승려로 지내며 일본어로 된 서구 문학을 중역하였고, 자신의 첫 단편소설 토혈(吐血)을 동아일보에 발표하며, 그 뒤 조선문단이라는 작은 언론사의 객원 기자 자리를 얻는다. 이 시기에 서해는 고향에 두고 온 딸을 병으로 잃고 아내도 집을 나갔다는 비보를 접하지만, 바로 다음 해에 자신의 역작 탈출기를 내놓으며 1925년의 조선 문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서해가 이 때 보여준 문학적 성향이 자신들과 맞다고 판단한 카프는 그를 맹원으로 초대하며, 서해 역시 카프의 색채에 맞게 홍염, 기아와 살육 같은 계급 의식이 강해진 소설들을 써냈다. 하지만 다른 카프 맹원들과 달리 서해는 딱히 사회주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며, 다니던 직장 중외일보가 일제의 탄압으로 사정이 어려워지고[2], 그가 내놓은 단편 갈등의 내용을 가지고 다른 카프 맹원들이 '인도주의적 회색 분자'라 비난하자 서해는 먹고야 산다라며 카프를 탈퇴하고 매일신보[3]로 이직하고 만다.

매일신보로 옮긴 뒤 서해는 더 이상 작가로서 고평가 받지는 못했지만, 지긋지긋한 생활고도 해결하고 학예부장 자리까지 승진하는 등 순탄한 생활을 드디어 보내는 듯 했다. 하지만 가난하던 시절에 얻은 위 질환으로 급히 수술을 받으며, 동료 작가들이 수혈까지 해주는 정성에도 결국 서해는 1932년에 사망하고 만다.


3. 작품 경향[편집]


보통 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하였고 생애의 대부분을 단순 노동을 하며 살아왔기에, 문체나 기교 같은 면에서 보자면 서해는 뛰어나기는 커녕 오히려 평균 이하, 일반인의 습작 수준으로 혹평 받는다. 당장 그를 가르쳤던 춘원만 해도 조선문단에 서해를 추천할 때도 "기교와 문체에는 다소 미숙하지만 진정과 노력이 보이며 장차 서해가 문단에 크게 소리칠 날이 올 것이다." 라고 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리 문학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바로 춘원이 말한 그 '진정성'이었다. 자신이 가난과 멸시를 직접 겪으면서 자라온 서해의 글은 별다른 기교 없이 자신이 겪고 느낀 걸 솔직하게 썼을 뿐인데 훨씬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다. 이런 점 덕에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나아가 한국의 리얼리즘 문학의 주요 인물로 평가 받는다.


4. 작품 목록[편집]


  • 「토혈(吐血)」 (동아일보, 1924)
  • 「고국(故國)」 (조선문단, 1924)
  • 탈출기(脫出記)」(조선문단, 1925)
  • 「기아(饑餓)와 살육(殺戮)」(조선문단, 1925)
  • 홍염(紅焰)」(조선문단, 1927)
  • 「큰물 진 뒤」(개벽, 1925)
  • 「갈등(葛藤)」 (신민, 1928)
  • 「호외시대(號外時代)」(매일신보, 1930)


5. 일화[편집]


사진으로는 잘 느껴지지 않을 수 있지만, 체격이 크고 얼굴이 검어 굉장히 험상궂은 인상이었다고 한다. 다만 인상과는 달리 굉장히 사람 좋은 성격이라 주변 작가들로부터 인망이 두터웠다고. 심지어 그 성격파탄자 김동인과도 잘 지낸 인물(김동인은 카프계열과는 사이가 원만한 편이었다.)이라 하니 말 다 했다.

비록 31세의 나이로 요절하였지만, 결혼을 4번이나 하였다. 간도에서 결혼한 첫 번째 부인은 가난으로 떠났고, 귀국하고 결혼한 두 번째 부인은 첫째 딸을 낳다가 사망하였고, 상경 전에 결혼한 세번째 부인도 역시 가난 때문에 도망갔다. 그리고 1926년에 친구 조운의 누이인 조분려와 네 번째 결혼을 하였는데, 6년 후에 최서해가 병사한다.

극빈자임에도 기생 관련 일화가 있는데, 김동인 같은 주색잡기이상 같은 애정 관련은 아니고, 역시 가난 때문에 얽히게 된 것이었다. 생계를 위해 기생들의 잡지인 『장한』의 편집자로 일한다거나, 잘 곳이 없어서 기생과 일을 치루는 동료의 집에서 숨 죽이고 잠을 자야 했던 비참한 일화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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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인 김기림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이 시기 서해는 일 년 중 딱 한 달치 월급만 받았다고 할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3] 조선총독부가 대한매일신보를 인수해 기관지로 운용한 친일 신문으로 악명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