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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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해식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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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8.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9.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6
1997

{{{#000000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22번}}}
팀 창단

최해식
(1990~1994.6.6.)


장채근
(1994.6.7.~1995)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2번
장채근
(1987~1994.6.6.)

최해식
(1994.6.7.~2000)


김상훈
(2001~2014)



파일:external/i2.media.daumcdn.net/20110915105210883.jpg
해태 타이거즈에서의 선수 시절
파일:external/sports.chosun.com/98y68132_2.jpg
현재는 '최고루'라는 중국집을 차려서 프랜차이즈도 만들 만큼 사업가로 성공했다.
최해식
崔海植 | Hae-sik Choi

출생
1968년 9월 30일 (55세)[1]
전라북도 이리시[2]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이리초 - 군산남중[3] - 군산상고 - 건국대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0년 1차 지명 (쌍방울)
소속팀
쌍방울 레이더스 (1990~1994)
해태-KIA 타이거즈 (1994~2001)
지도자
해태-KIA 타이거즈 2군 플레잉코치 (2001)
KIA 타이거즈 2군 배터리 코치 (2002~2003)[4]
KIA 타이거즈 1군 배터리·주루코치 (2003)[5]
해설위원
CMB 광주방송 야구 해설위원 (2010~2011)
kbc MyFM 야구 해설위원 (2012~2013)
가족
아들 최우재, 조카 방건우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플레이 스타일
3. 은퇴 후
4. 연도별 성적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박동희의 Mr.베이스볼] ‘풀빵’ 해태 최해식의 인생역전

전직 KBO 리그 야구 선수.

고향팀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데뷔해 1990년대 중·후반 해태 타이거즈의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 선수 시절 등번호는 22번. 동글동글 한 외모 때문에 풀빵이란 별명으로 통했다.[6]


2. 선수 경력[편집]


군산상고건국대[7]를 졸업한 후 연고 팀인 쌍방울 레이더스 창단 멤버로 프로에 입문했지만[8] 김호근, 전종화, 김충민, 박경완에 밀려 별 다른 활약은 없었다. 1994년 장채근과 트레이드[9] 되어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고, 부상으로 인해 경기에 제대로 나오지 못 하던 정회열을 제치고 해태의 주전 포수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트레이드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었지만, 최해식은 본래 해태 입단을 희망했기에 트레이드 소식을 듣고 굉장히 기뻐했다고 밝혔다. 사실 그 전에 코치한테 폭행까지 당한지라 쌍방울에 대한 애정은 더더욱 없어진 상황이었다.

이후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김상진 등의 화려한 투수진과 호흡을 맞추었고, 타선에서는 이종범, 홍현우, 박재용 등과 함께 힘을 합쳐 1996년1997년 해태의 한국시리즈 2연패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1996 한국시리즈 우승 확정 당시 마스크를 쓰고 있던 포수는 정회열이었다. 우승을 확정지은 6차전에서 최해식이 김호인 구심의 볼 판정에 헬멧까지 벗어던지며 거칠게 항의했다가 퇴장당했기 때문이다. 한국시리즈 사상 1호 퇴장이었다.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으로 인해 감독에게 찍힌데다가 성적마저 하락세를 타던[10] 정회열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면서 사실상 경쟁자가 없는 주전 포수로 자리 잡았는데, 문제는 그나마 그를 받쳐줘야 할 백업 포수인 김지영, 권오성의 실력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고, 2000년 1차지명 신인 김성호와 1996년 2차 2순위인 황성기는 성장하지 못하고 쓸쓸히 잊혔다. 거기에 김상훈차일목은 각각 고려대, 홍익대로 진학하면서 1998~2000 시즌 동안 주전포수로 혹사를 당해야 했다. 당시 최해식의 출장 경기 수는 1998년 114경기, 1999년 130경기, 2000년 101경기로 3년간 88.2%에 해당하는 경기에 출장하였다.

결국 최해식은 3시즌 간의 혹사로 인한 부상과 피로누적으로 어깨가 완전히 박살나면서 최고의 강점이던 수비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2001 시즌에 플레잉코치로 1시즌을 더 뛰고 은퇴한다.[11] 최해식의 은퇴 이후 타이거즈는 김상훈이 2001 시즌부터 주전 포수를 맡게 된다.[12]


2.1. 플레이 스타일[편집]


통산 성적은 375안타, 17홈런, 165타점, 타율 0.217로, 타격이 매우 부진했던 전형적인 수비형 포수의 성적을 보였다. 500경기 이상 출전선수 중 최저 타율 10위를 기록했을 정도.[13]

그나마 타율이 가장 높았던 것이 97년의 2할 5푼일 정도로 방망이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를 할게 못되는 포수였지만, 그의 진가는 투수 리드와 블로킹, 프레이밍 등 수비에서 드러났다. 최해식 이전의 해태 포수 장채근이 .328의 도루저지율을 보였을때, 노쇠화된 장채근의 후임으로 들어온 최해식의 통산 도루저지율은 .340이었고,[14] 특히 2루 송구 시간이 1.60초로 역대 포수 중 1위를 기록할 정도로, 공을 받자마자 미트에서 빼내 송구로 잇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15] 특히 조인성의 트레이드 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앉아쏴의 원조가 바로 이 분. 하지만 선배들에게는 건방지게 보였던 듯. 이 때문인지 고2 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엔트리에도 뽑히지 못했다. 이후 더이상 앉아쏴를 하지 않았다고.

트래쉬 토크를 상당히 즐겨했던 선수로 상대 타자에게 트래쉬 토크를 하도 많이 해서[16] 외국인 선수들도 최해식의 트래쉬 토크에는 치를 떨었다고 한다. 박동희와의 인터뷰에서 타이론 우즈에게 하도 트래시 토크를 해서 우즈가 욕설로 받아치다가 결국 홈 쇄도 플레이를 할 때 의도적으로 최해식을 향해 돌진해서 튕겨나간 적도 있었다고.#


3. 은퇴 후[편집]


플레잉코치이던 2001년부터 사실상 배터리코치였고, 이후 2003년까지 KIA 타이거즈 2군 배터리 코치로 재직했으나[17] 감독이던 김성한과 구단의 관계가 악화될 무렵 재계약에 실패했다. 이후 화순고등학교 배터리코치로 옮겼으나 열악한 야구부 사정[18]과 당시 감독의 강압적인 지도스타일로 구타, 똥군기를 혐오하던 본인과 맞지 않아 화순고를 떠났다고 한다.

이후 야구계를 떠나 사업가로 변신하여 광주광역시에 배달 전문 중국집 최고루를 차렸고, 직접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철가방을 들고 뛰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자신이 개발한 볶음짬뽕이 빅히트를 치며 순식간에 사업 규모를 확장시켰다. 물론 처음에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하며 가게 오픈 후 경쟁업체들의 견제가 심해 배달 오토바이를 여러차례 도둑맞고 최고루의 빈그릇들이 깨져있거나 없어지는 일이 있었으며 처음에는 주방장을 고용했는데 주방장들이 배짱을 부리는 통에 직접 요리를 배우는 등 고생을 했다고 한다. 공사장에 홍보 차 방문했더니 다른 중국집들은 새벽부터 와서 홍보하는데 늦은 아침에 왜 오냐는 말을 듣고 다음날부터 제일 먼저 공사장에 도착했다고 한다.[19]

현재는 가맹점 15개[20]에 연 순이익으로만 약 10억원을 기록할 정도로 성공한 사업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한편으로 매달 한 번씩 광주시내 보육원 등을 순회하며 아이들에게 짜장면 200~300그릇을 대접하는 등 봉사활동도 하고 있으며 이 덕분에 광주광역시에서 표창을 받기도 했다.

덧붙이자면 학창 시절부터 야구만 하며 살아온 선수 출신이 은퇴 후에 사업가로서 성공한 매우 드문 사례이다.[21] 1990년 프로 입문 동기이자 야구선수로서는 자신보다 훨씬 스타였지만 은퇴 후 사업에 실패하고[22] 안 좋은 일에 휘말렸으며 이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이호성과는 크게 비교되곤 한다. 최해식의 경우 이호성과 달리 남의 말에 꾀여 사업을 확장 한다든가하는 욕심 없이 기존에 경영하고 있던 중국집에만 우직하게 전념한 것이 빛을 보게 된 것.[23]

사업가로서 성공한 후에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현역 시절 시즌 15승을 했던, 30홈런을 쳤던 사회 생활과는 무관하다." 는 직설적인 말로 프로선수의 은퇴 후 삶이 녹록치 않음을 거듭 강조했었다. 실제로 최해식 역시 사업을 하던 당시에 사기를 당해 몇 번이나 가세가 기울기를 반복한 끝에 지금의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사회경험이 없기 때문에 배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24]

2014년까지 광주과학기술원에서 야구를 가르치고 있었다. 2018년 현재는 바쁜 관계로 야구 강의 강사가 바뀌었다고 한다.

2010년대 초반 식당 경영을 하는 틈틈히 KIA 타이거즈의 홈경기를 중계했던 광주 지역 케이블 SO인 CMB에서 해설을 맡았다. 이후 2012~2013년도에 광주방송 MyFM에서도 KIA 타이거즈 편파중계 방송 '말로 홈런' 해설을 맡았다. 한때 우승 후보로 거론되던 기아가 7위로 추락하자 냉정하게 문제점을 분석하면서 여러가지 조언을 하였다. 기아 타이거즈 `우승 조급증’에 멍들다

광주MBC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전설의 타이거즈'에 까치 김정수와 함께 출연하여 입담을 뽐냈다. 영상 중 압권은 2002년 광주MBC 노래열전에 출연하여 혜은이의 열정을 열창했던 장면이다.영상은 여기에서

전설의 타이거즈에 총 4회 출연했으며 송유석(5회) 다음으로 최다 출연자다. 김정수와 한 번, 김성한과 한 번, 양준혁과 한 번, 양회열과 한 번 출연했다.

4.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OPS
1990
쌍방울
1군 기록 없음(쌍방울 1군 미참가)
1991
4
.000
0
0
0
0
0
0
0
0
0
0
.000
.000
.000
1992
3
.000
0
0
0
0
0
0
0
0
0
1
.000
.000
.000
1993
18
.179
5
1
0
1
3
3
0
3
1
4
.281
.321
.603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OPS
1994
쌍방울 / 해태
12
.313
5
0
0
0
3
2
0
1
1
5
.389
.313
.701
1995
해태
96
.196
49
7
0
2
14
17
0
18
9
49
.273
.248
.521
1996
113
.188
55
12
0
1
27
24
1
25
4
55
.261
.240
.501
1997
91
.250
65
15
0
1
28
25
1
15
9
36
.310
.319
.629
1998
114
.220
69
9
0
4
31
25
1
25
3
54
.282
.288
.570
1999
130
.214
68
8
1
7
34
36
0
25
3
46
.278
.311
.589
2000
101
.242
59
9
1
1
25
22
0
33
2
51
.337
.299
.636
2001
해태 / KIA
1군 기록 없음
KBO 통산
(10시즌)
682
.217
375
61
2
17
165
154
3
145
32
301
.288
.284
.572


5. 기타[편집]



  • 그의 아들인 최우재도 야구선수다. 개명전 이름은 최상인으로 186cm, 85kg의 건장한 체구를 자랑하는 우완 정통파 투수였으나 2018 시즌부터 외야수로 전향했다. 광주수창초, 진흥중, 진흥고 출신으로, 고졸로서 2016년 신인드래프트 대상에 포함되었는데 KIA에 지명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고. 다만 기록이 좋지 않아서 상위권 지명은 힘들 것으로 보였던 모양. 결국 2015년 8월 24일 실시된 2차 지명에서 NC 다이노스에 2차 5라운드로 지명되었다.

  • 아들 최우재가 프로로 진출하면서 광주광역시야구협회에 1,000만원을 기부했는데, 본인이 아들에게 권유했다고 한다. 지명 순위가 높은 편이 아니어서 계약금을 많이 받은 것도 아닌데 기부를 했다는 점에서 팬들의 칭찬을 받았다. 이 공로로 특별상을 받았다. 최상인 ‘광주 야구인의 밤’ 특별상

  •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김상진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997년 해태의 마지막 우승 당시 주전 포수로서 그와 함께 하기도 했으니, 누구보다도 그의 안타까운 이른 죽음에 슬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유튜브 방송에서 정수근자기 때문에 제일 많이 맞은 포수라고 최해식을 언급했다.[25] 당시 해태와 OB가 경기를 할 때 정수근이 계속 도루를 하니까 도루저지도 신경쓰고, 그러면서 블로킹도 하다가 몇 개 공을 빠트렸는데 김응용 감독은 그걸 보자마자 바로 포수 교체 사인을 하고 교체되는 최해식을 코치들이 때렸다고 한다. 다만 최해식도 당하기만 한 게 아닌데 정수근이 타석에 설 때마다 일부러 트래쉬 토크를 걸어 "수근아~ 좋은 공 보내준다, 좋은 공 받아라." 라고 말했고 해태 투수에게는 빈볼 사인을 내서 정수근을 맞춰버렸다고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다. 여러모로 둘 다 현역 시절 시합으로 많이 붙은 것이 기억에 남는 듯.

  • 아들 최우재만이 아니라 조카 방건우도 야구선수 출신이다. 동성고 출신 투수로, 2015년 두산 베어스의 지명을 받았으나[26] 2018년을 마지막으로 방출되었다.

  • 전설의 타이거즈 방송에서 선배인 김성한과 같이 출연하여 이전 편에서 탈모를 이유로 모자를 쓴 채로 방송을 했던 강태원을 디스하며 최해식 본인은 가발을 착용한다는 사실을 고백한 바 있다. 상당히 자연스럽다.

  • 김응용 감독이 포수 리드를 중시하는 바람에 경기를 지면 상당히 자주 갈궜다고 한다. 김응용 감독의 갈굼에 욱한 마음이 올라온 최해식은 김 감독에게 "아이씨! 거기까지만 해!"라고 짜증을 냈고[27] 김 감독은 당황했는지 "야! 이 자식 또라이야! 또라이!"라고 말한 뒤 그쳤다고 한다. 그 뒤로 김응용 감독은 최해식을 갈구지 않고 종이만 찢었다고(...) 한다.[28]

  • 이후로 김응용 감독이 대타를 최해식 타석에 쓰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오기가 올랐는지 감독과 5만원 빵, 10만원 빵을 하는 일도 흔했다고.[29] 물론 최해식의 통산 성적에서 볼 수 있듯이 못 치는 일이 더 많았다.

  • 1995년 5월 27일 청주구장 원정경기에서 이상군을 상대로 2회에 쓰리런 홈런을 쳤는데, 김응용 감독은 이를 두고 "소가 뒷걸음 치다 쥐를 잡은 격."이라는 촌평을 남겼다. 그럴 만한 것이 최해식은 그 시즌 1할대 타율과 2홈런을 쳤기 때문.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최해식은 이를 회고하면서 "그 때는 상군이 형이 맛탱이 갈 때였다."라고 했다.

  •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이종범에게 한 경기에서 5개의 도루를 내 준 적이 있다고 한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이 일을 언급했을 때 같이 출연한 양준혁도 "한 게임에?"라고 되묻자 최해식이 "그렇게 주기도 힘들어."라고 대답했고 양준혁은 본인도 황당하다는 듯 "대단하십니다. 형님, 어떻게 5개나......"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6. 관련 문서[편집]


[1] 다만 호적상 생일과 실제 생일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 당시에 생일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68년 2월 생이며, 빠른 생일에 따라 67년생들과 학교를 다닌 것으로 보인다. 1967년생인 정회열공필성과 동기생이자 친구다.[2] 1995년 도농통합 당시 익산군과 합병으로 익산시가 되었다.[3] 익산 원광중학교에서 전학[4] ~5월 18일[5] 5월 19일~[6] 최해식 본인 스스로 밝히기로는 원래 어린 시절부터 워낙 먹성이 좋아서 별명이 '밥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선수단 식당에서 나오는 밥도 부족했는지 학교 앞에서 파는 풀빵을 엄청 사먹어서 "쟤는 생긴 것도 풀빵이라 그러나 풀빵만 사먹는다"고 야구부원들이 놀려서 풀빵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쌍방울에 입단한 후 한동안 이 별명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1994년 최해식이 해태로 트레이드되어 오자 해태에 있던 최해식의 고교 선배 조계현이 다짜고짜 최해식을 향해 "해식아!"가 아니라 "워메! 풀빵 왔는가?"라고 말하는 바람에(...) 해태 선수단 내에서도 풀빵이라는 별명이 고착화됐다고 한다.[7] 최해식과 강광회가 4학년, 송구홍이 3학년, 차명석이 2학년, 이종범추성건이 1학년이었다. 1992년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 연세대를 결승전에서 꺾고 정상에 올랐다.[8] 쌍방울 구단 역사상 최초의 1차지명 선수였다. 원래는 군산상고 동기인 투수 박찬홍도 함께 1차지명을 받았으나 쌍방울 입단을 거부하면서 창단 원년에 고향팀 유니폼을 입은 유일한 1차지명자가 됐다.[9] 이 때 쌍방울은 최해식에 2차 1라운드 지명권(해태는 이를 이용하여 대졸투수 이원식 지명)까지 얹어서 장채근을 영입했지만, 정작 장채근은 1995 시즌이 끝나자마자 은퇴하여 해태 코치로 돌아온다.[10] 94 시즌 말에 부상을 당했는데, 이 여파로 95년에는 겨우 8경기에 나왔으며 96년에 백업으로 활동하면서 1할대 타율을 기록하고 만다. 출루율이 3할에 걸쳤지만 타율로 모든 것을 평가하던 시대였고 그 마저도 똑같이 1할대를 기록한 최해식이 근소하게 더 높았다. 이런 상황이니 김응용 감독은 2군 포수들에게 기회를 주고 정회열은 겨우 11경기만 내보내고 방출시킨 것. 정회열은 하와이 전훈 당시 항명 사태의 발단이었던 이순철의 룸메이트이자 전령 역할을 했다.[11] 플레잉코치지만 부상으로 인해 1군 출장 경력은 없다. 참고로 같은 해에 이호성도 플레잉코치로 뛰다가 은퇴했다.[12] 김상훈도 최해식과 상황이 비슷했는데 2004 시즌이 끝나고 부상과 수술로 인해 기량이 내리막을 탔다. 하지만 김상훈을 대체할 수 있는 포수가 없었고 결국 제대로 쉬지 못 한채로 계속해서 대부분의 경기에 출전해야 했다.[13] 여기서 최저 타율을 기록한 주인공이 염경엽, 그 다음으로 조범현, 김경문 등이 있다. 다 1군 감독을 해봤다[14] 500경기 이상 뛴 포수 중 도루저지율 .374의 조범현보다 낮고, .320의 김태형이나 .301의 강민호보다 높다.[15] 투구 포구 후 2루 송구 시간(팝타임)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기준으로 1.92초 이내가 수준급 평가를 받고, 1.98초 정도가 마지노선이다. 2.0초대를 넘기면 도루 저지가 힘들어진다. 현존하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포수로 손꼽히는 야디어 몰리나의 2루 송구 시간은 1.8초를 넘기지 않는다고 한다.[16] 가장 항의를 한 구단은 롯데였고, 동기였던 공필성이 많이 당했다고 한다.[17] 이 때 2군 투수코치로 온 주동식과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술만 마시면 종종 주동식에게 전화를 할 정도라고.[18] 학교, 동문들의 지원 없이 학생들의 부모님이 납부하는 돈에 의존해 팀을 운영했다.[19] 여담으로 자신의 인맥을 십분 발휘해 25,000원 이상 주문 시 이종범 친필 사인볼을 증정한다는 홍보전단을 돌렸는데, 이종범은 지금도 최해식한테 '아따 형님 내 얼굴 그만 좀 쓰쇼잉~'하면서 타박한다고 한다. 최해식은 '얼굴(사진)은 안썼어~ 이름만 썼지. 선배가 좀 먹고 살고 그러겠다고 한건디~'하며 너스레를 떨었다고. 참고로 이때 당시 25,000원이면 짜장면 여덟 그릇을 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고 덧붙였다.[20] 본점은 광산구 운남동에 있다. 먹어 본 팬들의 증언에 의하면 본점과는 별개로 가맹점마다 맛이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몇몇 가맹점은 관리하는데 한계가 있어 정리했다고 한다.[21] 야구선수 중에 사업만으로 최해식보다 더 성공했다 볼 수 있는 사람은 KBO 대표 명의(...) 허준정도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이 분은 웨딩사업으로 대박을 쳤다.[22] 이호성은 현역 시절부터 사업을 했는데, 컴퓨터 솔루션 업체와 사무용 복사기를 공급하는 회사는 상당히 잘 굴러간 모양. 이 회사에서 번 수익을 기초로 하여 웨딩사업으로 대박을 치나 싶었지만, 이후 마권사업에 뛰어들고 이게 망하면서 그 동안 벌어두었던 돈을 다 날리고 270억원의 부채를 지게 되었다. 다만 컴퓨터 솔루션 업체와 복사기 공급 업체는 끝까지 제법 잘 굴러갔는지 이호성이 사망하던 시점까지도 정상적으로 굴러가고 있었다.[23] 최해식의 증언에 의하면 이호성이 '품위 떨어지게 프로야구 출신이 무슨 중화요리 배달을 다니냐?'고 핀잔을 주자 최해식이 '너는 집이 돈이 많아서 예식장이라도 하지만 나는 가난해서 이거라도 해야 먹고 산다. 그냥 나를 투명인간 취급해라' 받아쳤다고 한다. 이후 이호성의 행보가 어떻게 되었는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24] 최해식의 선배이자 동종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김성한도 선수시절부터 재테크에 관심이 많았고, 선수시절 쌓은 이미지와 경력, 인맥을 바탕으로 꽤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웃기는 해설자로 유명한 이병훈도 사업을 하다가 숱하게 말아먹고 최해식과 비슷하게 은퇴 이후 준비없이 무작정 사업에 뛰어들지 말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25] 마토브리그 방송에서 정수근이 나무위키에 자기 항목을 보면서 한 방송[26] 지명 순위는 2차 4순위로 최우재보다 1단계 높있다.[27] 사실 이 정도는 약과다. 장채근은 본인 대신 김무종만 기용한다는 부분에 불만을 품고 술에 만취한 뒤 김응용 감독 방에 방망이를 들고 들어갔다가 역관광을 당했다.[28] 같이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김정수는 김응용 감독이 소심한 편이었다고 회고했다.[29] 물론 이 때는 최해식도 팀내에서 고참 축에 들어가는 편이었고, 김응용 감독도 이를 제법 즐기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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